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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함흥차사 박순
《함흥차사》란 말은 지금은 속담처럼 굳어진 말로서 처음에는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일러 하는 말이였는데 그후로는 심부름을 가서 돌아오지 않거나 아무 소식이 없을 때 그를 가리키는 말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였다. 함흥차사의 어원적바탕에는 심각하고 비극적인 사연이 깃들어있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고 7년간 왕위에 있던 리성계가 늙어서 왕위를 넘겨줄 생각을 하게 되였는데 그때 그에게는 8명이나 되는 아들이 있었다. 첫째부인 한씨에게서 본 6명의 아들과 두번째부인 강씨의 두 아들(방번, 방석)이였다. 리성계는 8명의 아들중에서도 왕위에 오른 후 후실에게서 난 두 아들을 각별히 사랑하였고 왕위도 후실의 아들 방석에게 넘겨줄 생각이여서 측근신하들인 정도전과 남은도 방석을 끼고돌아갔다. 이 기미를 알아차린 방원(한씨의 다섯번째아들)은 리씨왕조를 세우는데서 자기 공로가 큰데 그것을 알아주지 않고 배다른 방석에게 넘겨주려는 부왕의 처사에 분통이 터져 몇몇 재상과 장군들의 도움을 받아 방석의 형제와 그를 지지하는 정도전, 남은 등을 한꺼번에 다 죽여버렸다. 왕위는 방과(정종)에게로 넘어갔지만 방원은 정종마저 밀어내고 끝끝내 왕자리를 타고앉았다. 제 아들들사이에 계속 벌어지는 피비린 왕권쟁탈싸움으로 인하여 울화가 치민 리성계는 옥새를 가지고 함흥으로 내려가버렸다. 그후 방원(태종)은 함흥에 있는 리성계(태상왕)에게 차사(왕의 사신)를 보내였는데 리성계는 《나에게는 그런 아들이 없다.》고 하며 방원에 대한 분풀이로 그를 죽여버렸다. 방원은 그후 계속 함흥에 차사를 보내였으나 그때마다 리성계가 죽여버려 살아돌아오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이때부터 심부름을 갔다가 종적없는 사람을 두고 《함흥차사》라고 부르게 되였다. 리방원은 수많은 차사를 보내였으나 옥새를 받지 못하고 리성계도 환궁시키지 못하여 시름에 겨운 날을 보내고있었다. 이런 형편을 지켜보고있던 박순이 리성계와 친분관계도 두터운지라 자진하여 차사로 가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늙은 재상 박순이 력사에 마지막 함흥차사로 알려지게 되고 그의 소행이 전설로 남아 전하여오게 되였다. 박순은 10여일을 거쳐 지친 몸으로 함흥에 도착하였다. 그는 가지고간 새끼말은 나무에 매여놓고 엄지말만을 끌고 리성계의 처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리성계앞에 엎드려 《전하!》 하고 눈물을 쏟으며 갈린 목소리로 불렀다. 리성계는 그 늙은 차사가 다름아닌 박순임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그런데 이때 새끼말이 엄지말을 찾느라고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울음소리를 듣는 리성계의 마음은 산란해졌다. 리성계는 늙은 몸으로 어찌하면 돌아가지 못할 길을 스스로 찾아온 박순을 측은히 여겨 함구무언으로 그의 얼굴만을 지켜보았다. 얼마후 박순은 부디 장수불로하시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이때 리성계의 직하신하가 엄명이 있을줄 알고 한참동안 기다리고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없는지라 리성계를 찾아들어가 박순도 죽여야 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리성계는 한참 생각을 굴리다가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늙은 몸으로 어려운 길을 왔으니 강을 건너갔거든 내버려두라고 하였다. 무장은 급히 말을 몰아 강가로 달려갔는데 박순의 한발은 배우에 있고 한발은 땅에서 떼려던 참이였는지라 박순을 죽이고말았다. 그 사연을 전해들은 리성계는 박순의 죽음을 놓고 생각이 많아져 끝내는 서울로 환궁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박순은 돌아오지 못한 마지막 함흥차사로 전설화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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