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6신》과 《생6신》

 

력사에 널리 알려진 《사6신》과 《생6신》에 대한 사화전설적인 이야기는 선대왕에 대한 충정으로부터 왕대를 지키고 이어나가려고 하다가 왕권을 빼앗은 폭군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당하였거나 벼슬자리를 버리고 멀리 떠나 은둔하여 생을 마친 봉건충신들의 절개, 악에 의한 불우한 최후를 비사적으로 전하는 설화이다.

1450년에 세종이 세상을 뜨자 그의 맏아들 문종이 즉위하였으나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생을 마쳐 12살 되는 그의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였다. 나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못마땅히 여겨오던 그의 삼촌 수양대군은 끝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탈취하였다.

그래서 력사에서 이른바 《단종애사》라는 설이 나오고 책으로도 씌여져나왔는데 여기에는 《사6신》과 《생6신》에 대한 애사도 함께 들어있다.

수양대군이 왕권을 탈취하자 먼저 분개한것은 집현전 학자이며 문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리개, 류성원과 호위무관 유응부였다.

그들은 세종이 아끼고 사랑해오던 충신들일뿐아니라 어린 임금 단종을 잘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받은 선대왕의 충신신하들이였다.

수양대군은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단종을 지지하는 충신들을 갖가지 죄명으로 처단하기 시작하였다.

단종을 지지하는 기미만 보이면 처단하는지라 성삼문을 비롯한 문신들은 수양대군을 제거하고 단종의 왕위를 복귀하기 위한 기회만 엿보고있었다.

때는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해에 처음으로 외국사신을 맞아 경회루에서 연회를 베풀게 되여있었다. 이때 단종의 왕위를 회복하려고 모의를 한 6신중에서 유일한 무관은 유응부였으며 기타 사람들은 모두 문신들이였다.

유응부는 연회때에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함께 왕의 좌우에서 의장용 큰 칼인 운검을 들고 호위하게 되여있었다. 그들은 이 기회에 간신들을 쳐없애고 단종의 왕위를 회복시키려다가 간신 한명회의 방해로 운검을 세우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거사단행을 주장하는 유응부를 설복하여 거사를 후날로 미루었다. 결국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말았다.

한편 그날 거사에 참가하기로 하였던 김질은 거사가 실행 못되니 뒤일이 두려워 이 사실을 세조에게 고발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그 즉시로 유응부에게서 칼을 빼앗고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문신들과 함께 옥에 가두고 문초를 들이대였다. 회유도 해보고 고문도 들이대여보았으나 약하다고 생각되는 문신들까지도 모두가 반발하며 수양대군을 단죄하여나섰다.

유응부는 끌려나와서도 《네가 수양대군이지 나라가 정하여준 임금이냐? 어린 임금을 쫓아내고 룡상에 앉았다고 하여 임금이 되는것이 아니다. 선왕과의 의리로 보아서도 그렇게 못하겠는데 룡상을 허물어냈으니 군신의 명분조차 없는 행위라 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하며 엄하게 질책하였다. 그리고는 《의례》를 지킨다고 하면서 거사를 단행하지 못한 문신선비의 나약함을 다시금 절감하였다.

유응부는 《이 꼴이 무슨 꼴이냐. 세상사람들의 말이 선비들과는 국정과 관련된 아무런 큰일도 치르지 못한다 하더니 그게 정말이였구나. 내가 거사를 하자고 했을 때 운검을 높이 들었더라면 우리 소원이 성취되였을것이다. 죽는것은 한이 없으나 간신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한것이 한스럽다.》 하고 한탄하였다.

세조는 쇠몽둥이를 벌겋게 달구어 유응부의 몸을 지지여 팔다리가 떨어지게 한 다음 목을 잘라버리였다.

그리고나서 5명의 문신들을 각각 불러내여 무서운 고문을 들이대며 문초하였으나 선대왕에 대한 충의와 절개를 굽히지 않는지라 다 죽여버리였다.

이때 감옥의 형틀에서 죽은 사람은 성삼문, 박팽년, 리개, 유응부, 하위지이고 류성원은 잡혀들어가기 전에 관복을 입고 자기 집 사당에 들어가 자살하였다.

이리하여 당대 명망이 높았던 5명의 문신과 1명의 무관은 형장의 이슬이 되여 력사에서 《사6신》이라는 애사적인 사화전설을 낳게 하였다.

성삼문은 재능있는 학자로서 박팽년과 함께 세종왕의 어지를 받들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참가하였으며 《훈민정음해례》를 편찬하였다. 그는 집현전의 문신거장으로서 선대왕의 정사에 충의를 다하였으며 왕대를 이어 변함없이 충정을 다해왔다. 하기에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집현전의 다른 문신들의 선두에서 이를 반대해나섰으며 끝내는 5명의 충신들과 함께 처형되면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의지를 다음과 같은 시조에 담아 피력하였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락락장송되였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리개도 한산출신으로서 시문에 뛰여나 세종의 총애를 받아온 집현전 문신이다.

그도 형장에 끌려나가는 죽음의 시각을 앞두고 시 한수를 지었는데 절개를 지켜 굴하지 않을 땐 죽음도 영광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충정과 절개를 이렇게 피력하였다.

 

세상에 쓸모있을 때는

나의 목숨도 또한 중하고

절개지켜 목숨을 버릴 때는

죽음 또한 영광이로다

 

밤이 새도록 잠들지 못하고

생을 모대기다가 내 떠나노니

현릉(문종의 무덤)의 푸른 솔숲은

그리던 꿈속에도 뚜렷하구나

 

학문에 능하고 청렴결백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자로 등용되였던 하위지도 충의와 절개를 지켜 죽음을 택한 충신이였다.

력사에서 《생6신》으로 일러온 6명중에서 김시습이나 남효온도 학문에 밝은 재사로서 선대왕에 대한 충정과 의리를 귀중히 여기여 벼슬자리를 그만두고 산속이나 향촌에 내려가 은둔하면서 글로써 마음을 달래이며 절개를 지켜갔다.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하여 장차 큰 학자가 될것을 희망하여왔다.

그는 당시 유교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자기 집가까이에 있었기때문에 그를 넘겨다보면서 학문을 닦고 글짓기도 하였다.

소년시절에 글짓기를 잘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세종왕은 호기심이 동하여 김시습을 궁중에 불러들이여 시를 지어보게 하였는데 그 솜씨가 여간 아닌지라 기특하게 여겨 많은 상품까지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가 21살 되는 해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사건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숭상해오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대학자들이 참형을 당하자 울분을 금치 못하여 벼슬길에 오르기를 단념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였다.

그렇다고 불도를 닦으려 한것이 아니라 세조의 집권에 분노하여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은둔하고있다가 한평생 방랑생활을 하며 글로써 위안하며 살았다.

금강산에 들어가 쓴 글이 단편소설집 《금오신화》이다.

남효온도 이름난 선비로서 학문에 뜻이 깊고 불의를 증오하고 량심과 의리를 귀중히 여기는 의협심이 강한 문신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봉건관료들의 권력싸움에 불만을 품고있던차에 수양대군의 왕권쟁탈이 벌어진지라 정계와 인연을 끊고 시골로 돌아가버렸다.

그는 세조가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문신 5명과 왕호위무관 유응부를 악착하게 고문하고 참살하자 《사6신》의 선대왕에 대한 충정과 절개를 력사에 자랑스럽게 알리려고 《사6신전》을 집필하였다. 그는 이외에도 《추강랭화》, 《사우록》 등을 쓰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향촌에서 생을 마치였다.

이상과 같이 력사에 새겨진 《사6신》과 《생6신》에 대한 사화전설적인 이야기는 선대왕에 대한 충의를 끝까지 지켜가는 봉건충신들의 절개를 널리 찬양한것으로 하여 당대는 물론 오늘까지 전해져 력사의 교훈을 돌이켜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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