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의 절개

 

정몽주는 고려 말기 이름있는 유학자이며 문하시중으로서 옳은 정사를 펴나가도록 왕을 도와나섰으며 간신과 역적무리, 탐관오리들을 반대하여 유교교리를 거울로 삼아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그는 린방과의 관계에서 복잡한 문제가 나설 때마다 외교활동도 능숙하게 벌리고 어려운 국사가 제기될 때에도 충정 다하여 한몸으로 맡아나섰다. 그는 리성계가 고려충신들을 잡아죽이고 고려왕조를 허물려 하자 의분을 금치 못하여 국운을 회복해보려고 모색하며 절개를 지켜오다가 끝내는 리방원이 보낸 졸개들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를 뿌리고 순직한 고려말의 재상이며 충신이다.

정몽주의 행적과 관련한것은 《고려사》에 비교적 상세히 기사화되여있다.

이와 함께 《해동악부》에 리성계의 왕권탈취와 관련하여 고려충신으로서의 절개를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타살당하여 최후를 마친것을 애석하게 여기여 《정몽주의 충절》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시조와 함께 일화를 적어놓은것이 있다. 그후에는 명인전설집들에 충신 정몽주의 사적과 생애에서 특징적인 일화와 지물전설, 선죽교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수다히 전하여진다.

정몽주는 태여날 때부터 기이한 전설을 가지고있다. 그의 어머니 리씨부인이 막달이 되던 어느날 꿈에 란초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면서 놀라 잠을 깨고 그를 낳았다고 하여 이름을 몽란이라 하였다. 1337년에 출생하였는데 나서 목욕을 시키면서 그의 어머니가 보니 어깨우에 검은 사마귀 일곱개가 마치 북두칠성같이 배렬되여있는지라 장차 큰사람으로 되기를 바랐다.

나이가 아홉살 되던 해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검은 룡이 동산가운데의 배나무에 올라가는것을 보고 놀라 깨여났는데 자기 아이가 올라가있는지라 그 이름을 몽룡이라고 아명을 고치였다. 그것은 룡처럼 되기를 바래서였다. 성년이 된 후에는 꿈과 이어져있다 하여 몽주라고 정식 부르게 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과에 달통하여 힘든 고전들을 쉬이 읽어갔을뿐아니라 당시 선비들이 갖고있는 책들을 눈에 뜨이는족족 빌려다 읽으므로 큰 재사감이라고 모두들 칭찬하였다.

그는 체구가 장대하고 무장다운 기질도 있었으나 선배유학자들을 가까이 하여 학문을 닦고 문사로서의 재능과 수양을 열심히 다져나갔다.

그러던 1360년에 문과에 응시하여 단연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예문관 검열로 선발배치되게 되였다. 그후 례조 정랑을 거쳐 성균관 박사, 사성, 대사성, 정당문학 등 높은 문관벼슬을 하였으며 5부학당과 향교를 세워 유교교육을 발전시켰으며 자신이 직접 성리학을 연구하여 강의에도 출연하였다.

그의 높은 인품과 재능, 외교수완과 충정으로 하여 나중에는 문하시중이라는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다.

정몽주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일화들과 전설들이 전하여오는데 거기에서 몇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몽주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임명되여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아버지 상사를 치르게 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는것이 서러워 눈물을 쏟으며 장례를 지내고 상제로서의 구실을 례법대로 충실히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 자기가 할 일걱정을 하자 어느날 저녁 어머니가 묘막에 찾아와서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나라의 충신으로 키우시려고 훈시도 자주 해주시였겠는데 이제는 그럴수 없게 되였다고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이제 벼슬길의 첫자욱을 뗀데 불과하니 알수 없겠지만 지금 벼슬하는 사람들치고 충성을 입으로 외우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임금과 나라를 위하기보다는 자기의 일신과 탐욕에 물젖어 남을 해치고 진짜충신을 간하여 임금에게 <충정>을 보이려 하니 만사를 도리있게 처신해라. 입으로 충성을 외우지 말고 사리를 멀리하며 나라와 백성, 임금을 위한 한마음을 변치 말고 절개로 간직하거라. 어머니는 이걸 바랄뿐이다.》

정몽주는 벼슬길에 나선 초시기 어머니가 일러준 이 말을 일생 잊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고 살았다.

그후 성균관 사성으로 있을 때였다. 자기 옛 스승이며 선배인 김공(김득배)이 역적의 죄명을 쓰고 참형당하여 그 시신이 형틀에 묶이운채 내버려져있었다. 사실 김득배로 말하면 외적이 큰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올 때 그를 물리치는데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였다. 그런데 간신 김용이라는자가 그의 공로를 시기하여 간사한 꾀를 꾸며 여러 도당들과 함께 《역적》으로 몰아 죽이였다.

정몽주는 죽기를 각오하고 왕앞에 꿇어앉아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아뢰였다. 처음에 왕은 그의 체구가 장대하여 무관인줄 알았다가 사리가 밝게 정중히 제소하는것을 보고서야 성균관 사성 정몽주임을 알아보았다. 그가 《소신이 김공의 제자로서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목숨만 아끼고 의리를 저버리는 인간추물이나 다름없기에 죽기를 각오하고 상감마마께 아뢰옵니다. 소신에게 김공의 시신을 맡겨주시와 목과 몸을 함께 안장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후 소신의 외람된 죄를 다스려주옵소서.》 하며 눈물을 쏟는지라 무슨 변고가 있는줄 짐작한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차후 조사해본데 의하면 간신 김용이 국내외 반역세력과 결탁하여 역모한 죄가 드러난지라 그 패당들을 참형에 처하고난 왕은 여기에서 큰 교훈을 찾으면서 젊은 선비 정몽주의 충신다운 의기를 새롭게 알게 되였다.

정몽주는 문관이지만 외적들이 쳐들어왔을 때엔 왕의 신임을 받고 종사관이 되여 과감무쌍하게 용병술을 써서 무찔러버림으로써 크게 공을 세웠다.

그후 정몽주는 국사와 외교술에서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문신충신으로서 고려 마지막임금인 공양왕때는 문하시중으로까지 되였다.

고려의 충신이며 문하시중이였던 정몽주에 대한 전설로는 리성계의 왕권탈취때 끝까지 고려충신의 절개를 지켜 죽은 선죽교와 관련한 전설이 유명하다.

리성계가 고려의 왕권을 탈취하고 리씨왕조를 세우려고 반역행위를 로골적으로 단행한것이 위화도회군이다. 그는 료동지방의 할거세력을 징벌하고 고구려 옛땅을 회복할 대신 왕권탈취의 흉심을 품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 개경을 점령한 리성계는 가장 두려워하던 적수인 8도도통사 최영장군부터 귀양보냈다가 무참히 살해하였다. 그리고는 고려충신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버리기 시작하였다.

정몽주는 최영이 살해되자 불안속에서 기울어져가는 고려왕조를 지켜보고있었다. 리성계의 반역패당세력이 점점 커지자 종전에 《충정》을 외워대며 고려왕조를 받든다고 《충신》으로 자처하던자들도 다 리성계의 패거리에 가붙었다.

그러나 정몽주만은 아무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집에 꾹 박혀있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왕권탈취를 위하여 분주히 뛰여다니며 모략을 꾸미던 리성계의 아들 리방원이 정몽주의 동향을 의심하여 《아버지,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쏠리고있는데 정몽주는 어째 그러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리성계는 아들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생각을 굴려보게 되였는데 그전까지만 하여도 정몽주는 자기와 같이 시중으로 있으면서 대가 바르고 례절이 깍듯하며 자기에게 해를 입힌 일이 없을뿐아니라 도와준 일이 많았던것을 생각해보게 되였다. 그래서 《정몽주는 내가 모함에 들었을 때 목숨을 내대고 나를 도와주었는지라. 그러나 지금은 알수 없지. 나라일과 관련하여서는 그의 심중이 과연 어떠할는지…》 하고 반신반의하였다.

그후 어느날 방원은 정몽주의 뜻을 알아보려고 제 졸개들과 함께 주연을 열고 그를 청하였다. 정몽주는 거절하면 자기 심중을 인차 알아차릴것 같아 모른척 하고 형세도 살필겸 주연에 참가하였다. 리성계의 패당들인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고려의 형세가 다 기울어진듯 의기양양하여 시조를 읊조리였다. 방원은 정몽주에게 술을 따라 한잔 권하면서 제가 먼저 시조를 읊어내려갔는데 그 내용인즉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도 얽혀져있거늘 우리도 그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려보자는 《권고》였다. 다시말하여 시세를 따라 자기 패당과 함께 어울려 손잡고 일해보자고 그를 회유하려든 시조였다.

정몽주는 리방원의 시조속에 반역의 음모가 력력히 비껴져있는지라 의분을 참지 못하여 자기의 철석같은 지조와 절개를 담아 후날 력사에 널리 알려진 《단심가》를 읊어내려갔다.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이랴

 

리방원은 정몽주의 시조를 듣고서야 그를 자기 편에 돌려세울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그를 없애버릴 흉심을 품게 되였다.

한편 정몽주는 리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치료받고있는 기회를 리용하여 왕을 찾아가 반역음모를 꾀하는 리성계의 패거리인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을 없애버릴 청을 올리였다. 왕은 쾌히 그 소청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런 기미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리방원이 해주로 달려가 누워있는 리성계에게 《우리 집안이 멸족당할터인데 빨리 수습하셔야 합니다.》고 바쁜 소리를 하며 그날밤으로 개경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리방원은 리성계의 동생과 사위, 그 휘하에 있는 여러 무리들을 청하여 고려충신들을 제거할 모의를 계속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리성계의 형 리원계의 사위 변중량은 너무도 분개하여 포은 정몽주를 찾아와 알려주었다.

포은 정몽주는 정세가 험악해지나 당장 손쓸 형편도 안되는지라 동정도 살필겸 리성계의 집을 찾아가 병문안하기로 하고 말을 몰아 록사 김경조를 앞세우고 갔다. 집에 들어가 병문안으로 말이 잠간 오가고 그다음은 별로 할 말이 없어 침묵이 흘렀다. 리방원은 방으로 드나들며 살피다가 때를 놓칠세라 졸개들에게 흉모지시를 주었다. 정몽주는 얼마 안있어 일어나 나오면서 몸조리를 잘하라고 이르고는 말을 몰아 록사와 함께 오다가 마음이 산란하여 형세도 알아보고 이야기도 나누어볼겸 옛친구이며 정승을 지낸바 있는 성여완의 집을 찾아들어갔다.

그런데 친구는 없고 그의 부인이 정몽주를 맞아들이고 술상을 차려들여왔다. 그래서 가슴도 답답한지라 큰 잔으로 연거퍼 두잔을 마시고는 록사 김경조에게 친구집 술맛은 예나 다름없이 변하지 않았다면서 오늘 술맛은 유별나게 좋다고 흥이 나서 잔을 권하며 얼근해진 다음 집을 나와 돌다리가까이에 이르게 되였다.

몇명의 무사가 가로질러 달려오는것이 언뜻 보이기에 정몽주는 록사 김경조에게 나를 따르지 말고 어서 피하라고 소리쳤다. 그 말이 떨어지자 한 괴한이 달려들어 말머리를 철퇴로 쳤다. 말이 쓰러지자 정몽주도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괴한은 이어 정몽주를 다시 철퇴로 내리쳤다. 뒤를 따르던 김경조가 말에서 급히 뛰여내려 정몽주를 몸으로 덮으며 끌어안으려 하자 다른 괴한이 달려들어 그의 등에 칼을 박았다.

뜨거운 피가 돌다리를 붉게 물들였다. 고려의 마지막충신 시중 정몽주는 이렇게 역적무리들에 의하여 고려의 무너져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숨을 거두었다.

리성계는 포은 정몽주의 관계자들과 반대파대간들을 모두 이렇게 제거하거나 귀양을 보내고 석달후에는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들어앉았다.

그후 포은 정몽주의 피로 얼룩진 돌다리틈사이로 그의 변심없는 충절을 상징하는듯 대나무가 한그루 솟아오른것을 보고 개경사람들은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그의 넋이라 하며 그 다리를 《선죽교》라고 고쳐부르게 되였다. 그리고 비석을 세워 그의 애국충정과 굳은 절개를 전하여오게 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전하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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