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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직과 《말하는 무덤》전설
김후직은 신라 진평왕때의 재상으로서 누구도 감히 선뜻 나서서 왕의 정사를 놓고 간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것으로 하여 력사에 알려진 충신중의 한사람이다. 김후직의 충신다운 소행은 《삼국사기》 권45에 기록되였고 그후 사화나 야담, 전설집들을 통하여 전하여졌다. 지증왕의 증손인 김후직은 진평왕때 왕을 직접 섬기는 이찬으로 있다가 그후에는 병부령으로 전직되였다. 김후직이 진평왕을 보좌하던 당시 신라의 형세를 놓고보면 국력이 쇠진해가는 반면에 이웃나라들의 위세가 증진하여 나라의 안정이 심히 위협당하고있었다. 당시 신라의 임금으로 즉위한 진평왕은 진흥왕의 후손으로서 왕세자로 있을 때는 나라의 국력을 강화하는데 힘썼고 린접나라들과의 외교사업도 잘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외적의 침입도 나라의 위세를 돋구어 견제하였고 그자신이 명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던 그가 진지왕이 세상을 뜨게 되여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다음부터는 국력을 강화하는데 별로 낯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활을 잘 쏘는지라 사냥놀이를 즐겨하였는데 그것이 차츰 버릇되여 3일이 멀다하게 사냥하러 다니였다.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냥에 나선 왕의 요란한 행렬을 보며 평범한 백성들까지도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당시 이찬이였던 김후직은 어떻게 하면 왕이 국정에 힘쓰도록 보좌할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던 끝에 설사 왕의 노염을 사서 죽음을 당할지라도 자기의 진정을 간하리라 마음먹었다. 어느 봄날 아침 후직은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북과 징을 울리며 사냥하러 가는 길에 불쑥 나타나 엎드려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사냥놀이에만 몰두하시고 국사에는 낯을 돌리지 않으시나이까?》고 하였다. 그러자 진평왕은 경이 아직 사냥맛을 모르기때문에 그런 언짢은 소리를 하는것이니 어서 일어나 나와 함께 사냥하러나 가자고 하였다. 후직은 일어설념을 않고 《나라의 흥망이 좌우되는 엄숙한 시기에 정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토끼나 사슴의 뒤를 쫓느라 여념이 없으시니 정사를 누가 보며 나라의 안정을 어떻게 도모할수 있겠나이까? 옛책에 이르기를 안으로 계집에게 미치거나 밖으로 사냥에 미치거나 이중에서 한가지만 범하여도 망하지 않는자가 없다고 하였은즉 부디 사냥을 뒤로 미루시고 국정을 살펴주옵소서. 소신이 지금 전하를 도울 일은 이것뿐이오니 외람되다 나무라신다면 죄로 다스려주옵사이다.》 하고 진정을 담아서 말하였다. 그러나 진평왕은 《알만 하니 어서 물러가거라.》 하고는 사냥터로 가던 길을 돌리지 않았을뿐아니라 그후에도 여전히 사냥놀이를 일삼았다. 그런 가운데 병이 위중하여 림종에 이르게 된 김후직은 세 아들을 불러앉혀놓고 죽어서라도 기어이 임금을 깨우쳐주려고 하니 자기의 시체를 왕이 사냥다니는 길옆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간절한 유언대로 사냥길옆 언덕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후 왕의 사냥행렬이 이 언덕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어데선가 《가지 말라!》고 하는듯 한 이상한 소리가 련속 들려왔다. 왕은 너무나도 이상하고 괴이쩍은지라 저 소리가 어데서 나느냐고 수행신하에게 물었더니 김후직의 묘에서 나는 소리라고 하며 그의 유언내용을 아뢰이는것이였다. 왕은 침통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그가 충성으로 간하다가 무덤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이렇게 타일러주는데 내 끝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슨 면목이 있으랴.》 하고는 활과 살을 가져다가 그자리에서 꺾어버리였다. 그후로는 다시 사냥길에 오르지 않고 국사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김후직의 《말하는 무덤》에 대한 전설이 생겨나 력사에 기록되여 전해지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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