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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의 애국충의
박제상은 신라봉건국가의 낮은 벼슬자리의 관리로서 볼모로 가있던 두 왕자를 빼내오기 위하여 충의를 다하였으며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킨 력사적인물이다. 박제상에 대한 행적과 설화적인 내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거의 비슷하게 실려있는데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표기되여있다. 신라는 이웃나라들과의 빈번한 충돌을 막기 위한 조치로서 왕자 미사흔을 왜(일본)나라에, 복호를 고구려에 각각 볼모로 보냈었다. 볼모는 해당 나라의 령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것을 담보하기 위하여 왕자를 맡겨두는것인데 본질에서는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눌지왕은 왕위에 오른 후 어느날 신하들과 나라의 호걸들을 불러 큰 연회를 베풀고 잔을 들다가 문득 《인질》로 잡혀있는 두 동생의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이전에 선왕께서 볼모로 보낸 아들을 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고 또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동생들을 데려오지 못하고있다. 만일 그 두 동생을 다시 만나게 되여 함께 선왕의 사당에 가서 참배하게 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을터이니 누가 능히 이 일을 성공할수 있을듯싶은가?》고 하였다. 그러자 좌중의 문무신하들이 서로 입을 모아 아뢰기를 《이 일은 실로 용이한 일이 아니오니 반드시 지혜와 용맹이 출중한 사람이라야만 될것이온즉 저희들의 생각에는 삽량주의(경상남도 량산지방) 장관 박제상이 적임자로 생각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박제상을 불러들이여 그의 뜻을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듣기에 <임금이 걱정하게 되면 신하로서는 욕으로 되는것이요, 임금이 욕을 보게 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만일 일의 어려움과 쉬움을 가려서 실행한다면 그것은 충성치 못하다고 할것이요, 죽고사는것을 따져본 뒤에 행동한다면 그것은 용맹스럽지 못하다고 일러야 할것입니다. 제가 비록 변변치 못하오나 어명을 받들어 수행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박제상은 말을 달려 고구려에 들어가 절차를 밟아 궁성에 안내되였다. 그는 사절답게 왕을 만나뵙고 절절히 말하였다. 《우리 나라 선대왕께서 고구려와 화친하기 위해 왕자를 볼모로 보내였는데 10년세월이 가까와오는 오늘까지 돌려보내지 않아 우리 임금은 형제간의 정을 그리워하고있으니 살펴주기 바라나이다.》 그러자 고구려왕은 생각되는바가 있어 제상에게 복호를 데리고가라고 하였다. 박제상이 왕의 동생인 복호를 데리고 돌아오자 눌지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제상을 위로하여 주연을 베풀고 그의 공을 크게 칭찬하였다. 그러면서 왜국에 잡혀있는 막내동생생각이 더욱 간절해져 《나의 두 동생은 마치 내 몸의 두팔과 같은데 이제 다만 한팔만 찾았으니 어찌하랴?》고 탄식하였다. 박제상은 이미 결심한바인지라 왕에게 아뢰기를 《저의 재간이 비록 우둔하오나 나라에 바친 몸이오니 끝까지 어명을 받들어 왜국으로 가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왕도 사리가 있어 저의 한마디 말로써 돌려세웠지만 왜왕은 포악하여 꾀임수로써 왕자를 돌아오게 해야 할듯싶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나라를 <배반>하였다는 소문을 내여 왜인들이 알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래야 왜국에 쉽게 들어갈수 있고 적당한 꾀도 꾸밀수 있을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박제상은 임금과 하직하고 말을 달려 집에도 들리지 않고 곧바로 바다가에 이르렀다. 뒤늦게 안해가 소식을 듣고 바다가로 달려가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올라 노를 저어가며 손을 흔들어보일뿐이였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작별이 될줄은 누구도 몰랐다. 박제상은 왜국에 닿아 왕궁에 안내되였다. 그는 신라왕이 죄없는 내 부형을 죽였으므로 여기로 도망쳐왔노라고 꾸며대였다. 왜왕은 나라를 《배반》하여 도망쳐온 그를 후히 대접하며 인질로 잡혀있는 미사흔과도 말동무삼아 놀게 허락하였다. 박제상이 자기 나라 왕자 미사흔과 함께 바다가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 바치니 왜왕은 기뻐하며 의심치 않고 때가 오면 길잡이로 써먹으려는 속심을 굳혀갔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안개가 자욱히 끼여 사위를 분간할수 없게 되자 박제상은 때를 놓칠세라 미사흔을 손잡아끌며 바다가로 달려갔다. 미사흔은 《내가 그대를 적국에 남겨두고 어찌 혼자서 가리오. 잡혀죽더라도 함께 가자.》고 목메여 말하였다. 박제상은 그의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두사람이 함께 없어지면 적들이 인차 뒤쫓아올테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빨리 배를 몰아 고국에 가닿으라.》고 하고는 이미 대기시켰던 신라사람을 배길잡이 겸 호위병으로 왕자와 함께 급히 떠나보내였다. 이어 박제상은 자기 거처소에 돌아와 새벽잠을 청하는듯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고 동정을 살피고있었다. 시간이 퍼그나 흘러간 후에야 왜군수비장이 방문을 열어제끼며 왜 늦게까지 잠을 자는가고 물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어제 배를 오래도록 타고 고기잡이에 정신을 팔다나니 피곤하여 그렇게 되였다고 하였다. 그놈은 방안을 살펴보더니 왕자가 없는지라 그가 어데로 갔는가고 재차 물었다. 박제상은 문을 열고 밖을 살피다가 《아마 내가 곤히 잠들었으니 저 혼자 바다가로 나가 고기잡이에 취했는가 봅니다.》라고 어물쩍 넘기였다. 그러자 놈이 의심스러워 바다가에 달려가 찾아보고나서 미사흔이 도망갔다는것을 알아차렸으나 안개때문에 추격하지 못하고 이 사실을 왜왕에게 아뢰였다. 왜왕은 박제상을 불러다 왕자가 어데로 갔는가 다그쳐 물었다. 박제상은 태연하게 그가 제 혼자 달아날수는 없으니 이제 돌아올것이라고 하면서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왜왕은 병졸을 풀어서 바다가와 이웃골짜기와 인가들을 훑게 하였다. 그래도 왕자를 잡아오지 못하고 그 행적을 알수 없는지라 박제상을 잡아가두고 문초를 들이대였다. 《네 어찌하여 몰래 왕자를 빼돌리였느냐?》 박제상은 이제는 왕자가 무사히 귀국했으리라고 생각하고 태연히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신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는 아니다. 여기에 와서 나는 우리 임금의 뜻을 성취코저 할뿐이니 구태여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랴.》 그러자 왜왕은 성이 독같이 올랐으나 그를 달래여볼 심산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미전에 내 신하가 되겠다고 도망쳐왔는데 오늘엔 신라의 신하라고 하니 응당 엄한 벌을 주어야 하겠지만 이제라도 나의 신하가 되겠다는 말만 하면 반드시 높은 벼슬로 상을 주리라.》 박제상은 왜왕의 간교한 희롱에 결연히 맞서 신라의 충신의 의지와 절개를 지켜 서슬푸르게 웨쳤다. 《내 차라리 계림(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로는 되지 않을것이며 내 차라리 계림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록은 안 받겠다.》 악에 받친 왜왕은 그의 발바닥가죽을 벗기고 대를 벤 갈밭을 걷게 하면서 절개를 꺾어보려 하였으나 그를 굴복시킬수 없게 되자 섬에 끌고가서 장작불에 태워죽인 후 목을 잘라버리였다. 충신 박제상의 자기 나라에 대한 애국충정과 임금에 대한 충의와 굳은 절개는 그후 널리 전설화되면서 풍물이나 지물전설들에도 반영되게 되였다. 민간에서는 갈대에 붉은 빛이 있는것을 보고 박제상의 피자욱이 배여나온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날 때 집에 들리지도 않고 가다나니 부인이 뒤늦게야 알고 바다가로 달려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서러워 길게 통곡한 모래터를 《장사》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박제상부인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못이겨 치술령에 올라가 멀리 왜국땅쪽으로 이어진 바다길을 바라보며 서러움에 눈물을 쏟다가 바다에 몸을 던지였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박제상과 그 부인의 절개와 충정을 전하려고 여기에다 사당을 세웠고 《치술령가》도 지어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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