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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공진의 애국충정과 절개
고려의 무장 하공진의 애국적인 소행은 《고려사》와 여러 인물전기와 전설집에 실리고 민간극에 담겨 《하공진놀이》로 전하여왔다. 하공진은 진주사람으로서 어려서부터 글공부도 잘하였지만 군사를 즐겨하여 병서를 탐독하고 무예를 닦는데 남다른 취미와 특기를 가지고있었다. 어릴 때 의협심이 강하여 늘 약한 아이들의 편을 들어 소년들모두가 그와 놀기를 좋아하였다. 어른들도 자기 집 자식이 그와 함께 노는것을 보면 마음을 놓고 일보러 갔다고 한다. 이런 특기와 기질로 하여 젊은 나이에 군사에 뽑혀 무관으로 있다가 조정의 신임을 받아 중랑장으로 임명되여 궁실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게 되였다. 그후 곧 상서좌사랑중으로 승직되여 왕을 군사로 보좌하는 무신거장이 되였다. 1010년 40만의 외래침략자들이 고려에 쳐들어왔다. 그 구실인즉 당시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죽인것으로 하여 그를 《징벌》하겠다는것이였다. 그러나 외적들은 강조를 붙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철군하지 않고 계속 남하하였다. 새로 왕위에 오른 현종은 국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행차중이였다. 하공진은 전란을 수습할 외교적수완을 착안하여 왕을 찾아가 아뢰였다. 그는 적들이 본시 《역적을 징벌한다》는 구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강조를 잡았으니 이때에 사신을 보내여 강화를 제의하면 그들은 별수없이 철퇴할것이라고 아뢰였다. 그리하여 화해를 요구하는 공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철퇴할것을 건의하니 적장이 국왕의 행처를 알아보는지라 임금께서는 우리를 사신으로 보내고 멀리 강남으로 행차하였으니 만날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적장은 추격하던 군사를 멈추게 하고 하공진을 자기네 왕앞에 가서 여쭈어보게 하였다. 하공진은 능란한 외교술과 무장다운 기백으로 외적들을 철퇴시켰으나 자신은 억류당하게 되였다. 그는 내심으로는 탈주할 기회만 노리면서 외면으로는 외적들에게 충실한것처럼 보이니 적우두머리도 심히 기특하게 여겨 연경에 거주하게 하고 한 처녀를 배필로 정하여주었다. 이렇게 적우두머리의 《신임》을 얻은 다음 그는 탈주할 때 쓰려고 좋은 말들을 사서 고려쪽으로 통하는 길목의 곳곳마다에 배치하여두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내막을 탐지한 밀정이 적우두머리에게 사실을 고발하여 그만 잡혀가 문초를 받게 되였다. 적우두머리는 처음에는 그를 좋은 말로 달래면서 높은 벼슬자리를 줄테니 자기 나라의 충신이 되라고 하였다. 그러자 하공진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우리 나라에 대하여 딴 마음을 품을수 없으니 만번 죽더라도 외국의 신하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적들은 그후에도 여러차례 그를 귀순시켜보려고 달래였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완강히 맞서나오는지라 고려충신무장을 굴복시킬수 없다는것을 통감하고 그를 무참히 죽여버리였다. 하공진은 적들의 손에 희생되였으나 그의 능란한 외교술과 충신무장다운 기백과 의지는 력력히 살아있어 그 나라땅에 소문이 퍼지고 고려조정에도 인차 알려지게 되였다. 왕은 교지를 내리여 그의 위국충정과 충신무장으로서의 애국절개를 기록하게 하고 그의 아들의 봉급과 관등을 높여주었다. 그후 민간극으로 《하공진놀이》가 성행하면서 하공진의 공적이 널리 전설화되여 전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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