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나라시기 명장전설
 

을지문덕

 

을지문덕장군에 대하여 처음으로 소개한것은 《삼국사기》이다. 여기에는 을지문덕의 장수다운 기질과 지혜, 재주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수십만의 외적을 물리치고 살수(소자하)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력사적사실을 전기로 묶어놓았을뿐이다. 그후 을지문덕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광범히 전설화되면서 명인집과 사화, 전설집에 묶여져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세나라시기는 물론 이후시기에도 명장으로 을지문덕을 첫자리에 놓았다.
  을지문덕은 못살고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하여 고구려무관으로 복무하다가 대신급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하기에 을지문덕장군에 대한 전설은 편폭이 클뿐아니라 생애사의 전반을 포괄하여 장군다운 기질, 무예와 지략, 통군술 등을 갖가지로 전설화하고있다.

을지문덕에 대하여 서술한 여러 책들에서도 《을지문덕은 용감한 천재로 당시 병법과 무예에 능통하였나니 말타기와 활쏘기, 칼과 창쓰기를 잘하고 용병술은 <신>과 같았다.》고 쓰고있다.
  하기에 을지문덕의 장군다운 기상과 위용, 무예와 용병술은 《신》적인것으로 전설화되였다. 그것은 그의 출생부터 기이하게 엮어주고있을뿐아니라 어릴 때에 벌써 석굴에 들어가 돌책상을 마주하고 병서를 읽었고 험한 산발을 오르내리며 용맹을 키웠다는 전설적이야기에서 잘 알수 있다.

을지문덕은 지금의 평안남도 증산군 서해바다가기슭 석다산밑 적성골 태생이다. 그는 자라남에 따라 힘꼴이 잡히고 장수다운 기질을 나타내였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을지문덕은 어릴적부터 서해바다가에 나가 소금을 구워가지고는 저녁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둠이 깃든 밤길에 웬 송아지 같은것이 길을 막아나서며 성가시게 굴기에 몽둥이로 후려쳐 넘겼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호랑이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몽둥이로 호랑이를 잡은 소년장수 을지문덕에 대한 소문이 나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여 학당에 가서 공부할 처지가 못되였다. 그는 저녁마다 산에 올라 무예를 익히고 장수힘을 키워나갔다. 고구려에 상무기풍이 차고넘치던 때라 큰 칼과 창을 만드는 대장간에서 메질도 하였고 후에는 산에 들어가 돌책상을 마주하고 글을 익히였다.

또한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날아넘으며 검술과 창법을 익혀나갔다. 어느 하루는 큰 칼을 휘두르며 검술을 익히다가 석굴의 바위를 내리쳤는데 칼이 바위에 박히여 꺾어져나갔다고 한다. 이로부터 그후 민간에서는 《신검 박힌 불곡산 석굴》이라는 전설이 생겨나게 되였으며 후세에 와서는 이 석굴을 《을지문덕굴》이라고 지명전설화하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글을 익혀 나중에는 벼슬길에 올라 대신, 국상으로까지 되였다. 뿐만아니라 기마와 활쏘기, 칼과 창쓰기, 용병술에 완전히 도통하여 외적을 쳐부시는 전쟁터에서 큰 공적들을 세워 명장으로 떠받들리게 되였다. 하여 그의 이마우에 잡힌 세개의 주름살을 두고 문무의 영웅호걸적인 의지와 애국지정을 천연으로 얼굴에 자연스럽게 새겨넣은것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였다.

고구려애국명장으로서의 신묘한 지략과 용병술은 그가 살수에서 유인기만전술로 30여만의 적군을 격파하고 큰 승리를 가져온데서도 잘 엿볼수 있다.

외래침략자들이 612년에 방대한 병력으로 고구려에 침입해왔을 때 을지문덕은 군사를 도맡아 지휘통솔하였다.

적들의 군세를 알지 못하여 신통한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있던 을지문덕장군은 왕에게 자기가 직접 적진에 들어가 탐지하여올것을 아뢰이고는 적장이 도사리고있는 적군병영에 들어갔다.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담판장에 태연자약하게 단신으로 들어오는 을지문덕장군의 기상에 눌리여 적장도 그를 사신처럼 맞이하였다.

을지문덕장군은 적장과 통성하고 주위를 휘둘러본 다음 스스럼없이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량국이 오래 전쟁해야 백성이 도탄에 들고 피차에 고통이 많으니 청컨대 량국이 화평을 맺음이 옳을가 하노라.》

적장은 사리 밝고 기개 도도한 을지문덕장군의 말에 기가 꺾이여 꼼짝 못하고 수긍하였다. 이때 적군영에서는 을지문덕장군이 직접 단신으로 온것은 군세를 탐지하러 온것이라느니 뭐니 하며 떠들어댔다. 적장은 황제의 밀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체포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래서 날랜 사람을 시켜 협의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알리였으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던 을지문덕장군은 《내 볼일이 바쁘다.》고 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의 진에 돌아가버리였다.

적장은 수십만대군을 가지고도 아무런 전과도 없이 되돌아간다면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뵈옵겠는가며 을지문덕을 추격하게 하였으나 허사였다.

한편 담판과정에 장수들사이의 의견불일치와 군량의 부족 등으로 골머리를 앓는 적장의 가긍한 정상을 꿰뚫어본 을지문덕장군은 일부러 물러서는척 하면서 적들을 봉황성의 서쪽 30리계선까지 끌어들이였다.

적장은 지친 병졸들을 강다짐으로 내몰아오기는 했으나 봉황성을 살펴본즉 군세가 충천하고 성벽의 방비가 어찌나 견고한지 도저히 빼앗아낼것 같지 못했다. 게다가 군량마저 다 떨어져 이제는 부대를 지탱하기조차 어려웠다. 이때 을지문덕장군으로부터 궁지에 빠진 자기들을 조롱하는 시 한수를 받게 되였다.
 

신통한 전략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하였네

싸움에서 이겨 공로가 이미 높거니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리

 

적장은 그제야 을지문덕장군의 계략에 말려들어갔음을 깨닫고 황급히 퇴군을 명령하였다. 적들은 여러 행렬로 무리를 지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유인청야전술이 드디여 은을 내게 되였다는것을 확신한 을지문덕장군은 퇴군하는 적들을 4면으로 포위공격하게 하였다. 얻어맞고 지쳐 쓰러지면서 가까스로 퇴군하여 살수에 이른 적들은 물이 얕은줄로만 알고 급하던 나머지 저저마다 뛰여들었다. 이때 고구려군이 사전에 막아놓았던 뚝을 터뜨리고 앞뒤에서 맹공격을 가하는통에 대부분의 적들은 센 물결에 휘말려 수장되였고 요행 헤여나온 놈들마저 화살과 칼에 맞아죽고말았다. 이리하여 살수에서의 전투는 수십만 적군을 일시에 수장한 력사에 보기드문 승리로 끝났다.

적왕은 수십만의 병력을 가지고도 고구려에서 패하고 돌아온 제편 장수의 목을 베여버리였다. 그리고는 을지문덕장군의 지략과 신출기묘한 용병술에 감탄을 금치 못해하면서 두고두고 자기의 파병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을지문덕장군전설은 실재한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명장의 신통스러운 지략과 용병술, 장수다운 위풍과 대담성, 유인기만전술 등을 보다 신비화하여 자랑스럽게 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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