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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전투와 권률
행주산성전투는 임진조국전쟁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전투들중의 하나로서 《행주대첩》으로 력사에 기록되여 전해오고있다. 권률장군은 임진조국전쟁시기 오랜 기간 도원수로 있으면서 관군과 의병대를 총지휘하여 전쟁승리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행주산성전투에 대한 전설과 더불어 권률장군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권률은 령의정 권철의 아들로서 젊어서 유학이나 경전공부를 많이 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설 생각이 없어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명문가의 자제로서 그의 이같은 놀라운 처사는 친척과 친지들로부터 과거를 안볼바에야 글공부를 해서 무엇하려느냐는 비난을 자아내였다. 하여 45살 되던 해에 비로소 문과시험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나섰으나 10년동안 하관말직에 머물러있다가 54살에 의주목사로 임명되였다. 그로부터 1년후에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때 그는 령남과 호남지방의 요충지인 광주목사로 임명되였다. 권률은 서울에 올라와서도 제 집에 들리지 못하고 광주로 떠나게 된다는것을 전해달라고 조정의 한 신하에게 부탁하고 그길로 돌아서서 광주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자기를 맞아주는 장졸도 없는 형편이라 그는 군사를 징발하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권률은 방도를 찾느라고 모대기다가 한밤을 새워 의병모집에 대한 격문을 써서 산지사방으로 사람을 파하여 뿌리였다. 그러자 한달도 못되는 사이에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일대에서 수많은 군사가 모여들고 많은 의병대가 조직되였다. 그는 문신출신이였지만 임진조국전쟁에서 리치고개전투와 행주산성전투를 령활무쌍하게 지휘하여 이름을 크게 날리였다. 리치고개전투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요충지인 리치고개의 길목을 막아 진을 치고 달려드는 적의 대병력을 일시에 격멸소탕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권률장군은 리치고개를 막아놓으면 전라도에는 적들이 넘어설수 없다는것을 판단하고 이 유리한 요충지에 진을 굴설하고 만단의 준비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아니나다를가 7월초 어느날 적들은 이 고개를 넘어보려고 기승을 부리며 새벽부터 큰 병력으로 달려들었다. 관군과 의병대는 고개턱에 은밀히 진을 치고 매복하고있었다. 놈들은 아무리 조총을 쏘아대도 반응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기세가 등등하여 밀려들었다. 권률장군은 적들이 턱밑까지 바싹 다가선 다음에야 구령을 내려 화살을 날리게 하였다. 그러자 선두에서 달려들던 적병들이 무리로 꺼꾸러졌고 뒤따르던 적들도 돌아설 사이도 없이 외통길에서 도망치는 놈들과 마주쳐 갈팡질팡하였다. 이때 권률장군과 그의 군사들이 일제히 반격하여 칼과 창으로 죽탕을 쳐 주변을 왜병시체로 뒤덮어놓았다. 권률장군은 이처럼 리치고개에서의 싸움을 승리에로 이끌었을뿐아니라 적들로 하여금 전쟁의 전기간 전라도에 들어설념을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도는 아군의 공고한 후방기지로 되였으며 의병대는 동서로 왕래하면서 적의 진출과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 싸움에서 명성을 떨친 권률장군은 그후 행주산성전투를 령활하게 지휘하여 왜놈들을 전률케 한 애국명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권률장군은 서울에 주둔하고있는 적들을 배후에서 기습타격하기 위하여 지리적으로 유리한 수원의 독산성을 차지하고 만단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왜적들이 소리만 들어도 기겁하여 달아나게 리치고개의 장군이 서울의 적들을 치려고 수원에 날아들었다는 소문을 퍼치게 하였다. 의주행궁으로 가고있던 왕은 권률장군이 서울을 탈환하려고 수원에 진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도 대견하여 자기의 보검을 전달병에게 내주면서 《짐은 그대의 애국충정을 믿노니 이 장검으로 수하 모든 장병들을 격려하고 지휘하라.》라는 어명을 권률장군에게 전달하도록 분부하였다. 한편 서울에 웅거하고있던 적장 우끼다는 권률장군의 부대가 독산성에 진주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위압감에 사로잡혀 장졸들을 내몰아 독산성을 포위하고 형세를 살피며 매일같이 공격해왔다. 권률장군은 그때마다 일제히 화살을 날려 적들로 하여금 성벽에 다가붙지 못하게 하였고 밤이면 어둠을 타서 소부대를 각방으로 파하여 적군영을 일제히 기습타격하게 하였다. 얼혼이 나간 왜놈들은 공포에 떨며 서울로 퇴각하고 말았다. 권률장군은 수세에 빠져있는 적들을 기만유인하여 소멸하는 한편 서쪽으로 뻗은 통로를 차단할 계략밑에 서울에서 40리 떨어져있는 행주산성으로 진을 은밀히 옮기게 하였다. 그리고는 견고치 못한 성벽은 통나무를 찍어 보강하고 돌과 흙으로 한둘레의 내성을 튼튼히 쌓도록 하였으며 성벽가까이 군데군데마다에는 돌들을 산더미같이 모아놓게 하였다. 한편 한쪽에서는 큰 가마를 걸어 물을 부글부글 끓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성벽마다에 돌산이 솟아나고 물끓이는 곳곳마다에서는 불길이 타래쳐올라 마치도 백만장졸의 때식을 준비하는듯 군세가 위용찼다. 서울에 도사리고있던 적장 우끼다는 권률장군부대가 행주산성에 옮겨앉았다는것을 뒤늦게야 알고 탐지병을 파하였더니 그 군세가 대단한지라 성을 완전구축하기 전에 치려는 야심밑에 3만이 넘는 엄청난 병력을 공격에로 내몰았다. 권률장군은 적병이 성가까이에 나타나기만 하면 그때마다 화살을 날려 완전히 소멸하게 하였다. 인원으로 보아도 3만을 넘는 큰 병력인지라 적장은 시체더미를 딛고서라도 성벽에 다가붙으라고 련속 졸병들을 몰아댔다. 사실 이때로 말하면 아군의 정규병력은 2 300여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리치고개에서처럼 복병을 대기시키였다가 일시에 반돌격을 할수도 없는 형편이였다. 행주산성전투는 성안의 군사들과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가 활과 돌, 끓는 물로 결사적으로 왜적과 싸워야 하는 힘겨운 전투였다. 적들은 무리죽음을 내면서도 성을 포위하고 사면팔방으로 련속 공격해왔다. 권률장군은 성벽우를 왔다갔다하면서 백열전을 능숙하게 지휘하였다. 그때마다 성벽에 기여오르던 놈들은 아낙네들이 앞치마로 날라온 돌에 맞아죽고 끓는 물과 불뭉치에 온몸이 데여 죽어버렸다. 그리하여 성벽의 길고 넓은 둘레마다에 왜놈들의 시체가 덧쌓이게 되였다. 녀인들이 자기 앞치마에 돌을 싸안고 날라 전투승리에 크게 기여한 전투라고 하여 이 산성전투를 《행주산성전투》라고 불렀으며 후에는 행주치마에 대한 전설도 생겨나 후세에 전해지게 되였다. 적장은 도망치기 전날까지 남은 병력을 련속 들이밀었으나 한놈도 성벽으로 바라오르지 못하여 결국 패전의 쓴맛을 보고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급기야 서울진에 돌아온 왜장은 필경 행주산성전투에서 승리한 권률부대가 인차 뒤따라올것이라는 판단밑에 도망칠 길마저 막히기 전에 미리 퇴각하려고 남쪽으로 달아나버리였다. 하여 서울의 탈환은 아무런 접전도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되였을뿐아니라 행주대첩은 이로써 력사에 전설로 길이 남아 전해지게 되였다. 권률장군은 문신출신의 무장인데다가 55살이 넘은 로장이였지만 지혜와 계략이 출중하고 청년장군의 기상으로 적은 군사를 가지고도 전투를 능숙하게 지휘하여 력사에 남는 큰 전투를 두번에 걸쳐 승리에로 이끌었다. 하기에 행주산성과 더불어 명장으로서의 그의 인물전설도 후세에 널리 전하여지게 되였다. 이처럼 그는 우리 인민이 왜적을 반대하는 임진조국전쟁사를 더욱 빛나게 장식하는데서 큰 공훈을 남긴 애국명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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