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북의병장 정문부

 

정문부는 문신출신의 의병장으로서 임진조국전쟁시기 관북지방에서 의병을 불러일으켜 군세를 강화하고 림기응변의 전술로 이 일대에 침입한 왜적들을 모조리 쳐없앤 승전장군이다.

량반가정에서 출생한 정문부는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의 참군이 되였으며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나기 전해에 함경도 북평사로 임명되여 관북 경성에 부임하였다.

그는 한양을 떠나올 때 길잡이군이 이끄는 말에는 짐을 싣고 자기는 하늘소를 타고왔다. 그런데 여느때와 달리 하늘소가 말을 앞서려 하는지라 그 짐승도 주인이 승진한줄 알고 걸음을 재촉하는 모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는 문신출신이지만 성격이 엄하고 강직한데다가 지략에 능통하고 정세판단이 정확하여 감히 누구도 맞서지 못하였으며 간신들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때만 하여도 관북땅의 관료패당은 제 마음대로 날치며 득세하였는데 정문부가 온 다음부터는 그 눈길만 보아도 기가 죽어 로략질도 못하고 그앞에 나서기조차 꺼려하였다.

정문부의 강직한 기질과 전술적수완은 임진조국전쟁에서 뚜렷이 과시되였다. 그가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해온 다음해 4월에 임진조국전쟁이 발발하였는데 7월에 이르러서는 왜적들이 마천령을 넘어왔다. 이에 당황한 간신, 역적들은 저들의 더러운 목숨을 건져보려고 회령에 피난간 두 왕자를 잡아 적장에게 바치기까지 하였다. 정문부는 자기 수하군사가 얼마 안되는데다가 6진의 군사는 멀리 떨어져있어 형세는 다급한지라 그해 8월 경성에서 함경도 여러 고을의 원과 선비, 백성들에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칠데 대한 격문을 발포하였다.

그는 격문에서 엄혹한 형세와 간신, 반역무리들의 준동을 알린 다음 군인, 남녀로소 할것없이 왜적의 무리들을 쳐부시는 의로운 싸움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내 지금 그대 군사들과 백성들, 늙은이들에게 말하노라.

조상이 물려준 이 나라를 지켜내리라 결심하고 모두 떨쳐일어나 적을 친다면 임금과 신하사이의 의리가 있게 될것이며 같은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호응해나서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

저 무도한 왜적의 무리가 우리 나라와 원쑤를 맺았나니 그 형세로 말하면 저놈들이 불리한 형편에 있으며 그 처지로 말하면 우리는 정당한 립장에 있다. 아무리 뱀처럼 독기를 내뿜어도 반드시 무참한 죽음을 당하고야말것이다. …

여러분들은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적들을 쓸어버릴 그날을 기약하라. …》

정문부는 격문을 보내여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군세를 강화하는 한편 북방의 6진군사들이 적의 침입을 막아나서도록 불러일으키고 선차적으로는 경성과 명천, 회령 등지에서 준동하던 반역무리, 간신들을 일제히 잡아 처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군중에게 교훈을 주고 애국의기를 분발시켰으며 저저마다 의병에 떨쳐나서도록 하여 한달사이에 수천명의 의병들을 묶어세우게 되였다.

그는 청년의병장으로서 6진의 용맹한 장졸들로 대오를 보충확대해나가면서 기습, 포위, 매복, 림기응변의 기묘한 전법으로 세차례의 전투를 조직하여 왜군을 일망타진하고 관북의병장으로서의 명성을 떨치였다.

그는 임진년 9월 경성을 떠나기에 앞서 관청에 들어앉아 도망갈 생각만 하는 비겁분자, 반역자들을 처단하여 의병과 군중에게 애국의기를 불러일으켰으며 명천에 이르러서도 역적무리들을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정판사(정포수)의 손탁에 《늙은 시라소니》와 《하루강아지》까지 다 잡히고 녹아났다고 깨고소해하였다고 한다.

그는 충천한 기세로 그해 10월에는 길주방면에 웅거하고있는 왜적들을 사면으로 포위해들어가면서 빠져 못나가게 하다가 길주 장평돌고개에서 일대 섬멸전을 벌림으로써 적들을 격멸소탕하고 수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하는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군세를 더욱 늘여나갔다.

장평돌고개전투와 관련하여 그날 새벽에 그곳 집들에 있는 닭들이 세번씩 일제히 울음소리를 냈는데 그것이 아마도 승리의 예언이였는가싶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그는 다음해 1월부터 함경도내에 침입한 적들을 완전히 쓸어버릴 전략을 세우고 단천에 몰켜있던 적들을 유인기만하여 미리 매복시켜놓은 지점에 끌어내다가 일격에 족쳐버림으로써 적들은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고말았다.

의병대를 거느리고 길주로 들어오는 관문이라고 할수 있는 림명골짜기어구에 진을 치고 대기하고있던 정문부는 적들이 패주하던 도주병까지 합세하여 림명벌로 쳐들어오자 기만전술을 써서 적과 접전하지 않고 군세가 약한것처럼 보이면서 뒤로 물러서 후퇴하는척 하다가 지형지물적으로 유리한 길주의 백탑에 와서 매복진을 폈다. 그리고 림명으로부터 길주로 들어오는 고개턱과 입구에 기습조를 파견하였다. 또한 도주하는 적들을 따라잡아 모조리 소탕하기 위한 기병대도 대기시켜놓았다. 이리하여 백탑에서 관북의병대와 적들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였다. 지금도 백탑에는 당시 전쟁형편을 전하는 지명(쌍룡)과 지물(돌고개)이 있다고 한다.

적들은 수적우세를 믿고 련속 군사를 들이밀었다가 매복에 걸려 녹아나고 기습에 얻어맞아 죽어넘어졌다. 그러자 적장은 분통이 터져 골목으로 빠져나가도록 하였으나 이번에는 숨어있던 복병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칼과 창으로 베고 찔러죽이는통에 무리죽음을 당했다. 그리하여 마천령을 넘어왔던 적들은 세차례의 큰 격전에서 완전히 패하고 다시는 관북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어려웠던 정황은 정문부의 능숙한 지휘밑에 관북의병대의 승리로 끝을 보게 되였다.

이처럼 정문부는 문신출신의 젊은 청년무장으로서 나라가 왜적들의 침노로 위기를 겪게 되자 격문을 내여 관북의 군사들과 관리, 백성들을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로 불러일으킨 애국적인 명장이다. 그는 또한 대담한 결단으로 역신과 반역자들을 제때에 색출처단하고 군세를 강화하여 전투마다 기묘한 전법으로 련승함으로써 왜적으로 하여금 관북땅으로부터 패주케 하여 전쟁승리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여러 고을들에서 장관벼슬을 지내다가 당시 첨예화된 당파싸움으로 하여 억울한 죄명을 쓰고 옥에 갇혀죽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농포집》이 있으며 적지 않은 시문과 산문도 있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