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리순신

 

우리 나라에서 수군장으로 첫자리에 꼽는것은 충무공 리순신장군이다.

리순신장군은 임진조국전쟁시기 3도수군통제사로서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리용하여 왜적으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였으며 한산도해전과 최후의 격전이였던 로량해전에서 큰 승리를 이룩하고 배우에서 순직한 충신애국명장이였다. 하기에 력사에서는 일찌기 리순신장군을 충신무장, 충무공이라고 불러왔다.

리순신은 1545년 서울에서 리정의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공부도 잘하였지만 군사놀이를 즐겨하였는바 매양 놀이를 할 때면 자기또래 아이들에게 싸울 진을 만들어놓게 하고 스스로 대장이 되여 지휘함으로써 승리의 쾌감을 맛보군 하였다고 한다.

그는 늦게야 무과시험에 급제하여 무관벼슬길에 오르게 되였는데 처음에는 훈련원 봉사로 있었다. 그후 여러 직종을 옮겨앉았다가 다시 훈련원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발포수군만호를 하게 되면서 수군장의 길에 들어섰다. 1587년 조산보만호로 있을 때 두만강변에서 외적의 침범을 방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리순신은 임진년 전해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여 수군건설에 힘썼다. 그는 진과 항을 정비하고 군률을 세우는 한편 철갑선인 유명한 거북선을 새로 건조하여 공격용으로 써먹을수 있게 준비하였다. 그리고 형세로 보아 왜놈들이 해상으로 침략해오리라는것을 예견하고 수군력량을 보충정비하는 동시에 군량을 저축하고 병기장비를 개선하며 군세를 강화해나갔다.

그러던차에 1592년 4월에 일본침략군이 방대한 병력으로 불의에 침공해왔다.

당시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은 적군과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밀리다가 함선과 군사만 잃었다.

왜구의 오만한 침략에 분노한 리순신장군은 원균의 나머지군사와 전라좌도, 전라우도의 수군을 련합하여 제1차로 출전하여 옥포, 합포 등지에서 적함선 40여척을 격상시켰으며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여 임진조국전쟁의 첫 승리를 빛나게 장식하였다. 그는 제2차로 출전하여 사천해전과 당포, 당항포앞바다싸움에서 수많은 적선을 격침시키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리순신장군은 적들이 다시 력량을 편성하여 침습해오리라는것을 타산하고 적들을 전략적으로 유리한 계선인 한산도앞바다에까지 유인하여 일격에 포위격멸할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먼저 복병할 선단을 파견하고 공격해오는 적함대를 피하여 후퇴하는척 하면서 한산도앞바다까지 끌어내여 일시에 포위를 좁혀 반격함으로써 적선 73척가운데서 59척을 격침시켰으며 적병 수천명을 살상수장시켰다.

이것이 제3차출전으로 안아온 《한산대첩》이다. 장군은 이어 안골포에서 다시 쳐들어온 적2함대에 속한 적함 40여척을 기습하여 모조리 격침시키였다.

그후 리순신은 적수군이 둥지를 틀고있던 부산포를 공격하여 정박하고있던 100여척의 적함을 격침시킴으로써 적들의 《수륙병진》기도를 파탄시키고 임진조국전쟁의 첫 시기 전쟁국면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변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로 하여 리순신장군은 3도(경상, 전라, 충청)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여 수군전체를 지휘하게 되였다.

리순신에 대하여 민간에서 전하여온 전설적인 이야기를 보면 소년때는 자기 형들과 함께 유학을 배우는데 힘쓴 그였으나 점차 커감에 따라 붓보다 검을 쥐고 휘둘러볼 생각을 더 하였다고 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무예를 닦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활쏘기와 창쓰기,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나가는데서 그 위력이 하도 특출하여 누구도 그를 따를념을 못했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허실하지 않고 단정하고 엄정하여 상종하는 제또래 무사들도 그를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는 28살 되는 가을에 훈련원의 별과시험에 응시하였다. 그때 무예시험에 말을 타고 달리는 경기종목이 있었다. 그런데 군마로 써보지 못하였던 말을 타고 달리다보니 말이 탄 사람을 떨구려고 높이 뛰여오르며 날뛰는통에 그만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골절되였다. 모두들 그가 다리까지 상하였으니 필시 포기할줄 알았다. 그런데 한팔로 버들가지를 휘여잡고 일어나 그 껍질을 벗겨 골절된 다리를 처매고 다시 말에 올라 단단히 나꾸채며 달림으로써 비록 성적은 받지 못하였으나 장차 큰 무사감이라는 칭찬을 받게 되였다고 한다.

1576년 그가 무과시험에 합격되여 처음으로 군무를 맡아 수행하던 때의 일이다. 리순신의 무예적인 재능과 사람됨을 알아본 병조판서가 그에게 자기 첩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으려 하였다. 리순신은 무장으로 되는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권세있는 가문에 발을 들여놓고 출세하려는것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면서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평범한 집의 딸을 안해로 맞아들이였는데 그의 처가와 관련하여서도 재미나는 일화가 전해져온다.

방씨부인이 12살 나던 해 가을 어느날 밤 로략질을 하려고 도적패거리들이 그 집 대문가에 나타났다. 도적패거리들은 그의 아버지가 활을 잘 쏜다는것을 알고 그 집 계집종과 내통하여 화살통을 미리 없애버렸었다.

도적무리가 나타나자 아버지는 다락에 올라가 활을 쏘려 하였으나 화살이 없으므로 《웬 일이냐? 화살! 화살!》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딸 방씨는 화살을 도적맞힌것이라고 생각하고 베틀옆에 묶어놓은 잉아대를 한아름 안아다놓고 아버지에게 《이것으로 쏘시오이다.》 하며 연방 한대씩 셍겨주었다. 도적패들은 화살통을 없앴는데도 연방 화살이 날아오는지라 공포에 질려 끝내는 도망치고말았다.

리순신은 방씨와 결혼한 다음에도 그 일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리순신이 발포만호로 수군군직을 맡고 왔을 때의 일이다.

수군절도사로 있던 성박이 병영마당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여 거문고를 만들려고 사람을 보내여왔다. 리순신은 아무리 상관일지라도 거문고를 만들려고 남의 병영마당에 높이 자란 나무를 찍으려 하는지라 《이것은 관가의 공물이라 사사로운 일에 쓸수 없다.》고 꾸짖어보냈다. 절도사는 그 말을 듣고 대노하였으나 끝내 오동나무를 베여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는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에도 진중에서 장졸들과 함께 있으면서 식음을 소박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늘 한번씩 진을 돌아보고 적정을 살폈으며 잠을 잘 때에도 대체로 군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새벽닭이 울면 곧 일어나 홀로 앉아 문서를 보거나 병서를 연구하였으며 병선을 철갑을 씌운 거북선으로 개조하고 화포와 병기를 개량하고 보충하여 싸움준비를 완비하는데 심혈을 다 쏟아부었다.

한때 장군의 몸이 허약해진데다가 병을 만나 숨소리가 고르롭지 못하여 부하들이 좀 쉴것을 청하자 《전쟁형세도 숨찬데 어찌 무장의 몸이라고 탈이 없겠는가. 승패가 눈앞에 놓여있거늘 어이 일신의 안정을 바라겠는가!》 하며 하루도 자리에 눕지 않았다고 한다.

1597년 리순신은 그전부터 자기의 공로를 시기하여오던 원균의 모해로 잡혀가게 되였다. 억울한 루명을 쓰고 수인이 되여 조정의 호출을 받고 사지길에 오른 장군을 바래우는 수하장졸들과 백성들은 어찌할바를 몰라 눈물을 흘리며 멀리까지 그를 따라나섰다.

조정에서는 그를 옥에 가두어넣고 원균이 제소한대로 《적과 내통한 역적죄》로 몰아 사형선고를 내리였다. 그를 사형한다는 소식이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성안의 장졸들과 백성들속에도 전하여져 울분과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다시 론의하고 수군의 큰 장군이니 앞으로 큰 전공으로 《죄》를 씻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였다. 그리하여 리순신은 당시 도원수였던 권률장군의 부대에서 보통군사로 복무하게 되였다.

리순신을 모해한 원균은 끝내는 그의 직위를 빼앗아 3도수군통제사로 되였다.

그는 수군을 정비하여 군세를 강화하고 왜적의 침략을 경계할 대신 매일 주색에 빠져 군률을 심히 문란케 하였다. 이런 정황을 샅샅이 살펴가던 왜군은 불의적인 기습으로 조선수군을 칠천도앞바다에 끌어내여 포위공격하였다.

원균이 칠천도앞바다에서 패하고 그자신도 목숨을 잃었다는것을 알게 된 봉건정부는 그제야 당황망조하여 병졸생활을 하던 리순신을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리순신장군은 이때 12척의 전함과 수군 120명을 인계받았으나 락심하지 않고 수군건설에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기지를 지형적으로 유리한 전라도 진도로 옮기고 수군을 정비보강하여 군세를 강화해나갔다.

리순신장군은 12척의 함선으로 진도와 해남사이의 좁고 세찬 울돌(명량)해협에 은밀히 대기하고있다가 달려드는 적함선을 맞받아 출격하여 련속 타격함으로써 적함 30여척과 적병 4 000여명을 순식간에 수장시키는 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이 승리를 계기로 우리 륙군과 수군은 도처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기세차게 쳐부시면서 전면적인 반공격에로 넘어갔다.

리순신장군은 함대재건과 수군보충을 통이 크게 다그치는 한편 수군지휘처를 전라도 고금도로 옮기고 침입하는 왜적함대를 지켜섰다가는 련속 쳐부시였다.

일본침략군의 괴수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전쟁에서 승산이 없게 되자 《화친》을 시도하였으나 일축당하고 울화가 치밀어 끝내는 죽고말았다.

그리하여 적들은 1598년 8월 500여척의 함선을 들이 밀어 총퇴각하는 륙군을 실어내려고 기도하였다. 한편 적군의 선봉장 고니시(소서행장)는 리순신장군에게 총과 검을 뢰물로 보내면서 도망칠 구멍을 얻어보려고 어리석게 책동하였다.

리순신장군은 적병 한명도, 적함 한척도 절대로 살려보낼수 없다는 굳은 의지를 안고 1598년 11월 전체 수군에게 총출격명령을 내리였다. 그는 퇴각하는 적병을 실어나를 적함 500여척이 접근해온다는 정보를 받은 즉시 로량앞바다로 총진격하여 적함을 일시에 포위하고 불화살을 날리며 드센 공격으로 적들을 소멸하였다.

리순신장군은 선두함선에 서서 《적을 한명도 살려보내서는 안된다.》고 웨치며 도주하는 왜적의 지휘함선을 추격하여 화살을 연신 날리며 항복할것을 요구하였다. 로량해전이 승리로 끝나가던 이무렵 불행하게도 리순신장군은 적탄에 치명상을 입게 되였다. 그는 마지막힘을 다하여 몸을 반쯤 일으키고 지휘기를 옆에서 보좌하던 조카 리완에게 넘겨주면서 《지금 싸움이 한창 승리의 고비에 달하였으니 내가 죽은것을 숨기고 대신 지휘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리순신장군이 최후를 마치는 순간까지 령활무쌍하게 지휘한 로량해전의 승리로 하여 7년간이나 계속되였던 임진조국전쟁은 우리 인민의 승리로 끝났다.

수군강화를 위해 한생을 사심없이 바쳐 나라의 위용을 떨친 애국명장을 잃은 슬픔을 누를길 없어 달려와 통곡을 하는 행렬이 고금도를 떠난 리순신장군의 령구가 가닿을 그의 고향 아산까지 줄지어 늘어섰다.

조정에서는 례관을 보내여 국장으로 제를 지내도록 하였고 모든 대신들이 만가와 제문을 띄워 장군을 추모하게 하였다.

그후 리순신의 행적이 깃든 곳곳마다에 그의 애국충정과 전투위훈을 력사에 길이 전하는 사당들이 세워졌다.

리순신장군의 애국명장으로서의 위풍과 절개, 전투위훈은 우리 나라 애국명장전설을 더욱 풍부히 하여주며 널리 전해졌다.

리순신장군의 후일담으로는 방씨부인의 대바른 품성과 위풍에 대한 이야기도 전하여온다.

리순신장군이 순직한 후 인민들은 물론 관리들까지도 그의 위국충정과 전투위훈을 잊지 못하여 그의 제단을 자주 찾아들었다.

그러던 어느해 한낮이였다. 리순신장군이 3도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부하장수로 있었던 리운룡이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여 아산고을을 지나가게 되였다. 그는 행차시 4인교에 올라앉아 수하장졸들의 호위속에 징과 나팔, 새납을 요란스레 울리며 거들먹거리였다.

아산에 도착하여서는 전달병을 시켜 리순신장군의 사당을 찾아뵙고 방씨부인과도 인사말을 나누고저 한다고 전해왔다.

그러자 방씨부인은 리운룡이 승급하여가는 길에 옛 상관인 리순신장군의 사당을 찾아뵙겠다니 감사하나 사당을 지나면서 나팔과 새납을 불고 징을 치는것은 례법에도 어긋나는 무례한 참배이니 받아들일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제야 리운룡은 방씨부인의 훈계에서 자기의 방자한 행위를 큰 실수로 뉘우치고 4인교에서 내려 대문가에까지 허리굽히고 걸어가서 진심으로 사죄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리순신장군의 사당을 찾는 사람들은 장군이 생전에 쌓은 위국충정과 전투위훈을 되새겨보는것과 함께 방씨부인의 례법의 엄정에 대하여서도 이야기하며 전설로 전하였다.

이상과 같이 리순신장군은 애국명장으로서 력사에 길이 빛날 영웅적위훈을 남기였기에 전설 역시 허구로 가공되기보다는 사실성이 강할뿐아니라 편폭이 크고 공감되는바가 많은 전설로 일러오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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