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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진개척과 김종서, 리징옥
김종서는 함경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여 북방의 변강을 소란시키며 수시로 침범하던 외적을 막고 6진을 개척하여 북방방비를 강화하는데 큰 공훈을 세운 장군이며 세종때는 좌의정으로 승진되였다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낸 수양대군에 의하여 타살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겪게 되였다. 그의 최후는 비록 비참하였지만 사람들은 북방의 6진개척에 세운 명장으로서의 김종서의 위훈을 전설로 길이 전하여오며 그의 뒤를 이은 힘장사 리징옥에 대해서도 구전전설화하였다. 김종서는 전라도 순천에서 1390년에 태여났는데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잘하여 영특한데다가 꾸준하고 결단력이 있어 모두들 앞으로 큰 재상감이라고 하였다. 그는 무예와 지략이 뛰여나고 문장에도 달통하여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419년에 사간원 우정언이 되였고 이어 승진하여 우부대언을 거쳐 1433년에는 함경도 관찰사로 되였다. 조정에서는 당시 북방의 변방에 있는 외적들이 자주 침노하여 수탈과 살륙을 일삼으므로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그때 조정의 관리들을 놓고보면 문신출신의 관리들은 학식은 비록 능하다 하여도 병법과 지략을 갖추지 못하여 병장을 이끌만 한 인재로는 될수 없었다. 그러니 함경도와 같이 외진 곳의 정사와 함께 군사를 통솔하여 빈번히 국경을 침노하는 외적을 징벌하고 나라의 안전을 지켜갈만 한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찾기가 힘들었다. 이런 때에 김종서가 물망에 올라 함경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여가게 되였다. 당시 김종서는 마흔이 넘었으나 맞다드는 호랑이라도 산채로 붙잡아 태를 칠만 한 용맹과 기상, 힘을 가진 문신출신의 장수로 알려져있어 사람들은 그의 센 손탁을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임금과 조정관리들은 김종서를 함경도 도절제사로 파견하면 외적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침노하지 못할것은 물론 북방경비가 안정하고 빈틈없을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그는 북방경비를 맡은 절제사로서 진을 돌아보기 전에 백두산에 올라가 멀리 펼쳐진 조국의 산야를 굽어보며 민족의 슬기와 넋을 한가슴에 부풀어오르도록 받아안고 북방땅을 철옹성같이 지켜나가리라는 장수다운 의분과 기개를 시조에 담아 읊었다. 그는 음풍영월하는 보잘것없는 선비들과 권력싸움에 열을 올리는 부패무능한자들, 간신들을 끝없이 저주하면서 나라의 안정과 국방에 자기의 지혜와 힘을 깡그리 바쳐 충정 다할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김종서장군이 큰소리로 읊은 시조를 따라읊는 수하장 졸들의 우렁찬 소리가 적진에까지 울려퍼져 적들을 전률케 하였다고 한다. 김종서는 현지에 도착하자 진을 샅샅이 다 돌아보고나서 본래 있던 고을진을 분할하여 6개의 군사행정단위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6진 즉 경원, 회령, 종성, 경흥, 온성, 부령 여섯고을의 요새였다. 그는 6진을 설치하고 그것을 북방방비의 위력한 군사요충지로 꾸려가기 시작하였다. 매 진을 돌아다니며 수자리에 나온 군사들의 생활형편을 알아도 보고 그들과 허물없이 한상에 마주앉아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며 보살펴주었다. 그는 매 진을 다 돌아보느라고 몇달째 본영으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군사들의 사기와 생활형편을 알아보았다. 그가 어느 한 진에 갔을 때의 일이다. 군량을 제대로 내주지 않아 군졸들은 배를 곯고있는데 순시들이 내려오면 《대접》해보내야 한다는 구실로 떼놓은 군량미로 몇몇의 리속만 채우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래서 군영장에게 이르기를 오늘 이 진으로 순시가 올테니 잘 대접시켜보내야 한다면서 저축해둔 오곡과 고기, 술 등 음식물을 다 털어내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진이 생겨서 처음 보는 연회상이 차려지게 되였다. 그러자 김종서장군은 군영장에게 순시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데려다 앉히라고 령을 내리였다. 군영장이 순시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지라 주저하며 몸둘바를 몰라하자 장군은 자기가 장졸들과 함께 진을 꾸린것을 장쾌히 여겨 순시가 온다고 했으니 주저치 말고 량껏 먹으며 회포도 나누자고 그를 안심시켰다. 장졸들은 새 관찰사의 도량과 군사를 위하는 마음에 크게 감복하여 북방경비에서의 외로움이나 서러움을 모두 잊고 진방비를 굳건히 다져나갔다 한다. 한편 강건너에 도사리고있던 적들은 새로 온 도절제사가 날이 갈수록 진방비를 빈틈없이 다져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농군으로 가장한 자객을 보내여 김종서장군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절제사는 낮에는 종일토록 진을 돌아보고 저녁 늦게야 장졸들이 마련해놓은 방에 들어가 초불밑에 지형도를 펴놓고 낮에 살펴보았던 지형지물과 군사들의 배치상태를 다시 가늠해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때 어데선가 화살이 날아들어 김종서장군의 상투를 스칠듯 지나 뒤벽에 박혔다. 마당가에서 보초를 서고있던 군사가 황급히 방문을 열고 들어섰으나 절제사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듯 머리도 들지 않은채 지도만 훑어보고있었다. 이어 이 사실이 알려져 진의 여러 장졸들이 달려와 몹시 죄송스러워하자 별치않은 일이니 놀랄것이 없다면서 하는 말인즉 《밤에 <박쥐>가 날아다니는거야 이 북방진에서 례사로운 일이 아니겠느냐. 내가 왔다는것을 벌써 냄새맡은 모양인데 불나비가 날아든다고 초불도 못 켜면 오랑캐를 어찌 평정하겠느냐? 조용히 물러들가서 진이나 굳건히 지키라.》고 하였다. 장졸들은 그제서야 절제사의 속깊은 뜻을 알고 진을 굳건히 다지며 적을 경계하는데서 일심동체가 되여 어려움도 잊고 낮과 밤을 이어 요새를 철벽같이 구축해나갔다. 한편 자객을 파하였다가 실패한 적들은 이번에는 음식물에 벌레독을 친다는 소문을 요란스레 내돌려 김종서장군으로 하여금 식음을 하는데 신경을 쓰게 하고 나중에는 지쳐서 6진방비에서 스스로 손을 떼고 서울로 돌아가게 하려고 꾀하였다. 놈들의 계책을 꿰뚫어본 장군은 진에서는 끼니마다 해독하는 물로 쌀을 씻고 해독풀로 쌈을 싸먹으며 진한 술로 해정한다는 소문을 크게 내돌리게 하였다. 그리고 자객을 점찍어놓았는데 며칠안으로 덫에 걸려 잡히게 된다는 소문도 함께 퍼치게 하였다. 그러자 진에 다가섰던 자객과 련루자들은 당장 잡힐것 같아 꼬리를 사리게 되였는데 자기 괴수에게 빈손으로 돌아갔다가 칼에 맞아죽을것이 두려워 영영 어데론가 도망치고말았다고 한다. 김종서장군은 외적두목이 호시탐탐 노리며 계책을 꾸밀수록 그에 대처하여 지략을 펼치고 군률을 세우며 경계근무와 순시를 강화해나가도록 하였다. 그는 북방의 찬바람이 불어치는 어느 겨울날 달밤에 말을 달려 6진의 초소마다 순시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이때 강너머 적진에서는 김종서장군의 군대가 쳐들어오는가 하여 공포에 떨며 복닥소동을 부리였다. 장군은 자기를 따라서는 장졸들과 함께 말을 달려 높은 산마루에 올라 사위를 살펴본 다음 말에서 내려 장검을 짚고서서 위국충정의 기개를 시조에 담아 큰소리로 읊었다. 6진의 넓고 긴 구간을 한눈에 살펴보며 적진을 일장 호령으로 제압하듯 시조를 읊어가는 그의 힘찬 목소리는 산발을 뒤흔들며 울려퍼져 경계근무며 순시에 따라나선 장졸들의 사기를 더욱 충천하게 하였다. 김종서장군이 6진을 철통같이 다지며 장졸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던 어느날 고향의 늙으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게 되였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장례를 치르면서도 북방이 걱정되여 마음이 괴롭고 번거로왔다. 당시 조상례법대로 하자면 부모가 세상을 하직하면 3년상을 마칠 때까지 상주노릇을 해야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어머니의 묘를 지키며 3년세월을 움막에서 보낸다면 그간 구축해놓은 6진은 어떻게 될것인가. 가까운 친척에게 맡기고 떠나자 하여도 사람들속에서 비난이 자자할테니 안절부절하며 조정의 지시만을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김종서가 상제가 되여 묘직(묘지기)으로 100일째 되던 날 그에게 다시 6진으로 내려가 방비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는 한달음으로 6진에 돌아와 병력을 크게 늘이고 진과 고을을 방비할 수많은 성들을 쌓아 두만강류역일대를 요새로 꾸리고 국경방비를 더욱 강화해나갔다. 김종서가 도절제사로 온지도 수년세월이 흘렀는지라 그사이에 6진이 새로 개척되고 성벽이 굳건히 다져지게 됨으로써 더는 외적이 로략질하거나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세종은 북방방비에 헌신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그 다음해에 형조판서로 임명하여 한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것으로 하여 세종이 아끼고 기둥같이 믿어온 고관으로서 좌의정으로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북방방비를 위한 6진개척에서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고려사》편찬에도 참가한 김종서장군의 최후는 너무나도 비참하고 억울하였다. 하기에 김종서의 문신출신의 무장다운 용맹과 슬기, 위국충정에 대한 전설과 함께 그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애사도 전해졌다. 그를 기둥같이 믿고 아껴오던 세종이 1450년에 세상을 하직하고 그의 맏아들 문종이 즉위하였으나 그도 2년만에 죽어 그의 아들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였다. 그러자 오래전부터 왕자리를 탐내오던 수양대군(단종의 삼촌)은 1455년에 이르러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으며 김종서와 두 아들을 함께 살해하였다. 리징옥장군에 대한 전설은 김종서장군과 함께 6진개척을 하는 과정에 그 장수다운 위풍이 과시된것으로 하여 생겨났다. 리징옥은 아버지를 일찌기 여의고 형과 함께 홀어머니를 모시고 근근히 살아가던 빈곤출신의 힘장수이다. 그는 집안이 하도 가난하여 어린 나이에도 산에 올라가 나무도 해오고 짐승잡이도 하면서 힘을 키우며 뼈마디가 굵어졌다. 14살이 되던 어느날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큰 산돼지와 맞다들게 되였는데 너무도 바투 마주서다보니 활을 쏠수가 없었다. 그래서 맨손으로 죽기내기를 하여 산돼지의 앞다리를 잡고 내동댕이쳐 산채로 잡아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징옥이가 활도 잘 쏘고 힘도 장사인지라 관가에서 수탈하러 오면 의협심이 강한 아들이 가만있지 않을것이니 그로 하여 신상에 화가 미치지 않을가 늘 걱정하였다고 한다. 한번은 리징옥이 무사차림으로 어깨에 활을 메고 말까지 타고 경상도 김해에 갔던 일이 있었다. 그가 고개길 중턱에 오르니 한 녀인이 앉아 울고있었다. 사연인즉 범이 자기 남편을 물고 산속으로 달아났다는것이였다. 징옥은 급히 말을 몰아 쫓아갔다. 물어온 사람을 어느새 다 먹어버리고 입을 다시던 범은 그를 발견하자 살기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그의 머리우를 날아넘었다. 범이 다시 날아넘으려 할 때 징옥은 무쇠주먹으로 그놈의 낯짝을 면바로 후려치고 말에서 뛰여내려 너부러진 범의 두 앞발을 휘여잡고 진대나무에 내동댕이쳤다. 범은 허리가 꺾어져 더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징옥은 나무로 범의 대가리를 짓쪼아죽인 다음 칼로 배를 가르고 먹히운 사람의 뼈를 골라내여 령길의 녀인에게 싸주었다. 리징옥은 18살 잡히던 해에 나라에서 병장을 뽑는 시험을 친다기에 서울에 올라가 무과시험에 응시하게 되였다. 때마침 당시 훈련대장이였던 김종서가 6진개척을 위하여 군사를 모집하던차였다. 징옥은 시험장에서 뛰여난 무예와 활쏘기, 칼쓰기재주를 보여주었다. 김종서장군은 무예가 뛰여나고 힘장사로 소문이 난 장수감을 고르게 된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세종에게 고하여 징옥을 강계를 지키는 변방장수로 추천하였다. 이리하여 징옥은 강계에 내려와서 진을 꾸리고 인재를 선발하여 변강을 다스리는데 큰 공을 세워 세종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북도절도사로 임명되였다. 리징옥장군은 북방경계를 넘나들며 로략질하는 무리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군사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군률을 강화하여 진을 견고히 다져나감으로써 그 위세가 당당하여 크게 소문나게 되였다. 이를 시기해오던 한 간신이 리징옥이 북방에서 군사를 대대적으로 훈련시켜 앞으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하고있다고 세종에게 고자질하였다. 세종은 리징옥을 자기가 임명해보냈고 북방진을 꾸리는데서 그가 큰 공을 세운것을 잘 아는지라 간신들 모르게 비밀편지를 보내여 마음을 안착시키고 군사에 열중하도록 고무하였다. 그리고 《나라에 큰일이 없으면 부르지 않겠으니 진을 더 튼튼히 다져나가라.》고 신심을 주는 어지도 보내였다. 그는 6진을 맡아보던 김종서장군이 형조판서로 승진하여 서울로 올라가자 그자리를 인계받아 6진의 방비를 더욱 굳게 다져나갔다. 힘장사이고 무술과 지략이 능한 리징옥에 의해 6진의 형세가 날로 강화되여 크게 소문이 나자 변방에서 로략질하며 살던 이방의 젊은 청년들이 귀순하여오는 수가 더욱 늘어나게 되였다. 그는 그 젊은이들중에서 칼을 잘 쓰고 말을 잘 타는 사람들을 뽑아 밤낮으로 훈련시켜 정예군사로 양성하였으며 《용맹》을 믿고 분별없이 날치는자들은 가차없이 쳐버림으로써 강건너의 적군을 꼼짝 못하게 눌러놓았다. 이런 때 조정에서는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김종서를 비롯한 충신들을 살해하거나 축출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철퇴로 무참히 때려죽인것을 그 부하장군인 리징옥이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것 같아 그를 서울에 불러올려다가 내직을 준다고 하고 제거해버릴 작정을 하였다. 이런 형편을 알리 없는 리징옥장군은 조정에서 내려보낸 박호문에게 절도사직책을 인계하고 길주까지 내려왔다가 그것이 어쩐지 불안하고 이상스러워 되돌아섰다. 그것인즉 세종이 그전에 나라에 큰일이 없으면 자기를 부르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어지도 없이, 더구나 김종서대감이 이 일을 알고있을터인데 편지 한장 써보내지 않고 교대할 사람만 보냈으니 더욱 의심스러웠던것이다. 그는 한달음으로 경성에 돌아와 박호문을 잡아 묶어놓고 따져물었다. 그제야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고 김종서를 비롯한 수많은 단종의 지지자들을 살해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린듯 앞이 캄캄하였다. 분개한 그는 박호문을 그자리에서 죽여버리고 군사를 이끌고 당장이라도 서울로 쳐들어가 수양대군과 그 역신들을 처단하고 김종서장군의 원한을 풀어주고싶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다시 하게 되였다. 서울로 올라간대야 김종서장군도 없고 간신들만 기승을 부리겠으니 누구와 손을 잡고 중대사를 성공시킬수 있겠는가. 수양대군이 충신들을 다 제거해버렸고 한명회, 김질, 신숙주, 정린지 같은 인물들을 장악하고있으니 성공할 가망이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그리하여 징옥은 반정부군을 모으려고 북변방 한끝에 있는 종성으로 갔다. 큰 칼을 짚고 종성의 수루에 올라서서 북쪽의 넓은 광야를 바라보던 그의 눈앞에는 아직 개간되지 못한 벌이 한가득 안겨왔다. 그는 로략질하는 외적의 무리들을 징벌하고 새 정사를 펴는것이 어떠할가 하는 생각도 하였다. 이러한 때 종성부 판관으로 있던 정종이란자는 조정의 령을 어기고 박호문을 죽인 리징옥을 죽여 수양대군에게 바치면 치하를 받고 승진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자는 힘센 장사 한사람에게 여러 장졸들을 붙여 리징옥을 잡아죽여 가져오라고 하였다. 리징옥은 먼길을 달려온지라 밤이 되여 깊이 잠들게 되였다. 모든것이 시름을 잊고 잠든 고요한 북방의 밤이였다. 불의에 달려든 힘장사가 깊이 잠든 리징옥을 큰 칼로 내려치자 그는 꿈결인듯 벌떡 일어나며 그 칼을 빼앗아 자객을 쳐넘어뜨리였다. 그러나 징옥장군은 이미 칼에 맞은데다가 문밖에서 연신 화살이 날아들어 끝내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말았다. 이리하여 북방방비에서 김종서장군의 뒤를 이어가던 리징옥장군은 수양대군의 왕권탈취로 인한 살륙행위로 하여 원한을 품은채 북방에서 숨을 거두게 되였다. 무예에 달통하고 위국충정에 불타 세종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귀히 보호해주었으나 외적도 아닌 역적과 간신들에 의하여 피살되였으니 그의 나이가 아깝고 장부의 원한이 사무쳐올라 입에서 입으로 그 사실이 전하여지면서 전설을 낳게 되였다. 리징옥전설은 김종서장군전설과의 련관속에서 그의 장부다운 기개와 위국충정, 비참하나 영원히 지울수 없는 력사의 교훈을 깊이 되새겨보게 하는 애국명장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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