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북국경경비와 남이
남이(1441∼1468년)장군은 압록강연안일대에서 소란을 피우는 외적들을 징벌하고 서북국경경비를 강화하는데서 크게 공헌한 젊은 장군이였다. 그는 청년장군의 패기와 지략, 충정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간신의 모해로 27살에 생을 마치였지만 그가 남긴 무훈과 전설적내용은 오래도록 전해지면서 각종 설화집과 력사책들에 남았다. 남이는 리조 3대왕 태종의 사위인 남휘의 아들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잘하였으며 무예를 닦는데 힘써 검술이 능하였다고 한다. 특히 칼쓰는 재주가 신묘하여 어릴 때부터 무관다운 기질과 재주를 보여주었다. 그는 소낙비가 쏟아붓는 속에서 칼을 휘두르며 칼춤을 추면서 의복을 하나도 적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은행나무밑에서 칼을 휘두를 때면 잎사귀에 칼자리가 두금씩 어김없이 났다고 한다. 무예가 뛰여나고 병서와 병법에 능통하여 어릴 때부터 큰 장수감이라는 소문이 서울장안에 나돌았으며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질이 출중하고 모험을 즐겨하고 의협심도 강하였다. 그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사냥을 하다가 땀을 씻으며 산아래를 굽어보고있을 때였다. 산골짜기에 웬 일인지 두 처녀가 쓰러져있기에 달려가보니 신음소리를 내며 배를 끌어안고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인배인 유교교리로 하여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주춤거리고있었다. 남이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다가가 처녀를 흔들며 《어찌된 일이요? 말해보우.》 하고는 그들을 일으켜세우려 하였다. 그러자 간신히 한 처녀가 말하기를 《저는 아씨의 시녀이고 아씨는 좌의정대감의 딸이온데 저 아래동네 아씨친척집에서 홍시 몇알씩 먹고 떠난것에 이 지경이 되였소이다.》고 하는것이였다. 남이는 어느새 칼로 나무를 베여 웃옷을 벗어 들것을 만들고 거기에 아씨를 태워 권대감의 집으로 급히 향하였다. 때마침 집에는 대감이 있었는지라 총각의 소행을 고맙게 여기며 가문래력을 물어보았더니 리조 3대왕 태종의 외손자벌이였다. 그리하여 자기 딸을 살려준것을 연분으로 하여 남이를 사위로 삼게 되였다. 남이는 10대에 무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여 궁중을 수비하는 무예청의 대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얼마동안은 궁중의 경비를 강화하느라 보초교대도 규률있게 시키고 수비초소들을 돌아보며 경계질서를 정연하게 세우는데 관심하였으나 일과가 단조롭고 무관다운 기질을 써먹을데가 없어 갑갑증이 났다. 혈기왕성한 청년인 그로서는 마치도 자기의 처지가 큰 조롱안에 갇힌 새의 신세나 다름없게 생각되였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가 용맹을 떨치고싶은 마음이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해졌다. 바로 이런 때 압록강너머에 있던 외적들이 강을 넘나들며 로략질하고 민심을 소란시키면서 서북국경지대를 계속 위협해나섰다. 세조는 남이의 청년무장다운 기질과 용맹을 잘 아는지라 그를 우상대장으로 임명하여 정예군사와 함께 출동시켰다. 남이는 무사다운 기질과 용맹을 발휘할 때는 왔다고 기뻐하며 국경으로 달려가 로략질을 일삼는 외래침략자들을 샅샅이 훑어내여 소탕하였다. 그는 조종의 산 백두산에 올라 그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며 대장부의 기개와 나라를 지켜 싸울 충정을 담아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백두산의 돌은 칼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먹여 다 말리리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일러주랴
세조는 남이가 말썽이 많아 걱정거리의 하나였던 서북국경지대의 안전을 보장하고 외적들을 징벌하고 승리를 이룩하자 그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였다. 그리고 장차 큰 군장감이라고 하며 26살의 그를 최고관직인 병조판서로 임명하였다. 남이가 청년장군으로 이름을 날리고 하루아침에 병조판서자리에 오르자 그를 무서워하며 시기하는 간신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임명한 충신이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다. 그러던중 1468년에 왕이 세상을 뜨고 예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였다. 어느날 밤 남이가 궁성의 수직이여서 몇몇 각료들과 함께 바깥을 돌아보며 산책을 하고있을 때였다. 이상하게도 밤하늘에 살별이 나타났는데 그것을 본 한 관리가 불길한 징조가 틀림없다는 말을 내여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였다. 남이는 그들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그 별은 살별이 아니라 낡은것을 쓸어버리고 새것을 펼 길할 징조로 된다고 하였다. 남이장군의 이 말을 들은 류자광이란자는 그 말을 거들어 《낡은 왕조를 뒤집어엎고 새 왕조를 세울 야망》이라고 예종에게 고발하였다. 류자광은 당시 병조의 낮은 관리로 있었다. 남이보다 나이도 우이고 재주도 있었으나 첩의 소생인것으로 하여 출세하지 못하고 남이의 수하에 있으면서 늘 그를 시기질투하여왔다. 그는 남이가 백두산에 올라가 지은 시에서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일러주랴》 한것도 그의 《집권야망》을 말해주는것이라고 덧붙여 력설하였다. 그러면서 그가 《반역음모》를 꾸미는것이 틀림없다고 예종을 구슬렸다. 예종은 간신의 모해에 넘어가 그를 당장 잡아들여 《반역죄》를 실토케 하라고 호령하였다. 그러나 남이는 청렴결백한지라 의금부의 심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약이 오른 예종은 남이를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끌어다 앉히고 자기가 직접 심문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진정을 알면서도 두둔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어는 남이를 제일 잘 알고 그를 병조판서로까지 키워낸 령의정 강순까지도 이것이 간신의 모해라는것을 알면서도 예종이 《반역음모》를 기정사실화하고 성이 독같이 나서 심문하니 자기까지 화를 입을것 같아 입을 다물고있었다. 남이는 분통이 터졌으나 공손하게 《소신이 선왕의 한량없는 은총으로 병조판서에까지 이르렀는데 무엇이 모자라 반역을 하오리까.》고 하였으나 예종은 《반역》은 틀림없는것이고 누구와 《작당》하여 《모의》를 꾸미려 하였는가고 소리치며 다시 캐여물었다. 남이는 어린 왕을 보좌하여 옳바른 판결을 내리게 해야 할 여러 대신들의 얼굴을 훑어가며 보다가 앞상에 《점잖게》 앉아 아무말없이 있는 늙은 령의정 강순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순은 남이의 눈길을 피하여 먼산을 쳐다보는것이였다. 남이는 더는 진실을 밝히고 동정을 얻을 길이 없는지라 머리숙여 아뢰기를 《저기 <점잖게> 앉아있는 령의정 강순대감의 부추김을 받아 <모의>하였음을 솔직히 아뢰옵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대신들은 모두 소스라치며 령의정대감이 그런 《모의》를 하다니 믿기 어렵다며 웅성거렸고 강순은 웃쪽에서 벌떡 일어나 밑단에 내려와 어린 왕앞에 꿇어엎드려 말하기를 《70도 넘은 이 재상이 앞날도 얼마 안남았는데 무엇을 바라서 그런 <작당>을 하였겠소이까?》고 하였다. 남이는 더욱 의분이 치솟아올라 왕에게 《강순의 그 간사한 소리를 그대로 믿고 용서한다면 죄인을 이제 어디서 찾을수 있겠나이까?》 하고 아뢰였다. 그리하여 강순은 형장에 끌려가 모진 고문끝에 종당에는 《반정모의》를 했다고 《자백》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며칠이 지나 두 사형수(남이와 강순)는 나무형틀안에 갇혀 달구지로 사형장에 끌려가게 되였다. 강순은 마주서서 끌려가는 남이에게 《남이 이놈, 나와 무슨 피묻은 원쑤가 돼서 죄없는 이 늙은것을 끌고가려고 하느냐?》고 분통이 터져 말하였다. 그러자 남이는 《대감, 령의정을 떼우고 죽는것이 그리도 아쉽소? 내게 아무런 죄도 없는것을 잘 알면서도 령의정이란게 말 한마디 없으니 량심이란게 어데 있소? 당신같은 등신이 령의정으로 도사리고있으니 조정안에 개싸움이 그칠새 없고 살륙이 멎을 날이 없소. 그래서 령감을 데리고가는것이니 그리 아오. 나는 오늘 죽어도 멀지 않은 후날에 무죄라는것이 밝혀지겠지만 령감은 비록 무죄라는것이 밝혀질지언정 비겁하고 무능하고 량심없는 인간추물이라는 평은 가셔지지 않을것이요.》 하고는 속시원한듯 크게 웃었다. 때는 1468년, 남이장군의 나이는 27살이였다. 비록 간신의 모해에 걸려 억울하게도 27살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공훈과 용장의 기상은 전설로 남아 세세년년 전하여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