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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영
최영은 고려 말기에 활동한 무인거장으로서 일생동안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고 나라의 안정을 지켜내는데서 큰 공훈을 세운 애국명장이다. 그의 생애사와 관련된 전설적인 내용은 《고려사》 권113 렬전26에 실려있으며 각종 명인전, 야사집, 《용재총화》에도 일부 내용이 전해지고있다. 최영은 개경에서 사헌부 문관벼슬을 한 최원직의 아들로 1316년에 태여났다. 고려말에 이르러 빈번히 외적이 침노할 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무관이 되지 못한것을 한탄하였으며 아들을 어떻게 하나 지략과 용맹을 갖춘 비범한 무관으로 키우려고 마음먹었다. 때마침 최영이 어려서부터 몸도 좋고 튼튼하여 군사놀이도 즐겨하므로 무관재목이 됨직하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최영은 아버지의 엄격한 훈계밑에 소년시절부터 송악산의 산마루에 치달아오르고 골짜기들을 누비며 장수적인 기질과 힘을 키웠다. 그는 어떤 때는 하루종일 산에 올라가 무술을 닦으며 말타기와 활쏘기, 칼쓰기와 창찌르기에 시간을 보내다가 때식을 번진적도 수없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걱정하여 산으로 떠나보낼 때면 먼저 먹을것부터 싸서 허리에 매여주군 하였다. 그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무장이 되겠다는 자식이 활과 칼을 먼저 차야지 먹을것부터 차면 되는가.》고 엄하게 나무람하였다고 한다. 최영은 무술을 익히는 과정에 건장한 체력을 갖추게 되였으며 성격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증오하였다. 특히 사리사욕을 채우는자들과 유흥만을 즐기는자들을 미워하였으며 대바른 소리를 거침없이 하므로 그를 무서워하는자들이 많았다. 무신관리들은 그를 두고 훌륭한 장수감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최영은 군사에 첫발을 들여놓은 청년기로부터 예순을 넘긴 로년기까지 손에서 칼을 놓은적이 없었으며 외래침략이 대두할 때마다 전쟁마당에 용약 뛰여들어 선봉에서 칼을 휘두르며 군사들을 고무함으로써 매번 승리를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밖으로는 침략해오는 외적들을 용맹무쌍한 위세와 지략으로 물리치고 승세를 떨치였으며 안으로는 반역무리들의 흉계와 반란을 일격에 짓부셔버림으로써 나라의 안전을 지켜갔다. 하기에 임금과 함께 문무백관들 그리고 만백성이 최영장군을 두고 고려의 기둥이라고 일러왔으며 한번도 전쟁에서 패한적이 없는 백전로장이라고 전설화하였던것이다. 최영은 젊은 시절에 양광도 도순무사의 휘하에 있을 때 금강하류에 침입하여 소란을 피우던 왜적을 일격에 쳐부심으로써 적들이 1 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게 하였다. 그는 그후에도 남쪽바다가로 빈번히 기여들어오는 왜적을 지켜섰다가는 쏜살같이 달려가 퇴로를 차단하여 궁지에 빠지게 한 다음 장검을 휘둘러 살아남은 놈들마저 도망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용감무쌍한 지략과 무공을 세운것으로 하여 그는 청년장군으로 이름을 날리였다. 그는 1364년 고려에 침노한 외적들을 소탕해버림으로써 외적들이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동북부의 지역을 되찾았다. 그는 군사에 발을 들여놓은 때로부터 40대의 군장으로 승진하여온 전기간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능숙한 전법과 용병술을 발휘함으로써 1373년 10월에는 6도도순찰사로 임명되였다. 그는 륙군과 함께 수군건설에도 힘써 짧은 기간내에 수백척의 싸움배를 무어 수군의 위세를 강화하여나갔다. 그리하여 다음해인 1374년에는 2만 5 000여명의 군사와 300여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탐라(제주도)에 원정하여 적들을 완전히 격멸소탕하였다. 1370년대에 들어서면서 왜구의 침입이 전례없이 잦아져 우리 나라 내륙깊이에까지 큰 규모의 무력으로 왜적들이 들어오게 되였다. 이렇듯 국난을 겪게 되자 임금은 문무백관들을 모아놓고 침울한 낯빛으로 《요즈음에 왜적들이 달려들어 바다가고을들을 소란케 하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고는 무관들쪽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장내에는 침묵만 흐를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이때 최영이 임금앞으로 나가 꿇어앉으며 아뢰였다. 《신이 비록 늙고 재주는 없으나 군사를 이끌고나가 왜적을 물리치겠소이다. 신에게 출병을 허락해주옵소서.》 왕은 흰 수염을 드리우고 어지를 기다리는 그가 너무도 대견하여 《경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기특하나 이제 늙은 몸으로 사선을 헤치며 풍찬로숙할수 있겠는가? 하물며 왜적의 기세가 강성하여 조련히 깨뜨릴수 없을듯 한데…》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최영은 다시 머리를 들어 왕의 안색을 살펴보며 《보잘것없는 왜적이 이처럼 방자하니 이제 왜놈들을 눌러놓지 않으면 후일에는 더 큰 걱정거리가 될것이옵니다. 신이 비록 몸은 늙었으나 뜻은 꺾이지 않아 나라를 편히 하고 백성들을 구원할 일념뿐이오니 곧 군사를 이끌고나가 싸우게 하여주옵소서.》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최영장군의 간청이 너무도 고맙고 충성이 지극하여 결국 출전을 승낙하였다. 그날밤으로 임금을 하직하고 장수들과 군졸들을 이끌고 홍산으로 진출한 최영은 수하장수들을 불러 요충지를 차지하게 하고 전략을 토론한 다음 신새벽에 적진을 기습하게 하였다. 최영이 《장수가 주저하고 비겁하면 군사들도 비겁해지거늘 그대들은 나를 따르라!》고 소리치며 내달으니 군세가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그리하여 왜놈들은 잠간사이에 무리죽음을 당하고말았다. 그가 도망치는 적장수와 마지막잔병들까지 뒤쫓아가서 《이놈들아, 최영의 칼을 받으라!》고 호통치며 내달으니 부두가에 닿았던 왜놈들도 질겁하여 배에 오르지 못하고 바다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죽어버렸다. 이때부터 왜구의 병장들은 최영장군의 호령소리만 들어도 중풍을 만난것처럼 벌벌 떨며 줄행랑을 놓았다고 한다. 홍산에 기여든 왜적을 완전히 징벌하고 돌아오는 최영장군과 그 휘하의 군사들을 맞으러 교외에까지 나온 임금은 그 위훈을 높이 칭찬하였고 최영장군을 문하시중으로 봉한다는 어지를 내리였다. 이때 최영은 황송하기 그지없사오나 시중으로 되면 전장으로 나갈수 없으니 왜적을 다 평정한 다음에 어지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그의 진정을 알면서도 《과인은 그대를 나라의 기둥으로 아는터인지라 시중벼슬도 사양하니 뉘와 더불어 정사를 의논하리오.》라고 하였다. 그는 어명을 어기는것이 죄스러웠으나 용단을 내리고 재차 자기의 진정을 담아 간청하였다. 《전하, 바라옵건대 신에게서 검을 빼앗지 마시오이다. 왜적을 쓸어버리고 나라와 백성들을 구원하게 하여주옵소서!》 하고는 임금앞에 머리를 숙이며 허리를 굽혔다. 그때 그는 60을 넘긴 고령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왜구가 계속 침노하는 형세에서 손에서 칼을 놓을수 없다고 생각하였기때문에 그처럼 애국충정에 넘쳐 상주하였던것이다. 하기에 1378년 왜적들이 고려수도가 지척에 있는 해풍(개풍군)에 달려들었을 때 그는 늙은 몸이였지만 선두에서 칼을 빼여들고 말을 달리며 《모두들 보아라. 최영이 예 있다. 군사들, 왜적의 무도한 칼날에 부모형제들을 내맡기지 않으려거든 적을 치며 내달으라. 나의 뒤를 따라 왜적들을 반원으로 에워싸고 무찌르라!》고 소리쳤다. 최영의 호령소리와 함께 수만 장졸들의 칼이 번뜩이며 도망치려는 왜적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히며 두들겨댐으로써 왜적은 일망타진되였다. 최영은 군사에 나선 청년기로부터 전쟁터에 나서기 어려운 고령기까지 손에서 칼을 놓지 않고 수많은 적과 수십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도 언제나 병장들의 앞장에서 달린 고려의 충신이며 수많은 싸움에서 적을 공포에 떨게 한 백승의 무장호걸이였다. 그는 왜적과 대치하여 싸울 때 적의 화살이 날아와 입술에 꽂혔으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겨누었던 적을 활을 당겨 쏘아눕힌 다음에야 웃으며 서서히 뽑았다고 한다. 한때 최영장군이 늙은 몸으로 매번 선두에서 군사를 이끌고 달리다보니 병을 만나게 되여 휘하장군들이 걱정하며 약을 달여 권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밖에 나가매 어찌 병을 념려하랴. 내 이미 늙은지라 생사가 명에 있거니 어찌 약을 먹어야 반드시 생을 구할수 있다 하랴.》 하고는 일어나 말을 타고 병영을 한바퀴 돌고 오면서 자기의 충의를 다지는 시조를 류창하게 읊었다고 한다. 최영장군은 한생을 애국명장으로 나라에 충성 다하였을뿐아니라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권세를 부릴줄 몰랐으며 사리사욕을 미워하고 청렴결백하게 살아왔다. 전설에 의하면 최영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그에게 유언하기를 《금을 보고도 돌과 같이 생각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일생동안 그 유언을 잊지 않고 재물을 탐내지 않고 보통사람이나 다름없이 검박하게 생활하였다. 하기에 《놀면서 잘 먹자면 굶는것이 상반찬이다.》는 격언까지 최영장군의 집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고려 말기에 조정의 문무대관들속에서는 주로 쉬는날을 계기로 하여 순번으로 돌아가며 자기 집에 청하여놓고 바둑이나 장기, 시짓기 등 놀이를 하면서 잔치를 차리는 관례가 있어 아침에 놀이가 시작되면 점심때가 되기 바쁘게 갖가지 음식을 차려들여와 먹으면서 흥겹게 놀군 하였다. 그런데 최영장군의 집에 와서는 정오가 되고 퍼그나 시간이 흘렀어도 주방에서 상을 차려들여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들 아마 특별히 색다른 음식을 많이 차리기에 시간이 걸리는거라고 속짐작을 하면서 놀이를 계속하고있었다. 시간도 너무나 흘러 초기증이 날무렵에야 상을 차려들여 왔는데 별다른것은 없고 보통때와 같이 시래기국에 콩나물, 된장찌개와 산채 몇가지가 놓여있었을뿐이였다. 그러나 모두들 수저를 빨리 놀리여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후에 한 재상이 롱삼아 친구들에게 감상이 어떻던가고 물으니 《최영의 집에서 제일 맛있게 먹었다. 된장지지개에 채소 몇가지 해놓았지만 신선한 어육보다 좋았다.》고 하여 그후로부터 앞에서 본 그런 격언이 생겨났다고 한다. 최영장군은 군사를 이끄는 높은 벼슬의 장군이나 무관들이 향락을 추구하고 안일해이해지면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할뿐더러 국권도 지켜낼수 없다면서 그런자들을 엄벌에 처하여 교훈을 찾게 하여야 한다고 임금에게 늘 상소하였다. 최영은 한생을 고려군의 장군으로, 외적을 치는 싸움에서 백전로장으로 이름을 날리였고 고려 말기에는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나라의 정사와 위기를 한몸으로 막아선 고려의 충신장군이였다. 이런 충신에게 있어서 죽어서도 풀길 없는 과오, 분통이 터질 결점이 있었다면 료동정벌과 관련하여 8도도통사로서 직접 좌우군을 따라가며 지휘하지 못하고 우왕과 함께 평양에 와있으면서 먼거리에서 련락을 한것이라고 볼수 있다. 뿐만아니라 미리전부터 리성계의 반역흉심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에게 원정군을 떼여맡긴것이 큰 실책이였다. 료동원정은 고려의 안전을 계속 위협하는 침략세력의 야욕을 꺾어버리고 고구려의 땅을 회복하기 위한 의로운 중대사였다. 최영은 국왕과 조정의 제신들과 토론한 끝에 1388년에 50 000여명의 원정군을 편성하고 자신이 직접 8도도통사의 중책을 맡고 좌군도통사를 조민수로, 우군도통사를 리성계로 하여 출전하게 되였다. 그런데 최영은 나이가 70살을 넘어선 백전로장으로서 직접 따라서지 못하고 우왕과 함께 서경까지 와서 거기에 머물러있으면서 지휘하였다. 그런데 원래부터 료동원정을 달가와하지 않던 리성계는 압록강가 위화도에서 배신적인 모의를 하고 군대를 돌려세웠으니 이것이 리성계의 이른바 위화도회군이다. 리성계는 료동땅을 회복할 대신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개경으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최영은 우왕과 함께 왕궁으로 돌아와 방어군을 조직하였으나 군사도 얼마 없는데다가 때가 이미 늦어 끝내는 왕궁이 포위되여 반역신의 손에 들게 되였다. 최영은 한생동안 크고작은 수많은 전투를 하면서도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백전로장이였으며 청렴결백하고 용맹한 충신호걸이였다. 그런데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되였으니 고려왕조를 지켜내지 못한 충신의 돌이킬수 없는 후회와 원한이 땅속에 묻혀선들 사그라질수 있었으랴. 리성계는 왕궁에 달려들어 우왕을 내쫓고 9살밖에 안되는 우왕의 아들 창왕을 앉히고는 이어 반대파세력을 일시에 내쫓거나 처형하였다. 최영도 《반역자》의 루명을 쓰고 처형당하였는데 최영이 죽는 날 개경사람들은 가게문을 닫았고 시외의 먼곳에서까지 그 비보를 듣고 달려와 눈물을 흘렸으며 말에서 내려 조의를 표했다고 한다. 최영은 림종에 앞서 통탄하며 유언하기를 《나에게 만일 사심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생기고 사심이 없었으면 풀이 나지 않을것이다.》고 하였다. 그후 과연 그의 묘에는 풀이 돋아나지 않고 흙만 붉어서 사람들은 《적분》이라고 일러오면서 최영의 무장충신다운 한생을 회억하군 하였다고 한다. 최영장군전설은 고려말 애국로장에 대한 인물전설로서 그의 지덕과 인품, 절개를 돌이켜보게 하는 유산적의의를 가지는 전설의 하나이다. 또한 전설을 통하여 고려 말기의 정세와 전쟁형편, 국력 등 민족력사의 일단을 가늠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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