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감 찬

 

원래 문신출신인 강감찬이 장군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것은 고려군의 상원수로 임명되여 20만 8 0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기묘한 전술과 대담무쌍한 진공, 유인, 기습전법으로 외적들을 련속 타격하고 포위하여 몰살시킴으로써 큰 승리를 이룩한 그의 특출한 군공과 관련되여있다. 그때 국왕은 직접 영파역까지 나가 전장에서 돌아오는 그를 맞아들이였으며 연회를 차리고 금으로 만든 여덟가지 꽃을 머리에 꽂아주고 시를 지어 위로해주었다.

그는 그후 늙어 은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치 않았다. 왕은 안석(방안에 앉았을 때 몸을 기대는 크고 두툼한 받치개)과 지팽이를 하사하고 사흘에 한번씩 입궐하게 하였으며 안국공신칭호를 주었을뿐아니라 1031년에는 문하시중의 최고벼슬을 주었다. 강감찬은 문하시중으로 있다가 1031년에 고령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갖가지 전설과 일화들을 남기였다. 그의 간략된 래력은 《고려사》에 전기로 기사화되였으며 그후의 명인집과 야사집, 《보한집》, 《용재총화》들에 널리 소개되여왔다.

강감찬의 아버지는 고려건국시 특공을 세운 벽상공신이였고 어머니는 사리에 밝은 현숙한 녀인이였다. 948년에 출생한 강감찬(아명-은천)은 어릴 때부터 청렴하였을뿐아니라 검박하였다.

몸집도 작은데다가 애기때 심한 마마병을 앓다보니 얼굴에 곰보자국이 많이 있은것으로 하여 동네아이들까지 《곰보, 곰보》 하며 놀려댔다. 그래 그가 때려주면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그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어느날 된욕과 놀림을 받은 은천이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어머니, 나 죽고싶어요. 나만 보면 밉다고 욕지거리를 하니 분해서 어찌 살겠어요.》 하고 하소연하였다.

어머니는 그를 달래면서 《은천아, 울지 말아. 너야 사내가 아니냐. 얼굴 못난것으로 억울하고 분하게 생각하는것은 어리석은것이란다. 사내로서 도량이 좁고 학식이 적은것이 못난것이지 얼굴타발만 해서는 절대로 큰사람이 못되는 법이다. 그러니 너는 조금도 그런 일엔 마음을 쓰지 말아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어릴 때부터 남다른 의지와 결심을 품고 학식을 닦고 무예를 익히니 문무의 자질이 월등하여 983년에 그는 갑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였다.

그는 비범한 재능과 자질로 하여 계속 승진하였다.

강감찬이 해주목사로 부임되였을 때에는 《부용당》의 못에서 성가스럽게 울어대던 개구리들을 글 한장으로 벙어리로 만들었다는 신기한 전설이 생겨났다.

한때(현종때) 한양을 둘러싸고있는 여러 산들에서 자주 범이 나타나 집짐승을 물어가고 지어 사람까지 해치여 왕궁에서도 큰 우환거리로 되였다고 한다.

왕은 강감찬의 신묘함과 무장다운 비범성을 잘 알고있는지라 그를 한양판관으로 임명하고 소란을 피우는 호랑이의 피해도 막으라고 전교를 내리였다.

강감찬은 호랑이가 사람많은 벌판에까지 나타나 소란을 피우는것을 보면 틀림없이 변신술을 쓰는 요물일것이라고 짐작하고 산세와 지맥을 살펴본 다음 장정군졸을 불러 이르기를 《저기 인왕산중턱에 올라가면 늙은 승이 있으려니 이 편지를 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 늙은 승이 강감찬앞에 끌려온듯 풀썩 주저앉았다.

강감찬이 대번에 눈총을 쏘며 큰소리로 《네놈이 아직도 제 본색을 드러내지 않을테냐?》 하고 칼을 뽑아들듯 하니 늙은 승은 큰 얼룩범으로 변신해버렸다.

강감찬은 《네 산중의 왕이기로서니 승의 탈을 쓰고 범무리를 이끌고 해만 끼치니 하늘의 엄벌이 무섭지 않는가?》 하고는 이달 보름날 야삼경에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서 범무리들을 거느리고 떠나도록 하라고 엄명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용재총화》에 적혀있는 강감찬이 범을 쫓았다는 일화이다.

물론 한때 한양근방에 범이 나타나 소란을 피운 일도 있지만 호랑이의 우두머리가 늙은 승으로 변신하여 강감찬장군앞에 나타났다거나 그의 엄명에 자기 무리를 이끌고 멀리 북쪽산중으로 사라졌다고 하는것 등은 다 환상적으로  꾸며진 이야기로서 그의 남다른 기질을 과장하여 가공한 전설이라고 볼수 있다.

최자의 《보한집》에서는 강감찬에 대한 항간전설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있다.

일찌기 어느 나라의 한 사신이 강감찬의 출생지인 시흥군으로 들어선적이 있었는데 그의 눈앞에서 갑자기 큰 별이 하나 떨어져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 하도 신기하여 아전을 보내여 알아보니 마침 그 집 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이였다는것이다. 그후 세월이 흘러 이 사신이 고려에 다시 오게 되였는데 강감찬이 재상이 되였다는 소리를 듣고 대궐에 들어와 그를 찾아보고 하는 말인즉 《내 일찍부터 문곡성(별이름)이 오래동안 나타나지 않아 지금 어데 가있는지 몰랐더니 바로 공이십니다.》 하고는 뜰아래로 내려가 절을 하는것이였다.

강감찬은 외국사신이 임금을 먼저 뵈옵지 않고 자기부터 찾으니 몸둘바를 몰라하였다고 한다.

1018년 12월 외적들이 침입하였을 때 강감찬장군은 상원수로 있으면서 고려군을 기묘한 전법으로 지휘하여 적병을 대혼란에 빠뜨리게 한 다음 매복기습전을 벌려 심대한 타격을 주고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강감찬장군은 외적들의 침공에 대처하여 20만 8 000여명의 고려군을 녕주(안주)로부터 흥화진(의주 동남쪽)까지 늘어세워 진을 치게 하고 기병 1만 2 000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켜놓았다.

그리고 굵은 바줄로 꿰맨 소가죽으로 강물을 미리막아놓았다가 적이 얕은 물인줄 알고 건늘 때 일시에 터쳐놓음으로써 수많은 적병을 수장시키고 살아남은 놈들은 복병으로 쳐없앴다.

한편 개경으로 몰려드는 적군은 1만명의 병력을 파하여 지름길로 쏜살같이 달려가 개경방위군과 함께 막아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청야전술을 써서 개경주변 100리안팎의 인민들을 성안에 옮겨앉게 하고 먹을것을 남겨놓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적군은 련전 패하는데다가 군량마저 떨어져 굶주리고 지치여 쓰러지는자들이 점점 많아지는지라 할수없이 패배의 퇴군길에 오르게 되였다.

강감찬장군은 적의 저락된 군세를 손금보듯 살피고 퇴군하는 적들을 기병들로 계속 추격하여 구주성부근으로 몰아오게 하였다. 그는 지형적으로 유리한 구주성부근 퇴로를 차단하여 고려군을 매복시켜놓고 사나운 눈바람을 리용하여 지쳐서 대항조차 하지 못하는 적들을 포위섬멸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멸소탕하고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하기에 왕과 문무백관, 전체 개경인민들은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그를 승전대장군으로 맞이하였으며 왕은 나라를 지켜낸 강감찬장군에게 수태사 겸 중서령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고려 현종은 강감찬장군의 공훈을 찬양하는 시까지 써서 그를 위로하였다.

이처럼 강감찬장군은 지략과 전법이 남달리 출중한 명장이였고 문하시중에까지 이른 명망높은 재상이였으며 고려의 애국충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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