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규와 김숙흥
양규와 김숙흥은 적은 병력으로 고려에 침입한 수십만 적군과 맞서 능란한 전법과 용병술, 용감무쌍한 위세로 적군을 퇴군시킨 전설적인 용장으로 공신각에 그 화상이 남겨진 명장들이다. 양규장군은 1010년에 외적이 40만의 방대한 병력으로 내륙깊이 침입하였을 때 도순검사(방면군 지휘관)로서 불리한 형세를 역전시켜 고려군의 승리를 이룩하게 한 애국명장이다. 그는 적들에 대한 1차타격후에 통주일대에 흩어져있던 군사 1 000여명과 자기의 군사를 합쳐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그리고는 적정을 면밀히 탐지한데 기초하여 기묘한 야음기습전을 불의에 단행함으로써 거들먹거리던 적들을 일시에 혼란에 몰아넣었다. 양규장군은 고려군의 충천한 기세를 늦춤없이 불과 10여일동안에 7차례의 큰 전투를 벌려 적병 수만명을 무찌르고 적진에 억류되였던 3만여명의 인민들을 구원하였으며 각종 무기와 말, 수많은 전투기재들을 로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구주별장 김숙흥은 중랑장과 함께 적들을 매복습격하여 1만여명을 살상하였다. 양규장군도 때를 같이하여 무로대에 운집되여있는 적군을 불의에 습격하여 2 000여명을 살상하고 랍치되였던 백성 3 000여명을 구원하였다. 그리고 또 리수의 적을 공격하여 도주하는 적병 2 500여명을 살상하였으며 3일후에는 여리참에서 적병 1 000여명을 죽이고 랍치되였던 백성들을 구원하였다. 그후 어느날 하루종일 진행된 전투에서 화살이 다 떨어져 나중에는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는데 이때 그의 몸에는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박혀있었다고 한다. 적들은 두 장군과 맞다들어 10여차의 싸움을 하였으나 그때마다 참패를 당하고 수많은 병력을 잃은데다가 도망치는자들이 많아지고 더는 싸울수 없게 되자 패배의 쓴맛을 보고 끝내 쫓기여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리하여 고려는 용맹한 무장 양규장군과 김숙흥의 영웅적인 전공과 무비의 희생성으로 하여 승리를 이룩하였고 고려군의 위세를 높이 떨치게 되였다. 국왕은 양규장군의 희생을 슬퍼하며 그에게 공부상서벼슬을 추증(죽은 뒤에 벼슬을 주는것)하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작성하여 내려보냈다. 《병졸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은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쑤를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도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곳마다 만인이 다투어 도망쳤고 활을 당길 때마다 적병들이 모조리 투항했도다. 이로써 성과 진이 보존되였고 사기 또한 드높았다.》 이리하여 양규장군은 고려의 영용무쌍한 명장으로 이웃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지고 전설화되게 되였다. 구주의 별장 김숙흥도 양규장군의 승세에 맞추어 자기 수하의 병장들을 이끌고 기세충천하게 검을 휘두르고 화살을 비발같이 날려 적군을 수세에 몰아넣은 다음 적진을 날래게 기습공격하여 단숨에 제압, 격멸하였다. 또한 수많은 병기와 군마를 로획하였을뿐아니라 도망치는 적들을 련속 추격하여 양규장군의 포위진에 몰아넣었다. 이리하여 적군으로 하여금 더는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끝내 퇴군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김숙흥도 가렬처절한 이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김숙흥의 희생을 애석하게 여긴 국왕은 그에게 장군칭호를 추증하고 그의 충의를 찬양하는 교서를 내리였다. 적군이 싸움에서 패배한 후 두 장군의 무비의 용감성과 위훈에 대한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전하여지게 되였다. 1020년에 양규장군과 김숙흥장군에게 명예직과 함께 벽상공신칭호가 내려져 그들의 초상이 공신각에 걸려지게 되였다. 이리하여 두 장군의 무공에 대한 전설이 전하여지게 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