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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희
서희는 수십만의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높은 지략과 외교활동, 능란한 용병술과 군세로 적을 굴복시키고 승리를 가져온 이름난 장군이다. 서희장군의 위훈과 전투사적은 《고려사》 권94 렬전7에 력사기록적으로 서사화되였으며 그후 여러 명인집들에 실려 사화전설적으로 전하여온다. 서희장군의 할아버지인 서신일은 고려건국초기에 개성의 한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80살이 되도록 자식을 보지 못하였다. 늙은 부부는 외롭게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밭에서 일하다가 선불맞은 사슴이 자기앞으로 정신없이 달려오는것을 보고 사냥군의 눈을 피하여 콩단속에 숨겨주었다. 이윽고 뒤쫓아온 사냥군이 자꾸 따져묻는 바람에 그는 별수없이 사슴을 내보였다. 그러자 사슴은 발발 떨며 로인의 품속으로 기여드는것이였다. 그 모양이 너무도 애처로워 로인은 사냥군에게 값은 후하게 치를테니 사슴을 자기에게 팔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냥군은 밑지는 장사가 아닌지라 대번에 승낙하였다. 할아버지는 사슴을 안고 집에 돌아와 정성껏 간호하며 치료해주었다. 자식이 없는 집안이라 잠재울 때는 이불까지 덮어주며 귀여워하였다. 늙은 마누라도 비록 산짐승이기는 하나 정이 붙으니 집에서 기를수만 있다면 한이 없을것 같았다. 수십여일 지나 사슴의 상처도 완치된지라 늙은 부부는 산에 올라가 자기 살붙이를 떠나보내듯 사슴을 놓아주면서 《다시는 사냥군에게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하여 살아가거라.》 하고는 눈물이 글썽하여 뒤돌아보며 뛰여가는 사슴을 멀리까지 바래워주었다. 이 일로 하여 그후 전설 《은혜갚은 사슴》에 윤색된것처럼 《산신》이 내린 복을 받았는지 그는 80고령에 아들을 보게 되였다. 아들 서필과 손자 서희는 할아버지처럼 물욕을 모르고 고향산천과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지극하고 은혜에 보답할줄 아는 청렴결백한 기품을 지녔기에 모두가 충신재상과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였다. 이로 하여 민간에 갖가지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지게 되였다. 서희장군의 아버지인 서필이 내의정(재상)벼슬을 할 때 임금(광종)이 몇사람의 충신에게 금술잔을 하사한 일이 있었다. 서필은 너무도 감개무량하고 마음을 안정시킬수 없는지라 임금앞에 무릎을 꿇어 아뢰이기를 《재상자리에 오른 은총을 받은것만도 황송하기 그지없사온데 궁중에서 쓰는 기물과 항간에서 쓰는 기물에는 등급의 차이가 있는것이 세상의 리치라 신하가 금기물을 쓰면 임금께선 장차 어떤 기물을 쓰셔야 하오리까?》 하고는 금술잔을 도로 바치였다. 그러자 왕은 《경이 보물을 보물로 여기지 않으니 참으로 갸륵하도다. 과인은 경의 그 말을 귀중한 보물로 여기리라.》고 하였다. 또한 서필의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과 대바른 품성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하여오고있다. 한때 고려에서는 귀화인들을 관리로 등용하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귀화해오게 되였다. 그래서 왕은 국내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귀화인들에게 주도록 조치를 취한적이 있었다. 왕의 이러한 지나친 귀화인등용정책은 국내의 큰 반발에 부딪쳤다. 왕의 이 조치를 부당하게 생각한 서필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다 재상이 되였은즉 어떻게 자손들까지 대대로 재상만이 쓰고사는 큰집을 그대로 쓰고살기를 바라 겠소이까?》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죽은 뒤에 집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미리 바치는것이 현명한 처사일것 같다고 하는것이였다. 왕은 분노했지만 나중에는 서필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 다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 서희장군은 재상을 지낸 명문거족의 가문에서 났지만 엄정하고 사리에 밝으며 청렴한 가풍을 이어받아 어릴 때부터 꾸준하고 성실하게 학문과 무예를 익혀나갔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성질이 대바르고 성실한데다가 시국판별도 잘하니 과시 재상의 가풍을 이어 나라의 기둥감이 됨직하다고들 하였다. 그는 96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광평원외랑, 내의시랑을 거쳐 외적의 침입시에는 중군사로 임명되여 방비를 빈틈없이 강화하였다. 적장이 수십만대군을 끌고들어와 위세를 뽐내며 협박하기를 《너희 나라 국왕과 신하들은 빨리 우리 군영앞에 와서 항복하라.》고 하였다.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국난을 놓고 의논하였는데 어떤자는 《왕은 서울로 돌아가시고 대신 한명이 군사를 거느리고가서 투항을 청하자.》고 하였고 혹자는 서경이북땅을 적에게 넘겨주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겁에 질린 대신들의 사대주의적인 태도로 보아 필시 땅을 떼여주지 않을수 없겠다고 생각한 성종은 서경(지금의 평양)창고의 쌀을 백성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적지 않은 쌀이 남아있었으므로 적들의 군용으로 될것이 념려되여 나머지는 대동강에 버리라고 하였다. 이때 서희장군은 적의 허세에 위압되여 쌀까지 버리려 하는것이 너무도 가슴아파 다음과 같이 상주(임금에게 의견을 제기하는것)하였다. 《식량이 넉넉하면 능히 성을 지킬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할수도 있사옵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이 강하고 약한데만 달린것이 아닌것만큼 적의 약점을 잘 알고 행동하면 승리할수 있는것이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갑자기 쌀을 버리려고 하오이까? 그것은 또한 하늘의 뜻에도 부합되지 않는것이라고 생각되오이다.》고 하니 성종도 그의 의견을 옳게 여기고 그만두게 하였다 한다. 서희장군은 적들에게 굴복하여 옛 고구려의 땅을 떼여주자고 하는데 대해서도 분노에 떨며 《적들의 의도는 두개의 성을 탈취하려는데 불과한것이고 우리의 군세가 두려워 미리 항복하라고 위협하는것이니 한번 판가리싸움을 한 다음 외교전략을 세워 담판을 하는것이 어떠하오리까?》라고 아뢰였다. 이어 그는 태조가 고려를 창건한 후 대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보위하려는 충신이 없어 국토를 떼여 경솔하게 적에게 내주려고 하니 이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며 만대의 치욕이라고 하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왕도 충신명장의 진정어린 말에 감동하여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였다. 한편 적장은 고려군에게 항복할것을 권한지도 퍼그나 되였지만 아무런 회답도 없는지라 고려의 안융진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이 맞받아 공세를 들이대는통에 감히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또 사신을 보내여 항복할것을 독촉해나섰다. 성종은 강화체결을 위하여 화통사 장영을 보내였다. 그러나 적들은 명망있는 대신, 장군을 보내라며 상대도 하지 않고 그를 돌려보내였다. 성종은 여러 대신, 장군들을 모이게 하고 《누가 적진으로 가서 언변으로써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워보겠는가?》 하고 물었으나 선뜻 응답해나서는이가 없었다. 이때 장내의 저락된 사기를 살펴보고있던 서희장군이 정중히 일어나서 《제 비록 불민하오나 감히 왕명을 받들어 중임을 감당해볼가 하나이다.》 하고 자원하여 그가 적군영으로 가게 되였다. 서희장군이 국서를 가지고 적진으로 가서 통역을 시켜 회견하는 절차를 문의하자 적장이 말하기를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나에게 먼저 뜰에서 절하여야 한다.》고 요구해나섰다. 그러자 서희장군이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는 뜰에서 절하는것이 례법에 맞는 일이나 량국의 대신들끼리 만나는 좌석에서 어찌 그럴수 있겠는가?》 하고 반박하여나서며 숙소에 돌아와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적장은 그의 당당한 거동을 살펴보고나서 고려명장의 인품이 비범함을 인정하고 마침내 대등하게 대면하는 례식과 절차를 밟지 않으면 안되였다. 서희장군의 이러한 담력과 주동적이며 능숙한 외교활동에 의하여 적들은 담판에서 완전히 피동에 빠지게 되였다. 고려군민의 강력한 항전에 맞설수 없었고 담판에서 궁지에 빠진 적들은 마침내 물러가지 않을수 없었다. 이렇게 되여 서희장군의 능란한 외교전술적수완과 고려의 위세에 대한 소문은 문무백관들에게는 물론 민간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전설처럼 그 무공이 전해지게 되였다. 그후 평장사로 된 서희장군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이남의 여러 지역에 성쌓는 일을 지휘하여 서북지방의 방비를 강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성종은 나라의 군세를 강화하기 위해 아무런 사심도 없이 애쓰는 서희장군을 충신으로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그의 검소하고 성실한 성품에 감동한 나머지 그를 허물없이 대해주었다고 한다. 한때 서희장군이 왕을 따라 해주로 간 일이 있었는데 그가 심회를 나누려 하였던지 서희장군이 류숙하는 천막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장군은 황송하여 《여기는 존귀하신 상감께서 들어오실만 한 장소가 못되옵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왕은 허물할것 있느냐며 어서 술이나 가져오라고 하였다. 장군이 난처하여 《신에게 있는 술은 상감께서 드실만 한 술이 못되옵니다.》고 하자 왕은 걱정말라고, 자네와 같이 이야기나 나누자고 드는 술인데 거기에도 등급의 차이가 있겠는가고 하며 즐겁게 마시고 돌아갔다고 한다. 또한 한때 한 관리가 당시 정사에 관한 일곱가지 문제에 대하여 론평한 글을 조정에 제출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왕의 뜻에 거슬린바가 있어 재상들은 감히 직분에 어울리지 않게 정사를 론하였다며 그에게 처벌을 내리는것이 어떠하냐 하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그것이 정사와 관련된 의견이고 또 왕의 비위를 거슬린것이였으니 그 누구도 감히 이를 반대하지 못하고있었다. 이때 좌중을 살펴보던 서희장군은 《옛날에는 간관의 간언에 직분상제한이 없었는데 어찌 처벌하겠소이까. 저는 졸렬한 자질로서 부당하게 재상의 지위에 앉아서 직책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관직이 낮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 교화에 대한 잘못을 론난하게 만들었으니 모두가 저의 죄과이옵니다. 하물며 그 관리의 견해는 가장 적절하니 마땅히 표창할만 한 일이오이다.》고 하였다. 그러자 왕도 그의 말이 진실인지라 어쩔수 없어 두사람을 다같이 표창하도록 하였다. 정우현에게는 감찰어사벼슬을 주도록 하였다. 서희장군에게는 수놓은 말안장과 궁중에서 기르는 승마를 하사하고 술과 안주를 보내여 위로케 하였으며 태보 내사령의 벼슬을 주어 왕을 전적으로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서희장군은 겸허하고 대바른 명문집안의 가풍을 이어 어릴적부터 지덕과 무예를 닦아 장원급제하고 일찌기 벼슬길에 나서서 여러가지 일화와 전설을 남긴 애국명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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