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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과 관련된 여러가지 전설
우리 나라에는 이름난 석굴에 대한 전설도 적지 않다. 룡문대굴과 같이 크고 긴 명승대굴은 아니지만 명인, 대장부의 행적이나 평백성의 기구한 운명과 관련된 전설적인 사연을 전하는 석굴도 적지 않다. 평양의 부벽루아래 맞은편 언덕밑에는 옛날 고구려 시조왕 주몽이 날아다니는 기린마를 두었던 곳이라 하여 《기린굴》이라고 부르는 굴이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아침에 말을 타고 하늘로 오를 때마다 딛고섰던 바위돌인 《조천석》도 있다. 평안남도 증산군 불곡산에도 자그마한 석굴이 있는데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이 도를 닦고 무술을 익히며 살던 곳이라 하여 돌책상과 함께 전설화되였다. 명산 금강산에만 하여도 장수명약 불로초가 있었다는 《금란굴》이 있다. 대성산에는 옛날 하늘사람들이 내려와 머무르다가 올라갔다는 《선인굴》이 있으며 칠보산의 내칠보에는 하늘선녀와 결부된 《대장굴》과 《천치굴》이 있다. 우리 나라 자연석굴중에서 보다 전설적인 사연을 담은 굴은 황해북도 수안군의 《마십굴》과 금강산의 《보덕굴》을 대표적으로 들수 있다. 《마십굴》전설은 황해북도 수안군 뒤산절벽에 있는 50리굴과 관련된 전설이다. 옛날 마음이 어질고 착한 농사군 마십이 아름답고 현숙한 안해를 데리고 근근히 살아가고있었다. 어느해 겨울날 마십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눈우에 쓰러져있는 웬 사나이를 발견하게 되였다. 그래서 구원해줄 생각으로 집에 업고와 눕혀놓았다. 그가 정신을 차린 다음 사연을 알아본즉 고을원의 아들이였는데 사냥을 나왔다가 길을 잃고 쓰러졌다는것이였다. 비록 살림살이는 어려웠지만 이들부부는 산꿀을 얻어다가 극진히 간호하고 봉양하여 완쾌시켜주었다. 그런데 원의 아들은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머뭇거리며 마십의 안해의 일손을 도와주는척 하면서 마십의 동정만 살피고있었다. 어느날 마십은 그사이 땔나무도 하지 못하였고 해서 원의 아들이 오늘은 떠나가겠거니 생각하며 산에 올랐다. 마십이 산에 오르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원의 아들은 그의 안해를 건드려보려고 별의별 수작질을 다하였다. 그러나 마십의 안해로부터 단호하고 맵짠 면박을 받고 꽁무니를 빼고말았다. 악에 받친 그놈은 며칠후 십여명의 장정을 데리고와서 마십을 바줄로 꽁꽁 묶어놓고 그의 안해를 죄인처럼 덮쳐갔다. 그가 산속에 쓰러져있은것도 실상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마십의 안해를 꾀이려고 그의 집에 기여들기 위한 흉계였던것이다. 선량한 마음으로 사경에 처한 제놈을 구원하고 정성껏 봉양하여주었는데도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그렇게까지 파렴치하게 행동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마십은 그놈의 집에 찾아가 안해를 돌려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그놈은 오히려 제편에서 《정녕 네 계집을 찾고싶거든 뒤산 절벽에 굴을 50리만 뚫으라.》 하고 뇌까렸다. 마십은 그 말을 정말로 곧이듣고 다음날부터 바위중턱에 올라 굴을 뚫기 시작하였다. 마십이 한가닥 희망을 안고 매일과 같이 정대와 곡괭이를 가지고 혼자서 굴을 뚫은지도 수십일이 지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이 알아보았는지 어느날 꿈에 웬 백발로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100일 되는 날이면 굴이 뚫릴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십은 용기를 잃지 않고 100일을 채웠는데 그날 아침 바위에 정대를 대고 메로 힘차게 내리치니 정말 구멍이 펑 뚫리였다. 구멍을 더 크게 하고 들어가보니 굴은 자연동굴과 이어져있었는데 마십이 그속으로 달려들어가 막아선 석벽을 밀어제꼈더니 원의 집 후원이 휑하니 들여다보였다. 마십은 때마침 뜰에 나와있던 안해의 손을 잡고 굴로 빠져나오면서 《50리굴을 뚫었으니 나는 안해를 데리고간다.》 하고 크게 소리쳤다. 원의 아들이 그제야 부랴부랴 이들의 뒤를 쫓아가게 내몰았던 졸개들은 얼마 못가서 굴이 와락 무너지는통에 황천객이 되였다. 화가 꼭뒤까지 치민 원의 아들은 그래도 하인들을 시켜 계속 뒤쫓게 하는 한편 산을 돌아 굴입구를 지켜섰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마십부부가 밖으로 나오지 않자 나중에는 굴아구리에 불까지 질러댔다. 이때 굴안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퍼런 물이 콸콸 쏟아져내려 악당들은 잠간새에 물귀신이 되여버렸다. 그후부터 이 굴의 이름을 《마십굴》이라고 불렀다. 금강산 만폭동에 들어서서 한줄기 눈보라가 뿜어져 나오는듯 한 분설담을 지나 법기봉의 깎아지른듯 한 절벽우에 올라서면 구리기둥 하나에 받쳐있는 《보덕암》이라는 암자와 함께 그 뒤쪽에 있는 《보덕굴》이라는 자연굴을 볼수 있다. 보덕굴과 그 암자는 아찔하게 쳐다보이는 벼랑턱에 기묘하게 자리잡은것으로 하여 만폭동의 산수와 어울려 천하절경을 이루며 신비한 전설을 낳게 하였다. 옛날 《보덕각시》가 살았다고 하는 여기에 여러 변종의 전설이 깃들어 전해지고있다. 《유정사본말사지》의 기록에 의하면 보덕굴은 관음보살이 거처하던 굴이라고 한다. 옛날 한 젊은 승려가 금강산골안에 들어와 불도를 닦다가 싫증이 나서 잠을 잤는데 꿈에 아릿다운 보덕각시를 만나 대번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거절당하고말았다. 그 아릿다운 녀인은 후에 만폭동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어데론가 사라졌다. 잠에서 깨여난 그는 꿈이 기이한지라 만폭동에 들어가 경치도 구경할겸 정갈한 개울가와 담소, 높이 미끄러져내린 벼랑들을 살펴보며 걸음을 옮기고있는데 뜻밖에도 개울가 벼랑바위에 수건이 하나 드리워져있었다. 그가 놀라서 주위를 살펴보니 꿈에 본 보덕각시가 돌소반의 맑은 물에 머리를 감고있었다. 젊은 승려는 너무도 기쁘고 황홀하여 소리쳐 부르며 달려갔으나 보덕각시는 수건을 바삐 걷어가지고 개울 웃쪽으로 사라져버리였다. 그래서 그 각시가 머리를 감던 곳에 가보니 거울같은 소(후에 《세두분》이라고 불러왔다.)가 있을뿐이였다. 맥빠진 젊은 승려가 아쉬워서 멍하니 서있는데 난데없이 파랑새 한마리가 날아와 골짜기를 따라 오르더니 법기봉 절벽터의 바위구멍속으로 자취를 감추는것이였다. 그리하여 벼랑을 간신히 톺아올라 그 바위턱의 굴을 살펴보니 파랑새는 없고 굴가운데 부처 하나가 놓여있고 그앞에는 불경책이 쌓여있었다. 그제야 공부를 게을리하고 잡념에 사로잡혔던 자기의 처사를 뉘우치고 이 굴을 암자로 하여 불도를 열심히 닦아 금강산의 유명한 승려가 되였다고 한다. 보덕각시와 관련한 지물전설도 적지 않게 생겨났는바 보덕의 수건이 드리워졌던 바위를 《수건바위》, 보덕이 처음 머리를 감던 소를 《세두분》 그리고 보덕의 그림자가 비꼈던 못을 《영아지》라고 불러오게 되였다. 다른 하나의 《보덕굴》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보덕이라고 부르는 한 처녀가 있었는데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를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활이 부끄러워 아버지와 함께 산수절경인 금강산 만폭동에 들어와 어느 한 굴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처럼 의지하여 살았다. 하루는 성긴 베로 열말들이 큰 주머니 하나를 만들어 근처에 있는 폭포곁에 걸어놓고 아버지더러 《주머니에 물이 차게 되면 세상의 도리를 알게 될것》이라고 하면서 물을 길어넣자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험한 산으로 오르내리며 싸리대를 베여다가 날마다 삼태기를 하나씩 엮어 그것과 곡식을 바꾸어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그런데 산중에 와서 경을 외우던 한 승려가 쌀이 떨어진지라 보덕이 바꾸어온 쌀을 몰래 훔치려다가 발각되였다. 보덕이 《승려는 그림에 있는 부처도 공경하며 그앞에서 나쁜 일하기를 차마 두려워하거늘 어찌 산 사람의 앞에서 그리하랴.》 하고 엄하게 꾸짖자 승려는 죽기를 맹세하고 잘못을 빌었다 한다. 보덕은 또한 아버지가 성긴 베주머니에 물을 채운다는것은 아니될것이라며 맥을 놓고 앉아있는것을 보고 《아버지, 마음을 하나로 가지고 공을 들이면 그 공들임이 곧 도리를 알게 할것인데 미리부터 물이 차지 않을것이라 단정하고 물을 길어넣지 않으니 어찌 공이 이루어지고 도리를 깨달을수 있겠나이까?!》고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물을 연신 길어다 부었다. 그랬더니 베가 물기를 받아 불어나면서 한가득 찼다. 아버지는 기뻐 웃으며 《일찍 불을 붙일줄 알았더라면 밥이 익은지 오랬을것이다.》 하고 깨달은바를 말하였다. 옆에 서있던 승려도 그 말을 듣고 자기도 공을 들여 불경을 외우면 불도가 터서 부처님을 만나뵈워도 부끄러움이 없지 않겠는가고 되뇌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후 승려들은 그 굴가까이에 암자를 세우고 옥으로 새긴 보덕의 조각상을 들여놓았으며 이 굴을 《보덕굴》이라고 불렀다. 굴에 대한 전설은 인간생활과 결부시켜 의로운 행위나 선악관계를 밝힌것으로서 석굴의 사연을 지물전설화하는데서 인민적재능과 기지가 잘 반영되여있다. 보충적으로 석굴에 대한 전설을 하나 더 보기로 하자. 옛날 함경북도 칠보산근방의 어느 마을에 힘세고 칼쓰기를 좋아하는 두 청년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장수가 될 꿈을 키워갔다. 그러던중 그들 두사람은 다같이 칠보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무술을 익히기로 약속하였다. 내칠보계곡을 따라 서책봉쪽으로 한동안 올라가느라면 서로 이백여걸음 떨어진 아래웃쪽에 입구가 커다란 두개의 굴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기 여기에 거처를 정하고 병서를 익히고 무술을 닦아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밤 이들을 시험해보려고 칠보산산신이 아릿다운 선녀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이들이 거처하고있는 굴로 찾아왔다. 먼저 찾아간 아래굴에 있던 청년은 《선녀》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서를 열심히 읽으며 밤을 지새웠지만 웃굴의 청년은 《선녀》에게 눈을 팔다나니 도를 제대로 닦지 못하여 천치로 되여버렸다. 후날 사람들은 무술련마에 힘써 장원급제하여 대장수가 된 청년이 있던 아래굴을 《대장굴》이라고 불렀고 《선녀》의 유혹에 넘어가 무술련마를 제대로 하지 못한 청년이 있던 웃굴을 《천치굴》 혹은 선녀가 내렸던 굴이라고 하여 《강선굴》이라고 부르며 전설로 전해오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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