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 장
1
읍거리 장마당으로 들어가는 게시판에는 밤사이에 처음보는 격문 한장이 나붙어있었다. 격문을 쓴 글체며 색갈부터가 류다르고 이채로와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무슨 소식인가싶어 목을 빼들고 다가갔다. 어제저녁까지만 하여도 토지개혁법령문이 붙어있던 게시판이였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이여서 잠간사이에 게시판주변이 인총으로 들끓었다. 흰전지 한장에 울긋불긋하게 테두리를 치고 푸른색갈을 먹인 주먹같은 글자들을 삐뚤삐뚤하게 내려쓴 격문은 먼발치에서도 읽을수 있었다. 글씨가 지내 서툰것을 보면 분명 글씨임자를 알아내지 못하게 왼손으로 쓴것 같았다. 《군민…에게고…함이라…지주도아닌농…민토지…》 소달구지를 옆에 세워놓은 한 농민이 떠뜸떠뜸 글자음을 붙여보다가 종시 읽어내지 못하겠는지 곁에 선 양복차림의 사나이를 돌아보았다. 《여보소, 저기 무어라고 썼소? 좀 읽어주소.》 《허허, 령감두 글이란 띄여서 읽어야지 앞뒤글자를 마구 붙여읽으면 되겠소 》 양복쟁이는 약간 경멸하는듯 한 눈찌로 농군을 흘깃 스쳐보더니 글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들으라는듯 큰소리로 격문을 읽었다.
군민에게 고함! -지주도 아닌 농민 토지를 빼앗기고 자살을 기도-
3월10일 반달면 동흥리 자경농민 박병칠씨는 착취자라는 애무한 루명을 받아오다가 마침내 공산당군당부 유사천의 청산이주령을 받고 알몸으로 축출되게 되여 고민끝에 자살을 기도했다. 군민들은 이 참사를 기억하라! 일체 개인토지를 수탈하는 공산당의 류혈정책에 항거하자! 련합군공동위원회의 재조정으로 38°선은 곧 39°선으로 된다. 서북자유청년동지회 황해지부
《엉? 그게 무슨 소리요? 박병칠령감이 죽었단말요? 거 글을 바루 읽긴 읽소?》 농군은 대번에 경악실색하여 양복쟁이를 치떠보았다. 《허허 - 령감 말조심하오. 그럼 내 허튼글을 읽겠소 》 양복쟁이는 눈꼬리를 치켜들고 역증을 냈다. 게시판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격문에 놀라고 반신반의하며 떠들어댔다. 《아니 지주가 아니라면 까밝힐것이지 죽기는 왜 죽어?》 《죽은건 아니구 자살하자구 모진 마음을 먹었던것 같소. 오죽하문 그랬겠소 》 《세월이 왜 이렇게 불개미집 쑤셔놓은것처럼 소란스러운지.》 어느덧 장마당입구에는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치 조직적인 군중집회라도 하는것처럼 되였다. 끔찍스러운 일이라고 치를 떠는 사람, 세월이 점점 흉흉해진다고 혀를 차는 사람, 이른바 《서북자유청년동지회》의 격문은 사람들마다에 각이한 반응을 일으켰다. 공포와 불안, 의혹과 불신의 어지러운 공기가 읍내의 맑은 하늘을 오염시키고있었다. 어린아이, 아낙네들 할것없이 사람들은 게시판주변으로 자꾸 모여들었다. 이때 무명바지저고리를 입은 굴대장군같은 한 농민이 격노한 얼굴을 하고 사람들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비키시우!… 비키란말요!》 농군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듯 빽빽이 진을 친 사람들을 좌우로 마구 밀어헤치면서 게시판앞으로 달려가더니 한쪽 귀가 약간 들리운 《격문》을 와락 뜯어내여 구겨쥐였다. 그리고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자연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헤쳐가시우! 이건 반동놈들이 지어내는 허튼 수작질이요!… 우리는 오직 토지개혁법령문을 믿어야 합네다!》 그러면서 농군은 얼결에 게시판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반동놈들이 토지개혁법령문을 떼버리고 《격문》을 붙였던터여서 게시판에는 허연 종이딱지만이 몇군데 붙어있을뿐이였다. 군중들은 《격문》을 뜯어낸 농군의 벽돌빛 얼굴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하였다. 《저 사람이 누구요? 보매 농군같은데 농군치곤 꽤 당돌하군 그래.》 《아마 공산당에서 파한 사람일테지.》 《가만있자… 저 사람이 거 농민궐기대회때 호미들고 나와서 연설하던 농군 아니요?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웠다던…》 《옳거니, 그사람이군! 듣자니 저 사람이 요즘 신당리 농촌위원회 위원장이 됐다던데…》 사람무리의 어느 한쪽에서 이런 말들을 주고받고있을 때 조순근은 벌써 군중들속에서 빠져나오고있었다. 그는 아직도 가쁜 숨을 가라앉히지 못해 풀무처럼 가슴을 들먹거리면서 땀에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연방 씻어냈다. 그와 좀 떨어져서 다림발이 깔끔하게 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서달호가 조심스레 따라갔다. 장마당입구를 벗어나서 군농조사무실앞으로 걸어가던 두사람은 누구인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섰다. 김창규가 둥글모자를 쓴 군보안서장과 함께 따라오고있었다. 《아, 영길이 매부! 내 그러지 않아 군당에 가려던 참인데…아, 글쎄 이걸 보게, 에익!…》 조순근은 보안서장에게 수인사를 하고는 손에 구겨쥔 《격문》쪼박을 창규에게 내보이였다. 그는 방금 벌어진 일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우들우들 손을 떨기만 하였다. 《아저씨, 알고있습니다. 방금 우리도 아저씨가 그걸 떼는걸 보구 왔습니다. 군중앞에 나섰던바엔 좀 연설을 할게지 그냥 나왔습니까?》 김창규는 조순근의 손안에서 이미 파죽이 되여버린 《격문》쪼박지들을 보안서장에게 넘겨주며 말하였다. 그의 얼굴은 몹시 수척해지고 두눈은 수면부족과 여러가지 번민으로 해서 시뻘겋게 충혈되여있었다. 《연설할줄도 모르지만 그까짓 말이나 자꾸 해선 뭘하나. 난 반동놈들이 이렇게까지 없는 말을 지어내며 못된짓을 할줄은 몰랐구만.》 동흥리사건을 아직 모르고있고 군당비서를 두어번밖에 만나본적이 없는 조순근은 유사천이가 박병칠로인에게 청산이주령을 내렸다는 말도 그리고 박병칠이 자살을 기도했다는것도 반동들이 지어낸 악선전으로만 생각하고있었다. 그 사건들은 바로 어저께 저녁에 벌어진 일이여서 신당리사람들은 거의나 모르고있는것이였다. 《반동놈들의 준동이 아주 심해지는것 같습니다. 그러니 신당리에서도 경각성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저씨들은 이 아침에 어떻게 여길 오셨습니까?》 김창규는 군당청사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군당비서어른이 날 찾는다기에 왔어.》 《비서동무가요? 무슨 일로 찾는가요?》 창규는 뜻밖인듯 걸음을 멈추고 조순근을 지켜보았다. 《글쎄 낸들 알겠어. 무슨 신당리 농촌위원회사업을 알아보자구 하는것 같기두 하구… 내 그래 농촌위원인 서달호형님을 데리구 이렇게 새벽걸음을 했는데 오자마자 반동놈의 글을 보게 되니 제길헐!》 조순근은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리고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는 요즘 재령벌에서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불상사들로 해서 불안하고 괴로왔다. 바로 며칠전에는 집안에서 미투리를 삼다가 한밤중에 훌쩍 나간 대복이가 행방불명이 되였다. 혹시 서분이라도 알수 있지 않을가 해서 찾아가보았지만 성배의 말이 서분이는 지주집심부름으로 어디 먼곳을 갔기때문에 조만간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조순근은 그 말을 들을 때 섬찍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었다. 그러나 무엇때문에 가슴이 섬찍해지는지 따지고보면 이렇다하게 명백한 근거가 없는 일이여서 아직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비치지 못하고있었다. 그는 아들의 실종과 오늘 나붙는 반동삐라. 이 모든것들이 하나의 선에서 생겨나는 불상사같았다. 《참 서달호아저씬 요즘 재미가 어떻습니까? 농촌위원으로 선거받고 일을 아주 열성스레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창규는 천천히 걸음을 떼면서 흰두루마기를 산뜻하게 차려입은 서달호를 은근히 지켜보았다. 서달호는 군당에서 불러준다는 말에 너무 황공해서 단벌나들이옷을 밤새 말끔히 빨아 다림발까지 세워가지고 온것이였다. 《정말 달호형님이 일을 아주 열성스레 하네. 장군님을 뵈운 일을 평생 잊지 못하겠다면서… 자네도 자주 와보아서 알지만 장군님 다녀가신다음부터 서씨농민들의 열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네.》 조순근이 어줍어하는 서달호를 곁들어 대답했다. 《그래야지요.》 창규는 그것이 자기자신의 보람처럼 느껴져 흐뭇한 마음에서 고개를 끄덕이였다. 얼마후 조순근, 서달호들이 군당비서실에 들어서자 유사천은 보던 신문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에서 밤을 새운 모양인지 재털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하고 얼굴이 부석부석해보였다. 《응, 왔구만. 위원장동무, 거기 앉소.》 유사천은 서달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순근에게만 눈길을 주며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긴의자를 가리켰다. 그는 두사람이 앉은 다음에도 한참 말이 없었다. 담배를 꼬나물고 초조한 걸음새로 창가를 오락가락하다가는 목을 쳐들고 천정을 향해 담배연기를 후 내뿜었다. 얼마후에야 목이 꽉 잠겨버린 석쉼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조직부장의 말을 들으니 조순근농민이 농촌위원회 위원장으로 선거됐다면서?… 나는 아주 기쁘게 생각하오. 그건 그렇구, 저기 저 손님은 어디서 왔소?》 유사천은 무릎우에 손을 포개고 송구하게 앉아있는 서달호를 지켜보며 물었다. 《예, 저도 신당리 농민올시다 》 서달호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황송하게 대답했다. 《왜 왔소?》 유사천은 쌀쌀한 눈매로 서달호의 두루마기차림을 훑어보았다. 《예, 제가 데리고왔습니다. 필시 농촌위원회문제루 절 부르시리라 짐작하구…이 형님두 농촌위원이올시다.》 조순근이 어줍은 표정으로 서달호를 소개하였다. 《음, 그렇소?》 유사천은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넌지시 조순근을 스쳐보더니 불쑥 물었다. 《참, 그런데 위원장의 아들이 행방불명이 됐다는 말이 있는데 아직 찾지 못했소?》 《…》 조순근은 갑자기,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덤덤히 앉아있었다. 《아무 짐작도 가지 않소? 그 애가 혹시 친척집에라도 가지 않았는지?》 《비서어른, 고맙습네다. 그녀석의 걱정을 해주시니…》 조순근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송스레 허리를 굽혔다. 불시에 눈구석에 이슬이 개피여 머리를 돌리고 손바닥으로 뿍 훔치였다. 그는 군당비서가 자기를 위안해주기 위해 부른것만 같아 가슴이 젖어들었다. 문득 그는 아까 게시판에서 본 반동선전문을 상기하였다. 반동들의 악선전이 유사천에게 쏠리고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자기가 그를 위로해주고싶었다. 《집의 아이는 아주 훌륭한 아이요. 알아본데 의하면 그 애는 리자위대에서 임무를 받고 서만호아들놈의 잠입여부를 감시하고있었소. 없어진날 밤에도 서만호의 집에 갔겠는데 참 모를 일이요.》 유사천은 창턱에 손을 짚고 충혈된 눈으로 조순근이와 서달호를 번갈아보았다. 조순근은 아들녀석이 그런 중한 소임을 맡고도 자기에게 일절 입밖에 내지 않은것이 대견스러웠다. 자기는 그것도 모르고 아들에게 어딜 밤늦게 싸다니느냐고 늘 핀잔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야학에 나가 글배우고 온다고 천연스레 둘러쳐서 속아넘어가군 했다. 《그 애가 바로 혁명의 산아요.》 유사천은 불시에 흥분하면서 누구에게라없이 부르짖었다. 《계급투쟁은 이렇게 날카롭소… 조순근동무! 그래서 내가 늘 계급적원쑤에 대해선 무자비해야 한다고 말하는게요. 그래 요즘 그 마을의 동향은 어떻소?》 《예, 요즘은 우리 신당리두 좀 뒤숭숭합니다. 공산당에서 일체 자작농의 토지는 다 몰수한다느니 청산이주시킨다느니 하며… 그래 일부 자작농들은 토지를 몰수하면 짐을 떠싣구 남으로 도망가겠다구들 한다나요. 그래 우리 농촌위원회에선 토지개혁법령문을 가지고 매일밤 중농, 부농들을 찾아다니며 일깨워줍니다.》 《허허 참…》 유사천은 무엇인가 못마땅한듯 입귀를 실룩거리며 랭소를 하고는 눈에서 퍼런 불꽃을 날리였다. 《남으로 도망가겠다는 놈이 어느놈인지 붙들어내시오! 내 이미 보안서에도 지시했지만 류언비어를 류포하는자, 반동삐라에 흥미를 가지는자들을 모조리 색출해서 징벌해야 하오. 무슨 빚을 졌다구 따라다니며 일깨워주는가?…그래 서만혼지 그 지주놈은 어떻게 나오고있소?》 《예, 그놈이 말썽이웨다. 이젠 저희 문중인 서씨들이 자기와 상종하지 않으니까 타성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들쑤셔놓아요.》 조순근은 이날 아침 장마당입구에 나붙었던 반동삐라에 대한 말까지 하면서 그것도 서만호지주의 작간인것 같다고 하였다. 유사천은 반동선전문이 나붙은 사실을 아직 모르고있었다. 그는 조순근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더욱 열을 올리며 소리쳤다. 《그렇소. 나는 박병칠에게 청산이주령을 내렸소. 반동선전문을 놓고 걱정할건 하나도 없소. 나는 반동들에게 욕을 먹는걸 자랑으로 여기오. 그건 이 유사천이가 혁명가라는걸 말해주니까… 아닌게 아니라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하자니 류혈정책을 할수밖에 없소 》 조순근은 잠시 어리둥절해 서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군당비서가 실지로 박병칠에게 청산이주령을 내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방안에는 한동안 느릿느릿 마루바닥을 밟는 유사천의 발자국소리만이 유난스레 울리였다. 《박종관이도 백해무익한 존재요. 그래 조순근위원장동무, 토지개혁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중농, 부농들을 그냥 그렇게 어루만지겠소?》 유사천은 자기 책상으로 돌아와 앉으며 눈을 찌플사하고 조순근을 건너다보았다. 《신당리 중농, 부농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처음 뒤숭숭한 소문때문에 좀 술렁댔지만 우리가 법령을 놓고 일깨워주니 모두 머리를 끄덕입데다.》 조순근은 무릎을 짚고 일어나서 유사천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머리를 끄덕인다? 오늘은 끄덕이지만 래일은 또 도리질을 한단말이요. 그런 사람들을 옆에 놓고 토지분여를 해낼수 있소? 저기 저 위원동무 말해보시오. 안그렇소?》 유사천은 서달호에게 눈길을 돌리였다. 《예, 위원장의 말이 옳쉐다. 별다름이 없이 오손도손 토지분여를 해낼것 같습네다.》 《음, 어느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해주었는지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만… 위원동무의 이름은 뭐요?》 《서달호올시다.》 서달호는 배허벅에 손을 붙이고 새삼스레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서달호!》 유사천은 무심중 이름을 받아외웠다. 그러나 다음순간 웬일인지 얼굴에 강한 파문을 일으키며 서달호를 유심히 쏘아보았다. 《서달호라, 서달호? 그러니 거 말썽많은 서씨가문이로구만. 호자돌림을 쓰는걸 보니 혹시 서만호지주하구 친척벌이 되는건 아니요?》 《예. 촌수가 먼 동생벌이 됩니다. 서씨가문에 그런 나쁜놈이 있다는게 참 부끄럽소이다.》 서달호의 얼굴은 수치감으로 해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하얗게 바래졌다. 유사천의 눈이 대뜸 꼿꼿해졌다. 《촌수가 멀건 가깝건 어쨌든 친척이겠지. 그런데 농촌위원으로 선발했단 말이요? 이거 소가 웃다 꾸레미가 터지겠소. 서씨네 문중이 농촌위원이라? 진짜 〈대동단결〉이구만. 으하하하…》 유사천은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고개를 제끼고 한참 웃어대더니 약손가락으로 서달호의 가슴을 겨누며 내뱉었다. 《됐소. 당신은 나가시오. 난 당신같은 사람을 부른적이 없소.》 서달호는 일순 중풍을 일으킨 사람처럼 온몸에 전률을 일으켰다. 그가 어떻게나 몸을 떠는지 두루마기자락이 바람을 맞는것처림 펄러덕거리였다. 《내 글쎄 그 두루마기가 별루 말쑥하다 했지… 어서 나가라는데 왜 그렇게 서있소? 여기는 군공산당 비서실이란말요!》 앉은자리에서 마른벼락을 맞은 서달호는 허둥지둥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때까지 억이 막혀 잠자코 서있던 조순근이 달려가서 서달호의 팔목을 붙잡았다. 《형님, 나가지 마시오. 비서어른이 내막을 잘 몰라서 그러는것 같은데 무서워말구 가서 앉아요.》 《이러지 말게. 난 가겠다는데…》 서달호는 몸을 비틀며 팔목을 빼려고 하였으나 조순근은 꺾쇠처럼 쥐고 놓지 않았다. 유사천은 입술을 실그러뜨린채 두 농군이 하는 양을 쓰겁게 지켜보다가 허파가 텅 비여버린것 같은 허거픈 웃음을 하며 돌아앉았다. 《허허 참… 조직부장인지 김창균지 그 사람에게 맡겨두었더니 신당리가 아주 망태기가 됐군…》 그러면서 유사천은 전화기에 손을 뻗치였다. 《도당부에 전화를 대라!… 응 기다리겠으니 빨리 나오게 해라.》 유사천은 교환수에게 호령조로 전화를 부탁하고는 뒤짐을 지며 일어섰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방안을 거닐다가 조순근을 돌아보았다. 《위원장동무, 일을 빨리 바로잡아야겠소. 이제부턴 내가 신당리농촌위원회 사업을 직접 지도하겠소. 우선 무엇부터 토론하는고 하면…》 유사천은 이미 서달호의 존재를 잊어버린듯이 뚜걱거리며 긴의자쪽으로 걸어가더니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여 조순근의 무릎에 얹었다. 그 종이장에는 《청산대상자》라는 표제밑에 10여명이나 되는 신당리 부유농민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거기에는 지어 논 3천평밖에 안되는 자작농도 들어있었다. 유사천은 뒤짐을 지고 방안을 빙빙 돌아가면서 말하였다. 《신당리에 토지혁명의 표본을 하나 만들자고 하오. 그러기위해 우선 김창규가 조직했던 농촌위원회는 해산하고 새로 조직합시다. 물론 위원장은 당신이요. 새로 조직된 위원회가 이 종이에 적힌 사람들에게 청산이주령을 내리시오. 토지몰수와 토지분배를 동시에 시작해서 며칠안으로 끝을 맺읍시다 》 《아니, 우리 신당리에 몰수대상이 서만호말구두 이렇게 많다는 말씀인가요?》 조순근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유사천을 마주보았다. 몰수명단을 쥔 그의 손이 가볍게 떨리였다. 《아니, 이제까지 내 말을 뭘로 들었소? 서만호두 서만호지만 이번 토지개혁을 통해 미타한것들을 다 청산하자는거요. 군당에서부터 리에 이르기까지 채로 말끔히 추겠소. 그 청산명단은 이것저것 다 타산해서 우에 간부들과도 합의를 보고 작성한거요. 위원장동문 앞으로 일만 잘하면 리가 아니라 군에 올라와서 일할수 있소. 알겠소? 이제 채로 추고나면 간부자리들이 수태 비겠는데 동무같은 사람이 그런 자리에 앉아야지…》 유사천은 벌써 모든 일이 락착된듯이 애써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그의 눈에선 어딘지 모를 초조와 불안의 빛이 떠돌고있었다. 《비서어른, 난 그건 못하갔습네다.》 조순근은 벌떡 일어섰다. 《무얼 못하겠다는거요?》 유사천이 눈섭을 치켜올리며 따지였다. 《나는 법령에 없는 일을 하는 위원장은 못하갔시다. 법령에야 어디 이런 사람을 청산하라구 했나요? 비서어른, 법령대루 하게 해주시우. 난 다른건 몰라두 토지개혁법령은 장군님께서 직접 만들어 내려보내신 법령이라는것만은 알고있수다. 그런데 그 법령을 어겨서야 되겠소.》 조순근의 목소리는 무언가 범접하지 못할 기운을 담고 크게 울려나왔다. 《여보, 누가 법령에 없는 일을 하는가?》 유사천은 조순근의 손에서 종이장을 나꾸채며 양철판을 긁어내리는것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보니 이 동무두 단단히 물이 든것 같구만… 동무가 몰라서 그러지 법령밑바닥엔 이런자들을 다 숙청해버리라는 내용이 깔려있소. 이 사람들은 친일반역지주인 서만호와 결탁되여있는 부농, 중농들이기때문에 민족반역죄로 숙청해버린단말요. 이런 계급투쟁에서 외면하면 되겠는가? 총을 돌려주던 그 시절로 도루 후퇴했소?》 《내 과거지사를 두고두고 욕을 해도 좋수다. 난 장군님의 말씀을 한치두 어기문 망한다는걸 알게 된 사람이외다. 천하 그 어떤 사람의 말두 장군님의 말씀에 꼼꼼히 비추어보구 들어야 한다는걸 육신이 저리도록 알게 됐시다.》 조순근의 눈귀에는 미음처럼 건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조만식을 장군님의 부하로만 알고 찾아갔다가 한생을 두고 씻을수 없는 과실을 저질렀던 뼈아픈 추억이 새삼스레 그를 울리는것이였다. 《비서어른, 장군님께선 신당리에 오셨을 때 서씨네 중농, 소작인들을 다 농조에 받아야 한다구 하셨수다. 그런 사람들두 잘 일깨워주문 지주놈이 아니라 우리 농군편에 선다구 말씀하셨수다. 그건 내 이 두귀로 직접 들은 말씀이요 》 《당신은 뭔가 그때 잘못들었소. 토지개혁법령의 글귀도 잘 새기지 못하는 사람이 장군님의 말씀을 옳게 들었을게 뭐요… 재령벌은 특수하기때문에 부유농민들도 악질적인것은 다 청산해야 한단말이요.》 유사천은 낯빛이 창백하게 이그러지며 진정을 못하고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주머니에 쑤셔넣었던 종이장을 다시 꺼내였다. 《위원장동무, 똑똑히 알아두시오. 동무의 아들은 이 종이장에 씌여있는 이런자들에 의해 잘못되였소. 그래두 이 사람들을 감싸구 돌겠소?》 《그 사람들이 내 아들을 왜 까닭없이 죽이겠습네까. 비서어른은 내가 장군님의 말씀을 잘못들었다는데 그때 그 자리엔 여기 서달호형님두 앉아있었지요. 들은 사람이 수십명이 되니 가서 알아보시우다. 안그렇소. 달호형님?》 조순근은 겁에 질려 우들우들 떨고있는 서달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무렴… 장군님께서… 이 손을 잡아주시며 하신 말씀을 내 어떻게 잊을수 있겠나.》 서달호의 목소리는 불시에 흐느낌처럼 떨리였다.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농군의 진정어린 목소리에 유사천은 당황하였다. 그리고 제마음대로 다룰수 있는 몽매한 인간이라고만 생각한 농군들앞에서 곤경을 당하고있는 자신의 몰골에 스스로 화가 나서 그는 별안간 리성을 잃게 되였다. 《여보! 그만하오!》 유사천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그는 겁에 질려있는 유순한 농군을 마구 지리밟아 문질러버리고싶은 광증에 몸을 떨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네 서가문중이 그날 서만호지주놈을 살려달라고 진정하러 다닌걸 내가 모르는줄 아는가? 썩 나가라!》 유사천의 조폭한 소래기질에 서달호는 화닥닥 놀라며 몇발자국 쫓기듯 걸어나갔다. 뒤따라 조순근이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은 도담한 눈빛으로 유사천을 노려보았다. 《비서어른은 너무하웨다. 저 서달호형님의 손이 어떤 손인지 아십네까? 장군님께서 잡아주신 손이웨다. 장군님께선 우리 농군들의 손을 잡아주시며 이제 더는 누구도 농군들을 천대하지 못하게 해야 된다구 하였수다. 그런데 보아하니 어제날 천대받던 우리 농군을 오늘은 비서어른이 괄시한단말이웨다.》 《뭐요?!》 유사천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으나 마침 책상우에서 울리는 전화종소리가 그의 고함을 막아버렸다. 반사적으로 말을 뚝 끊어버린 유사천은 눈을 치뜨며 전화통을 잠간 내려다보더니 수염이 더부룩한 입가에 랭소를 띠며 위협적인 어조로 뇌까렸다. 《좋소. 당신이 군당비서앞에서두 아무 말이나 탕탕 줴치는데 어떤 불순분자의 꾀임을 받았는지 짐작이 가오. 내가 왜 도당에 전활 신청했는지 알아? 바로 김창규같은 불순분자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요.》 《좋수다. 내 보기엔 당신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장군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실을 하는것 같수다. 우린 가겠시다 》 조순근은 서달호를 이끌고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유사천은 사나운 눈초리로 두 농민이 사라진쪽을 한참 지켜보다가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거만하게 움직이던 유사천의 몸이 수화기를 들자마자 비굴하게 구부러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제 유사천입니다. 며칠전에 중앙에서 내려온 간부동지가 계시겠지요?… 예, 좀 알아보고 바꿔주시오.》 유사천은 수화기를 들고 기다리였다.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앉아있는 그의 머리에서는 방금전에 있은 불쾌한 일때문에 여러가지 번거로운 생각들이 어지럽게 떠돌았다. 그러나 그는 이 전화기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힘을 얻고있었다. 이윽고 유사천은 송수화기에 허리를 구부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도당의 교환수는 유사천이 찾고있는 간부가 이미 소환되여가고 대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보내신 전권대표가 내려왔다고 알려주었다. 순간에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유사천의 낯빛은 졸지에 흐려졌다. 김일성장군님께서 파견하신 전권대표가 왜 느닷없이 도당부에 나타났을가? 유사천에게는 이런 뜻하지 않은 일들이 언제나 불안스러운것이였다. 그는 많은것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였다. 부유중농까지도 계급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청산해야 한다고 소리치고있는 유사천 자신이 부농의 아들이라는것을 알고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유사천은 음울한 얼굴빛을 하고 오래도록 의자에 앉아있었다. 출세와 영달을 위해서 미친듯이 달려온 자기의 앞길에 급기야 어두운 그늘이 비껴드는것만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