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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사회에서만 바로 《본다》
흉악범얼굴 공개할건가 말건가
련쇄살인범의 얼굴을 공개할것인가 말것인가? 《한국》언론재단이 2월 9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쎈터 12층에서 언론의 범죄피의자얼굴 공개와 인권에 관한 토론을 벌렸다. 조, 중, 동 등 《한국》의 보수신문들은 강력범들의 얼굴공개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진보성향의 언론 및 방송들은 이를 반대하고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선 이런 론쟁이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흉악범들자신들이 자기들 얼굴이 언론에 공개되는것을 개의치 않기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피의자자신이 먼저 얼굴을 들지 않고 혹은 못하고 스스로 감추려 하는데서부터 문제의 원인이 생긴다. 얼굴공개반대에 대한 가장 큰 리유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흉악범과 인상착의가 같은 사람이 선의의 피해를 입을수도 있기때문이라고 한다. 이 두가지 리유모두가 《한국》과 서양에서 얼굴을 《본다》는데 대한 인식차이때문이라는것이 분명해진다. 즉 동양에서는 흉악범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가족공동체와 동일시하거나 같은 인상착의의 모든 인간을 같은 동류로 보는 이것, 모두가 결국 《나》라는 개인의식이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에 제압당하기때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문제의 관건은 근본적으로 《본다》는 말의 의미의 차이에서 생각을 정리하는것이 순서일것이다.
동양의 《본다》와 서양의 《본다》의 차이
서양에서 흉악범들이 자기 얼굴공개를 꺼리지 않는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말에 그대로 나타나있다. 영어의 see나 look나 watch 등은 모두 주객이 선명하게 나뉜 상황을 전제한다. 보는쪽과 보이는쪽이 분명하게 나뉘여져 그사이의 혼동이란 있을수 없다. 그래서 내 얼굴이 네 얼굴일수 없고 네 얼굴이 내 얼굴일수 없다. 《판옵티콘》은 《옵티콘》의 《본다》와 《모두(pan)》의 합성어이다. 서양철학에서 《본다》는 기능은 지금 혐오와 청산의 대상이다. 그리스의 《에이도스(eidos)》로서 이 말에서 플라톤의 idea 즉 관념이란 말이 유래한다. 옵티콘은 눈이 대상을 일방통행적으로 보는 행위로서 이 말은 결국 서양철학을 주객이원론의 함정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다. 사실 푸코의 판옵티콘에 대한 강한 거부감도 서양철학의 이러한 본다는 행위의 감시자기능때문이다. 다시말해서 감시자가 피감시자를 일방통행적으로 본다는, 다시말해서 감시한다는데 그 리유가 있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의 녀류신학자 일리가리는 보는 《시각》을 《촉각》으로 대치할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있다. 서양의 이러한 《본다》에 대하여 한문의 본다에는 《견(見), 시(視), 관(觀)》, 《망(望)》, 《간(看)》 등이 있다. 한의사가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진단하는것을 망진(望診)이라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본다는 말이 한문에 많은것은 인간이 보는 시야의 범위와 차이때문이다. 견은 주견이나 견해에서 보는바와 같이 보는 주체에 방점을 두는것이고 시는 주시나 감시같이 보이는 대상에 방점을 두는것이다. 바로 판옵티콘의 본다에 해당하는것은 시이지 견이 아니다. 그러나 견이나 시모두 일방통행적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주에서 객으로 향하든 그 반대이든 비대칭적일방통행적이다. 서양에서는 본다에서 주객을 상호교통시킬수 있는 본다라는 말이 없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를 본다고 할 때에 본다는 말의 비대칭적인 구조라 한다. 범시가 진화를 하면서 대칭적구조로 바뀌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생긴다. 대칭성이란 보면서 동시에 보이는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감옥에서 간수가 죄수들을 보는 동시에 죄수들에 의해 간수가 보인다는것을 두고 대칭적이라고 한다. 이제 범시 혹은 판옵티콘이 벤담과 푸코를 넘어 또 다른 진화를 할 리유가 여기에 있는것이다. 그런데 동양에는 본다는 의미의 관(觀)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시와 견을 상호련관을 시켜 비대칭적구조를 파괴하는 구조를 암시하고있다. 불교 반야심경 첫 구절인 《관자재(觀自在)》라고 할 때에 이 말은 《스스로의 자기를 본다》를 의미한다. 여기서 견이나 시를 사용하지 않고 관이라고 한것이다. 관은 시와 견과 달리 자기가 자기자신을 본다는것이다. 그럼 객관적대상을 보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자기가 자기를 먼저 대상화하여 먼저 보고 다시 그렇게 본 자기를 대상과 겨냥하는것을 두고 관이라고 한것이다. 시와 견과는 달리 중층구조를 가지고있는것이 관이다. 이러한 관은 360°전체 방향을 다 보는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시와 견은 그 반정도의 시야를 갖는 말이다. 시와 견은 자기자신의 봄, 자기 공동체안의 봄이라는 내재화를 할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재화는 범시의 의미를 벤담이나 푸코를 넘어서게 한다. 지금까지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판옵티콘》이란 말은 《범시(凡視)》라고 하는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판옵티콘은 《다봄》이라는 뜻이지만 비대칭적으로 보는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서양언어의 본다는 말의 일방통행적비대칭성은 판옵티콘의 진화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즉 범시로서 판옵티콘은 1990년대이후 감시로서의 판옵티콘이 전자통신의 혁명과 함께 초(超)-범시(super-panopticon), 등(等)-범시(syn-panopticon) 그리고 역(逆)-범시(reverse-panopticon), 탈(脫)-범시(post-panopticon) 등으로 진화한다. 이렇게 말을 비교해놓고보면 우리가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 못하는 리유도 분명해졌다. 그것은 다름아닌 저 흉악범의 얼굴이 다름아닌 나자신의 얼굴이라는 주객비분리적 관의 립장에서 보면 흉악범얼굴공개는 나자신의 얼굴공개와 같기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관이 없는 서양에서는 나-너의 분리가 분명하기때문에 너를 나와 동일시할 아무런 리유가 없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이 아무리 닮았다 하더라도 서양에서는 아들이 범인이라고 해서 아버지도 그럴것이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친한 가족이라도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같은 가족성원이 고발한다. 동양은 이미 일찌기 주객이 쌍방향적으로 보는 역-범시와 등-범시에 익숙해져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탈-범시의 순간에 서있다.
자본주의사회에 먼저 찾아온 《1984년》
오웰이 1948년 소설을 쓴 곳은 먄마였고 당시 먄마는 《사회주의》체제였다. 그래서 그는 먄마《사회주의》체제를 눈으로 목격하면서 이 1984년을 썼다고 한다. 1984는 1948을 뒤집은 수자이다. 소설에 나오는 태형(Big Brother)은 공산주의사회의 독재자라고 하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오웰이 예언한 1984년은 자본주의사회에 더 먼저 찾아왔다. 그의 예언이 적중한 곳은 차라리 자본주의국가에서였다. 소설을 쓴 직후인 1950년대부터 콤퓨터에 의한 자료감시(dataveillance)라는것이 가능해졌고 이런 감시망은 자본주의정부, 기업, 은행 등에 적용되였고 심지어는 상용화까지 된다. 미국의 경우는 이런 전자감시망을 FBI가 리용하기 시작한다. 이런 콤퓨터에 의한 감시이외에 1984년의 원거리감시경(telescope)에 근접한것은 전자기기에 의한 감시이다. 그 대표적인것이 바로 페쇄회로감시 CCTV이다. 지금 우리는 거리의 CCTV가 련쇄살인범을 잡는데 수훈을 세운 이후 더 많이 설치해야 한다고 공감대를 이루고있다. 이에 《정부》 여당은 박차를 가하고있다. 지금 리명박《정부》의 독재가 성공 못할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그 반대로 성공할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지금 거리데모현장은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소위 채증이라는것이 있어서 시위군중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감시카메라에 잡힌다. 채증에 의해 불법시위고지서가 집에 날아올 때에는 시민들이 앞이 캄캄해진다고 한다. 100만원 내지 200만원은 보통이고 단체 같은 경우는 수천만원의 고지서에 시달리고있다. 1960∼1990년대 시위는 차라리 랑만적이였다. 공산주의사회가 아닌 자본주의사회에서 오웰의 예언은 적중하고말았다. 2001년 《남한정부》는 한 개인의 혈액형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는 전자건강보험증을 만들려 하다 거센 여론에 직면하여 포기하고말았다. CCTV란 일명 페쇄회로TV이다. 1967년 포토스캔회사에서 발명했다. 한자리에 고정돼있으면서 근거리를 감시하는 TV이다. 그러나 GPS 즉 위치추적장치는 24시간 지구주위를 도는 24개의 위성으로 우리가 어느곳에 있든지 모두 감시할수 있어서 2002년 3월 미국 남가주에서는 처음으로 성폭행 가석방범을 24시간동안 이 항법장치가 감시할수 있었다. 거기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기도 당할지도 모른데도 말이다. 영국에서는 500개이상 도시에 모두 2백만대이상의 CCTV가 작동중이다. 9. 11이후 미국은 지하철과 학교에만 500만대이상의 CCTV를 설치하였다. 이제 남《한》에는 뻐스기사의 삥땅까지도 감시할 정도이고 병원은 간호원의 손놀림까지도 감시하고 공장에서는 RF(Radio Frequency)라는것을 도입해 50m이내에서 인간이 움직이는 모든 행동을 감시할수 있다고 한다. 벤담이 꼭 중앙감시탑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필요없다. 례를 들어 기동순찰경찰은 길거리에서 차량번호만 입력을 하면 그것이 도난차량인지 아닌지를 그자리에서 확인할수 있다. 모든 곳이 중심이 되여버린 범시가 등장한것이다. 이 정도면 서울이 아닌 평양을 가야 더 자유를 만끽할수 있다는 소리가 나올법 하게 되였다.
역-범시의 등장과 초-범시
조지 오웰도 예측하지 못했던것은 그의 텔레스코프가 적어도 3단계로 진화하고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 디스토피아적인것만은 아니라는것도 암시하고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감시를 당하면서 감시를 해달라고 자기 정보를 감시자에게 스스로 주고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벤담도 푸코도 알지 못했던 점이다. 지금 휴대전화나 인터네트를 사용하자면 가입등록을 해야 하는데 그때에 나의 많은 정보를 주어야 한다. 그러다가 해킹을 당할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감시당하는 사람이 감시에 필요한 정보를 스스로 주는것》, 이것을 소위 수퍼-판옵티콘 혹은 초-범시라고 한다. 초-범시는 벤담과 푸코의 판옵티콘개념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놓는다. 두사람은 모두 감시자의 립장에서 보는것에만 관심을 기울였지만 1960년대이후부터 전산 그리고 전자산업의 발달로 피감시자의 립장에서 보는 혹은 감시하는 기능도 함께 발달등장하기 시작한다. 거듭 말해 피감시자가 자발적으로 감시행위에 참가하는것이다. 감시를 즐겨 받음으로써 돌려받을 리익이 더 크다고 생각하여 자기에 관한 신상정보모두를 감시자에게 즐겨 넘기는것이다. 이런 초-범시를 정의하면 《보는것에 심취한 나머지 보이는것에 신경쓰지 않음》과 같다. 디즈니랜드 놀이터나 유명연예인을 보기 위해 깔려죽을 각오를 하고도 모여드는 《리얼리티 쇼》같은것이다. 이를 《중인환시(衆人環視)》 혹은 《스펙터클(spectacle)》이라 하며 초-범시라 번역한다. 오웰이 못본것 가운데 하나가 인간은 스스로 감시당하고 보이기를 원하는 본능이 있다는것이다. 이런 감시당하고싶은 본능에서 스펙터클이 가능해진다. 연예인들일수록 중인환시에 환장이 날 정도이다. 그래서 사생활을 고의로 언론에 흘리기도 한다. 푸코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들어 스펙터클사회가 감시사회로 변했다고 했다. 그런데 20세기에 와서는 전자, 전산사회로 변하면서 스펙터클과 감시의 사이가 불분명해지고말았다고 한다. 둘이 하나로 뭉개지면서 범시는 등-범시가 된다. 등-범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것이 바로 역-범시이다. 이번 룡산참사에서 용역깡패의 살수장면촬영은 역감시의 좋은 례이다. 백인경찰의 로드니 킹이란 흑인구타장면을 촬영한 장본인은 일개 시민이였다. 이 사진 한장이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덮여지고말번 하였다. 역감시의 좋은 례이다. 《청와대》에서 이메일발송발각도 모두 역감시의 덕분이다. 벤담도 쇠관을 통해 간수가 죄수와 통화하는 통로를 만들려 했지만 역으로 죄수가 간수에게 말할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페기하였다. 벤담의 판옵티콘은 결코 이런 역감시를 허용하는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감시는 있어도 역감시는 없다. 그러나 전자산업은 역감시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그의 판옵티콘은 비대칭적일방통행적이였다. 역감시는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려 출발했지만 지금 조, 중, 동은 오히려 감시의 대상이 되고말았다. 조, 중, 동을 감시하는 언론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서프라이즈》 등 전자매체언론은 역감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한국》의 《참여련대》나 《경실련》같은 시민단체의 역감시역할은 세계적이다. 리명박《정부》와 《한나라당》은 이 역감시장치의 뿌리를 뽑으려고 지금 서두르고있다.
《우리가 오히려 당신 태형(Big Brother)을 감시하고있다》
범시가 감시자에서 피감시자에로 향하는 일방적감시라면 역감시는 그 반대로서 일방적이다. 여기서 쌍방향적보기와 감시가 자연히 대두될수밖에 없다. 이런 쌍방향적인것을 바로 《신-판옵티콘(syn-panopticon)》 혹은 《등-범시》라고 한다. 역감시는 공개되는 정보에 한에서만 감시를 할수 있다. 힘과 권력을 모두 가지고있는 상황에서 역감시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2001년 정보공개법개정안을 놓고 론난이 된적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찬성할리 없었다. 미국 FBI의 도청장치를 카니보어나 에쉘린이라고 하는데 시민들은 이의 공개를 강력히 요청했지만 FBI가 말을 듣지 않자 1999년 10월 22일을 《에쉘린파괴의 날》로 정하고 전세계해커들이 총동원하여 인터네트를 마비시키고 주요정보를 파괴하고말았다. 《한국》에서 리명박《정부》가 지금 시도하고있는 《정보통신법》이 얼마나 성공할지는 미지수이다. 앞으로는 《한국》내뿐아니라 전세계전자시민들(네티즌)이 공동으로 등-범시를 만들어나갈지는 큰 과제가운데 하나이다. 등-범시는 결국 힘의 균형과 권력과 경제력 등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가 평등해야 하고 평균적이여야 함을 전제한다. 다시말해서 서로 쌍방향으로 감시하자면 감시도구와 장치조직력 등이 균등해야 하는데 지금 《실용정부》는 이를 파악, 시민단체들에게 돌아가던 모든 예산을 삭감 내지 페기하고있다. 그리고 초불시위에 참가하였다고 하여 무려 1 400여 시민단체들을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있다. 쌍방향감시의 균형이 엄청나게 무너져내리고있는 순간이다. 2009년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역-감시를 해낼수 있느냐의 시금석의 해이다. 지금 MB가 점점 태형으로 변해가고있다. 1998년 메히꼬에서 반군지지자들은 《우리는 당신 태형을 감시하고있다.》라는 구절로 정부전자집을 해킹해버렸다. 시위현장에서 경찰들의 한무리는 시위자를 채증한다. 시위자들도 역으로 채증을 한다. 그러나 한쪽은 힘을 가지고있지만 다른쪽은 그렇지 않다. 이런 힘의 불균형속에서 쌍방향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결국 범시의 문제는 한 사회의 평등과 균등의 문제로 귀착되고만다.
중인환시속 《아리랑》축제
여기까지와 우리는 벤담이 18세기말에 좋은 의미로 구상한 판옵티콘이 결국 《본다》는 철학의 근본문제와 우리 사회의 구조문제와 련관이 되는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오웰의 《1984년》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니고 차라리 자본주의국가에 해당되는 예언이라는것도 새삼 알게 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1984년》의 영사라는 사회는 북 사회, 태형(Big Brother)은 수령 그리고 평양거리에는 텔레스코프로 치장되여있을것이라 생각했을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반대로 되여가고있다. 이 마당에 북의 생각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이란 말을 판옵티콘과 련관시켜 한번 생각해보자. 감시와 처벌이 가장 심한 사회는 군대병영사회일것이다. 병역기피를 하려는 가장 큰 리유는 아마도 개인의 사생활이 감시당하고있는것이 싫어서일것이다. 그러나 보라. 항일유격대원들은 징병도 모병도 아닌 본인들스스로가, 남녀로소가 자진해서 참가한 대원들이다. 심지어는 10살전후의 소년대원들은 부모의 만류와 유격대장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유격대에 합류한 대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항일유격대는 초-범시 혹은 수퍼-판옵티콘의 사회였다. 해방후 이런 유격대원들이 입국하여 이들이 주축이 되여 나라를 세웠다. 그런 의미에서 초-범시적 대스펙터클사회이다. 이들이 만드는 정치는 그래서 《리얼리티 쇼》와 같았다. 깔려죽을 각오를 하고 공연장에 몰려드는 젊은이들같이 인민대중들은 나라세우는데 신명나있었다. 《아리랑》축제에 어린아이들을 강제동원했다고 하지만 이들은 공연을 초-범시적으로 자기 정보를 주고 스스로 관람하고 공연도 하는 중인들의 환시속에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이들이 과연 감시속에서 공연을 하는 벤담의 원형감옥 혹은 판옵티콘속에 있는 광대라고는 보지 않는다. 마치 서커스단의 단원같지는 않다고 본다.
정치생명공동체와 탈-범시
그리고 수령과 인민대중은 얼마나 쌍방향적인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에서와 같이 전체와 하나는 서로 상호교호작용을 하면서 서로 바라보는 수평적관계이다. 하나는 전체를 하늘같이 여기는 《이민위천》의 정신으로 그리고 전체는 하나를 태양같이 여기는 그래서 등-범시 혹은 신-판옵티콘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전체와 하나를 묶는 띠는 《일심(一心)》이다. 일심단결, 그것은 전체와 하나가 다시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있는 단위생명체라는것이며 이를 두고 《정치생명체》라고 한다. 《본다》의 문제로 결국 다시 돌아왔다. 감시이든 주시이든 환시이든 본다는 문제는 이미 주관에 중점을 두는 견과 객관대상에 중점을 두는 시사이의 관계도 애매하고 확정을 지을수가 없다. 그리고 감시주체와 감시대상의 한계도 결정지을수 없다. 전산, 전자시대의 《본다》의 의미가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이것이 감시와 스펙터클의 관계도 서로 불가분리적이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본다의 구조는 전체와 하나의 관계로 귀결되고만다. 벤담은 자기의 판옵티콘구상이 실현되지 못함을 비분강개하면서 생을 마쳤지만 푸코는 말년에 와서 자기의 감시리론의 한계를 절감한 나머지 주저 《감시와 처벌》이후 결국 문제는 인간의 주체문제라는 착안, 《자기 개발(technologies of the self)》에 열중하다 생을 마쳤다. 그래서 푸코는 자기의 기술을 《통치의 기술(technologies of government)》과 조화시키려 노력했지만 결론을 보지는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푸코의 《자기 개발》은 고대밀교에 해당하는 령지주의에서 영성개발하는 기술과 류사한것으로 결국 《본다》는 문제가 자기를 본다는 내면화와 대상을 본다는 외면화와 분리될수 없음을 발견하고 주객합일의 자기 개발없이 통치의 기술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이는 결국 공자가 이룩하려는것이고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로 요약될수 있을것이다. 수신제가(자아의 기술)와 평천하(통치의 기술)를 조화시키는 요체는 《이민위천(以民爲天)》이다. 이것을 두고 푸코사상의 전진인지 후퇴인지는 속단할수 없다. 다만 그의 사상에 잘못이 있었던것이 아니라 이 글의 모두에서 본바와 같이 《본다》의 감각이 가지고있는 구조적인 숙명이라고 할수 있다. 본다의 애매성은 판옵티콘 그자체를 해체시키고만것이다. 그러나 이 해체의 자리는 공백이지만 거기서 주체가 움터올라오고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자아의 기술과 통치의 기술을 조화시킬것인가. 인간내면의 주체를 개발하는 기술과 천하국가통치의 기술을 어떻게 련관시킬수 있을것인가?
《평등해야 건강하다》
평등해져 감시하는자와 감시받는 그자체가 없어져 판옵티콘자체가 무용지물이 된 상태를 사회학자 보인은 《탈-범시》 혹은 《포스트-판옵티콘(post-panopticon)》이라 했다. 탈-범시가 나오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힘의 불균형과 불평등을 전제로 해야 하기때문에 결국 등-범시를 이룬다는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벤담이 구상한 판옵티콘은 이러한 자본주의사회구조를 그대로 전제하고야 가능한 구조이다. 거의 250여년간 그 수명을 유지해오면서 지금 해체에 직면한 리유도 쌍방향적감시가 가능한 전자매체때문이다. 판-범은 전체와 하나의 관계의 문제 그리고 옵티콘-시는 전체와 하나사이의 관계작용이다. 그래서 판옵티콘의 철학적문제성은 전체와 하나사이의 작용의 문제이다. 판옵티콘이 문제가 되는것은 다름아닌 하나와 전체가 분리되여 서로 객관시하면서 보고있기때문이다. 하나가 전체를 감시하는 범시 그리고 그 반대인 역-범시 그리고 서로 쌍방적인 등-범시로 진화했다. 결국 하나와 전체가 력동적상호작용을 하는 관계는 전체가 하나를, 하나가 전체를 위하는 작용관계이다. 이는 이미 본다는것자체도 없어진 작용 그자체만 남는 관계이다. 이를 탈-범시라 한다. 이러한 탈-판옵티콘은 《유격대가 고기라면 인민은 바다》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될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회고록은 이렇게 쓰고있다.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였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였다.》(1권 머리글 2페지) 1937년 천도교 교령 박인진은 김일성사령관에게 《장군도 숭상하는 대상이 있느냐?》고 묻자 《…물론 나에게도 신처럼 숭상하는 대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민이다. 나는 인민을 하늘처럼 여겨왔고 인민을 하느님처럼 섬겨오고있다. 나의 하느님은 다름아닌 인민이다.》(5권 369페지)라고 대답한다. 남《한》보수들과 세계렬강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북의 진정한 힘은 핵무기도 미싸일도 아닌 지도자는 한없이 낮은 곳에 림하고 인민을 하늘같이 모시라는 이 《이민위천》, 《통치기술》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주체사상은 다름아닌 《자아의 기술》이며 《이민위천》은 《통치기술》이다. 이러한 《이민위천》과 주체사상의 결합은 인민과 지도자가 일심동체가 되게 하여 이 지구상의 무적함대로 등장하고있다. 로작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는 《인민대중이 력사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하자면 반드시 지도와 대중이 결합되여야 합니다. 인민대중은 력사의 창조자이지만 옳은 지도에 의하여서만 사회력사발전에서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할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지도자의 통치기술과 인민의 주체간의 력학적관계가 설정돼있으며 이에 대한 규명이 주체사상연구의 근간이라고 할수 있다. 지도자와 인민사이는 결코 감시와 처벌이란 판옵티콘적관계가 아니다. 인민과 지도자는 상호작용 그자체만의 관계이다. 통치의 기술과 자아의 기술의 어우러짐,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사회의 눈의 가시이다. 벤담의 범시이든 전자시대의 등시이든 그 자체가 이미 인민과 대중으로부터 유리와 괴리를 전제한것이다. 《하나》와 《전체》사이의 균렬을 전제한것이다. 그 균렬자체가 없어진다면 이미 그것은 범시자체가 없어진 탈-범시이다. 인민대중을 하늘같이 여기지 않고 소모품같이 여기고 선거철만 되면 여론 조작의 수단으로 당선만 되면 공권력의 이름으로 인민대중을 폭압하는 구조속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그런 곳은 감옥의 구조이다. 감옥이 없는 곳엔 사회자체가 감옥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할것이다. 차별자체를 인정하지 않고는 생명유지가 불가능한 자본주의는 병든 사회이다. 리처드 윌킨스는 《평등해야 건강하다》(후마니타스, 2005)에서 인간의 평등과 불평등은 수명과 질병의 종류까지 결정한다고 하면서 평등하지 않으면 건강한 사회가 될수 없다는것을 주장하고있다. 끊임없이 감시하고 감시받아야 하는 구조속에 우리는 지금 로출돼있다. 누가 누구를,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두고 지옥같은 동토의 나라, 감옥이라고 하는가? 인민대중이 지도자와 원쑤지간이 되고 나아가 이것이 내면화되여 인민이 인민을 서로 감시하는 그곳이 지옥이고 감옥이다. 그래서 북의 사회는 초이든 역이든 공이든 《판옵티콘》자체를 적용하는것이 무의미하다. 하나와 전체의 경계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누가 누구를 감시한다는것자체가 없기때문이다. 그곳에서 감시와 처벌의 대상은 이런 정치생명체 그자체를 파괴하려는 그 모든 외부세력과 내부세력이다. 그래서 북에서 말하는 감시라는 말자체가 남과는 다른것이다. 남에서 지도자가 국민들을 감시하거나 국민들(시민단체)이 당국자를 감시하는것으로서의 역-감시로서의 감시이지만 북에서는 그런 감시가 아닌 생명체로서의 정치공동체를 지켜내는 의미의 감시이다. 범시자체를 감시하는 메타-범시같은 CCTV가 평양에 없으라는 법은 없을것이다. 이를 체제유지라고 비난하는것은 자본주의가 보는 또 다른 눈일뿐이다. 이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뿐이다.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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