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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경은 미닫이와 덧문까지 꼭꼭 닫아놓은 컴컴한 방안에 홀로 누워 물끄러미 천정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는 볕에 타지 않은 흰 얼굴에 코밑에는 검스레 수염이 돋고 뒤통수를 받친 팔에 푸르스름한 입묵자리가 보이는 청년이였다. 그의 머리맡에는 책들이 널려있었고 한쪽에는 종이를 덮어놓은 물대접이 놓여있었다. 그 종이 한쪽귀머리는 대접속에 빠져 축축히 젖었는데 거기서는 시퍼런 잉크가 배여나와 물빛을 흐려놓고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그의 눈망울에는 한량없는 무료와 애수가 흐르고있었다. 그는 지난해 경성2고보에서 동맹휴학에 참가하였다가 강제출학처분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온후 지금까지 방안에만 들어박혀있었다. 장차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며 무엇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지향도 결심도 분명히 가지지 못한채 매일매일을 보내고있는것이였다. 비록 학창의 꿈을 빼앗기고 벽촌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시대의 문명에 잠시나마 접근했던 그로서는 농사에 몸을 잠그기는 어려웠으며 그렇다고 사회운동에 나서 돌아가기는 그의 사상적지향이 아직 명백치 않았다. 재학당시에 그는 서울 뒤골목책방에 드나들면서 좌익소책자들을 사서 탐독하는 과정에 맑스-레닌주의사상에 접하게 되였고 학교내의 비밀독서회에 망라되여 공산주의사상을 열렬히 옹호하였다가 출학처분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지세경은 채 꽃피지 못한 리상세계의 환상만을 간직한채 촌으로 돌아왔으며 그것은 어느덧 자신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한 반항과 불만으로 가득찬 헤여날수 없는 막연한 고민의 나락속에 깊이깊이 잠겨들게 하였다. 새문을 닫아놓은 아래방에서 어머니의 짜증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아버지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울리고 어머니의 지청구가 똑똑히 들려왔다. 《또 다툼이로구나.》 지세경은 늙은이들의 말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손에 잡히는대로 책을 집어들었다. 무슨 신경병에 대해 쓴 글줄이 무심히 눈에 들어왔다. 극장의 관람석에 앉아 연극을 보면서 자기가 문득 저 무대에 뛰여올라가 소리를 질러 소란을 피운다면 그때에는 어떻게 될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자신을 끝없이 괴롭히고 그때문에 불안속에서 허덕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이 공허한 생각을 거듭해온 결과에 일어나는 일종의 지속적정신병이라고 한 구절이였다. 이건 무엇에 필요한가? 이 부분은 무엇때문에 접어놓았을가? 지세경은 분명하게 생각되는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와 같이 공허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쉽게 맞다들릴수 있는 정신착란상태였으며 그때문에 두렵게 읽었던 대목이였다. 그래 그렇지, 이건 나에게 필요했었다. 지세경은 줄곧 자기 생각에 빠져 아래방에서 들려오는 그 귀찮은 말다툼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늙은이들의 음성은 점점 높아지기만 하였다. 《그래 령감은 저 자식 하나를 뭘루 만들 작정이요. 밤낮 천정을 쳐다보고 한숨만 쉬구있게 만들 생각이요. 재산 있구 인물맵시 잘난 딸을 가진 집안에서 혼사를 하자는데 령감은 무엇이 못마땅해서 승인을 못하오?》 《제가 귀찮다는데 낸들 어떻게 하라는거요 엉? 농사짓는 집 자식이 농사군 딸을 데려다 살림을 채리면 되는거지, 되지도 않을 가시집 덕을 바라고 혼사를 한단말이요?》 아버지의 윽벼르는듯 한 고함소리다. 늙은이들은 요즘 틈만 나면 마주앉아 혼사다툼이다. 얼마전에 신파 《혜산상점》주인인 정장로가 지세경의 아버지에게 은근히 혼사말을 건네였다. 서울 가 공부하고있는 외동딸을 데려다 지세경이와 혼사를 시키고 그에게 상점일을 떠맡기였으면 하는것이 정장로의 속심이였다. 비록 가난하게는 살지언정 남달리 영민하고 의젓한 지세경이를 정장로의 집안에서는 오래전부터 탐내고있었다. 여기서 정장로의 사위인 《동아일보》신파지국장 리풍우가 적극 나서서 자기 처제와 지세경의 혼약을 성사시켜보려고 왼심을 쓰고있는것이였다. 그러나 지세경은 이 혼사가 마음에 없었다. 우선은 재산때문에 누구에게 매이고싶지 않았고 평생 상점을 경영하는 장사군이 되고싶지 않았으며 서울 가서 공부하고있는 미모의 딸이 탐탁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알지도 못하는 양서쪼각을 끼고다니며 《코-티》의 분냄새를 자랑삼고 뾰족한 구두로 죄없는 고향둔덕길을 두드리는 허공뜬 도시처녀들의 생활에 대한 질시와 환멸이 있었다. 봄이 되면 산등성이며 밭고랑에서 바구니 끼고 호미 든 농촌처녀, 여름이면 수양버들 우거진 시내가에서 청청 물방치소리를 울리군하는 농촌처녀의 순박한 모습이 얼마나 좋은가. 《조선의 녀성아, 농촌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내가 부르짖는 말이 아니요 조선이 부르짖는 말이며 녀성 한사람을 위한 말이 아니라 조선녀성 전부의 복리를 위한 절규이다!》하고 이즈음 뜻있는 사람들은 부르짖고있었다. 지세경이도 이 성스러운 호소에 자기의 목소리를 합치였다. 그리하여 그의 소박하며 일견 단순하기도 한 련애관이 형성된것이였다. 그에게는 소박한 농촌처녀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는 쌍별이를 사랑하였다. 어릴 때부터 지세경은 쌍별이와 함께 자랐으며 커서는 남몰래 그를 사랑하였다. 그가 쌍별이를 은근히 사모하며 가슴을 태우고있다는것을 늙은 내외간은 알고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너그럽게 대해주었고 어머니는 그것을 못내 섭섭해하였다. 《아들 하나 있는걸 난 그렇게는 못하겠소.》 어머니의 목멘 소리가 지세경의 귀를 아프게 허볐다. 《자식이라고 그 하나밖에 없는데 농사군을 만들다니… 남같이 의젓하게 가꾸어 내세우지 못할망정 할짓이 없어 농사를 시킨단말이요. 아니 그래서 뼈빠지게 벌어 서울공부 시켰소? 아이구, 내 가슴야.》 철썩 무릎을 치며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지세경은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 서슬에 손은 물대접속에 풍덩 빠졌다. 엎질러진 물이 바지가랭이를 적시고 삿자리우로 흘러갔다. 지세경은 좁은 방안을 오락가락하였다. 삿자리에서는 젖은 몽당이 기여올라 쿨적거렸다. 그는 책상우에서 잉크병도 쿵 들었다놓고 책꽂이도 몇번 잡아흔들어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가 웃방에 있다는것을 알리려 하였고 자기가 있다는것을 알면 다툼은 끝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세경정도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듯 말다툼은 그대로 계속되였다. 그는 화가 나서 사이문을 잡아젖히려 하였다. 그때 손에서 종이뭉테기가 뚤렁 떨어졌다. 그것은 물대접에 덮었던 종이였다. 지세경은 얼른 구겨진 종이뭉테기를 집었다. 그 순간 《세경군, 나는 요즘 몹시 군이 그리워.》하는 글줄이 펀뜻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며칠전 리풍우한테서 온 편지였다. 그는 아쉽게 너덜거리는 젖은 편지쪼각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리풍우는 그의 소학시절의 스승이였고 한고향사람이였다. 그는 문학과 력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였고 중학때의 지세경 역시 감상적인 청년으로서 문학을 사랑하였으므로 그들사이는 남달리 각별하였다. 고보에서 출학을 당한 이후에 지세경이 유일하게 교제하고있는 사람은 리풍우였다. 그가 생각하건대 리풍우는 다난한 시대사변의 집요한 목격자이고 비평자였으며 부러워할만한 의지와 동정심을 가진 이 나라의 량심인이였다. 리풍우는 언제나 너그럽게 세경이더러 적적한 때면 혼자 머리를 썩이지 말고 놀러 오라고 하였다. 그는 너무도 일찍 날개죽지를 얻어맞고 퍼득이는 어린 넋을 가엾이 여겼고 자기의 앞길을 탐구하듯이 이 청년의 나아갈바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리풍우가 찾은 길은 아직 없었다. 다만 그는 나라잃은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자기 한몸보다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하며 그리로 가는 길은 멀리에서 찾을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바로 자기 주변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민족계몽이다. 하고 리풍우는 확신을 가지고 력설하였다. 어디서나 글을 배우고 글을 배워주어야 한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것도 인민이 몽매했기때문이다. 나라를 빼앗은 일제를 미워하기전에 몽매했던 우리자신들을 먼저 통탄해야 한다. 이것이 리풍우의 지론이였다. 지세경은 젖은 손바닥을 펼치고 오래도록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리풍우가 서울에 출장가있으면서 보낸것인데 자기가 이번 신파로 돌아갈 때는 유명한 시대계몽가이고 애국자인 유재민선생을 모시고 갈터이니 꼭 신파로 돌아와 선생의 강연을 들으라고 부탁하였다. 《군, 황량한 이 땅에도 민족의 등불들은 살아있다. 기뻐하라, 그것이 어쩌면 래일의 우리 민족의 찬연한 넋일지 모른다!》 리풍우는 편지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지세경의 공허한 머리속에 이 편지는 일종의 기대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안방에선 여전히 말다툼이 계속되고있었다. 이제는 아들문제가 아니라 이것저것 고달픈 생활의 하소연이다. 성난 아버지는 목침으로 방바닥을 땅땅 울리면서 울분을 터뜨렸다. 《내가 술먹고 투전놀음이라도 해서 못산단말이요?》 《술 안먹고 투전 안하면 그만이요? 쪼글쪼글 늙은년을 사람들앞에 거지처럼 해내세워도 마음이 편하오.》 지세경의 머리는 다시 캄캄해졌다. 리풍우의 편지가 환기시켰던 그 아지 못할 보라색 꿈조차 자취없이 사라졌다. 이윽고 아버지의 깊은 한숨소리가 지세경의 가슴을 아프게 허볐다. 《그러지 말고 좀 더 참아봅시다. 세경이도 왔은즉 설마 우리가 한평생 이꼴이야 되겠소?》 그것은 측은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다. 몇십년을 두고 달랬을 그런 말로 지금 아버지는 어머니를 달래려고 하는것이다. 어머니는 그 말을 믿고 한해두해 속아 살다가 이제는 허리가 꼬부라지고말았다. 어머니의 푸념은 그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마치 지금도 그 말에 속고속으면서 허망한 기대를 몽상하기라도 하는듯이… 문득 끊어져버린 부모들의 그 처량한 하소연때문에 지세경의 가슴은 더욱 쓰려났다. 형언할수 없는 련민의 정이 눈구석을 뜨겁게 하였다. 결코 나아지지 못할 미래, 나아지지 않을 생활의 고역이 아버지, 어머니의 일생보다도 더 길고 지루하게 이어져있는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자기의 일생 그리고 분명히 있게 될 자기 아들의 일생을 합한것보다도 더 장구할지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고 심장이 얼어드는듯 하였다. 인생이라고 태여나서 마음놓고 밥 한번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고 지지리 가난에 쪼들리우다 허망하게 죽는 우리들의 일생, 아버지들이 그랬고 우리들이 그랬고 또 우리의 후대들이 그래야 할 같은 일생… 지세경은 으스러지게 주먹을 틀어쥐였다. 손바닥에서 물이 솟아올라 삿자리우에 뚝뚝 떨어진다. 젖은 리풍우의 편지가 주먹안에서 비틀리우고있는것이다. 그는 괴로왔다. 그는 답답한 이 방안의 환경만이라도 탈피하고저 벽에 걸린 낡은 학생모자를 집어썼다. 지세경은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울 땐 조용히 들에 나가 지치도록 돌아치군하였다. 지세경이 토방에서 뽀얗게 먼지 오른 운동화를 꺾어신고 마당에 내려섰을 때 마침 삽짝을 밀고 강성태가 들어섰다. 무명조끼주머니에 한손을 지른 강성태는 여유작작하게 마당을 굽어보고있었다. 지세경은 모자를 벗고 그의 앞에 내키지 않는 인사를 하였다. 《응, 세경인가?》 강성태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 세경의 순편치 못한 얼굴을 살펴보았다. 《어제밤에 내가 한 부탁을 좀 생각해보았나? 자네가 선생으로 나와주겠다고만 하면 오늘밤부터라도 야학을 열 차비네.》 《백지주어른에게서도 권고를 받았습니다만 저는 응해줄 계제가 못됩니다. 협화회야학을 해서 얻을것이 무엇입니까?》 《이사람, 자네 공부깨나 한 사람인데 글 모르는 사람들에게 글 배워달라는 부탁이야 마다할수 있는가?》 《모르겠어요, 나는 생각이 없습니다. 다른데서 물색해보십시오.》 지세경은 뒤통수가 불룩한 머리에 모자를 꾹 눌러썼다. 도대체 야학이란걸 달가와하지 않았고 더구나 협화회야학을 증오했다. 토방에는 어느새 지석참로인이 나와 이 광경을 지켜보고있었다. 강성태는 벌써 두번째로 지세경을 만난다. 지세경의 거동을 보니 오늘은 틀린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그는 말없이 돌아서 삽짝을 향해 몇걸음 걸어가다가 여유있게 한마디 하였다. 《정 싫다면야 할수 없지. 래일부터는 토성공사에 나와야 하겠네. 그건 한달이 걸릴지 두달이 걸릴지 모르는 공살세. 난 세경이가 야학일이나 좀 봐주면 부역같은건 일체 면제해줄가 했는데… 자 그럼 그리 알게.》 강성태는 즉시 선자리에서 경찰에 보고할 공사동원명부에 세경의 이름을 적어넣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얘, 넌 도대체 어쩔려고 그러니?》 석참로인은 화가 나서 떠들기 시작하였다. 《늙은것이 아득바득 벌어서 남과 같이 공불 시켰는데 무슨놈의 동맹휴학에 참가해가지구 퇴학을 맞어? 넌 이 집이 되여가는 꼴을 눈뜨고 보지 못하냐? 밤낮 천정만 쳐다보고 들어박혀 하는 수작이 도대체 뭐냐?》 지세경은 골치가 아픈듯이 이마살을 찌프리고 망연히 그 어딘가를 바라보고있었다. 그는 늙은이의 푸념이 끝나기만을 초조히 기다리고있었다. 석참로인은 아들의 그러한 태도가 더욱 언짢아 음성을 높였다. 《너 이 늙은것의 성화가 그리도 귀찮거든 어디 실컷 하고픈대로 해보아라. 하루 세끼 죽물이라두 떠먹는게 쉬운 일인줄 아니? 너 이걸 좀 봐라. 밤낮 하늘만 쳐다보고 서있는 물방아간에 숱한 세금이 나왔어.》 석참로인은 주머니에서 뻘건 세금고지서를 꺼내여 세경의 눈앞에 내휘두르며 화를 내였다. 《왜놈들은 눈이 뻘개서 긁어만 가지 자식이라는건 멋모르고 애비의 속만 태우지, 도대체 누굴 믿고 살라는거냐. 에익 망할놈의 자식같으니라구.》 지세경은 그래도 아무 말이 없었다. 부엌에서 강아지가 뛰여나와 세경의 바지가랭이를 물고 장난을 쳐도 아무감각없이 서있었다. 뜨물함지를 들고 밖에 나온 어머니가 주춤거리며 아들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령감하고는 곧잘 성화를 내여도 아들앞에서는 상냥하기 이를데없는 늙은이였다. 《세경아, 너 정말 이 촌구석에서 야학일이나 하구 속을 썩일테냐? 나하구 같이 신파루 건너가자. 요즘 듣자니까 서울 가 공부하던 딸두 내려와있단다.》 《어머니, 내가 그런 집 사위가 되는게 그렇게두 부러워요. 돈때문에 머리를 숙이구 돈때문에 매워사는게 그렇게두 소원입니까? 돈을 먹고 자란 녀자들은 우리 집에 들어와 이틀도 견뎌내지 못합니다.》 《아이구, 그러니 어쩐단말이냐? 토성공사라는게 어떤건지 알기나 하니.》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해서 돌아섰다. 뜨물함지를 안고 돼지우리로 걸어가는 늙은이의 허리는 꼬부장하게 휘여졌다. 지세경은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애써 눈길을 돌렸다. 《암만 그래봐야 소용이 없다.》 석참로인은 여전히 언짢은 목소리로 아들을 꾸짖었다. 《나두 한때는 독립운동이요, 천도교요 하면서 나서 다니는 사람들을 수태 만나봤구 내자신이 그들을 성심껏 돕기두 했었다. 그래 나한테 차례진게 뭐니? 재산이냐? 지체냐? 일본놈들은 갈수록 영악스러워지구 살기는 갈수록 어려워만진다. 너 신파읍에만 나가봐라. 한때 제노라던 운동가들도 포목점을 차리구 돈벌이하는 판국이다. 〈혜산상점〉주인인 정장로령감이 그렇지 않았느냐. 그 령감두 한때는 〈신간회〉회장이라는걸 했어. 하물며 너같은 애숭이가 도대체 뭘 할테냐? 군말말구 여기서 착실한 일자리를 구해라.》 로인은 기가 나서 문을 후려닫고 방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지세경은 머리를 수굿하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리고 발길 미치는대로 향방없이 걸었다. 될수록 멀리, 될수록 빨리 이 지긋지긋하고 짜증나는 생활로부터 격리되고싶었다. 그는 큰길을 버리고 좁은 밭 사이길을 따라 걸었다. 땅은 질쩍거렸다. 발바닥에는 온통 진득거리는 검은 흙이 무겁게 매달렸다. 어디서 쭐렁쭐렁 물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해묵은 말꼴같은 잡초들이 마구 뒤엉킨 좁은 도랑밑으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눈에 띄였다. 덤불숲에서는 이따금 푸릉푸릉 새들이 날아난다. 그는 마른 풀덤불에 신발을 문대고 조금 거뿐해진 걸음으로 도랑을 뛰여넘었다. 그 다음은 푸석푸석한 흙이 밟히는 높은 둔덕밭들이 펼쳐져있었다. 지난해의 수수그루가 삐죽삐죽 돋아난 그 밭둔덕에는 돼지발자국들이 수없이 찍혔고 드문드문 주둥이로 땅을 헤집어놓은 자리들이 꺼멓게 보였다. 지세경은 드디여 머리를 들었다. 아무 거칠것이 없는 자연의 들을 보게 되리라는 짧은 충동이 그를 기쁘게 하였다. 그러나 눈앞에는 들이 아니라 작은 물방아간이 마주 서있었다. 그것은 몇해전에 아버지가 목돈을 들여 세웠다는 물방아간이였다. 아버지는 이 물방아간을 돌려 아들의 학비를 충당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옛날의 일이다. 마을사람들의 살림이 쪼들리자 방아간도 궁색해진것이다. 지세경은 일종의 어떤 향수에 사무쳐 가까이 다가갔다. 겨우내 내버려두었던 방아간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비바람에 지붕이 들리고 처마가 처져내렸으며 울타리가 자빠져있었다. 지세경은 천천히 방아간 뒤로 돌아갔다. 농군들이 울타리를 뜯어다 깔고 자고 불을 피우기도 해서 볼나위가 없었다. 게다가 비에 둔덕이 무너지고 그때 흘러내린 모래자갈이 방아간울타리를 반나마 파묻어버렸다. 지세경은 방아간 뒤구석에 세워놓은 삽을 집어들었다. 꺼멓게 멍이 진듯한 박달나무자루에는 희슥희슥 곰팡이 피였던 자리가 있고 삽날은 시뻘겋게 녹쓸어있었다. 그는 삽을 들고 보도랑으로 오르내리며 여러군데 끊어진 자리에다 떼를 떠다놓고 구레로 새빠진 물줄기도 모두 보도랑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이것이 무엇에 필요하며 이 부질없는 손질이 무엇을 위한것인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그 일을 하였다. 짓밟힌 자기의 생활에 대한 막연한 애착이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였다. 지세경은 방아간으로 들어와 방아확에 들어간 흙도 쳐내려다가 방아간대들보에 매달아놓은 펄럭거리는 백지와 북어 한마리를 보았다. 그 순간 그는 삽조차 움직일 힘을 잃어버리고 한동안이나 우두머니 서있었다. 그것은 며칠전에 아버지가 돈 일원오십전을 가지고 신파장에 건너가 쌀 엿되와 북어 세마리, 백지 한장, 막걸리 한되, 초 한가락을 사가지고 와서 어머니와 함께 《고사》를 지낸것이다. 그때 늙은 내외간은 샘물에다 손을 말끔히 씻고 바로 저렇게 대들보에다 백지와 북어를 매달아놓고는 이 방아가 하늘만 쳐다보고있게 하지 말아달라고 몇십번이나 엎드려 빌고빌었다. 지금 흙이 가득 들어앉은 이 방아확앞에는 커다란 떡시루가 놓여있었고 털털한 막걸리가 이 확주변에 비방울처럼 뿌려졌었다. 하얀 초가락도 이 확우에서 긴 시간을 연약한 불꽃을 날리며 타올랐고 그렇게 마지막까지 녹아버렸다. 지금 초물이 흘러내린 자리는 눈물자국처럼 번들거렸다. 쓰리고 아픈 가난의 흔적이다. 그러나 그날 아버지는 흥겨워 이렇게 한마디 하였다. 《기분이 이렇게 거뜬한걸 보니 방아가 움직이겠다.》 어머니도 웃으며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 갸륵한 정성으로 드린 백설기 고사를 지낸지도 한달이 지났건만 방아공이는 의연히 고개를 번쩍 들고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확만 들여다보고있었다. 지세경은 번쩍 손을 뻗쳐 대들보에 걸려있는 백지장을 와락 잡아챘다. 꽁꽁 말라비틀어진 북어가 땅바닥에 딩굴었다. 그는 그것을 발로 다시 차굴리고 비틀어진 물레쐐기를 고치기 시작했다. 자귀나 망치대신에 돌멩이를 틀어쥔 지세경의 손바닥은 얼얼하고 몇번 빗맞아 쐐기에 부딪친 손가락에서는 피가 흘렀다. 《방아를 고치는군.》 등뒤에서 소리가 났다. 지세경은 무춤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술에 거나해진 백지주가 상아목단장을 짚고서서 방아간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지세경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백지주는 능글맞게 히죽이 웃더니 모자를 벗어 단장손잡이에 씌워놓았다. 그는 쉽게 물러갈 잡도리가 아니였다. 《봄씨붙임을 하자면 겉곡을 찧어야 할테니 이 봄엔 방아를 손질해두는것도 좋을걸세.》 지세경의 손에서는 돌멩이가 뚤렁 떨어졌다. 그는 자기 의식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마나 부질없는 노릇에 정신을 팔고있었는가. 울분은 서서히 가슴에서 타올랐다. 그의 눈에서는 모멸당한 분노가 번쩍거렸다. 《에익-》 지세경은 와락 손을 들어 공이를 매달았던 줄을 확 나꾸챘다. 그 순간 쾅! 하고 무거운 공이가 확을 내려찧고 펄쩍 뛰였다. 그바람에 깜짝 놀란 백지주는 뒤걸음치다가 무엇에 걸채여 넘어졌다. 하얀 넙적 백고무신발이 번쩍 공중에 들리고 공작색비단조끼가 거꾸로 번쩍하였다. 지세경은 방아간을 뛰쳐나왔다. 《쾅, 치르르》《쾅, 치르르》 빈공이가 오르내리며 돌을 바수는 무서운 소음이 쏟아진다. 그것은 주위의 모든것을 순간에 짓누르고 집어삼킬듯이 맹렬하게 튀여오른다. 백지주는 정신없이 방아간으로 들어가 공이를 멈췄다. 무엇때문에 그에게 이런 돌발적인 행동이 필요했던지 그것은 그자신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간에도 그 산산이 짓부셔버릴듯한 짓누르는 소음이 두려웠다. 몇개의 밭지경을 지나 호젓한 들 저쪽으로 걸어간 지세경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밭둔덕을 아무렇게나 밟아치며 걸어온 자기의 발자국이 곧추 바라보였다. 그것은 지경이 없는 사래긴 밭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두동강으로 쪼개여놓은 가느다란 직선이다. 그 선으로 갈라진 한쪽의 습기찬 삼각형구획에는 연두색의 어린 풀이파리들이 파랗게 돋아났다. 걸을 때는 발밑에 아무것도 없는것 같던 그 땅이 지금은 거대한 어린 생명체를 안고 푸르게 누워있다. 신묘하고 장엄한 자연의 조화이다. 허리를 낮추 굽히면굽힐수록 그 푸른 밭둔덕은 더욱 푸르게 보인다. 지나온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여 그속에 스민 진미를 강렬히 감촉하듯이 그렇게 감촉하는 순간이다. 거기에는 순간마다 자라고 순간마다 약동하는 생의 맥박이 있다. 서서히 그러나 완강하게 이루어져가는 우주의 거대한 리치도 거기에는 깃들어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밖에 존재하나 항상 그 의식에 반영되여 자기 존재와 가치를 발산하는 자연의 신비이다. 지세경은 흐트러진 머리를 이마우에 드리우고 자연과 더불어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 생활에도 서서히 거대한 생명체를 부활시키는 저 자연의 품같은것이 있지 않을가? 그것은 순간순간에는 느낄수 없어도 시간이 흘러 저렇게 지나온 밭둔덕을 가로질러보듯이 지나온 생활을 더듬어보면 분명히 파랗게 쳐다보일 광휘로운 생활이 문득 도래할수 있지 않을가?… 나는 지나가고있다. 아무것도 없는 생활의 빈 공간을… 번민과 고독에 싸여 터벅터벅 가고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렇게 지나온 자국에서도 새파란 연록색 풀이파리들을 보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그것은 내가 자래운것이 아니라 대지가 자래운것, 거대하고 성스러운 인간들이 자래운 자취일것이다. 그것을 보고싶다. 내 비록 공허속에 헤매는 이 순간에조차 피와 땀으로 키우고있을 그 생활, 그 인간들을 보고싶다. 그러한 인간들은 어디에든 있을것이다. 그들이 누굴가? 그들은 어디에 있을가?… 지세경은 리풍우라도 만나고싶은 강렬한 충동을 어찌할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