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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산은 마지막 배로 강을 건넜다. 해는 지고 길은 어두워오기 시작하였다. 너펄거리는 바지가랭이를 얼추 접어서 무릎아래와 발목 두곳을 단단히 묶고 지하족허리에다는 지게 삼바오리 한가닥을 풀어서 칭칭 감은 다음 벌방의 절반밖에 안되는 산골 짧은 해꼴에도 백리길을 달아뺀다는 그 소문난 장사걸음으로 씽씽 내달았다. 지게다리 한쪽에는 지하족이 걸리고 다른쪽 다리에는 춘옥이가 싸준 밥꾸레미가 달렸으며 손에는 북어와 절군 고등어를 한데 접어 바오래기로 묶은 고기꿍지가 들려있었다. 권용산은 이런 차림으로 오늘 장마당에도 벌사마을에도 나들었으며 지금은 집으로 돌아오고있었다. 서산마루에 걸렸던 불그레한 노을이 사라지고 암청색 하늘중천이 점차 캄캄해오기 시작하자 창백하게 여문 달빛이 등뒤로부터 한결 선명하게 비쳐와 발부리로부터 긴 그림자를 내던졌다. 방아다리같은 검은 그림자가 그의 발밑에서 얼씬얼씬하고 지게뿔이 어깨우로 올리뻗쳤으며 지하족과 밥꾸레미가 량쪽다리끝에서 공중뜀을 하고있었다. 고요한 산골길에는 성급히 옮겨놓는 권용산의 발자국소리가 벼랑턱에 투닥투닥 덜맞쳐 마치 속이 비기 시작한 큰 진대나무를 두드려대는것 같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윽하고 다정한 생각이 굽이돌며 봄동산처림 화려한 꿈이 피여나고있었다. 권용산은 언젠가 꼭 한번은 김정숙동지에게 졸라서 통신쪽지를 가지고 사령부를 찾아가리라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무송이나 화전이나 안도가 아니면 좀 더 먼 북만쪽일수도 있고 어쩌면 아주 가까운 림강이나 백여리안팎의 장백 어디에 있을수도 있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밀영에 찾아가 김일성장군님께 도천리지하조직원 권용산이가 김정숙동지의 련락을 가지고 찾아왔다고 보고를 드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되면 권용산이는 세상에 태여났다가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는 영광을 지니게 되고 어쩌면 그이의 친근한 가르치심을 받게 될지도 모르며 혹시 산골농민으로서 유격대에 무슨 도움을 드리게 될지도 모른다. 권용산은 김정숙동지께서 공작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가실 때 자기를 유격대에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하면 어떻겠는가 하여 강성태에게 한번 비쳐본바 있었는데 그때 강성태는 대단히 노여워하면서 지하공작사업도 혁명인데 옳지 않다고 비판을 주기까지 했었다. 참, 유격대에 가서 총들고 싸우겠다는데 옳지 않을것까지야 있는가? 권용산은 며칠이고 속에서 내려가지 않아 남모르게 끙끙 앓고있었다. 권용산은 김정숙동지께 자기 마음을 실토정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유격대에 가면 몇가지 우점이 있겠는가? 하는것까지 곰곰히 생각하였다. 첫째, 자기는 힘이 세다. 힘이 세기때문에 밀영에서 나무 패는 일, 귀틀집 짓는 일을 비롯해서 힘으로 할수 있는 일은 도맡아 할수 있고 행군할 때에는 동지들의 배낭, 총 혹은 식량포대같은것을 메고갈수 있다. 둘째로, 자기는 걸음이 빠르다. 걸음이 빠르기때문에 부대의 바쁜 련락은 자기가 도맡아할수 있다. 그리고 셋째는 산세를 잘 안다. 산세를 잘 알기때문에 정찰같은것을 잘할수 있고 산골짜기에서 산전막이나 화전귀틀막을 찾아내는 일도 아주 잘할수 있다. 권용산은 어제저녁 집으로 내려와서 안해에게 제 속심을 슬그머니 비쳤다. 안해는 반대가 없었다. 그래서 권용산은 자기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유격대에 아주 필요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기 우점들을 말하였다. 안해는 대뜸 거기 대해선 반대의견을 말하였다. 유격대에서는 힘이 세거나 걸음이 빠르거나 하는것이 문제가 아니고 기본이 총을 잘 쏘고 때식을 번지고도 배고픈티를 내지 않고 전투랑 잘할수 있는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권용산에게는 이 두가지 큰 장점이 없는것이 문제라고 하였다. 오래간만에 안해와 마주앉은 저녁이였지만 권용산은 기분이 없어하였다. 그의 생각에는 자기보다 안해가 유격대의 생활을 더 잘 아는것 같았다. 권용산은 김정숙동지께 직접 청을 들여보리라, 그러면 강성태나 춘옥이가 하는 말처럼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권용산은 손에 들린 고등어꿍지를 가끔 눈앞에 들어보았다. 안해가 기뻐할것은 이것이다. 매양 공작원동지의 도움만 받고 그이께 때식 한번 변변히 권해보지 못한 안해이다. 그 안해를 기쁘게 하고 김정숙동지를 위해드릴 일을 생각하니 발은 날개돋친듯 가벼워졌다. 권용산은 13도구 세거리앞을 지나 도천리쪽으로 내려오는 개뚝밑에서 웬 사람이 얼씬하는것을 보았다. 권용산은 정신을 도사리고 개뚝옆을 지나가면서 나무그림자에 한쪽 어깨를 들이밀고 가만히 서있는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는 고르뎅양복을 입고 풍덩이를 눌러쓴 사나이였다. 그는 나무밑에서 나와 권용산이를 부지런히 따라오기 시작하였다. (가만, 이게 어떤놈인가?) 권용산은 신경이 곤두섰다. 13도구 세거리에서, 벌사촌 오리나무숲속에서 그리고 다시 여기에 문득 나타난 이자가 분명 자기를 뒤따르고있었던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놈을 꼬리에 달고 그냥 부락으로 들어가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약 이자가 벌사촌 주창범이와 만나는것을 눈치챘다면 일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워지며 벌사촌이나 도천리나 다 피해를 입게 될것이다. 어떻게 할가? 이놈의 정체를 좀 더 똑똑히 알아낼수는 없겠는가?… 권용산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사람을 향해 몇발자국 다가가면서 담배 한대 얻을수 없느냐고 하였다. 고르뎅양복을 입은 사람은 염낭을 뒤지더니 권연 한대를 집어주고 성냥을 그어주었다. 권용산은 그 사람의 허리춤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붙이고 오래 담배를 붙이면서 단추가 벗겨진 저고리안을 들여다보았다. 반짝거리는 무엇이 보이였다. 그것은 권총갑이였다. 그리고 아래턱밑에 칼자리같은 흠집이 유표나게 보이였다. 분명 13도구에서 본적이 있는 경찰이였다. (경찰이다, 이놈이 종일 따랐구나. 이제는 죄다 들장났다!) 그놈이 슬그머니 권총집으로 손을 가져가며 이쪽을 덮칠듯 가슴팍으로 뛰여드는 순간, 먼저 권용산이 비호같이 날아들어 놈의 면상을 후려쳤다. 이놈을 죽여 흔적을 없애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한것이였다. 경찰은 푹하고 꼬꾸라졌다. 권용산은 놈의 목덜미를 잡고 개울바닥으로 내리끌었다. 무거운 몸뚱이가 질질 끌리다가 철버덩 하고 물속에 떨어졌다. 그 순간 권용산의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하고 튕기면서 허리가 푹 꺾이는것을 느꼈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아주 먼곳에서 울리는것 같은 총성이 들려왔다. 권용산은 총쥔놈의 손을 갈겨버리고 물속에 대가리를 처박고 목줄을 눌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권용산의 손에서 놓여난 시체가 흐름을 따라 아래로 밀려내리고 자신도 함께 무릎이 꺾이면서 물속으로 들어가는것 같은 환각을 느꼈다. 권용산은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된다. 빨리 마을에 가서 알려야 한다. 그는 지게를 벗어버리고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손에는 고등어꿍지가 매달려 데룽거리고있었다. 그는 차츰 힘이 진해갔다. 도저히 걸을수가 없었다. 마을은 멀지 않은곳에 있었다. 불빛들이 반짝거리고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권용산은 언덕인지 풀더미인지 알수 없는 두두룩한 거밋한 땅을 두손으로 짚고 무릎을 꿇고 앉은채 마을의 명멸하는 불빛들을 넋없이 바라보았다. 김정숙동지며 안해며 강성태며 그리고 장인로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소리치면 금시라도 뛰쳐나올듯 한 거리다. 마을의 불빛들은 하나하나 어둠속으로 튀여나와 그를 향해 줄달음쳐 다가오는가 하면 갑자기 멀어지기도 하고 다시 손바투 다가왔다가는 또 아득히 멀어진다. 의식도 점점 몽롱해졌다. 이제는 불빛이 하나가 아니라 둘로 셋으로 겹쳐보이고 어떤 순간에는 온 마을이 불길에 싸인듯이 커보이기도 한다. 《여보!》 권용산은 힘을 다해 안해를 불렀다. 소리는 새여나가지 않았으나 그는 분명 큰소리가 날아간듯 하여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사위는 고요하고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여보!》 권용산은 또한번 힘껏 소리쳐불렀다. 그리고 이번에도 귀를 기울였다. 문득 그의 눈앞에 안해의 얼굴이 비꼈다 사라지며 반짝거리는 불꽃쪼각들이 흩어졌다. 권용산은 일어나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몸은 어디엔가 미츠러지고 깊고깊은 심연으로 빠져들면서 굳고 딴딴한 그 무엇이 이마에 부딪쳤다. 여긴 어딘가, 권용산은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몸이 편안하고 얼굴이 축축하였으며 생전 한번도 감수하지 못한 진하게 싱그러운 향기가 풍겨왔다. 그것은 흙이였다. 아, 흙냄새! 내가 어디에 쓰러져있는가, 내가 어째서 여기 누워있는가. 그러자 권용산은 드디여 자기가 경찰의 총에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을어구의 둔덕에 쓰러져있다는것을 감각하였다. 권용산은 기를 쓰고 머리를 들었다. 눈앞에 반짝거리는 마을의 불이 보였다. 한번 더 정력을 모아 머리를 들었다. 불빛들은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반짝거렸으며 손바튼 거리에 다가와있었다. (내가 여기서 죽다니, 아니 나는 죽을수 없다. 혁명을 어찌하고 죽겠는가!) 권용산은 어떤 기적같은 힘에 떠받들리여 땅을 딛고 일어섰다. 하늘이 돌고 마을이 공중으로 왔다갔다하였다. 권용산은 몇발자국 내디뎠다. 옆구리가 쑤셔오고 그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그는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몸의 중심은 유지된듯 하였으나 아픔은 몇갑절 더 심해졌다. 그는 또 몇걸음 내짚었다. 마을은 아주 가까와진듯 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권용산은 자기가 이런 몸으로 마을로 들어가서는 안되며 김정숙동지의 신상에 위험을 끼쳐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그는 서둘러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이제는 될수록 빨리, 될수록 멀리 마을로부터 떨어져야겠다는 한가지 생각만 꽉 차올랐다. 그는 온몸의 정력을 다하여 한발한발 다리를 옮기며 한치한치 톺아나갔다. 이윽고 권용산은 자기가 퍼그나 멀리 왔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마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을은 지척에 있는것 같았다. 불빛들은 아까보다도 더 바투 다가와있는것 같았으며 더 많은 무리를 짓고 빛을 발산하는것 같았다. 그제서야 권용산은 백발자욱도 되나마나한 거리를 겨우 톺아왔다는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금 넋없이 발을 옮겼다. 정신은 그냥 어질거리고 시간을 따라 힘은 자꾸 진해갔다. 권용산은 자기가 가고있으며 아주 멀리 상당한 거리를 떠나오고있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있었으나 그것은 자기 의식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일뿐이고 실은 전혀 몇발자욱도 옮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따금 정신이 들고 자기의 걷는 모양이며 순간순간 기력을 잃어가고있는 참담한 육체의 허탈상태를 감촉하게 되는 때면 생각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그리하여 괴로운 순간이 온몸을 태우는것이였다. (빨리 가야 한다. 빨리 멀어져야 한다.) 권용산은 서두르며 있는 힘껏 내달리려 하였으나 그럴수록 몸은 점점 지탱점을 잃고 좌우로 흔들리면서 길의 방향마저 삭막하게 만들었다. 권용산은 밭인지 개울바닥인지 알수없는 울퉁불퉁한 땅우에 쓰러졌다. 그는 엎드려 손을 앞으로 내뻗치고 닥치는대로 잡아 가슴앞으로 끌어당기면서 몸을 내밀었다. 의식은 아주 몽롱해졌다. 그는 이따금 어디에선가 헤염을 치고있는것 같은 자기를 보았으며 물의 세찬 흐름에 밀리워 아주 먼곳으로 떠내려가는것 같은 환각도 들었다. 드디여 권용산은 의식을 잃고말았다. 그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수수밭고랑에 엎어져 머리를 이랑너머에 내던지고있었다. 달빛은 창백하게 그의 몸을 비치고있었다. 풀잎에서는 이슬이 맺혀 이따금 그의 이마며 입술이며 길게 옆으로 기울어진 목언저리에 떨어지고있었다. 권용산은 차고 습한 땅기운과 대지에 흐르는 저녁기류의 차거운 감촉으로 어느 순간엔가 정신이 들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있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그는 손을 조금씩 움직여 땅의 울퉁불퉁한 굴곡을 더듬었다. 그것은 길도 아니고 밭도 아니고 산속도 아닌 자갈깔린 개울바닥 같았다. 그러자 아주 가까이에서 처음은 락수물소리같기도 하고 다음은 석수의 실흐름같기도 한, 그러다가 차츰차츰 커가는 개울바닥의 물소리가 분명 들려오는것이였다. 순간 권용산의 머리속에는 즐거운 생각이 아지랑처럼 피여올랐다. 여기는 징검다리다. 내가 징검다리에 왔구나 하고 권용산은 생각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 마을에 들어오실 때에 찬물에 들어가 손을 얼구며 괴여올리시였다는 그 징검다리께로 자기가 왔다고 착각한것이였다. 다음순간 권용산은 어느새 싱싱한 몸이 되여 바지가랭이를 걷고 물속에 들어가 징검돌을 돋구고있는 자기를 보았다.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나면 김정숙동지께서 또 이 징검돌을 괴여올리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먼저 여기에 온것이였다. 권용산은 늘 마을어구의 이 징검돌을 밟고 건늘 때마다 가슴쩌릿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이제는 그런 아픈 생각을 좀 덜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은 들어올리기만 하면 옆으로 군드러진다. 처음 하는 노릇이라 묘리가 없어 그런가부다. 권용산은 유쾌히 생각하면서 그냥 그 일을 반복하고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곳에서 동작은 반복되고 한순간도 돌을 놓을수 없었다. 권용산은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점점 타드는듯 하였으며 손에 힘이 빠지고 물속에 두다리를 짚고 서있기도 힘들어진다는것을 드디여 깨달았다. 문득 안타까운 가슴언저리아래로부터 무서운 동통이 솟아올랐다. 권용산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개울은 순간에 사라졌다. (내가 어디에 누워있는가? 내가 마을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가?) 권용산은 가까스로 머리를 들고 밭이랑을 기여갔다. 손에 고등어꿍지가 있나 하여 그 창황중에도 자주 정신을 차리고 그것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안해가 부탁한것이다. 권용산은 안해의 부탁을 별로 들어준적이 없었다. 안해, 그에게 있어서 춘옥이라는 그 자그마한 녀인의 존재는 그가 세상에서 느낄수 있었던 기쁨과 즐거움, 사랑과 애착의 전부였다고 말할수 있을만큼 그렇게 귀중한것이였다. 문득 권용산의 눈앞에는 지주의 대문앞에서 물동이를 깨치고 울고있는 조그마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길을 가고있었던 권용산은 소녀가 가엾어 지주집에 들어가 물동이를 깬 값을 물어주겠다고 종일 외양간바닥을 쳐주던 일이 생각났다. 안해는 권용산이와 성례를 치르고 가정을 꾸린 다음에도 자주자주 그때 일을 추억하군하였다. 그것은 이 억세고 장대한 사나이를 마음놓고 사랑하며 정을 줄수 있었던 탐탁한 생활의 믿음이였다. 이 추억은 곧 권용산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다른 생각, 이상하게도 뚜렷하며 쩌릿한 다른 상념과 환영이 어른거리면서 떠올랐다. 그것은 권용산이 등불을 벗겨들고 잠자는 안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때의 행복한 순간이다. 부녀회장이 된 안해의 얼굴을 보고싶어 권용산은 등잔을 가져다 세세히 그 얼굴을 비쳐보았던것이다. 권용산은 정신을 차리고 손에 고등어꿍지가 들려있나 하여 그것을 더듬어보았다. 고등어꿍지를 떨구지 않고 들고있다는 안도의 생각을 품게 되는 순간 권용산은 다시금 의식을 잃었다… 권용산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하늘중천에 밝은 달이 떠있었다. 이곳이 어디인가? 권용산은 여기가 분명 산판인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주변은 이렇게도 조용한가? 인부들은 다 어디로 가고 톱질소리, 도끼질소리, 소의 영각소리며 그렇게 끝없이 왁작하고 고아치던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죄다 사라져버렸는가? 그래 여기서 파업이 일어났구나. 그런데 나는 어디 갔다가 이제야 왔는가? 사방을 둘러보니 산판에 가득 쌓아놓았던 원목더미들은 하나도 없다. 그래 인부들이 들고 일어나서 원목더미들을 모두 절벽에 굴러내친 모양이다. 그는 누군가 자꾸만 자기를 흔들어대면서 《용산이, 용산이, 이사람아!》 하고 웨치는 소리를 들었다. 눈여겨 살펴보니 강성태가 와 서있었다. 《아니, 형님이 어떻게 오셨소?》 권용산은 소리쳐 물었다. 강성태는 무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귀를 기울여야 들리지 않았다. 강성태는 자꾸만 안타깝게 무어라고 말한다. 그래서 권용산은 아, 이 형님이 목침을 깎아달라구 왔구만 하고 생각하였다. 내가 목침을 깎아드리지 않았던가, 분명 깎아준것 같았는데 강성태는 고개를 흔들며 그냥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권용산은 가슴이 아팠다. 내가 그렇게 중한 부탁을 받고 그 일을 안하고있었으니. 그는 부랴부랴 뛰여돌아가며 어디서 통나무를 가져다가 자귀로 깎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손이 빗나간다. 자꾸만, 더욱더 손이 빗나가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깎아낼 재간이 없었다. 안타깝고 구슬픈 생각에 그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조용히 소리를 죽여가며 흐느꼈다. 《이사람 용산이, 정신을 차리라구.》 세찬 뒤흔들림에 용산은 고개를 들었다. 강성태의 얼굴이 아주 뚜렷하고 크고 선명하게 그의 시야를 덮으면서 다가오더니 굵다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순식간에 아득히 빨간 노을이 떠오른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버리였다. 권용산은 온 세상천지가 붉은 노을로 뒤덮인 신비한 산마루에 서있었다. 발밑에는 새빨갛게 익은 가시딸기들이 깔려있었다. 권용산은 안해와 더불어 딸기를 딴다. 안해는 치마폭에 담고 권용산은 가랑잎오가리를 만들어가지고 거기에 담는다. 부부가 경쟁을 하고있는것이였다. 안해는 깔깔 소리를 내면서 그냥 한모양으로 웃고있었다. 권용산의 가랑잎오가리에서 딸기들이 자꾸만 흘러떨어지고있었다. 권용산은 그것을 막으려 하나 막을 재간이 없었다. 공작원동지에게 이 맛좋은 딸기를 빨리 따다 드려야 할텐데 권용산은 안타까와 안해더러 도와달라구 소리쳐불렀다. 그러나 안해는 어디 갔는지 종적이 없었다. 붉은 노을은 점차 스러져가고 딸기들은 거멓게 색조가 변하였다. 선홍색 피방울같던 붉은 딸기들이 자주빛으로 암갈색으로 변하더니 드디여는 검은 딸기로 돼버리였다. 검은 딸기, 드디여 세상은 어디라없이 검은 딸기빛의 광막한 우단에 둘러싸여 점점 빨리 협착하게 권용산에게로 다가들더니 온몸은 검은 장막속으로 잠겨들고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