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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산은 솔광을 지고 안해와 함께 집을 나섰다. 김정숙동지의 련락을 가지고 13도구 세거리에 가야 할 일이 있어 춘옥은 남편을 따라 길을 나선것이였다.

구름 한점없이 개인 하늘은 거울처럼 맑았다. 산촌의 대기는 신선하고 해빛이 갓 떨어진 눅눅한 검은 땅에서는 김이 피여오르고있었다.

곡우가 오늘래일하는 이 즈음의 날씨는 훈훈하고 땅은 부풀어 등이 터지였으며 들판에는 어린 봄싹들에서 풍기는 신선한 향기와 함께 흙을 살찌우는 잘 썩은 거름냄새들이 떠돌고있었다.

《날거리가 정말 따스해요.》

춘옥은 남편의 곁에 다가가 총총히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말했다.

《보리싹이 잘 트겠소. 올해는 우리 집안일이 좀 펴이는것 같아. 아버님 병환도 좀 나아가고…》

《공작원형님이 수고가 많았어요.》

《아무렴.》

권용산은 나무짐을 한번 추슬러 지게등태를 찌르는 옹이를 돌려놓고 말을 이었다.

《아버님 일도 일이려니와 나는 당신 일이 여간만 희한하게 생각되지 않았소.》

《왜요?》

《당신이 부녀회장이 되였다고 하니말이지. 묻는 말에도 어려워서 미처 대답 못하던 당신이말이요!》

춘옥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남편을 쳐다보더니 방긋 웃어보였다.

《난 지금 생각해두 꿈만 같애요. 걱정도 생기구. 아는것, 배운것 없는데 부녀회장노릇을 어떻게 할가요?》

《원 그런 소리마오.》

권용산은 미덥게 안해를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공작원동지앞에서는 일절 그런 소릴 말아야 한다니까. 당신보다 그분이 더 잘 아오.》

《누가요. 공작원형님이 나를 더 잘 안단말예요?》

《그렇지 않구. 당신이야 뭘 자신에 대해서 아는것이 있소? 당신은 괜찮은 녀성이요. 참하구, 똑똑하구… 이건 공작원동지의 말씀이지만 내 보건대두 그렇거던.》

권용산은 마음이 씌이는듯 다정히 들여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참, 그것두 말이라구 해요. 다시 그런 말씀말아요.》

《그럽시다.》

권용산은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대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일해야겠소. 공작원동지 애쓰는걸 보지 못하오. 늘 입술이 초들초들 말라가지구… 당신이 그분을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소?》

춘옥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한동안 걸어갔다.

《지금두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춘옥은 나직이 한숨을 쉬였다.

《그건 무슨 말이요?》

권용산은 의아쩍게 안해를 여겨보았다.

《공작원형님이 처음 우리 집에 오셔서 나무를 팰 때 일을 생각하면말예요. 그때 저는 아무것두 모르구 랭대를 했으니까요. 아버님두 좀 푸념을 하셨지요. 쌍별이 그 애도 그랬구. 형님은 아버님의 푸념을 묵묵히 들으시면서 손바닥에 묻은 송진을 조용히 내려다보셨어요. 그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가요?

당신두 나를 나무랐겠지요. 집에 내려와서 형님이 패놓은 나무를 보시고 형님을 랭대한 이야기랑 듣구…》

《그런걸 보면 당신두 눈치가 없어 참. 쌍별이 저고리까지 지어주신분을 못미더워 곁을 주지 않았다니, 혁명을 하자면 첫눈에 사람을 가려보는법부터 배워야 하오.》

《그래요. 이제는 좀 알겠어요. 사람이란 뭘 겪어보아야 좀 아는것 같애요. 난 마음이 꽁한게 탈이야요.》

춘옥은 발밑을 굽어보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있었다. 마음을 너그럽게 쓰지 못해 김정숙동지를 안타깝게 해드렸던 일을 생각하며 후회하고있는지도 몰랐다.

《저 한가지 물어두 좋아요?》

춘옥은 여전히 발밑을 굽어보면서 생각에 잠긴채 물었다.

《뭔데? 당신이 묻지 못할게 뭐 있소?》

《저번에 그 목침있지 않아요. 그게 정말 목침이나요?》

《왜?》

《제가 공작원형님한테 그 말을 하지 않았겠어요. 그랬더니 그런 일 있었느냐구 하시며 여간만 속상해하시지 않더군요. 무슨 일 만들었게 그렇게 걱정을 끼쳐요?》

《하, 당신이 또 일 저질렀군.》

권용산은 지게를 진채 멈춰서더니 그지없이 답답해하였다.

《그건 왜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그러오?》

《왜요? 저야 무슨 일이 있으나 꼭 알려드려야 하지 않아요.》

《그래두 알려드리지 말아야 할것도 있는것이지.》

권용산은 자못 못마땅해하였다. 춘옥은 영문을 알수 없어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남편을 그냥 쳐다보았다. 권용산은 안해의 등을 밀고 걸음을 떼였다.

《일인즉 이렇소. 강성태형님이 워낙 코를 골기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요? 하루는 얌전이 어머니가 형님더러 하는 말이 집에 중한분을 모시구있다는 어른이 그렇게 코를 요란하게 골아서야 되겠느냐구 하더라오. 그때 강성태형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오. 내가 코를 골았다니, 얼마나 깊이 잠들었으면 코를 곤단말인가? 잠을 깊이 들지 말아야겠다. 공작원동지의 신변을 전적으로 책임진 내가 잠을 깊이 들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잠깊이 안드는 방법을 생각해낸것이 머리를 높이 고이고 자는것이였소. 그래서 나에게 부탁이 왔구, 내가 그 목침을 깎아드린거요. 그런데 당신이 공작원동지에게 그걸 알려드리면 어떻게 하오. 남의 일에 대해서 그처럼 세세히 마음쓰시는분에게… 얼마나 가슴아파하시겠소?》

《아니, 그런 일 있었군요. 난 통 모르고… 이젠 어쩌면 좋아요.》

춘옥은 안타까와 어찌할바를 몰라하였다.

《어쩔것이 뭐 있소. 엎지른 물이지. 당신은 중한분 모시는 법을 몰라, 궂은일 진일 가리지 않고 해주시니까. 습관이 돼버렸단말이요. 그래서는 안되겠소.》

《철없는 저를 책망해요. 저는 참…》

춘옥은 눈물이 글썽해졌다.

권용산은 말없이 수걱수걱 걸었다.

춘옥이도 한동안 말없이 자박자박 걸었다.

《여기 짐을 벗어놓아요. 제가 한단 이고갈래요.》

춘옥은 홀가분히 빈몸으로 가는것이 죄송스러워 남편의 팔소매를 잡았다. 권용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오. 당신은 홀개바람으로 걷소. 몸도 약한게…》

권용산은 지게짐을 추스르며 손을 넓게 펴서 안해의 등을 밀었다. 춘옥은 몇발자국 공손히 걷더니 남편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난 그전처럼 약하지 않아요. 이젠 무슨 일이나 할수 있어요.》

《모르겠소.》

권용산은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웃어버렸다.

《왜요. 나는 당신이 자꾸 약하게 보는게 싫어요.》

춘옥은 뾰로통해졌다. 권용산은 놀란듯 눈섭을 꿈틀거리며 안해를 보더니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안해와 이렇게 살갑게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도 처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전에는 이렇지 못했다.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서먹서먹하게 살았다. 그는 나어린 안해를 데리고 사는 사람의 구슬픔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에게 아무런 간격도 남아있지 않았다. 두사람이 같이 혁명을 하며 장한 일을 하고있다는 생각이 서로를 가깝게 하고 못 잊게 하였다.

《나는 가끔 생각하면 우스워 못견디겠어요.》

춘옥은 깔깔 소리내여 웃었다.

《뭘말이요?》

권용산은 까닭없이 싱그레 따라 웃으며 물었다.

《언젠가 당신이 밤늦게 들어와서 잠자는 사람을 앉혀놓고 따져묻던 일말이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아니 벌써 다 잊었어요. 당신이 그랬지요. 어디 가 투전을 놀다가 청부업자같은걸 하나 때려눕히고 경찰에 잡혀간다면 혼자 힘으로 병든 아버님 모시구 살아갈수 있느냐구?》

《응? 참 그랬던가?》

《시치미를 떼지말아요. 공연히 남을 속태우게 만들구선. 난 그때 얼마나 억울했던지 몰라요. 하필 투전놀다 잡혀갈게 뭐예요.》

권용산은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그래 진짜 투전놀줄 알았댔소?》

《그러지 않으문요. 당신이야 고지식한 성미이니 곧이곧대루 믿었지요.》

《참, 사람두.》

권용산은 혀를 끌끌 찼다. 춘옥은 쌩긋 웃고 말을 계속하였다.

《그때부터 당신은 밤늦도록 나다니군했어요. 그러니 더욱 믿을수밖에요. 그런데 이상한건 투전을 논다는분이 돈을 땄다는 말두 잃는다는 말두 없는거예요. 그냥 속을 조이면서 보아두 마찬가지예요 참.》

춘옥은 지금도 그때의 안타까움이 살아나는듯 이마살을 찌프렸다.

《여보, 그만하오. 내가 다 답답해지오.》

권용산은 안해의 말을 막을 양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게 다 당신탓이요. 당신이 조금만 눈을 떴던들 그런 연극이야 놀았겠소. 난 당신이 아예 혁명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댔소. 그러니 실토정할수가 없었지.》

《그랬을거예요.》

춘옥은 수긍하였다.

《그렇던 당신이 나와 함께 혁명을 하고있소. 얼마나 장한 일이요. 응 이게 다 누구덕분이요. 공작원동지 보살핌이 아니였던들 그냥 까막나라에서 헤매구있을걸 그랬지.》

춘옥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메이는 일이였다.

그들은 말없이 한동안 걸어갔다.

《여보, 채벌장 가는 노루목 묵밭에 산딸기가 깔린걸 봤소?》

《나는 모르지요. 어느 묵밭에 산딸기가 있어요?》

춘옥은 남편을 쳐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노루목바깥쪽 양지바닥에 있지. 우리 고장 가시딸기맛이야 유별하지 않소.》

춘옥은 남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의 심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김정숙동지께 이고장 명물인 산딸기라도 정성껏 대접하고싶은 마음인것이다.

《제가 채심을 해두었다가 딸기가 익으면 따다 드리겠어요.》

《딸기야 내가 따다 드려야지. 당신은 다른걸루 위하오.》

《그럴가요. 그럼 장에 가시면 절군 고등어래두 몇손 구해요.》

춘옥은 부탁하였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그렇듯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김정숙동지께 밥 한상 성의껏 차려드리지 못한것이 마음에 걸리였다.

《그럽시다. 고등어가 없으면 북어라두 괜찮겠소?》

춘옥은 자기의 뜻을 알아차린 남편을 고맙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어두 좋지요. 양념장을 발라 찌면 북어두 별맛이예요.》

이윽고 그들은 13도구에 이르렀다.

춘옥은 베보자기에 싸가지고온 점심보자기를 권용산의 손에 들려주었다.

《앞뒤를 잘 살펴 탈없이 일을 보구 돌아오세요.》

《걱정마오. 련락장소가 세거리 어디어디라는걸 머리에 넣었소?》

《예.》

《먼저 들어가오. 내가 여기서 짐을 내려놓구 좀 쉴터이니.》

춘옥은 옆으로 팔을 내저으면서 세거리골목길을 재빨리 걸어갔다. 권용산은 눈에 온 정신을 모으고 총총히 다그쳐가는 안해의 뒤모습을 탐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안해는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권용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서 안해를 따르는놈이 없나 하여 주의깊이 살폈다. 약간 색이 바랜 고르뎅양복에다 전이 너펄거리는 풍덩이를 쓴 중년의 사나이가 길 맞은편쪽에 다리쉼을 하고있었다. 그는 자루에다 무엇인지 불퉁불퉁한것을 넣어들고있었다. 그는 안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있었다. 이따금 뜻 없는 무료한 눈길로 권용산을 흘끔흘끔 살펴보고있었다.

권용산은 나무짐을 지고 일어섰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권용산이더러 신파 벌사촌에 간다는것을 절대 비밀에 붙이며 뒤에 따라서는 사람이 없나 항상 주의를 돌려 살피라고 하시였다.

권용산은 어느덧 압록강기슭에 이르렀다. 주위를 돌아보니 밤색 고르뎅의 사나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아낙네들 몇이 그의 뒤에 묻어오고있었다. 권용산은 줄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갔다. 그는 장마당웃쪽 나무장쪽으로 가서 인차 솔광을 팔아버리고 사람사태를 이루고있는 장마당 복판으로 들어가버렸다. 거기서 뒤따르는놈이 있으면 떨구어버리려고 복새통을 한참 비비고 돌아갔다. 그러다가 우연중에 밤색고르뎅 입은 사나이와 마주쳤다. 불쾌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르뎅사나이는 권용산을 알아보지 못하는듯 하였다.

권용산은 잡화가게에 들어가 지하족 한컬레를 사고 물고기상점에 가서 절군 고등어 두손, 북어 다섯코를 사서 점심보자기에 꽁꽁 쌌다. 다음 그것을 들고 또다시 주위를 살피고 싸전에 들려 잠간 지체하였다가 광선사진관 뒤골목으로 해서 소장대옆길로 빠져 벌사촌으로 들어갔다.

권용산이 벌사촌에 이르렀을 때는 한낮이 조금 기운 때였다. 통나무귀틀막합숙 마당앞에 숱한 벌사들과 벌사촌 아낙네들, 아이들이 한데 뒤엉켜 설레고있었다.

권용산은 무슨 일인지 몰라 석새베등거리를 입고 마대짝으로 앞치마를 두른 벌사청년에게 사유를 물었다. 그는 동아일보지국장 리풍우선생이 야학을 설립하려 벌사촌에 나왔는데 이제 곧 연설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권용산은 사람들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벌사촌의 《형제계》좌상인 주창범이 은테안경을 쓴 중년의 미남인 리풍우지국장과 마주서서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권용산이를 알아본 벌사들은 성준이의 주검을 메나르던 씨름군이 나타났다고 쉬쉬하였다. 사람들속을 비집고나가는 권용산을 본 주창범은 한달음에 다가와서 그의 단단한 어깨를 꽉 잡아흔들었다.

《도천리 갈범이 또 왔군. 요전엔 성준이 주검때문에 할말도 못했지. 어떻게 넘어왔나?》

《전에 형님부탁두 있구 해서 장마당에 왔다가 얼핏 들렸소.》

《부탁이라니? 자네 우리 형제계에 들려구 왔단말인가?》

《그럼요. 가서 곰곰히 생각하니 불상사를 당하구 가슴이 아파 부탁한 일을 뿌리치구 온게 내려가지 않더란말이요.》

주창범은 눈을 슴벅슴벅하였다.

《고맙네, 고마와. 우리 형제계 스물세형제가 자네를 환영할거네. 암, 환영하구말구.》

그러고나서 주창범은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이보게 동생.》

주창범은 권용산의 손을 꽉 잡고 눈을 슴벅이며 말하였다.

《생때같은 사람을 묻구두 숨이 있는것들은 또 이렇게들 모여서 법석대고있네. 어떻게 험한 세상을 기어이 살아보려구 이런다네.》

《무슨 일을 하게요?》

《리풍우지국장선생이 벌사촌에 야학을 설립하겠다구 나왔다네. 불쌍한 사람들을 가없이 여겨 마음으루라두 돕겠다고 하는데 마다할수가 있는가.》

주창범은 다짜고짜 권용산을 끌고가더니 리풍우에게 인사를 시켰다.

《알만한분이시군요.》

리풍우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였다. 리풍우는 권용산을 잘 알고있었다. 이따금 계몽강연이나 《동아일보》구독자를 늘이기 위해 도천리에 건너와서는 강성태의 집에서 묵군하였는데 그때 권용산이와 낯을 익힌것이였다.

리풍우는 자기가 며칠전에 지세경을 만났는데 도천리에 야학이 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하면서 야학을 해보니 어떤가, 사람들이 열성스레 모이군하는가고 물었다.

《모이다뿐이겠습니까. 야학인기가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여간만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리풍우는 못내 기뻐하였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벌사들을 둘러보더니 회중시계틀 꺼내 손바닥에 움켜쥔채 통나무더미우에 성큼 올라섰다.

《여러분!》

리풍우는 어지간히 흥분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저는 오늘 한겻을 바쳐 여러분들의 생활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살림살이를 기웃거려보고 여러분들의 일손을 거들어도 보았으며 여러분들의 가난한 떼목터에도 나가보고 벌사들의 무덤에도 가보았습니다. 간곳마다 본것마다에 눈물과 한숨이 흐를뿐이요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우리만의 한숨이거나 우리만의 눈물이 아니라 전조선의 한숨, 전조선의 눈물입니다.》

벌사들이 갑자기 웅성거리며 박수를 쳤다. 리풍우의 얼굴은 주기가 오른듯이 보기좋게 상혈되여있었다.

《실상 온 세상을 다 다녀본다 할지라도 조선사람같이 취미없는 생활을 하며 아주 낮은 생활을 하는 민족은 다시 없을것입니다. 먹는것은 그 무엇이며 입은것은 그 무엇입니까? 피아노는 고사하고 단소 한개, 횡적 한개나마 있는 집이 몇입니까? 이러한 조선사람의 생활중에도 더욱 가난하고 쪼들려사는것은 우리 벌사들입니다. 우리는 웨 하필 조선민족으로 태여났으며 더우기 조선의 벌사들로 태여났단말입니까? 생각하면 원망이 부절없이 가슴을 윽조입니다.》

리풍우는 가슴이 저리도록 깊이 눈을 감았다떴다. 이마우에 흩어진 머리카락은 얼굴의 절반나마에 그늘을 던져주어 그의 심신의 괴로움은 진실로 깊은 나락속에 싸인듯이 보였다.

《그러나 여러분!》

리풍우는 획 고개를 젖히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망만으로는 대세를 움직일수 없으며 궁지에 떨어진 의식을 바로 잡을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분발하여야 합니다. 온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일체 분발하여 보다 즐겁고 유쾌한 생활을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없는 사람이란 내내 이 꼴로 살아가는것이거니 생각하고 벌사란 있는 사람의 종노릇하는 인생이려니 생각하는 그 답답한 정신부터 우리는 고쳐야 합니다. 속담에 고초에서 난 벌레가 고초의 매움을 알지 못한다는것과 같이 우리는 본래 그렇게 구차하게 살아왔으므로 더 좋은 생활을 갈망하는이가 적습니다. 그저 이 모양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기원하는 최저급의 생활희망자들이 없지 않다는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세상에 한번 태여났다가 번한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이 꼴로 살다가 속절없이 쓰러질수 있단말입니까? 우리는 잘살수가 있습니다. 아주 잘살수 있는 길이 눈앞에 있습니다. 마치 서울가는 차를 타면 누구나 서울을 갈수 있고 부산가는 차를 타면 누구나 부산으로 갈수 있는것과 같이 잘살수 있는 방도가 눈앞에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잘살고싶습니까? 어디 말씀을 해보십시오.》

리풍우는 사람들의 머리우를 재빨리 휘둘러보았다. 좁은 마당안은 먼지가 확 피여오르듯이 소란히 끓어올랐다. 벌사들은 웃고 떠들고 북적거렸다.

《분명 잘살고들싶을것입니다!》

리풍우는 스스로 대답하고 허공중에 힘껏 손을 들었다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의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벌사들은 잠잠해졌다. 그대신 신기하리만치 들뜬 호기심과 초조가 사람들을 휘여잡았다.

《여러분들중에 혹시 포드나 미쑝과 같은 차를 타고 길을 가본이가 있습니까? 저 신파 다꾸시에서 떠나는 뻐스를 타고 그다음 함남선철도에 올라본 일이 있느냐말입니다.》

《예, 있습니다.》

권용산의 뒤에 선 한 벌사가 대답하였다. 리풍우는 집요하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으로 찾아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야기하기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목적한곳을 가려면 먼저 차표살 돈을 마련하고 다음은 차표를 사고 다음은 차에 올라 어느어느 정거장을 거쳐 목적한곳에 도달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잘살수 있는 목적지에까지 갈려면 반드시 차를 타고 갈 때와 같은 순서와 준비가 있어야 하는것입니다. 그러면 그 준비의 첫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모두가 새별같은 밝은 눈을 준비하는것입니다.》

굴뚝모퉁이에 모여선 벌사촌의 처녀들속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올랐다.

《얘 해순아, 네 눈이 새별같구나. 모두 너처럼 돼야 할가부냐?》 그 소리를 들은 벌사들은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그러자 온 마당안이 웃음소리로 소란해졌다.

그러나 리풍우는 웃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심심한 고독과 비애의 그림자가 드리워있었다. 리풍우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고 말을 계속하였다.

《〈밝은 눈을 준비하자!〉 이 말을 생각할 때에 저는 하염없는 눈물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과연 우리 벌사들은 과거에 얼마나 눈이 어두웠으며 그때문에 얼마나 비참한 일을 겪어야 했습니까? 의식이 있고 눈물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슴을 헤쳐놓고 눈물을 뿌리지 않을수 없을것입니다.》

리풍우는 안경을 벗고 서슴없이 눈물을 닦았다. 방금전에 웃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실없는 행동을 돌이키고는 모두다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여러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리풍우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연설을 계속하였다.

《모르는 때에 우리는 어떠한 실수로 불행도 저지르게 되는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실수와 실책을 알지 못하고 자기에게 돌아올 불행이 무엇때문인지 그것조차도 알지 못하며 살아가는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불행이 아닐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과거에 우리 벌사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사람으로서 사람대우를 받았습니까? 모든 권리를 가진 무리는 우리의 피와 기름을 함부로 빨아먹으며 우리를 짐승같이 대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벌사들은 눈이 어두운 까닭에 이같은 불행이 어째서 생기는지 몰랐습니다. 정치가 어떤것인지 경제가 어떤것인지 도덕이란 어떤것인지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으며 그런 까닭에 코꿰인 소가 끄는대로 따라가듯이 권리를 가진자들이 이리 끌면 이리 끌리고 저리 끌면 저리 끌려갔습니다. 이 모든 불행은 결국 어디서 생겨났습니까? 그것은 우리 벌사들이 글 모르는탓에 생겨난 불행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당하는 이 불행을 없애려고 저 계몽의 기발을 들고 여기 이 편벽한 벌사촌을 찾게 된것입니다!》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벌사들은 리풍우같은 큰 활동가가 자기들을 동정하여 몸소 이렇게 벌사촌에까지 나와준것을 고맙게 여겨 아낌없는 지지와 환호를 보내고있는것이였다.

권용산은 벌사들의 그 소박하고 꾸밈없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순간 가슴이 아프고 동시에 눈물이 솟아나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한때 도천리사람들도 리풍우의 계몽연설을 듣고는 이렇게 감격하였으며 온 부락이 없는 쌀을 모아들여 가루를 빻아 설기를 찌고 이밥에다 닭을 잡아 리풍우의 때식을 마련하였던것이다. 그리고 단꺼번에 몇십명의 《동아일보》구독자들이 생겨나 리풍우에게 신문예약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리풍우의 이 연설이야말로 얼마나 귀맛좋고 유해한것인지 알수가 없는것이다. 세상을 알기 위해 모두 다 글을 배우자고 웨치는 그 진정은 물론 고맙다. 하지만 우리가 못사는것, 우리가 당하는 불행이 단순히 글을 모르는 탓이며 글만 배우면 그 모든 불행이 즉석에 물러갈것 같이 말하는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유해한것인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같이 지내는 도천리와 벌사촌은 하늘땅의 차이를 가진 두 세상이다.

권용산은 몇달전까지만도 이 벌사촌과 다름없이 암흑의 나락에서 헤매던 도천리땅에 오늘과 같은 전변을 가져다주신 김정숙동지의 피어린 노력의 자취가 눈물겹게 생각났으며 이 벌사촌도 머지않아 그이의 손길아래 새세상으로 전변되리라는 믿음으로 가슴이 설레였다.

연설을 마친 리풍우는 벌사들에게 둘러싸여 신문예약을 맺고있었다.

묵묵히 눈을 감고 리풍우의 말을 듣고있던 주창범은 권용산의 팔을 끌고 옆으로 나와 어떤가, 리풍우가 난 사람은 난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형님, 어디 이렇게나 해서야 벌사들이 잘사는 세상이 마련되나요?》

권용산은 은근히 불만을 내비쳤다.

《그럼 적은인 무슨 딴생각이라도 가지구있는건가?》

《우리가 못사는거야 형님도 잘 알다싶이 일본놈과 지주, 자본가들이 인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기때문이 아닙니까? 글을 몰라 못산다는거야 어디 될말입니까?》

주창범은 유심히 눈을 쪼프리고 권용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씨름판에서 샅바를 끼고 다가오는 상대방을 지켜보듯이 그렇게 세세히 바라보고있는것이다.

《자넨 뭐가 좀 달라졌군. 말하는거랑 무엇을 주시하는 모양이 다 이전같지는 않거던.》

《달라졌지요.》

권용산은 그렇게 대답하고 주창범의 만만치 않게 굽어보는 눈을 마주 힘을 주어 응시하였다.

《내가 형님을 믿구 크게 비밀이 될 말을 해두 일없겠습니까?》

주창범은 천천히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추겼다.

《자넨 나하구 의형제를 뭇겠다는 처지가 아닌가, 무엇이 두려워 발을 저는건가?》

《형님은 노했군요.》

권용산은 그렇게 말하고나서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리 오게.》

주창범은 권용산의 팔을 끌고 떼목무이터 빈초막으로 데리고 갔다. 주위를 둘러보고 가까이에 사람이 없다는것을 확인한 주창범은 새초가 깔린 바닥에 마주앉아 단도직입으로 말하였다.

《나는 무엇이나 실토정하는걸 좋아하는 사람일세. 보아하니 자네 나하구 중대한 교섭을 하려구 온 모양인데 주저없이 어서 말하게.》

《형님,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시는 어느 한분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권용산은 잠시 말을 끊고 주창범의 얼굴표정을 가늠해보았다.

주창범은 마치 성난사람 모양으로 입을 꽉 다물고 긴장에 싸여 주시하고있었다.

《그분은 하루속히 일본놈을 때려부시고 나라를 찾기 위해서 형님과 뜻을 나누어보자는 의향을 제기해왔습니다. 형님은 여기 대해서 어떤 답변을 줄수가 있습니까?》

주창범은 천천히 한손을 뻗쳐 마가리의 가름목을 움켜쥐고 가슴을 들먹거리더니 번쩍 눈을 크게 뜨고 권용산을 들여다보았다.

《자네 생각엔 내가 어쩔것 같은가?》

《벌사들을 위해 야학이라도 하겠다고 나서신이가 거절하리라고야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그렇게 믿어주니 고맙군. 한데 적은이, 난 말로 하는 일은 백번이라도 청하면 응할수 있는 사람이지만 아무나 벌사촌에 함부로 들여놓지는 않네. 자칫하다가는 사상운동바람에 벌사촌이 녹아날판이니. 벌사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네. 이 사람들에게 불행이 닥쳐와서야 안되지. 벌사들을 위해 유익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것이고 해가 될만한것은 아예 싹부터 잘라버릴터이네. 자네 그리 알구 내 의향을 전하게.》

권용산은 남다른 의리와 기개로 충만된 벌사촌의 이 범같은 사나이를 존경과 믿음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김정숙동지의 마음에 이 사람이 반드시 들리라는 확신이 생겼으며 그러자 기쁨은 서서히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형님, 이제 삼사일 이내에 장백 백지주 목재판에서 큰싸움이 있게 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산판인부들이 일삯을 올리고 감독들이 인부들을 학대하지 말라는 요구를 내걸고 싸우게 된단말입니다.》

《음, 그것참 흥미있네. 그래 싸우면 이길 잡도리가 돼있는가?》

주창범은 유심히 기틀을 엿보려는듯 눈을 쪼프리고 권용산을 응시하였다. 주창범에게는 그 쪼프린 눈이 무서운것이였다. 일단 그렇게 눈이 쪼프려지고 그와 함께 눈섭이 떨기만 하면 범같이 날뛰기 시작하는것이였다.

《이길 준비가 돼있을뿐만아니라 앞으로 광범한 지역으로 투쟁의 선풍을 휘몰아갈 결심입니다.》

《그러니까 자네두 그쪽방면에 연줄이 있는가?》

《있지요. 이 투쟁은 바로 아까 말한 그분이 지도하고있습니다. 그러니 이길수밖에요.》

《놀랍군, 음!》

주창범은 눈을 번뜩거리며 계속하였다.

《놀라와, 난 자네 말을 곧이 믿구 기다려보겠네.》

《그러십시오. 그럼 래일이나 모레쯤 도천리에 한번 넘어오십시오. 형님에게 헛걸음은 안될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러세, 응할터이네. 모레로 정하고 우리 〈형제계〉 셋째를 데리고 가겠네. 자네 한치렬이를 알지?》

《알다마다요.》

《그럼 내가 그렇게 할터이니 기다려주게.》

《그래주십시오. 제가 형님 모시러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 탁주라도 한잔 나누지 않고 그냥 떠날터인가?》

《예, 오늘은 급히 가야 합니다. 웬간해서 사양할 사람이 아니니 막지 마십시오.》

권용산은 일어났다.

주창범은 꽤 멀리까지 권용산을 바래주었다. 주창범이와 헤여져 벌사촌의 오리나무숲을 벗어난 권용산은 눈결에 숲속을 빠져나가는 밤색 고르뎅양복입은 사나이를 얼핏 보았다.

불안한 예감이 피뜻 떠올랐다. 이사람은 세번째 그의 앞에서 이상한 정체를 내보였다. 첫번은 13도구 세거리앞에서였고 두번째는 장마당에서였으며 세번째는 벌사촌숲속에서 문득 눈에 띄운것이다. 이게 꼬리를 밟아온놈이 아닐가?

권용산은 긴장에 싸여 주위를 살피면서 행길에 나섰다. 사나이는 어데로 사라졌는지 종적이 없어졌다. 어데서 보았던가 분명 낯이 익은데… 권용산은 머리를 흔들며 어둡기전에 강을 건느려고 빨리 걸음을 다그쳐 나루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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