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밋밋한 언덕밑으로 가느다랗게 뻗어나간 실개천이 해빛을 받아 반짝거리고있었다. 하얀 모래와 돌들이 깔린 물밑은 맑았고 등이 새까만 종개들이 떼를 지어 헤염쳐다녔다.

언덕의 그늘이 비낀 물기슭의 한쪽 컴컴한 구석에서는 가재들이 뭉툭한 집게발을 딱 벌린채 돌바닥우를 기여다니고있었다. 때때로 물속에서는 은빛의 예리한 광선이 번쩍번쩍하고 빛났다.

나물바구니를 안고 기슭을 따라오는 처녀의 그림자에 놀란 종개들이 배를 뒤채며 수면을 흔들고 달아났다. 나물바구니를 든 쌍별이는 지세경이를 만나려고 개울가로 나왔다.

처녀는 이슬에 젖은 손으로 나물을 캐면서 강웃쪽으로 올라갔다. 언덕우에 총총히 늘어선 버드나무사이로 지세경이네 물방아간 한쪽 귀퉁이가 나타났다. 처녀는 잠시 나물캐던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지세경이가 자주 나다니는곳이다. 버드나무, 오리나무가 꽉 우거지고 그속에 드문드문 자작나무의 흰가지가 섞인 둔덕숲은 방금 떠오른 아침해빛에 유난히 반짝거리고 그아래 줄줄이 낮은 기복을 이루고 마을어귀까지 펼쳐진 들은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들의 반사광으로 하여 신비로운 은빛광택의 너울을 쓰고 누워있었다. 들을 걸으면 발끝에서는 찬란하고 가느다란 수만갈래의 은실들이 휘감기고 뒤엉키여 발은 빛나는 흰 광선속에 휘감길것 같았다.

쌍별이의 눈앞에는 저 신비하게 누워있는 돌을 밟고 성급하게 이쪽으로 다가오는것 같은 지세경의 모습이 언뜻 떠올랐다. 처녀는 남몰래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백지주가 춘옥이네 소를 뺏어가지 못하도록 지세경에게 부탁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닐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와 이야기하며 그에게 이같이 큰 청을 들여본다는것은 한편 기쁘기도 한 일이였다.

무슨 말부터 할가? 만난지도 벌써 보름하고 사흘이 지났지. 그리 멀지도 않은 이웃에 살면서… 쌍별은 전번날 그와 만나던 때를 회상했다. 수수깡 울바자밑에서 봄고양이가 울면서 향옥이네 발방아간모퉁이로 사라질 때 지세경은 가만히 삽짝을 밀고나와서 회파람을 불었지. 그리고는 옥탄이네 뒤울안모퉁이를 돌아가면서 따라오나 어쩌나 돌아보군했었지. 그때 가슴이 콩콩 뛰던 일을 생각하면…  쌍별은 얼굴을 붉히였다. 생각만 해도 그것은 행복하고 남보기에 부끄럽기도 한 일이였다.

쌍별이는 바구니를 들고 물방아간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지난해 달이 밝던 어느날 밤, 여기서 마을 녀인들과 함께 보리를 찧던 생각이 났다. 지세경의 아버지 지석참로인은 언제나 그러하듯 방아 찧으러온 아낙네들을 귀인이나 만난듯이 반갑게 맞이했다.

아낙네들은 방아확주변에서 키로 보리를 까불고 지석참로인은 한옆에서 담배를 태우며 구경하고있었다. 아낙네들은 그때 서울가 공부하는 지세경의 소식을 물었다.지석참로인은 흥이 나서 아들자랑을 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있던 쌍별이는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행복에 겨웠던지 모른다.

약속은 없지만 오래전부터 쌍별의 가슴속에는 지세경에 대한 남다른 련모의 애틋한 감정이 자라나고있었다. 그것은 지세경이도 모르고있었다. 세상에 아는 사람이란 오직 쌍별이자신뿐이였다. 그것이 처녀에게는 다행한 일로 생각되였으나 한편으로 그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입심좋은 옥탄이가 쌍별이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한마디 하였다.

《얘, 너 지세경이같은 랑군을 만난다면 어떻겠니. 생각이 있거든 석참아바이한테 불공을 드려라.》

《에그머니!》

쌍별이는 보리를 까불던 키를 엎지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방아간에서는 아낙네들이 죽겠다고 웃어댔다. 쌍별이는 옥탄이가 야속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롱담으로라도 그렇게 빗대준것이 감사하였으며 자기의 마음속을 알아준듯도 하여 의지가 되는것이였다.

방아간에서는 아낙네들이 그냥 떠들어대고있었다.

《쌍별이가 왜 저렇게 내우를 할가요?》

《그러게… 별나게도 겁을 내지요.》

《아이구, 내가 막 가슴이 울렁거리네.》

아낙네들은 점점 쌍별이의 마음속을 뒤져내기 시작했다. 그들도 처녀시절을 거쳐본 녀자들이였다. 짝사랑에 속이 타던 얄궂은 시절을 그들은 잊지 않고있는것이다. 혼자 웃고 혼자 울던 분하고도 행복한 처녀시절, 생활의 세파에 눌리워 주름만이 늘어난 그 가슴을 더듬으며 흘러간 시절의 고운 추억들을 상기하는 때가 지금도 가끔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아낙네들은 질겁해 뛰여나온 쌍별이의 급작스런 행동에서 멀리 가버린 자기들의 처녀적모습을 보았으며 쌍별이가 사랑에 빠졌구나! 하고 모두들 생각한것이였다.

마을에는 소문이 떠돌았다 쌍별이가 지세경이를 사랑한다는… 그것은 전혀 근거없는 헛소문이였으나 그러나 참으로 근거가 확실한 바른 소문이였다. 그래서 쌍별이는 전혀 반항할념을 못하고 미소를 띠우고 다소곳하여 다녔던것이다.

지세경에 대한 련모의 감정은 나날이 끝을 모르고 깊어져갔다. 이즈음에는 이상하게도 어린시절에 그와 함께 소꿉놀이를 하며 즐기던 일이 자주 추억되였다.

지세경은 어릴적부터 들을 좋아하였다. 쌍별이를 꽁무니에 달고 들에 나가서는 해가 질 때까지 놀군하였다. 그들은 들에서 꽃을 꺾고 개울에서 가재를 잡았으며 때로는 산속으로 들어가 버섯을 따고 새둥지를 들춰내기도 하였다.

쌍별이는 사내애처럼 세차고 장난이 심하였다. 신을 벗고 줄창 들로 산으로 돌아치고 온몸은 해빛에 타서 숯덩이같았다. 눈은 반짝거리고 그가 가는곳에서는 항상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다만 가시에 걸려 치마나 적삼이 째지면 콜짝콜짝 눈물을 짜군하였는데 그런 때에도 오래 울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반짇고리에 살금살금 기여들어서 바늘과 실을 훔쳐가지고는 자기 손으로 홀가입군하였다. 그리고 이런 때는 늘 세경이가 망을 보아주든가 바늘에 실을 꿰여주면서 동무해주었다. 그 애들의 머리에는 언제나 먼지가 낀 낡은 거미줄이 매달려있었고 몸에서는 풀과 송진내가 떠나지 않았다.

세경이는 쌍별이보다 네살 우였다. 그는 날파람있고 영악스런 처녀애를 끔찍이 위해주었다.

그는 들에서 풀을 뜯어다 말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가시밭에 들어가 딸기를 따서 가둑나무잎에 싸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쌍별이는 좋아라 딸기를 받아가지고는 마을로 달음박질쳐가면서 애들 들으라고 소리치군하였다. 가시딸기, 땅딸기, 멍두딸기, 양딸기…

이집저집에서 조무래기들이 달려나와 쌍별이의 뒤에 사슬처럼 늘어섰다.

쌍별이의 머리에는 밤하늘에 반짝거리는 애기별과 같이 무수히 많은 추억이 있었다. 그는 그 추억을 안고 애달파하였다…

지난해 가을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들길로 세경이가 터벅터벅 걸어오고있었다. 세경이가 온다는 소문이 부락에 알려졌다. 갑자기 총알같이 나타난 쌍별이가 그를 향해 달려갔다. 쌍별이는 마을에 떠도는 소문이며 마음속으로 끝없이 사모하고있었던 련정의 감정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렸을 때 그와 애틋이 어울려 지냈던 그때의 순진하고 무랍없는 생각에 휩싸여있었다.

《세경오빠!》

쌍별이는 세경이의 손을 잡고 기쁨에 겨워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냐!》

지세경은 깜짝 놀라 멎어섰다. 늘씬한 몸에 아름답게 활짝 핀 미모의 처녀를 그는 환희에 넘쳐 바라보았다. 그러나 쌍별이는 세경이의 눈에 어린 기쁨과 놀람의 열렬한 감정을 알지 못했으며 그저 자기 기분, 자기 만족에 취하여 트렁크를 뺏어 이고 마을로 달려왔다.

쌍별이는 한달음으로 세경이의 집까지 갔으며 삽짝을 밀어젖히고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

《어머니, 세경오빠가 왔어요!》

방안에서 지석참로인과 세경이의 늙은 어머니가 뛰여나와 아들의 손에 매달렸다. 울바자에는 동네사람들이 하얗게 모여들었다. 그때에야 쌍별이는 문득 자기의 분수없는 행동을 감촉하였으며 질겁을 떨고 줄행랑을 놓았다…

사랑은 약속없이 맺어졌다.

쌍별이는 방아간에 들어가 바람에 짚갈비들이 우시시 떨고있는 방아확주위를 둘러보았다. 빈 확에 공이가 떨어져 바수어놓은 돌파편이 도끼밥처럼 떨어져있었다. 지금은 공이가 천정에 매달려있었으며 구레쪽에서는 수차를 돌리지 못하고 떨어지는 물소리가 났다.

쌍별이는 방아간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누군가 겨우내 메워버린 물길도 쳐내고 물레쐐기도 바로잡고 도랑뚝에도 흙을 올려주었다. 그 일을 지세경이가 하였지만 쌍별이는 이것이 지석참로인이 한 일이려니 생각하며 쓸쓸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쌍별이는 오랜 시간을 방아간에서 서성거리다가 뒤울안으로 나왔다. 그리고 가시덩굴이 엉켜붙은 언덕쪽으로 해서 불그레한 채양버들이 가뜩 들어찬 후미진 골짜기로 들어갔다. 지세경이가 자주 다니는 자그마한 버들숲이 나타났다. 습하고 평평한 홈타기에는 풀들이 파랗게 들여다보였다.

쌍별이는 풀밭에 바구니를 놓고 나물을 캐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기다리노라면 지세경이를 만날수 있지 않을가?

바로 그 순간에 가랑잎 밟는 소리가 와삭와삭하고 들려왔다. 쌍별이는 고개를 쳐들었다. 버드나무 웃초리들이 마구 흔들리는 저쪽에 새까만 학생모자가 얼찐거렸다. 쌍별이는 반가와 뛰여일어났다. 지세경은 가느다란 회초리를 들고 걸어오고있었는데 까만 양복저고리에서 유난히 윤기나는 노란 단추들이 해빛에 반짝거렸다.

쌍별이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잠간 망설이다가 《저, 이것보세요.》하고 인적기를 내였다.

지세경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어지간히 날카로와보이는 눈지방에서 긴장을 띤 부리부리한 눈이 내다보고있었다. 그는 처음 한순간 쌍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예요!》

쌍별이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얼굴은 삽시에 부드러워지고 평온해졌으며 입가에는 알릴락말락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여기까지 나왔소?》

《나물캐러 나왔어요.》

쌍별이는 몸을 돌려 바구니를 기울여보였다. 지세경은 바구니속을 들여다보더니 아-하고 감탄하였다.

《이렇게들 자랐소?》

《그럼요. 벌써 봄인걸요.》

《그래 봄이지… 참 세월이 가는것도 모르겠소.》

《장참 들에 사시면서도요?》

《들에서 살기때문에 들이 푸르러지는걸 모르는거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인가요?》

쌍별이는 약간 헤살치는듯 한 눈웃음을 짓고 청년을 쳐다보았다.

《내가 만약 어느 딴 세상을 얼마동안 헤매이다가 이곳에 와본다면 들이 푸르러지는걸 알고 약동하는 생의 숨결소리를 들어볼수가 있겠지만 지금은 모르겠소.》

《전 알겠는데요. 하루하루가 달라져가는걸 똑똑히 느낄수 있어요. 나물을 캐보면 그것이 환히 알리니까요.》

《그렇소?》

지세경은 놀라는듯 한 표정을 짓고 쌍별이의 두눈을 마주 들여다보았다. 불안도 번민도 없는 맑은 눈이다. 지세경은 얼핏 시선을 떨구었다가 다시 들여다보았다.

《얼굴이 까맣게 되였군요. 작년에 이곳으로 올 땐 얼굴이 그저 하앴어요. 전 어디가 편찮은가 걱정까지 했는데요. 그런데 이젠…》

《해볕에 탔을거요.》

《볕에 탄 얼굴이야 내가 모를라구요. 너무 마음을 쓰지 말어요. 무엇이든 일을 잡아야 하지 않겠어요. 예?》

간절한 처녀의 속삭임에 지세경은 고개를 흔들며 웃어보였다.

《우울병이지. 어쩔수 없는거요. 몇달을 이렇게 속을 썩이구는 홀연 베잠뱅이를 입구 근로농군으로 화할는지도 모르오.》

그 말에 쌍별이는 쓸쓸히 미소를 띠우며 지세경의 우울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서울공부를 그냥 하셨더라면 지금쯤 졸업하실 때가 가까왔겠군요.》

《그렇소. 오래지 않아 뿔뿔이 사회에 흩어질 그네들이 그립소. 그들은 엄연한 십자군들이요. 우리의 십자군졸에 개선가를 불러줄 이 몸이 촌에서 속절없이 썩고있소.》

지세경은 후유하고 달아오른 입김을 내뿜었다.

《너무 그렇게 속일랑 썩이지 말아요. 사람은 마음먹기탓이라고 하더군요. 일을 잡아요. 그러면 마음이 안정될거예요. 여기두 할일이 있고 기쁨이 있어요.》

《쌍별이, 옳은 말이요. 봄이 있고 인간이 있는 이 땅에 왜 할일이 없고 기쁨이 없겠소.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차례지는것은 아니요.》

《일을 멀리하지 말았으면 해요. 일을 하면 괴로운 마음도 없어지고 사람들에게 정을 붙이게 되여요. 그러면 즐거울거예요.》

처녀는 애정과 열정을 담아 정이 스미도록 간절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청년의 깊고깊은 고민의 세계를 이 세상 둘도 없이 가까운 사람인 쌍별이조차도 다는 알지 못했다.

서울에서 출학처분을 당하고 몇달동안을 방황하다가 부모가 있는 이 농촌으로 올 때만 하여도 세경에게는 구슬프고 유정한 촌의 추억, 어린시절에 그가 들을 돌아치면서 나무열매도 따고 풀뿌리도 캐고 꽃도 꺾고 가재며 버들치같은것도 낚아내군하던 촌의 목가적인 풍경들과 수더분한 촌사람들의 정깊은 인상들이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소란한 서울거리에 나가 죽지에 화살을 맞고 희망이며 포부를 꺾이웠을 때 그는 향촌이나 다름없는 이 촌의 풍경과 촌사람들을 생각하였으며 여기서 상처받은 고달픈 마음을 위로받을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었다. 그러나 이 촌에 발을 들여놓고 희망에 타는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았을 때 그의 눈에 비친 촌의 모습, 그의 의식에 날아온 촌의 풍경은 참담하고 욕스럽기 그지없는것이였다.

집이며 울바자들이 낡아 찌그러지고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한 빈궁과 고역에서 헤매고있었다. 특히 칠봉로인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프고 처절하기 이를데 없는것이였다.

세경이가 서울공부갈 때만 하여도 칠봉로인은 두다리가 성성하여 예전과 같이 백지주의 머슴을 살고있었다.

어려서 남달리 들을 좋아하였던 세경이는 누구보다 칠봉로인과 가까이 사귀였다. 그는 잊지 못할 추억을 가지고있었다. 로인은 세경이에게 새둥지도 털어주고 피리도 만들어주었으며 자신도 가끔 풀판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구성지게 피리를 불어주기도 하였다. 세경은 들에서 로인과 어울려 지내는것이 큰 재미였으며 종일 로인을 따라다니다가 지쳐 끄떡끄떡 졸면서 로인의 손에 매달려 해저무는 들길을 걸어오군하였다. 가끔 들판에서 아주 잠이 들어가지고는 로인의 팔에 안기여 집에 오는 때도 있었다. 그렇던 로인이 지주의 목재판에 가서 한다리를 잃고 병신이 되였으며 짝지발을 짚고 돼지떼를 몰고있는것이였다. 돼지무리속에 찍힌 로인의 한쪽발을 보았을 때 지세경은 그것이 칠봉로인의 발자국이라고는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으며 지금도 그것에 순응될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동네사람들은 심상하게 지냈으며 그 불행에 습관되고 익숙되여있는것이였다.

(이 사람들에게 의탁하여 내가 무엇을 할수 있단말인가? 이런 의식으로는 세상에 반항하지 못한다. 반항이 없는 삶은 죽음이다.)

세경은 눈물이 날만큼 구슬퍼졌다. 그의 마음속 공허는 나날이 깊어졌다.

이러한 지세경에게 무슨 말이 쉽게 통할수 있겠는가?

그렇건만 쌍별이의 단순한 생각으로써는 그것이 죄다 리해가 되지 않았으며 야속하고 안타깝기만 하였다.

쌍별이는 무엇인가 주저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 우리 마을에 새로 온 구장누이가 있지 않아요?》

《들었소. 도회에서 왔다는…》

지세경은 멀리 들 한끝에 시선을 박은채 무관심하게 대답하였다.

《도회에서 왔을게 뭐예요. 무산이라는 촌에서 왔어요. 처음엔 도회에서 왔는가 모두 그렇게 생각했지요. 신식녀성처럼두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사귀여보니 전혀 그렇지 않거던요. 얼마나 마음이 상냥하구 순박하구 일손이 잰 형님이겠어요. 바느질을 해도 그래, 삼삼이를 해도 그래, 연자방아를 돌리는 일을 해도 그래, 세상에 못하는 일이란 하나두 없구 재빠르고도 기름이 돌게 해놓아요. 얌전이 엄마가 그러는데 구장누인 일곱살 때부터 연자방아를 돌렸대요. 고생이면 세상에 그런 고생이 어디 있겠어요. 참 그렇지 않아요? 들어요, 안들어요?》

《듣구있소.》

지세경은 여전히 들 한끝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자기의 상념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대답하였다.

《동리아주머니들은 처음은 구장누이라고 뒤에서 쉬쉬하고 말들이 있었어요. 생긴것도 신식녀성같고 도회에서 곱게 살다 온것 같은데다 세도가 당당한 사촌오빠등을 대고 우리같은 사람들을 하대할것 같은 생각도 들었거던요. 그렇지만 하루이틀 지나자 구장누이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정말 곱게 생긴 얼굴모양대루 마음속두 비단같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어요. 모두 구장누이하고 친하고싶어 했어요. 저도 하루 연자방아간에서 일을 같이 하고는 구장누이하고 가까와지고싶은 생각이 간절했어요. 지금은 나하구 춘옥언니가 구장누이하구 제일 가까와요.》

쌍별이는 눈을 깜박거리고 상그레 미소를 띠운채 지세경의 약간 앞으로 내민 거무스레한 얼굴이며 머리카락이 드리운 이마를 바라보았다.

《쌍별이가 좋다면 좋은 녀성일거요. 쌍별이 큰아버지가 구장누이를 칭찬하는 말도 들었소. 그러나 사람은 좀더 지내보아야 하는거요.》

《지내보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지요.》

《너무 속단하는게 아니요.》

《아니예요. 정말 그렇지 않아요.》 쌍별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쌍별이는 구장누이에 대해서 좀더 말하려고 하는데 문득 지세경이 물었다.

《그래 요즘 마을형편은 어떻소?》

《집단부락소동때문에 남자들은 거지반 부역에 나가구 아낙네들만 남아서 농사걱정을 하고있어요. 부림소까지두 채벌장과 토성공사장에 동원되구… 녀자들이 가대기를 끌지 않으면 땅에 씨앗조차 묻지 못할 형편이예요.》

지세경은 말없이 버드나무가지를 꺾어 유연하고 휘청거리는 가지의 암록색 눈마다에 맺힌 토실토실한 버들강아지를 들여다보다가 한쪽끝을 입에 물었다.

씁쓸하고도 싱그러운 향기가 입안에 차고넘치더니 페부에까지 깊이 스며들었다. 재채기가 나며 코구멍으로 버들향기가 흘러나왔다.

(이런 연약한 체질이라니, 버들향기에도 곧잘 재채기를 하고… 머리는 어째서 이렇게 무거운가, 농민들은 생활의 최저저항선에서 필사의 몸부림을 하게 되겠지.)

지세경은 또다시 버들가지를 씹었다. 혀끝이 알알해지고 목구멍이 후끈거린다. 이상하게 머리가 맑아졌다.

(놈들은 기어이 집단부락을 만들고 농민들을 포박할 작정인가? 하넓은 들에 살면서도 항상 강압에 숨막힘을 느끼던 사람들이 토성안에 갇히여 2중3중의 핍박과 생활고의 중압을 어찌 견뎌내려는가?)

《그런데 어제아침 춘옥언니가말예요. 보리밭에 거름을 내려구 지주한테 알리러 갔대요. 소를 써야 하겠으니 동의를 얻자구요. 그런데 지주가 글쎄 소는 채벌장에 보내야 한다구 하더래요. 춘옥언니가 순순히 응하지 않자 지주라는것이 글쎄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소잔등에 거름바리만 얹어봐라 당장 뺏어오지 않나 하더래요.》

《그래서?》

《그래 모두들 걱정하고있어요. 어떻거면 좋아요?》

《어떡할게 뭐있소. 뺏기지 않으면 되는거요, 그런데 그 소는 도대체 누구 집 소요?》

《누구 집 소라니요? 춘옥언니네 소지요. 큰아버지(춘옥이 아버지)가 궁박골자드락에서 건건 죽어가는 송아지를 안아다가 죽을 먹여서 자래운건데요.》

《그러니까 지주집 암소가 낳은 송아지란말이요?》

쌍별이는 뽀로통해졌다.

《지주집 암소가 낳은거면 뭐래요. 우리 큰아버지가 거지반 눈을 감은 쇠지를 토스레적삼에다 싸안구 지주집에 달려오니까 지주령감이 대청에서 야, 이 죽일놈, 어디서 송장치자구 저런걸 안고왔니. 조상제사가 랠모렌데 마당에다 까마귀를 불러들이겠느냐? 하고 소래길 질러대면서 내쫓더래요. 어진 령감님은 그래도 눈물이 글썽해서 〈주사님, 쇠지두 숨가진 즘생인데 버리기야 어떻게 버린다고 그럽니까?〉하고 사정을 드려보았대요. 그러자 대청에서 벼루가 날아오구 방석이 날아오구 놋재털이가 날아오구 야단이 났대요. 그래 령감님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며 쇠지한테 말했대요.

〈쇠지야 너 죽지 말구 제발 살아나기만 해라. 네 엉치에다 피둥피둥 살을 찌워가지구 지주집마당을 한바퀴 어른스레 돌테다.〉

어디 들어봐요. 눈물이 안나요?

그런데 어떻게 큰소가 된 지금에 와서 지주가 제 소라고 할수 있어요?》

《그렇군!》

지세경은 사뭇 흥분하였다. 그는 이마를 찌프리고 앞을 주시하다가 진저리를 떨듯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에겐 인륜도덕이란것이 있는 법이요. 그렇게는 안될거요. 소를 뺏다니. 아니, 그렇게는 안되지. 부역태만건으로 벌금을 들씌울수는 있어도 소를 뺏지는 못하오.》

《그래도 백지주가 하는노릇은 몰라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니까요.》

쌍별이의 목소리는 절절하게 울렸다.

《그렇지 않소. 일본놈 법률에도 개인재산과 사람의 인권이 법에 의해 보호된다는 조항이 있소. 놈들의 법조를 들고 따져도 이길판이요. 뭐가 겁나오?》

《그럼 그거라두 좀 말해주세요. 지주욕심이 어떻다는거야 잘 알지 않아요.》

쌍별이는 안심할수 없어 애원하였다.

지세경은 갑갑하여 목단추를 끌러놓고 머리를 젓더니 휘적휘적 걸어갔다. 쌍별이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지세경은 머리를 수굿하고 기다란 다리를 성큼성큼 내짚으며 버들숲을 돌아나오더니 둔덕을 넘어 밭이랑사이를 지나갔다. 그렇게 얼마쯤 가다가 그는 멎어섰다. 바구니를 끼고 어푸러질듯 이랑에 걸채이며 다그쳐오는 처녀를 그는 물끄러미 아픈 표정을 하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버리면 난 어떻게 해요. 난 춘옥언니의 부탁을 받구왔어요.》

《후-》

지세경이는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렇게는 안된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따위 강도의 론리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소.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오. 절대로!》

지세경은 의분에 넘쳐 부르짖더니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이랑을 넘어갔다. 그의 머리는 앞으로 숙여지고 발밑에서는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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