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1

 

강성태는 마을의 한복판에 있는 산당집 돌배나무가지에다 낡은 양푼을 걸어놓고 어뜩새벽부터 그것을 두드려대면서 빨리 공사판에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둠속에 짓눌린 마을은 조용하였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고 대기는 싸늘하였으며 컴컴하게 에돌아간 수림우에 한쪽끝을 박은 가느다란 갈구랑달이 차디찬 빛을 뿌리고있었다.

아직은 한밤중이였다.

새벽의 첫닭이 이제 겨우 목을 뻗치고 간간이 울어대고있었다. 그랬건만 강성태는 박달나무로 깎은 단단한 방망이를 들고 사정없이 양푼을 두드려댔다.

쾡창 쾡창 쾡창!-

눅눅한 새벽대기를 갈기갈기 찢어대면서 새되고 아츠러운 금속성 음향이 마을의 상공을 파도쳐갔다. 그러나 마을은 기척없이 누워있었다. 어디서도 불빛 한점 켜지지 않았다. 부락의 맨 끝쪽에 있는 홍과부네 마가리에서 빤히 내비치던 불빛은 오히려 양푼소리에 기절한듯이 꺼풋하고 꺼져버렸다.밤새 모여들어 탁주를 마시며 마장을 치던 놀음군들이 양푼소리를 듣고 기겁을 하여 방등을 꺼버린 모양이였다.

강성태는 돌배나무가지에서 양푼을 벗겨들고 골목길을 돌아가면서 귀청이 터지게 두드려댔다. 요즘 아라가와지도관은 공사를 내미느라고 뻔질나게 부락에 내려왔다. 지난밤에는 늦게까지 백지주의 안방에서 술대접을 받으며 구장을 불러들여가지고는 며칠간 부락에 묵으면서 공사동원상태를 보겠노라고 하였다.

그래서 강성태는 겉으로라도 요란하게 떠들어대지 않을수 없었으며 아라가와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얼마간은 일을 하는척 해보이지 않을수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쾡창 쾡창 쾡창!

양푼소리에 개들이 기겁을 하며 사방에서 짖어댔다.

《빨리들 일어나라구요. 빨리요! 어서들 조반을 지으라구요. 경찰서 지도관님이 검열을 나오셨소!》

덤불속에서 개똥벌레들이 불을 달고 나타나듯이 한집 두집에서 불이 켜졌다. 부엌문들이 바삐 여닫기고 골목골목에서 총총히 내닫는 아낙네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선잠을 깬 애들의 울음소리, 꾸짖어대는 늙은이들의 목소리, 우물가에서 쉴새없이 덜그럭거리는 드레박소리가 소란하였다.

강성태는 불이 없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양푼을 두드리고 삽짝을 잡아닥치면서 사람들을 깨우고 꾸물거리는 아낙네들을 보고는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강성태는 복방아네 집앞에서 두회째 양푼을 두드렸다.

사방 집들에서 방등을 켜고 문을 여닫으며 사람들이 바삐 나들고있는데도 복방아네 집은 죽은듯이 감감하였다.

복방아 어머니는 남편이 이태전에 지주의 빚 갚아주려 산판운재터에 갔다가 통나무에 깔려죽은후 아들 하나와 어린 딸 둘을 데리고 근근히 살아가는 아낙네였다.

그런데 구장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또 산판에 보내여 남의 집안을 망쳐줄 잡도리를 한다고 앙심을 먹고있었다. 이때문에 아낙네는 구장집식구들은 물론 구장네 닭새끼들까지 뜰아근에 얼씬 못하게 하였다.

불쌍하기 이를데 없는 아낙네였으나 강성태로서는 그 하정을 알아줄 방법이 없었다. 아라가와가 묵고있는 지주집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이 마가리에서 불이 켜지지 않는다면 아라가와가 소동을 일으킬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강성태는 할수없이 뜰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집엔 사람이 없소? 사람이 없는가?》

강성태의 노한 목소리를 듣고야 부엌문이 열렸다. 삼태기에 재를 담아든 복방아 어머니가 재간모퉁이로 가더니 거기서 오래동안 꾸물거리였다.

《이 집은 늘 보아야 이 모양이거던, 새벽바람을 맞고 돌아가는 사람 생각도 해주어야지. 무슨 경을 치려고 엇서는거요 엉?》

강성태는 한바탕 소란을 떨었다. 아낙네는 대답없이 삼태기를 들고 부엌에 들어가더니 야멸차게 문을 후려닫아버렸다.

강성태는 후- 한숨을 내쉬고 삽짝앞을 물러났다. 가슴은 숯덩이처럼 타드는것 같았다. 그는 복방아네 이웃에 있는 방숙이네 집으로 갔다. 그 집에도 불이 없었다. 방숙이는 시집살림이 싫어서 친정에 와있는 녀자인데 구장이 엄청난 부역공수를 들씌웠다고 하여 원한을 품고있었다.

강성태는 방숙이네 삽짝을 밀고 뜰안에 들어서기는 하였으나 불현듯 입이 굳어져 말이 나가지 않았다. 방금전 복방아 어머니에게서 보았던 그 랭랭한 거동이 그냥 눈앞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것이였다.

그는 잠시동안 멍청히 아무생각없이 서있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할 난감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것이였다. 그러나 이 일은 해내야 한다. 김정숙동지께서 마음을 굳세게 다지고 혁명이 요구하는 일을 해내자고 몇번이나 말씀하셨던가!

강성태는 곰곰히 그이의 충고를 돌이키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새로이 몇번이고 결심을 다진후에야 목소리를 높여 방숙이를 찾았다.

복방아네와 똑같이 불은 켜지 않고 누군가 지게문만을 지쳤다. 희끄무레한 모습이 방숙이의 어머니인것 같았다.

《이 집에선 어째서 아직도 불을 켜지 않구있소. 예?》

《애가 몸살이 났소다.》

《아주머니, 공연히 화를 당하지 말구 부역에 내보내라구요.》

강성태는 그만한 사정은 계산에 쳐주지 않는다는듯 엄엄하게 말을 하였다.

《앓는 애가 어떻게 공사에 나간다구 그러오. 애를 당장 시집에 보내든지 무슨 마련을 보아야지 구장성화를 이겨내겠소.》

늙은이는 화를 냈다.

《그렇게 하시구려. 부락에 있어가지군 용수가 없으니. 경찰서지도관님이 검열을 나오셨소. 공연히 벌금을 짊어지구 고생을 않겠거든 나와주는게 좋겠소.》

강성태는 퉁명스레 한마디 던지고 삽짝밖을 나왔다. 별이 총총한 하늘을 향해 집집의 굴뚝마다에서 연기가 솟구쳐나왔다.

해뜨기전부터 사람들은 공사판으로 밀려나갔다. 어른, 아이, 늙은이 할것없이 부락의 인총은 죄다 공사장에 내몰리는 판이였다. 놈들이 씨붙임전으로 공사의 많은 분량을 해제끼려고 밥술을 드는 사람이면 다 공사명부에 넣었다.

부락사람들은 일본측량기술자들이 박아놓은 말뚝을 따라 토성이 둘러앉을 기초구뎅이를 파기 시작하였다. 소와 달구지를 가진 사람들은 막돌과 자갈을 실어왔다. 눈석임물이 질적거리는 난벌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널려 역사를 벌리고있었다.

부락은 도적이 꽹과리를 울리면서 털어가도 모를 지경으로 텅텅 비여있었다. 배를 곯은 돼지들은 목책에 앞발을 걸고 죽겠다고 사방에서 울어댔다. 어떤놈들은 우리를 짓부시고 뛰쳐나 부락을 돌아치면서 울바자밑을 파뒤집고 귀밀짚동가리를 헐어자빠뜨리며 닭무리를 쫓아 죽기내기로 달려다니기도 하였다. 돼지에게 쫓긴 닭들은 울바자우의 지붕꼭대기에 하얗게 날아올라 꼬꾸댁거렸다. 간혹 난벌에 쪼겨난 닭들은 굶주린 돼지의 주둥이에 물리워 죽지를 푸득거리며 사방에 피묻은 털들을 흩날렸다.

강성태는 한복바지가랭이에 각반을 치고 공사용 배급물자로 나온 검은 지하족을 신고 넓은 공사구간을 쉴새없이 돌아갔다.

현장에는 백지주도 나와있었다. 머리에는 한낮의 해빛을 가리울 양으로 전이넓은 풍덩이를 쓰고 눈에는 수정안경을 꼈으며 손에는 딱따구리망치가 달린 단장을 짚고있었다. 공사장을 둘러보는 그의 안경낀 얼굴은 해빛이 반사되여 펀뜩펀뜩 하였다. 한낮때가 되여서는 아라가와대위도 공사현장에 나왔다. 붉은 장화목다리에 말채찍을 두드리면서 난벌에 하얗게 널린 사람들을 둘러보고난 아라가와는 자못 만족하여 구장의 동원솜씨를 치하하였다. 그는 몇개의 공사구간을 돌아보고 백지주와 함께 들어가면서 구장더러는 저녁에 따로 만나 공사일정을 타산하자고 하였다.

강성태는 혼자 공사판을 돌아가면서 십가장들을 만나 지시도 하고 사람들의 일하는 모습도 여겨보았다.

며칠사이에 그의 얼굴은 해빛에 타서 컴컴해지고 입술은 말라 히슥히슥 조갈이 들었으며 눈빛은 날카롭고도 대중할수 없는 음울한 빛을 띠우고있었다. 사람들은 어딘가모르게 엄엄하고 무엇에 화풀이를 못해 속타 하는듯 한 그의 기색을 엿보고는 전에없이 조폭해가는 그의 행위에 의혹도 가져보고 원한도 품어보고 반발심도 드러내면서 그를 주시하는것이였다.

함석필십가장이 담당한 공사구간에 이른 강성태는 그의 작업조에 망라된 동원인원들을 깐깐히 따져보았다. 다섯사람이나 이틀째 공사에 빠지고있었다. 그중에는 춘옥이와 복방아 어머니도 속해있었다.

《어쩐일인가? 자네 작업구미에선 왜 성적이 오르지 못하는가?》

얼굴이 멀끔하고 키가 후리후리한 함석필십가장은 삽자루를 짚고서서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더니 시답잖게 입을 열었다.

《할수 없지요. 다들 구실이 있으니까. 춘옥이는 늙은이 병시중때문에 자리를 뜰수 없다고 하고 복방아 어머니는 아들이 산판에 갔는데 농사차비는 어떻게 하고 공사에 나오라는가 하면서 땅땅 맞서는데 방법이 있습니까?》

《나오라구 하게. 그건 구실이 될수 없는것이니. 〈안민촌〉을 건설하는 일이 어디 쉬운노릇인줄 아는가? 눈을 꾹 감구 사람들을 동원해야 하네. 그래두 맞서는 사람이 있으면 벌금을 물린다구 하게. 자네 경찰의 강경조치가 무언지 잘 알지 않는가?》

《알지요.》

《안다는 사람이 이 모양인가?》

강성태는 엄한 눈빛으로 함석필을 지켜보았다. 가까이에서 일하던 몇사람의 농민들이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강성태의 노기가 어린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묵묵히 말없는 가운데 강성태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고있었다. 강성태의 귀에는 농민들이 조용히 연장소리를 울리면서 낮게 술렁거리고 쓰겁게 입맛을 다시는 소리와 진창에서 발을 뽑느라 혀를 차며 무엇엔가 성가스러워 중얼중얼 푸념을 늘어놓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강성태는 돌아보지 않았다. 소요는 차츰차츰 끓어올랐다. 농민들은 확연히 목소리를 높여 웅얼거리며 불평을 늘어놓는가 하면 다가오는 씨붙임을 두고 걱정하며 짜증을 내기도 하였다.

강성태는 돌아섰다. 말소리들은 점점 더 높이 울리면서 그를 따라왔다. 그 순간 함석필십가장이 무어라고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 소리들은 일시에 주저앉고 돌서덜에 부딪치는 삽소리와 팍팍 땅을 찍어대는 곡괭이질소리가 울리고 그때마다 발밑의 땅과 랭기를 품은 이른봄의 대기가 가볍게 진동하였다.

가슴은 이름못할 공허로 가득찼다. 분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대중못할 번거로운 상념이 머리를 아프게 자극하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풀어진 신끈을 매는척하면서 헛손질을 하였다. 똑똑한 정신으로는 이 순간을 지탱할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이 개구장노릇을 언제까지 해야만 한단말인가?)

강성태는 안타깝고 가슴이 죄여드는듯 한 일종의 막막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자기의 이런 행동, 사람들과 척질수밖에 없고 그들의 원한을 사지 않을수 없는 이런 행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김정숙동지의 사업에 그만큼 난관을 미치지 않을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곰곰히 할 때, 그로부터 오는 위구와 참담한 고심을 이겨낼수가 없었으며 점점 허망한 나락으로 빠져드는듯 한 자신을 도저히 걷잡아낼수가 없었다.

 

×

 

 

부락에서 토성공사소동이 크게 일어나면 날수록 그 여파는 그대로 김정숙동지께 미치였다. 아무리 공을 들여 사람들을 도와주고 가까이 하려고 애를 쓰셨으나 누구도 그이와는 친숙해지려고 하지 않았다.

아직 낯이 선데다가 구장누이라고 하여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숙이나 복방아네같이 구장에게 원한을 품고 적심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생각할수록 이 모든것은 지지리 마음을 녹여내는 고통이 아닐수 없었다. 정을 두고싶은 사람들에게 돌림을 받으며 사랑을 주고싶은 사람들에게서 랭대를 받는것처럼 섭섭하고 괴로운 순간이 어디 있으랴.

그이께서는 아직 생활에서 이런 다난한 곡절을 겪어본적은 없으시였다. 원쑤들과의 싸움이 아무리 어렵고 간고하였다 할지라도 자기 사람들에게서 받은 오해처럼 그렇게 힘들고 참아내기 어려울수는 없었으며 그것마저도 누구에게 하소할수 없고 괴로움도 나눌수 없으며 혼자의 가슴속에만 묻어두고 남모르는 고통을 당하는 그런 모대김에 들볶일수는 없는것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믿음과 사랑과 정리에 습관되고 충만되신분이시였다. 동지들의 사랑이 없이 살수 있다고 상상만이라도 해본적이 없는 분이시였으며 동지들의 믿음만 있다면 굶어도 배부르고 추위에도 얼어들지 않으며 고난도 웃으며 넘을수 있다고 항상 생각한, 드물게 부드럽고 순결한 마음을 지니셨던 분이시였다.

사랑에는 강하나 그 반대의것에는 전혀 강할수가 없으며 방비에도 전혀 무능할수밖에 없으셨던 그이시였다.

그랬건만 김정숙동지께서는 자기 마음속의 가장 약하고 민감한 이 감정을 얼결에라도 얼굴에 드러낼수가 없었으며 자칫 실수하여 그것을 드러내보일가봐 마음을 쓰시였다.

강성태는 언제나 말없는 가운데 그이를 주시하였다. 혹시 그이께서 마을사람들로부터 받은 랭대를 괴로와하며 견디기 어려워 속을 태우지나 않는가 하여… 그는 자기가 속을 썩이고있는것만큼 김정숙동지의 마음도 그렇게 번거로우리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래서 항상 감추지 못하는 당황함을 그대로 드러낸채 그이를 지켜보는것이였다.

그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언제나 조용하고 침착하며 강잉히 모든것을 참고견디는 한가닥 의지의 빛발만을 얼굴에 내비치시였다.

마을은 어둠속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낮동안 놓여난 짐승들을 찾아들이느라고 아이들이 사방에서 와짝 떠들었다. 미련한 짐승이 뉘 집 장독대를 뒤집어엎었다고 고함을 지르는 아낙네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피묻은 닭털을 주둥이에 물고있는 돼지를 잡아가겠다고 이웃간에 말다툼을 벌리는 농민도 있었다.

어수선한 저녁이였다.

아낙네들은 물동이를 이고 바삐 우물가로 모여들었다. 저녁을 한술씩 지어먹고는 개울가에 나가 홰불망치를 꽂아놓고 자갈을 춰야 하는것이였다. 공사를 다그치라는 아라가와의 지시가 떨어져서 부락사람들은 밤에도 쉴수 없게 되였으며 곱절이나 바삐 돌아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나가시였다. 한무리의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빨래를 하기도 하고 나물을 헹구기도 하고 물을 긷기도 하면서 떠들어대고있었다.

《날거리가 자꾸 좋아지는게 겁나는군요. 씨붙임때를 놓쳐버리면 어쩌겠나요. 남정들은 산판에 끌어가구, 밭을 갈아주어야 씨앗이라도 뿌리지 않겠나요?》

춘옥이가 아낙네들을 보고 하는 말이였다. 그러자 옥탄이가 춘옥이의 말을 받았다.

《말마오. 농사가 다 뭐요. 강구장이 하는 노릇을 보면 땅에 씨앗묻을 잡도리가 아이오. 사람이 얼마나 영악해졌는지.》

《참 강구장이 왜 그렇게 사나와졌을가요? 이젠 구장등쌀에도 우린 못살것 같아요.》

복방아 어머니가 끼여들었다. 물을 긷던 방숙이가 드레박줄을 잡고서서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그러게말예요. 동네사람들을 못살게 굴어서 무슨 수가 나는지. 구장누이두 호사스럽게 살아온 녀자 같아요. 제가 농사지으려 왔다고는 하지만 어디 농사지을 녀자같아요?》

《기가 차라. 제가 농사를 지어? 오래비등을 믿구 마을사람들을 구박이나 하지 말라지.》

복방아 어머니가 비쭉거렸다. 그 다음 무슨 말끝엔가 아낙네들은 웃어댔다. 방숙이가 먼저 김정숙동지를 알아보고 드레박을 우물속에 떨어뜨렸다. 물이 우물밖으로 흘러떨어지고 좌르르 활차가 돌아갔다.

놀란 아낙네들이 엉겁결에 뛰여일어났다.

《어쩐 일이요?》

《구장누이가… 와요!》

방숙이가 아낙네들에게 귀뜀하였다. 아낙네들은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라하더니 저마끔 빨래함지며 나물버치며 물동이들을 들고 뿔뿔이 달아났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신듯 흔연히 아낙네들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건늬시였으나 누구도 대척하지 않았다.

텅빈 우물가에 홀로 서신 김정숙동지께서는 막을수 없는 공허와 구슬픔이 가슴을 헤치고 날아드는것을 어쩔수 없으시였다. 다리가 떨려 그이께서는 우물귀틀을 잡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물가에서 퍼그나 시간을 보내고야 저고리앞섶에 물을 흘리면서 돌아오시였다. 삽짝을 열고 뜰안으로 들어서자 난데없이 머리우에서 물동이가 훌렁 들리웠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강성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머리우에서 미끄러지는 또아리를 얼른 잡으시며 강성태를 바라보시였다. 그러나 강성태는 아무말도 없었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잠시 그이를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쉬였다.

부엌에 물동이를 들여다놓고 웃방으로 올라간 강성태는 김정숙동지더러 좀 의논을 하자고 하였다. 강성태는 화가 동한듯 한 얼굴을 하고 방등밑에 쭈그리고 앉고 김정숙동지께서는 문턱 바로밑에 들어와 한쪽무릎을 세우시고 단정히 앉으시였다.

《나는 이 노릇을 더는 못하겠습니다.》

강성태는 통절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개구장노릇을 더는 못하겠단말입니다. 사방에서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적심을 가지구 맞서는판인데 내가 어떻게 개구장노릇을 계속한단말입니까?》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지회장동지가 혁명의 임무를 망각하고 그런 말씀을 하신다고는 차마 생각할수 없어요… 저는 리해를 못하겠습니다.》

《리해를 못할것이 있습니까? 이대로는 일을 해나갈수 없습니다. 내가 개구장노릇을 그만두지 않는한에는 공작원동지가 사람들을 장악하기 어렵습니다. 보지 못합니까? 얼마나 영악스레 엇나가고있는지.》

《그럼 어떻거실 작정입니까? 지회장동지의 생각은요?》

강성태는 후-하고 단숨을 쉬고나서 대답하였다.

《내가 사람들에게서 좀 환심을 사는수밖에 없지요. 지금처럼 강하게는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작원동지의 사업에서 출로가 열립니다.》

《그렇게 되면 적들이 지회장동지를 어떻게 볼것 같습니까? 그걸 생각하셔야지요. 적들도 눈이 있습니다. 적들이 지회장동지를 의심하게 되면 우리의 사업은 지금보다 더 어려운 난관에 처하게 됩니다.》

강성태는 어떤 격한 생각에 목이 막혀 잠간동안 말을 못했다.

《그렇지만 공작원동지가 겪는 고충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겠습니다. 다른 방도가 있어야지 이대로는 안됩니다.》

《저의 걱정은 마세요. 저는 얼마든지 견디며 난관도 헤쳐나갈 작정입니다.》

《공작원동지, 너무 그러지 마시오. 참고견디는데도 한도가 있습니다. 방금 우물가에서 봉변을 당하는것도 보았습니다. 에익, 이 고통을…》

강성태는 움켜쥔 주먹을 무릎우에 올려놓고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은 침통하게 이그러졌으며 희슥희슥 말라터진 입술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있었다. 그것을 보시자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이 옥죄여드시며 무어라 표현 못할 쓰라림이 온몸을 에워싸는것을 어쩔수 없으시였다.

《미안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지회장동지에게 부담을 끼친 제가 일을 잘못했어요. 제가 이처럼 지회장동지를 괴롭히다니요.》

《원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야 내가 안할 소리를 했지요. 그러지 마시오. 나도 눈이 있고 분별있는 사람인데 공작원동지가 겪는 고통을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자신을 모질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위해주시니 고마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용히 손을 올려 저고리앞섶을 만지시면서 진정을 다해 말씀하셨다.

《저는 그저 저의 정성과 힘이 모자라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주지 못하고있다는 생각만 들어요. 얼마나 지지리 가난에 시달리고 학대에 짓눌린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가슴속에 들어찬 원한과 비분을 생각하면 어찌 한순간에 그들의 노염을 풀어줄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것은 옳습니다. 사람들의 아픈 가슴을 생각하면…》

강성태는 약간 땀이 내번진 부석부석한 얼굴을 들고 감명에 차 그이를 바라보았다. 가늘게 주름이 얽힌 그의 눈시울은 그늘이 진듯이 푸르스름하고 열기를 띤 두눈은 약간 충혈되여있었다. 문득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어떤 충동에 숨이 가빠지신듯 김정숙동지의 어깨가 천천히 오르내리였다.

《사람들을 깊이 생각하고 동정하며 끝까지 그들을 리해하려고 애쓴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은 아픈 말을 하지 않을수가 없으며 원쑤들의 눈을 가리우고 혁명을 일떠세우기 위해서 구장노릇도 하지 않을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고비도 넘길수 있고 괴로운 순간도 참아낼수 있을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해주세요. 저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랭대와 온갖 수모를 괴롭게만 생각하지 않을터입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오며 가슴에 맺힌 원한의 폭발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눈물이 나군합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눈을 슴벅이시였다. 강성태는 고개를 숙이였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고보면 가슴에 눈물이 차오르는 일이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수천마디의 말을 대신하며 그리고 수천의 가지가지 목메이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면서 혁명가의 기개, 혁명가의 의지며 리념이며 숭고한 지향이기도 한 그 모든것을 속속들이 더듬게 하는 그런 앙양된 상념의 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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