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민주의 요람을 지켜
□ 《미국놈들이 조선사람을 잘못 보았소》
해방후 민주건설의 5년이라는 기간은 짧았던가 길었던가. 흔히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이 5년이라는 기간에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해방은 인민들에게서 식민지노예살이의 멍에를 끊어버렸고 민주개혁과 공화국의 창건은 그들을 나라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의 지위에 올려세웠다. 이 희한한 현실앞에서 사람들은 반만년민족사에 처음으로 도래한 인민의 좋은 세상을 더 훌륭히 가꾸고 꽃피워갈 일념으로 일하고 또 일하였다.
인민들은 행복한 새세상이 전쟁의 불바다에 잠기리라는것을 아직은 다는 모르고있었다.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표면화된 조선에 대한 미제의 침략적야망은 이무렵에 이르러 더욱 로골화되고있었다.
미제는 《해방자》의 탈을 쓰고 조선반도의 남쪽을 점령한 첫날부터 군사적침공에 의한 전쟁의 방법으로 전조선을 강점하려는 모험에 매달리였다.
도서 《미국의 극동군사전략》의 저자 하야시 가쯔야는 자기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웨드마이어중장(장개석의 군사고문-인용자)은 <한국>에서의 군사기지화계획진행정형을 시찰한 뒤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 조선의 통일과 독립은 미국의 전반적리익에 중대한 위협으로 되므로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된다. 군사적점령의 범위도 전조선으로 확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웨드마이어 보고서의 결론은 실천에 옮겨졌다. 이것이 조선전쟁이였다.》(일본도서 《미국의 극동군사전략》 1965년)
이렇게 조선인민은 미제의 탐욕적인 침략정책에 의하여 전쟁을 강요당하게 되였다. 3년간의 전쟁은 조선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재난과 불행을 들씌웠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조선인민이 수난자의 운명만을 겪게 된것은 결코 아니였다. 준엄하였던 조국해방전쟁에서 인민은 더욱 강해졌고 굳게 단결되였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미제를 타승하고 내리막길에 처넣은 영웅적조선인민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미제와 남조선괴뢰군은 38°선 전 지역에 걸쳐 불의의 북침공격을 개시하였다.
조국과 민족의 운명이 엄중한 위험에 직면하게 된 그 시각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지체없이 내각비상회의를 소집하시였다.
적들의 대병력이 북으로 밀려오고있는 준엄하고도 절박한 현실앞에서 내각성원들은 누구라 없이 심각한 우려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였고 회의실분위기는 전례없이 엄숙하였다.
바로 이때 팽팽하게 긴장된 회의실의 공기를 뒤흔들며 위대한 수령님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 놈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소.
미국놈들이 조선사람을 잘못 보았소.》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이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는것이였다.
회의실 주석단에 나오신 수령님께서는 언제나와 같이 환하신 얼굴로 장내를 둘러보시고나서 미국놈들이 조선사람을 알기를 우습게 안다, 승냥이는 몽둥이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과 같이 조선사람을 몰라보고 덤비는 놈들에게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 군림한 미제를 무분별하게 날뛰는 한갖 승냥이로 보시고 몽둥이찜질로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이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배짱과 담력은 실로 백두산을 주름잡으며 왜적을 벌벌 떨게 한 백전로장의 기개 그대로였다. 팽팽한 풍선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 회의실의 긴장한 분위기는 순간에 풀리고 승리에 대한 신심이 차넘쳤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엄혹한 시각에 우리가 만일 싸우기를 주저한다면 우리 인민은 또다시 망국노의 운명을 면치 못할것이라고 하시면서 전체 인민이 총동원되여 적들의 무력침공을 좌절시키고 결정적인 반공격으로 넘어가 무력침공자들을 소탕할데 대한 명령을 내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9(1950)년 6월 26일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력사적인 방송연설에서 전체 인민군대와 인민들을 전쟁승리에로 조직동원하기 위한데서 나서는 구체적인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전체 인민이 총동원된 정의의 전쟁으로 미제침략자들을 물리치자는것이 전쟁수행과 관련된 위대한 수령님의 전략적의도였다.
그것은 민주의 새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맛본 인민이 그 행복을 목숨바쳐 지켜내리라는 확신, 인민에 대한 절대적믿음에 기초한 력사적선언이였으며 전민을 조국수호전에로 부르는 호소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각계각층 인민들이 앞을 다투어 전선으로 탄원하였다. 전쟁이 일어난 후 며칠사이에 74만여명의 근로자들과 청년학생들이 전선으로 나갔으며 몇주일후에는 그 수가 80여만에 이르렀다.
철도역들은 날마다 전선으로 떠나는 근로자들과 청년학생들로 붐비였다.
후방에 남은 근로자들도 적을 족치는 전투원의 심정으로 증산투쟁에 몸을 바쳤다.
그들은 로동시간을 연장하여 3교대제를 2교대제로 개편하였으며 전선돌격대운동, 청년작업반운동, 2인분, 3인분 초과생산운동 등 여러가지 형태의 전시증산운동을 벌리였다.
전시생산과 전선원호를 위한 투쟁은 농촌에서도 어촌에서도 벌어졌으며 여기에는 녀성들과 어린 학생들로부터 늙은이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이 적극 참가하였다.
《모든것을 전쟁승리를 위하여!》라고 하신 수령님의 전투적구호를 높이 받들고 전당, 전군, 전민이 떨쳐나섰다.
인민을 믿으시고 그들을 전쟁승리에로 불러일으키신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가 있음으로 하여 적들이 선전포고도 없이 38°선 전 지역에 걸쳐 불의의 공격을 감행하여왔음에도 조선인민군은 원쑤들을 맞받아 즉시 반공격에로 넘어갈수 있었다.
반공격으로 넘어간 인민군부대들은 38°선이북으로 기여든 적들의 침공을 완전히 저지시키고 질풍같이 남으로 진격하였다.
이것은 무력침공을 개시하기만 하면 38°선을 삽시에 돌파하여 《아침은 해주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으며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떠벌이던 적들에게 안기는 무서운 보복타격이였으며 무자비한 징벌이였다.
전전선에 걸쳐 총반공격에로 넘어간 인민군부대들은 3일만에 서울을 해방하고 적의 주력집단을 포위섬멸하였으며 공격속도를 더욱 높여 7월 4일에는 제2근거지라고 하던 수원을 해방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대담한 작전과 령활한 지휘밑에 오산계선에서 미제침략군의 첫 지상부대를 괴멸시킨 인민군대는 금강계선의 《불퇴의 방어선》을 단숨에 허물어버린데 이어 재빠른 우회기동과 전면포위전술로 미제의 《상승사단》을 통쾌하게 전멸시키고 적들의 《림시수도》인 대전을 해방하였다.
지상전선에서뿐아니라 해상과 공중에서도 전쟁국면이 뒤집혀졌다.
조선인민군 해병들은 7월 2일 새벽 주문진앞바다에서 자그마한 어뢰정 4척으로 《움직이는 섬》이라고 자랑하던 미제의 1만 7 000t급 중순양함을 격침시키고 1만 2 000t급 경순양함을 격파하는 세계해전사에 류례없는 빛나는 위훈을 세웠다.
용감한 인민군비행대들은 《공중요새》라고 뽐내던 미제의 《B-29》전략폭격기를 비롯한 수십대의 최신형전투기와 폭격기를 격추, 격파하였다.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인민군장병들은 적의 숨통을 옥죄이면서 승리적인 전진을 계속하여 전쟁이 개시된지 불과 한달 반사이에 남반부지역의 90%이상과 인구의 92%이상을 해방하였다.
인민군대의 강력한 타격에 의하여 좁은 《부산교두보》에 갇히운 적들은 공포와 비관과 절망속에 허덕이게 되였다. 세상사람들은 청소한 조선이 세계를 정복하려는 강대한 미국에 대하여 력사상 가장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하는데 대하여 의혹과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제놈들의 《강대성》만을 믿고 조선사람을 얕잡아보았지만 놈들을 맞받아나선 그들은 망국노의 멍에를 지고 시들어가던 어제날의 조선사람이 아니였다.
민주의 새 제도에서 나라의 주인으로 자라난 우리 인민은 해방후 비록 5년밖에 안되는 짧은 세월이지만 자기 운명을 자기 손에 튼튼히 틀어쥐고 자신이 지닌 력사적사명을 심장으로 깨달은 인민이였다.
원쑤들은 위대한 령도자의 두리에 뭉친 인민이 얼마나 강의한 의지를 지니였으며 얼마나 거대한 힘을 발휘할수 있는가를 보지 못했다.
인민군대의 련속적인 타격에 의하여 조선에서 쫓겨나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된 미제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조선을 강점하려는 야망을 기어이 실현해보려고 막대한 병력과 전투기술기재를 동원하여 침략전쟁의 규모를 더욱 확대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태평양방면에 배치하였던 저들의 륙해공군 총병력과 지중해함대의 일부, 미국본토의 지상군과 영국을 비롯한 추종국가군대까지 모두 합쳐 30만에 가까운 병력을 조선전선에 더 들이밀었다. 미제는 증강된 대병력으로 락동강계선에서 《총공세》를 시도하는 한편 9월 중순 5만여명의 대병력과 수백척의 함선, 약 1 000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적들은 인천, 서울, 원주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우리의 전선과 후방을 차단하고 전선의 인민군주력부대를 포위소멸하며 단시일내에 전조선을 강점하려고 획책하였다.
적의 대집단이 인천, 서울지구에 침입하고 락동강계선에서 적들이 대대적인 반공격으로 이행함으로써 전선의 형편은 공화국에 매우 불리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조직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고 그 관철에로 인민군대와 전체 인민들을 조직동원하시기 위하여 주체39(1950)년 10월 11일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라는 력사적인 방송연설을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방송연설에서 인민군장병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시면서 조국의 촌토를 사수하며 도시와 농촌을 수호하기 위하여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쳐 용감히 싸울것을 호소하시였다. 그리고 전체 인민들은 한대의 기관차, 한대의 차량, 한알의 쌀도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며 적강점지역들에서는 빨찌산투쟁을 광범히 전개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높이 받들고 전체 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은 드놀지 않는 신념으로 원쑤격멸에 떨쳐나섰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는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엄혹한 시련이 아닐수 없었으며 많은 애로와 난관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 공화국북반부의 넓은 지역을 일시 강점한 미제침략자들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신천군 한개 군에서만도 군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 000여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우리 인민을 결코 놀래울수도 굴복시킬수도 없었다.
인민군대와 인민들은 미제에 대한 치솟는 적개심과 복수심을 백배, 천배로 벼리며 도처에서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겨주었다.
항일투사 최현을 비롯한 우수한 지휘관들의 지휘밑에 제2전선부대들은 황해도와 강원도, 평안남도 등 중부조선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적후투쟁을 과감히 벌려 여러 지역들을 해방하고 수많은 애국자들과 인민들을 구원하였으며 적의 보급선을 끊고 수많은 적유생력량과 전투기술기재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인민들도 미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지하투쟁과 유격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적강점지역의 애국적인민들과 청년들은 물론 소년들까지 일떠서 유격대와 청년근위대, 소년근위대를 뭇고 적들의 지휘부와 병영을 들이치고 보급선을 끊어버렸으며 감금된 인민들을 구출하였다.
준엄한 싸움의 나날에 우리 인민들은 조국의 소중함을 더욱 가슴깊이 새기게 되였으며 그 어떤 시련도 뚫고나갈줄 아는 강의한 인민으로 성장하였다.
주체39(1950)년 11월 하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군부대들에 전 전선에서 총반공격으로 넘어갈것을 명령하시였다.
인민군대의 재진격의 함성이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전선서부의 인민군부대들은 청천강지역의 여러곳에서 적을 대량적으로 포위섬멸하고 도망치는 적들을 맹렬히 추격하여 파죽지세로 밀고나갔으며 전선동부의 아군련합부대들은 장진호반일대에서 미제침략군을 포위섬멸하고 함흥방향으로 성과를 확대하였다. 제2전선부대들도 38°선계선을 장악하고 적의 증원부대들을 때려부시는 동시에 강력한 배후타격전을 벌려 적들을 격멸소탕하였다.
한편 인민유격대들도 인민군부대들과의 긴밀한 협동밑에 적의 지휘부, 통치기관, 탄약저장고, 정거장, 통신지휘기관들을 기습소탕하고 고향마을을 해방하였으며 패주하는 적들의 퇴로를 끊어버리는 투쟁을 활발히 벌리였다.
패주하는 적들은 가닿는 곳마다에서 길목이 막혀 갈팡질팡하다가 포위섬멸전의 불바다속에 휘말려들어 무자비한 징벌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노호하는 격랑우에 떠서 몸부림치던 가랑잎들이 길길이 솟는 파도속에 삼키워버리는 모양과도 같았다.
지어 미제침략군 8군사령관 워커까지도 아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가려고 헤덤비다가 졸병들과 함께 황천객이 되였다.
그리하여 우리 인민은 12월말에는 적들이 일시 강점하였던 공화국북반부지역을 완전히 해방하였으며 38°선이남까지 전과를 확대하였다.
준엄하였던 1950년 한해가 저물어가는 조국강산에 만세의 함성이 그칠줄 몰랐다.
청소한 공화국을 요람기에 말살하고 전조선을 삼키려던 미제국주의자들의 강도적침략계획은 인민군대와 전체 조선인민의 영웅적투쟁에 의하여 여지없이 파탄되였다.
조선에서 돌이킬수 없는 참패를 당한 미제는 공화국의 위력과 잠재력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게 되였다.
이해 《감은절》(11월 23일)전으로 전조선을 강점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맥아더는 미국대통령 트루맨에게 보낸 보고에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부과된 권한과 힘으로는 도저히 사태를 수습할수 없다고 우는소리를 줴쳤으며 미합동참모본부 의장 브랫들리는 12월에 미국회에서 《우리들은 조선에서 잘못 고른 시각에 잘못 고른 장소에서 잘못 고른 적과 싸우고있다.》고 비명을 질렀다.
미제를 질겁케 하는 공화국의 위력과 잠재력, 그것은 행복한 삶의 보금자리를 지켜 총대를 틀어잡고 일떠서 강철의 령장 김일성장군님의 명령일하에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강력한 대오로 자기의 모습을 일신시킨 군대와 인민의 단합된 힘이였다.
□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
미제의 《강대성》에 대한 신화는 여지없이 깨여졌다.
미제침략자들은 전쟁 1년동안에 군사, 정치, 도덕적으로 심대한 패배를 당하였다. 미제는 저들의 침략무력과 남조선괴뢰군 그리고 추종국가고용병들을 내몰아 가장 야수적이고도 잔인한 전쟁방법으로 공화국을 일거에 점령하려고 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시기에 입은 손실의 절반에 달하는 막대한 유생력량과 전투기술기재를 잃고 전쟁을 일으켰던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였다.
미제는 극도로 당황하였으며 공포와 절망감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렸다.
미제침략자들은 저들의 참패를 만회해보려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무력을 더욱 대대적으로 끌어들이면서 《하기공세》, 《추기공세》, 《김화공세》 등 어마어마한 군사적공세를 련이어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전쟁은 류례없이 격렬하고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그러나 군사적압력과 공세가 심화될수록 인민군대는 더욱더 용기백배하여 조국의 촌토를 결사수호하였다.
가렬한 싸움으로 날이 새고 저무는 혈전속에서도 인민군장병들 누구나의 가슴마다에 드팀없는 신념으로 간직된것은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끝없는 충정과 열렬한 조국애였다.
나의 고지운동의 선구자인 한계렬영웅의 위훈이 그것을 보여주고있다.
1951년 4월 중순 한계렬이 지휘하는 소대는 1044. 9고지 북쪽 무명고지에서 적의 반돌격을 물리치기 위한 방어전투를 진행하고있었다. 불과 12명밖에 안되는 적은 인원으로 적 1개 대대력량의 7차례에 걸치는 공격을 물리쳤다. 수차에 걸치는 적들의 공격을 물리치고나니 고지에는 5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전사들은 한걸음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무서운 타격에 적들은 무리죽음을 당하면서도 수적우세를 믿고 검질기게 달려들었다.
소대장 한계렬은 고지가 위험에 처하게 되자 《내가 살아있는 한 적들은 이 고지에 한걸음도 올라오지 못할것이다. 조국의 고지는 모두다 나의 고지이다. 이 고지와 그리고 나의 뒤에는 수많은 고지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물러설 고지는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고지를 지켜싸웠다.
최후의 순간에 그는 《동무들, 조국의 고지는 나의 고지, 고지를 끝까지 사수하여주시오.》라고 전우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허리에 찬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여 두손에 정중히 받쳐들고 간신히 《최고사령관동지께 이 권총을…》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그의 마지막말은 전우들의 심금을 울리며 그들을 영웅적위훈에로 고무하였다. 고지의 방위자들은 《조국의 고지는 나의 고지, 나의 고지를 피로써 사수하자!》라고 웨치면서 고지를 목숨으로 지켜냈다.
나의 고지운동은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무한한 충직성과 숭고한 조국애에서 흘러나온 백절불굴의 정신과 대중적영웅주의의 발현이였다.
영웅의 절절한 마지막소원은 드디여 실현되였다.
주체40(1951)년 6월 어느날 공화국영웅들과 모범전투원들을 만나신 자리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계렬영웅이 사용하던 무기를 받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영웅의 넋이 어려있는 무기를 이윽토록 눈여겨보시다가 한계렬동무는 나의 고지운동의 첫 봉화를 든 용감한 영웅이라고 높이 치하하시였다.
영광이면 이보다 더 큰 영광, 믿음이면 이보다 더 큰 믿음이 어디에 있으랴!
영웅의 삶은 비록 짧았지만 그는 수령의 사랑속에 영생하는 전사로 되였다.
《조국의 고지는 나의 고지!》
이 말은 싸우는 전선의 수많은 고지마다에 끝없이 메아리쳤다.
중기사수 조군실영웅은 적과의 싸움에서 왼쪽다리와 두팔에 심한 부상을 입고 몸을 가늠할수 없게 되자 마지막힘을 모아 턱으로 중기관총의 압철을 눌러 적을 소멸하였으며 강호영영웅은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 몸을 가늠할수 없게 되자 입으로 수류탄을 물고 적진속으로 굴러내려가 폭파시키고 최후를 마쳤다.
1211고지방위자들이 발휘한 대중적영웅주의는 나의 고지운동의 극치를 이루었다.
전선동부에 위치한 1211고지는 전략작전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이 고지를 지켜내는가 지켜내지 못하는가 하는것은 전선동부는 말할것도 없고 전 전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고리로 되고있었다. 만일 1211고지를 적들에게 내여주게 되면 금강산지구를 비롯한 많은 지역을 잃어버리게 되고 원산까지도 내주어야 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최대의 포격》, 《최대의 폭격》을 떠벌이면서 1211고지에 하루에 3만~4만발의 포탄과 폭탄을 퍼부었으며 수많은 땅크의 엄호밑에 인민군방어진지를 련속 공격하였다. 하늘을 가리우던 울창한 산림이 모조리 불타고 바위도 부서져 가루가 되여 흩날렸으며 땅이 타번지였다. 산토끼와 다람쥐마저 몸둘데가 없어 전사들의 품으로 뛰여들었다. 1211고지는 이리떼처럼 밀려드는 적들과의 치렬한 피의 격전속에서 해가 저물고 날이 밝았다. 그러나 적들의 그 어떤 발악도 방위자들의 억센 투지를 꺾을수 없었다.
그들은 모임을 가지고 위대한 장군님을 위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조국의 고지를 영예롭게 사수할것을 굳게 맹세다졌으며 수령님께 자기들의 맹세를 담은 편지를 올리였다.
그 맹세문들가운데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이시여!
원쑤들은 악착스럽게 달려들고있습니다.
허나 항일의 전통을 이은 우리는 비록 몸이 천쪼각만쪼각나는 한이 있어도 한놈의 적도 올려놓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겐 죽어 묻힐 땅은 있어도 살아 물러설 땅은 한치도 없다는것을 똑똑히 알고있습니다.
당신의 전사들이 서있는 한 1211고지는 영원히 조국의 고지로 남아있을것입니다.》
18살의 민청원 리수복분대장은 반돌격을 앞두고 자기의 수첩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해방된 조선의 청년이다. 생명도 귀중하다. 찬란한 래일의 희망도 귀중하다. 그러나 나의 생명, 나의 희망, 나의 행복, 그것은 조국의 운명보다 귀중치 않다.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 둘도 없는 목숨이지만 나의 청춘을 바치는것처럼 그렇게 고귀한 생명, 아름다운 희망, 위대한 행복이 또 어디 있으랴!》
자기의 청춘, 자기의 생명보다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더 귀중히 여기는 정신력, 그것은 1211고지방위자들과 전체 인민군전투원들 그리고 조선청년모두의 사상정신적풍모이기도 하였다.
1211고지방위자들은 모두가 자기들의 결의를 지켜 청춘을 바쳐 용감하게 싸웠다.
무명고지릉선에서 리수복영웅은 불뿜는 적의 화구를 가슴으로 막아 승리의 진격로를 열어제꼈고 한 통신병은 끊어진 통신선을 자기의 혈맥으로 이어 부대의 지휘통신을 보장하였으며 치명상을 입은 한 전투원은 생명의 마지막순간에 《김일성장군 만세!》를 웨치며 수류탄묶음을 안고 적진속에 굴러들어 육탄으로 적을 소멸하였다.
취사병들도, 위생병들도 그리고 담가대원들도 싸우는 전투원들을 도와 영웅적투쟁을 벌리였다.
후방인민들도 《한발의 포탄, 한알의 쌀이라도 더 많이 1211고지에 보내자!》라는 구호밑에 우박치는 탄우속을 뚫고 탄약과 식량을 나르고 부상자들을 후송하였다. 군대와 인민은 말그대로 한덩어리가 되여 미제침략자들을 쳐부시였다.
1211고지의 영웅적방위자들은 전투기간 수만명에 달하는 적의 유생력량을 살상포로하였으며 수많은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를 로획파괴하였다.
1211고지전투에서 계속 녹아난 적들은 제놈들의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강물을 이룬 이 고지를 쳐다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상한다고 하여 《상심령》이라고 불렀고 혹은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듯 하다 하여 《단장령》이라고 하였으며 이 고지일대의 골짜기들을 그속에 들어서기만 하면 살아나오지 못한다고 하여 《함정골》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1211고지가 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무리죽음터로 되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미제는 《기술적우세》가 전쟁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떠들던 그 입으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무기도 오늘 전선동부에서는 무능한 기구로 되였다.》고 비명을 질렀다.
이러한 비명소리는 비단 1211고지만이 아닌 하늘과 바다 등 정의의 수호자들이 지켜선 조선의 그 어디에서나 터져나왔으며 날이 갈수록 적들의 염전의식을 증폭시키고 전쟁의욕을 허물어버리는 촉매제로 되였다.
1953년 1월 미제가 《신공세》의 서막으로 벌리였던 정형고지전투가 그것을 웅변으로 실증해주고있다.
그때 미제침략자들은 인민군 한개 련대가 방어하고있는 이 계선에 무려 3개 사단을 동원하고 자기들이 인민군대를 치는 《모범전투》를 벌린다고 떠벌이면서 저들의 륙군, 공군의 고위급장성들과 추종국가의 공사, 령사, 전체 《유엔군》 종군기자들까지 끌어내다가 《구경》시켰다.
만사람의 이목이 쏠린 속에 진행된 정형고지전투에서 인민군용사들은 적의 《파도식》공격을 물리치고 결정적인 반공격으로 넘어가 적들에게 무자비한 징벌을 안기였다. 그리하여 정형고지《모범전투》는 수치스러운 참패로 끝나고말았다.
이 전투에 대하여 미국의 한 출판물은 《클라크와 밴플리트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한 언덕을 얻기 위하여 하루 30만발의 포탄을 쏘았고 가장 우수한 기계화병력을 투입하였으나 완전히 실패하였다.》라고 썼다.
정형고지전투의 실패는 적들내부에 수습할수 없는 혼란을 빚어냈다. 적들은 이름없는 자그마한 고지에 대한 공격에 필요한 모든 군종, 병종과 최신무기를 다 동원하고서도 실패하였는데 하물며 전 전선에서 대규모적《공세》를 벌린다면 과연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고 하면서 옥신각신하였다. 적들은 《신공세》를 벌린다면 《5만 내지 그 이상》의 주검을 낼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량면에서 협격을 받고 최후의 한사람까지 소탕당할 위험성이 있다.》고 비명을 올렸다.
궁지에 빠지게 된 미제의 전쟁우두머리들은 부득이 《신공세》기도를 포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한 인민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불굴의 영웅적기상, 그것은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충정에 뿌리를 둔 결사수호정신의 발현이였다.
□ 후방도 전선
전선만이 싸움터가 아니였다. 후방의 인민들도 모두가 전선용사들의 심정으로 전쟁승리를 위해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조국해방전쟁은 방대한 경제군사적잠재력을 가지고있는 미제무력침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이였다. 그런것만큼 전쟁에서의 물질적수요는 매우 크고 다양하였을뿐아니라 끊임없이 증대되였다. 전선의 이 방대한 물질적수요를 그것도 후방의 교살을 노린 미제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포격속에서 보장한다는것은 조선인민에게 있어서 실로 아름찬 일이 아닐수 없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현대전쟁의 요구에 맞게 우리의 후방을 조직되고 공고한 후방으로 튼튼히 꾸려 날로 증대되는 전선수요를 원만히 보장할수 있게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화의 나날 몸소 불비속을 헤치시며 여러 공장, 기업소들을 현지지도하시였다.
주체40(1951)년 2월 어느 한 군수공장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장일군들과 하신 담화 《무기를 더 많이 생산하여 전선에 보내자》에서 무기와 탄약을 생산하기 위한 투쟁은 조국해방전쟁의 종국적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투쟁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의 지형과 조선사람의 체질상특성에 맞는 무기를 질적으로 더 많이 생산할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기와 탄약생산을 늘이기 위하여 설비관리사업을 개선하고 기술혁신운동을 널리 벌리며 자재와 공구보장사업을 잘하고 기술인재양성사업을 강화할데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피끓는 심장에 받아안은 우리의 로동계급은 《후방도 전선이다!》라는 구호밑에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적에 대한 치솟는 증오심을 안고 원쑤와의 결전을 벌리는 기세로 전시생산을 다그쳤다.
로동자들은 《싸우는 인민군용사들에게 한알의 탄알, 한자루의 총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만들어 보내주자!》라는 구호를 들고 전선작업반운동, 전선지원청년작업반운동 등 여러가지 전시증산경쟁운동을 힘있게 벌리였다.
로동계급의 헌신적인 투쟁에 의하여 군수품생산이 현저히 늘어났다. 군수공업기업소들의 생산실적은 평화적건설시기에 비하여 5~6배이상 높아져 더 많은 무기와 탄약을 전선에 보내줄수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로동계급의 증산경쟁운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것은 새 기준량창조운동이였다.
새 기준량창조운동의 불길은 군수공장로동자들속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들은 《고속도절삭방법》을 창안도입하여 종전의 3배이상의 능률을 내였다.
군수공업부문 로동자들속에서 일어난 혁신의 봉화는 채취공업, 경공업, 림업부문을 비롯한 인민경제의 다른 부문에도 널리 퍼져 새 기준량창조운동은 급속히 대중적인 혁신운동으로 확대발전되였다. 그리하여 로력과 자재가 긴장한 어려운 조건에서도 전시생산을 끊임없이 늘여 1951년도 공업총생산계획을 109. 6%로 넘쳐 수행하였다. 1952년도에 이르러 공업총생산액은 전해에 비하여 19% 더 장성하였으며 군수공장에서 포, 기관단총을 비롯한 각종 무기생산이 늘어남으로써 장기전에 대처할수 있는 군수기재들을 그쯘히 마련할수 있었다. 1953년 인민경제계획도 그해 7월 정전이 실현될 때까지 매달, 매 분기별로 넘쳐 수행되였다.
농민들도 전시식량증산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전시식량증산투쟁은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 진행되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로력사정이 긴장한데다가 미제의 야수적폭격으로 비료공장과 관개시설이 파괴되였다. 뿐만아니라 적들의 파괴략탈행위로 말미암아 식량은 물론 축력과 농기구, 심지어 종곡까지도 매우 부족하였다.
그러한 극악한 조건에서도 농민들은 창조적열성과 호상협조정신을 높이 발휘하여 전시식량증산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각지 농민들은 부족한 종곡과 식량을 호상협조하여 유무상통하는 방법으로 해결하였으며 자급비료를 생산하고 적의 포탄깍지와 파고철로 농기구를 만들었다.
농민들은 품앗이반과 소겨리반 등을 광범히 조직함으로써 로력과 축력의 부족을 타개하고 전시식량증산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갔다. 품앗이반과 소겨리반을 무어 서로 힘을 합치고 도우면서 농사일을 하는것은 우리 농민들의 전통적인 미풍이였다. 품앗이반과 소겨리반을 널리 조직하는것은 전시로력과 축력의 부족을 타개하는데서뿐아니라 농민들의 단결을 강화하고 그들을 집단주의정신으로 교양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1952년에 평안남도에서만도 3만 3 523개의 품앗이반과 2만 6 151개의 소겨리반이 조직운영되였으며 품앗이반에 망라된 농민은 35만 7 715명이나 되였다.
농민들은 밤낮없이 계속되는 적기의 폭격과 함포사격속에서도 논밭머리에 대피호를 파고 소잔등에 위장을 해가면서 낮에 밤을 이어 밭을 갈고 씨를 뿌리였다.
이 과정에 녀성보잡이운동이 힘있게 벌어졌다.
농촌녀성들은 밭갈이는 자기들이 맡겠다고 하면서 전선에 나간 남정들을 대신하여 보탑을 잡았다. 그들은 《전선에 나간 남편과 아들과 오빠를 대신하여 식량증산으로 원쑤들에게 복수의 죽음을 주자!》라고 하면서 지난날에는 남성들만이 할수 있다던 논밭갈이를 제힘으로 보란듯이 해제끼였다. 도처에서 보잡이강습이 조직되고 좋은 경험을 일반화하는 과정에 더욱더 많은 녀성들이 보잡이운동에 참가하게 되였다.
강원도 안변군의 한 녀성은 군안의 첫 녀성보잡이로서 자기 리에서 16명의 녀성보잡이를 양성하고 그중 우수한 10명을 각 면에 파견하여 녀성들에게 밭갈이강습을 주게 함으로써 군적으로 400여명의 녀성보잡이가 양성되게 하였으며 영농사업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는데 기여하였다.
각지 농촌들에서 녀성보잡이운동이 대중적으로 벌어진 결과 평안북도, 평안남도, 황해도에서만도 1951년 한해동안에 무려 1만 1 300여명의 녀성보잡이들이 나오게 되였다.
전시 농촌녀성들속에서 널리 벌어진 녀성보잡이운동은 해방후 자기들을 국가와 사회의 참다운 주인으로 키워주시고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우리 나라 녀성들의 높은 충정의 발현이였으며 전쟁승리를 위해 적극 기여하려는 녀성들의 뜨거운 애국심의 표현이였다.
농민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의하여 전쟁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농업생산물에 대한 전선과 후방의 수요를 원만히 충족시킬수 있게 되였다.
전쟁의 물질적수요를 보장하기 위한 전시수송도 생명을 내대는 가렬한 혈전속에서 진행되였다.
미제침략자들은 《공산군들의 철도를 모조리 파괴》함으로써 전선의 인민군대를 《질식시켜죽이며》, 《얼구어죽이며》, 《굶겨죽이겠다.》고 떠벌이면서 우리의 철도, 다리에 대한 야수적폭격을 계단식으로 감행하였다.
1952년 5월에 철도에 대한 적기의 폭격회수는 7 140으로서 1951년 1월에 비하여 무려 71배로 늘어났다.
적들의 폭격이 더 악랄해질수록 수송전사들은 더욱더 용기백배하여 분초를 다투어 밤낮으로 전시수송을 보장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투쟁하였다.
고원기관구(고원기관차대)의 기관사는 1952년 7월 중순 군수화차를 끌고 전선으로 달리던중 적기가 떨군 소이탄에 의하여 마지막화차에 불이 붙게 되여 포탄화차들이 위험에 빠지게 되자 불길에 휩싸인 화차의 련결기의 못과 공기호스를 끊어놓음으로써 군수화차를 위험에서 구출하였으며 1953년 1월말에는 적기의 야만적인 폭격속에서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군수화차를 구출해내는 영웅적위훈을 세웠다.
자동차운전사들도 적의 맹폭격속을 뚫고 달도 없는 야밤에 조명도 없이 험산준령을 넘고 길아닌 길을 달리면서 전선과 후방에 수없이 많은 물동을 끊임없이 실어날랐다. 도로복구대원들과 다리사수대원들, 자동차이동수리대원들이 인민들과 함께 포연탄우속에서 파괴된 도로와 다리, 자동차들을 기동성있게 복구수리하여 전시수송을 원만히 보장할수 있게 하였다.
인민들도 전선수송의 일익을 맡아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들은 달구지와 지게, 등짐으로 무기와 탄약, 군수품을 싸우는 고지의 용사들에게 날라다 안겨주었다.
미제가 매일 수백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철도와의 전쟁》을 벌리고 야수적인 《교살작전》을 감행하였어도 《전선을 교살할수 없었》고 전선수송로를 끊을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맥아더는 후날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파괴된 다리나 도로를 수리하는 손재간과 그 인내성은 굉장한것이여서 북조선으로부터는 새로운 사단이나 땅크려단이 끊임없이(전선으로) 보내져왔다. 보급품, 식량, 탄약 등도 기차, 짐차, 자동차, 달구지 또는 지게군에 의하여 조금도 쉴 사이없이 운반되여왔다.》(미국도서 《맥아더회상록》)
전시생산과 전선수송뿐아니라 전선원호도 전인민적인 사업으로 벌어졌다.
후방의 인민들은 군기기금헌납운동과 전선원호미헌납운동을 벌려 《로동자》호, 《민청》호, 《대학생》호, 《소년》호, 《상공》호 등의 이름을 붙인 비행기, 땅크, 함선들과 수천t의 원호미를 마련하여 전선으로 보내였다.
인민들은 또한 인민군용사들에게 자기들이 정성들여 마련한 수많은 위문품과 편지, 축기들을 보내주었으며 학생소년들도 다채로운 위문공연을 진행하여 싸우는 전투원들을 뜨겁게 고무하였다. 각급 인민대표단과 각 시, 군단위로 조직된 전선위문단도 자주 전선을 방문하여 인민군용사들을 위문격려하였다.
전선지구 인민들은 전선을 돕기 위하여 비발치는 탄우속을 뚫고 포탄과 식량을 전호까지 운반하였고 돌아오는 길에는 부상병들을 후송하였으며 한전호속에서 같이 지내면서 갱도진지굴설작업도 도와주었다.
가렬처절한 전쟁의 나날에 전인민적운동으로 줄기차게 벌어진 전시생산과 수송, 전선원호는 인민군용사들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었으며 그들을 원쑤격멸의 투쟁에로 더욱 힘있게 고무함으로써 전쟁의 종국적승리를 이룩하는데서 실로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항일무장투쟁시기 조선인민혁명군과 인민이 일심동체가 되여 일제침략자들을 때려부신 옹군애민, 군민일치의 전통적미풍은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빛나게 이어져 이렇듯 커다란 생활력을 발휘하였다.
□ 최고사령관과 인민(1)
가렬처절한 전화의 나날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언제나 싸우는 전사들과 인민들속에 계시였고 그들에게 주실수 있는 사랑을 다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방의 인민들을 찾으시면 그들의 생활의 구석구석을 따뜻이 보살피시였고 전선의 작전과 전투를 지휘하실 때에는 군인들의 건강과 안전을 첫자리에 놓으시고 깊이 고려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전쟁의 전기간 인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피해를 적게 입도록 온갖 심혈을 기울이시였다.
전쟁시기의 최고사령관명령들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결정들, 내각결정들, 전쟁의 매 단계의 전략전술적방침들에는 인민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어버이심정이 맥맥히 흐르고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0(1951)년 1월 21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하신 결론 《전시인민생활안정을 위한 몇가지 과업》에서 전시조건이라고 하여 인민들의 생활에 무관심하는 경향을 철저히 극복하고 생활필수품생산과 식량문제를 해결하며 상품류통사업을 개선하고 의료봉사사업을 강화하도록 하시였으며 련이어 1월 25일에는 전시인민생활안정을 위한 내각결정 제197호를 채택하도록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나라의 형편이 어려운 때에 최고사령관이라고 하여 결코 다르게 생활할수 없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는 잡곡밥을 잡수시고 일군들이 그이의 탄생일을 맞으며 소박한 축하연을 마련하는것마저 엄하게 막으시면서도 인민들의 먹는문제를 푸는데 선차적인 관심을 돌리시였다.
그이께서는 전쟁의 어려운 때일수록 인민들이 배를 곯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여러차례에 걸쳐 내각결정과 지시로 로동자, 기술자, 사무원가족들에 대한 식량공급량을 늘이도록 해주시고 1952년 10월 1일부터는 국가적으로 그들에게 정상적인 식량공급외에 눅은 값으로 보충미를 더 공급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애국렬사유자녀들과 전재고아들을 국가에서 맡아키울데 대한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주체40(1951)년 1월 13일 수령님께서는 전쟁에서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유자녀학원을 설치할데 대한 내각결정을 채택하게 하시고 1월 21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또다시 애국렬사유자녀들을 양육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릴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그리고 부모와 집을 잃은 전재고아들을 위하여 곳곳에 초등학원과 애육원을 내오며 일군들이 전재고아들을 한두명씩 맡아키울데 대한 은정어린 조치를 취하시고 자신께서 몸소 고아들을 데려다가 육친의 사랑으로 키워주시였다.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시고 미제와의 판가리싸움을 승리에로 이끌어나가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고아들을 키우시는 숭고한 모습에 감격한 일군들은 앞을 다투어 고아들을 데려다가 키우기 시작하였으며 전재고아를 맡아키우는 사회적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게 되였다.
위대한 어버이사랑속에 유자녀들과 전재고아들은 미래의 역군으로 튼튼히 준비되여갔다. 그들의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이시였고 그들의 집은 어머니당의 품이였으며 온 나라 인민이 그들의 친형제였다.
병이 나면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무상으로 치료하는 력사적인 무상치료제가 전쟁이 한창 가렬하게 벌어지고있던 시기에 실시된 사실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인민을 위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뜨거우신가를 깊이 절감하게 된다.
1952년 1월 20일이였다.
모든것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바쳐야 할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히 보건부문 일군들을 몸가까이 부르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지금 우리 인민들은 전방에서나 후방에서나를 막론하고 전쟁승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쳐가며 싸우고있다고 하시면서 인민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아끼겠는가고, 전체 인민들에게 전반적무상치료제를 실시하자고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나라의 형편이 몹시 어려웠던 조건에서 국가부담에 의한 전반적무상치료제를 실시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나라의 모든 물질적자원을 깡그리 총동원해야 하며 모든 생활상불편을 참아야 하고 많은 인적희생도 각오해야 하는것이다.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심중을 헤아리신듯 오늘 우리의 형편은 곤난하지만 인민들의 생명을 적극 보호하며 건강을 증진하기 위하여 반드시 무상치료제를 실시하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인민들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것이 없다고, 무상치료제를 꼭 실시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시고 그 준비사업을 몸소 지도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전반적무상치료제실시를 위한 준비사업이 본격적으로 다그쳐져 보건일군들이 대대적으로 양성되고 병원과 진료소들이 복구건설되였으며 의료기구와 의약품생산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1년도 못되는 사이에 전반적무상치료제실시를 위한 준비사업이 완전히 끝났다. 이에 기초하여 1953년 1월 1일부터 국가부담에 의한 전반적무상치료제가 공화국북반부 전 지역에서 일제히 실시되게 되였다.
진정 인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데서는 그 어떤 객관적사정이나 곤난에도 구애됨이 없이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단호한 결심과 대담한 조치에 의해서 전쟁의 불길속에 휩싸여있는 조선에서 인류력사상 처음으로 전반적무상치료제라는 가장 선진적인 인민적보건시책이 태여났다.
이렇듯 인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한없이 위대한 어버이사랑이였다.
인류력사가 시작된이래 전쟁은 어느 시대, 어떤 전쟁을 막론하고 막대한 희생과 파괴를 가져왔으며 인민생활을 극도로 령락시켜 수많은 피난민과 령세민들을 낳았다. 지난 시기 전쟁을 《란리》라고도 부른 리유가 여기에 있었다. 《란리》통에 인민생활의 안정은 고사하고 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아사자, 병사자, 동사자가 무리로 발생하는것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는 불가피한 일로 여겨왔다.
그러나 공화국에서는 3년이라는 가렬처절한 전쟁기간에도 인민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여있었고 미제의 무차별적인 야만적폭격으로 인한 폭사자를 내놓고는 단 한명의 굶어죽은 사람, 얼어죽은 사람이 없었으며 류랑걸식하는 고아들이 없었다.
싸우는 전선의 군인들에게도 친부모도 줄수 없는 위대한 어버이의 손길이 구석구석 세세히 미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1211고지방위자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 하나만 두고도 인민군전사들에 대한 그이의 사랑이 얼마나 세심한가를 깊이 느낄수 있다.
주체40(1951)년 9월 어느날 수령님께서는 적의 폭격과 포격이 쉬임없이 계속되는 불비속을 헤치시고 1211고지 전사들을 찾아주시였다.
당시 적아간에 가장 치렬한 싸움이 벌어지던 1211고지에는 최고사령부와 직통전화가 놓여있어 수령님께서는 전선형편을 세세히 료해하고계시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전화나 련락군관을 통하여 전선형편을 알아보는것이 어찌 직접 보는것만이야 하겠는가고 하시면서 방어체계의 완성을 현지에서 지도하시기 위하여 최전선에까지 나오신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투원들이 높은 산우의 갱도에 의거하여 밤을 지새우며 적들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한 격전을 벌리고있는 조건을 헤아리시고 그들의 생활을 잘 돌봐줄데 대하여 간곡하게 이르시였다.
《우리의 전투원들은 모두다 귀중한 보배들이며 혁명전우들입니다. 군인들의 생활을 잘 보살펴주는것은 지휘관들의 신성한 의무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이께서는 지휘관들은 군인들이 먹고 입고 휴식하는 문제로부터 그들의 전투행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을 육친의 심정으로 세심히 보살펴주어야 한다고 하시였다.
남새가 잘 공급되지 못한다는것을 아신 수령님께서는 남새를 못 먹으면 군인들이 비타민결핍증에 걸릴수 있다고 심려하시면서 콩을 보내주도록 하겠으니 그것으로 콩나물을 길러 군인들에게 채도 메워먹이고 국도 끓여먹여야겠다고 하시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어느날 깊은 밤에 또다시 1211고지의 군부대장을 전화로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기가 나는것 같은데 더운밥과 따끈한 국을 먹이도록 해주고 잠자리도 춥지 않게 해줘야 한다, 그리고 전투원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미리 보살펴주어야 한다고 하시였다.
고지에서 싸우는 전사들과 지휘관들도 선기가 나는것을 미처 감촉하지 못하고있는 때에 그이께서는 이렇듯 친어버이의 심정으로 전사들의 생활을 념려해주고 따뜻이 보살펴주시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은정이 깃들어있는 콩나물국과 나물, 두부 음식들이 전투원들에게 공급되였다.
사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이러한 음식들이 새삼스럽고 진귀한것은 아니였다.
생활에서 드문히 맛볼수 있는 음식들이였다.
그러나 천수백m나 되는 소소리높은 고지에서 그것도 포연이 자욱한 갱도와 전호속에서 받은 더운 콩나물국과 콩나물무침, 두부장은 그야말로 산해진미였으며 모든 용사들은 그 구수한 맛속에서 고향어머니의 다심한 손길, 끝없는 사랑을 마음속깊이 되새길수 있었다.
바로 이 모든것이 수령님의 은정깊은 손길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1211고지의 방위자들은 목숨도 청춘도 다 바쳐 싸울것을 굳게 맹세하였으며 판가리싸움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진정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의 나날 미제와의 판가리싸움에서 군민이 한데 뭉쳐 무비의 희생성, 대중적영웅주의를 발휘할수 있은것은 이렇듯 위대한 수령님의 뜨거운 어버이사랑과 은정에 그 바탕을 두고있다.
□ 최고사령관과 인민(2)
인민을 믿으시고 인민에게 의거하는것은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삶과 투쟁의 좌우명이다. 가렬한 전화의 나날 그이께서는 언제나 군대와 인민들속에 깊이 들어가시여 그들의 마음에 신념의 기둥을 세워주시고 그들에게서 힘을 얻으시며 부닥치는 난관과 시련을 이겨내시고 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시였다.
3년간에 걸치는 전화의 나날 위대한 수령님과 인민들사이에 오고간 고결한 믿음과 의리의 세계를 펼치자면 끝이 없을것이다. 다만 가장 준엄한 시련의 시기였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있었던 극히 짧은 몇가지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 세계를 알수 있다.
노도와 같은 남진으로부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로 전쟁국면이 급격히 변화된것은 인민들을 의기소침하게 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전쟁의 전망에 대하여 우려하면서 최고사령부를 바라보고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라는 력사적인 방송연설을 통하여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와 관련한 방향을 제시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마지막까지 평양에 남아 후퇴과정을 지도하시였다.
그러던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을 호위하던 친위중대를 정렬시키도록 하시였다.
빨간 령장을 목깃에 단 보위색 새 군복에 기관단총을 메고 줄지어선 친위중대원들을 기쁨어린 안색으로 둘러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친위중대 전체 성원들이 평양시 대통로에 나가 씩씩하게 행진하면서 대렬합창을 불러 인민들의 사기를 높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에는 후퇴하는 인민들이 자그마한 비관도 없이 승리의 신심을 더욱 굳게 가지게 하시려는 깊은 뜻이 담겨져있었다.
뜻밖의 명령을 받은 친위중대 대원들은 처음 모두 의아해하였다. 대동강건너편에서는 벌써 적들의 포소리가 들려오는데 가창행진을 한다는것이 도무지 리해가 되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다음순간 수령님께서 그처럼 준엄한 판국에서도 가창행진을 하라고 하시는것을 보니 이 전쟁은 틀림없이 이긴 전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친위중대는 보무당당하게 대렬을 짓고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노상 조여드는 마음으로 보짐을 이고 지고 후퇴길에 올랐던 사람들의 얼굴이 금시 환하게 밝아졌다.
노래소리를 듣고 수천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달려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환성을 올리고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친위중대원들을 따라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하였다.
침울하던 거리가 활기를 띠였다.
《인민군대가 다 후퇴하고 없는줄 알았더니 저렇게 름름하고 씩씩한 군대가 아직 평양에 있구만. …》
《김일성장군님께서 친솔하시는 친위대원들이라오.》
《그럼 최고사령부도 지금 평양에 있단 말이요?!》
시민들속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끝없이 오고갔다.
(친위중대가 우리곁에 있다, 친위중대가 남아있으니 최고사령관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도 지금 우리 가까이에 계실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인민들은 신심에 넘쳐 길을 다그쳤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시안의 모든 기관들이 후퇴길에 오른 그때에야 비로소 평양을 떠나시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그 준엄한 시련속에서도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을 끝없이 아끼고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에 멀리 락동강연안의 마산지역에 진출하였던 련합부대들과 대구 북쪽지역에 진출하였던 련합부대들, 포항지역에 진출하였던 련합부대들 모두가 앞을 막아나서는 적들과의 끊임없는 전투를 벌리고 소백산줄기와 태백산줄기의 높고 험한 령과 골짜기들, 키를 넘는 강을 넘고 건느며 지정된 지점에 신속히 집결할수 있었다. 그 대오속에는 남반부에 나갔던 정치공작원들과 남조선의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들과 나어린 소년들도 있었다.
인민군대의 전략적후퇴가 얼마나 조직적이고 은밀하였으며 얼마나 신속하였던지 세상사람들은 큰 의문을 가지고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다!》라고 탄복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외국의 한 군사론평가는 그렇게 간고한 시련속에서도 인민군대가 《해체되지 않은 거기에 자본주의국가군대와의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양상의 철퇴는 주민의 완전한 정신적지지와 병사 각자의 완강한 정치의식의 두가지가 있음으로 하여 비로소 가능한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병사들의 《완강한 정치의식》, 인민들의 《완전한 정신적지지》란 곧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찾아가야 전쟁에서 이길수 있다는 높은 정치도덕적의리심을 말하는것이다.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만 믿고 따르는데 자신들의 삶이 있고 전쟁에서도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은 후퇴길에 오른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의 가슴마다에 하나의 숨결로 고동쳤다.
후퇴의 나날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기의 최고사령관에 대한 끝없는 충정과 전쟁승리에 대한 필승의 신념과 락관주의정신을 지닌 인민들과 인민군군인들을 수없이 목격하시면서 그들에게서 큰 힘을 얻으시였다.
주체39(1950)년 10월 어느날 밤이였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안북도의 어느 한 고개길에서 소달구지에 후퇴하는 인민군대의 군수물자를 싣고 강원도에서 온다는 로인을 만나 담화를 하시였다.
어둠때문에 위대한 수령님을 알아뵙지 못한 로인과 수령님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
《그래 로인님은 이 깊은 밤에 어디로 갑니까?》
《북으로 가지요, 지금이야 북쪽밖에 갈데가 있습니까?》
《북쪽밖에 갈데가 없다. …
북에는 어디 가까운 친척이라도 있습니까?》
《가까운 친척이 없지요. 있다고 해도 이 전쟁판에서 친척을 찾아가 뭘하겠소.》
《그렇다면 북에는 왜 갑니까?》
《왜 가다니요?! 군대동무들과 같이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가지요.》
《그래 이 란리통에 김일성장군은 왜 찾아갑니까?》
《왜 찾아가다니요?!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가야 살길이 열리고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지 않겠소.
참, 세상은 좋은 세상이지요. 우리 농군들이 제땅에서 농사를 지어보기는 평생 처음이였쉐다. 바로 이 황소도 해방후 장군님께서 주신 3 200평 땅에서 농사를 지어가지고 사맨것이지요. 그런데 미국놈들이 장군님께서 주신 우리 땅을 빼앗자고 달려들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소, 장군님을 찾아가야지요.》
…
《로인님생각에는 우리 편이 전쟁에서 이길것 같습니까?》
《이기지요, 이기구말구요.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소! 이기지요!
일찌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그 악독한 왜놈종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신분이 바로 우리 장군님이 아니시오. 장군님께서는 이번에도 그 못된 미국놈들을 모조리 쳐없앨것입니다. 이제 두고보시오. 놈들이 혼쭐이 나서 달아나는걸…》
로인의 말은 조용하였으나 그 한마디한마디에는 민주의 새 제도에 대한 애착과 수령님만을 굳게 믿고 따르는 드놀지 않는 신념이 힘있게 맥박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길가에서 만났던 이름없는 농민의 말을 두고두고 새기시며 이런 인민들이 있는 한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히시였다.
11월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느날 림시지휘소로 가시던 길에서 밤하늘이 들썩하게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며 씩씩하게 행군하는 인민군대의 한 구분대를 만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 오는 부대인가고 물으시였다.
지휘관은 서울제3보병사단 9보병련대 1대대라고 하면서 락동강계선을 출발하여 도처에서 적들을 족치면서 적후 2천리를 행군하여 이곳까지 이르렀다는것을 보고드리였다.
수령님께서는 지휘관의 손을 굳게 잡으시고 수고했다고 거듭 치하해주시고서는 한 나어린 전사에게 동무들은 어디로 가는 길인가고 물으시였다.
짙은 어둠때문에 위대한 수령님을 알아볼수 없었던 전사는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받으러 갑니다.》라고 힘차게 대답하였다.
수령님께서는 그래 동무들은 명령만 받으면 미국놈들과 싸워 승리할수 있는가고 다시 물으시였다.
군인들은 한사람같이 《승리할수 있습니다.》라고 골짜기가 찌렁찌렁 울리게 대답하였다. 군인들은 후퇴의 걸음을 걷고있었지만 바로 이 길이 원쑤를 무자비하게 족칠 재진격의 길, 전쟁승리의 길에 잇닿아있음을 믿고있었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준엄한 시기에도 자기의 수령과 공화국을 굳게 믿고 따르는 이러한 군대와 인민의 모습에서 힘과 용기를 얻으시고 적들의 발악적인 공세를 좌절시키고 위력한 총반격의 길을 열어나가시였다.
수령은 군대와 인민을 믿고 군대와 인민은 수령을 끝없이 신뢰하고 받들며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싸웠기에 민주의 새 제도는 굳건히 수호되고 싸움마다 련전련승의 개가를 떨칠수 있었다.
□ 높은 칭호―《영웅적조선인민》
싸우면 싸울수록 강력해지는 조선의 군대와 인민의 불패의 위력앞에 미제는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1953년 7월 27일, 이날 판문점에서는 정전협정조인식이 진행되였다.
미국측 수석대표는 유엔기발과 나란히 꽂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앞에서 저들의 패배를 시인하는 정전협정조인문에 도장을 찍었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 프로렌스에서 이딸리아주둔 파쑈도이췰란드군대와 무쏠리니군대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우쭐대며 조선에서도 다시한번 그러한 《공적》을 세우려고 꿈꾸던 미극동군 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이였던 클라크는 정전협정문에 서명하고나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정부의 지시를 수행함으로써 력사상 승리하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조인한 최초의 미군사령관이라는 영예롭지 못한 이름을 띠게 되였다. 나는 모든것이 실패라는감을 가지고있었다. 나의 선임자들인 더글라스 맥아더와 매튜 릿지웨이장군들도 동감이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적(인민군대를 말함.)이 패배당하지 않은채로 그리고 이전보다 더 강력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있다는 의미에서는 패배를 한셈이다.》
클라크의 가련한 몰골에 대하여 후날 그의 처도 《그 당당한 기백도 위풍도 위신도 간 곳없이 사라지고 그의 얼굴에는 두줄기의 눈물만이 흘러내렸다.》고 썼다.
클라크의 고백과 그의 가련한 몰골, 그것은 그대로 패배한 미합중국의 탄식이였고 거덜이 난 《초대강국》의 비참한 모습이였다.
미제는 정전이 되자 《경축》은 없다고 탄식하였으며 리승만괴뢰는 7월 27일을 《국치일》이라고 하였다.
조선은 승리하였고 조선인민은 싸워이겼다. 세계《최강》을 떠벌이면서 며칠내로 조선을 완전히 먹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미제는 3년동안이나 만신창이 되도록 된매를 맞고 끝내 우리 인민앞에 두손을 들고 항복하고야말았다.
조선인민이 쟁취한 력사적승리는 강대한 제국주의침략자들을 상대로 하여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간고하고 시련에 찬 전쟁에서 이루어진것이였다.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미제국주의자들은 청소한 공화국을 요람기에 없애버리며 조선인민이 쟁취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짓밟아버리고 전조선을 강점하기 위하여 악착스럽게 덤벼들었다.
미제침략자들은 수적, 기술적우세를 떠벌이면서 조선전선의 좁은 지역에 최신장비로 무장한 자기 나라 륙군의 3분의 1과 공군의 5분의 1, 태평양함대의 대부분 그리고 15개 추종국가군대와 남조선괴뢰군 및 일본군국주의침략군을 포함하여 무려 200여만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였으며 태평양전쟁에서 소모한 군수물자의 11배에 달하는 7 300만t이상의 군수물자와 150억US$의 직접적군사비, 1 500억US$의 간접적군사비를 탕진하면서 세계전쟁력사에서 일찌기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가장 야수적인 전쟁수단과 방법을 다 썼다.
실로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에 들이민 군대의 규모와 화력기재의 밀도에 있어서나 전쟁수법의 야만성과 인민들에 대한 살륙만행의 잔인성에 있어서 조선전쟁은 지난날에 있은 그 어느 전쟁과도 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적들은 조선인민을 놀래울수도 굴복시킬수도 없었다.
식민지노예살이의 운명을 가슴에 저리도록 체험한 조선인민은 조국은 곧 김일성장군님의 품이라는 철석같은 신념을 간직하고 조국의 한치한치의 땅을 위해 귀중한 목숨도 서슴없이 바쳐싸웠다. 10대의 청춘으로 적의 화구도 서슴없이 막았고 녀성의 몸으로 수류탄을 안고 적땅크에 뛰여들었으며 적탄에 두팔을 잃었어도 턱으로 중기의 압철을 눌러 원쑤들을 족쳤다. 애어린 소년들도 총을 들고 원쑤들과 싸우다 잡혀 참형을 당하면서도 《김일성장군 만세!》를 웨쳤으며 후방의 녀인들도 적기의 맹폭격속에서도 보탑을 잡고 전시식량증산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조선인민의 대중적영웅주의와 무비의 애국적헌신성앞에 미제가 하늘처럼 믿고있던 군사기술적우세, 최신, 《최강》의 무기들도 맥을 추지 못했다. 지상전선에서 《왕》이며 《신》으로 불리우던 미국의 최신형땅크와 대포들은 인민군대의 령활무쌍한 습격전과 적후파괴전, 땅크사냥군조운동에 의하여 이르는 곳마다에서 박살났고 이른바 《하늘의 요새》라고 하던 《B-29》전략폭격기와 분사식비행기들이 인민군대의 추진식비행기에 의해 격추당하고 비행기사냥군조의 저격무기에 얻어맞아 녹아났으며 《바다의 섬》이라고 하던 전함, 중순양함들도 인민군해군의 어뢰정과 해안포들, 기뢰들에 의하여 격침, 격상되거나 손발을 묶이고말았다.
적들이 조선을 알고 조선인민을 알고 조선인민군을 알게 되였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그들의 표현대로 말하면 《미국은 대문을 발길로 걷어차서 열었으나 방으로 들어갈수도 없었으며 나올수도 없는》 진퇴량난의 처지에 빠졌으며 《벌의 둥지를 헤쳐놓은 격》이 되고말았다.
남의 행복한 살림에 뛰여들어 불을 지른 범죄의 대가는 참으로 값비싼것이였다. 적들은 이 전쟁에서 미제침략군 40만 5 490여명을 포함한 156만 7 120여명을 잃고 1만 2 220여대의 비행기, 3 250여대의 땅크 및 장갑차, 1만 3 350대의 자동차, 560여척의 함선 및 선박, 7 690여문의 포, 92만 5 150여정의 저격무기를 완전히 잃었거나 격파, 격상당하였다. 사상자대렬에는 많은 장성들도 섞여있었다. 워커중장과 그의 스승인 바튼대장이 죽었고 《상승사단》의 사단장 띤이 포로되였으며 미9군단장 무어, 오스트랄리아군 사령관 그린과 남조선괴뢰군 전 《참모총장》 채병덕, 1군단장 김백일도 죽었다.
미국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드》지는 《미군의 손실은 미국인이 다섯번의 대전쟁 즉 독립전쟁, 1812년전쟁, 메히꼬전쟁, 미국-에스빠냐전쟁 및 필리핀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다 합친것보다 2배이상 더 많다.》고 개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나름의 계산이지 실지에 있어서는 제2차 세계대전시기에 태평양전쟁 4년동안에 입은 손실의 거의 2. 3배에 달하였던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파멸이였다.
이렇듯 조선인민은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우리 조국력사와 세계전쟁력사에서 가장 간고하고 준엄하였던 시련을 영예롭게 이겨냈으며 미제를 우두머리로 한 제국주의침략자들에게 돌이킬수 없는 심대한 정치군사도덕적패배를 주고 놈들의 침략야망을 꺾어버렸다.
이것으로 하여 조선전쟁의 결과도 새로운 결론을 낳게 하였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의 령도를 받는 인민은 백전백승하며 그 단결된 힘을 어떤 제국주의의 군사력으로도 꺾을수 없다는것이다.
조선인민은 자기 위업의 정당성과 정의성, 쌓아올린 업적의 커다란 의의로 하여 세계인민들로부터 《영웅적인민》, 《식민지민족해방투쟁의 기수》, 《민족해방정신의 위대성과 불굴성의 상징》이라는 높은 칭호를 받게 되였다.
인류력사에는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정의의 전쟁을 한 인민들이 적지 않게 있었지만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를 받는 조선인민과 같이 조국의 자주권을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고 외래침략자와 영웅적항전을 벌려 그것을 끝까지 지켜냄으로써 이렇듯 높은 칭호, 고귀한 영예를 받은 그러한 위대한 인민은 없었다.
승리의 7월, 조국강산은 《만세!》의 환호성으로 들끓었으며 온 나라는 승리의 환희와 기쁨으로 넘쳐있었다.
전승의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을 내리시여 전체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열렬한 축하를 보내시였다.
주체42(1953)년 7월 2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전체 조선인민의 한결같은 의사와 념원을 담아 조국해방전쟁을 빛나는 승리에로 령도하신 위대한 수령님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삼가 드리였다.
이날 전쟁의 준엄한 시련을 이겨낸 영웅도시 평양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경축하는 군중대회가 성대히 열리였다.
조국의 고지를 사수한 영웅전사들, 전시생산에서 위훈을 떨친 로동자들과 농민들 그리고 적기의 맹폭격속에서 영웅의 도시를 굳건히 지켜낸 평양시민들이 광장을 메웠다.
폭풍같은 환호속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복을 입으시고 주석단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뜨거운 답례를 보내시고 전체 인민에게 보내시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력사에서 외래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영웅적투쟁을 전개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조국해방전쟁에서와 같이 전체 인민의 단결된 력량으로 강대한 적에게 결정적타격을 주고 빛나는 승리를 쟁취하여본적은 일찌기 없었으며 오늘처럼 우리 인민이 국제적위신이 높고 전세계인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와 동정을 받아본 때는 없었습니다.》
광장은 드높은 긍지와 누를길 없는 환희로 하여 끝없이 설레였다.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로동당 만세!》
이어 전승열병식과 장엄한 군중시위가 시작되였다.
전승의 광장은 그 어떤 강적도 쳐이기는 조선인민의 힘,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철통같이 뭉친 인민의 불패의 힘을 자랑높이 시위하였다.
쇠가 용광로에서 강철로 벼려지듯이 전쟁을 통하여 공화국의 주체적력량은 더욱 강화되였다.
조선로동당은 조직사상적으로 더욱 튼튼히 꾸려지고 인민정권의 기능과 역할도 전례없이 높아졌으며 당과 인민정권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비할바없이 높아졌다. 인민군대는 수적, 정치사상적, 군사기술적으로 더욱 장성강화되고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무용지물로 만든 무적의 강군으로 되였다. 전쟁의 불길속에서 당, 정권기관, 사회단체 일군들이 강철같이 단련되고 풍부한 경험을 가지게 되였다.
조선인민은 전쟁의 준엄한 시련을 통하여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위대한 주체사상의 진리를 더욱 심장깊이 간직하게 되였으며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굳게 뭉쳐 그이의 령도따라 나아가는 길에서는 그 어떤 험산준령도, 폭풍우도 헤치고 반드시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을 굳게 가지게 되였다.
전쟁의 불길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내고 위력한 혁명력량으로 더욱 강화됨으로써 조선인민은 전후에 재더미속에서 불사조처럼 일떠서 복구건설을 본때있게 다그치고 사회주의에로의 길로 줄기차게 전진할수 있는 담보를 가지게 되였으며 이 땅우에 제국주의침략자들이 다시는 감히 덤벼들수 없는 사회주의건설이라는 보다 높은 목표를 향해 력사적인 진군의 닻을 올릴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