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회적변혁 - 모든것을 인민에게
□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조국의 해방을 맞이한 우리 인민은 다시는 식민지적 및 봉건적예속밑에서 살것을 원치 않았다. 인민들은 자기들에게 진정한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여주는 새 생활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온갖 착취와 구속에서 벗어나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며 민주주의기발아래 뭉치여 새 조국건설을 떠메고나가려는 인민의 지향과 열정의 폭발이기도 하였다.
인민들의 이러한 지향과 요구를 실현하자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민주주의적개혁을 실시하여야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적개혁은 악독한 일제의 식민지통치의 후과와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지속되여온 온갖 사회적악페와 질곡을 청산하는 심각한 사회적변혁으로서 광범한 인민대중을 민주주의기발아래 뭉치게 하기 위한 사회경제적지반을 마련하는것으로 된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처럼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거창하고 심각한 민주주의적개혁이 각계각층의 광범한 근로대중의 단결된 힘에 의거하여 매우 짧은 시일안에 수행되도록 현명하게 이끄시였다.
제반 민주주의적개혁들은 그것이 철두철미 인민대중의 자주적요구와 리해관계를 실현하는데로 지향되고 복종되였으며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광범한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참가밑에 그들자신의 힘과 투쟁에 의하여 이룩되였다.
토지개혁이 성과적으로 수행되여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봉건적인 토지소유제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여 땅의 주인이 되였다.
지난날 우리 나라는 뒤떨어진 식민지반봉건사회로서 농민이 인구의 거의 80%를 차지하고있었다. 그들은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봉건적인 토지소유제에 얽매여 마소와 같이 착취당하고 짓밟혀왔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나라의 거의 모든 토지를 저들의 소유로 만들고 봉건적토지소유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방향에서 식민지통치를 감행하였다.
조선의 농촌이 걸어온 력사는 토지를 통한 착취자들의 살인적인 략탈과 그를 반대하는 농민들의 피어린 투쟁의 력사였으며 이 땅의 모든 전야가 토지를 빼앗긴 수백만 농민들의 원한과 피눈물로 젖어온 수난의 력사였다.
해방은 되였으나 아직 농촌에는 봉건적토지소유관계와 소작제도가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일제와 결탁하여 농민들을 가혹하게 략탈하던 지주들은 여전히 많은 땅을 가지고 농민들을 착취하고있었다.
제땅에서 농사를 지어보려는것은 농민들의 세기적인 숙망이였고 사활적인 요구였다.
토지문제는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는데서나 군중을 단합시키는데서도 선차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초미의 문제였다. 토지문제를 해결하여야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봉건적착취에서 해방하고 그들의 건국열의를 높일수 있었으며 나라의 전반적인 정치, 경제, 문화생활을 민주화하기 위한 사회정치적지반을 강화할수 있었다.
하기에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농민들의 세기적숙망을 실현시켜주기 위한 토지개혁을 민주주의적개혁의 선차적인 과업으로 내세우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4(1945)년 10월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1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토지개혁의 기본방향을 밝힌 《토지문제에 대한 결정》을 채택발표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토지문제를 농민들의 요구와 의사에 맞게 해결하기 위하여 주체34(1945)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석달동안 몸소 평안남도 대동군을 비롯한 여러 지방에 나가시여 농민들과 무릎을 마주하시고 식구는 몇이며 지주의 땅은 얼마나 부치는가, 소출은 얼마나 나는데 소작료는 얼마나 바치는가, 일하는 사람은 몇인데 땅을 얼마나 가지면 생활할수 있는가, 농촌의 장정로력 한사람이 어느 정도의 땅을 다룰수 있는가, 땅을 주면 어떻게 경작하겠는가 하는것 등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시였다. 이 과정에 우리 나라 농촌실정에 맞는 토지의 몰수대상과 몰수 및 분배방법, 소작제도를 없애기 위한 방도를 확정하시였다.
이 시기 전국각지의 농민들이 위대한 수령님께 봄갈이전으로 지주의 땅을 빼앗아 밭갈이하는 농민들에게 나누어줄것을 요청하는 편지와 결의문, 청원서를 올리였다.
토지개혁을 실시하는것은 성숙된 문제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3월 5일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공포하시였다.
법령에서는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밑에 농민들을 땅의 주인으로 되게 하는것을 토지개혁의 기본원칙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서 토지개혁을 하며 몰수한 땅을 국가소유로 하지 않고 농민들의 개인소유로 한다는것을 규정하였다. 토지몰수대상과 기본투쟁대상도 명확히 규정하였다.
토지개혁법령은 농촌에 뿌리깊이 남아있던 봉건적토지소유관계와 착취관계를 철저히 청산하고 땅에 대한 농민들의 세기적숙망을 풀어주기 위한 과업과 방도를 집대성한 토지개혁법전이였다.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은 공포되자마자 전국의 농민들은 물론 각계각층 인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찬동을 받았으며 대중을 그 수행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토지개혁법령이 발포된 이후 전국의 농촌들에는 토지개혁을 직접 담당집행할 농촌위원회들이 조직되였다.
각지 농촌위원회들은 토지몰수대상과 청산대상을 규정하며 몰수한 땅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사업을 비롯하여 토지개혁법령을 집행하는데서 나서는 모든 사업을 맡아 농민대중의 리익에 맞게 처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토지개혁실시에서 농촌위원회들의 역할을 높이고 토지개혁이 편향없이 옳바로 진행되도록 하기 위하여 농촌에 자주 나가시여 실태들을 료해하시고 세심한 지도를 주시였다.
토지개혁이 한창 벌어지던 3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당시)의 어느 한 마을에 나가시여 농촌위원회사업을 지도하시였다.
그때 리농촌위원회 위원장은 토지개혁과 같은 어렵고 복잡한 사업을 맡아하자니 아는것이 없어서 힘에 부친다고 수령님께 솔직히 말씀드리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에 지식있는 사람이 없어서 빈농, 고농들로 농촌위원회를 조직하게 한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토지개혁은 바로 동무들과 같은 빈고농들이 해야 철저히 할수 있고 또 정확히 할수 있다고 크나큰 신임과 고무를 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토지개혁법령을 집행하는데서 농촌위원회일군들이 알지 못하여 안타까와하던 여러가지 문제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 걸린 문제들도 손수 풀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날 농촌위원회일군들과 함께 이웃마을에 있는 지주집에도 들리시였다. 해방이 되자 지주는 남조선으로 도망치고 그 집에는 종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살고있었다.
그이께서 대문안에 들어서시자 그들은 한달음에 달려나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였다.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세우시고 거북등처럼 갈라진 손을 쓸어주시며 지나온 생활경위에 대하여 물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지주집머슴으로 살아온 그들의 피맺힌 이야기를 들으시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면서 농촌위원회일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이 집과 이 집세간살이등속을 몽땅 이 집에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하신분들에게 드리고 땅도… 지주네 땅가운데서 제일 좋은것으로 이분들에게 드립시다.》
수령님께서는 이날 그 집 대문에 머슴살이를 하던 한 농민의 이름을 문패에 쓰시고 그것을 달아주도록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농민을 데리고 들로 나가시여 제일 기름진 밭을 골라 그에게 분여해주도록 하시고 이 밭을 영원히 부쳐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렇듯 세심한 령도와 뜨거운 사랑이 있어 천대와 멸시만을 받으며 살아오던 농민들이 세기를 두고 내려온 봉건적토지소유관계를 짓부시는 투쟁에 결연히 떨쳐나 마침내는 땅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될수 있었다.
토지개혁은 농민대중만이 아니라 각계각층 인민대중의 지지성원속에 진행되였다.
각 정당, 사회단체들은 농민대중속에 들어가 토지개혁법령을 해설선전하는 한편 토지개혁법령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공동성명서는 토지개혁실시에 궐기한 농민들을 적극 고무하고 그들에게 신심을 주었으며 적들에게는 공포를 주었다.
로동계급은 토지개혁지원대를 농촌에 파견하여 토지개혁을 위한 농민들의 활동을 적극 도와주는 한편 《농민들에게 농기구를 선물하자》라는 구호를 들고 호미와 낫을 비롯한 농기구들을 생산하는 등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농민들을 지원하였다.
민청, 녀맹단체들에서도 우수한 일군들을 농촌에 파견하여 토지개혁을 도왔다.
토지개혁수행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인민대중이 적극 떨쳐나선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관하게 견지하고 빛나게 구현하여오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정책의 거대한 승리였으며 토지개혁과 같이 거창한 사회적변혁을 한달도 못되는 짧은 기간에 성과적으로 수행할수 있게 한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다.
토지개혁에 의하여 100만여정보의 토지가 무상으로 몰수되여 72만여호의 농민들에게 98만 1 000여정보의 토지가 무상으로 분여되였다.
수천년을 내려오던 봉건적착취와 예속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제땅을 가져보려던 세기적숙망을 이룩한 농민들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컸다.
여기에 김일성장군님의 덕분으로 땅의 주인이 된 농민들의 그때의 환희와 기쁨을 그대로 담은 한편의 소박한 시가 있다.
땅!
김일성장군님께서 주신 내 땅
삼천평!
…
아, 이 땅을 다 짊어지고 일어설수 없어
가슴에 붙안고 차마 집으로 갈수 없어
두고서는 차마 한발자욱도 옮길수 없어
어머니는 아예 땅을 안고 누우시네
그러자 그 언제인가
첫애기를 재우던 그밤처럼
마음은 속삭이고 노래부르고싶어…
어머니는 가슴을 헤쳐
대지에 젖을 물리고싶고…
아, 땅이 어머니를 안았는가
어머니가 땅을 품었는가
땅도 어머니도 위대한 품에 안겨
말도 없이 깊어가는 밤
…
땅때문에 아버지와 남편, 세 자식을 잃었다는 시의 주인공인 한 농촌녀성이 사랑하는 자식에게 젖을 물려주고 품어주고싶은 심정그대로 분여받은 제땅에 젖을 주고 안아주고싶은 그 마음은 땅을 분여받은 이 나라 모든 농민들의 마음 그대로였다.
나라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농민들은 자기들에게 땅을 주신 위대한 수령님께 감사편지를 드리였으며 그이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새 민주조선건설에 몸바쳐나설 굳은 결의를 다지였다.
□ 공장의 주인, 사회의 주인으로
토지개혁에 이어 산업분야에서의 민주개혁과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보장을 위한 사회적변혁과정이 다그쳐졌다.
해방전 일제와 민족반역자들은 우리 나라 산업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식민지적강제로동으로 조선인로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일제는 로동자들의 피땀을 짜내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하루 로동시간을 14~16시간까지 연장시켰으며 일본인로동자들과 꼭같은 일을 시키면서도 그들보다 훨씬 적은 기아임금을 주었다. 조선인로동자들은 일제의 《공장법》에 의하여 식민지노예의 쇠사슬에 얽매여있었으며 아무런 로동보호시설도 없는 최악의 조건에서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다.
근 반세기동안이나 일제의 악정밑에서 인간이하의 비참한 로동생활을 강요당하여온 우리의 로동계급은 조국이 해방된 후 강도적인 노예로동제도를 철페하고 민주주의적인 로동생활을 보장해줄것을 간절히 요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동계급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산업분야에서의 민주개혁을 진행해나가시였다.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산업분야에서 기본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인민의 소유로 전환시키는 거창한 사회적변혁을 이룩하시였다.
중요산업을 국유화하여 우리 인민이 자기 손에 틀어쥐여야만 자기의 요구에 맞게 국가를 관리운영할수 있고 인민생활을 안정향상시킬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4(1945)년 10월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창립대회에서 중요산업을 국유화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일반적으로 산업의 국유화는 사회주의혁명단계의 과업으로 인정되여왔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 산업의 명맥을 틀어쥐고있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패주하고 민족반역자들의 대부분이 도망친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민주주의혁명단계에서 중요산업을 국유화할것을 결심하시고 그것을 정책적요구로 제시하시였다. 이것은 반동들의 경제적지반을 철저히 없애고 로동계급을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하며 민족경제를 계획적으로 발전시킬수 있다는 과학적타산에 기초한것이였다.
공화국에서 중요산업의 국유화는 토지개혁과는 달리 진행되였다. 토지개혁이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발포한 기초우에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그것을 땅이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분여하였다면 중요산업의 국유화는 먼저 로동자들로 조직된 공장위원회가 일제와 예속자본가들의 소유를 몰수하여 그것을 넘겨받은 다음에 중요산업국유화법령을 발포하여 몰수된 모든 중요산업시설들의 소유권과 리용권이 로동계급을 비롯한 전체 인민의것으로 넘어간다는것을 법적으로 고착시키는 방법으로 진행된것이다.
로동계급을 정치사상적으로 각성시켜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그들자신의 손으로 하도록 한것이다.
새 사회건설의 첫 시기 로동계급의 구성을 보면 대대로 내려오면서 로동을 하여온 본래의 로동자는 얼마 되지 않고 그 대부분이 일제의 농촌수탈로 말미암아 살길을 찾아 도시에 모여온 지난날의 농민들이였거나 태평양전쟁말기에 일제의 강제징발에 의하여 각지에서 모여온 청장년들이였다. 그러다나니 그들은 정치사상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단련되여 로동계급으로서의 혁명적기질을 소유할 기회가 없었다.
이로부터 적지 않은 로동자들은 조국이 해방된 다음 공장의 주인이 되여 건국사업에 앞장서겠다는 마음보다도 저주로운 강제로동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제가끔 흩어져갔다.
이러한 실태를 헤아려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장은 로동자에게》라는 구호를 제시하시고 로동계급속에 들어가시여 그들에게 공장의 주인, 나라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높여주기 위한 정치사업을 강화하는데 선차적힘을 넣으시였다.
《공장은 로동자에게》라는 구호는 로동계급을 공장의 주인, 나라의 주인으로 내세우시려는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을 체현하고있는것으로 하여 그들로 하여금 중요산업을 국유화하기 위한 투쟁을 자신의 사업으로 전환시키고 주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도록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추동력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당, 건국, 건군위업을 령도해나가시는 바쁘신 속에서도 각지의 공장, 기업소들을 찾으시여 로동자들에게 공장의 주인이라는 높은 자각을 안겨주시고 그들이 중요산업을 국유화하고 공장들을 복구하는데 떨쳐나서도록 고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청진에 있는 한 제철소를 찾으시였을 때 있은 일이다.
모조리 파괴되고 광석먼지만이 날리는 공장안의 용광로곁에서 한 로동자를 만나신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을 하고있는가고 물으시였다. 그러자 그 로동자는 누구이신지 몰라 엉거주춤하면서 경비를 서고있다고 대답을 올리였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숨죽은 용광로를 지켜서있는 로동자를 만난것이 너무도 기쁘고 대견하시여 그에게 좋은 일을 하고있다고 치하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날 제철소에 남아있는 로동자들을 다 한자리에 모이게 하시고 이제는 동무들이 공장의 주인이라고 하시면서 일제가 파괴하고간 용광로를 자체의 힘으로 복구할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그러시면서 용광로를 복구하는데는 경험도 없고 기술자도 없지만 우리 로동계급이 살아있는 한 용광로는 반드시 다시 숨쉴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로동자들을 공장으로 부르신다는 소식은 삽시에 온 나라에 퍼져갔다. 고향으로 돌아가 농쟁기를 잡았던 사람들도, 거리에서 품팔이하던 사람들도 다 앞을 다투어 공장으로 달려왔고 공장의 주인이 되여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기 위한 투쟁에 일떠섰다.
각지의 공장, 기업소들에 공장위원회를 조직하여 로동계급이 공장의 주인이라는 자각과 책임감을 더욱 높여주도록 한것을 계기로 산업국유화가 본격적단계에서 진척되였다.
공장위원회는 로동자들의 리익을 대표하는 동시에 로동계급을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대중단체였으며 로동자들의 정치적열성을 높여 일제가 소유하였던 산업운수기관들과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공장, 기업소들을 빼앗아내고 그것을 관리운영하기 위하여 조직된 민주주의적기업관리조직이였다.
공장위원회의 조직은 우리 나라 로동계급을 력사상 처음으로 새 사회건설의 당당한 주인으로, 공장의 주인으로 되게 한 력사적사변이였다.
실정에 따라 자치위원회, 운영위원회, 관리위원회, 경영위원회 등 여러가지 명칭을 가진 공장위원회는 반동들의 책동을 짓부시면서 군중투쟁의 방법으로 일제와 예속자본가들의 소유를 몰수하여 장악하였다.
공장을 빼앗고 그 관리운영권을 장악하기 위한 로동계급의 투쟁은 철도운수, 체신, 재정금융기관, 상업류통, 문화기관 등 모든 부문에서 벌어졌다.
공장위원회는 자체의 힘으로 공장을 복구하고 관리운영하는 사업도 잘해나갔다.
강선의 로동계급은 자기들의 일터를 찾아주시여 공장의 주인, 나라의 주인으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에 무한히 고무되여 낮에 밤을 이어가며 돌격전을 벌려 단 20일만에 전기로를 복구하고 첫 쇠물을 뽑았으며 황해제철소의 로동계급은 일제가 파괴하고 도망치면서 조선사람의 힘으로는 10년이 걸려도 복구하지 못한다고 떠벌인 1호평로를 열달도 못되는 기간에 복구하여 첫 쇠물을 뽑을수 있게 하였다.
주체35(1946)년 6월 1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첫 쇠물을 뽑는 황해제철소(당시)의 로동계급을 몸소 찾아주시였다.
주홍빛 쇠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장쾌한 그 순간 수령님께서는 용해공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면서 대단히 수고들 했다고, 동무들의 손을 잡는 내가 행복하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앙양된 기세를 늦추지 말고 하루빨리 제철소를 복구하여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믿음과 고무를 주시였다.
로동계급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그들은 공장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일제와 그 앞잡이들에게서 공장과 기업소들을 몰수하여 자기들의 손에 장악하고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기 위한 투쟁에서 높은 헌신성과 애국적열성을 발휘할수 있었다.
이것은 중요산업국유화의 력사적과업이 실제상 실현단계에 들어섰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처럼 중요산업국유화의 요구가 실제상 실현된 조건에서 지체함이 없이 주체35(1946)년 8월 10일에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을 공포하도록 하시였다.
산업국유화법령이 발포됨으로써 일제와 예속자본가, 민족반역자들의 소유였던 모든 생산수단에 대한 합법적주인은 다름아닌 조선인민자신이라는것이 온 세상에 엄숙히 선포되였다.
그리하여 제국주의적착취와 예속의 경제적지반이 청산되여 온갖 사회적불행을 낳게 하던 근원이 산업분야에서 기본적으로 없어지고 중요생산수단들이 나라의 륭성발전과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위하여 복무하게 되였다.
근로자들의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를 전면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개혁들도 적극 추진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요산업국유화에 앞서 로동자, 사무원들의 로동조건과 물질생활수준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민주주의적로동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주체35(1946)년 6월 24일 《북조선 로동자, 사무원에 대한 로동법령》을 발포하시였다.
로동법령에 의하여 로동자, 사무원들은 처음으로 8시간로동제와 동일한 로동에 대한 동일한 임금제, 유급휴가제와 사회보험제를 비롯하여 로동과 휴식에 관한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를 전면적으로 보장받게 되였다.
로동법령은 가장 민주주의적인 로동법령이였다.
로동법령은 국가기관, 국영기업소들에서 일하는 로동자, 사무원들이나 개인기업에 고용되여 일하는 로동자, 사무원에 관계없이 모든 로동자, 사무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유일적인 법령이였으며 개인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리익과 민주주의적권리도 옹호하고 보장하는 법령이였다.
그 민주주의적성격은 로동자, 사무원들의 리익과 함께 민주주의적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는 원칙에서 개인기업가들의 리해관계도 일정하게 반영하고있는데서도 표현되였다.
로동법령은 개인기업에서 일하는 로동자, 사무원들의 임금은 단체계약 또는 로동계약에 따라 정하며 로동자, 사무원들이 로동규률을 준수할 의무와 함께 로동규률을 세우는데서 개인기업가들의 일정한 통제적권리를 규정함으로써 기업가들이 기업활동을 해나갈수 있는 실제적조건을 보장받을수 있게 하였다.
법령은 로동자들과 기업주들사이에 발생하는 로동쟁의문제는 직업동맹이나 인민재판기관을 통하여 공정하게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로동법령은 개인기업가들이 기업활동을 자유롭게 할수 있는 권리를 따로 규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쉽게 받아들일수 있게 하였다.
민주주의적로동법령의 제정, 실시는 로동자들에게 민주주의적해방을 가져다주었을뿐아니라 그들이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 적극적으로 참가할수 있게 하였으며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의 통일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녀성들을 사회적으로 해방하는 문제를 민주주의혁명의 중요한 과업으로 내세우시고 남녀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도 현명하게 이끄시였다.
남녀평등을 실현하는것은 낡은 사회의 유습을 청산하기 위한 혁명과업이며 녀성들의 지위와 역할을 높여 민주력량을 더욱 튼튼히 꾸리기 위한 중대한 정치적과업이다.
하기에 수령님께서는 사회경제개혁을 실시할 때에도 남녀평등이 실현되도록 각별한 관심을 돌리시였다.
그이께서는 토지개혁을 실시할 때에 녀성들이 남자들과 꼭같은 자격으로 토지를 분여받게 하시였고 로동법령을 실시할 때에도 로동생활에서 녀성들이 남성들과 평등한 권리를 가지게 하시였을뿐아니라 모성으로서의 여러가지 특전까지 보장받게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7월 30일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령역에서 녀성들에게 남자와 꼭같은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해주기 위하여 《북조선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을 발포하시였다.
법령은 녀성들이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모든 령역에서 남자들과 평등권을 가진다는것을 선포하였으며 남자들과 동등하게 선거할 권리와 선거받을 권리를 가지며 로동과 교육의 권리, 자유결혼 및 리혼의 권리, 재산상속권을 담보하였다. 그리고 일부다처제, 인신매매와 같은 녀성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봉건적유습과 공창, 사창 및 기생제도를 금지한다는것을 규정하였다.
남녀평등권법령은 수천년을 내려오던 남존녀비의 악습을 없애고 남자와 꼭같은 지위와 권리를 찾으려던 녀성들의 간절한 념원을 실현하며 관습과 도덕의 모든 분야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한 녀성해방선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남녀평등권법령을 공포하시여 사회적으로 녀성들을 남자들과 동등한 지위에 올려세워주심으로써 녀성들은 사회발전에서 한쪽수레바퀴의 역할을 담당수행할수 있게 되였다. 실로 민주개혁은 녀성들로 하여금 2중, 3중의 복을 안겨주었다.
남녀평등권법령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철저히 구현되여 녀성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 무참히 짓밟혀온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되찾고 새 민주조선건설의 보람찬 길을 떳떳이 걸어나가게 하였다.
이렇듯 민주개혁은 근로자들에게 진정으로 공장의 주인,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안겨주었으며 그들이 새 민주조선건설에 한사람같이 떨쳐나 자기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도록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 문명의 세계에로
40여년간의 일제식민지통치기간 우리 나라는 일제의 악랄한 민족문화말살정책과 식민지노예교육의 강행으로 하여 현대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암흑천지로, 교육의 불모지로 되였다.
일제의 식민지우매화정책으로 말미암아 해방전 북조선에는 단 하나의 대학도 없었고 기껏해야 도에 중학교 한두개가 있었을뿐이였는데 그것마저도 지주, 자본가의 자식들이나 공부하는 학교로 되였다.
일제는 조선인민에게서 말과 글까지 빼앗고 배움의 권리를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는 학교들에서 진행한 교육마저도 철두철미 식민지교육으로 일관시켰다.
그리하여 조국이 해방된 직후 우리 나라의 교육실태는 실로 한심한 형편에 있었다. 이때 북반부에만도 성인문맹자가 230여만명에 달하였으며 농촌인구의 거의 전부가 글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는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서도 당시 우리 나라 교육의 후진성을 력력히 찾아볼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해방후 민족교육의 건설은 령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했다.
력사는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참다운 교육사업을 떠나서는 그 어떤 사회적진보도, 민족의 번영과 발전도 기대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나라의 렬악한 교육실태와 새 조국건설의 절박한 요구를 깊이 통찰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인민의 지향과 요구에 맞는 새로운 교육제도의 확립에로 전체 인민을 조직동원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의 잔재를 철저히 숙청하는 한편 주체34(1945)년 11월 북조선 교육국에서 인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교육제도수립의 일환으로 《북조선학교교육림시조치요강》을 제정하도록 하시였다.
여기에서는 지난날 지주, 자본가를 비롯하여 유산계급출신의 자녀들만이 공부하게 되여있던 식민지교육제도를 철페하고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출신의 자녀들은 재산과 직업, 성별, 신앙 등에 관계없이 누구나 공부할수 있다는것을 규정함으로써 인민적인 교육제도수립의 전제를 마련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 기회에 진보적민주주의원칙에서 새로운 교육체계와 교양체계를 세우도록 조치를 취하시였다.
그리하여 공화국에는 식민지교육체계가 없어지고 짧은 기간에 소학교와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로 구성된 보통교육체계와 대학들과 연구원들로 구성되는 고등교육체계, 초급기술학교와 전문학교들로 이루어진 기술교육체계가 세워졌으며 교원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학교들도 설립되였다.
학업을 전문으로 하는 정규교육체계와 함께 대학들마다에 야간 및 통신학부를 내오고 공장기술학교와 야간기술전문학교, 농촌과 가두에는 성인학교와 성인중학교를 세워 근로자들이 일하면서 배울수 있는 교육체계도 세워지게 되였다.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제도가 철페되고 새로운 인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교육제도가 수립되던 시기, 지난날 그렇게도 바라던 근로인민의 배움에 대한 소원이 어떻게 풀리고 배움의 터전이 어떻게 마련되였는가는 연필에 깃든 사연을 통해서만도 잘알수 있다.
주체35(1946)년 2월 20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1차회의때 있은 일이다.
해방된 조국땅에 처음 탄생한 인민의 정권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앞에는 참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민주개혁을 실시하여야 하였으며 파괴된 공장들을 빨리 복구하여 생산을 늘이고 식량문제도 해결하여야 하였다. 한번의 회의에 필요한 그 모든 문제를 다 상정할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무슨 문제부터 상정시켜 토의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자기 사업을 무엇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개회를 선언하시고 회의의정을 발표하시였다.
회의참가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1차회의 의정으로 연필생산문제가 상정되였던것이다.
회의장분위기를 일별하신 수령님께서는 연필문제를 해결하는것은 단순한 실무적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후대들을 훌륭한 인재로 육성하며 우리 인민들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되여있는 소원을 풀어주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문제라고 하시면서 연필생산을 자체의 힘으로 보장할데 대한 방침과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사실 우리 인민은 과거 글 한자 배우지 못하고 등뼈가 휘도록 일하면서도 자식들에게만은 연필을 쥐여주어 글을 배우게 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제땅을 가지고 마음껏 농사를 지어보았으면 하는 농민들의 평생소원과 꼭같은 인민의 간절한 념원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일제통치밑에서 전혀 실현할수 없었던 인민의 이 소원을 풀어주시려는것이였다.
회의의정이 발표될 때만 하여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던 참가자들은 수령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이의 높은 뜻을 뜨겁게 새기였다.
그것은 단순히 연필생산 그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인민정권기관 일군들로 하여금 교육사업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새롭게 가지며 나라의 부강발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사업이 바로 무엇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하는가를 깊이 깨닫게 한 뜻깊은 의정이였다.
인민교육사업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립장과 관점은 바로 이러하였다.
하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국의 첫 시기 있는것보다 없는것이 더 많고 국고가 텅 비여있던 어려운 조건에서도 교육의 물질적토대를 마련하는데 모든것을 아끼지 않으시고 다 돌려주시였으며 이 사업에 전체 인민을 불러일으키시였다.
주체34(1945)년 10월 28일 평안남도 대동군 칠골(당시)인민들의 환영모임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민주조선건설에서 교육사업이 가지는 거대한 의의를 강조하시면서 조국의 장래와 후대들을 위하여 학교를 많이 세우자고 절절하게 호소하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중학교를 하나 세워보겠다는 칠골인민들의 소박한 의견을 적극 지지해주시면서 몸소 새로 지을 학교터전까지 잡아주시였다. 그후 학교건설에 쓰라고 화물자동차와 여러가지 설비들도 보내주시였고 학교건설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지식과 도덕, 건장한 체력을 겸비한 훌륭한 인재를 육성하여 나라를 흥하게 해야 한다는 뜻에서 학교이름을 《삼흥중학교》라고 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직 국가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1946년에만도 국가예산의 17%를 학교건설과 수리비 등 교육비에 돌려주시였으며 삼흥중학교건설의 모범을 전국에 일반화하여 학교건설사업을 전군중적운동으로 벌리도록 이끌어주시였다.
학교건설사업이 새 조국의 장래를 위한 숭고한 애국사업이라는것을 자각한 로동자, 농민, 기업가, 상인 등 각계각층 인민들은 로력과 기술, 자금을 여기에 바치는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1946년에 소학교수는 전해에 비하여 1 100여개가 늘어나 2 400여개로 되였으며 학생총수는 87만 8 000명으로부터 118만여명으로 늘어났다. 중학교는 1945년에 44개, 그 학생수는 1만 9 800명이였다면 1946년에는 중학교수가 217개, 그 학생수는 7만명으로 늘어났다. 1947년에는 또 1946년에 비하여 학교수는 1.4배로, 학생수는 1.3배로 늘어났다. 그밖에 28개의 여러 중등전문학교들에서 9 7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2개의 사범전문학교와 8개의 사범학교가 세워져 교육사업에 복무할 민족간부를 양성하게 되였으며 김일성종합대학을 모체로 하는 여러개의 단과대학들도 태여나게 되였다.
도시와 농촌 그 어디에서나 배움의 종소리가 높이 울리고 어느 집에서나 어린이들의 랑랑한 글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배움의 종소리를 들으며 일손을 다그치고 자식들의 글소리를 들으며 하루의 피곤을 풀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대교육사업과 함께 성인들의 문맹을 시급히 퇴치하기 위한 문화계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그이께서는 중앙으로부터 리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성인교육지도체계를 세워주시고 마을마다 성인학교를 내오도록 하시였으며 방학기간에는 대학생들까지 각지에 파견하시여 문맹퇴치사업을 도와주도록 하시였다.
이리하여 이미 1946년에 1만 6 178개의 성인학교가 서고 거기에서 55만 6 000명의 근로자들이 공부를 하게 되였다.
성인교육사업은 1947년에 와서 더욱 활발히 벌어졌다.
문맹퇴치운동을 성과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모범을 창조하고 온 나라에 일반화해나가시였다.
주체36(1947)년 8월초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분여받은 땅에서 자기 손으로 지은 햇감자와 밀을 알알이 골라가지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온 평강군의 리계산농민을 만나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가 아직 글을 모른다는것을 아시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글을 모르고서는 민주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할수 없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리계산녀성이 장군님의 말씀대로 글을 배우겠다고 말씀올리자 그이께서는 고향에 돌아가면 글을 열심히 배워가지고 금년말까지 자필로 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라고, 그것을 나와 약속하자고 하시며 문맹을 퇴치한 다음 전체 인민들에게 문맹퇴치운동을 더욱 힘있게 전개할것을 호소하라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그때로부터 석달이 지난 후 그 녀성은 문맹을 퇴치하고 제 손으로 쓴 편지를 수령님께 올리였다.
《… 김일성장군님!
오늘이야 겨우 편지를 올리게 되였습니다. 장군님께서 석달후에 편지를 써서 보내라신 말씀을 받들고 저는 자나깨나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
편지에는 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마음먹고 달라붙어 우리 글을 한자한자 배우던 이야기며 농사를 잘 지어 만기작물현물세를 선참으로 바친 이야기, 소도 매고 돼지도 먹이니 참 재미난다는 이야기며 마을에 중학교도 세우고 구락부와 목욕탕도 지었다는 이야기 등 가정과 마을의 형편이 상세하게 씌여져있었다.
석달전에 문맹자였던 산골마을의 그 농촌녀성이 쓴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잘 쓴 편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누구나 이악하게 노력하면 안될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친히 그에게 회답을 보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약속대로 석달동안에 문맹을 퇴치하고 편지를 써서 그 소식을 보내준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일을 더 잘하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하여 새로운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고 당부하시였다.
그 녀성이 수령님께 편지를 올리게 된것을 계기로 평강군 농민들은 군중집회를 열고 문맹을 퇴치하기 위한 운동을 더욱 힘있게 벌릴것을 전국에 호소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펴주신 문맹퇴치운동의 불길은 수만사람들의 심장을 불태우며 도시와 농촌, 벌방과 산골, 온 나라 곳곳으로 세차게 타번져갔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금 북조선 방방곡곡에서는 <아는것이 힘이고 무식은 멸망이다!>,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자!>라는 구호를 들고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가 글을 열심히 배우고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따라 온 나라 근로자들이 문맹퇴치사업에 떨쳐나섬으로써 1949년 3월에 우리 나라는 동방에서 처음으로 문맹자가 없는 나라로 되였다.
그 나날은 우리 인민들이 높은 정신문명의 소유자로, 새 조선건설의 믿음직한 역군으로 자라나는 나날이였다.
□ 첫 민주선거
조국이 해방된 때로부터 1년 남짓한 기간이 지나갔다.
전체 인민의 적극적인 지지와 열성적인 참가밑에 진행된 민주주의적개혁들은 사회의 모든 면모를 근본적으로 변경시켜놓았다.
각계각층 인민들은 민주주의기치밑에 굳게 결속되였으며 인민대중의 정치적열의는 비상히 높아졌다.
우리 인민의 생활에서 짧은 기간에 그처럼 큰 변혁이 이룩될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인민의 정권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각계각층 인민의 리익을 옹호하고 전체 인민을 민주주의의 승리에로 확고하게 인도하였기때문이였다.
1946년 2월에 조직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비록 림시적성격을 띠였지만 자기의 정책과 사업을 통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속에서 높은 신망을 얻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주개혁의 성과를 더욱 공고발전시키기 위하여 림시적성격을 띤 인민위원회를 선거에 의하여 수립된 인민위원회로 발전시킬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인민위원회의 지도밑에 위대한 민주개혁들을 실시하였으며 자주독립국가건설의 튼튼한 토대를 닦았습니다. 그런데 민주개혁의 성과를 더욱 공고발전시키기 위하여서는 림시적성격을 띤 인민위원회를 법적으로 공고한 인민위원회 즉 일정한 선거에 의하여 수립된 인민위원회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해방후 조성된 복잡한 주객관적정세로 말미암아 전인민적인 민주주의적선거를 거치지 못한채 세워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아직은 림시적성격을 띠고있었던 조건에서 민주주의적선거를 통하여 그것을 법적으로 공고화하는것은 중요한 문제로 나섰다.
민주선거를 실시하여야 림시적성격을 띤 인민정권을 인민대중이 자기의 의사와 리익을 대변하는 대표들로 구성하고 주권을 행사하는 보다 튼튼하고 강력한 정권으로 강화발전시킬수 있었다. 만일 정권기관이 공정한 선거에 의하여 세워지지 않으면 인민들이 그것을 진실로 받들지 않게 되며 그렇게 되면 인민의 의사를 철저히 대변하는 공고한 정권으로 될수 없는것이다.
주체35(1946)년 9월초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2차확대위원회에서는 각급 지방인민위원회 위원선거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11월 3일에 북조선의 모든 지역에서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를 실시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선거규정에서는 일반적이며 평등적이며 직접적인 비밀투표의 방법으로 선거를 실시할데 대하여 밝혔다. 이것은 각계층 인민들이 누구나 다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제 손으로 직접 인민의 대표들을 선출할수 있게 하는 가장 진보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선거제도였다.
우리 인민은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한번도 자기의 손으로 정권을 세운적이 없었으며 또 그렇게 할수도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민주주의적선거제도는 제반 민주개혁의 실시로 자주적인 삶의 권리를 찾은 인민대중이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여 주인된 지위와 역할을 제도적으로 담보하며 자주적삶을 보장하여줄 자기의 진정한 국가정권을 세우는 사회적변혁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제5차회의와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2차회의에서 선거와 관련한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밝혀주시면서 모든 민주주의적정당, 사회단체들에서 인민위원회 위원후보자를 공동으로 추천하고 그들을 공동으로 선거하도록 하시였다. 로동당원들뿐아니라 다른 민주주의정당들도 그리고 로동자, 농민뿐아니라 각계각층 출신의 선진분자들이 립후보자로 추천되게 한것이다. 이것은 새로 창설되는 정권이 각계각층의 광범한 대중의 의사와 요구를 실현해나가는 참다운 인민의 정권으로 되게 하고 정권건설에서 여러 당들사이에 정치적대립과 분렬이 생기는것을 미리막을수 있게 한 현명한 조치였다.
선거준비사업은 활기있게 추진되여갔다.
중앙선거지도위원회가 구성되고 뒤이어 도, 시, 군 및 구, 분구선거위원회가 꾸려졌으며 각계각층의 우수한 대표들이 위원으로 선출되였다.
인민위원후보자추천사업이 시작되자 모든 선거구들에서는 저마다 우리 인민에게 잃었던 나라를 찾아주시고 땅을 주시고 공장을 주시고 삶의 보람을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을 자기네 선거구후보자로 추대하였다.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당시)인민들도 1946년 10월 9일 군중대회를 열고 수령님을 인민의 첫 대의원으로 높이 추대하였다.
삼등면인민들은 군중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을 열성적으로 환영지지하면서 장군님의 과거에 있어서 춘풍추우(봄바람과 가을비 즉 지나가는 세월이라는 뜻-인용자) 20년을 오직 조국해방이란 대사명실천에 백절불굴의 철석같은 의지로 성심감투(마음과 성의를 다하여 용감하게 싸운다는 뜻-인용자)하신것과 해방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의 중책을 지니시고 토지개혁, 로동법령, 남녀평등권법령, 현물세제, 산업국유화법령 등을 실시하시여 민주국가로서의 모든 기초를 튼튼히 하야 장군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단시일내에 달성키 곤난한 모든 민주과업을 가장 성공적으로 완수하신 그 공적을 찬양하며 전조선을 통하여 가장 자랑스러운 이 영예가 본 선거구에 부여되였다는것을 본 대회는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하여 전조선인민의 이름으로 김일성장군님을 본 선거구후보자로 추천하기로 결정한다.》
삼등면인민들의 한결같은 결의는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위대한 수령으로 영원히 높이 우러러모시려는 전체 인민의 절절한 념원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였다.
삼등면인민들은 수령님을 자기 선거구의 후보자로 추대한다는 편지를 올리고도 마음을 놓을수 없어 10월 14일에는 로인들과 로동자, 농민, 학생들로 대표를 선출하여 그이께서 계시는 평양으로 올려보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하시고 10월 16일에는 선거자들과 상봉하시기 위하여 강동군 삼등면을 찾으시였다.
이 영광의 날에 이곳 인민들은 수령님께서 차에서 내리시여 회의장으로 들어가실 길우에 자기들이 정성들여 짠 무명필을 펴놓았다. 그것은 잃었던 조국을 찾아주시고 보람찬 새 생활을 안겨주신 수령님께서 걸으실 길우에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비단필을 펴놓아드리고싶어하는 인민의 간절한 소원의 표시였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인민들이 옷을 해입어야 할 천을 내가 밟아서야 되겠는가고 하시며 굳이 사양하시고 천을 거둔 다음에야 회의장으로 들어가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군중대회에서 자신을 평안남도인민위원회 위원후보자로 추천하여준데 대하여 사의를 표시하시고 첫 민주선거가 가지는 의의와 건국사업에서 나서는 당면과업을 밝히시였다. 그리고 모든 선거자들이 력사적인 민주선거에 적극 참가하여 우리 인민주권을 반석같이 다질데 대하여 호소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삼등면인민들과의 뜻깊은 상봉은 온 나라 인민들로 하여금 그이에 대한 다함없는 흠모와 충정의 마음을 더욱 심장깊이 간직하고 선거에 한결같이 떨쳐나서게 하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선거구들에서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대의원으로 높이 추대한 다음 자기들의 진정한 대표들을 인민위원립후보자로 추천하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이 사업을 짧은 시일안에 성과적으로 끝마쳤다.
온 나라는 선거분위기로 끓어번졌다.
민주선거를 위한 활동은 근로자들의 증산투쟁과 결합되여 진행됨으로써 더욱 고조되였다.
근로자들은 력사적인 민주선거를 높은 정치적열의와 빛나는 로력적성과로 맞이하자고 하면서 증산투쟁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로동자들은 일제놈들에 의하여 심하게 파괴된 공장을 빨리 복구정비하기 위한 생산돌격운동을 힘차게 벌려나갔으며 생산에서 일대 앙양을 일으켰다. 해방된 첫해농사에서 풍작을 이룩한 농민들도 자기들에게 땅을 주신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은정에 보답하려는 불타는 충정의 마음을 안고 새해영농준비를 다그치는 한편 애국미헌납운동과 같은 애국운동을 전군중적운동으로 벌려나갔다.
11월 3일, 드디여 첫 민주선거의 날이 왔다.
이른새벽부터 선거선전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거리를 누벼가고 명절옷차림을 한 유권자들이 앞을 다투어 선거장으로 밀려갔다. 온 나라의 모든 선거장들에서 흥겨운 노래소리가 울리고 춤판이 벌어졌다.
온 나라 전체 인민이 크나큰 감격과 기쁨으로 설레이는 가운데 총유권자의 99.6%가 선거에 참가하였으며 그중 96%가 추천된 립후보자들에게 찬성투표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자기 선거구의 립후보자로 모신 삼등지구의 선거자들은 선거에 100%로 참가하여 100% 찬성투표하는 높은 정치적열의를 발휘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우리 인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 열화같은 흠모심의 뚜렷한 표시였다.
도, 시, 군인민위원회 위원선거에 이어 1947년 2월과 3월에 면, 리(동)인민위원회 위원선거가 실시되여 하부말단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지방정권기관들이 법적으로 공고히 다져졌다.
1947년 2월 17일 로동자, 농민, 사무원, 지식인, 상인, 기업가,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인민위원 1 159명의 참가하에 북조선 도, 시, 군인민위원회대회가 소집되였으며 대회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발포한 모든 법령을 승인하고 1947년도 인민경제발전계획을 채택하였으며 북조선의 최고주권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를 창설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2월 21일에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인민회의앞에 자기 정권을 위양한다는것을 천명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회의에서 전체 인민의 한결같은 의사와 념원에 따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높이 추대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조선인민회의 위임에 따라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시였다.
첫 민주선거의 전 과정은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굳게 뭉친 인민의 통일단결의 위력을 남김없이 시위하였으며 조선인민이 자기의 손으로 능히 자주독립국가를 일떠세울수 있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 건국사상총동원운동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의 민주주의적변혁은 인민들의 사상의식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상의식의 변화는 류례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된 사회경제적변혁에 미처 따라서지 못하였다.
이것은 인민의 정신력발현에 부정적영향을 주고 새 조국건설을 저애하는 근원으로 되고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깊이 통찰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건국위업수행의 기본열쇠를 사상개조에서 찾으시고 주체35(1946)년 11월 25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3차확대위원회에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발기하시였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본질에 있어서 인민들의 애국심을 높여 전체 인민으로 하여금 새 조국건설사업에 총동원되도록 하는 운동이였다. 이 운동의 근본특징은 일제가 남겨놓은 모든 타락적이고 퇴페적인 유습과 생활태도를 없애고 새로운 민주조선의 일군다운 정신과 풍모, 도덕과 전투력을 전면적으로 키우며 생기발랄하고 약동하는 민족적기풍을 창조하기 위한 일대 사상개조운동인 동시에 경제, 문화건설과 밀접히 결합시켜 사상개조투쟁을 심화시키고 앙양된 대중의 혁명적열의와 애국적헌신성을 새 조국건설을 위한 투쟁에로 적극 불러일으키기 위한 군중적애국운동이라는데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본질과 특징에 맞게 일군들과 근로자들속에서 사상교양과 사상투쟁을 전군중적운동으로 조직전개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서는 1946년 12월에 건국사상교양의 기본내용과 선전형식, 방법을 구체화한 《건국사상총동원선전요강》을 작성하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각급 당단체들과 북조선직업총동맹, 북조선농민동맹,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각급 단체들은 각계각층의 군중속에서 사상교양사업을 활발히 벌려나갔다.
각급 당단체들에서는 여러 교양망을 통하여 일군들과 당원들을 건국사상으로 무장시키는 전당적인 학습을 끊임없이 심화시켜나갔으며 작가, 예술인들은 문학, 연극, 음악, 미술, 사진, 무용 등 다양한 예술형식을 통한 건국사상교양사업을 적극 벌렸다.
광범한 군중을 건국사상으로 무장시키는데서 《건국사상총동원공작대》는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공작대는 시, 군을 단위로 하여 각 정당, 사회단체와 각계각층 대중속에서 선발된 선전원들로 무어졌으며 여러가지 공작반을 두고 활동하였다.
공작대원들은 여러가지 선전자료를 가지고 광범한 군중속에 들어가 대상의 특성에 맞게 강연회, 해설담화, 좌담회, 연예활동, 직관선전 등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선전사업을 힘있게 전개하였다.
선전원들과 공작대성원들은 특히 농민들속에 들어가 일제사상잔재와 봉건유습의 해독성에 대하여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면서 알곡을 더 많이 내는것으로 건국에 이바지하자고 그들속에 애국정신을 깊이 심어주었다.
사상교양사업과 함께 온갖 낡은 사상잔재와 악습을 뿌리뽑기 위한 사상투쟁이 동반되여 진행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매 단위들에서의 사상투쟁이 일제사상잔재와 악습을 쓸어버리고 새 조선의 주인답게 살며 일하는 기풍을 확립하는데 중심을 두고 진행하도록 하시면서도 해당 단위의 특성에 맞게 매 단위들에서 나타나고있는 결함들을 놓고 철저히 사상투쟁을 벌리도록 이끄시였다.
당원들과 근로자들속에서 벌어진 회의들에서는 국가재산을 탐오랑비하고 개인의 리익만을 위해 일하는 낡은 사상들이 비판검토총화되였다. 특히 국가, 행정, 경제기관 일군들속에서는 관료주의, 형식주의, 개인향락주의, 안일과 해이, 부화방탕, 사기, 횡령 등 일제통치의 악습을 뿌리빼고 불순분자를 적발숙청하는데 중심을 두고 사상투쟁이 진행되였다.
문학예술단체들에서는 문학예술분야에 남아있는 반동적부르죠아사상여독을 청산하기 위한 사상투쟁회의가 벌어졌다.
이리하여 일군들과 근로자들속에서 일제의 낡은 사상잔재와 악습이 청산되고 새 조선의 주인다운 정신이 높아지게 되였으며 사회에 생기발랄한 건국기풍이 비상히 높아지게 되였다.
낡은 사상잔재와 생활태도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은 그자체에 목적이 있는것이 아니라 온 사회에 진보적민주주의를 구현하여 새 조국건설사업을 힘차게 벌려나가기 위한데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벌어지는 나날에 언제나 로동계급과 농민들속에 들어가시여 그들과 무릎을 마주하시고 새 조선건설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깊이 심어주시였으며 불타는 열정과 애국적헌신성을 가지고 새 조국건설에 달라붙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로동자들을 만나시여서는 나라의 어려운 경제형편도 알려주시고 로동계급이 새 조선건설에 앞장서라고 믿음을 주시였으며 농민들속에 들어가시여서는 농사에서 걸린 문제를 풀어주시며 해방된 조국땅에서 첫해농사를 잘 짓기 위한 방도도 의논해주시였다.
주체35(1946)년 10월 어느날 정주기관구 로동자들을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금 건국사업에서 큰 난관으로 되고있는것이 철도운수사업이라고 하시면서 고열탄이 없어 렬차운행에 큰 지장을 받고있는데 그 누가 가져다줄것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애국적열성과 창발성을 발휘하여 자체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동무들을 믿는다고, 우리의 혁명적로동계급이 결심하고 나서면 못할것이 없다고 고무해주시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애국운동을 벌려 철도수송을 하루빨리 추켜세우라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수령님의 현지지도에 무한히 고무된 정주기관구 로동자들은 그때까지만도 기관차연료로는 도저히 쓸수 없다던 안주탄으로 끝내 기관차를 움직이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당시 안주탄광에서는 로력과 갱목, 자재들이 걸려 석탄을 제대로 캐내지 못하고있었다.
그렇게 되자 정주기관구 로동자들은 《우리들에게 부과된 최대의 임무는 기차를 원활히 돌리는데 있는것이며 기차가 정지되는 날은 우리들의 생명도 정지되는것이다.》고 하면서 채탄돌격대를 뭇고 안주탄광으로 달려가 탄부들과 같이 석탄을 더 많이 캐기 위한 돌격전을 벌렸다.
그리하여 하루 30~60t밖에 생산하지 못하던 이 탄광에서는 하루평균 300t, 최고 380t까지 석탄생산량을 늘이는 혁신이 일어나 전반적철도운행을 국내산연료로 정상화할수 있는 전망을 열어놓았다.
정주지구 철도로동자들은 1947년 1월 종업원대회를 열고 이 애국운동에 호응하여나설것을 전국의 기술자, 사무원들에게 호소하였다.
정주기관구 로동자들의 애국적발기는 건국사업에 몸바치려는 그들의 고상한 애국심과 헌신적인 투쟁정신의 구체적인 발현이였다. 그것은 건국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로동자들속에서 벌어진 애국운동의 첫 봉화로 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감사를 보내주시여 그들의 창발적애국운동을 높이 평가하시고 전체 철도일군들과 로동자들이 정주철도종업원들의 모범을 본받아 부강한 자주독립국가건설에 떨쳐나설데 대하여 호소하시였다.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직업동맹을 비롯한 사회단체들에서는 정주기관구 종업원들의 창발적애국운동에 호응하는 전군중적운동을 벌리도록 전체 로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을 힘있게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산업부문에서는 수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조업할수 있게 되였고 이 과정에 일군들과 로동자들은 생산실천투쟁속에서 온갖 낡은 사상잔재와 생활태도를 극복하고 새 민주조선의 건설자로서의 풍모를 갖추어나갈수 있었다.
건국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애국운동은 농민들속에서도 힘있게 벌어졌다.
당시 농민들의 애국운동은 나라의 어려운 식량문제를 풀기 위한 애국미헌납운동으로 전개되였다. 이 운동의 선구자는 재령나무리벌의 김제원농민이였다.
그는 해방전 일제가 경영하던 《동척회사》에서 소작살이를 하면서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만을 받으며 살아왔다.
위대한 수령님의 은덕으로 해방후 3 390평의 토지를 분여받아 평생의 소원을 풀게 된 그는 땅의 주인으로 된 긍지와 기쁨을 안고 첫해농사를 잘 지어 남먼저 현물세를 바치였을뿐아니라 30가마니의 쌀을 애국미로 나라에 바쳤다. 김제원농민의 애국적모범을 따라 재령군 농민들은 1946년 12월 농업현물세완납경축대회를 열고 애국미헌납운동과 량곡수매사업을 힘차게 전개할것을 결정하고 수령님께 자기들의 결의를 담은 편지를 올리였으며 전국의 농민들에게 애국미헌납운동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재령군 농민들이 전국의 농민들에게 보낸 호소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있었다.
《우리들이 이러한 애국적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실로 김제원씨의 열렬한 애국심에서 나오는 창발적애국미헌납의 발동에서 시작된것입니다. 김제원씨의 이 애국열은 우리들에게 애국적충성심을 환기하였고 감격이 극도에 도달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이에서 우리들은 … 김일성위원장의 절실한 말씀을 명심하고 이 대회에서 애국미를 헌납함으로써 건국식량해결에 이바지하려는 결의를 하였습니다. … 북조선농민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들이 일으킨 이 애국운동에 반드시 동감하며 호응할것을 믿어마지 아니하며 이에 호소하는바입니다.》
김제원농민의 애국적발기와 그에 적극 호응한 재령군 농민들의 애국적호소는 나라의 절박한 식량문제를 농민들의 불타는 애국심으로 풀어나가려는 애국열의 발현으로서 이것은 전군중적인 애국미헌납운동의 봉화로 되였다.
이 운동은 나라를 찾아주시고 땅을 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우리 농민들의 일치한 지향과 념원을 그대로 반영하여 일어난 자원적인 애국운동이였으며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구체적인 발현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제원농민과 재령군 농민들에게 감사편지를 보내시였다. 그이께서는 편지에서 그들의 애국적열의를 높이 평가하시고 모두가 애국미헌납운동을 힘있게 벌릴것을 호소하시였다. 그리하여 온 나라에서 대중적애국미헌납운동이 힘차게 전개되였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불길은 교육, 문화, 보건부문과 가정에까지 급속히 번져져 이르는 곳마다에서 낡은 사상잔재와 생활기풍이 근절되고 새 조선의 민족적이며 혁명적인 사업기풍, 생활기풍이 확립되였다.
실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우리 나라에서 대중적인 사상개조운동과 애국운동의 시원을 열어놓고 우리 인민의 사상정신생활과 새 조국건설투쟁에서 전환을 가져온 력사적사변이였다.
이 시기에 우리 인민들의 사상정신생활에서 일어난 전변은 참으로 놀라운것이였다.
쏘미공동위원회가 진행될 때 이전 쏘련의 대표단 단장 쓰띠꼬브대장이 우리 나라의 로동자, 농민대표들과 담화한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대표들에게 당신들이 요구하는것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한결같이 남조선에서도 북조선에서와 같이 로동법령을 실시하며 땅없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줄수 있는 림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이 림시정부의 수위에는 전체 조선인민의 한결같은 지지를 받고계시는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을 높이 모셔야 한다고 절절하게 이야기하였다.
쏘련대표단 성원들은 당신들의 요구가 전적으로 옳다고 하면서 해방이 된지 불과 2년도 못되는 사이에 조선의 로동자, 농민의 의식수준이 매우 높이 발전했다고 탄복하여마지 않았다.
이때 농민대표의 한사람이 미국대표단 단장 브라운의 요청에 의하여 그와 만났다.
브라운은 쏘미공동위원회에 참가한 북조선 각계각층 대표들가운데서 바지저고리에 조끼차림인 최재린농민에게 눈길을 돌렸던것이다. 그는 최재린농민에게 조선에 어떤 림시정부를 세웠으면 좋겠는지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하였다.
최재린이 입을 열었다.
《그거야 더 말할게 있소.
우리 인민들에게 나라를 찾아주시고 땅을 주신 김일성장군님을 높이 모시는 민주주의통일정부를 세워야 하오.》
그러자 미국대표는 미국식《민주주의》가 이렇소, 저렇소 하면서 한바탕 장광설을 늘어놓고나서 평양시장에 나가보니 무엇이 어떻더라고 하면서 농민을 업수이여기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두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있던 사람들은 긴장해졌다.
조선농민과 미국외교관사이의 대화가 어떻게 벌어지겠는가, 한쪽은 학교라고는 문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이제 겨우 성인학교에서 문맹을 퇴치한 순박한 농사군이요, 한쪽은 미국의 한다하는 외교관이였다.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최재린농민에게 쏠리였지만 그는 태연하고도 배심있게 그와 맞섰다.
《미국이 그렇게 좋은 나라요? 그렇다면 한가지 물어봅시다. 그래 당신네 나라에는 농민들에게 땅을 거저 나누어주는 법이 있소?》
브라운은 말문이 막혔다.
농민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로동자들에게 8시간로동제를 실시하는 법은 있소?》
이번에도 그는 대답을 못했다.
최재린농민은 더 다우쳐 그럼 남녀평등권법령이 있는가고 따져물었다.
브라운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왜 대답이 없소. 그럼 한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이자 당신이 미국은 인민들이 잘사는 나라라고 했는데 도대체 로동자, 농민, 녀인들을 내놓고 인민이란 어떤 사람들이요?》
입안에서 무엇이라 씨벌이던 브라운은 오만상을 찌프리더니 이야기를 그만하자고 하였다.
회의장에서는 폭소가 터져올랐다.
바로 이것이 조국이 해방된 이후 인민민주주의제도에서 성장한 우리 인민의 사상정신상태였다.
□ 인민이 드린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
민주개혁의 빛나는 승리로 이 땅에는 민주의 새세상이 펼쳐졌다.
해방의 감격이 넘쳐나던 강산은 다시금 세기적숙원을 이룩한 인민들의 환희와 열정으로 끓어번지였다.
제땅에서 농사를 지어보려던 간절한 소원을 성취한 농민들, 식민지적노예로동과 굴욕에서 해방되여 건국의 마치소리를 세차게 울려가는 로동자들, 온갖 멸시와 천대를 벗어던지고 사회의 한쪽수레바퀴를 믿음직하게 맡아나선 녀성들, 자기의 지혜와 재능을 마음껏 꽃피워나갈 넓은 길에 들어선 문화인들 누구라 없이 나라의 주인이 되여 새 생활을 누려가는 인민들의 행복과 기쁨은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었다. 민주개혁의 혜택으로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된 우리 인민모두의 가슴마다에 차고넘친것은 이 땅우에 천지개벽을 안아오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와 흠모의 정이였다.
《우리 인민의 영명한 령도자 김일성장군 만세!》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부르는 만세의 환호성은 온 나라 방방곡곡에 그칠새없이 높이 울려퍼졌다.
문필가들은 주옥같은 말들을 모으고 골라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과 고매한 덕성을 칭송하는 글을 써서 출판물의 지면을 메웠고 정열에 불타는 청년들은 경모의 정을 시행에 담아 수령님께 드리는 헌시를 읊었으며 로동자, 농민들은 심장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의 편지를 수령님께 삼가 올리였다.
하지만 인민들은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정성껏 편지를 올리는것만으로는 자기들의 가슴속에 가득찬 수령님에 대한 칭송의 마음을 다 표현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제를 쳐부시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주실 그날을 그리며 기나긴 세월 모진 수난을 꿋꿋이 이겨온 조선인민이 이제 해방된 조국땅에서 그이의 은덕으로 더없는 행복을 누리게 되였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인민들은 난생처음 누리는 새 생활의 기쁨과 보람이 크면 클수록 이 행복을 마련하고 가꾸어가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은덕을 마음껏 노래하고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여갈 전인민적송가를 절절히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온 나라 남녀로소, 각계각층은 정권기관들에 이 뜨거운 소망을 담은 수많은 편지를 보내였다.
한 편지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 위대한 장군님을 모신 겨레의 기쁨과 만백성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여주신 장군님의 은덕의 고마움을 목이 터지게 웨치는것만으로는 다 표현할수 없는것이 안타깝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3천만겨레가 한결같이 바라는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노래를 지어주십시오.》
인민들은 수령님에 대한 송가를 기다리고만 있은것이 아니라 그이를 칭송하는 가사와 곡을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시대의 요청에 화답하여 열정에 불타는 청년시인, 청년음악가들이 송가창작에 심혈을 기울이였고 오랜 기간 수령님을 모셔온 항일투사들은 그들의 사업을 적극 밀어주었다.
이러한 사연을 아시게 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느날 항일투사 김책을 부르시여 심중한 어조로 내 마음을 잘 아는 사람도 동무이고 또 이런 때에 나를 도와주어야 할 사람도 동무가 아닌가, 인민들의 의사를 막을수 없다면 그 마음들을 모아서 인민에 대한 노래를 지으면 되지 않는가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인민에 대한 노래를 지으면 절대찬성이지만 그렇지 않고 나에 대한 노래를 지으면 끝까지 찬성할수 없다고 엄하게 이르시였다.
언제나 자신께서 받으셔야 할 영예를 동지들과 인민들에게 돌리시며 오직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바쳐가시는 수령님의 고매한 풍모앞에서 항일혁명투사들도 청년창작가들도 그이에 대한 경모의 정이 북받쳐올라 후더워지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고매한 풍모를 되새길수록 송가를 훌륭히 완성하려는 창작가들과 인민들의 열의는 더욱 높아졌다.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이렇게 후세에 길이 전해질 송가로 창작완성되게 되였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항일무장투쟁을 승리에로 이끄시여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성취하심으로써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찬란한 새시대를 열어놓으신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전체 조선인민의 다함없는 흠모와 최대의 찬양과 칭송의 마음을 뜨겁게 노래하였다.
송가에서는 영웅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간고한 나날들을 경건한 심정으로 더듬으면서 바로 김일성장군님께서 항일무장투쟁을 위대한 승리에로 이끄시였기에 해방된 조국의 행복한 오늘이 있고 조국의 휘황한 미래가 약속되여있음을 격동적으로 노래하고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송가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의 수십만리 장정우에 아로새겨진 그 성스러운 《피어린 자욱》은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력력히 비쳐》준다고 함으로써 김일성장군님께서 개척하신 주체의 위업이 해방후에도 그이의 현명한 령도밑에 승리적으로 실현되여가고있다는것을 형상적으로 강조하였다.
송가에서는 계속하여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영생불멸의 위대한 업적을 끝없는 자랑과 경모의 마음을 담아 앙양된 정서적체험으로 숭엄하게 노래하였다.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하라
밀림의 긴긴밤아 이야기하라
만고의 빨찌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후렴)
만주광야와 밀림의 긴긴밤에 깃든 수천수만의 불멸의 이야기들을 시적형상의 기초에 놓고 위대한 혁명업적을 쌓아올리신 김일성장군님을 《만고의 빨찌산》, 《절세의 애국자》로 끝없이 흠모하고 칭송하면서 그이를 민족의 위대한 령도자로 높이 모신 크나큰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열정적으로 노래하였다.
송가에서는 이와 같이 김일성장군님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와 불멸의 혁명업적에 대한 높은 칭송의 감정을 깊이있게 토로하면서 해방의 은인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두리에 굳게 뭉쳐 나아가는 우리 인민의 앞길에는 반드시 행복한 새봄이 오리라는 굳은 확신과 함께 그이께서 가리키시는 한길을 따라 끝까지 나아갈것이라는것을 격조높이 노래하고있다.
로동자 대중에겐 해방의 은인
민주의 새 조선엔 위대한 태양
이십개정강우에 모두다 뭉쳐
북조선 방방곡곡 새봄이 온다
(후렴)
해와 달도 빛을 잃었던 그 수난의 시기에 민족의 태양으로 높이 솟아 민족재생의 새봄을 안아오신 김일성장군님을 높이 모시고 그이께서 밝혀주신 20개조정강따라 새 민주조선건설에 일떠선 끝없는 행복과 영예, 드높은 긍지와 자부심, 이것은 김일성장군님께 모든것을 의탁하고 그이를 끝없이 신뢰하고 흠모하는 전체 조선인민의 한결같은 심정을 그대로 반영한것이다.
2부분형식으로 된 송가의 음악은 전진적인 기상과 숭엄하고도 경건한 감정으로 특징적인 전렴과 감격적이면서도 숭고한 정서로 일관된 후렴부의 대조와 통일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송가는 가사에 담겨져있는 사상정서적내용이 부르기 쉬운 통속적인 선률로 일반화되여 형상의 선명성과 간결성을 보장하고있다.
참으로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우리 인민의 열화같은 흠모심과 티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이 한데 모여 시가 되고 선률이 되여 창작된 력사에 일찌기 있어보지 못한 태양송가였다.
가장 숭엄하고 경건한 흠모의 마음을 맑고 아름다우며 장중한 선률로 형상한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창작완성되자 온 강산이 기쁨으로 설레였다.
로동자들은 용광로앞에서, 천길지하막장에서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민주조선의 터전을 다져갔으며 이 땅의 주인이 된 농민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풍요한 가을을 마련하였고 새 조선의 꽃봉오리들도 이 노래를 부르며 미래의 역군으로 준비되여갔다.
우리 인민들은 투쟁의 노래, 승리의 노래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민주조선의 장엄한 력사를 창조하였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일찌기 조선혁명의 개척기에 혁명송가 《조선의 별》을 지어 수령님을 민족의 향도성, 단결의 중심으로 노래하며 목숨바쳐 싸우던 청년혁명가들의 그 열화같은 흠모심이 전체 인민의 숭고한 사상감정으로 승화되여 해방된 조국강산에 메아리치는 전인민적인 태양찬가였다.
노래는 김일성장군님이시야말로 인민의 다함없는 신뢰와 흠모를 한몸에 지니신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새 조선의 통일단결의 중심, 령도의 중심이시라는것을 실증해주고있었다.
우리 인민들은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굳게 뭉치여 민주조선의 장엄한 력사를 창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