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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민족의 총동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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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이라는 무한대한 창해가 있어

 

민족의 총력량을 독립전선에 집결시키는 문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하신 첫날부터 시종일관하게 주장하신 전민항쟁전략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제를 반대하는 유격전구상을 내놓으시였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문을 표시하였다. 국가적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도 없이 그것도 남의 나라 령토에서 유격대와 같은 비정규적인 무력으로 이겨낼수 있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였다. 의병도 독립군도 그리고 만주에서 제노라 하던 장학량의 30만대군도 모두 일본군대의 위력앞에 풍전등화의 운명을 면치 못했던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고 일본과 같은 군사강국을 타승할수 있다고 하는가, 우리에게 국권이 있는가, 령토가 있는가, 재부가 있는가?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국권도 령토도 자원도 다 빼앗긴 망국노의 아들들이다. 지금은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하는 적수공권의 청년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주저없이 도전해나섰다. 무엇을 믿고? 인민을 믿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려고 결심하였다. 인민이 국가이고 인민이 후방이며 인민이 정규군이다. 싸움이 시작되면 전민이 병사가 되여 일어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벌리게 될 유격전은 인민전쟁이라고 말할수 있다.》

인민이 국가이고 인민이 후방이며 인민이 정규군이라는 말씀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으신 《이민위천》의 사상이 그대로 구현된 위대한 전민항전의 구상이였다. 단결된 인민은 유격대를 키워줄것이고 도와줄것이며 유격대와 일심동체가 되여 일제와 싸워나갈것이라는것이다. 말하자면 전체 인민이 항일전에 동원될것이라는것이였다. 그런 뜻에서 수령님께서는 이 전쟁을 락관하신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인민들을 하나로 묶어세우고 반일투쟁에로 불러일으키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 방도의 하나가 유격대와 인민들간의 련계를 강화하는것이였다.

군민간의 련계가 밀접해야 유격대가 인민들로부터 풍부한 인적 및 물질적지원을 끊임없이 받음으로써 자기의 대오를 강화하고 전투작전을 보다 폭넓게 벌려나갈수 있었다. 또한 인민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이 여러가지 대중투쟁으로 유격대의 군사활동에 적극 합세해나서게 할수 있었다. 유격대가 인민들과 련계를 강화하지 않고서는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주도세력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다할수 없는것은 물론 유격대오자체를 유지공고화할수도 없었다.

이 모든것을 깊이 통찰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의 첫날부터 유격대와 인민들간의 혈연적뉴대를 강화하는데 커다란 관심을 돌리시고 대원들을 이끌어주시였다.

지난 시기 군대라고 하면 어느 나라 군대를 막론하고 나라를 지키고 보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모든 군수물자를 인민들로부터 보장받는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겨왔다. 우리 나라에서 반일을 한다고 하던 적지 않은 의병이나 독립군들도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가난한 인민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아들이고 지어는 로략질도 서슴지 않았다. 독립군중대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인민의 피땀이 스며있는 군자금으로 자기의 결혼식을 크게 하는것과 같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가 힘들었고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이것은 인민들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관점과 태도에 기인된다. 즉 군인들이 인민들을 한갖 저들의 수요를 충당시켜주는 존재로, 부속물로 보고 멸시한데 있다.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 시기에 벌써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인민대중에게 의거하여야 혁명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주체의 진리를 발견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유격대원들이 항상 인민의 리익을 귀중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복무할데 대한 관점과 태도를 가지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유격대의 지휘관이나 전사나 할것없이 다 인민들속에서 나왔다고 하시면서 로동자, 농민의 우수한 아들딸들로 조직된 조선인민혁명군은 마땅히 인민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것을 자기의 혁명적본분으로, 어길수 없는 행동준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인민대중의 리익을 가장 귀중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충실히 복무할데 대한 관점과 태도를 구현하시여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는것처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서 살수 없다.》는 구호를 제시해주시였으며 대원들에게 살아도 인민의 사랑속에 살고 죽어도 인민의 사랑속에서 죽어야 한다는 생활과 투쟁의 참다운 진리를 심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활동에서 인민의 생명재산과 리익을 옹호보위하는것을 첫째가는 원칙으로 삼고 이것을 유격대의 중요한 규률의 하나로 내세우시였다.

그이께서는 《유격대동작》에서와 《조선인민혁명군 잠행조례》에서 군중규률을 강화할데 대한 문제를 설정하시고 그것을 준칙으로 삼고 생활하도록 대원들을 교양하고 이끌어주시였다. 특히 중일전쟁도발후 《후방의 안전》의 미명하에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토벌》공세를 더욱 악착하게 벌리면서 조선인민혁명군과 인민들과의 련계를 끊어버리려고 미쳐날뛰는 일제의 책동에 대처하여 군민일치를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 커다란 힘을 넣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원들이 언제나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옹호보위하는것을 본분으로 간직하도록 실천적모범으로 이끌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군사작전과 전술을 구상하시거나 하나의 전투를 조직하고 지휘하실 때에도 인민의 생명을 지키는것을 철칙으로 삼으시였다. 특히 집단부락이나 성시를 공격할 때에는 전투가 아무리 복잡하고 불리한 정황속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인민의 생명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마을에 들리실 때마다 인민들의 리익을 한치도 침해하지 않으며 그들의 일손도 도와주도록 유격대원들을 이끌어주시였다.

주체22(1933)년 4월초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부대를 이끄시고 두만강기슭에 있는 량수천자부근의 한 농막집앞에서 잠시 휴식하게 되시였다. 4월이라고 하지만 해질무렵이여서 날씨는 춥고 두만강의 얼음은 두터웠다. 주인을 찾았으나 집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주인의 승낙을 받지 않고 집안에 들어설수 없어 대원들은 농막집마당에서 휴식하게 되였다.

수령님께서는 자신의 외투를 벗으시여 부상당한 대원들을 덮어주시고는 추운 때에는 가만히 앉아있기보다 몸을 놀리는것이 더 좋다고 하시면서 손수 도끼를 드시고 마당의 나무를 패시였다. 대원들은 모두 수령님을 따라나서 집주위의 눈을 치고 마당을 쓸었으며 나무를 해다가 불을 피워놓고 식사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총멘 사람들이 마당에 들어서는것을 보고 왜놈군경들인줄 알고 집안에 숨어서 문짬으로 바깥동정을 살피던 농막집의 늙은 부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대원들의 동정을 눈여겨보면서 그들부부는 분명 왜놈군대가 아님을 알고 바삐 밖으로 나와 자기들의 잘못을 사과하며 집안으로 맞아들이였다. 그리고는 식량과 추녀밑에 매달았던 배추까지 아낌없이 내놓으며 정성을 다하였다.

수령님께서는 로인을 할아버지라고 부르시며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그이께서는 로인에게 농민들이 가난하게 사는것이 팔자탓이 아니라 일제와 지주놈때문이라는것과 인민들이 잘살수 있는 길은 오직 유격대를 도와 일제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여 싸우는데 있다고 차근차근 일깨워주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농막을 떠나시면서 로인앞에 얼마간의 돈을 내놓으시며 할머니가 입고계신 옷이 헐어서 문밖출입을 못하시는것 같은데 적은 돈이지만 보태쓰라고, 닭도 사다가 기르면서 아이들에게 고기도 먹일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시였다.

로인은 자기들을 이렇게까지 극진히 대해주시는분이 김일성장군님이시라는것을 알게 되자 수령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한 큰 어른이 손수 나무를 패시다니, 사령관님께서 그런 일을 다하시니 될말인가고 하면서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로인의 감동어린 말에 가벼이 미소를 지으시며 《사령관도 인민의 아들이랍니다. 인민들이 다하는 일을 내라고 어째 못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시였다.

로인은 수령님의 숭고한 풍모앞에서 너무도 감동되여 그이의 손을 덥석 부여잡으며 날씨가 추운데 하루밤 집에서 더 쉬여가시라고 하면서 세상에 이런 군대는 처음 본다고 진정을 담아 말씀올리였다.

수령님께서 가시는 곳마다에서 꽃피우신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인민들의 가슴속에 그이에 대한 다함없는 신뢰와 흠모의 정과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의 인민적풍모를 깊이 심어주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세심한 지도와 보살피심 그리고 수령님의 실천적모범에 고무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언제 어떤 환경에서도 항상 인민들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았으며 인민들을 성심성의로 도와주고 그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였다.

간고한 행군길에서 며칠씩 낟알구경을 못하다가 요행 빈집이나 산속의 밭을 만나 강냉이나 감자 같은것을 주인의 승낙없이 부득이하게 가져가게 될 경우에도 그곳에 본값보다 몇갑절 되는 돈을 놓아두고 가군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인민혁명군 대오안에 철두철미 인민의 생명재산을 옹호보위하는 사상과 관점이 확고히 지배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반일민족해방투쟁의 매 전략적단계의 앞길을 밝혀줄 로선과 방침을 어디까지나 인민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반영하여 세우시였으며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하여금 하나의 전투를 조직하거나 지하사업, 군중정치사업을 할 때에도 언제나 인민들에게 철저히 의거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니신 인민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헌신적복무정신 그리고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고상한 정신도덕적풍모에 감동된 인민들은 유격대야말로 진정한 인민의 군대이며 유격대를 돕는것이 곧 독립을 이룩하는 길이라는것을 확신하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격대를 원호하였다. 그들은 적정을 탐지하여 알려주기도 하고 적을 치러 가는 인민혁명군부대의 길잡이를 자진하여 맡아나섰으며 모든 성의를 다하여 부상당한 대원들을 치료하고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귀한 자식들을 주저없이 유격대에 입대시켰다. 그들은 또한 여러가지 방법으로 식량, 피복, 일용품, 약품 등 지성어린 물자들을 인민혁명군부대들에 보내주었다.

1937년 봄 한두달사이에만 하여도 장백현의 20여개 촌에서 쌀 10여섬과 광목 100여필을 비롯하여 신발, 버선 그밖에 막대한 원호물자를 조선인민혁명군에 보내왔다. 일제가 1g의 쌀, 한컬레의 신발도 눈을 밝히며 통제하고있던 당시의 조건에서 이것은 생명을 내걸고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위험한 일이였고 간고한 투쟁이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원호사업이라면 저마다 앞을 다투어나섰고 그 무엇이든 아끼지 않았다.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 이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필승불패의 힘의 원천이였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이렇게 서술하시였다.

《적들은 우리를 <창해일속>이라고 하였지만 우리의 뒤에는 무궁무진한 힘을 가진 인민의 바다가 있었다. 우리가 무슨 로선을 내놓기만 하면 인민들은 그것을 쉽게 리해하고 자기것으로 만들었으며 우리 대오에 수천수만명의 아들딸들과 형제자매들을 보내주면서 물심량면으로 우리를 도와주었다.

우리가 령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만주의 혹한속에서 15년동안이나 발톱까지 무장한 강적과 싸워이길수 있었던것은 인민이라는 강력한 성새가 있고 인민대중이라는 무한대의 창해가 있었기때문이였다.》

유격대와 인민의 혈연적뉴대의 강화,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이민위천》사상의 위대성과 거대한 생활력에 대한 뚜렷한 증시로 되였으며 인민들의 가슴속에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능히 일제를 몰아낼수 있다는 확신을 안겨주었다.

유격대는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은 유격대를 사랑하는 혈연적뉴대는 오늘날 군대와 인민의 사상과 투쟁기풍의 일치를 이루고 사회를 떠받드는 공고한 지반으로, 밑뿌리로 발전하는 고귀한 전통으로 되였다.

 

 

 3

□ 조국광복회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의 첫 시기부터 광범한 대중을 반일의 기치밑에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을 적극 추진시켜오시였다.

이 과정에 항일무장대오가 질량적으로 강화되고 통일전선운동을 전민족적범위에서 벌려나갈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였으며 귀중한 경험도 축적되였다.

조선독립의 기치밑에 보다 광범한 반일군중이 결속되고있는 현실을 두고 일제는 다음과 같이 비명을 질렀다.

《공비(조선인민혁명군-인용자)는 … 적화와 동시에 반만항일의 불길을 선동하는데 전력을 다하고있다. 실로 이 전술은 극히 교묘하고 합리적이기때문에 … 부민은 하나둘도 아닌 모두가 그들의 마수에 걸려 한덩어리로 되여가고있다.

… 공비는 부민의 고혈을 짜는 토비를 소탕 또는 정복하여 먼저 부민의 신뢰를 얻은 후에는 곧 <타도일본>의 강연회를 열고 반만항일의 격문을 뿌린다. 부민은 성실한 그들의 이 전술에 물젖어 마치 갈망하고 바라며 찬양하던 구세주와 같이 추켜들어 … 추대하는것이다. 그리하여 인차 반일회는 조직되고 청년의용군 또는 농민자위대가 생긴다. 갈팡질팡하던 부민은 … 혁명군의 뜻대로 움직인다. 따라서 그들이 목표하는 반만항일의 기세와 공산주의사상은 그들의 자태가 나타난 어느곳에서든지 침투하여간다.》(《국경의 화》 1936년 12월 5일 압록강일보사)

민족대단결을 바탕으로 하는 전민항쟁력량을 꾸리기 위한 투쟁은 마침내 주체25(1936)년 5월 5일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체인 조국광복회가 결성됨으로써 근본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립하신 조국광복회는 전민족을 조선독립전선에 굳게 결속시켜 반일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유일적령도를 실현할수 있게 한 지하투쟁조직이였다.

흔히 통일전선이란 반드시 정당단체들의 련합으로 이루어지는것으로 간주되여온것과 달리 조국광복회는 군중이 있고 령도핵심만 있으면 통일전선체를 내올수 있다는 사상에 기초하여 반일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묶어세울수 있게 한 상설적인 통일전선체였다.

조국광복회창립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께서 작성하신 《조국광복회10대강령》《조국광복회창립선언》이 발표되였다.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것이라는 항목으로부터 시작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각계각층 인민의 리익을 가장 정확히 반영한것으로 하여 극소수의 친일분자를 제외하고 모든 반일대중을 항쟁대렬에 굳게 결속시킬수 있게 하는 불멸의 기치였다.

강령은 민족의 전도가 뚜렷이 제시되여있는것으로 하여 발표되자마자 내외에서 커다란 지지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국광복회창립선언》 또한 사람들의 가슴을 흥분시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창립선언에서 우리가 모든 차별을 론하지 않고 늙은이와 젊은이, 남자와 녀자 할것없이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이 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능과 지혜를 바치며 2천만 민중이 일심동체가 되여 반일조국해방전선에 총동원된다면 일제놈들은 괴멸될것이며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은 이룩될것이라고 강조하시였다.

창립선언의 구절구절들은 민족성원모두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누구를 막론하고 나라를 찾는 싸움에 이바지할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주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우리 나라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결부되여 전국적, 전민족적범위에서 보다 조직성있고 체계성있게 급속히 발전하게 되였으며 모든 반일력량을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로 더욱 힘있게 조직동원할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국광복회창립은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꾸준히 키워온 우리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노력의 위력한 산물이였다. 그것은 우리 인민이 민족자체의 힘으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해나갈 의지를 다시금 엄숙하게 선포한 력사적인 계기로 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을 기본으로 하는 전반적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떠밀어가는 전환점으로 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곧 전민항쟁선언이였다. 그것은 강령에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데 대한 전략적요구가 다 반영되여있기때문이다.

전민항쟁선언인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 인민들속에서 얼마나 커다란 견인력을 가지고있었는가 하는것은 조국광복회가 나온 몇달사이에 20여만명이 조직에 망라된데서 뚜렷이 찾아볼수 있다.

각계각층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조국광복회는 날을 따라 급속히 확대되여갔다.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던 백두산근거지일대에서 1937년 2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가 조직되고 이것을 계기로 현, 구회, 지회, 분회 등 각급 단위조직들이 나와 정연한 지도체계가 세워졌으며 국내에는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전신은 갑산공작위원회)이 있었다.

북청지구와 흥남지구, 연사지구 등에도 지구위원회가 조직되고 신갈파와 삼수, 갑산, 혜산, 풍산, 단천, 홍원, 신의주 등지에 지회들이 나왔으며 지회산하에는 분회들이 있었다.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은 동해안의 중요산업지대와 농어촌들, 평양과 평안남북도, 황해도, 강원도의 각지, 남부조선의 서울, 인천, 부산 등지에도 그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반일청년동맹과 부녀회, 아동단과 같은 외곽단체들을 꾸려 각계각층 군중을 폭넓게 결속하였으며 매개 지회는 생산유격대를 따로 조직하여 유사시 인민혁명군과 합세할수 있게 준비시켰다.

조국광복회조직은 조선경내를 넘어 일본땅에까지 확대되였다.

그것은 황해도태생으로서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의 영향을 받은 민덕원의 지도밑에 1938년 4월 1일 일본 오까야마의 제6고등학교에서 공부하던 5명의 조선인학생들로 조국광복회 일본 제6고등학교분회가 조직되여 활동한 사실에서 찾아볼수 있다. 이러한 조직은 도꾜를 비롯한 일본도처에 생겨났다. 당시의 삼엄한 비합법적조건에서 조국광복회조직망이 일본본토에까지 뿌리내렸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로서 조국광복회의 거대한 생활력을 여실히 보여주는것이다.

조국광복회가 확대됨에 따라 반일민족해방투쟁전선에서 각이한 계파들간의 대립과 반목이 해소되고 정견과 신앙을 초월하여 반일을 지향하는 모든 력량의 폭넓은 련합이 이루어졌다.

사령 최윤구의 인솔하에 독립군의 골간부대가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되는가 하면 그에 앞서 천도교 령북도정 박인진을 비롯한 장백과 압록강연안일대의 수많은 천도교교인들이 조국광복회에 망라되였으며 《헤그밀사사건》때 순국한 리준렬사의 아들 리용(공화국 내각 초대도시경영상)도 자기가 조직운영하고있던 반일회를 조국광복회 지부로 개편하였다. 당시 조선지식인들의 대표적조직의 하나였던 《조선어학회》에도 조국광복회 지부가 무어졌다.

이렇듯 조국광복회는 공산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종교인도 지식인도 그리고 반일적성향을 가진 지주나 자본가들까지 포함한 명실공히 범민족적인 조직체로 되였다. 조국광복회에 망라된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조국광복회창립정신에 따라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능과 지혜를 바쳐 일제를 반대하는 거족적위업에 떨쳐나섰다. 그리고 인민들을 의식화하여 각종 형태의 반일투쟁에로 줄기차게 조직동원하였다.

조국광복회가 논 거대한 역할에 대하여 일본의 한 출판물은 《조국광복회는 광범한 조선인민의 마음을 틀어잡고 민족해방투쟁을 촉진시키는데서 획기적역할을 놀았다. 그것은 수많은 공업도시의 로동자, 농민, 중소상공업자들과 청년, 학생, 인테리겐챠 등 대중속에 퍼졌다.》(《태평양전쟁사》 력사학연구회편 2 276페지)라고 썼다.

탁월한 령도와 바다와 같은 넓은 도량과 포옹력으로 만사람을 안아주는 위대한 수령님의 넓은 품이 있었기에 정견과 사상, 계급과 계층의 차이, 신앙의 유무를 초월하여 온 민족이 조국광복회의 기치밑에 뭉칠수 있게 되였다.

백두산을 축으로 하여 형성된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민족대단합운동의 전통으로 되였다.

 

 

4

□ 전민항쟁의 불길은 온 나라에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수 있는 주체적반일력량이 비상히 강화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일제와의 최후결전에서 주동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수행할수 있는 혁명무력으로 강화발전되였으며 국내각지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최후공격작전을 벌릴 때 그에  합세할수 있는 전민항쟁력량이 그쯘하게 준비되였다.

파쑈이딸리아의 패망에 이어 파쑈도이췰란드가 항복하자 일제의 최후멸망도 불을 보듯 뻔해졌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급변하는 정세의 추이를 꿰뚫어 보시고 일제를 격멸하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최후결전준비를 완성하는것을 다그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미부터 심혈을 기울여 무르익혀오신 최후공격작전계획을 완성하시였다. 최후공격작전계획에 일관된 전략적의도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적극적인 공격과 그에 배합한 전민항쟁으로 일제를 격멸하고 조국을 해방하는것이였다. 조선인민자체의 힘,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해방을 이루자는것이였다.

이를 위하여 수령님께서는 국내에 수많은 소부대, 소조,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시여 전민항쟁력량을 조국해방작전에 철저히 준비시키도록 하시였다.

국내에 파견된 소부대들과 소조들, 정치공작원들은 압록강, 두만강연안의 국경지대뿐아니라 서울을 포함한 중부조선일대와 부산, 진해를 비롯한 남부조선일대에까지 침투하여 정치군사활동을 맹렬히 벌리고 조국광복회조직을 발동시켜 광범한 반일군중을 전인민적항전에로 불러일으켰다.

결과 전국의 광범한 인민들의 투쟁열의는 급격히 앙양되였다. 특히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신뢰와 흠모의 정은 날을 따라 더욱 높아갔다.

인민들은 수령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해방의 구성으로 끝없이 경모하였다.

당시 조선의 곳곳에 《조선독립대장 김대장 만수영생》, 《김일성장군님 만세!》, 《며칠 안있으면 김일성장군님께서 나오신다.》, 《근일 김일성대장 조국개선》 등의 글발이 나붙었으며 지어 부산과 시모노세끼를 오가던 일제의 관부련락선 《고안마루》의 3등선실천정에까지 《조선독립대장 김일성》이라는 글이 씌여졌다.

당시 인민들속에 널리 퍼진 《백두산장수》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백두산은 조선명산, 산은 고경하기에 백두라 함.

백두의 중심에 조선독립대장 무적장수 있나니 바로 그 장수 누구인가.

그는 조선명장 김대장이시다.

김대장은 천하 요술쓰시여 동서남북을 날아다니신다.

김대장은 조선독립대장이며 만국의 명장이시다.

김대장은 일본군을 전멸하고 조선반도에 태양빛 비쳐주네.

김장군의 유명한 전법에 일본군벌 쇠물처럼 녹아난다.

일본군벌은 김대장이란 말만 들어도 쥐구멍 찾는다.

그러니 조선겨레에게 필심을 준다. 김장군은 천년만년 승승장구하시와 조선독립 쟁취하신다.》

온 나라가 어둠에 잠겨있던 그때 조국땅에 널리 퍼진 이러한 글들과 전설같은 이야기들은 위대한 수령님께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그이께서 이 땅우에 재생의 새봄을 안아오시리라는것을 굳게 믿고있는 우리 인민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의지의 표시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한 력사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김일성의 이름은 일본제국주의의 헌병과 경찰의 조밀한 그물의 압제하에 있는 조선남부의 어린이들에게까지 알려졌으며 그들의 존경과 흠모의 중심으로 되였다. … 이리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조선통치는 이미 패전전에 최후붕괴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 조국의 해방을 실현할 전민족적투쟁의 정력은 전쟁시기에 이미 충분히 성숙되여있었던것이다.》(《태평양전쟁사》 4 동양경제신보사 1954년판 64페지)

당시 함경남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에게 보낸 비밀보고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들로부터 구세주와 같이 존경을 받는 정도로 되였다.》고 썼다.

적들까지 인정하고있는바와 같이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조선인민의 절대적인 흠모와 신뢰의 정은 막을수 없는 민심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흠모와 신뢰의 정은 그대로 그이의 령도따라 일제식민지통치를 뒤집어엎고 조국의 해방을 이룩하기 위한 거대한 힘으로 전환되고있었다.

주목되는것은 온 나라 도처에 무장대들이 조직된것이다.

함경북도에서 곰산로농무장대, 까치봉무장대, 무산광산백의사, 증산무장대, 일철비밀결사, 라진인민무장대, 함경남도에서는 대진평항일결사대, 삼각대반일결사대, 구국청년회, 문천인민무장대, 평안북도일대에서는 잠봉로농단, 천산애국단, 삼봉산인민무장대, 비래봉무장대 등 각이한 명칭의 무장대들이 조직되였다.

전민항쟁을 위한 무장봉기조직은 평양, 성천, 황주, 금천, 벽성, 통천, 이천 등 중부조선일대에서도 힘있게 벌어졌다.

평양일대에서는 1944년 7월 애국적인 청년들에 의하여 조국해방단이 조직되였다.

조국해방단은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망라한 무장봉기조직으로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해방작전에 합세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킬것을 주되는 목적으로 삼고 평양 등 우리 나라 중서부의 공장, 농촌지대들에 들어가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군중들속에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조직망은 일제의 경찰기관, 관공서, 군수공장들에도 뻗치였다.

성천의 반일행동대, 황주의 천주산반일애국단, 금천의 제적산항일결사대, 벽성의 영천인민무장대, 통천무장대, 이천의 조국광복단 등이 조직되여 최후결전을 위한 싸움준비를 갖추어나갔다.

전민항쟁을 위한 무장봉기조직들은 일제식민지통치의 아성인 서울에서도 광범히 조직되였다.

1942년에 서울에서는 이 일대에서 활동하던 정치공작원의 지도밑에 로동자들과 각계각층 인민들로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모신 《김일성대》가 조직되여 제주도 모슬포와 국내각지 그리고 일본에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김일성대》는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전사가 되여 조국해방성전에 한목숨바쳐 싸울것을 맹세한 항쟁조직으로서 광범한 반일대중을 묶어세워 항쟁태세를 빈틈없이 갖추고있다가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진공을 개시할 때 거기에 합세하여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최후성전에 참가하는것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투쟁하였다.

1944년 봄 경성제국대학출신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경성지구무장봉기준비결사(일명 성대비밀결사라고도 함.)를 조직하고 원산, 마산, 서울 등지에서 무장봉기조직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적극 추진시켰다.

이 시기 남부조선일대의 여러 지역에서도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 소조들과 정치공작원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애국적인 청년들에 의하여 수많은 무장봉기조직들이 결성되였다.

1942년 8월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면 주약리(진주시 주약동) 약골에서 여러명의 핵심적인 성원들로 고려구국회가 조직된데 이어 1943년 10월에는 고려구국회의 핵심성원들과 일제의 강제징병, 징용, 학도병을 기피하여 산속에 숨어다니는 청장년들을 망라하여 지리산에서 광복무장대가 결성되였다. 또한 지리산주변일대의 애국적인민들을 망라한 지리산무장소부대가 조직되였다.

전민항쟁조직을 내오기 위한 활동은 일제침략군에 강제징집된 조선청년들속에서도 벌어졌다. 1944년 진해해병단에 끌려간 조선청년들은 김일성장군부대에 달려가 조선독립을 위해 싸울 계획밑에 병영에서 집단탈출하였으며 평양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30사단에서도 조선청년들이 반일학도병무장대를 조직하고 조선인민혁명군에 집단적으로 합류할 계획까지 세우고 활동하였다.

국내에서 반일투쟁을 하면서 이러저러한 조직에 관계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전민항쟁로선을 받들고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최후결전준비에 합류하였다.

전민항쟁세력은 급속히 장성하여 1942년에 일제에게 로출된 국내의 반일지하조직만 해도 180여개나 되고 조직적력량이 50만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전민항쟁력량은 국내뿐아니라 일본본토에까지 확대되였다.

일제의 패망이 다가옴에 따라 각계각층의 광범한 대중이 참가하는 각종 형태의 반일반전투쟁도 심화되였다.

수령님께서 파견하신 정치공작원들과 조국광복회조직의 지도밑에 로동자들은 도처에서 파업과 태업, 방화, 폭파 등 여러가지 형태의 투쟁을 적극 벌려 일제의 군수생산과 전시수송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농민들은 농산물의 강제공출과 각종 전시부담, 강제동원을 반대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전국각지에서 교원들과 학생들의 비밀결사사건과 동맹휴학사건이 련이어 일어났으며 징병, 징용, 강제동원을 반대하는 청장년들의 투쟁이 힘차게 벌어졌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전민족을 일제와의 최후결전에로 총동원하기 위한 투쟁이 힘있게 벌어짐으로써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전인민적항쟁준비가 빈틈없이 갖추어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와의 최후결전을 위한 우리 인민의 주체적혁명력량이 충분히 마련되자 이전 쏘련의 대일선전포고와 때를 같이하여 주체34(1945)년 8월 9일 조선인민혁명군 전부대에 조국해방을 위한 총공격명령을 내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총공격에로 넘어가 대일전쟁에 참가한 쏘련군대와의 긴밀한 련계밑에 일제침략군을 격멸소탕하면서 성난 파도와 같이 조국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최후결전의 선두에서 무비의 용감성과 희생성, 대중적영웅주의를 남김없이 발휘함으로써 조선혁명의 주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간백산밀영을 최후공격작전의 출발진지로 차지하고있던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소부대, 소조들, 전민항쟁조직들과 함께 각 도들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였다. 두만강연안에 집결한 부대들은 일시에 적의 국경요새들을 돌파하고 경원, 경흥일대를 해방하였으며 웅기(당시)방향으로 계속 전과를 확대하면서 국내의 넓은 지역을 해방하였다. 그리고 해안상륙부대의 선견대로 활동하던 일부 부대들은 지상부대와의 긴밀한 협동작전으로 웅기에 상륙하여 청진일대로 진격하였다.

다른 부대들은 금창, 동녕, 목릉, 목단강을 해방하고 적들을 격멸하기 위한 추격전을 벌리면서 관동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두만강대안으로 진출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 방면으로 진격하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의 작전전반을 지휘하시는 한편 평양과 신의주, 함흥을 비롯한 주요지대들에 락하할 부대들을 비행장에 대기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전에 합세하여 인민들을 전민항쟁에로 불러일으키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에 호응하여 이미 국내에 파견되여 활동하던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 소조들과 정치공작원들은 인민무장대들과 무장봉기조직들, 광범한 인민들을 전민항쟁에로 조직동원하여 전국각지에서 일제침략군과 헌병, 경찰기관들을 습격소탕하면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투쟁을 과감히 벌리였으며 진격해오는 인민혁명군부대들을 적극 지원하였다.

함경북도 라진인민무장대는 쏘련군대가 상륙하기 전에 이미 라진을 해방하였으며 경흥, 웅기지구들에 조직된 인민무장대는 최후공격개시초기부터 아군의 공격에 합세하여 용감히 싸웠다. 까치봉무장대는 최후결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전투행동을 개시하여 퇴각해오는 패잔병들을 소탕하고 자체의 힘으로 회령을 해방하였다. 청진, 길주, 성진지구의 무장부대들은 적패잔병들을 소탕하고 도시와 공장들을 장악하였으며 일제의 경찰기관들을 기습소탕하였다.

함경남도일대의 항쟁조직들은 부대가 진격해오기 전에 수많은 경찰서와 적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였다.

강원도의 철원, 법동지구와 평안북도의 염주, 삭주지구 항쟁조직들도 용감히 싸웠다. 신의주지구의 항쟁조직들은 총공격명령이 내린 날부터 경찰관파출소와 국경경비초소들을 들부시고 도경찰부와 도청을 점거하였으며 비행장에 박혀있는 패잔병들을 무장해제하였다.

평안남도와 평양지구에서는 조국해방단을 중심으로 무어진 큰 항쟁대오가 병기창을 습격하고 도청과 부청을 점거하였으며 적패잔무력을 제압하였다.

아군부대들의 맹렬한 공격과 적극적인 전민항쟁에 의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일제는 최후공격작전이 시작된지 1주일만인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항복을 선언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가 무조건항복을 선언한 후에도 전후 《조선의 공산화》를 막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방해하기 위한 음흉한 기도밑에 저항을 계속하는 조건에서 일제침략군을 완전히 격멸소탕하며 일제식민지통치체계를 철저히 짓부시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받들고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과 전민항쟁세력은 각지에서 저항하는 일제침략군을 최종적으로 격멸소탕하고 적들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일제식민지통치기구를 짓부시고 당조직과 인민적인 지방자치기관들, 보안기관들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새 질서를 확립하고 원쑤들의 파괴암해책동으로부터 나라의 산업, 문화시설들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였다. 함경남북도를 내놓고도 국내의 항쟁조직들과 무장대들은 8월 16일부터 23일까지의 1주일동안에만도 근 1 000개소의 적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힘차게 전개된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과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무장항쟁에 의하여 일제의 식민지통치체계는 종국적으로 무너지고 우리 인민이 그처럼 바라마지 않던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은 빛나게 성취되였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시였다.

《이렇게 우리 나라의 해방은 15성상이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강력한 군사적타격을 안겨 그것을 밑뿌리채 뒤흔들어놓은 조선인민혁명군과 각계각층을 망라한 전민항쟁력량의 총동원으로 이룩되였습니다. 우리 군대와 인민의 장기간에 걸치는 항전이 선행되였기에 쏘련의 대일작전은 그처럼 짧은 기간에 결속될수 있었던것입니다.

조선의 해방은 쏘련군이 일본관동군을 격멸하는 유리한 환경에서 우리 인민과 인민혁명군자체의 력량에 의해 마련된 위대한 결실입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 우리가 조직한 국내의 항쟁조직들과 무장대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계획에 따라 국내도처에 웅거하고있는 일제의 침략무력과 식민지통치기구들을 제압소탕하고 나라를 해방하였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온 나라는 감격과 환희로 하여 바다처럼 설레였다. 근 반세기동안이나 식민지노예의 쇠사슬에 얽매여 천대와 멸시, 착취와 압박에서 신음하던 우리 인민이 일일천추로 갈망한것은 조국의 해방이였다. 전체 인민은 이 해방의 기쁨을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와 흠모의 정을 안고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목청껏 부르고 또 불렀다.

해방된 조국강산에 메아리치는 만세의 환호성, 하늘을 찌를듯 한 인민들의 혁명적기세, 거세찬 대하처럼 굽이쳐흐르는 인민들의 혁명적진출, 이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수 없는 새 조국건설의 담당자, 주체적력량의 결집이고 거대한 혁명적잠재력의 발현이였다.

전체 인민은 위대한 수령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영명한 지도자로 높이 우러러받들었으며 그이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 새 조선을 건설할 결의에 충만되여있었다.

이것이 20성상에 걸치는 항일혁명투쟁의 장구한 나날에 언제나 식민지노예의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는 우리 인민의 운명을 생각하시며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열렬한 조국애와 민족애, 인간애의 힘으로 가꾸어오신 조선의 새 모습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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