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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전체 인민은 당중앙위원회두리에 굳게 뭉쳐 하늘을 찌를듯 한 기세로 나아가고있습니다. 우리 인민들의 정치도덕적통일은 어느때보다도 강화되였으며 그 정신적풍모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일하며 배우며 즐겁게 사는 근로자들의 화목하고도 단란한 가정으로 되고있습니다.》

김 일 성

 

 

2

1) 모두가 사회주의근로자

 

 

3

□ 사회주의에로의 길을 열어놓은 4월테제

 

해방후에 진행된 제반 민주개혁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는데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되였다. 인민들은 력사상 처음으로 국가주권을 자기의 손에 틀어쥐고 공장의 주인, 땅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참된 삶을 누리게 되였다.

그런데 민주개혁이후에도 나라의 경제구조에는 개인농민경리와 도시수공업경리로 이루어진 소상품경제형태, 농촌의 부농경리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경제형태가 남아있었다. 소상품경제형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와 생산수단의 소유자자신의 로동에 기초하고있는 경리로서 거기에는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가 없다. 그러나 소상품경제형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에 기초하고있는것만큼 그 내부에서는 자연발생적으로 계급분화가 일어나며 그것은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를 낳는 온상으로 된다.

소상품경제형태는 그 령세성과 분산성으로 하여 대부분이 확대재생산을 보장할수 없다. 더우기 농촌에 개인경리가 지배하고있는 조건에서 인민경제의 2대부문의 하나인 농업을 현대적기술에 기초한 공업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세울수 없으며 인민경제의 전반을 계획적으로 발전시킬수 없다.

그러므로 인민대중의 사회정치적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고 그들에게 유족하고 문명한 물질문화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하여서는 착취와 억압의 사회적근원을 청산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기 위한 방향에서 낡은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여야 했다.

낡은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개조는 인민대중의 통일과 단결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구로 제기되고있었다.

해방후 세워진 인민민주주의제도는 인민대중의 통일단결을 강화하는데서 커다란 생활력을 발휘하였다. 제반 민주개혁의 결과 지주, 예속자본가, 민족반역자들이 청산되고 인민대중이 나라의 주인으로 됨으로써 광범한 인민대중이 사회의 민주주의적발전을 지향하고 서로 협력하고 단결하게 되였다. 그 힘은 새 사회건설과 민주의 새 생활을 지키기 위한 조국해방전쟁에서 뚜렷이 과시되였다.

그러나 민주제도의 수립을 통하여 이루어진 통일단결은 사회계급적처지가 서로 다른 계급들사이의 통일단결이였고 사회의 민주주의적발전을 이룩하려는 요구에 기초한 통일단결이였다. 사회계급적처지가 다르면 지향과 요구에서 서로 차이가 생기게 되며 따라서 이러한 통일단결은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민주개혁이후에도 남아있는 소상품경제형태와 자본주의적경제형태의 담당자자체는 반동세력이 아니지만 그 경제형태들은 반동세력이 발붙일수 있는 지반으로 되며 자본주의사상을 비롯한 온갖 낡은 사상을 낳는 온상으로 된다.

인민대중의 정치사상적통일은 사람들의 목적과 리해관계는 물론 사회경제적처지를 동일한것으로 만들 때 더한층 공고히 다져지게 된다. 처지의 공통성과 사상의 공통성, 지향과 목적의 공통성에 기초한 통일단결을 실현하자면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사회주의적근로자로 만들어야 한다.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사회주의근로자로 만드는데서 선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낡은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여 처지에서의 차이를 없애는것이였다.

전쟁으로 하여 모든것을 잃고 다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인민들은 전쟁이 승리하자 스스로가 생활의 절실한 요구로부터 집단경리를 요구하고있었다. 인민들이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개조를 삶의 필수적인 요구로 제기한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주의제도확립에 대한 요구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혁명발전의 요구와 인민대중의 지향에 대한 과학적분석에 기초하여 주체44(1955)년 4월테제를 발표하시여 공화국에서 사회주의구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개조, 사회주의제도확립과정을 본격적으로 추진시켜나갈수 있는 휘황한 길을 열어놓으시였다.

해방후 새 조국건설시기와 조국해방전쟁시기, 전후초기에 인민대중의 준비정도를 고려하여 사회주의구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개조를 부분적으로 진행하면서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준비사업을 철저히 갖추도록 이끌어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무렵 몸소 농촌에 나가시여 농민들과 담화하시면서 시험적으로 진행하는 농업협동화에 대한 그들의 인식정도를 가늠해보시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당시에 시험적으로 조직하는 농업협동조합이 사회주의적인것인지, 반사회주의적인것인지 가려보지 못하고있었다.

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농업협동조합의 세가지 형태에 대하여 알기 쉽게 해설해주시면서 어떤것이 사회주의인가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수령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기들의 협동조합이 바로 사회주의적이라는것을 깨달은 농민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3(1954)년 12월 어느 한 회의에서 《어떤 협동조합에 나가서 농민들에게 당신네 협동조합이 바로 사회주의라고 말해주었더니 그들은 이런것이 사회주의라면 사회주의보다 더 좋은것이 어디에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에서 사회주의구호를 제기하고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개조를 본격화할수 있는 주객관적조건이 성숙되였음을 깊이 헤아리시고 드디여 주체44(1955)년 4월 테제 《모든 힘을 조국의 통일독립과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건설을 위하여》를 발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테제에서 먼저 조선혁명의 성격을 밝히신데 이어 공화국북반부의 경제형태들과 계급관계들을 심오히 분석하시고 사회주의기초건설에 관한 사상을 밝히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사회주의에로 나아가는 과도기의 현계단에 있어서 우리 당앞에 나선 기본임무는 로동자, 농민의 동맹을 더한층 강화하면서 전후 인민경제복구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쟁취한 성과들에 의거하여 사회주의의 기초를 건설하는데 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반부에서 사회주의건설의 주되는 임무는 사회주의기초건설을 진행하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도시와 농촌에서 소상품경제형태와 자본주의적경제형태를 개조하여 사회주의경리형태의 유일적지배를 확립할데 대하여, 사회주의의 물질기술적토대를 축성하기 위하여 생산력을 더욱 발전시킬데 대하여 밝히시였다. 그러시면서 사회주의공업화의 기초를 쌓는것을 공업화의 제1단계로 규정하시고 그 수행을 5개년계획의 중심과업으로 내세우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개조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주의기초건설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인민대중을 사회주의사상으로 교양하고 새로운 문화기술일군들을 많이 양성하며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을 철저히 관철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4월테제는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제도확립과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로선과 정책의 기초를 이루는 강령적문헌으로 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처지와 리해관계에서의 공통성을 가지는 사회주의근로자로 되게 함으로써 인민대중의 통일단결을 새로운 높이에 올려세울수 있는 사상리론적기치로 되였다.

조선인민은 4월테제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승리의 신심과 락관에 넘쳐 사회주의에로의 길을 힘차게 다그쳐나갔다.

 

 

4

□ 농민들을 사회주의근로자로

 

농민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있는 조건에서 사회주의적생산관계의 유일적지배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농촌경리의 협동화를 선차적으로 실현하여야 하였다.

농촌경리를 협동화하여야 소소유자인 농민대중을 사회주의근로자로 만들고 농업생산력을 낡은 생산관계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하여 계획적으로 빨리 발전시킬수 있었다.

농촌경리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데서 나서는 근본문제는 농촌경리의 기술적개조와 경리형태의 개조의 호상관계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것이였다.

이미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한 나라들의 경험에 의하면 공업화가 실현된 조건에서만 농업협동화를 할수 있다는것이 하나의 공리로 되여있었다.

이전 쏘련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을 할 때 사회주의공업화를 실현하여 농촌에 뜨락또르를 비롯한 기계수단들을 보내줄수 있는 토대를 쌓은 다음 1929년경부터 농업집단화를 실시하는 길에 들어섰다.

이러한 경험을 따르면 지난날 식민지, 반식민지로 있던 나라들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한 다음 공업화가 실현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농업협동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사이에 개인경리는 더 자라나 농촌에서 계급분화가 심화될것이며 착취와 빈궁의 근원은 더욱 깊어질것이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사업을 생산력을 낡은 생산관계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경제적문제로 보시기에 앞서 인민들을 온갖 착취관계에서 종국적으로 해방하고 새로운 사회주의적사회관계를 확립하는 심각한 사회개조사업으로 보시였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개조는 공업발전수준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철두철미 인민대중의 자주적요구와 의사에 따라 수행되여야 한다는 립장으로부터 출발하시여 이 심각한 사회적변혁을 조직령도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립장에 서시여 주체42(1953)년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전원회의에서 농촌경리의 기술개조에 앞서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할데 대한 독창적인 농업협동화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는 전후 우리 나라의 구체적실정으로부터 출발하여 농촌경리의 기술개조에 앞서 경리형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할데 대한 방침을 내세우고 농업협동화운동을 힘있게 벌렸습니다.》

공화국에서 농촌경리의 사회주의적개조는 전후시기 농민들의 생활적요구로 나서고있었다.

3년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나라의 농촌경리는 형언할수 없을 정도로 혹심하게 파괴되였다. 전후 농촌에는 농사에 절실히 필요한 부림소와 농기구가 얼마 없었으며 로력도 부족하였다.

농민들의 생활형편도 매우 어려웠다. 전쟁으로 인하여 살림도구들이 거의다 마사지고 입을것과 먹을것이 모자랐다. 전쟁은 농민의 거의 40%를 령세농민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후에 농촌에서는 대부분의 농민들이 이렇게나 저렇게나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농사를 지을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으며 따라서 농민들자체가 농업협동화를 절실히 요구하였다.

전후시기 농촌에는 농업협동화를 해낼수 있는 력량도 충분히 준비되여있었다.

해방후 새 사회건설, 특히 토지개혁과 조국해방전쟁을 통하여 정치적으로 각성되고 단련된 농민대중은 조선로동당정책의 정당성과 인민정권의 귀중함을 깊이 깨닫고 수령님의 두리에 굳게 뭉쳤으며 그이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 나아갈 때만이 승리가 있고 행복이 있다는것을 굳게 확신하게 되였다. 또한 전시에 협동로동형태인 품앗이반, 소겨리반을 널리 조직운영하는 과정을 통하여 협동경리를 받아들일수 있도록 사상적으로도 준비되여있었다. 반면에 부농세력은 심히 약화되였다. 중농과 부유중농들도 전쟁기간 집과 농기구, 부림소를 잃고 령세화되였으며 부농경리 역시 거의다 파괴되여 보잘것없는것으로 되였다.

전후시기 땅에 대한 농민들의 소유관념도 매우 희박하였다. 땅이 있어도 부림소와 농기구, 로력이 모자라 제대로 부치지 못하는 형편이였기때문에 토지소유에 대한 관념이 토지개혁을 한 직후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처럼 전후 농촌현실에 대한 분석과 실천적경험에 기초하여 생산력과 기술발전수준이 비교적 낮다 하더라도 농업협동화를 실현할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시고 농업협동화운동을 힘있게 밀고나가시였다.

농업협동화는 먼저 경험적단계를 거쳐 농민대중에게 협동화의 우월성을 보여준 토대우에서 대중적단계로 발전시키고 모든 농민들이 다 협동조합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농업협동화를 완성하는 과정을 거치게 하였다.

협동화를 실현함에 있어서 실물교육을 통하여 농민들에게 협동경리의 우월성을 깊이 인식시켜 그들이 자원적으로 들어오도록 하였으며 빈농에 튼튼히 의거하면서 중농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부농을 제한하며 점차적으로 개조하는 계급정책을 견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과 국가의 지도와 방조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순차적인 단계를 거치고 지도적원칙을 견지하면서 농업협동화운동이 벌어지던 나날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력사적위업을 성과적으로 완수하기 위하여 불면불휴의 로고와 심혈을 다 바쳐가시였다.

주체43(1954)년 4월 15일 전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뜻깊은 생신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화군 삼정리(당시)를 현지지도하시였다.

온 나라 인민들이 어버이수령님께서 이 하루만이라도 편히 쉬여주실것을 소원하였지만 그이께서는 이날도 첫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협동조합을 위하여 농장벌을 찾으신것이였다.

수령님께서는 협동조합 관리일군들과 조합원들에게 새벽길을 걷는 사람이 찬이슬을 먼저 맞듯이 무슨 일이나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애로와 난관을 겪기마련이라고 하시면서 모두다 굳게 뭉쳐 농사도 잘하고 조합의 살림살이도 잘 꾸려나가야  하며 그리하여 모든 농민들에게 개인경리에 비한 협동경리의 참다운 우월성과 생활력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날 농업협동조합을 공고발전시키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농사를 잘 짓기 위한 방도를 일일이 가르쳐주시고 협동조합을 공고발전시키기 위하여 조합관리운영사업을 잘하여야 한다고 하나하나 일깨워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조합에 뜨락또르와 영농기자재들도 보내주시고 사과, 복숭아나무모도 보내주시여 조합경리를 빨리 발전시켜나가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해 여름에 또다시 이곳을 찾으시여 영농사업을 보살펴주시였으며 조합이 한해농사를 훌륭히 지은 가을철에도 찾아주시였다.

그이께서 봄에 조합을 찾으시였을 때에만 하여도 조합을 갓 뭇다보니 종곡이며 부림소며 비료걱정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다니던 농민들이 가을철에는 전례없는 풍작을 이룩하고 너무 기뻐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한 로인은 수령님께 큰절을 올리면서 《나는 구한국시기부터 왜정때 그리고 공화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농사를 해왔지만 금년처럼 농사가 잘되기는 처음입니다.》라고 하면서 감사를 드리였다.

농업협동화운동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세심한 지도와 손길은 이 협동조합만이 아니라 두메산골의 조합으로부터 벌방지대 조합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나 다 미치였다.

경험적단계에서 조직된 농업협동조합들은 첫해농사에서부터 그 우월성을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54년 협동경리에서 알곡단위당 수확고는 개인농민경리보다 10~50%나 더 높았으며 현금수입은 2~7배나 더 많았다.

농업협동조합의 우월성이 실물로 확증되자 조합에 들기를 망설이던 농민들은 저마다 부림소와 농쟁기들을 조합에 들여놓고 조합원이 될것을 희망해나섰다.

농업협동조합의 조직사업이 농민대중의 드높은 열의속에 대중적으로 전개되여 1955년 가을부터 다음해 영농기까지의 기간에 협동화비률은 총농가호수의 44. 7%로부터 70. 5%로, 1956년말에는 80. 9%에 이르렀으며 1958년 8월까지는 모든 농가가 협동경리에 망라되게 되였다.

농업협동화운동의 승리적인 전진은 농업생산을 장성시키고 령락된 농민들의 생활을 빨리 추켜세웠다.

알곡생산은 1954년에 비하여 1955년에는 104%로, 1955년에 비하여 1956년에는 123%로 늘어났으며 1956년에 협동조합 농호당 분배몫은 그 전해에 비하여 알곡은 129%로, 현금은 170%로 장성하였다.

개인농민경리가 협동화된 이후 농촌에는 목적과 리해관계가 같고 집단경리의 발전을 위하여 서로 돕고 이끌면서 공동으로 일하며 생활하는 사회주의적협동농민들사이의 단결과 협력, 평등의 관계가 지배하게 되였다. 모든 농민들이 다 사회주의사회의 동등한 주인으로, 사회주의적근로자로 전환됨으로써 농촌에서는 빈농, 중농, 부농의 계층별구별이 없어지고 사회경제적처지와 생활조건이 같은 사회주의적협동농민으로 그 구성이 단일화되게 되였다.

수백만 농민들의 사회경제적처지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그들의 사상정신적풍모를 크게 변모시켰다. 농민들은 협동화과정에 높은 사회주의의식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였으며 사회주의적근로자로서의 정치적각성과 문화수준도 훨씬 높아지게 되였다.

사회주의의 길에서 행복한 생활과 보람찬 미래를 찾은 농민들은 농촌경리의 사회주의적개조에서 얻은 승리를 더욱 공고히 하며 그것을 보다 더 발전시키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그리하여 농업근로자들은 로동계급과 함께 사회주의건설의 강력한 력량으로 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높은 애국적열성을 발휘하였다.

 

 

□ 개인상공업자들도 사회주의근로자로

 

전후 농촌에서 개인농민경리의 협동화가 진행될 때 도시에서는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개조가 적극 추진되고있었다.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개조를 실현하는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와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의 근원을 없애고 생산관계의 유일적지배를 확립하는 문제이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개인상공업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데서 자본주의적상공업의 개조에 특별한 주의를 돌리시였다.

선행한 리론이나 경험에 의하면 자본주의적상공업이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에 기초하여 생산과 류통과정에 근로자들을 착취하는 경리형태라는데로부터 사회주의혁명단계에서 수탈해야 할 대상으로 되고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본주의적상공업자들을 수탈하지 않고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독창적인 방침을 취하시였다.

공화국에서 일제와 예속자본가들의 소유였던 중요산업은 이미 해방후 국유화되고 남아있은 자본주의적상공업은 얼마 안되는 민족자본가들의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민족자본가들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우시였으며 해방후 민주주의혁명시기에도 변함없이 그들을 믿고 적극 이끌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일시적동반자로 보시지 않았다. 민족자본가들에 대한 수령님의 립장은 처음부터 그들을 공산주의사회까지 데리고 가시려는것이였다. 그러므로 사회주의혁명단계에 와서 자본주의적상공업자들이 혁명의 대상이라고 하여 그들을 수탈할수는 없었다. 더우기 전쟁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적상공업이 적지 않게 파괴되고 령세화되여 기업가, 상인들이 당의 협동화정책을 지지하여나선 조건에서 그들을 수탈하고 청산할 필요가 없었다.

자본주의적상공업자들을 사회주의적근로자로 개조하는것은 그때까지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성리론에도 없고 어느 나라에서도 실현해본 경험이 없지만 자본주의적상공업자들을 끝까지 믿고 이끌어주며 그들에게 참된 인생의 길을 열어주시려는 립장으로부터 기업가, 상인들을 사회주의적근로자로 개조하는 독창적인 길을 택하시였던것이다.

이렇듯 숭고한 뜻을 지니시였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경리형태의 개조와 인간개조를 밀접히 결합시켜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개조를 진행해나가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개인상공업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데 있어서 당은 경리형태의 개조와 인간의 개조를 밀접히 결합시켜 진행하였습니다.》

경리형태의 개조와 인간개조를 밀접히 결합하여 개인상공업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데서 중요한 문제는 근로정신이 희박한 자본주의적상공업자들을 어떻게 생산로동에 참가시켜 사회주의적근로자로 개조하는가 하는것이였다.

이를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개인기업가들을 업종별로 희망하는 생산협동조합에 들어오게 하되 먼저 수공업자들로 조직된 조합들을 튼튼히 꾸린 기초우에서 점차적으로 거기에 받아들이게 하시였으며 기업가들의 의식정도와 조합의 경제형편에 따라 반사회주의적형태를 널리 도입하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개인기업가들이 들여놓은 설비들에 대해서는 점차 생산협동조합의 공동축적금으로 값을 치르어 기업가들에게 손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소유를 사회주의적소유로 전환시키게 하시였다. 이러한 조치는 기업가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재산을 서슴없이 협동조합에 들여놓고 조합원으로 망라되게 하였다.

그러나 상인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상업활동자체가 생산로동이 아니기때문에 단순히 상인들의 경제를 통합하는것만으로는 그들을 사회주의근로자로 개조할수 없었다.

수령님께서는 상인들이 로동에 습관되지 않은것을 고려하여 처음에는 순수 판매만을 하는 판매협동조합을 조직하였다가 그것을 점차 생산과 판매를 동시에 하는 생산판매협동조합으로, 다음에는 생산을 기본으로 하는 생산협동조합으로 전환시키도록 하시였다. 이러한 과정은 국영공업과 사회주의상업의 지도적역할이 결정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조직된 생산협동조합들에 설비와 원료, 자금을 대주고 세금을 낮추어주며 조합의 관리간부들을 옳게 선발배치하고 조합에서 엄격한 제도와 질서를 세워나가게 하시였다.

어제날의 기업가, 상인들이 가지고있는 낡은 사상은 주로 자기만을 생각하는 리기주의, 개인주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점을 깊이 헤아리시고 협동조합들에 문화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하시고 《생산협동조합학습반》을 운영하도록 하시였으며 조합원들의 사상의식개조를 위하여 여러가지 신문, 잡지 등 교양자료들을 발행보급하도록 적극적인 대책도 세워주시였다.

기업가, 상인들이 사상령역에서까지 낡은 사회와 완전히 인연을 끊을수 있도록 그 방향과 방도를 세심히 가르쳐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히 여러 생산협동조합들을 찾으시여 그들에게 크나큰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시면서 광명한 앞날에로 이끌어주시였다.

체46(1957)년 8월 군사분계선을 지척에 둔 개성시안의 생산협동조합들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합들의 사업에서 걸린 문제들을 손수 풀어주기도 하시고 조합원 한사람한사람의 사회정치생활과 가정생활, 그들의 장래문제와 자녀들의 교육문제에 대해서까지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의 품속에서 개인상공업자들은 사회주의근로자로 자라나게 되였으며 그들의 정치적각성이 높아짐에 따라 경리형태의 개조는 더욱 힘있게 추진되였다.

그리하여 공화국에서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개조는 농업협동화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성과적으로 완성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어제날의 상공업자들이였던 생산협동조합원들이 사업과 생활에서 뒤떨어질세라 극진히 보살펴주시면서 그들이 보람찬 삶을 누리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주체48(1959)년 6월 원산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시내 생산협동조합원들을 만나신 자리에서 지난날의 개인기업가, 소상인, 수공업자들모두를 사회주의건설자로 교양개조하여 공산주의가 승리할 때까지 데리고가는것이 우리 당의 방침이라고 강조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철공생산협동조합의 한 작업반장을 미덥게 바라보시며 《동무의 아들까지도,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전부 데리고 가겠소!》라고 다시금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말씀을 받아안은 작업반장은 커다란 흥분과 감격에 휩싸였다.

그는 지난날 20여명의 로동자들을 고용하여 주물공장을 경영하다가 조합에 들어와 주물반장으로 일하고있었다. 생산협동조합에 들어오기 전까지 오래동안 기업활동을 하면서 돈에 눈이 어두워진 그에게는 량심을 속이며 살아온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아들이 중태에 빠졌을 때에도 비상용으로 건사해둔 페니실린 한병이 아까와 쓰지 않았던 그가 병원에서 페니실린뿐아니라 값비싼 약을 다 써주고 다섯차례의 수혈까지 무상으로 해주어 사경에 처했던 아들을 살려낸 사실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가 걸어온 수치스러운 생활을 돌이켜볼수록 그는 수령님의 자애에 넘치신 말씀이 너무도 고마와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흐려짐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과업을 받고 무연탄으로 광석을 녹이기 위한 연구사업에서 성공한 날 저녁 옷장속에 깊이 간수했던 30만원의 출자금증명서를 가지고 당위원회를 찾아가 내놓으며 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사회주의를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할것을 맹세다졌다.

그후 작업반장은 조선로동당원의 고귀한 영예를 지니고 조합의 관리위원장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까지 자라나게 되였다.

이것은 결코 그 한사람에 한한 일이 아니였으며 그전날의 개인상공업자들모두가 받아안은 행복이며 영광이였다.

자기들을 당당한 사회주의적근로자로, 사회주의력량의 한 성원으로 되게 하여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에 감격하여 어제날의 한 기업가는 자기의 흥분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사회주의력량!

조선로동당은 그 넓고넓은 품속에 서슴지 않고 우리들을 받아들였다.

수령님께서와 당에서는 다같이 나가야 할 우리 인민의 먼 장래를 생각하고 자본주의적상공업자들까지도 뒤떨어지지 않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수령님께서와 당에서는 우리들-자본주의적상공업자들을 그의 넓은 품에 안아주시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 상공업자들은 짧은 기간내에 모두가 영광스럽게도 사회주의건설자의 떳떳한 일원으로 되였다.

이 보람찬 대렬속에서 나도 함께 걸어나간다고 생각하니 수령님과 당에 다시다시 감사를 드리고싶었다.》

참으로 인민모두를 한품에 안아 키워주고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믿음과 사랑이 있음으로 하여 어제날의 개인상공업자들도 사회주의적근로자로 인생전환을 하는 인간개조의 새 력사가 이 땅우에 펼쳐지게 되였으며 그들은 사회주의력량의 대오에 떳떳이 서서 사회주의만세의 우렁찬 함성을 높이 웨치며 희망찬 래일에로 확신성있게 나아가게 되였다.

이렇듯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사업은 경리형태의 개조만이 아니라 인간개조까지도 포괄하는 거창한 사회적변혁으로 되였다.

전후 4~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농업협동화의 완성과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개조가 순조로이 진행됨으로써 나라의 전반에서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개조가 완성되여 가장 선진적인 우리 식 사회주의제도가 튼튼히 서게 되였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압박이 종국적으로 청산되고 인민대중의 사회정치적자주성의 실현이 제도적으로 담보되게 되였으며 계급해방의 력사적위업이 빛나게 완수되였다.

그리하여 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적사회관계는 근로자들의 사회경제적처지만을 개변시키는데 머물렀던 다른 나라들의 사회관계와는 달리 사회주의적으로 교양개조된 근로자들사이의 사상의지적결합에 기초한 단결과 협조의 사회관계로 되였다.

 

 

6

□ 근로대중을 국가와 사회의 실제적인 주인으로

 

사회주의적경제형태의 유일적지배로 생산력의 빠른 발전과 함께 사회주의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인민대중의 지위는 강화되고 사회주의근로자로 된 근로대중의 정치적열의와 창조적적극성도 전례없이 높아졌다.

그러나 변화된 새로운 환경에 비추어볼 때 당, 국가, 경제기관들의 사업체계와 사업방법은 의연히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고 일군들의 지도능력도 발전하는 현실에 따라서지 못하고있었다.

만일 이러한 현상이 지속된다면 인민대중이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면서도 국가와 사회의 관리운영의 담당자로서의 제구실을 똑똑히 할수 없는것은 말할것도 없고 사회주의가 인민대중과 리탈될수 있었다.

새로운 환경과 낡은 사업체계, 방법사이의 불일치, 이 문제를 한시바삐 풀지 않고서는 사회주의경제를 옳게 발전시킬수 없었으며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발양시켜나갈수도 없었다.

이로부터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주체48(1959)년 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새로운 환경의 요구에 맞게 당, 국가, 경제기관들의 사업체계와 사업방법을 근본적으로 개선할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원회의이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체49(1960)년 2월 보름동안에 걸쳐 청산리와 강서군(당시)에 대한 현지지도를 하시였다.

2월 5일 이른새벽 숫눈길을 헤치시며 청산리에 도착하신 수령님께서는 가정방문으로부터 지도사업을 시작하시였다. 그것은 리의 전반사업이 조합원들의 가정살림에 그대로 반영되기때문이였다. 그이께서는 싸리울바자를 두른 한 농가의 뜨락으로 들어서시여 집주인을 찾으시고 허물없이 담화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가족은 몇인가, 지난해에 몇공수나 벌었는가, 알곡과 현금은 얼마나 분배받았는가, 분배받은 식량을 가지고 1년농량이 되는가, 돼지와 닭은 몇마리나 기르며 닭들이 알을 잘 낳는가, 김장은 얼마나 담그었으며 남새는 어디서 공급받았는가 등 집안살림살이에 대하여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료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처럼 군중속에 깊이 들어가시여 인민생활과 당사업, 행정경제사업 등 모든 사업실태를 구체적으로 료해하시였다.

이 과정에 그이께서는 조합에서 농사일에 로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계획이 없이 사업하고있으며 사회주의분배원칙을 잘 지키지 않고 알곡생산계획도 일률적으로 내려보내고있다는것을 아시게 되였다.

수령님께서는 리일군들의 사업에서 심중한 결함들이 생기게 된 원인이 중요하게는 웃단위일군들이 아래를 실속있게 도와주지 못한데 있다는것을 헤아려보시고 군당위원회와 군인민위원회의 사업을 료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주변에 있는 군안의 다른 몇개 리에 지도성원들을 파견하시여 군의 실태를 전면적으로 료해하도록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리와 군의 사업에 대한 료해과정을 통하여 나타난 결함의 근본원인은 리와 군의 사업체계와 일군들의 사업방법이 사회주의제도가 선 새로운 환경에 맞게 개선되지 못하고 종래의 낡은 사업체계와 사업방법에 매달려있는데 있다는 결론을 내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처럼 청산리와 강서군의 사업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신데 기초하여 청산리당총회와 강서군당위원회 전원회의 그리고 청산리와 강서군에 대한 현지지도를 총화하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새 환경에 맞게 일군들의 사업방법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사회주의사회에 맞는 새로운 사업방법을 확립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사회주의운동의 력사에는 사회주의건설을 령도한 령도자들이 많았지만 수령님과 같이 나라의 전반사업을 돌보시는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이름없는 한 농촌마을을 15일동안이나 현지지도하시면서 실천적모범을 통하여 사회주의사회의 본성적요구를 구현한 새로운 사업방법을 창조하신 전례는 일찌기 없었다.

우리 인민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청산리와 강서군에 대한 현지지도전반에 구현하신 혁명적군중로선과 현지지도를 통하여 새롭게 세워주신 사업체계와 방법 그리고 그이께서 몸소 모범을 보여주신 령도방법을 총괄하여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이라고 하였다.

청산리정신은 조선로동당의 혁명적군중로선을 구현한 대중지도사상이다. 인민대중의 리익을 옹호하며 그들의 힘에 의거하는것이 혁명적군중로선의 기본요구라면 그것을 구현한 대중지도사상이 바로 청산리정신이다.

청산리방법의 기본은 우가 아래를 도와주며 일군들이 늘 군중속에 들어가 군중에 의거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하는것이다. 이것은 집단주의가 사회생활의 기초로 되여있는 사회주의사회의 본성에 맞게 상하가 굳게 단결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해나가는 방법이다.

청산리방법의 기본은 또한 모든 사업에 정치사업, 사람과의 사업을 앞세우는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사상을 발동하여 모든 문제를 풀어나갈데 대한 주체사상의 요구로부터 흘러나오는 사업방법이다.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이 창조됨으로써 인민대중을 국가와 사회의 관리운영의 참다운 주인으로 만드는 가장 옳바른 대중지도방법이 확립되였다.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이 고요한 서재나 사무실에서가 아니라 사회주의근로자로 개조된 사람들과 들끓는 현실속에서 대중의 요구와 의사를 집대성한것으로 하여 그 견인력과 감화력은 비할바없이 컸다.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은 당 및 국가사업과 경제지도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일으켰다. 사회주의건설의 전진을 가로막던 낡은 사업방법은 극복되고 새로운 사업방법 그리고 인민적사업작풍이 전면적으로 확립되여갔다.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은 또한 경제사업에서 커다란 전변을 가져왔다.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이 나온 1960년에 농촌에서는 땅이 꺼지게 대풍이 들었다. 농민들은 이해에 전해의 1. 4배, 1946년의 2배에 달하는 알곡을 거둬들였다.

공업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1960년에 공업총생산액은 전해에 비하여 115%로 높아졌으며 해방전 1944년에 비하여 7. 6배로 늘어났다.

이렇듯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이 구현되는 모든 곳에서 례외없이 걸렸던 문제들이 풀려나갔으며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전면적인 앙양과 혁신이 일어났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철저히 구현하여 인민대중을 경제관리운영의 실제적인 주인으로 만드는 가장 합리적인 사회주의경제관리체계를 마련하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당은 청산리지도가 있은 다음 인민경제에 대한 지도관리사업에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더 잘 관철할수 있도록 공업관리에서 대안의 사업체계를 세우는 획기적조치를 취하였습니다.》

당시 경제관리체계와 방법은 지배인유일관리제였다. 지배인유일관리제에서는 지배인의 주관과 독단에 의하여 생산과 관리의 중요한 문제들이 좌우되고 생산자대중은 기업관리에서 거의나 제외되여있었으며 생산에 대해서도 주로 지배인 개인이 책임지고 생산자대중은 관여할수 없게 되여있었다. 또한 지배인유일관리제에서는 우에서 내려와 도와주는것이 아니라 관료주의적으로 명령만 하였으며 직장들사이에도 《너면 너고 나면 나다.》 하는 개인리기주의적, 본위주의적인 경향이 적지 않았다.

현실발전에 뒤떨어지고있는 이러한 낡은 공업관리체계를 가지고서는 생산자대중의 적극성과 창발성을 충분히 발양시킬수 없으며 발전된 사회주의적대규모경리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관리운영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50(1961)년 12월 여러날에 걸쳐 대안전기공장(당시)과 평양방직공장, 기계공업총국(당시)의 사업을 호상 련관속에 깊이 료해분석하시고 사회주의경제관리에서 근로대중이 높은 혁명적열의와 창조적적극성을 가지고 생산과 관리에 주인답게 참가할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공업관리체계인 대안의 사업체계를 내오도록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우선 공장당위원회의 집체적지도밑에 공장, 기업소를 관리운영하는 체계를 세우시였다. 그리하여 공장의 생산과 관리운영을 어느 개인이 아니라 전체 당원들과 로동자, 기술자들이 책임지며 무엇보다먼저 공장의 집체적지도기관인 공장당위원회가 책임지도록 하시였다. 이것은 그전까지 공장관리에서 하나의 공식으로 되여있던 지배인유일관리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한 새로운 조치였다.

수령님께서는 이와 함께 계획부, 생산지도부, 기술부와 같이 생산과 관련된 부서들을 망라하여 공장참모부를 조직하고 생산을 잘 아는 기사장이 참모장이 되여 생산을 통일적으로, 집중적으로 지도하는 새로운 생산지도체계를 세우시였다.

그이께서는 또한 설비, 자재를 비롯하여 생산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우에서 책임지고 아래에 현물로 내려다주는 자재공급체계를 세우시였다. 그리고 생산자대중의 생활을 완전히 책임지고 보장하는 정연한 후방공급체계를 세우시였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그전의 사업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사회주의제도의 본성에 맞는 가장 우월한 경제관리체계였다.

그 본질적우월성은 지도와 대중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당의 유일적령도와 혁명적군중로선을 다같이 철저히 관철해나가게 하는 사업체계라는데 있다.

새로운 사업체계가 공장의 관리운영에서 커다란 은을 나타내여 대안전기공장에서는 1962년에 년간계획을 두달이나 앞당겨 끝내는 혁신을 일으켰다. 이 공장뿐아니라 인민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경제지도체계와 기업관리운영체계가 대안의 사업체계의 요구대로 개편되고 사회주의경제건설과 경제관리에서는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성과에 기초하시여 대안의 사업체계의 요구를 사회관리전반에 구현하기 위한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대안의 사업체계의 위력은 단결과 협력의 위력이고 대중의 자각적열성과 창발성의 위력이며 당의 지도가 아래에 깊이 들어가는데서 나오는 위력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당위원회가 해당 단위의 최고지도기관으로서 매 시기 제시되는 당의 정책과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집체적으로 토의결정하고 그것이 잘 집행되도록 장악지도하고 통제하는 키잡이의 역할을 하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모든 부문에서 우가 아래를 도와주고 상하가 합심하여 동지적으로 단결하며 대중의 높은 혁명적열의와 무궁무진한 힘에 의거하여 제기된 과업을 수행하는 사업체계와 방법을 확립하도록 하시였다.

이것은 대안의 사업체계가 처음부터 사회주의사회전반을 관리하는 체계로서 자기의 모습을 뚜렷이 갖출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사회주의적정치방식으로 출현하였다는것을 실증하여 준다.

대안의 사업체계가 마련되고 그것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구현된것은 사회주의정권을 세우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소유관계를 확립한데 못지 않은 사회개조분야에서의 거대한 혁명으로 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구현한 대안의 사업체계를 창조하심으로써 력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사회의 본성적요구에 맞는 사회관리체계가 확립되고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된 인민대중을 그 관리운영에서도 실제적인 주인으로 되게 하는 참다운 길이 밝혀지게 되였다.

인민들은 조선로동당을 더욱 깊이 신뢰하고 따르게 되였으며 사회주의근로자로서의 자부심을 안고 당의 향도따라 사회주의길로 더욱 확신성있게 나아가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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