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개성의 유적유물마다에도 

 

 

《우리는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을 보여주는 우수한 력사문화유적들을 원상대로 잘 보존관리하여 후대들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김 정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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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태조 왕건왕릉

 

 

오늘날 북남경제협력의 상징으로 불리우는 개성공업지구가 자리잡고있는 개성은 분계연선도시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는 동시에 고려시기의 문화유적이 많은 도시로서도 유명하다.

개성은 우리 나라 판도우에 존재했던 첫 통일국가로서 세계에 이름을 떨치였던 고려의 도읍지이다.

고려는 개성에 수도를 정하고 근 500년간 우리 민족사를 아로새기면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여왔다.

번성했던 고려이후시기 우리 나라는 부패무능한 봉건왕조의 학정과 일제의 식민지통치로 하여 곡절많은 력사의 가시덤불길을 헤쳐왔지만 개성의 문화유적들은 오늘도 옛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고려문화의 찬란함과 우리 선조들의 슬기와 지혜를 자랑하고있다.

개성시 해선리에 가면 이곳 만수산줄기의 서남쪽으로 밋밋하게 뻗은 언덕가운데에 자리잡은 고려태조 왕건왕릉을 볼수 있다.

왕건왕릉은 고려시기만 하여도 외래침략자들이 침입하였을 때마다 서울, 강화도 등지로 옮겼던것을 비롯하여 여러차례나 파서 다른 곳으로 가져갔다가 1270년에 비로소 마지막으로 본래의 제자리로 다시 왔으며 일제강점시기에는 여러번 도굴당하여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왕건왕릉을 잘 꾸리는것은 단순히 력사유적을 개건하는 실무적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민들에게 민족사를 정확히 인식시키는 중요한 문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오랜 세월 묻혀있던 고려의 통일기상을 로동당시대에 자랑떨치게 하시려고 왕건왕릉을 훌륭히 개건하도록 하시였다.

주체81(1992)년 5월 5일 몸소 왕건왕릉을 찾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자리는 나쁘지 않은데 지내 초라하다고 하시면서 릉을 잘 꾸릴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왕건은 우리 나라에 첫 통일국가를 세운 사람인것만큼 릉을 잘 꾸려놓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해외동포들이 왕릉을 보여달라고 하면 고려태조왕이였던 왕건왕의 릉부터 먼저 보이고 그 다음에 공민왕릉을 보게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왕건왕릉을 동명왕릉보다 더 크고 요란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력사유적유물을 개건하거나 복구할 때에는 반드시 력사주의적원칙을 지켜야 하며 력사기록과의 관계를 잘 고려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김일성주석의 숭고한 뜻을 받드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왕건왕릉을 고려의 통일기상이 넘쳐나게 훌륭히 개건하도록 정력적으로 이끌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1(1992)년 6월 10일 고려태조 왕건왕릉형성안과 모형사판을 친히 보아주시고 왕릉으로 들어가는 도로와 주변을 참관지로 손색없이 잘 꾸리며 개건비도 새로 만들어 세우도록 하시였다.

왕건왕릉개건에 대한 소식을 들은 왕씨가문의 후손들은 왕건이 쓰던 옥새를 내놓으며 그 보물을 왕씨가문의 하늘이신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올려달라고 간청하였고 왕건의 초상그림이 있는 왕씨족보도 내놓았다. 그리고 《고려성원록》1권, 《개성왕씨족보》19권을 나라에 바치였다.

왕씨후손들이 고려관계유물자료들을 나라에 기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려관계유물자료들을 사회과학원에 넘겨주어 고려사연구에 리용하며 족보책에 있는 왕건의 초상을 고려박물관과 새로 꾸리는 왕건왕릉의 제당안에 붙이도록 하시였다.

또한 주체82(1993)년 2월 4일에는 왕건왕릉참관자들이 무덤안에 들어가 진렬해놓은 력사유물들과 왕건의 활동을 형상한 벽화들을 볼수 있게 지하통로입구를 내도록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왕건왕릉개건과 관련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밝혀주시였을뿐아니라 건설자재와 력량도 우선적으로 보장하도록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건설자들과 지원자들은 왕건왕릉개건사업에 적극 떨쳐나서 짧은 기간에 고려의 통일기상이 넘쳐나게 왕릉을 훌륭히 개건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왕건왕릉개건공사가 끝났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친히 기념비에 《高麗太苗 王建王陵改建碑》(고려태조 왕건왕릉개건비)라는 비문을 친필로 써주시고 왕건의 생일 1 117돐을 계기로 개건식을 진행하도록 하게 하시였다.

그리하여 1994년 1월 현지에서는 고려태조 왕건왕릉개건식이 성대히 진행되였다.

왕건왕릉은 3단축도형식의 웅장한 릉으로 훌륭하게 개건확장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친필이 새겨진 고려태조 왕건왕릉개건비가 한옆에 세워져있는 릉문으로 들어서면 제당과 비각이 보인다. 제당의 벽면들에는 왕건의 화상과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그림들이 그려져있다. 제당과 비각이 있는 구역을 지나면 고려돌칸흙무덤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왕건왕릉이 안겨온다.

왕릉은 바깥둘레에 쥐, 소, 범 등 12지신상을 정교롭게 부각한 12각의 병풍돌을 세웠고 그 밖으로는 돌란간을 둘렀다. 봉분의 높이는 8m, 병풍돌의 대각직경은 19m이다.

왕릉의 네귀에는 돌범이 놓여있고 앞에는 상돌과 망주석, 석등, 문무관들의 돌조각상이 있다.

주체85(1996)년 3월 31일, 끊임없는 선군혁명령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날 훌륭하게 개건된 왕건왕릉을 찾으시였다.

만수산의 가지줄기가 뻗어내려온 밋밋한 등성이우에 자리잡은 고려태조 왕건왕릉, 고즈넉이 안겨오는 왕건왕릉은 여느때없이 빛나고있는듯싶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만면에 해빛같은 미소를 지으시며 왕릉이 아주 훌륭하다고, 대단하다고 못내 만족해하시면서 왕건왕릉은 통일국가였던 고려를 상징합니다, 앞으로 북남교류가 실현되여 남조선사람들이 오게 되면 왕건왕릉도 보여주어야 할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왕건왕릉을 일일이 돌아보시면서 제당바닥에 깔아놓은 돌을 보시고 오랜 력사유적인 왕릉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나무바닥으로 고쳐야 하겠다고, 이 지대에 왕가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데 왕건의 후손들도 있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설명문도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왕건왕릉을 더 잘 꾸릴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고나서 왕건왕릉 앞쪽에 있는 500년동안 자란 느티나무를 잘 관리하여야 한다고, 왕릉앞에는 공원을 꾸리면 좋겠다고 이르시였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있어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첫 통일국가인 고려의 위용이 비낀듯 내 나라의 푸른 하늘을 떠이고 일떠선 왕건왕릉은 단군릉, 동명왕릉과 함께 자기의 모습을 한껏 자랑하며 찬연한 빛을 뿌릴수 있었다.

 

 2

력사문화유적들을 돌아보시며

 

 

개성에는 민족적정서가 진하게 풍기는 성균관과 선죽교, 남대문과 공민왕릉, 첨성대, 만월대, 개성성, 대흥산성을 비롯한 수십개의 국보적유적들이 있다.

력사적인 6. 15북남공동선언발표이후 《우리 민족끼리》의 거센 흐름을 타고 남조선의 수많은 사람들이 개성의 문화유적들을 돌아보았는데 그들은 개성의 문화유적들이 훌륭히 보존관리되고있는데 대하여 한결같이 찬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진주보석도 주인을 잘 만나야 제 빛을 낼수 있다.

개성의 유적들을 몸소 찾으시여 보존관리를 잘해나갈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따뜻한 손길이 있어 개성지구의 유적들도 민족의 귀중한 유산으로, 후세에 길이 물려줄 국보로 될수 있었다.

주체57(1968)년 8월 22일이였다.

이날 개성을 찾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뜨거운 뙤약볕이 내려쪼이는것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여러곳에 있는 력사유적들을 돌아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맨 먼저 들리신것은 성균관이였다.

성균관마당에 있는 은행나무가 대단히 크다고, 아마 한 1 000년은 자란것 같다고 말씀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성균관의 력사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주시였다.

고려시기 국가의 최고교육기관이였던 성균관은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

개성의 성균관은 992년에 세워졌다. 고려시기의 건물은 임진조국전쟁때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건물은 1602~1610년 기간에 다시 지은것이다. 성균관은 약 1만의 넓은 부지에 자리잡고있는데 거기에는 동재, 서재, 명륜당, 동무, 서무, 대성전, 향실, 존경각, 계성사를 비롯하여 당시의 건축술을 자랑하는 18동의 건축물이 있다. 성균관건물은 엄격한 유교적질서에 맞게 남북축을 따라 중심부분을 대칭으로 구성하였으며 이른바 《검박》을 표방하는 유교적교리에 따라 사찰과는 달리 장식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상급학생들을 위한 대성전구획과 하급학생들을 위한 명륜당구획을 엄격히 구별하였으며 명륜당을 배집으로, 대성전을 합각집으로 하고 크고작은 건물들을 조화되게 배치한것 등은 당시 학교건축의 일반적특징과 선조들의 재치있는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성균관이 고려시기의 최고교육기관인 대학으로서 그 력사가 거의 천년이 되여온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에 성균관과 같이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교육기관이 있었다는것은 세계적으로 자랑할만 한 일이라고 긍지높이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명륜당과 대성전 등 여러 건물들을 돌아보시면서 고려시기의 건축술이 대단히 높고 다양한 색갈로 단청도 아주 잘 입혔다고 하시면서 민족건축유산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러시고나서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적유물들을 잘 보존하여 후대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그래야 후대들이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더 잘 알고 민족적긍지와 애국심도 키울수 있으며 우수한 문화전통도 옳게 계승발전시켜나갈수 있다고 하시면서 성균관을 잘 보존관리할데 대하여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을 들으며 일군들은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이 세워진 때로부터 근 1 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언제 그 누가 경애하는 장군님과 같이 이렇게 력사속에 파묻혔던 성균관을 민족의 자랑으로, 국보적유산으로 빛내여주신적이 있었던가 하는 크나큰 격정에 휩싸여 높뛰는 가슴을 진정할수 없었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개성시 선죽동의 로계천에 놓여있는 고려시기의 돌다리인 선죽교와 그의 서편에 있는 표충비도 찾으시였다.

선죽교는 길이 8. 35m, 너비 3. 36m로서 크지 않지만 정몽주가 리방원일파에 의하여 여기에서 피살된것으로 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원래는 선지교라고 불리웠는데 정몽주가 피살된 후 그가 죽은 자리에서 참대가 돋아났다고 하여 다리이름도 선죽교라고 고쳐 불렀다. 다리는 개울바닥에 기초를 다진 다음 네줄의 기둥돌을 세워 세 경간을 설치하고 그우에 화강석장대돌들을 깔았다. 1780년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개성류수로 있으면서 선죽교우에 돌란간을 돌려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그옆에 새로 돌다리를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까지 전해오고있다. 다리옆에는 리조시기의 명필인 석봉 한호가 쓴 《선죽교》라는 비석이 있고 1641년에 정몽주의 《충절》을 찬양하여 세운 성인비(읍비), 1796년과 1824년에 세운 록사비가 있으며 다리의 서편에는 표충비가 있다. 표충비는 정몽주의 충절을 찬양하여 리조왕들이 세운것이다.

선죽교와 표충비의 유래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을 보여주는 문화유적들을 잘 관리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선죽교와 표충비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잘 꾸려 문화휴식터로 만들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공민왕릉을 돌아보시였다.

공민왕릉은 현릉(공민왕의 무덤)과 정릉(왕비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쌍무덤으로서 1365년부터 1372년사이에 공민왕자신이 직접 감독하면서 인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든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왕릉의 규모가 크고 돌조각을 잘하였는데 이것만 보아도 고려시기에 조각예술이 발전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고 하시면서 공민왕릉이 왕의 무덤이지만 당시 우리 인민들의 재능이 깃들어있는 귀중한 력사문화유적인것만큼 원상대로 잘 보존관리하여 후대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을 들으며 일군들은 후대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무장시키고 그들에게 민족적자부심을 높여주기 위하여 그토록 마음쓰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심중이 뜨겁게 어려와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공민왕릉을 돌아보신 후 이어서 박연폭포를 찾으시였다.

높이 37m, 너비 1. 5m인 박연폭포는 우리 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3명폭의 하나로, 송도3절의 하나로 불리워왔다.

아호비령산줄기의 성거산과 천마산사이의 험준한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구슬같은 맑은물이 선바위에 부딪쳐 돌면서 박연에 담기였다가 바위벽으로 떨어지면서 폭포로 된다. 이 폭포는 다른 폭포보다 물이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고 물소리 또한 요란하다. 그리고 뽀얀 물안개를 일으키므로 풍치를 더 아름답게 한다. 폭포우에는 너럭바위가 바가지모양으로 패워 이루어진 둘레 24m, 직경 8m, 깊이 5m정도의 기묘한 못인 박연이 있고 그가운데에 여러 사람이 앉을만 한 크기의 선바위가 있다. 폭포밑에는 폭포수에 의하여 패인 둘레 120m, 직경 40m정도인 고모담이라는 못이 있다. 고모담기슭에는 물에 잠겨 웃부분만 나타낸 룡바위라는 둥근 바위가 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연못이 바가지처럼 생겼는데 그가운데 큰 바위가 있으니 더 보기 좋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전설에 의하면 못이 바가지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 이름을 박연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아마 박연폭포라는 이름도 이 전설에서 유래된것 같습니다. 이 못을 박연이라고 부르게 된것과 관련하여서는 다른 전설도 있습니다. 그것은 먼 옛날 박진사라고 하는 퉁소를 잘 부는 총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하루는 저 못가운데 있는 바위에 앉아 구성지게 퉁소를 한곡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자 퉁소소리에 반한 룡왕의 딸이 물속에서 나와 박진사와 사랑을 맺고 함께 못속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못의 이름을 박연이라고 하였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폭포아래에 있는 못은 박진사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다니며 슬퍼하다가 물에 빠져죽은 곳이라고 하여 고모담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계속하시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앞으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박연폭포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해주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복고주의를 반대한다고 하면서 명승지에 오는 사람들에게 전설이야기를 해주지 않을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명승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전설을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해설이 딱딱하고 들을 맛이 없을것이라고, 명승지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폭포주변에 있는 력사유적유물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폭포주변에 력사유적이 있으니 풍치가 살아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우리는 선조들이 남긴 우수한 문화유적들을 원상대로 보존관리하여 후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그래야 후대들이 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잘 알고 민족적긍지와 애국심을 키울수 있으며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전통을 옳게 계승발전시켜 나갈수 있다고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전국적으로 력사문화유적들에 대한 보존관리상태를 알아보고 현실적요구에 맞게 관리체계를 바로세우도록 하여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이날에 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은 력사문화유적유물의 보존과 관리의 중요한 원칙으로, 기준으로 되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빛나는 예지와 세심한 손길, 탁월한 령도가 있었기에 그후 개성지구에 있는 성균관과  선죽교, 남대문과 공민왕릉, 대흥산성, 관음사, 표충비 등 수많은 유적유물이 원상대로 더 잘 보존관리되고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으로, 국보로 될수 있었다.  

 

 3

력사적원상을 잘 살리도록

 

 

문화유적유물들은 그것이 만들어진 당대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을 비롯한 사람들의 생활과 풍속들을 반영하고있다. 그러므로 문화유적유물의 생명은 시대상과 함께 력사적원상이라고 말할수 있다.

시대상과 력사적원상을 잃어버린 문화유적유물은 민족문화유산으로 될수 없다.

문화유적유물은 력사적원상을 살려야 자기의 본질적특성을 가지고 력사해명과 대중교양에 복무할수 있으며 민족고유의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나가는데 참되게 이바지할수 있는것이다.

옛 모습그대로 문화유산과 유적들을 복구하여야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우리 선조들의 건축술을 비롯하여 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생동하게 보여줄수 있는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문화유적유물원상의 중요성을 깊이 헤아리시고 그것을 력사주의적원칙에서 옛 모습그대로 복구하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의 건축력사를 실물로 보여줄수 있는 력사유적인 령통사를 원상복구하도록 하시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개성시 룡흥동 오관산기슭에 자리잡고있던 령통사는 고려시기 이름난 승려인 의천과 관련되여있는 사찰로서 그 부지면적은 4 200에 달하며 기본사찰구획과 동북쪽무덤구획, 서북쪽무덤구획으로 나누어져있다.  

령통사는 고려시기의 건축술을 연구하는데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지고있다고 할수 있다.

령통사의 사찰은 오래전에 외래침략자들의 침입때 불타 페허로 되고 령통사5층탑과 함께 령통사대각국사비와 당간지주, 동, 서 3층탑이 남아있었다.

령통사5층탑의 높이는 6. 48m이다. 한단으로 된 기단우에 화강암을 잘 다듬어 5층으로 쌓았다. 기단뚜껑돌이 얇고 그 너비가 3. 23m나 되여 탑의 높이에 비하여 몹시 넓은 감을 주면서도 탑전반의 균형이 잘 잡혀있다. 기단의 가운데돌에는 면마다 모기둥과 2개씩의 사이기둥이 보인다. 탑몸은 차례줄임을 비교적 크게 주고 몸돌의 높이를 크게 주었다. 탑몸의 지붕돌처마는 량가녁에서 아래, 웃선이 다같이 가볍게 들려 탑의 경쾌감을 돋구고있다. 처마고임은 1, 2층에서 4단을, 3, 4, 5층에서 3단을 주었다. 탑머리에는 로반이 남아있다. 령통사5층탑은 고려초기의 높은 건축기술을 잘 보여주는 민족문화유산의 하나이다.

령통사대각국사비는 고려시기 의천의 비로서 1125년에 세워졌다. 이 비는 밑에 바닥돌을 한벌 깔고 그우에 거북받침을 하였다. 그우에 비몸과 비머리가 있다. 비의 높이는 4. 32m이다. 바닥돌과 거북받침은 한돌로 다듬었는데 바닥돌의 크기는 길이 3. 02m, 너비 2. 36m이다. 거북받침의 네발은 바닥돌을 힘껏 잡고 목은 길게 내밀었다. 높이가 3. 15m인 비몸은 거기에 새긴 세련된 보상화넝쿨무늬와 봉황새무늬로 하여 유명하다. 무늬는 화가 박권이 새긴것으로써 거북받침의 름름한 형상과 대조되여 잘 조화를 이루고있다. 비문에는 1086년부터 4 769권에 달하는 1 000여종의 많은 책을 출판하는데 기여한 의천의 경력과 비를 세울 때의 공사관계자들의 이름이 밝혀져있다. 비머리는 우진각지붕형식이다. 이 비 역시 고려시기 출판기술과 건축술, 조각술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된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령통사터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여 과학적자료를 얻은데 기초하여 복구설계를 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건설준비사업을 다그칠데 대한 대책도 세워주시였다.

또한 해당 부문 과학자들을 동원하여 복원도와 기술과제, 설계를 완성하도록 하시고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밀고나가기 위해 상무조를 뭇도록 하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령통사건설을 잘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력사연구부문 일군들과 설계가들이 현지에 나가 령통사건설부지를 확정하고 건축설계를 하고있다는데 잘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령통사건축형성을 잘하여 질적으로 건설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8(1999)년 8월 25일에 령통사건설부지와 설계형성안을 친히 보아주시고 건설공사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몸소 해결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령통사는 원상대로 훌륭히 복구되였으며 고려시기의 건축기술을 통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내외에 널리 선전하는데 적극 리용되고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려의 왕궁터 만월대를 원상대로 복구하는 사업과 숭양서원을 잘 보수정비하는 사업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송악산 남쪽기슭인 개성시 송악동에 있는 만월대는 우리 나라 첫 통일국가인 고려의 왕궁터이다. 고려는 만월대건설을 다그쳐 919년에 왕궁을 화려하게 일떠세웠다.

만월대의 왕궁은 강화도에 도읍을 일시 옮겼던 40여년간(13세기 중엽)을 제외하고는 고려왕조의 기본왕궁이였다. 면적이 125만에 달하는 왕궁은 궁성과 그 남쪽에 있던 황성으로 되여있다.

만월대는 고려인민들의 창조적재능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미전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랜 력사가들과 학자들이 살아있을 때 만월대유적들을 복구개건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오랜 학자들에게 과업을 주어 연구사업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당장은 나라의 사정으로 만월대를 복구개건할수 없으나 앞으로는 하여야 하므로 예견성있게 연구사업을 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또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왕이 정사를 보던 건물인 최경전과 왕궁으로 들어가는 문루인 신봉문, 창남문만을 원상대로 복구하여 고려박물관으로 리용하고 그밖의 옛 건축지들은 모두 발굴하여 원상대로 보존하도록 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따라 공화국의 력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고려왕궁터 만월대에 대한 발굴사업을 진행하여왔으며 6. 15이후부터는 남조선력사학자들과 공동발굴사업을 진행하여왔다.

북측 40명, 남측 10명으로 구성된 공동발굴단은 2007년 5∼6월 만월대 서부 건축군가운데 1만평에 대한 시굴을 거쳐 9∼11월 1천평을 본격발굴한 결과 11동의 건축물기초와 회랑, 배수구 등을 찾아냈다. 그 과정에 고려청자와 청자기와, 명문기와 등 고려시대 왕궁생활을 엿볼수 있는 유물도 수많이 발굴하였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서는 여기에서 발굴된 유물을 소개선전하기 위해 유물전시회를 열었고 남조선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곳 유적과 유물 약 2 000점을 소개한 도서를 출판하였다.

고려시기 우리 인민의 창조적재능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인 고려왕궁터-만월대유적은 앞으로 원상그대로 복구되여 조선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갈것이다.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유교관계유적인 숭양서원은 고려의 대관료였고 유능한 군사가, 외교가였던 포은 정몽주(1337-1392)가 살던 집자리에 처음 세웠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리조시기인 1573년(선조 6년)에 세운 리조봉건시기의 교육기관의 하나이다.

여기서는 량반자식들에 대한 봉건유교교육과 함께 고려시기의 정몽주, 우현보(1333-1400, 고려때의 시중)와 리조시기 이름있는 학자들이였던 서경덕(1489-1546), 김육(1580-1658) 등을 제사지냈다.

1575년(선조8년)까지 정몽주의 시호를 붙여 《문충당》이라고 부르던것을 국왕의 사액(서원의 이름을 쓴 액자를 내려보내는것)으로 숭양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였으며 1864년(고종1년)의 대대적인 서원철페때에도 이 서원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76(1987)년 8월 개성시안에 있는 옛 건물들의 실태를 료해하시면서 숭양서원을 잘 보수정비하여 관광객들에게 보여줄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침략자들에 의하여 심히 파괴되였던 숭양서원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와 공화국의 옳바른 문화유물보존정책에 의하여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형식과 건축구조를 그대로 보존하고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옛 모습을 다시 찾게 되였으며 훌륭히 보존되게 되였다.

오늘 력사적원상을 살려 잘 보수정비된 숭양서원은 남조선과 해외의 동포들, 외국인들이 즐겨찾는 관광대상의 하나로 되고있으며 오랜 세월 사람들의 의식속에 사라졌던 황진이의 묘와 박지원의 묘와 같은 개성지구의 많은 문화유적유물들도 옛 모습그대로 잘 꾸려지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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