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옛 모습을 되찾은 대성산의 문화재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던것만큼 평양일대에는 고구려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많습니다. 대성산만 보더라도 거기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고 큰 성의 하나인 대성산성이 있고 그 기슭에는 고구려의 왕궁이 자리잡고있던 안학궁터가 있으며 수많은 고분들이 있습니다.》

 김 정 일

 

1

왕궁방위성-대성산성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사철 푸른 소나무가 온 산을 덮고있어 이른 봄에도 늦은 가을에도 변함없이 푸르게만 보이는 대성산의 풍치가 류달리 아름답게 안겨와 그 경치를 두고 《룡산만취》라 하였으며 《평양8경》의 하나로 꼽았다. 사철 푸른 소나무숲과 함께 철따라 이채를 띠는 갖가지 꽃들이 만발하여 대성산의 조화로운 자연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대성산은 경치보다도 동방에 그 강성함을 떨치고 슬기로운 재능과 찬란한 문화를 세계에 떨친 고구려의 옛 수도가 자리잡았던 유서깊은 곳인것으로 하여 더욱 자랑높다.

오랜 력사를 가진 대성산에는 우리 선조들이 이룩하여놓은 대성산성을 비롯하여 고구려왕궁터인 안학궁터와 고분 등 고구려시기의 발전된 문화를 보여주는 력사유적과 유물들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것중의 하나인 대성산성은 근 1 000년간 존재하여온 고구려의 유구한 력사와 함께 전해오는 오랜 유적이다.

이 산성은 3세기 중엽부터 쌓아지기 시작하여 중요한 군사시설의 하나로 리용되였으며 427년 평양천도이후에는 고구려의 수도방위성으로서 정치, 군사적으로 더 큰 의의를 가지게 되였다.

대성산성은 외적을 막기에는 유리하고 밖의 적들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한 위치에 자리잡고있다. 대성산의 북쪽에는 높은 산들이 련련히 잇닿아있고 동, 서, 남의 세면은 강으로 둘러막혀있어서 외적이 여기로 침입하자면 험한 산들을 넘거나 이 강들을 건너야만 하였으니 그것만 하여도 적의 전투력을 적지 않게 소모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되였다. 이런 좋은 지형을 택하여 대성산성을 쌓은것을 보면 고구려의 지리학과 군사지형학이 높은 수준이였음을 잘 알수 있다.

대성산성은 을지봉을 비롯하여 장수봉, 북장대, 국사봉, 주작봉, 소문봉의 6개 봉우리를 련결하여 산릉선을 따라 쌓았다. 성의 둘레는 7 076m나 되며 성벽의 총길이는 9 284m가 된다. 소문봉과 주작봉사이, 주작봉과 국사봉사이에는 큰 골짜기가 있는데 2중성벽, 3중성벽을 쌓은 곳이 바로 이 두 골짜기의 입구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높은 산릉선이 큰 골짜기를 얼싸안고 빙 둘러선 지형을 《고로봉》지형이라고 하며 그런 지형지점에 산릉선을 따라 쌓은 산성을 《고로봉식산성》이라고 한다.

대성산은 성안에 물이 풍부한것이 하나의 장점이다. 산속에 흐르는 물줄기는 없지만 도처에서 샘이 솟고 우물과 박우물이 많으며 사철 물이 차넘치는 큰 못들도 있어서 물부족을 느끼지 않는다. 이처럼 물이 많은것은 수도방위성인 이 산성의 생명력과 전투력을 보장하는 하나의 중요한 조건으로 되였다.

우리 선조들은 온 나라의 많은 산들에 산성을 건설하였지만 그 모든 산들가운데 대성산과 같이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은 별로 없었다. 고구려사람들은 이런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여기에 크고 견고한 산성을 쌓았다. 그러면서 종래 《구룡산》 또는 《로양산》이라고 불러오던 산이름도 《큰 성이 있는 산》이라는 뜻에서 《대성산》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오늘도 대성산에 오르면 민족의 존엄을 지켜 목숨도 서슴없이 바친 선조들의 무훈을 전하는듯 옛 모습그대로 생생한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고 고색창연한 루각들과 태고적전설을 담아 출렁이는 호수들이 눈앞에 안겨와 흘러간 수천년세월의 물결을 거슬러 지난날의 력사의 자취를 더듬게 된다.

풍파사나운 력사의 흐름속에서 대성산의 력사유적과 유물들은 오래동안 버림받아왔었고 이끼돋은 성돌만이 무성한 잡초속에 파묻혀 나딩굴었었다.

그러했던 대성산의 력사유적유물들이 옛 모습을 되찾고 사람들에게 우수한 민족문화전통과 애국주의정신을 심어주는 력사의 증견자로 된것은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손길이 미치게 된 그날부터였다.

대성산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력사유적과 유물들에 대하여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리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대성산성의 돌들이 아직 남아있는것만큼 조사발굴사업을 하여 산성벽도 일부 구간을 복구하고 성문도 원상대로 복구하여야 한다고 그리고 옛날 장수봉에 있던 정각도 다시 본래모습대로 지어야 한다고 교시하시면서 그 조사발굴과 복구를 위한 여러차례의 협의회도 마련해주시고 몸소 현지에 나오시여 구체적인 과업과 방도들을 환히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뜻을 빛내이시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대성산성의 조사발굴에 청년대학생들이 앞장서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주체50(1961)년 5월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대성산일대 유적발굴과 관련한 귀중한 말씀을 하시면서 어떤 학생들은 온 나라가 사회주의건설로 들끓고있는 때에 옛날유적이나 발굴하여 무엇하겠는가고 생각할수도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력사유적과 유물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민족의 재보이며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발전된 문화를 전해주는 귀중한 유산이라고, 우리는 선조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더 많이 발굴하고 잘 보존관리하여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그때로부터 두달이 지난 7월 31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함께 대성산을 몸소 찾으시여 《대성산성은 고구려사람들의 뛰여난 슬기를 보여주는 력사유적이다》라는 뜻깊은 담화를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구려는 427년에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왔는데 당시의 수도자리는 오늘의 대성산일대였다고 하시며 대성산남쪽기슭의 안학궁성은 왕궁자리였고 대성산성은 이 왕궁을 보위하는 방위성이였다고 그 유래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였다.

계속하여 고구려는 평양천도이후에 강력한 국력에 의거하여 삼국의 통일을 거의 완성단계에 올려세웠으며 대외적으로 높은 위세를 떨치였다고 하시면서 대성산성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 지금은 터만 남아있지만 성터와 성돌만 보아도 고구려사람들이 나라의 방위력을 튼튼히 다지기 위한 일에 얼마나 큰 힘을 넣었으며 고구려가 얼마나 강대한 나라였는가 하는것을 능히 짐작할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을 들으며 대학생들은 동방천년국으로 자랑떨친 고구려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 고구려사람들의 슬기와 애국정신에 대하여 다시한번 깊이 돌이켜보았다.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으로 충만된 그들을 둘러보시며 고구려사람들의 뛰여난 성축조기술에 대하여서도 하나하나 설명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대성산안에 99개의 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더 고증해보아야 하겠지만 이런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성안에 못이 많았던것만은 틀림없다고, 성안에 못을 많이 판것은 중요하게 성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고, 고구려사람들은 대성산성안에 더 많은 물을 저축해두기 위하여 물줄기가 있는 곳에는 못을 만들어 물을 잡아두고 물이 없는데서는 땅을 깊이 파서 인공적으로 물주머니를 만들어놓았다고, 이것만 보아도 고구려사람들이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얼마나 힘썼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구려에는 대성산성과 같은 훌륭한 산성이 많았다고 하시면서 대성산성을 비롯한 우리 나라의 력사유적과 유물들은 우리 민족의 오랜 력사와 선조들의 뛰여난 재능을 력사적으로 전해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므로 앞으로 이러한 력사유적과 유물을 더 많이 발굴하고 잘 보존관리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히 강조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53(1964)년 9월초 또다시 대성산을 찾으시여 이 일대 유적발굴 및 복구개건과 관련한 귀중한 말씀을 주시였으며 그로부터 며칠후인 9월 16일에는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옳은 리해와 관점을 가지고 대성산성을 비롯하여 평양시주변에 있는 력사유적들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적극 추진할데 대하여 다시금 강조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원대한 구상과 세심한 지도에 의하여 대성산성안에 있는 대성산 남문터와 170여개의 못자리, 집자리를 찾아내여 정리하였으며 그에 대한 고증사업을 진행하여 고구려사연구와 대표적인 유적들의 원상복구개건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내게 되였다. 또한 대성산성의 일부(소문봉)와 장수각, 장수못 등 많은 유적유물들이 발굴 및 복원되였으며 대성산 남문이 훌륭히 복구개건되고 대성산성과 결부되여있는 록족부인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많은 전설들이 발굴되였다. 이렇듯 민족의 슬기와 기상을 전하는 유적유물을 모두 찾아내여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가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에 의하여 대성산성을 비롯한 민족문화유산들이 더 많이 발굴되고 더 잘 보존될수 있었다.

 

2

고구려의 왕궁유적-안학궁터

 

 

평양의 대성산 남쪽기슭에는 안학궁터라고 불리우는 고구려의 왕궁유적이 있다.

안학궁은 지금으로부터 1 500여년전 고구려의 장수왕때 20여년간에 걸쳐 근면하고 재능있는 고구려인민들의 고귀한 로력의 대가로 건설되였다.

대성산성을 배경으로 38만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 들어앉은 웅장화려한 안학궁성안에는 아름이 넘는 붉은 기둥에 떠받들리여 일떠선 산악같은 궁전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안학궁이라는 이름은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있다.

《안학》이라는것은 안 혹은 안쪽을 이르는 《아낙》이라는 고유한 우리 말을 리두식으로 표기한것이다. 나라의 맨 아낙 즉 나라의 제일 중심인 수도(수도성)를 의미하여 그렇게 부른것이다.

안학궁의 이름은 이 성이 자리잡은 위치와도 련관되여있다. 안학궁의 바로 뒤산이 학이 편안히 쉬고있는 형세를 하고있어서 그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활짝 벌린 학의 날개와도 같이 하늘높이 추켜들린 추녀밑의 오색단청은 령롱한 무지개가 걸린듯 했고 여러가지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막새들과 장식기와로 이은 지붕, 황금으로 장식한 문들과 현란한 란간들은 고구려왕궁의 웅장미를 돋구게 했다.

안학궁성의 넓은 앞뜰에서는 고구려장수들이 무예를 자랑하며 승부를 다투는 경기도 자주 벌리군 하였다.

그 어느날에는 저멀리 변강에 있는 한 고을의 우두머리인 태수가 달려와 성돌밑에 엎드려 외적이 침입할 기미가 보인다는 보고를 하여 궁성에서는 그에 대처하여 나라를 방위할 대책을 세우노라 분주했고 또 어느날에는 이웃나라들에서 보내온 사신을 만나 국교를 론하기도 하였다.

무더운 여름의 뙤약볕밑에서 김을 매는 농부들이 타들어가는 곡식포기를 부여잡고 한숨짓고있을 때 궁성의 련못가 휘늘어진 수양버들밑에서는 왕자와 공주가 련꽃구경에 해저무는줄 몰랐다.

그후 586년에 고구려가 왕궁을 오늘의 평양성으로 옮기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안학궁은 흙사태속에 파묻혀 페허로 되였으며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도 사라져갔다.

지난 시기 사대주의에 물젖은 통치배들과 어용학자들은 저들의 반동통치를 미화하고 사대망국정책을 감싸기 위하여 우리 나라 력사와 민족문화발전에서 주축이였던 고구려력사를 왜소화하려고 하였다.

더우기 일제는 조선민족이 창조한 우수한 문화유산들을 파괴략탈하였을뿐아니라 그를 외곡말살하고 우리 나라 력사를 위조하는 가증스러운 행위를 감행하면서 안학궁터도 고구려의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지어는 고구려가 당시 매우 강대한 나라였다는 엄연한 력사적사실까지 부인하려고 책동하였다.

이로부터 안학궁터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전면적으로 진행하는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외곡서술된 과거력사를 주체적인 립장에서 재정리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고구려의 유적을 더 많이 발굴하여 유구한 고구려사를 빛내여주시려는 원대한 구상을 안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천년강국 고구려의 왕궁이였던 안학궁을 복구할데 대한 여러차례의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으며 그 사업을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주체47(1958)년 4월 대성산일대의 유적발굴과 관련한 협의회를 지도하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금 안학궁터에 있는 부락은 궁터밖으로 옮기도록 하고 궁터를 모두 발굴하여 고적을 원상대로 복구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날 안학궁터 발굴사업이 한 10년은 걸려야 끝낼수 있다고 하는 어느 한 고고학자의 이야기를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설공사장들에서 고적발굴을 선행하고 전문적인 고적발굴대를 조직하며 발굴사업을 전인민적운동으로 빨리 다그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력사학자들과 김일성종합대학 교원, 학생들은 안학궁터에 대한 발굴사업을 진행하여 천수백여년전 고구려시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주추돌과 여러가지 문양이 있는 기와, 막새를 찾아냈으며 고분에서 벽화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주체50(1961)년 5월 24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교원, 학생들이 대성산일대 력사유적들에 대한 고고학실습과 발굴과정에 많은 성과를 거두고있는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면서 조사발굴에서 이룩된 성과에 절대로 자만하지 말고 대성산일대 유적들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발굴을 계속 힘있게 벌릴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앞으로 안학궁을 비롯한 대성산일대의 고적을 전면적으로 발굴정리하면 고구려의 수도문제와 안학궁문제가 더욱 명백히 밝혀질것이며 강대하였던 고구려의 력사와 문화에 대하여 많은것을 새롭게 알수 있을것이라고 하시였다.

그후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교원, 학생들은 안학궁터에 대한 발굴사업을 더욱 힘있게 밀고나갔다.

그들은 안학궁터에서 30여개소의 성벽자리, 수십개의 궁궐자리, 여러개의 성문자리, 가로세로난 길들, 수많은 련못자리, 해자자리, 수천개나 되는 주추돌자리들을 발굴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실로 안학궁의 궁전건축부지는 옛 건축물부지로서는 처음보는 대규모의것이였으며 목조건축유적으로서는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방대한것이였다. 특히 중심건물인 중궁의 제1호궁전은 앞면이 87m, 옆면이 27m로서 옛 건물로서는 제일 큰것이였다.

고려시대의 왕궁인 개성의 만월대궁전의 길이가 40m이고 현재 남아있는 리조시기의 왕궁인 서울 경복궁의 길이가 30. 1m인것을 보면 안학궁의 중궁 1호건물의 크기를 짐작할수 있을뿐아니라 궁전전체의 웅장함과 여기에 반영된 고구려의 발전된 건축술을 충분히 리해할수 있다.

안학궁발굴과정에 궁터에서는 독, 항아리, 단지, 버치, 옹배기, 대야, 벼루, 유리장식품, 활촉, 못 등의 유물들이 1만 5 000여점이나 발굴되였다. 그리고 푸른빛, 회색빛 기와쪼각들과 유리제품쪼각, 적자색빛갈의 벽돌도 많이 나왔다. 특히 그 벽돌은 1 5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모서리가 조금도 닳지 않았을뿐아니라 칼날처럼 모가 선채로 있었고 쇠소리가 나는데 강도가 매우 높았다.

고구려사람들의 막대한 로력과 지혜로 건설되였던 안학궁터를 비롯한 대성산일대의 방대한 유적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끝마친 김일성종합대학 교원, 학생들은 그에 기초한 복구계획을 세워 경애하는 장군님께 보고드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72(1983)년 7월 25일 몸소 안학궁형성사판을 보아주시면서 그 복구와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으며 필요한 대책들도 세워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친히 안학궁건설부지를 정해주시고 설계에 앞서 학술고증사업을 진행하도록 하시였다. 이와 함께 안학궁건물들의 기둥과 보가운데서 작은것들은 나무로 하고 큰것들은 세멘트로 하면서 나무질감이 나게 마감처리를 잘하도록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건설일군들이 대성산기슭의 고구려왕궁이였던 안학궁터에 여러가지 건물을 짓자고 하였을 때에도, 식물학자들이 거기에 유지림을 조성하자고 제기하였을 때에도 모두 승인하지 않으시고 비록 그 유적이 고구려왕궁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슬기와 기상이 담겨져있다고 하시면서 왕궁을 복구하고 장차 거기에 고구려시기의 유물을 진렬하도록 하라고 강조하시였다.

그리고 안학궁복구를 위한 설계기술집단도 꾸려주시였으며 여러차례에 걸쳐 안학궁은 동방의 강력한 나라로서 발전된 문화를 자랑하고 나라의 위력을 세상에 떨치던 고구려를 잘 알게 하는 력사유적이라고, 우리는 앞으로 안학궁을 복구하여야 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와 가르치심에 의하여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있던 대성산의 유적들이 원상복구되였으며 앞으로 안학궁도 옛 모습그대로 그 터전우에 솟아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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