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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족의 자랑-국보적인 고구려벽화무덤
《안악3호무덤과 강서세무덤을 비롯한 고구려고분의 벽화들만 보아도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예술적재능과 고구려사람들의 다양한 생활면모를 잘 보여주고있습니다.》 김 정 일
안악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고구려시기의 안악고분은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와 오국리의 언덕기슭에 자리잡고있다. 이 무덤은 세개로 되여있는데 1949년에 력사학자들이 발굴하였다. 력사학자들은 이 세무덤을 발굴한 순서에 따라 안악제1호무덤, 안악제2호무덤, 안악제3호무덤이라고 이름을 달았다. 안악지방에서 3기의 고구려벽화무덤이 련이어 발굴된 사실은 세상사람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고구려시기의 발전된 문화를 고증할수 있는 또 하나의 산 력사자료가 세상에 나타났기때문이다. 이 무덤들은 천수백년이 지나는 동안 세월의 눈비를 맞으면서도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있었다. 안악고분벽화는 고구려시기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예술적재능과 발전된 고구려의 문화, 당시의 사회계급관계, 사람들의 생활풍속 등을 생동하고 다양하게 담고있어 우리 나라 력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여주는 매우 가치있는 민족문화유산으로 되고있다. 안악에 있는 세 무덤중에서 3호무덤은 가장 크고도 화려하여 고구려벽화무덤의 대표적인 무덤이라고도 할수 있다. 안악3호고분에는 세련된 필치로 그려진 벽화가 있는데 그 그림은 무덤의 주인공이 살아있을 때의 생활을 형상한것이다. 여섯개나 되는 굉장히 큰 방으로 이루어진 이 고분은 벽에 화려한 그림이 장식되여있어 지하궁전을 련상케 한다. 무덤의 벽화들은 주인공의 초상을 중심으로 수백명의 각계각층 인물초상들과 그들의 생활모습, 생활도구들을 하나의 대화폭으로 펼쳐보이고있다. 그림들이 화려하며 조화된 그 색채와 능숙한 구상 등은 해당 시기의 실로 놀랄만 한 예술적솜씨를 보여주고있다. 이 벽화를 보느라면 설명없이도 당시 고구려의 지배계급과 인민들의 생활형편, 생활세태를 련상할수 있다. 그런데 이 벽화의 대화폭을 두고 고고학적고증을 하던 력사학자들속에서는 한때 론쟁이 벌어졌었다. 론쟁의 초점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는것이였다. 어떤 학자들은 무덤의 주인공이 연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고분의 벽화에 《동수》라고 하는 인물의 래력을 밝힌 묵서가 있었기때문이였다. 동수는 원래 연나라사람으로 알려져있었다. 그런데 그가 고구려사람으로 귀화하여 고구려왕의 총애를 받아 태수의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바로 동수의 래력을 밝힌 묵서를 유력한 근거로 하여 《묘주동수설》을 들고나왔던것이다 《묘주동수설》을 주장한 일부 학자들은 사대주의적관점에서 안악고분의 벽화를 본데로부터 강성했던 고구려의 력사마저 무시하고 당시 고구려사람들이 연나라에서 온 동수라는 귀화인을 왕처럼 떠받들었으며 이 무덤도 왕의 무덤처럼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던것이다. 물론 그러한 사대주의사상에 물젖은 《묘주동수설》을 반대하는 학자들도 없은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벽화무덤의 주인공이 연나라사람이 아니라는것을 고고학적으로 고증할만 한 자료를 찾아내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던 주체47(1958)년 3월 하순 안악제3호무덤을 찾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무덤의 양식과 벽면에 그려져있는 인물들의 초상, 거기에 씌여있는 글자풀이를 통하여 그리고 무덤안칸의 동쪽벽에 있는 무용도 등을 분석하시며 안악제3호고분은 우리 민족의 고귀한 유산이라고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51(1962)년 1월 몸소 현지에 나오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날씨가 찬데 잠간이라도 좀 몸을 녹이셔야 하겠다는 일군들의 간청도 마다하시고 곧장 고분안으로 들어가시여 벽화들을 주의깊게 살펴보시였다. 여러 벽면들에는 벽화 《행렬도》를 비롯하여 인물도들과 풍습도들이 펼쳐져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다보니 적지 않게 퇴색되기는 하였으나 그 기법은 간결하고 선명한 전통적인 조선화의 기법이 틀림없었다. 벽화에서 화려한 수레에 탄 국왕이 요란한 고취악을 울리는 속에 여러가지 행색을 한 위병대렬의 보호를 받으며 행차하고있는 《행렬도》는 정말 볼만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행렬도》에서 수레앞에 나붓기는 기발이며 왕관을 유심히 보시다가 관리원에게 이 고분은 누구의 무덤인가고 넌지시 물으시였다. 오랜 력사전문가인 관리원이 인차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조선사람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고 다른 나라 사람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고 말씀드리였다. 역시 그의 대답은 학계에서 말하는 소리와 같았다. 장군님께서는 벽화를 다시금 살펴보시였다. 벽화의 회화적기법은 물론 행렬의 기발과 인물의 의상은 틀림없는 고구려의것, 그것도 왕의 행차를 상징하고있음이 분명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확신에 넘친 음성으로 수레앞에 나붓기는 저 기발은 이 무덤의 주인이 고구려의 왕이라는것을 확증하여주는 《성상번》이라는 표시기라고 하시면서 무덤이 발굴되던 초기에 일부 사람들속에서 무덤의 주인이 조선사람이 아니라는 론의가 있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론의였다, 안악고분은 조선사람의 무덤이다, 우리는 방금 왕이 흰 덧관을 쓰고 앉아있는 그림을 보았다, 옛 기록에 의하면 흰 덧관은 고구려왕만이 썼다고 한다, 그것만 보아도 안악고분은 고구려무덤이라는것을 알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우리 나라 력사에 대한 심오하고 해박한 지식으로 과학적근거를 내놓으시며 결연히 하시는 그이의 말씀에 관리원은 내심 놀랐다. 오랜 기간 력사연구와 민족문화유산발굴사업에 종사해 온 그였지만 기발과 왕관문제는 그렇게까지 심오하게 해명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진리는 알고보면 단순하고 가까이에 있다더니 이렇게 쉽게 해명되는것을 10여년간이나 합의를 보지 못하고 갑론을박하며 세월을 보낸 생각을 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자책감에 얼굴을 들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시다가 안악고분벽화는 묘사된 생활의 특징으로 고구려의 력사를 고증해준다고 하시면서 안악고분을 조선사람의 무덤이 아니라고 한것은 사대주의에 물젖은 사람들이 꾸며낸 허튼소리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이 무엇때문에 제 나라 땅을 둬두고 남의 나라 땅에 와서 묻혔겠습니까, 예로부터 사람들은 살아서 제 나라로 가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제 나라 땅에 묻히는것을 마지막소원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나라 왕이 제 나라 땅에 묻히지 않고 우리 나라에 와 묻힐리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왕노릇을 한적도 없었습니다, 옛무덤에 그려진 벽화의 풍속도 고구려의 풍속이며 따라서 안악고분자체도 고구려의 무덤입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인간의 본성과 생활의 리치로 보아도, 벽화의 내용과 풍속으로 보아도 더는 달리 볼수 없는 고구려의 무덤이라는 말씀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전에 력사박물관에 가서 안악고분의 벽화를 본 일이 있는데 역시 실물을 보니 더욱 생동하고 생각되는바가 많다고, 고분자체도 의의있지만 벽화는 고구려력사를 연구하는데서 귀중한 자료로 될것이라고 하시면서 안악고분을 돌아보면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있던 뛰여난 예술적재능과 건축술에 대하여 잘 알수 있고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일군들에게 나라의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인 안악고분을 더 잘 관리하며 민족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사업을 계속 강화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다녀가신지 얼마 안있어 력사학자들은 이 고분에 대한 연구사업을 더욱 심화시켜 안악3호무덤이 연나라 동수의 무덤이 아니라 4세기 중엽 고구려왕의 벽화무덤이라는것을 고증하는 수많은 사료들을 찾아내였다. 그후 황해남도 신원군 아양리, 월당리에서 발굴된 큰 도시유적을 통해 고구려의 부수도였던 남평양이 장수산일대에도 있었다는것이 판명되였고 371년에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장의 후방이였던 안악에 안치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안악제3호고분은 동수가 연나라에서 망명해온후 오래동안 섬기였던 고구려 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것이 움직일수 없는 사실로 확증되게 되였던것이다.
천수백년의 력사를 가진 강서고분
근면하고 지혜롭고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고구려사람들이 후손들에게 남긴 수많은 가치있는 문화유산들중에는 천수백년의 력사를 가진 강서고분도 있다. 평양을 유유히 감돌아흐르는 대동강을 따라 서해로 내려가노라면 강서땅이 나진다. 이곳에 고구려시기 고분인 세무덤이 있다. 강서땅에 있는 세개의 옛무덤이라 하여 강서세무덤이라고 부른다. 남조선과 해외에 사는 동포들중 력사나 지리학을 오래 연구해온 사람들에게는 강서세무덤이 결코 생소한것이 아니라고도 말할수 있다. 왜냐하면 오래전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라는 책에 들판 지평선에 표주박을 포개놓은듯 한 강서세무덤의 전경사진이 실려있어 늘 그것을 보고 익혀왔기때문이다. 세개의 무덤으로 떼를 이룬 강서세무덤은 삼묘리벌판에 자리잡고있다. 이 무덤떼는 크기가 거의 비슷한 3기의 돌칸흙무덤이 정삼각형으로 배치되여있다. 맨 앞쪽에 놓여있는 제일 큰것이 강서큰무덤이고 그뒤에 나란히 놓인 두 무덤가운데서 서쪽의것이 강서중무덤, 동쪽의것이 강서작은무덤인데 멀리서 볼 때는 탄력있게 부풀어오른 대지의 젖가슴인양 포근함과 아늑함이 동시에 느껴지게 한다. 강서고분의 벽면에는 아직도 옛 자취를 그대로 보여주는 벽화가 그려져있어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있다. 특히 강서큰무덤은 사신도가 그려진 외칸무덤으로 그림의 기법과 묘사력이 고구려고분벽화의 최고수준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희세의 명작이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동, 서, 남, 북 사방을 지키는 사신을 믿는 종교가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무덤안에 사신을 그리면 무덤에 묻힌 사람을 지켜준다고 믿었던것이다. 북쪽벽에 그린 현무는 균형이 잘 잡힌 몸매와 잘 째인 거북잔등무늬로 하여 마치 산 거부기를 보는듯 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거부기의 몸뚱이에 감긴 뱀은 거부기의 앞뒤다리사이를 지나 등우로 가볍게 반원을 그리면서 대가리를 돌려 거부기와 마주보며 혀를 내밀고있는것으로 형상되였다. 동쪽벽의 청룡은 대가리를 쳐들고 눈을 크게 부릅떴으며 아가리를 딱 벌린채 혀를 내밀고 네 다리를 뻗쳐 방금 달려나올듯 한 자세이다. 몸뚱이는 꿈틀거리는 뱀처럼 생겼다. 벽면의 대각선상으로 뻗은 꼬리는 매우 률동적이다. 비늘로 가득찬 몸뚱이는 5색을 아롱지게 칠하여 립체감을 나타내게 하고 가슴에는 불꽃이 휘날리게 하였으며 발가락이 넷인 다리들에는 흰 깃을 그려놓았다. 청룡과 비슷한 자세로 구름을 차고 달리는 서쪽의 백호(흰 범)그림은 기운차 보이며 가물거리는 산을 멀리 발밑에 떨구고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남쪽의 주작의 모습 또한 황홀하다. 천정의 그림들은 다양하면서도 모두 화려하다. 평행고임 첫단 옆면에는 인동넝쿨무늬를 그렸다. 평행고임의 둘째단에는 비천과 신선을 그렸다. 날개옷을 입은 비천은 연한 보라빛의 포동포동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선약을 담은 그릇을 들고 피리를 불면서 날고있다. 신선은 날개 달린 옷을 입고 구름속을 날아가는데 그뒤에는 나무숲으로 뒤덮인 중중첩첩한 산이 있고 산가운데는 붉은 바위가 보인다. 3각고임의 밑면들에는 활짝 핀 련꽃을 우에서 내려다 본 모양으로 그렸으며 3각고임의 옆면들에도 련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칭으로 《기린》과 《봉황》, 이상한 짐승 등을 배치하였다. 천정의 중심에는 한마리의 황룡이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듯 룡틀임을 하고 아래를 지켜보는데 이 그림은 무덤의 주인공이 왕이라는것을 상징한듯 하다. 이 무덤의 벽화에는 붉은색, 초록색, 노란색, 보라색, 흰색, 검은색, 밤색 등 다양한 색을 썼다. 그림은 먼저 밑그림을 그리고 그우에 색을 칠한 다음 힘있는 먹선으로 테두리를 쳐서 완성하였다. 붓은 부드러운것으로 혹은 가늘게 혹은 굵게 때로는 힘있고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꼼꼼하게 그렸다. 그리하여 무덤칸이라는 크지 않은 공간에 그처럼 다채롭고 아름답게 생동하고 힘있게 그림을 그려 천수백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강서고분을 찾으신것은 주체50(1961)년 3월 26일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강서고분은 축조기술과 회화기법에서 가장 우수한것으로 꼽히고있다고 하시면서 고분을 돌아보면 당시 고구려문화의 발전수준을 잘 알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고분을 돌아보시며 깊은 관심을 돌리신것은 무덤의 벽화였다. 장군님께서는 강서고분의 벽화들은 잘 다듬은 돌에 직접 그린것이라고, 중무덤의 벽화와 큰무덤의 벽화는 그 주제가 서로 비슷한데 작은 무덤에는 벽화가 없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벽화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는 다 방위신으로 묘사한 환상적인 동물들인데 벽화가 천수백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명하다고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벽화에는 고구려사람들의 진취적인 기백이 반영되여있다고 하시면서 강서고분의 벽화는 세계적으로도 그 명성이 높다고 긍지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일군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색을 모르며 그 내용과 화풍, 채색이 독특하고 생동성에 있어서 중세기초 동양화의 정수를 이루는 고분벽화를 만든 고구려사람들의 슬기와 재능에 대하여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강서고분을 돌아보시면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구려사람들의 돌가공술과 건축술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강서고분안에는 돌로 쌓은 무덤칸이 있는데 그우를 진흙과 석회를 잘 섞어 단단히 다지면서 쌓아올렸고 마지막에는 흙을 다져 덮었다. 강서큰무덤만 보아도 무덤무지는 한변의 길이가 50m이고 높이는 8. 7m로서 안길과 안칸으로 된 외칸무덤이며 무덤칸은 잘 다듬은 화강석판돌로 만들었다. 무덤안길은 길이 3m가량 되며 그 너비와 높이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차츰 좁고 낮아졌다. 안칸의 평면은 정방형으로서 그 동서길이는 3. 15m, 남북길이는 3. 18m이며 바닥에서 천정까지의 높이는 3. 5m이다. 안칸의 바닥은 진흙에 석회를 섞어 단단히 다지고 그우에 잘 다듬은 큰 판돌 두장을 깔아서 만들었다. 네벽의 밑부분에는 길고 가로자름면이 네모난 굽도리돌을 댔다. 안칸의 벽면은 길죽한 판돌 세장을 수직으로 포개여 쌓았다. 안칸의 천정은 평행3각고임형식으로서 4각형으로 두 단을 짜올리고 그우에는 두 단의 3각고임을 하였다. 고임의 매 옆면은 모두 조금씩 안으로 기울어졌다. 천정의 맨 꼭대기에는 큰 판돌을 한장 올려서 마감하였다. 안칸에는 남북으로 길게 두개의 관대가 놓여있다. 이 무덤의 무덤칸은 고구려사람들의 우수한 건축술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 무덤은 당시로서는 높은 과학기술적타산에 기초한 치밀한 설계와 능숙한 시공, 세련된 돌다루기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무덤안칸은 구조적으로 째여있을뿐아니라 구성상효과도 많이 고려되여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강서고분을 통하여 고구려사람들의 높은 건축술을 엿볼수 있다고 하시면서 무덤을 쌓은 돌의 맞물림을 보면 당시의 돌가공기술과 건축술이 아주 높았다는것을 알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우리는 천수백년의 력사를 가진 강서고분을 보면서 우수한 력사문화유산을 가지고있는데 대하여 응당한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선조들이 남겨놓은 력사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고 옳게 계승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리고 강서고분을 원상대로 잘 보존관리하여야 한다고 절절히 당부하시였다. 그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강서큰무덤과 중무덤의 영구보존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풀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들을 취해주시였다. 우리 나라 중세문화유산가운데서 특출한 가치를 가지는 문화적재보인 강서세무덤을 원상대로 잘 보존관리할데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를 심장깊이 새긴 문화보존부문의 일군들과 과학자들은 공기, 온도, 습도, 미생물 등에 의한 일련의 물리화학적 및 생물학적변화를 막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커다란 성과를 달성하였다. 오늘 강서세무덤은 국보적유적으로 잘 보존관리되고있으며 이곳을 찾는 참관자들과 남조선과 해외의 동포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고있다. 강서세무덤을 찾아왔던 남조선의 령남대학교의 한 교수는 고분벽화를 통해본 고구려문화에는 어떤 쇠퇴나 하강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면서 《신라에 석굴암이라는 조각이 있다면 고구려에는 강서큰무덤이라는 회화가 있다고 응답해도 좋을것 같다. 고구려는 오직 강서큰무덤 하나만으로도 그 찬란했던 문화와 강성했던 국가적기상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격찬하였다. 평양방문후 남조선에 돌아간 그는 세계미술사의 무대에 당당히 내세울수 있는 민족문화유물 10점을 제시하면서 고구려고분벽화로 강서큰무덤의 현무도를 꼽기도 하였다.
덕흥리벽화무덤
안악3호무덤의 벽화는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회화작품이 위주라면 강서세무덤의 벽화는 사람들이 머리속에 그린 환상적인 동물들의 모습이 기본으로 되고있다. 이와는 달리 덕흥리무덤의 벽화는 생활풍습을 생동하게 반영하면서도 문자자료를 가지고있는것이 특징이다. 안악3호무덤도 글자기록을 가지고있지만 그 무덤이 몇년도에 만든 누구의 무덤인가를 정확히 밝혀놓은것은 덕흥리벽화무덤이 처음이다. 결국 덕흥리벽화무덤은 모든 고구려벽화무덤의 기준작이 되는 기념비적인 유물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남조선과 해외에서 조선의 력사나 민속, 미술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속에서 덕흥리벽화무덤이 가지고있는 명성과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그들은 고대사, 미술사, 민속학 등에 대한 저서에서 이 벽화무덤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그 책은 엉터리이거나 1978년이전에 나온 낡은 책이라고 인정하고있다. 공화국에서 덕흥리벽화무덤을 발굴한것은 1976년 12월이였고 그것이 남조선학계에 소개된것은 1977년 12월 일본의 한 화보책을 통해서였다. 이렇게 남조선과 해외에 간접적으로 알려진 덕흥리벽화무덤이 고대문화사의 대표적인 유물로 떠오르게 된것은 두말할것없이 주인공의 이름과 경력 및 죽은 날자 등이 적혀있고 풍부한 벽화내용과 600여자나 되는 문자자료를 가지고있기때문이다. 408년에 만든 덕흥리벽화무덤은 강서군 덕흥리 무학산기슭의 전망이 좋은 언덕우에 자리잡고있다. 덕흥리벽화무덤은 고구려의 대신급인물이였던 《진》의것으로서 두칸무덤이다. 무덤칸은 안길, 앞칸과 안칸, 사이길로 이루어졌으며 그 방향은 남향이다. 무덤안길은 길이 1. 54m, 너비 1. 02m의 장방형평면이며 안으로 들어가면서 조금 좁아졌다. 높이는 1. 43m이다. 앞칸은 동서로 길게 생겼는데 앞칸의 서북쪽주인공 그림밑에는 길이 0. 955m, 너비 0. 55m, 높이 0. 175m 되는 제상을 놓았다. 앞칸과 안칸의 천정은 다같이 궁륭평행고임형식으로 하였는데 앞칸에서는 2단의 평행고임을, 안칸에서는 4∼5단의 평행고임을 한 우에 뚜껑돌을 덮었다. 무덤칸의 벽과 천정에는 여러가지 내용의 그림들과 그것을 설명하는 600여자의 글자가 씌여져있다. 무덤안길좌우벽에는 문지기괴물과 인물들을 그렸다. 거기에는 이 무덤의 문을 409년 2월 2일에 닫았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앞칸의 벽과 천정에는 주인공의 공로를 자랑하는 사건들, 신앙세계를 반영한 그림들과 그에 대한 설명문들이 있다. 그가운데서 가장 중요한것은 묘지인데 그것은 앞칸 북벽사이길우에 있다. 거기에는 무덤의 주인공은 진이라는 사람이고 신도(즉 오늘의 박천과 운전)지방출신으로서 건위장군과 고구려고유의 작위인 대형을 지낸 다음 순차적으로 여러 장군직과 태수직을 거쳐 유주자사를 지냈으며 나이 77살에 죽어 고구려광개토왕의 영락18년 12월 25일 이곳에 묻혔다고 하였다. 안칸에는 주인공이 자기 집에서 생활하던 장면들을 그렸다. 여기서 가장 흥미있는것은 서벽 남쪽분에 묘사된 말타고 활쏘기하는 장면의 그림이다. 출전을 기다리는 기마선수들, 말을 달리면서 앞으로, 뒤로 과녁을 쏘는 선수들, 엄격한 표정의 두 심판원과 우습강스런 표정을 지은 기록원 등 매우 재미나는 경기장면이 그려져있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를 배웠으며 민간오락과 경기들도 모두 무술을 기본으로 하던 상무정신이 강한 고구려사람들의 생활기풍을 보여준다. 안칸 북벽에는 큰집을 상징하는 장방속에 앉은 남자주인공과 그의 시중을 드는 시중군들을 그렸으며 녀자주인공은 없이 그에게 복무하는 시중군들만 그렸다. 안칸에는 또한 주인공이 타는 큰말, 여물을 먹는 말과 소, 여물을 써는 아이들, 수레와 건물들, 크고작은 련꽃 등이 있다. 이밖에 안칸의 네모서리에는 여러가지 장식무늬를 그렸다. 앞칸과 안칸의 사이길좌우벽에는 주인공부부의 나들이장면이 그려져있다. 사이길벽화에서는 고구려의 아름다운 색동치마에 긴 웃저고리를 입고 허리띠를 맨 옷차림을 한 두 녀인의 모습이 주목을 끈다. 무덤의 천정에는 해, 달, 별, 구름 등 천체들과 고구려사람들의 신앙심, 고대설화를 반영한 상상화들이 풍부한 예술적환상에 의하여 다양하고 흥미있게 그려져있다. 그중 견우와 직녀의 리별장면, 좋은 일의 상징인 《길리》, 무병장수의 상징인 《천세》와 《만세》, 의좋게 살려는 소망을 반영한 《청양지조일신량두》(비익조), 지신을 형상한 《지축일신량두》, 하늘을 날고있는 《선녀》와 《옥녀》, 《비어》를 비롯한 상상화들은 고구려인민들의 풍부한 환상과 높은 예술적재능을 보여준다. 특히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소를 몰고가는 《견우》와 검정개를 데리고 서있는 《직녀》를 형상한 그림은 견우직녀전설이 이미 이 시기에 널리 보급되여있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덕흥리벽화무덤은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벽화무덤들가운데서 무덤의 주인공과 그 축조년대를 정확히 알수 있는 유일한 무덤일뿐아니라 풍부한 벽화와 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통하여 4세기 후반기-5세기초 고구려의 강대성과 당시 동방정세의 일단을 밝혀주며 고구려의 우수한 문화와 풍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력사와 문화의 보물고이다. 강서군 덕흥리에서 고구려시기 가치있는 벽화무덤을 찾아내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빨리 발굴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현지에 강력한 학술연구집단과 발굴성원들을 보내주시고 유적유물에 대한 연구와 과학기술적인 보존관리대책을 세워나가도록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오랜 풍화작용으로 쌓여진 흙과 비물에 어지러워진 벽면을 정리하고 귀중한 자료들을 찾아내며 조사발굴과 연구사업을 진행한 끝에 이 무덤이 영락18(408년)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무덤이며 무덤의 주인공이 다름아닌 유주자사를 지낸 고구려사람의 무덤이라는것이 확증되게 되였다. 덕흥리벽화무덤이 발굴된지 3년후인 주체69(1980)년 3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최근에 우리 나라 력사학자들이 덕흥리벽화무덤연구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있다고 하시면서 력사학계가 거둔 성과는 우리 나라의 력사학자들속에서 주체적인 력사관과 과학탐구의 태도가 바로서가고있다는것을 보여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로부터 두달후인 5월 22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덕흥리벽화무덤을 비롯한 고구려벽화무덤들에 대한 참관조직사업정형을 료해하시고 정연한 참관질서를 세워주시였다. 당시 참관대상이였던 덕흥리벽화무덤과 강서세무덤에는 근로자들과 전문가, 외교대표단, 해외교포들이 적지 않게 찾아왔고 벽화모사와 사진촬영을 위하여 미술가, 기자, 촬영가들이 수많이 찾아오고있었다. 그리하여 온습도가 변하면서 무덤안에서 벽이 떨어지거나 곰팽이가 생기고있었다. 게다가 해당 부문 일군들이 관리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참관사업을 제정된 질서대로 하지 않아 벽화들에 손상을 입히고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런 실태를 깊이 료해하시고 고구려벽화무덤에 대한 참관사업을 계획화하고 옳게 통제하는 국가적인 대책을 세우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참관은 벽화원상보존에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보장되는 기간에만 조직되게 되였다. 이와 함께 벽화에 손상을 주는 내부촬영과 벽화모사는 제한하도록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고구려벽화무덤을 비롯한 력사유적을 잘 관리하여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귀중한 문화재들을 후대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시면서 문화유적과 유물 특히 옛 무덤의 벽화들을 보존관리하는데서 나서는 방도들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리하여 벽화무덤의 보존에서 가장 적합한 온습도확정, 완전밀페보장 등 벽화영구보존에서 나서는 문제들이 연구완성되게 되였으며 영구보존공사가 진행되게 되였다. 정녕 민족의 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시고 빛내여나가시려 온갖 심혈을 기울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가 있어 덕흥리벽화무덤뿐아니라 수산리벽화무덤, 약수리벽화무덤, 호남리사신무덤, 진파리4호무덤, 쌍기둥무덤, 룡강큰무덤 등 고구려벽화무덤들을 비롯한 이 땅의 문화재들이 나라의 국보로, 인류공동의 재보로 더욱 찬연한 빛을 뿌리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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