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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구려의 시조묘- 동명왕릉
《동명왕릉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서 우리 나라의 력사와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력사유적입니다.》 김 정 일 밝혀진 왕릉의 주인공
평양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60리가량 떨어진 력포구역 룡산리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울창한 소나무숲을 이룬 나지막한 동산이 있다. 아름다운 금잔디로 단장한 솔밭속에는 커다란 묘지가 있는데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 무덤을 고구려의 시조왕인 동명왕의 무덤이라고 하면서 《왕묘》라고 불렀고 이 부근을 왕릉동이라고 하였다. 이 사실에 대하여서는 15세기에 편찬된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도 중화땅 룡산에 동명왕무덤이 있다는 력사기록이 있다. 동명왕릉은 지난날 조선력사에서 가장 강대하였던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고주몽)의 무덤이다. 고구려사람들은 첫 봉건국가를 세운 건국시조 동명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를 숭배하였으며 그의 무덤을 훌륭하게 만들고 잘 보존관리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려왔다. 고구려시기에는 국력이 강하였기때문에 그 어떤 외래세력도 감히 범접을 못하였고 큰 나라를 섬기거나 숭배하는 일도 없었다. 우리 선조들은 고구려라는 광대한 령토에서 용감성과 애국심으로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근면한 로동과 지혜로 찬란한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것으로 하여 조선민족은 우리 나라의 력사에 대하여 말할 때 고구려시기를 하나의 큰 자랑으로 꼽고있으며 여기에서 민족의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는것이다. 그런데 력사의 흐름과 더불어 사대주의에 물젖은 봉건통치배들의 부패무능한 통치로 하여 국력이 점차 쇠진하여지고 우리 나라가 외래침략자들에 의하여 롱락됨에 따라 민족의 자랑인 력사유물까지도 허위적인 외곡의 장막속에 가리워 무시당하게 되였다. 동명왕릉도 한때 이 혼잡속에 깊숙이 묻혀 버림을 받아왔다. 동명왕자체를 실제인물이 아니라 한갖 전설적인 인물로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실제적인 인물로 보는 경우에도 동명왕의 무덤이 어떻게 평양에 있을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다 일제와 반동어용사가들은 동명왕은 실재한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나오는 환상적인 인물이며 동명왕릉도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소문을 크게 퍼뜨렸다. 여기에는 일제의 교활한 목적이 숨어있었다. 일본은 우리 나라보다 매우 늦게야 봉건국가를 세운 후진국가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강대함을 자랑하는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이 있다는 력사적사실을 인정한다면 저들스스로가 우리 나라보다 뒤떨어진 자기 나라 력사를 인정하는것으로 되는것이다. 일제는 이 력사적사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일제는 어중이떠중이 어용나팔수들을 긁어모아 고구려시조왕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우리 나라 력사에서 고구려시기를 외곡하려 하였다. 일제가 고구려시조왕의 존재를 부정하려 한데는 저들의 파렴치한 도적행위를 가리워보려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조선을 침략한 일제는 동명왕릉속에 있는 귀중한 문화유물들을 도굴해갔다. 이것은 조선인민의 민족적의분을 자아내게 하는 참을수 없는 강도적인 행위였다. 조선인민의 치솟는 분노를 무마시키기 위하여서는 그것이 고구려의 시조왕릉이 아니라 보통무덤이였다는 허위선전이 필요했던것이다. 이러한것으로 하여 동명왕의 무덤이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서가 아니라 보통무덤으로 버림을 받아왔다. 이렇게 외곡된 력사적사실은 해방후에도 사대주의사가들에 의하여 바로잡아지지 못하였으며 왕묘의 주인공이 진짜 동명왕인가 아닌가 하는것을 가지고 력사학계에서는 오래동안 여러가지 론의가 있었다. 문제는 동명왕이 평양에 묻힐수 없다는 주장이 우세한데 있었다. 이 주장은 동명왕이 환인(오늘의 중국 료녕성 환인현에 있음)에 첫 수도를 정하고 고구려국가를 세운 후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으며 그후 오랜 세월이 흘러간 다음에도 고구려가 집안(오늘의 자강도 만포시의 맞은편에 있음)에 두번째 수도를 정하였고 세번째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였는데 어떻게 평양에 그의 묘가 있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거기에다 평양에 있은 《기자묘》(B. C. 12세기 조선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고 꾸며댄 은나라 사람인 기자의 묘)가 가짜라는것이 판명된것을 계기로 동명왕릉도 역시 가짜일것이라는 주장에 더욱 힘이 실려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고고학자들속에서 이 력사적사실을 밝히기 위한 여러차례의 발굴조사사업이 시도되였으나 이렇다할 전진을 보지 못했다. 사대주의적인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데다가 오랜 세월을 두고 버림받아왔고 일제에게 도굴당한 무덤이고보니 그것이 고구려의 건국시조묘라고 확증할만 한 가치있는 유물을 찾지 못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력사가들의 거듭되는 론쟁의 대상이였던 동명왕릉은 력사의 짙은 안개속에 파묻혀 풀수 없는 과제로 남게 되였고 시간이 감에 따라 그것은 학계의 관심밖으로 점점 밀려나게까지 되였다. 동명왕릉의 진실을 밝히는것은 단순히 왕릉의 주인공을 밝히는 문제가 아니라 외래침략자들과 사대주의자들, 민족허무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당하고 외곡되여온 우리 나라의 력사를 바로잡는가 아니면 한 시기의 력사를 잃는가 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진실은 빛을 발하기 마련이며 력사적사실은 영원히 심연속에 묻혀있을수 없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천리혜안의 예지로 력사의 진실을 밝혀주신것이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주체59(1970)년 12월과 그 이듬해 4월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동명왕릉을 찾으시여 동명왕릉이 실지무덤일수 있을것이라고, 고구려의 시조왕인 동명왕이 처음부터 평양에 묻힌것은 아니겠지만 고구려사람들이 자기 시조왕을 신격화하고있었던것만큼 수도를 옮길 때마다 자기의 시조묘를 파가지고 왔을수 있으니 동명왕릉을 잘 정리하여야 하겠다고 가르치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어느 한 력사학자를 만나주신 자리에서 일부 학자들속에서 동명왕릉이 고구려의 첫 왕인 고주몽의 무덤이 아니라는 견해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주장은 고구려의 첫 수도가 평양이 아니였기때문이라는데 있었다고 하시면서 이러한 견해는 우리 나라의 력사와 풍속에 대하여 무식한 사람들의 허무주의적견해라고 명철하게 밝혀주시였다. 그러시면서 고구려사람들이 흙을 시루에 쪄서 정성스럽게 만들었기때문에 무덤주변에는 개미 한마리 얼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의 시조왕을 얼마나 숭배하였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자료이다, 자기의 선조를 귀중히 여긴 고구려사람들의 례의바른 이 풍속은 조선사람들의 아름다운 풍속으로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여 이역땅 일본에서 온갖 민족적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고통과 설음속에 살아온 재일동포들이 사회주의조국으로 귀국하면서 자기 조상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오는것을 우리는 가끔 보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조선사람들이 자기의 조상을 숭배하는 풍속을 가지고있다는것을 말해준다고 가르치시였다. 그러시면서 하물며 강대한 고구려사람들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길 때 자기 시조왕의 묘를 안가지고 왔겠는가고 말씀하시였다. 민족의 슬기와 존엄을 빛내이시려고 늘 마음을 써오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동명왕릉발굴정리사업을 주체적립장에서 과학적으로 진행할데 대한 력사적인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에 따라 이름있는 학자들과 연구사들로 연구집단이 무어졌다. 연구집단은 1974년 봄과 가을에 동명왕릉을 비롯하여 사찰자리와 그 부근에서 20여기의 고구려무덤과 1개의 못을 발굴정리하였다. 무덤의 구조형식, 벽화, 유물 등은 그것이 왕의 무덤이라는것을 실증해주었다. 무덤에서는 금관에 달았던 여러가지 보요가 100여개나 나왔는데 그것들은 백제, 신라의 무덤들에서 나온 금관에 달았던 보요와 같았다. 동명왕릉을 중심으로 20여기의 고구려무덤들이 배렬되여 있는데 그중 제1호, 제9호무덤에는 화려한 벽화가 있었다. 또한 동명왕릉 앞 120m정도 되는 거리에 놓여있는 고구려때 사찰터에서 기와장들과 질그릇쪼각들이 발굴되였는데 기와장들에는 《절사》자와 《릉사》자가 새겨져있는것도 있었다. 이것은 이 사찰이 왕릉을 위해서 지어진 사찰이고 따라서 뒤에 있는 무덤이 왕릉이라는것을 실증하여주었다. 동명왕릉이 고구려의 시조묘라는것이 확증됨으로써 고구려의 건국과정과 그 발전의 전면모, 그 시기 창조된 우수한 문화가 자기의 모습을 자랑하며 소생되여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력사를 더욱 빛내이게 되였으며 지난 시기 동명왕릉을 가짜무덤이라고 보면서 동명왕을 전설적인 인물로 보고 고구려력사의 첫시기를 부인한 일제의 력사외곡행위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수 있게 되였다.
개건된 동명왕릉
동명왕릉은 고구려가 427년에 조상의 도읍을 찾아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함께 옮겨온것이다. 동명왕릉이 자리잡고있는 곳은 남쪽과 서쪽에는 마장산의 지맥이 뻗어있고 동쪽에는 남북으로 뻗은 제령산의 지맥이 있으므로 평양으로 통하는 북쪽골짜기만이 틔여있는 매우 아늑한 지대이다. 그리고 그 서쪽에는 무진천이 북쪽으로 흘러내리고있으며 주변에 넓은 벌이 펼쳐져있다. 이 일대는 락랑준평원의 동쪽변두리로서 동쪽과 남쪽으로 높은 산발이 뻗어나가 평원지대에서 산악지대로 이행하는 지점이다. 동명왕릉이 있는 구릉지대에는 약 40정보면적의 소나무숲이 조성되여있다. 이 소나무밭은 수백년전부터 내려오는것으로서 동명왕릉을 위하여 특별히 인공적으로 조성한것이라고 한다. 몇백년 묵은 로송들이 있는 소나무숲은 동명왕릉의 주변풍치를 더욱 돋구어주고 그 일대를 엄숙한 분위기속에 휩싸주고있다. 이와 같이 동명왕릉이 있는 지대는 산과 강들이 적당히 배합되여있어서 예로부터 살기좋은 곳이였으며 경치 또한 아름다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곳이다. 1993년 5월에 개건된 동명왕릉에서 기본은 왕릉과 그 주변에 있는 유적들이다. 이 유적지에서 중심을 이루는 동명왕릉은 동명왕릉개건기념비구역과 석인상구역, 동명왕릉구역으로 이루어져있다. 동명왕릉개건기념비 정면에는 김일성주석께서 친히 써주신 《東明王陵改建記念碑》(동명왕릉개건기념비)라는 글발이, 뒤면에는 헌시가 새겨져있다. 왕릉으로 올라가는 곳에 릉문이 있다. 릉문은 전통적인 건축술에 따라 량쪽에 기둥을 세우고 용마루에는 망새를 올려놓아 고구려의 건축미가 살아나게 하였다. 릉문안쪽교양마당 서쪽과 동쪽에는 제당과 《고구려시조 동명성왕기적비》, 《고구려시조 동명성왕비》가 있다. 석인상구역은 릉문앞의 넓은 통로를 중심으로 하여 그 좌우에 각각 1개씩의 돌향로와 4개씩의 신하상들로 이루어졌는데 신하상들의 옆에는 말조각상들이 있다. 릉구역은 웅장한 규모의 릉과 그 둘레의 여러 시설물들로 이루어져있다. 왕릉은 남향한 돌칸흙무덤으로서 무덤무지는 방대형으로 생겼는데 무덤무지 한변의 길이는 34m, 높이는 11. 5m이다. 무덤칸은 안길과 안칸으로 되여있는데 안칸의 크기는 동서 4. 21m, 남북 4. 18m, 높이 3. 88m이다. 안칸의 천정과 벽들에는 련꽃무늬벽화가 있다. 왕릉앞에는 상돌과 석등, 돌범, 망주석이 있다. 동명왕릉앞에는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릉을 옮겨지을 때 지은 정릉사가 천수백년전의 옛 모습그대로 있다. 이 건물은 8각탑을 중심으로 중금당과 동, 서금당이 있는 고구려의 고유한 1탑3금당식건물로서 총 3만여㎡의 넓은 면적을 가지고있다. 동명왕릉이 고구려시조왕의 릉답게 훌륭히 개건되게 된것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의 손길에 의해서이다. 동명왕릉이 위대한 수령님의 구상대로 개건되도록 깊은 관심을 돌리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름있는 학자들과 연구사, 설계가들로 연구집단과 설계력량을 꾸려주고 지원로력까지 보내주시면서 왕릉개건을 현명하게 이끄시였다. 주체78(1989)년 7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동명왕릉에 세울 돌조각상모형들과 건축물들의 설계형성안을 보아주시고 부족점들을 일일이 지적해주시였으며 그해 10월과 12월에는 동명왕릉형성도안과 정릉사모형사판을 친히 보아주시면서 보다 훌륭히 완성해나가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그리하여 동명왕릉형성안이 훌륭히 완성되였고 동명왕릉개건공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되였다. 주체81(1992)년 1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구려는 근 천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다고, 동명왕릉을 더 크게 잘 꾸려야 한다고 또다시 강조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하나의 고적을 복구하여도 현시대만이 아니라 먼 후날 후대들에게도 교양이 되고 력사적가치가 있게 최상의 수준에서 일떠세우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드시여 그후 인차 동명왕릉을 고구려시조왕의 릉답게 전반적으로 개작하여 다시 꾸리도록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특히 릉문을 동명왕릉에 비례가 되게 좀더 크게 건설하도록 하시고 력사학자, 설계일군들로 고구려유적조사단도 무어주시였다. 고구려유적조사단이 발굴한 자료들은 력사주의적원칙에서 왕릉의 높이와 폭을 품위있게 보장하고 그에 균형을 맞추어 기단의 단수, 망주석과 석등, 범돌조각상, 문무관돌조각상들의 크기와 그 수를 바로 정하여 동명왕릉을 고구려시조왕릉답게 훌륭히 건설하는데 적극 리용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왕릉 제당안의 벽면들에 그릴 그림을 두고 깊은 심혈을 기울여오시면서 벽화를 훌륭히 완성하도록 창작가들을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주체80(1991)년 6월 5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동명왕릉의 미술작품초안과 동명왕의 화상초안을 친히 보아주시였고 9월에는 동명왕릉 제당안의 벽면들에 고구려의 력사와 고주몽의 건국일화를 형상한 그림을 그리도록 하시였다. 창작가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실록》 등 옛 기록들가운데서 교양적의의가 있는 력사자료들을 참작하여 고주몽의 건국일화를 형상하여 그린 벽화초안 16점을 창작완성하였을 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벽화초안들을 친히 보아주시고 제당안의 벽면들에 그리도록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동명왕릉주변을 꾸리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그이께서는 동명왕릉 제당뒤쪽에 있는 못을 잘 꾸리고 왕릉앞으로 흐르는 강도 깨끗이 정리하며 왕릉주변에 있는 소나무들을 잘 보존하고 여러 수종의 나무들을 많이 심어 왕릉이 숭엄한 감을 주면서도 민족적정서가 나게 하도록 하시였다. 이처럼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와 세심한 손길이 있었기에 동명왕릉은 짧은 기간에 훌륭히 개건되여 강대국으로 위용떨치던 고구려의 기상을 더 잘 보여줄수 있게 되였고 후손만대에 물려줄 또 하나의 귀중한 민족문화재보가 마련되게 되였다. 2010년에 조국을 방문하여 동명왕릉을 돌아본 한 재일동포력사학자는 《웅장하게 개건된 동명왕릉을 보니 동방의 천년강국이였던 고구려의 위용을 눈앞에 보는것 같다. 우리 민족의 력사가 오늘처럼 찬란히 빛나게 된것은 절세의 위인들을 모시였기때문이다.》고 절절히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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