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반만년력사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단군릉
《수령님께서 단군을 우리 민족의 원시조로 찾아주시고 단군릉을 훌륭하게 개건하도록 하심으로써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슬기를 대를 이어가며 길이 전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대경사이며 력사적인 사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김 정 일 단군이 신화적인물로 되여온 리유
100만년의 장구한 원시시대가 끝나고 조선민족이 국가시대, 문명시대에 들어서게 된것은 단군이 동방에서 처음으로 국가를 세우면서부터였다. 조선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은 지금으로부터 반만년전에 평양에 수도를 정하고 동방에서 처음으로 《조선》(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며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점차 령토를 넓혀나갔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그후 근 3 000년동안 존속하면서 아시아의 강대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오랜 력사책인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백성들에게 리익을 주기 위해 인간살이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면서 정치와 교화를 베풀었다고 씌여져있으며 《단군고기》에는 《단군왕검은 삼일신고를 천하에 포고하고 366일의 신정으로 나라백성들을 순박하도록 훈계하니 그 덕은 하늘땅과 같았고 그 밝음은 해와 달 같았더라.》고 씌여있다. 그리고 《제왕운기》, 《세종실록》에는 우리 나라 력사에서 단군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밝혀져있으며 1484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에서는 우리 민족사서술이 《단군조선》으로부터였다고 지적되여있다. 우리 선조들은 단군을 하늘이 낸 임금, 단군천왕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대성인으로 칭송했고 후기신라의 유명한 화가 솔거는 민족의 원시조 단군에게서 붓을 받는 꿈을 꾸고 그 붓으로 단군의 화상 1 000여상을 그려 후세에 전해지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명명백백한 력사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 90년대초까지 단군은 신화적존재로만 되여있었다. 단군이 력사의 풍운속에 신화적인 인물로, 허황한 존재로 묻히게 된것은 조상들이 그를 민족의 원시조로 신격화하면서 많은 전설들을 만들어낸데도 있지만 보다는 일제의 단군말살책동과 중요하게 관련되여있다.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으로서의 조선인민의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없애버림으로써 우리 나라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지배를 손쉽게 실현하려고 꾀하였다. 일본의 허황한 건국신화에서 전하는 국가기원년대는 B. C. 660년으로서 단군의 건국년대보다 형편없이 뒤떨어진다. 이것은 조선민족이 일본의 야마도민족보다 훨씬 앞서 국가를 세우고 문명시대를 개척했다는것을 실증해주는 유력한 증거이다. 조선침략을 노린 일본에 있어서 단군과 고대조선의 이러한 유구한 력사를 말살하여 근본을 따질수 없게 하여야할 필요성이 절박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조선민족은 력사로 보아도 야마도민족보다 《렬세》하며 민족성에 있어서도 《렬등》하기때문에 《우수》한 야마도민족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느니, 야마도민족과 조선민족은 한 조상의 뿌리에서 돋아난 《동조동근》이라는 따위의 흑백을 전도한 식민지지배의 리론적기초, 타당성을 내세워야 했던것이다. 이러한 의도로부터 일제는 조선강점 첫시기부터 단군 및 고대조선사외곡말살책동에 달라붙었다. 그것은 단군과 관련된 력사책들을 모조리 략탈하여 소각하는것으로 시작되였다. 초대《총독》이였던 데라우찌는 서울에 기여들어 둥지를 틀기바쁘게 조선의 민족적관습과 제반 제도를 《조사》한다는 구실밑에 전국각지의 책방들과 향교, 서원, 개인집들을 샅샅이 뒤지여 단군관계 력사책들을 모조리 압수하여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일제는 조선력사를 저들의 력사보다 뒤늦게 발생발전한것처럼 위조한 새로운 《조선사》를 꾸며내는데도 달라붙었다. 1915년 유구한 조선민족사를 저들의 리속대로 외곡날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조선사편찬과》라는것을 조작설치한 일제는 1922년에 그것을 《조선사편수회》로 뜯어고치고 조직적인 조선력사외곡날조행위를 감행하였다. 여기서 기본으로 된것은 두말할것 없이 단군말살책동이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일제가 1916년 1월에 공포한 《편찬지침》이라는데서 《조선사》의 서술은 편년체로 한다고 못박아놓은것만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편년체란 력사적사실들을 왕대순, 년월일순으로 기록하는 력사서술의 한 형식이다. 력사를 편년체로 서술하려면 적어도 왕의 년대가 명백해야 한다. 하지만 세계 그 어느 민족의 력사를 보아도 원시사회에서 갓 벗어난 첫 국가시대의 력사는 자료의 심한 부족으로 인하여 편년체로 서술된 례가 없다. 이것은 우리 민족사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활한 일제는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조선사》편찬에서 굳이 편년체서술형식을 택함으로써 조선민족사에서 단군조선의 력사를 송두리채 없애버리려고 꾀했던것이다. 일제가 단군을 신적인 존재로 날조하여 《조선사》에 올리지 못하게 강박한것도 이러한 책동의 한고리였다. 일제는 또한 《조선사》의 시대구분을 교묘하게 변경시켜 제1편에 서술할 력사적시기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방법으로 단군조선의 력사를 취급할수 없게 하였다. 원래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편찬지침》이라는것을 조작하면서 《조선사》의 1편을 《상고, 삼한》시기로 정했었다. 그러다가 그렇게 하면 《삼한》이전의 고대사도 편찬대상으로 되며 따라서 고대시기 단군조선의 력사도 취급되여야 한다는것을 알고는 1923년 1월 1편에 서술할 력사적시기를 《삼국이전》으로, 1925년 10월에는 다시 《신라통일이전》으로 끌어내렸다.(《신라통일》이란 신라가 당나라침략자들을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들을 멸망시킨것을 이르는 말로서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는 말이다.) 일제가 《조선사》의 1편에 서술할 력사적시기를 거듭 아래로 끌어내린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단군시대의 력사를 취급할 공간을 없애버림으로써 저들의 범죄적행위를 합리화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일제는 단군을 말살하려는 저들의 책동에 합세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설사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어 제거해버렸다. 이런 범죄적책동에 의하여 단군시기의 력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대신 조선력사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왕으로 즉위한 B. C. 57년부터 시작된것으로 날조된 《조선사》 제1편이 나타나게 되였다. 민족의 력사와 전통에 대하여서는 안중에 두지 않고 음풍영월로 세월을 보내며 무위도식한 봉건세력들에 의해 민족사에 대한 옳바른 서술이 없었던 조건에서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동조한 정객들과 사가들의 목적의식적인 친일행위에 의해 특히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의 교묘성과 악랄성을 바탕으로 하여 이 외곡된 《조선사》가 사람들의 의식속에 부단히 주입되였다. 한편 일제는 단군을 조선민족의 건국시조로 숭상하여온 조상전래의 민속전통이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에서 사라지도록 꾀하였으며 단군을 실재한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인 존재로 보는 그릇된 관념이 류포되게 하였다. 우리 민족사에서 오랜 력사적기간 단군문제가 옳바로 해명되지 못하고 한갖 신화적인 존재에 머물렀던 주되는 원인은 민족의 자주적인 존재와 발전의 출발점, 근원, 뿌리라고 할수 있는 원시조도 가려보지 못한 력대의 봉건지배세력의 부패무능과 일제의 조선침략지배목적으로부터 출발한 악랄한 민족말살, 민족사외곡책동에 있는것이다.
지명조사로부터 단군릉발굴까지
오랜 세월 단군신화설은 정설로 사람들의 머리속에 인박혀있었다. 력사학계에서도 단군과 고조선문제를 과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속에 1990년대에 들어와 공화국에서는 전국적으로 지명조사를 할데 대한 조치가 취해졌다. 이 땅이 생겨 수수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조상대대로 내려오면서 생긴 고장이름들을 조사장악할데 대한 국가적조치가 취해진것은 그때가 처음이였다. 국가에서는 이 사업을 도, 시, 군 단위로 하되 고장이름을 빠짐없이 조사등록하고 그 유래를 정확히 밝히며 지명과 력사유적, 전설들을 비롯하여 력사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장악하여 중앙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도가 담겨져있었다. 반만년력사국의 원시조를 찾는 문제를 두고 자신의 민족사적사명감으로 여기시며 일찍부터 구상을 무르익혀오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더는 미룰수 없다는 의지로부터 력사학계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국적인, 전인민적인 범위에서 유적유물발굴사업을 진행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신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단군과 고조선문제의 정확한 해명을 위해 력사에 류례없는 유적조사와 지명조사사업이 활발히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조사한 각 지방의 《고장이름조사보고서》들이 종합되였다. 그때 강동군에서 작성한 《고장이름조사보고서》에는 강동읍에 있는 주민부락 《단군동》이 고장이름으로 등록되고 그 유래가 《단군릉주변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단군동이라고 부른다.》는것과 그곳에 있는 묘가 옛날부터 단군릉이라고 전해져내려오고있는데 리조 22대왕이였던 정조 10년(1786)년부터 국가적인 관심속에 매해 수리를 하면서 제사를 지내왔다는 내용이 밝혀져있었다. 강동군에서 올려보낸 이 지명조사자료는 단군과 고조선력사를 해명하는데 귀중한 실머리로 되였다. 고고학분야의 이름있는 교수, 박사, 연구사들로 무어진 발굴대성원들이 강동군에서 단군릉발굴에 착수한것은 주체82(1993)년 새해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세월의 풍운속에 버림받아온 단군릉은 본래의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었으나 한겨울의 강추위속에서도 발굴대성원들은 직심스레 발굴사업을 진행하였다. 단군릉은 돌로 무덤칸을 만들고 그우에 흙무지를 쌓은 돌칸흙무덤이였다. 반지하형식에 외칸으로 된 무덤은 주검칸과 무덤안길로 이루어져있었는데 그 방향은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였다. 주검칸의 평면은 남북길이 276cm, 동서길이 273cm로서 거의 정방형이였으며 바닥에서 천정삼각고임 1단까지의 높이는 160cm였다. 원래 발굴대성원들은 처음 발굴을 시작할 때 이 릉이 일제에 의하여 도굴당하였기때문에 그 어떤 가치있는 유물들이 나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다만 무덤형식을 확인하여 그 축조시기를 밝히며 이 무덤이 《단군릉》으로 불리우는 리유가 무엇인가 하는것을 해명하는데 도움이 될 단서를 잡아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무덤칸안에서 사람의 뼈가 나왔다. 뼈는 관대우에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것들이 모서리에 뒤섞인 상태로 있었다. 발굴대성원들은 그것을 두고 일본놈들이 단군릉을 도굴할 때 유물을 훔치기 위해 뼈를 한쪽으로 밀어놓았기때문이라고 보았다. 인류학자들과 년대측정전문가들의 주관밑에 무덤칸에서 뼈를 골라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드러난 유골들중에는 옹근뼈도 있었고 부스러져 쪼박이 난 뼈도 있었다. 모두 합치니 86개였다. 전문가들은 골반뼈와 팔다리뼈에 근거하여 성별감정을 하고 남자와 녀자의 유골을 갈라냈다. 감정결과에 의하면 남자뼈는 주인공이고 녀자뼈는 주인공과 함께 묻힌 안해의 뼈로 인정되였다. 남자의 키는 170cm이상되는 큰 키로서 그때로서는 장수자에 속하였고 녀자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추측되였다. 이밖에 주검칸에서는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과 돌림띠, 여러개의 도자기쪼각과 관에 박았던 관못 6개가 나왔다. 단군릉에서 사람의 뼈와 금도금을 한 왕관쪼각이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일이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그후에 벌어졌다. 고고학자들은 릉을 발굴할 때 예상치 않았던 사람의 뼈가 드러나자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그에 대한 과학적인 측정사업을 의뢰하였다. 해당 과학연구기관들에서는 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법으로 뼈의 절대년대를 측정하였다. 근 6개월간에 걸쳐 수십차례나 실험을 진행한 결과 뼈의 주인공이 그때(1993년 현재)로부터 5 011±267년전에 세상에 태여난 사람이라는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B. C. 31세기초(B. C. 3018년)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지》, 《리조실록》의 《숙종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등에 강동 서쪽 3리되는 곳에 큰 무덤이 있는데 그것이 단군묘라고 명백히 기록되여있고 문헌기록에 지적된 그 무덤에서 나온 유골이 5천년전의것으로 측정됨으로써 년대측정결과가 문헌기록의 정확성을 확증하였다. 한편 력사학자들도 연구사업을 전면적으로 깊이있게 해나가던 과정에 어느 한 나라 력사기록에서 단군이 고조선의 왕이라는 자료를 찾을수 있었고 력사문헌에서 단군왕대를 47대까지 기록한 자료도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단군릉에서 단군의 유골이 발굴되고 그가 실재한 인물이라는것이 과학적으로 론증되게 되였다. 1993년 10월 《로동신문》에 《단군릉발굴보고》가 실리였다. 《단군릉발굴보고》는 우리 민족의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실증해주는 귀중한 력사유적인 단군의 무덤이 발굴된데 대하여 자세히 전하면서 이렇게 썼다. 《종전에 신화적, 전설적인물로 간주되여온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였다는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으며 이에 따라 우리 나라는 실지로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동방의 선진문명국이였다는것이 명백해졌다. 단군이 고조선을 창건하고 도읍한 평양이 산수수려한 곳으로서 검은모루유적의 주인공과 <력포사람>(고인), <만달사람>(신인), 조선옛류형사람으로 이어지는 인류발상지의 하나이며 조선민족의 발상지이고 첫 국가의 발생지였다는 사실이 힘있게 증명되였으며 조선민족은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떳떳이 자랑할수 있게 되였다. 이런 의미에서 단군릉의 발굴과 단군의 유골발견은 우리 고고학의 승리이며 나아가서 조선민족의 큰 승리로 된다.》 이것이 발표되자 남조선의 《서울신문》을 비롯하여 여러 언론들이 단군릉발굴보고의 내용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중국의 신화통신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통신, 방송, 신문들도 《조선에서 단군열이 일고있다.》는 내용의 글과 보도들을 냈다.
1 994개 화강암이 담고있는 의미
1994년 10월 평양시 강동군에 단군릉이 새로 일떠섰다. 5천여년전에 실재하였던 원시조의 유골을 찾아낸 후손들이 태고의 땅에 화강석을 주옥같이 다듬어 쌓아올린 단군릉. 단군릉은 강동읍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풍치수려한 대박산기슭에 자리잡고있다. 릉의 동북쪽에는 아달산이 있고 앞에는 벌이 있으며 그 맞은편에는 동서로 산들이 련달려있다. 벌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치우친 곳으로는 수정천이 동쪽으로 흘러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으뜸가는 명당자리이다. 단군릉은 1 994개의 화강석으로 다듬어진 9개 단의 계단돌무덤으로 축조되여있다. 묘실안에는 국보적유물인 단군과 그 안해의 유골이 완전한 유해로 조립되여 밀페된 유리관속에 소중히 보존되여있다. 단군릉앞에는 단군의 건국초기정사와 국토확대사업을 보좌한 왕자들인 부루, 부소, 부우, 부여의 조각상들과 측근신하들인 신지, 팽우, 치우, 고시, 주인, 해월, 여수기, 비천생의 조각상들이 세워져있다. 단군릉의 네모서리에는 비파형단검탑이 위엄있게 세워져 있고 묘곁에는 4개의 범상과 2개의 망주석과 돌등, 상돌과 분향로들이 있다. 단군릉의 입구좌우에는 릉문대신 크고작은 5개의 문기둥들이 나란히 세워져있다. 단군릉의 부지면적은 430 500㎡이다. 여기에 25 000여㎡의 화강석판석을 깔았다. 무덤을 보면 밑단 한변의 길이가 50m, 높이는 22m이다. 한마리의 범돌조각상무게는 90t, 높이가 5m인 석인상의 개당무게는 25t이며 비파형단검탑의 높이는 7m이다. 단군릉은 이처럼 우리 민족의 원시조릉으로서 그 웅대성을 잘 보장하고있다. 단군릉을 쌓아올린 1 994개의 화강석이 담고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남조선의 전 《한신대》 교수였으며 단군학회 회장인 김상일은 2009년 5월 6일 자기가 쓴 글에서 《1993년 1월 김일성주석은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에 있는 단군묘를 발굴할것을 지시하였다. 단군묘의 년대가 1993년 기준으로 5 011±267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덤근처에 고구려장군총과 모양이 같은 피라미드모양의 무덤을 건설하였다.…초대형 단군릉은 1994년 준공되였기때문에 1 994개의 화강석을 사용하였다.》라고 피력하였다. 사실 민족의 원시조를 찾아주신 절세의 위인은 바로 김일성주석이시다. 단군과 관련된 유적들을 다 찾아내고 똑똑히 고증할데 대한 과업을 주신분도, 70여년전의 잡지까지 보시며 단군에 대한 자료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시여 학자들에게 보내주신분도, 단군의 출생지와 고조선의 수도문제를 주체적립장에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확증하도록 하신분도 바로 김일성주석이시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주체76(1987)년 6월과 주체78(1989)년 4월 등 여러 기회에 우리 나라에 세워진 첫 국가는 고조선이다, 그러나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단군에 대하여서는 지금까지 신화로만 전해져내려오고있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실재한 인물인가 신화적인물인가 하는것은 력사학자들이 앞으로 더 해명해야 할 문제이다, 고조선시기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면 고조선의 건국년대와 력사발전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힐수 있다고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그때에 벌써 단군은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재한 인물이며 그것을 과학적으로 밝힐수 있는 유적유물이 반드시 있을것이라는것을 굳게 확신하고계시였던것이다. 주체81(1992)년 봄 어느날 구월산피서지구 국토총계획사판을 보아주시던 김일성주석께서는 또다시 단군과 고조선력사에 대한 문제를 화제에 올리시면서 내가 요즘 우리 나라의 고대력사책을 많이 보는데 거기에는 구월산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가운데는 단군을 구월산에서 낳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단군과 그의 아버지 환웅, 할아버지 환인의 제사를 지내던 단군사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단군을 숭배하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일군들과 력사학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숭배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러니 조상대대로 내려온 단군숭배를 전설로만 볼수 없지 않는가. 우리 인민이 단군을 조선민족의 원시조로 대대손손 숭배하는 정통성을 이어온것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었다. 그날 김일성주석께서는 나는 일제에 의해 여지없이 무시당하고 미제에 의하여 다 마사진 단군사와 단군에 대한 전설을 되살리려고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면서 구월산지구에 오래 살던 늙은이들이 다른 지방에 이사갔을수 있는데 찾아가서라도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그 말씀을 받아안고서야 력사학자들은 고조선의 중심지를 료동지방으로 생각하면서 그곳에서 단군에 대한 자료를 찾으려던 자기들의 생각이 잘못되였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후 력사학자들은 구월산의 패엽사 동쪽 소중산에 있는 단군과 그의 아버지 환웅, 할아버지 환인의 제사를 지내던 삼성사, 단군이 임금이 되기 위해 도를 닦을 때 단군을 태우고 세상을 돌아다니던중 구월산이 하도 좋아 경치만 바라보다가 굳어졌다는 거북바위, 단군이 무술을 련마하고 글을 익혔다는 단군대, 활쏘기를 하였다는 쿵쿵바위 등 많은 단군유적과 전설들을 구월산에서 찾아냈으며 묘향산에서도 단군이 태여났다는 자연동굴인 석굴단군성동과 단군이 무술을 닦았다는 단군대, 단군이 활쏘기목표로 삼았다는 천주석전설 등을 비롯한 단군과 관련한 유래, 유적들을 많이 발굴하였다. 단군과 관련된 유래, 유적, 전설들이 많이 발굴된 후 력사학자들은 단군이 실재한 인물인가 아닌가 하는것을 빨리 해명하기 위한 연구사업의 중점을 점차 강동에 있는 단군릉에로 돌리게 되였다. 왜냐하면 조상대대로 전해져온 강동의 단군릉을 과학적근거가 없는 이상 부정할 필요가 없었기때문이였다. 바로 이러한 때 전국적인 지명조사가 진행되고 강동군에서 뜻밖에 단군관계 지명들이 나오고 유적들과 전설들이 많이 발굴됨으로써 오랜 세월 전설처럼 전하여지던 단군릉이 바로 강동에 있는 묘가 분명하다는것이 확인되게 되였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주석께서는 일군들에게 강동군에 있는 단군묘를 발굴하며 빨리 원상복구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주체82(1993)년 2월 한 일군을 통하여 단군릉에서 사람뼈와 금도금한 왕관쪼각이 나왔다는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주석께서는 그것이 어느 년대의것인가 하는것을 과학적으로 고증한 다음 보고하라고 과업을 주시였으며 그후 단군과 그 안해의 유골이 과학적으로 확증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고서는 단군이 실재한 인물로 고증된것만큼 릉도 시조릉답게 로동당시대에 우리가 다시 잘 개건하여 후대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교시하시였다. 주체82(1993)년 9월 27일 강동땅을 찾으신 김일성주석께서는 단군릉을 개건할 자리로는 문흥리 고인돌유적이 있는 야산마루가 제일 좋을것 같다고 하시며 몸소 개건할 단군릉자리도 잡아주시고 단군릉을 돌무덤으로 크게 꾸릴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민족사의 상징인 단군릉을 잘 꾸리는데 각별한 관심을 돌리신 김일성주석께서는 설계도면만도 여러차례나 보아주시고 력사주의적원칙에서 부족점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였다. 그리고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나날에는 최종설계도안을 보시고 《1994년 7월 6일 김일성》이라는 친필로 비준하여주시였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반만년의 민족사를 빛내여주시며 단군릉을 훌륭히 꾸려주시기 위하여 한없이 뜨겁고 거룩하신 애국애족의 심혈을 다 바쳐오시였다 그 열렬한 애국애족에 떠받들려 훌륭히 일떠선것이 바로 단군릉이다. 세계에는 자기 민족의 유구성과 고대문명을 자랑하는 나라들이 있으나 민족원시조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론증된 나라는 흔치 않다. 그러니 단군릉을 쌓아올린 1 994개의 화강석 하나하나에 바로 민족의 원시조를 찾아내여 조선민족된 한없는 긍지와 자부심을 민족성원들모두에게 안겨주신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주석의 한평생의 불멸의 로고와 헌신이 새겨져있는것이 아닌가.
대박산기슭에 새겨진 위인의 손길
민족의 원시조의 무덤인 단군릉이 잘 꾸려져 후손들에게 물려지게 된데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크나큰 로고와 심혈 또한 깃들어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애국애족의 높은 뜻을 받들어 주체82(1993)년 9월 정무원 총리(당시)를 위원장으로 하는 단군릉복구위원회를 꾸려주시고 필요한 분과들을 내오도록 하시는 등 개건공사를 통일적으로 장악지도하는데서 나서는 크고작은 모든 문제들을 다 풀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단군릉 시공분담을 힘있고 전투력있는 단위들에 맡겨주시였으며 릉건설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적극 내밀도록 하기 위해 정무원 위원회, 부(당시)들과 중앙기관들에서 릉건설에 소요되는 자재와 설비들을 계획에 맞물려 지장없이 보장하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취해주시였다. 그리고 단군릉의 건축학적특성을 헤아리시고 돌조각상제작은 능력있는 만수대창작사에서 맡아하며 릉건설에 필요한 원석과 판석은 전국의 돌광산들에서 보장하도록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렇듯 정력적인 령도와 보살피심에 고무된 건설자들은 1993년 12월 17일 현지에서 궐기모임을 가지고 단군릉개건공사에 착수하였다. 대국상이후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유훈을 빛나게 관철하시려는 가장 의리깊은 충정과 철의 의지를 지니시고 단군릉을 로동당시대의 대기념비적창조물로 최단기간에 최상의 수준에서 건설하도록 현명하게 이끄시였다. 우리 민족의 반만년력사에서 가장 비통한 날로 새겨진 피눈물의 그날로부터 6일째 되던 7월 13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헤아릴수 없는 상실의 아픔과 비애를 가슴속깊이 묻어두시고 단군릉을 최상의 수준에서 하루빨리 완공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단군릉개건공사를 어버이수령님의 유훈관철을 위한 중요대상으로 정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온 나라가 떨쳐나 이 사업을 힘있게 밀고나가도록 하시였으며 주체83(1994)년 8월에는 전반적인 공사정형을 알아보시고 단군릉건설에 총력량을 집중하면서도 단군관계유적들을 꾸리는 사업을 동시에 밀고나가도록 현명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건설자들은 새로운 시공방법을 받아들여 짧은 기간에 방대한 량의 박토와 암반을 처리하고 콩크리트치기를 하여 웅장한 돌무덤과 무덤실의 골조공사를 끝냈으며 수만개의 돌을 가공하고 몇t씩 나가는 조각물들을 설치하였으며 주변포장과 원림조성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한편 조각가들은 개건기념비를 비롯한 여러건의 방대하고 정교한 조각물들을 최단기간내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평양시 강동군의 단군릉주변과 단군사당건물인 숭령전, 묘향산에 있는 단군사, 구월산에 있는 제2단군사와 묘향산의 천주석, 구월산의 단군대를 비롯한 단군관련 유적들을 정비하여 참관지로 꾸리기 위한 사업이 힘있게 벌어졌다. 이렇듯 우리 민족사를 길이 빛내이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거룩한 령도의 손길이 있어 단군릉은 민족의 성지로 강동군 대박산기슭에 웅장하게 일떠서게 되였다. 1994년 10월 11일 단군릉개건준공식이 현지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생전의 뜻대로 단군조선의 기상을 떨치며 유구한 민족사의 상징으로 웅장하게 솟아오른 단군릉을 찾아주신 날은 주체83(1994)년 10월 29일이였다. 단군릉개건준공식을 하던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싶어하는 인민들의 절절한 심정을 아뢰이던 일군에게 갈리신 음성으로 수령님생각만 하여도 눈물이 나서 나가지 못하겠다고, 후에 나가보겠다고 말씀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단군릉개건을 위해 바쳐오신 어버이수령님의 로고를 그토록 잊지 못해하시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날의 약속을 지켜 단군릉을 찾으신것이였다. 조선민족의 유구성과 단일성을 확증하며 우리 겨레에게 크나큰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는 귀중한 문화재보로 후손만대에 빛을 뿌리게 된 단군릉을 보시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전통적인 조선식돌계단무덤형식에 맞게 백옥같이 흰 화강석을 정교하게 다듬어 9개의 단으로 쌓은 4각추모양의 눈부시고 웅장한 릉을 한동안 바라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릉에 돌을 잘 쌓았다고 하시면서 단군릉은 로동당시대에 개건한것만큼 먼 후날에 가서도 그대로 보존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릉에 이어 유적유물들도 일일이 돌아보시면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묘실에 단군의 초상을 걸어놓고 유물을 안치한것은 잘하였다고, 묘실에 설명문을 우리 나라 글로만 써놓지 말고 중어, 일어, 영어를 비롯하여 다른 나라 글로도 써놓으라고 이르시였으며 돌조각상과 단군릉개건비를 돌아보시면서는 잘 만들어 세웠다고, 돌문주를 자연돌형식으로 만들어 세우니 보기 좋다고 말씀하시였다. 방대한 공사를 1년도 못되는 짧은 기간에 성과적으로 끝낸 건설자들의 수고를 높이 평가하시고 그들에게 감사를 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서는 단군릉개건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고 몸소 릉자리까지 잡아주시였다고, 수령님께서 잡아주신 단군릉자리는 명당자리이라고, 수령님께서 단군을 우리 민족의 원시조로 찾아주시고 단군릉을 훌륭하게 개건하도록 하심으로써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슬기를 대를 이어가며 길이 전할수 있게 되였다고, 이것은 우리 민족의 대경사이며 력사적인 사변이라고 할수 있다고 절절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이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단군릉은 대를 이어가면서 후대들에게 물려줄 국보인것만큼 자그마한 손색도 없게 꾸릴뿐아니라 보존관리를 잘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릉주변에 수종이 좋은 나무들을 더 많이 심고 주변정리도 잘하여야 하며 해외동포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찾아오는것만큼 참관에 필요한 시설들을 더 잘 갖추어 놓아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리고 고대문화의 발생지의 하나인 우리 나라에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이 대단히 많다고 하시면서 민족문화유산을 적극 계승발전시킴으로써 우리 인민에게 오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더욱 북돋아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잊을수 없는 주체83(1994)년 10월 29일. 가장 엄혹한 시련의 이 시기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몸소 찾아오시여 주의깊게 돌아보시고 유적유물들을 잘 보존하도록 온갖 조치를 다 취해주신 력사의 그날이 있어 단군릉은 반만년력사국의 상징으로, 조선민족의 자랑스러운 국보로 더욱 찬연히 빛을 뿌릴수 있게 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