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문명을 자랑하는 《대동강문화》

 

《우리 민족은 인류력사발전의 려명기로부터 훌륭한 민족문화를 창조하여왔습니다.》

 

김 정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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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발상지를 확증해준 검은모루유적

 

 

지난 세기 90년대에 공화국의 력사학학회에서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일대의 원시 및 고대문화유적유물들에 대한 발굴과 그 연구과정에서 거둔 특출한 성과들을 종합정리한데 기초하여 이 지역의 옛 문화를 《대동강문화》로 명명하였다.

세계적으로 볼 때 고대선진문명은 산천이 수려하고 땅이 비옥한 강류역에서 형성되였으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강이름과 결부된 《문화》로 불리워왔다.

대동강은 랑림산줄기의 한태령(1 356m)에서 시작하여 평안남도와 평양시를 지나고 남포시와 황해북도, 황해남도 경계를 따라 흐르면서 620개의 크고작은 지류들을 모아가지고 서해에 흘러든다. 대동강은 길이가 450. 3km, 류역면적이 20 247로서 우리 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강이다. 험한 산지지형을 이루고있는 상류와 달리 대부분 낮은 산지이거나 구릉성벌로 되여있는 중하류지역은 물매가 매우 느리다.

이 대동강중하류역은 수정같이 맑은 강줄기와 넓고 비옥한 평야, 물산이 풍부하고 기온이 따뜻한것으로 하여 예로부터 사람들이 살기좋은 고장으로 널리 일러져왔다.

에짚트의 닐강하류, 서남아시아의 량강류역, 인디아북부의 인두스강류역, 중국의 황하류역 등이 세계적으로 가장 일찌기 형성된 문명의 발상지로 인정되여왔는데 그에 당당히 어깨를 견주며 《대동강문화》가 명명된것은 구석기시대초기로부터 고대시기의 유적유물들이 수많이 드러난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의 중하류지역을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이 인류와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심지의 하나였다는것을 알리는 력사적인 선포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하여 동방일각에서 또 하나의 고대선진문명이 탄생하였다.

대동강류역은 인류와 조선사람의 발원지이고 고대문명의 발상지이다.

대동강류역에서는 이를 과학적으로 실증하여주는 구석기시대 전기, 중기, 후기유적들과 원인, 고인, 신인 등 인류진화사의 순차적발전과정을 보여주는 물질적증거물들이 수많이 나왔다.

지난 시기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가 존재하였는가 안하였는가 하는것이 오래동안 론난되여왔었다. 그것은 조선사람의 기원과 민족문화의 독자성, 우수성을 밝히는데서 나서는 선차적인 문제였으며 나라와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지키기 위한 심각한 정치적문제였다. 이러한 론난을 가져온것은 지난날 일제의 어용사가들이 조선에 대한 제놈들의 식민지통치를 합리화하는데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하여 조선사람의 기원문제를 의도적으로 외곡하였기때문이였다.

일제의 어용사가들은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인류력사의 려명기에 우리 강토가 인적없는 적막강산이였으며 이웃지역에서 구석기시대를 거친 사람들이 신석기시대 말엽에 흘러들어 이 땅의 첫 주인이 된듯이 사실을 외곡하였다. 그들은 해방전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유적유물이 발굴되지 못한것을 기화로 조선에는 원래 구석기시대가 없었다느니, 조선에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야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 살게 되였다느니, 조선민족은 청동기시대를 거치지 않고 이웃나라들의 영향밑에 석기와 청동기, 철기를 같이 쓴 《금석병용시대》를 거쳤다느니 뭐니 하면서 우리 나라 력사에서 구석기시대를 잘라버리려는 력사말살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일제어용사가들의 이러한 반동적인 리론과 주장들은 철두철미 조선민족의 《렬등성》과 야마도민족의 《우월성》을 고취하며 저들의 식민지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며낸 허황하기 그지없는 정치적날조품이였다. 결국 이것은 조선민족이 하나의 피줄을 이어온 단일한 민족이라는 엄연한 력사적사실을 뒤집어엎고 자기의 고유한 조상마저 가지고있지 못한 《렬등민족》이라는것을 류포시킴으로써 우리 겨레의 존엄과 자주의식을 말살하려는 음흉한 기도의 발로였다.

장구한 기간 짙은 안개속에 묻혀있던 구석기시대의 존재문제, 조선사람의 기원문제는 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빛나는 예지와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과학적으로 밝혀지게 되였다.

조선사람의 기원문제를 정확히 해명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해방후 첫 시기부터 사회발전의 매 단계마다 유적유물발굴사업을 력사주의적원칙에서 잘할데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그 사업을 현명하게 이끌어오시였다.

주체36(1947)년 8월 어느날 국립중앙력사박물관(당시)을 찾으신 김일성주석께서는 박물관에 진렬되여있는 석기시대의 유물들은 조선사람들이 오랜 옛적부터 우리 조선땅에서 살아왔다는것을 실증하여준다고 하시면서 유적유물발굴수집사업에서 얻은 성과와 경험을 살려 력사유적과 유물들을 발굴하고 수집하는 사업을 계속 진행할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느 한 유적발굴에서 거둔 성과를 평가하시면서 력사적사실과 유적들을 재검토, 재평가하여 우리 나라의 력사를 바로잡을데 대하여 간곡히 가르치시였다.

또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전후 인민경제복구발전을 위한 건설공사들이 활발히 벌어지고있는 실정을 고려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지시를 하달하도록 하시여 각종 건설공사과정에서 발견되는 유적유물의 파괴, 분실을 미연에 방지하며 발굴을 계획적으로, 전인민적운동으로 진행할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민족문화유산발굴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으며 특히 구석기시대유적유물발굴 및 수집을 위한 연구집단을 무어주시고 필요한 물질적수단들까지 마련해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의도하시는 조선사람의 기원문제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이미 오래전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선반도에서의 인류의 기원문제는 철저히 우리 나라에서 발굴한 고고학적자료에 기초하여 과학적으로 해명되여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시고 우리 나라 땅은 지질구성으로 보아도 인류가 발생한 신생대를 충분히 거치였으며 사람이 태여날수 있는 자연지리적조건을 가지고있었다는것, 우리 조선민족의 조상이 북쪽이나 남쪽, 남의 나라에서 몰려와 생겨났다고 보는것은 잘못이라는 확신을 표명하시였다.

주체49(1960)년 9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에 구석기시대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문제에 정확한 리해를 가지자면 반드시 주체적립장을 가져야 한다고 다시금 강조하시면서 구석기시대존재문제를 부정하는 일제의 어용학자들의 반동적인 주장과 견해의 부당성, 허황성을 하나하나 까밝히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 나라에서 아직 구석기시대의 유물을 발굴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우리 나라에 구석기시대가 없었다고 단정할수는 없다고, 우리 나라와 기후조건이 비슷한 세계 여러 나라들, 특히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들에서 이미 구석기시대유적들이 많이 발굴되였다고 하시면서 이러한 사실들은 아직까지 구석기시대유적들이 발굴되지 않았을뿐이지 우리 나라에도 구석기시대가 있었을것이며 그때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존재문제를 부정하고 신석기시대에 들어와서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이주해왔다고 하는것은 매우 옳지 않다고, 문제를 그런 식으로 고찰하면 조선민족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결론에 떨어지게 된다고 지적하시였다. 또한 일부 고고학자들이 우리 나라 력사를 바로 보지 못하는것은 중요하게 사대주의사상에 물젖은것과 관련되여있다고 엄하게 지적하시면서 풍부한 사료와 옳은 방법론에 기초하여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존재문제를 주체적립장에서 고찰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에 구석기시대가 있었다는것을 과학적으로 론증하려면 반드시 구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많이 찾아내야 한다고, 앞으로 구석기시대의 유물을 새로 찾아내자면 유적발굴사업을 적극 내밀어야 하며 광범한 군중을 이 사업에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땅속이나 동굴속깊이에 파묻혀있는 태고시대 인간들의 뼈와 타제석기, 그들이 잡아먹고 버린 짐승의 뼈화석 같은것을 찾아낸다는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그러나 유적발굴사업을 짜고들고 사회적관심을 높여나간다면 가까운 앞날에 우리 나라에서도 반드시 구석기시대유적유물들을 찾아낼수 있을것이라고 확언하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가르치심은 조선력사연구에서 미해명으로 남아있던 구석기시대의 유적유물발굴과 해명에서 지도적지침으로 되였다.

그이의 말씀이 있은 때로부터 몇달후인 1962년 1월에 공화국의 고고학자들은 함경북도 화대군 장덕리에서 《맘모스》라고 하는 구석기시대의 털코끼리뼈화석을 발굴한데 이어 1963년 3월 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당시)에서 구석기시대후기에 속하는 유적을 발굴하였다.

주체52(1963)년 5월 어느날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 령역에서 구석기시대의 동물인 털코끼리(《맘모스》)의 뼈화석이 발굴되였으나 구석기시대사람들이 남긴 유물이 발견된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시면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을 발견한것은 해방후 우리 나라 고고학계가 이룩한 성과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것의 하나라고 볼수 있다고 평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굴포리유적의 발견은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 존재문제를 해명하는데서 첫시작에 불과하다고, 굴포리유적에 대한 발굴과 연구사업을 심화시키는것과 함께 발굴된 자료에 대한 분석과 종합을 잘하여 옳은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에 동굴이 많은것만큼 동굴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잘 짜고들데 대하여, 유적발굴사업에 대한 사회적관심을 높여 관개공사장이나 채석장 같은데서 짐승의 뼈화석이나 이상한 흔적을 발견하면 제때에 해당 기관들에 알려줄데 대하여 그리고 군중속에 력사유적발굴사업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시킬데 대하여서도 강조하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이 말씀은 력사유적유물발굴에서 보다 큰 성과를 거둘수 있게 한 추동력이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뜻과 귀중한 가르치심을 심장깊이 새겨안은 력사학자들과 문화보존부문의 일군들, 과학자들은 조선사람의 기원과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구석기시대유적발굴에 계속 큰 힘을 넣었다.

마침내 대동강하류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전기유적인 검은모루유적이 발굴되였다.

1964년말부터 1966년초에 황해북도 상원군안의 주민들은 흑우리(검은모루)에서 채석작업을 하던중 석회성분이 많아서 돌같이 굳어진 흙덩어리속에 묻힌 짐승뼈를 발견하고 즉시 해당 기관에 통보하였다.

1966년 3월 현지에 파견된 력사학자들과 발굴성원들은 상원읍에서 서북쪽으로 3 000m정도 떨어진 검은모루부락 동쪽에 있는 우물봉이라는 석회암언덕 남쪽 비탈진 기슭에서부터 15∼17m정도 높은 곳에 있는 길이 약 30m, 너비 약 2. 5m, 높이 2m정도의 좁고 긴 동굴유적을 발굴하였다. 발굴당시 동굴안은 퇴적층으로 꽉 차있었으며 입구는 메워져있었다.

유적에서는 원시인들이 쓰던 타제석기들과 함께 잡아먹고 버린 수십종의 짐승뼈화석들이 발굴되였다.

검은모루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들은 매우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갓 형성된 사람들의 목적의식적인 로동활동의 결과에 의하여 이루어진 창조물들이였다. 석기는 푸른회색의 규질석회암을 깨서 만든것이였다. 검은모루유적에서 나온 석기의 종류에는 주먹도끼모양석기, 제형석기, 뾰족끝석기, 쪼각석기 등이 있다.

 주먹도끼모양석기는 그 생김새가 주먹도끼와 비슷하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 붙인것이다. 원래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 전기유적들에서 특징적인 석기이다. 길죽하게 생긴 주먹도끼의 등쪽은 손으로 쥐는데 편리하게 다듬어 졌거나 돌표면 그대로였고 날은 량쪽면을 깨서 가공하였기때문에 끝쪽으로 가면서 점차 뾰족하게 생겼다. 그러나 검은모루유적에서 나온 석기는 그 생김새가 주먹도끼와 비슷하지만 주먹도끼처럼 량면을 손질한 석기는 아니였다. 길이가 14㎝인 이 석기는 내리쳐 깼기때문에 깨진면은 납작하고 매끈하지만 반대면에는 릉이 생겼고 그 량쪽에는 날이 서있다. 석기는 그의 때림면쪽은 넓고 끝쪽은 점차 좁아져서 뾰족하며 전체적으로 길죽하게 생겼다. 그러므로 넙적한 때림면쪽은 손으로 쥐고 뾰족한 끝쪽은 날로 하여 쓴 석기임을 쉽게 알수 있다. 검은모루유적에서 나온 주먹도끼모양석기의 이러한 생김새는 이 석기가 주먹도끼를 만들어 쓰던 때보다 훨씬 이전, 아직은 일정한 형태를 갖춘 석기를 만들줄 모르던 시기의 수법으로 만든것임을 실증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석기의 생김새만을 가지고서도 검은모루유적이 구석기시대 전기의 매우 이른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이라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검은모루유적은 인류사회의 려명기에 해당되는 구석기시대 전기에 자연지리적조건이 유리한 이곳의 대동강류역에서 원시인들이 무리지어 생활하였다는것을 확증하여주는 귀중한 자료였다.

검은모루유적이 발굴됨으로써 지금으로부터 100여만년전 구석기시대 전기인 인류발생의 첫 시기부터 대동강류역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에서 사람들이 살아왔다는것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였다.

지금은 공화국의 여러 지역에서 그리고 남조선의 경기도 련천군과 충청남도 공주시를 비롯하여 수십여곳에서 구석기시대유적이 발견되였지만 인류발생의 가장 이른시기인 구석기시대 전기유적이 발견된것은 그때의 상원군 검은모루유적이 처음이였다.

유구한 우리 나라 력사의 시원을 알리는 검은모루유적은 인류력사의 서막이 열리던 아득히 먼 태고로부터 평양일대에서 사람이 생겨나 살기 시작하였으며 인류문화의 씨앗이 싹텄다는것을 보여준다.

이 유적의 발굴은 우리 나라 원시고고학이 달성한 가장 큰 성과들중의 하나이며 세계적판도에서 인류발생력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되였다.

이처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대동강류역에서 구석기시대 전기유적인 상원군 검은모루유적이 발굴됨으로써 지난날 조선의 구석기시대존재문제를 부정하려던 제국주의어용사가들의 궤변은 산산이 짓부셔지고 대동강류역이 인류발상지의 하나이며 인류문화의 발원지이라는것이 과학적으로 실증되게 되였다.  

 

 2

인류진화사의 과학적해명

 

 

검은모루유적이 발굴된 이후 대동강류역에서는 조선반도에서의 정상적인 인류진화사를 보여주는 수많은 유적유물들이 나왔다.

대동강류역인 평양시 력포구역의 대현동유적과 덕천시 승리산동굴유적에서는 《력포사람》, 《덕천사람》으로 불리워지는 고인의 화석이 발견되였으며 상원군 룡곡리 1호동굴유적과 중리의 금천동굴유적, 덕천시 승리산동굴유적, 승호군 만달리동굴유적에서는 《룡곡사람》, 《금천사람》, 《승리산사람》, 《만달사람》 등으로 불리워지는 신인의 화석들이 발굴되였다.

신인의 화석인 《룡곡사람》, 《승리산사람》, 《금천사람》은 인류학적으로 시초형의 신인으로, 《만달사람》은 늦은 시기의 신인으로 확인되였다.

구석기시대 전기, 중기, 후기유적들과 거기에서 발굴된 인류화석자료에 기초하여 공화국의 학자들은 대동강류역이 원인, 고인, 신인 등 인류진화의 순차적단계를 거쳐오면서 우리의 옛 조상들이 아득한 태고로부터 태를 묻고 살아온 보금자리였으며 인류의 초기문화가 싹튼 유서깊은 력사의 성지였다는것을 확증하였다.

그들은 또한 대동강류역이 이 고장에서 살던 구석기시대후기의 신인에 연원을 둔 조선옛류형사람들의 본 고장이며 그들의 창조적로동과 슬기로운 지혜에 의하여 농경문화를 위주로 하는 신석기시대문화와 높은 수준의 금속문화를 창조한 청동기시대문화가 매우 이른시기부터 면면히 발생발전되여온 원시문화의 발원지, 그 중심지였다는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유적과 표대유적, 사동구역 금탄리유적, 룡성구역 장촌유적, 상원군 룡곡리유적, 덕천시 남양유적, 온천군 운하리 궁산유적 등 대동강류역의 곳곳에 분포되여있는 신석기시대유적들과 팽이모양의 질그릇을 썼던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들이 잘 말해주고있다.

대동강류역의 집자리유적들은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조선옛류형사람들이 대동강류역의 광활한 대지에서 항구적인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업을 위주로 여러가지 생산활동을 벌려나갔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여러 유적들에서 드러난 농업도구들은 조선옛류형사람들이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돌보습으로 갈이농사를 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생산활동과정에 객관세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한 조선옛류형사람들은 석기를 더욱 세련시켰을뿐아니라 보통석재와는 다른 광석에 열을 가하여 금속을 얻어내는 야금기술을 체득하였다.

그들은 야금기술에 토대하여 동에 주석을 합금하는 방법으로 순동보다 세기가 강한 청동을 만들어내였으며 마침내 새로운 청동기문화를 창조하게 되였다.

이것은 물질문화발전에서 거대한 변혁이였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유적과 표대유적, 사동구역 금탄리유적, 락랑구역 원암동유적, 서성구역 와산동유적, 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유적, 평안남도 북창군 대평유적, 덕천시 남양유적을 비롯한 팽이그릇집자리유적들은 층위상으로나 계승관계로 보아 이 일대에서 신석기시대문화를 창조한 조선옛류형사람들의 직계후손들이 남긴것이라는것이 밝혀졌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유적 제1기층 제12호집자리에서 나온 팽이그릇을 시료로 하여 그 년대를 측정한 결과 5 300여년전의것이라는것이 확인되였다. 이 절대년대측정치는 대동강류역에서 청동기시대의 개시가 단군조선의 성립시기보다 훨씬 이른시기인 B. C. 4000년기 후반기로부터 시작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제반 사실은 매우 이른시기에 대동강류역에서 인류가 발생하여 조선옛류형사람으로 발전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원시문화와 고대문명이 시작되고 발전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대동강류역에서 인류진화사를 해명해주는 유적유물들이 많이 나온것은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와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주체65(1976)년 11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일군들과 력사학자들에게 인류진화발전사문제를 주체적립장에서 다시 검토하고 확고한 물질적자료에 기초하여 바로 해명할데 대한 강령적인 교시를 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확고한 물질적자료에 기초하여 인류진화발전사를 옳게 해명할수 있도록 온갖 조치들을 다 취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인류진화발전사연구집단을 내오도록 하시고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문화보존연구소를 비롯한 학술연구기관들을 튼튼히 꾸려주시였다.

고고학자들과 문화보존부문의 과학자, 기술자들은 대동강류역에서의 원시시대유적조사사업을 힘있게 벌려 많은 성과들을 이룩하였다.

특히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집단과 조선중앙력사박물관 학술연구집단,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학생들은 1979년 봄부터 근 3년간에 걸쳐 발굴사업을 진행하여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부락에서 큰 규모의 신석기시대유적을 찾아냈다. 고고학자들과 발굴성원들은 진지한 조사발굴과정을 통해 남경부락일대에서 신석기시대 집자리(5개), 청동기시대 집자리(22개), 청동기 및 철기시대 무덤들과 이 시기 사람들이 사용하던 각종 사냥 및 생산도구들과 벼를 비롯한 5종의 낟알들도 새롭게 발굴하였다.

고고학계와 문화보존부문의 일군들과 과학자들이 원시시대유적발굴에서 이룩한 성과자료들을 보고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69(1980)년 12월 26일 승호군 만달리동굴유적에서 발굴된 머리뼈를 비롯한 인류화석과 로동도구를 국보로 정하도록 하시였고 남경원시유적에서 발굴된 유적자료들은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진렬전시하여 원시사연구에 리용하도록 하시였으며 남경원시유적을 국가지정유적지로 잘 보존관리하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새로 발굴하는 원시유적터들을 잘 복구관리하여 새 세대들과 근로자들의 력사교양장소로 꾸릴데 대한 문제, 다른 나라 력사전문가들의 참관대상지로 할데 대한 문제에 대하여서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인류발상지의 하나인 대동강류역에서 원시시대유적발굴사업을 힘있게 벌릴데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사회과학원의 고고학자들은 유적발굴사업을 계속 밀고나가 1997년 6월 상원군 로동리에서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구석기시대 몰이사냥터를 발견하게 되였다.

당시 상원군 로동리의 고령산줄기에 있는 어느 한 수직굴에는 원시시대사람들이 남긴 토끼, 족제비, 오소리, 표범, 승냥이, 큰쌍코뿔이, 노루 등 13종에 200여점의 짐승뼈화석이 파묻혀있었다.

이 유적을 찾아낸 고고학자들은 과학적인 연구고증을 진행하여 이 유적이 지금으로부터 약 10만년전 구석기시대 중기의 유적이며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몰이사냥터유적이라는것을 확증하였다.

사실 원시인들의 사냥생활을 보여주는 구석기시대 몰이사냥터는 서유럽의 남단에 있는 이딸리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이래 아직까지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지역에서도 발견된것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때 동방의 오랜 력사문명국인 우리 나라에서 이 유적이 발굴고증된것은 세계의 고고학계를 놀래운 또 하나의 경이적인 일이 아닐수 없었다.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지켜 끊임없는 전선시찰과 현지지도로 날과 날을 보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구석기시대 중기의 몰이사냥터유적이 발굴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대단히 기뻐하시면서 고고학자들의 발굴성과를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구석기시대 중기의 몰이사냥터유적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이번에 새로 발굴한 수백점의 동물뼈화석들은 구석기시대 중기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사냥생활을 하면서 거기에서 얻은 수확물을 집단적으로 소비하였다는것을 시사해준다고, 이러한 유물자료들은 우리 나라 원시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된다고 말씀하시였다.

2009년에 김일성종합대학 인류진화발전사연구집단의 과학자들은 대동강류역의 황주군에 있는 청파대동굴에서 또다시 많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유물들을 발굴고증하였다.

유적은 황주군 청파대마을 뒤산에 자리잡고있는데 동굴의 길이는 32m, 너비는 6m, 높이는 13. 7m이며 퇴적층의 두께는 9. 9m이다.

퇴적층은 퇴적물의 조성상특징에 의하여 서로 다른 15개의 층으로 구분되는데 여기서 제3, 5, 6, 7층은 제1문화층, 제8∼14층은 제2문화층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제1문화층에서는 불자리유적 4개, 석기 32점, 짐승뼈화석 1 000여점이 나왔으며 제2문화층에서는 인류화석 5개체분에 7점, 불자리유적 9개, 석기 2 000점과 9 700여점에 달하는 짐승뼈화석이 나왔다.

인류화석은 제8, 12, 13층에서 발견되였다.

청파대동굴유적에서 사람뼈화석과 그들이 쓴 로동도구, 잡아먹고 버린 짐승뼈화석들이 동시에 수많이 발견된것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보기 드문 일로서 조선에서 인류진화발전과정과 구석기시대 문화 및 사람들의 사회경제생활을 연구하는데서 귀중한 자료로 된다.

청파대동굴유적에서 발견된 인류화석은 《황주사람》으로 명명되였다.

여러가지 절대년대측정방법들을 리용하여 청파대동굴유적의 년대를 확증한데 의하면 제3층부터 제11층까지의 년대는 지금으로부터 9만∼4만년전에 해당되며 유적에서 나온 인류화석은 지금으로부터 약 6만∼3만년전에 해당된다.

청파대동굴유적의 발굴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의 력사가 첫 고대국가의 성립으로부터 시작된 우리 나라의 반만년의 력사, 문명사회의 력사뿐만이 아니라 인류력사의 려명기에 해당하는 원시사회의 력사도 포함되는 참으로 장구한 나날이라는것을 다시한번 명백히 확증해주었다.

이처럼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대동강류역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의 유적들이 발굴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인류진화발전사가 물질적자료에 기초하여 과학적으로 해명되게 되였다. 

 

 3

대동강류역은 고대문화의 중심지

   

 

《대동강문화》가 공고한 학명으로 되게 된것은 대동강류역이 인류의 발생지의 하나인 동시에 고대문화의 중심지로 확인되였기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이 B. C. 3000년기초에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동방에서 처음으로 첫 고대국가 고조선을 건립함으로써 대동강류역에서는 드디여 새로운 문명시대가 펼쳐지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대동강류역은 고대문화의 중심지, 조선민족의 성지로 눈부신 빛을 뿌리였다.

대동강류역이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는것은 단군조선시기의 문화를 대표하는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이 이 강류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여있는데서 찾아볼수 있다.

고인돌무덤은 함경남북도, 량강도, 강원도, 중국의 료동지방에서는 각각 100∼500기가 알려졌지만 대동강류역에는 1만 4 000여기가 분포되여있다.

그것도 이 지역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수 없는 초기형으로부터 말기형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의 고인돌무덤이 다 있으며 특히 통치자들이 묻힌 특대형고인돌무덤이 다른 지역들보다 비할바없이 많다.

그중에는 뚜껑돌의 넓이가 50여에 달하고 그 무게가 40∼70t이나 되며 무덤칸의 높이가 2. 5∼2. 7m이상 되는 특대형고인돌무덤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큰 규모의 고인돌무덤들이 집중분포되여있는것은 당시 평양일대에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특권층들이 모여살았으며 무덤축조에 든 로력공수와 로동강도로 미루어보아 그것이 집단적인 노예로동과 권력의 산물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대동강류역에서는 고인돌무덤과 함께 돌관무덤이 다른 지역에서보다 많이 드러났다.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순창리, 송석리, 태잠리, 평안남도 성천군 금평리, 증산군 룡덕리, 평성시 경신리 등 여러 지역에서 돌관무덤떼들이 발굴되였다.

이 무덤들에서 당시 사치와 부귀영화를 누린 지배계급들만이 소유할수 있었던 금, 동으로 만든 귀걸이와 목걸이, 가락지, 청동띠고리들과 회색도기들이 나온 사실은 대동강류역이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는것을 생동하게 실증해준다.

강동군의 황대성, 봉산군 지탑리토성, 온천군 성현리토성 등도 이 강류역이 매우 이른시기에 국가가 형성된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는것을 실증해주는 뚜렷한 실례로 된다.

특히 강동군의 황대마을 앞산에서 발굴된 황대성은 지금으로부터 5 000년경에 축조된것으로서 우리 나라 중세기에 쌓아진 토석혼축의 성과 비슷한것이다. 이러한 토성유적들은 대동강류역에 이미 그때에 벌써 상비군과 방어수단을 가진 고대국가가 존재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대동강류역에서는 도시를 방불케 하는 큰 부락터유적들도 많이 드러났는데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유적을 비롯하여 승호군 봉도리유적, 리천리유적, 순안구역 석암유적, 덕천시 남양유적, 황주군 고연리유적 등 대부분의 유적들은 100∼150여개의 팽이그릇집자리들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부락터유적이다.

단군조선을 전후한 시기의 유적들인 상원군 룡곡리 5호고인돌무덤과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유적, 덕천시 남양유적의 팽이그릇집자리에서는 B. C. 2600년경의것인 비파형창끝이 발굴됨으로써 비파형단검문화의 발원지와 중심지가 대동강류역이라는것이 새롭게 밝혀졌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이른시기에 벼를 비롯한 조, 콩, 기장 등 오곡농사와 이웃나라의것과는 완전히 다른 석잠누에치기를 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물질적자료들도 나왔다.

또한 뚜껑돌겉면에 홈구멍을 파놓은 고인돌무덤이 200여기나 발굴되였는데 학자들이 조사연구한데 의하면 이 홈구멍들은 별자리들을 표시한 성좌도였으며 그것은 천문학의 시원으로 되는것이다.

언어학자들은 대동강류역의 단군조선유적들에서 발굴된 토기와 도기에 새겨져있는 글자들과 옛 기록들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키는 과정에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조선초기부터 신지글자를 창제하여 썼다는것을 새롭게 밝혀냈다. 옛 기록들에서 한결같이 신지글자를 단군때에 쓰인 글자라고 전하고있는데 이것은 신지글자가 단군조선초기부터 만들어 쓴 우리 민족의 고유한 글자라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참으로 자연지리적조건이 유리하고 산수수려하여 100여만년전에 인류가 발생하여 끊임없이 발전하여온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은 국가의 형성시기로 보나, 문화의 발전수준으로 보나 세계최초의 고대문명발상지들보다 앞서거나 동등한 지위에 있는 고대문명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대동강문화가 세계최초의 고대문명의 하나로 만방에 찬연한 빛을 뿌리는것은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리념과 현명한 령도의 빛나는 결실이다.

해방후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문화보존부문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고 락랑유적발굴에 커다란 심혈과 로고를 바치시였다.

새 조국건설시기 몸소 락랑유적발굴현지에 나오신 김일성주석께서는 발굴성과에 만족을 표시하시면서 앞으로 기성관념에만 매달리지 말고 주체적인 안목에서 력사적사실과 유적유물자료들을 재검토, 재평가하며 비뚤어진 나라의 력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간곡히 가르쳐주시였다.

김일성주석의 교시를 철저히 관철하기 위해 고고학자들과 문화보존부문의 일군들은 락랑유적발굴과 연구에 계속 큰 힘을 넣었는데 그 과정에 1967년부터 1971년까지의 기간에 정오동과 정백동, 토성동과 남사리일대에서 수십기의 옛 무덤들을 새롭게 발굴고증하였다.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민족문화재부를 길이 빛내여가시려는 김일성주석의 애국애족의 뜻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해 더욱 빛나게 실현되였다.

1980년대 중엽부터 평양시의 남단인 락랑지구에서는 거창한 통일거리건설준비사업이 힘있게 벌어졌다.

통일거리가 들어앉을 락랑지구에 옛 무덤들과 건축지들이 있다는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인 력사유적유물들의 보존관리에 특별한 관심을 돌리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74(1985)년 3월 어느날 통일거리건설형성계획사판을 몸소 보아주시면서 일군들에게 앞으로 건설하게 될 통일거리에 있는 고조선과 고구려시기 고분들을 없애지 말고 일정한 지역에 옮겨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78(1989)년 12월 12일에 평양시건설계획사판과 설계형성안을 보아주시면서 또다시 락랑지구에 고분이 한 2 000여기정도 있다는데 통일거리를 건설할 때 그것을 파묻어버리지 말고 일정한 지역을 설정하여 옮기는것이 좋겠다고 가르치시였다.

그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통일거리건설이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선데 맞게 유적발굴정리를 다그치도록 해당한 조치들도 몸소 취해주시였다.

주체79(1990)년 2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사회과학원과 문화예술부 문화보존총국(당시)안의 일군들과 학자들, 김일성종합대학과 건설건재대학의 교직원, 학생들로 고적발굴대를 조직하여주시였다. 그리고 력사유적유물들이 손상되지 않게 미리 대책을 세우고 건설작업을 진행하도록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대연구에서 고고학적발굴물은 문헌자료의 부족점을 보충해주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로 되기때문에 이 시기 유적에 대한 발굴사업을 계속 힘있게 내밀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면서 락랑유적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발굴을 통하여 민족의 유구성과 독자적인 발전을 옳게 해명하도록 세심히 이끌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뜻을 심장으로 받든 고고학자들과 발굴성원들은 통일거리건설장들마다에서 유적발굴정리를 다그쳐나갔다.

그들은 1990년 2월부터 1991년 11월 중순까지 근 1년 9개월이라는 기간에 락랑지구에 분포되여있는 2 000여기의 무덤들중 1 600여기의 무덤들을 조사발굴하고 8 600여점의 력사유물들을 찾아내여 정리하였다.

그들이 새로 발굴고증한 유적유물자료들을 보고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유적유물들의 보존관리대책과 과학연구를 심화시켜나가도록 하시는 한편 락랑유적발굴정리에서 이룩한 성과와 과학연구자료들을 출판물들을 통하여 소개선전하도록 하시였다.

주체80(1991)년 9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고학자들과 문화보존부문 일군들이 락랑유적지에서 찾은 금귀걸이, 금가락지, 금고리, 금장식품, 금못, 금실 등 금세공품들을 몸소 보아주시면서 력사유물로서 진귀하고 가치있는것들을 골라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보내주도록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극진한 관심과 지도에 의하여 문화보존부문 일군들과 력사학자들을 비롯한 발굴성원들은 마침내 1994년 11월에 락랑지구 유적발굴정리와 이설공사를 성과적으로 끝내였다.

이처럼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령도가 있었기에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이 고대민족문화의 중심지였다는것을 증명하여주는 고고학적유물들이 수많이 발굴될수 있었으며 이 지역의 고대문화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여 그것이 《대동강문화》라는 공고한 학명으로 내외에 널리 전해지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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