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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인물◎

왕   건

 

왕건(877-943)은 고려의 창건자이다. 통치년간은 918년부터 943년까지이다. 왕건은 송악(개성)지방의 유력한 봉건세력으로서 896년 궁예에게 협력하여 발어참성(개성안에 있던 성)의 성주로 되고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점차 승진하여 913년에 태봉국의 최고관직인 시중으로 되였다. 그후 왕건은 날로 심해지는 궁예의 포악한 행위를 경계하면서 자기의 지반을 닦다가 마침내 918년에 홍유, 배현경 등의 지지밑에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를 세웠다. 그는 나라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고려라고 하고 년호를 천수로 제정하였다. 이듬해 1월 수도를 철원으로부터 자기의 오랜 세력지반이던 송악으로 옮기고 새 왕조의 정치적안정을 보장하며 국토통일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우선 태봉국때부터 첨예화된 사회계급적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인민들에 대한 일시적인 양보, 회유정책을 실시하면서 여러 지방에 할거하고있던 봉건세력들을 포섭하는 신축성있는 립장을 취하였다. 또한 그는 신라를 끌어당기고 후백제에 대하여서는 군사적공격을 강화하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한편 북방의 거란을 경계하면서 대동강이북지역의 옛 고구려강토를 확보하며 이주하여오는 발해유민들을 적극 포섭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935년에 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하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무력으로 타승함으로써 국토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왕건이 국토통일을 이룩할수 있었던것은 나라의 분렬을 끝장내는데 리해관계를 가진 인민대중의 적극적인 투쟁의 결과였다. 왕건의 신축성있는 정책은 국토통일이라는 거창한 사업의 실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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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인물◎

정 몽 주

 

정몽주(1337-1392)는 고려시기의 관료이며 유학자이다. 1360년에 문과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그후 성균관 박사 등의 벼슬을 지냈고 유교를 깊이 연구하고 강의도 하여 성리학의 대가로 되였다. 그는 당시 집권자였던 리인임일파를 반대하여 원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명나라와 국교를 맺을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3차에 걸쳐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당시 복잡하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조정하였으며 또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단속을 강화하도록 일본측에 요구하였다. 1380년 운봉의 황산전투에 참가하여 왜구를 격멸하였으며 그후 밀직제학으로, 1384년에는 정당문학으로 되였다. 1388년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리성계가 정치적실권을 쥔 이후에도 문하찬성사, 수시중 등의 높은 벼슬을 지냈다. 리성계는 당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시할수 없는 존재였던 정몽주를 자기의 왕권탈취음모에 가담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몽주는 나라의 정치, 경제형편을 수습하는데는 찬성하였으나 리성계의 왕권탈취음모에 대하여서는 반대하는 립장에 서있었다. 그는 리성계의 왕권탈취음모에 가담하는것을 끝까지 반대한것으로 하여 리성계의 다섯째아들인 리방원(1367-1422)일당에 의하여 개경(개성) 선죽교에서 살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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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인물◎

의  천

 

의천(1055-1101)은 고려시기 천태종불교철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고려 문종왕의 넷째아들로 태여났으며 11살에 승려가 되여 령통사에 들어가 불교공부를 하였다. 31살때 송나라에 가서 화엄종과 천태종불학을 연구하였으며 돌아와 천태종불교를 창시하였다. 고려시기 불교를 연구하여 최고승직을 받았으며 1086년에 흥왕사에 있으면서 우리 나라와 료, 송, 일본 등지에 류포되고있는 불교책들을 수집정리하여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다. 그는 불교의 여러 종파의 철학사상을 섭취하고 종합하여 법화경의 삼체원융설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천태종불교관념론체계를 세웠다. 저서로는 《대각국사문집》, 《원종문류》, 《석원사람》, 《신편제종교장총록》 등이 있다.

 

4

◎력사인물◎

리 률 곡

 

리률곡은 리조시기의 관료이며 학자이다. 그는 1564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대사간, 리조판서, 우의정 등의 벼슬을 하였다. 그후 벼슬을 그만두고 정계에서 물러나 소현서원(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에 있음.)을 차려놓고 후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리률곡은 당시 봉건국가앞에 나서고있던 초미의 정치, 경제적 중요문제들의 해결책을 제기하는데서 진보적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봉건국가가 인민들로부터 수탈하던 공물을 현품대신 쌀로 환산하여 받고 그것으로 필요한 물자를 사서 쓰도록 할것을 제기하였다.

또한 그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10만명의 정예부대를 양성하며 성들을 고쳐 쌓을것 등을 국왕에게 적극 제의하였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예견한 당시의 조건에서 진보적인 의견이였다.

그의 철학사상은 리기2원론에 기초한 객관적관념론이였다. 그는 선행시기의 정통적성리학의 리1원론도 반대하고 유물론적인 기1원론도 다같이 반대하면서 리기2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의 령혼불멸설을 반대하면서 일정하게 무신론적견해도 내놓았다. 그가 남긴 글들은 《률곡전서》로 묶어져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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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인물◎

우 륵

 

우륵은 6세기초 중엽에 활동한 음악가이다. 그는 우리 나라 민족악기의 하나인 가야금을 처음으로 만들어 가야금음악의 시초를 열어놓았으며 수많은 가야금곡들을 창작하였고 후비들도 많이 키워냈다. 그가 만든 곡들가운데서 《삼국사기》에 기록되여있는것만 해도 《하가락도》, 《보기》,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상기물》, 《사자기》, 《거렬》, 《사팔혜》, 《니시》 등이 있다. 그는 또한 가야금연주의 명수였다. 우륵은 가야국이 망할무렵인 6세기 중엽에 제자 니문과 함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류랑연주를 해오다가 신라왕의 요청으로 551년 3월에 신라땅 랑성(오늘의 청주)에 가서 연주를 한적이 있다. 그후 국원경(오늘의 충주)에서 살면서 창작과 후비양성에 힘을 기울이였다. 그의 제자들가운데서 법지, 계고, 만덕 등은 재능있는 음악가들이였다. 그들은 수많은 곡을 만들었으며 가야금을 널리 보급하였다. 그리하여 가야금은 오늘까지 우리 민족악기의 중요한 종류로 널리 퍼지였다. 우륵이 지은 가야금곡은 무려 185수이다. 그는 작곡가, 연주가, 교육자로서 널리 알려져있으며 특히 가야금과 같은 훌륭한 민족악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 나라 음악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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