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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검은모루유적의 동물화석
검은모루유적에서는 29종의 동물화석이 나왔는데 그가운데는 쥐와 같이 매우 작은 짐승의 뼈가 있는가 하면 코끼리나 코뿔이와 같이 굉장히 큰 짐승의 뼈도 있다. 습들쥐, 간단이발쥐, 큰갈밭쥐, 상원갈밭쥐, 검은모루땅쥐, 짧은턱히에나, 코끼리, 큰쌍코뿔이, 상원말, 큰꽃사슴, 넙적큰뿔사슴, 상원큰뿔사슴, 물소, 옛소, 원숭이 등 17종은 이미 사멸한 종이며 상원갈밭쥐, 상원말, 상원큰뿔사슴 등은 고동물학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종이다. 물소, 원숭이, 코끼리, 큰쌍코뿔이 등은 더운 기후에서 사는 짐승들이며 습들쥐, 들쥐, 해리, 물소 등은 강가나 늪가와 같이 물이 많고 습기가 있는 곳에서 사는 짐승들이다. 메돼지, 승냥이, 곰 등은 나무가 무성한 지대에서 살며 말은 초원 혹은 산림성초원지대에서 사는 짐승이다. 검은모루유적의 동물상은 지금으로부터 100만년전에 상원일대에서 여러가지 종류의 짐승들이 살고있었으며 당시 상원일대의 기후도 지금보다 훨씬 더웠고 습기가 많았으며 수풀이 무성하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자료◎ 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법
지금까지 인류가 연구개발한 절대년대측정방법에는 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법, 방사성탄소-14법, 열형광법, 우라니움계렬법, 핵분렬흔적법, 아미노산정량법 등 10여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법은 현대물리학의 첨단기술의 하나이다. 이 현대적측정법은 천억분의 1g분자까지 측정할수 있는 초미량분석방법이다. 이 기술로는 고고학적유적유물들의 절대년대는 물론 200만년전의 지질학대상의 년대까지도 정확히 알아낼수 있다. 사람은 출생한 때로부터 살아있는 기간은 물론 죽은 후에도 우주선을 포함한 자연방사성원소들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받아 뼈에 그 흔적이 남게 된다. 그러므로 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법을 도입하면 무덤에서 드러난 뼈에서 그것이 생긴 때(출생당시)로부터 받아온 방사선의 총량(루적선량)과 뼈가 묻혀있던 지역에서 한해에 뼈가 받은 방사선의 량(년간선량)을 과학적으로 정확히 측정할수 있다. 그다음 산출된 루적선량을 년간선량으로 나누면 뼈가 생긴 때로부터 지금까지 존속한 기간이 몇해나 되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다. 1944년에 물리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이 기술은 1980년대부터 고고학과 지질학, 인류학과 고생물학분야에서 년대측정방법에 광범히 리용되고있다.
◎자료◎ 한주일이나 늦어진 단군릉개건준공식
원래 단군릉개건준공식은 개천절인 10월 3일에 하게 되여 있었는데 한주일이나 늦어졌다. 여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생전에 해외동포들을 접견하시는 자리에서 단군릉을 개건하는데 대하여 이야기하시면서 릉준공식때 다시 만나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었다. 개천절을 앞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김일성주석의 유훈대로 단군릉개건준공식을 북과 남, 해외에 사는 단군의 후예들이 한자리에 모여 성대히 뜻깊게 진행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 뜻을 받들어 공화국의 정당, 사회단체들에서는 남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종교인들, 개별적인사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사는 해외동포들을 행사에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해외에 사는 많은 동포들이 단군릉개건준공식을 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민족의 성지인 평양으로 찾아왔다. 그런데 자동차편으로 몇시간이면 올수 있는 남조선의 각계 인사들은 당국자들이 북행길을 열어주지 않아 오지 못하였다. 다만 《한총련》대표인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련합(범청학련) 공동사무국장만이 수륙만리 멀고먼 길을 에돌아왔다. 참으로 이것은 민족의 비극이 아닐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김일성주석의 유훈을 지켜 남녘동포들이 오기를 기다리시면서 행사를 며칠간 뒤로 미루게 하시였다. 그리하여 개천절인 10월 3일에 하게 되였던 단군릉개건준공식이 며칠 뒤로 미루어 11일에 하게 되였던것이다.
◎자료◎ 새로 씌여진 동명성왕비문
1892년에 세워진 동명성왕비에는 동명왕이 알에서 까나왔다는 식으로 허황하게 써있었다. 그것은 허황하기 그지없는 비과학적인것으로서 고구려의 건국년대를 모호하게 하는 외곡된 력사기록이였다. 우리 나라 력사책인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고주몽에 의하여 B. C. 37년에 세워졌다고 씌여져있었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고구려력사를 깎아내린것을 그대로 옮겨쓴것이였다. 김부식으로 말하면 고려의 귀족출신으로서 봉건유교사상과 사대주의사상에 깊이 물젖은 사람이였다. 그렇기때문에 그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력사를 50권에 달하는 방대한 량으로 묶은 《삼국사기》를 썼지만 계급적 및 세계관적제한성으로 하여 다른 나라들에서 주장한 세나라시기의 외곡된 력사를 그대로 옮겼던것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심하게 외곡서술된것은 고구려의 건국년대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건국년대를 바로잡는 문제는 우리 민족의 유구성을 립증하고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봉건제도가 언제부터 성립되였는가 하는것을 정확히 규정하는데서 관건적의의를 가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당시까지 일부 력사학자들은 고구려건국년대를 기껏해서 B. C. 1세기초로밖에 보지 못하고있었다. 그들은 옛 력사책들에 고구려가 800∼900년가까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B. C. 3∼2세기 고조선에 속한 소국이였다고만 보고있었다. 그들이 고구려건국년대연구에서 큰 실책을 범한것은 력사책 《후한서》예전에 쓴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못하고 그것을 사실로 인정했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력사학계에는 고구려가 고조선이 멸망한 B. C. 108년이후 고구려사람들에 의해 B. C. 1세기초에 건국되였다는것이 공인된 사실로 굳어지게 되였다. 고구려건국년대가 이처럼 심하게 외곡된것을 제일로 가슴아파하신 김일성주석께서는 고구려의 건국년대를 주체적립장에서 바로잡는데서 기준으로 삼아야 할 문제를 명확히 밝혀주시고 주체78(1989)년 6월 17일과 18일에는 동명성왕비문을 력사적사실에 맞게 정확히 쓸데 대하여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드시여 고구려의 건국년대와 그 존속기간을 과학적으로 정확히 밝혀 동명성왕비문을 완성하도록 해당 부문 일군들과 력사학자들을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해당 부문 일군들과 력사학자들은 고구려력사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나가는 과정에 고구려력사가 근 1 000년이나 된다는 력사책 《당희요》를 찾아내였고 옛 문헌들에서 중국의 진나라때부터 고구려가 중국의 동북지방에 강대한 나라로 존재하고있었다는 기록을 새로 발견하였다. 력사학자들은 력사문헌자료와 고고학유물에 기초하여 고구려의 건국년대와 존속기간을 과학적으로 확증하였으며 동명성왕비문을 새로 만들었다. 그 비문에서는 동명왕의 고구려건국년대를 B. C. 3세기 초엽 즉 B. C. 277년으로 정하였다. 그 근거는 고구려가 중국의 진나라, 한나라때부터 존재하였다는 기록과 고구려의 존속기간이 900여년이나 된다는 자료들에 기초한것이였다. 옛날 력사책들에는 고구려가 간지(륙갑법에 의한 년대표기)로는 《갑신년》에 선 나라라고 전해지고있다. 이러한 자료와 《900여년설》을 결부시키면 고구려의 건국년대는 B. C. 277년으로 된다. 이것은 결국 동명왕의 고구려건국년대가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고 시황제를 칭한 B. C. 221년보다 반세기가 앞선다는것을 보여준다. 비문에서는 고구려 1 000년대국의 강대성을 력사적자료에 기초하여 부각시켜주었다. 이와 함께 고구려이전 우리 나라의 유구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새로 고쳐만든 동명성왕비문을 친히 보아주시고 매우 만족해하시면서 김일성주석께 올리도록 하시였다. 이처럼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크나큰 로고와 세심한 지도에 의하여 B. C. 277년이라는 고구려건국년대와 천년강성대국의 존속기간이 명확히 밝혀져 고구려의 위용을 더 소리높이 떨치게 되였다.
◎자료◎ 사 신 도
동서남북의 네방위를 지킨다는 《수호신》들을 그린 그림이다. 이 신들은 환상적인 동물인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 등이다. 그밖에 황룡이 있는데 황룡은 중심의 상징, 수호신이다. 사신은 하늘의 별 28수(각, 항, 저, 방, 심, 미, 기, 두, 무, 너, 허, 위, 실, 벽, 규, 주, 위, 요, 필, 취, 산, 정, 귀, 류, 성, 절, 익, 진)를 네방위에 따라 7개씩 나누고 그 7개 별들의 자리모양을 환상적인 동물(수호신)에 비유한데서 유래되였다고 한다. 실례로 북쪽수호신인 현무는 거부기와 뱀이 엉켜돌아가는 모양으로 그려졌는데 그림은 북두칠성의 모양을 거부기에 비유하고 북두칠성옆의 《뱀별》을 북두칠성에 다가드는 별들로 보면서 그것들이 서로 엉켜돌아가는 모양으로 그린것이다. 사신도는 우리 나라에서 기원전후경부터 묘사하기 시작하여 고구려에서 가장 많이 그려졌으며 그 형상도 제일 발전하였다. 사신도유산가운데서 제일 우수한것은 고구려벽화무덤인 강서세무덤에 그려진것이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로 표현된 이 무덤벽화의 사신들은 소재의 추상성으로 하여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있으나 환상적인 동물로서의 특징들을 잘 살려내고있을뿐아니라 강한 기백과 살아 움직이는듯 한 동적인 느낌을 주는 점에서 특색을 가진다.
◎자료◎ 고로봉식산성
고로봉식산성이란 지형이 고리짝처럼 생긴 지형, 다시말하여 3면이 높은 산 또는 절벽으로 둘러막히고 한쪽만이 트인 지형의 골짜기를 안에 넣고 주위의 봉우리와 릉선에 둘러쌓은 성을 말한다. 고로봉식산성은 산봉우리와 산릉선을 따라 성을 쌓았기때문에 적을 방어하기 유리하며 성벽은 바깥쪽에만 쌓는다. 또한 성안에 골짜기들이 있어 적들이 성안실태를 알수 없으며 반대로 아군은 적의 실태를 내려다볼수 있다. 그리고 성안에 골짜기들이 여러개 있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수 있으며 수원도 많다. 고로봉식산성은 수많은 전투들을 통하여 그 우점이 유감없이 과시되였다. 고로봉식산성은 고구려산성의 전형적인 형식이며 그 이후 우리 나라 중세 산성의 기본형식으로 되였다.
◎자료◎ 대성산성남문
대성산성남문은 고구려시기 안학궁을 보위하는 방위성으로 쌓은 대성산성의 남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남향을 좋은 향좌로 여기고 하나하나의 건물들을 세울 때는 더 말할것도 없고 큰 도성이나 산성을 쌓으면서도 그 향좌를 가능한껏 양지바른 남향으로 정하였다. 때문에 도성이나 산성의 남문들은 례외없이 그 성의 문들가운데서 제일 중요시되는 정문이다. 대성산성남문은 이 산성의 정문으로서 이 문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행궁으로 길이 잇닿아있었다. 대성산성의 얼굴이라고도 할수 있는 남문을 원상대로 되살려주시기 위하여 깊이 마음써오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대성산일대의 력사유적조사발굴을 시작할 때 벌써 성문도 찾아내여 제대로 건설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고 그후에는 몸소 남문터에 나오시여 우리 조상들이 국방을 위해서 품을 많이 들였다는 평가의 말씀도 하시였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복구형성안을 지도해주시고 시공방법에 대해서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김일성주석께서 의도하시는대로 남문복구공사가 잘되도록 깊은 관심을 돌리시고 남문형성안도 지도해주시면서 공사과정을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그리하여 대성산성의 남문은 고구려시기 건축양식을 그대로 살려 소문봉과 주작봉골짜기사이의 남문터에 1978년 9월에 복구개건되였다. 남문은 가운데에 문길을 낸 견고하게 쌓아진 축대와 그 량쪽에 잇달린 적대, 축대우에 세운 문루로 이루어졌다. 남문의 총높이는 19. 5m이다.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문길을 냈다. 축대와 적대의 웃둘레에는 평가퀴를 쌓고 그곳에 낸 활구멍과 타구로 적을 사격할수 있게 하였다. 축대우에 세운 문루는 앞면 5간, 옆면 2간의 2층건물이다. 굵직하게 세운 배부른 기둥은 안정해보이며 안쪽모서리부분에 세운 4개의 기둥은 곧추 뻗어올라 2층기둥까지 겸하고있다. 건물내부는 통천정으로 시원하게 틔여놓았는데 대들보우에 대공을 세운 다음 충보를 놓고 거기에 다시 대공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보인다. 문루안팎에는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남문의 전반적모양은 지붕을 우진각지붕으로 한것 등 고구려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오늘 대성산성남문은 절세위인들의 불멸의 업적을 전하며 잘 보존관리되고있고 해마다 국내 인민들은 물론 수많은 남조선과 해외의 동포들, 외국인들이 여기에서 민족통일행사들과 국제적인 친선행사들을 벌리고있다.
◎자료◎ 국보로 보존하게 된 왕건의 금동좌상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주체81(1992)년 5월 5일 왕건릉을 현지지도하시면서 주신 교시에 따라 왕건왕릉개건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왕릉 북쪽 5m 지점에서 불상형식으로 된 금동좌상이 발굴되였다. 금동좌상은 땅속의 1. 5∼2m 깊이에서 나왔는데 사방 약 1. 5m정도의 화강석판돌이 이 유물을 덮고있었으며 그밑에 금동좌상이 앉은 모양으로 놓여있었다. 금동좌상은 청동주물로 만들고 그우에 금도금하였는데 높이는 1. 5m이고 무게는 80kg이다. 금동좌상은 라체형으로 되여있는데 머리에는 관을 씌웠다. 발굴당시 금동좌상몸체의 여러곳에 비단천쪼각들이 붙어있은것으로 보아 본래는 금동좌상에 옷을 입혔던것으로 보고있다. 일부 학자들이 발굴된 유물이 부처라고 하여 개성고려박물관에 전시하여놓았었다. 그런데 해당 부문에서 유물을 감정하는 과정에 금동좌상이 부처가 아니라 고려태조 왕건을 형상한 좌상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였다. 그리하여 력사학자, 미술가들이 협의를 거듭하면서 연구조사한 결과 유물이 발굴된 위치와 력사문헌들에 기록된 자료로 보아 금동좌상이 고려태조 왕건을 형상한것이라는것이 확증되였다. 금동좌상이 왕건왕릉주변에 묻히게 된것은 1010년부터 1232년사이에 4차에 걸치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피해를 막기 위하여 땅속에 묻었다는 견해일치를 보았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유골이 발굴되고 뒤이어 우리 나라 첫 통일국가인 고려태조 왕건의 금동좌상이 발굴된것은 력사학계에서 크게 자랑할만 한 일이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86(1997)년 8월 20일 고려태조 왕건의 금동좌상을 발굴확증한 자료를 보아주시고 왕건의 금동좌상을 국보로 보존관리하도록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로운 손길아래 고려태조 왕건의 금동좌상은 옛 모습그대로 보존되여 공화국의 문화유적유물보존정책의 정당성을 힘있게 과시하고있다.
◎자료◎ 상 원 암
상원암은 고려시기에 처음 세우고 리조시기에 고쳐세운 사찰이다. 상원암은 묘향산 보현사에 속한 암자로서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다. 상원암을 언제 처음 세웠는가 하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상원암에 고려시기의것으로 보이는 단청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마루도리의 상량문에는 이 건물을 1580년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상원암을 처음 세운것은 고려시기로 인정하고있다. 《묘향산 상원암 불영비》에는 1794년에 상원암을 대보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상원암은 본전과 칠성각, 불유각, 산신각 등으로 이루어졌다. 본전은 정면 5간(11. 06m), 측면 2간(5. 7m)이며 여기에 좌우 4간을 덧붙여 정면의 길이가 23. 78m 되게 하였다. 흘림기둥우에 2익공두공을 얹고 겹처마의 합각지붕을 이었으며 화려한 모루단청을 입혀 주위의 경치와 잘 어울리게 하였다. 여기에서 구조상특징은 퇴마루우에 길이 11m나 되는 긴 액방을 중간기둥없이 건너대여 전망을 좋게 한것이다. 칠성각은 본전 동쪽에 서있는 정면 1간, 측면 1간의 합각 포집인데 큰 나무 한대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명한 건물이다. 불유각은 본전 서남쪽에 서있는 6각의 수각이다. 사철 맑은물이 흘러나온다. 네모기둥에 3익공두공을 얹었으며 사가지붕을 이었다. 칠성각에서 동쪽으로 비스듬히 돌아가면 룡각석(룡의 뿔같이 생긴 바위)이 있으며 그우에 두그루의 소나무가 서있다. 현판에 《상원암》이라고 쓴 글씨는 19세기 전반기 이름난 명필가이던 김정희(호 추사)가 쓴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상원암은 당시의 우수한 건축술을 보여주기때문에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된다.
◎자료◎ 조선강점후 일제의 문화재파괴략탈죄악
강도 일제는 우리 나라를 강점한 첫 시기부터 조선민족의 긍지와 자부심, 력사문화전통과 애국심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민족문화재에 대한 날강도적인 파괴략탈만행을 감행하였다. 1905년 11월부터 1907년 4월까지의 사이에만도 일제는 여러기의 고려왕릉을 도굴하여 수많은 민족문화재들을 략탈하였다. 고려 24대왕 원종의 소릉, 그의 비 순경태후의 가릉이 여러차례에 걸쳐 피해를 입었으며 34대로 이어진 고려왕들의 분묘들가운데서 성한것이란 단 1기도 없었다. 일제는 평양시 락랑구역일대에 있는 락랑문화관계유적 역시 고려무덤 못지 않게 파괴하였으며 지어 조선민족의 원시조인 단군릉의 봉분을 파헤치고 무덤칸천정돌을 마스고 유골이 들어있는 관까지 마구 헤쳐버리는 무지막지한 만행을 감행하였다.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일제의 파괴략탈행위는 왕릉뿐아니라 나라의 곳곳에 있던 고분을 대상으로 잔악하게 감행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일제는 1921년 12월에 경상남도 량산의 신라시기 부부무덤을 파고 금동제관, 목걸이, 귀걸이 등 우수한 문화유물들을 수많이 략탈하였으며 1924년 10월에는 평양부근의 옛무덤들을 대규모적으로 파헤치고 우리 민족의 발전된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들을 모조리 략탈해갔다. 일제는 또한 임진조국전쟁때 왜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공을 세운 애국적군인들과 인민들의 소행과 넋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물들을 전부 파괴하였으며 우리 선조들의 애국적전통이 깃들어있는 유물들의 대부분도 흔적마저 찾아볼수 없게 마구 파괴략탈하였다. 그리고 철도와 도로부설, 도시와 공장, 군사시설건설 등을 구실로 평양성, 서울성 등 도성과 지방의 읍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들을 파괴하였으며 각지의 력사건물들과 고적들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온갖 날강도적인 방법으로 금관 장신구, 고려상감자기, 청동거울, 불상 등 우리 민족의 문화유물들을 강탈해간 일제는 그것을 도꾜우에노박물관에 가져다놓고 뻔뻔스럽게 저들의 《국보》로 세상에 공개하였다. 일제강점시기 우리 나라의 민족문화재파괴략탈을 적극 부추기고 그에 앞장선자가 바로 조선침략의 원흉인 《조선통감》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였다. 이자는 조선의 문화유물들을 《조사》, 《수집》, 《보존》한다는 미명하에 헌병, 경찰들은 물론 온갖 불량배들까지 동원하여 왕릉들을 무차별적으로 습격도굴하도록 명령하고 그러한 행위를 《참으로 나라를 빛내이는 행동》이라고 찬양하면서 우리 나라의 문화재들을 닥치는대로 략탈하도록 하였다. 일제의 조선민족문화재략탈책동은 《조선총독》 데라우찌에 의하여 더욱 강화되였다. 이자는 1915년에 이른바 《시정5주년 공진회》를 벌려놓고 가치있는 문화유물들을 출품하는 사람들에게 《후한 보상》을 준다고 허튼수작을 늘어놓는 한편 경찰들을 동원하여 조선사람들의 가정들까지 수색하여 진귀한 문화유물들을 이 《공진회》에 거두어들이였으며 《공진회》가 끝난 뒤에는 그것들을 《연구자료》로 리용한다는 구실밑에 빼앗아갔다. 일제가 이렇게 빼앗아간 문화재는 무려 수만점이나 되였다. 일제는 우리 선조들이 쌓아올린 건축술의 전통을 없애버리기 위해서도 미쳐날뛰였다. 그 단적인 실례로 《조선총독》 데라우찌가 《총독》의 권력을 리용하여 리조의 력대 왕궁인 경복궁안의 건물 하나를 통채로 헐어 자기 고향인 야마구찌에 가져다 그대로 다시 짓고는 《조선관》이라는 간판까지 달아놓고 거기에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가지가지의 이름난 보물들과 책들을 전시해놓은 사실을 들수 있다. 이 《조선관》에 전시된 략탈물가운데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 동방에서도 걸작품으로 인정되고있던 2개의 석불상과 대리석탑도 있었다. 이밖에도 개성부근의 고려시기 고분에서 도굴한 수많은 도자기와 장신구를 비롯한 무려 수천점의 유물들이 있었다. 특히 데라우찌는 우리 나라에서 국보중의 국보로 되고있던 《리조실록》까지 가져다가 도꾜대학에 넘겨주었는데 그후 그것은 1923년 간또대지진때 불에 타서 흔적조차 없어졌다. 지금도 일본의 각 대학 문서고들과 박물관들에는 우리 나라의 수많은 귀중한 유물들과 고서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시기 금속류《공출》의 미명하에 조선사람들의 가정에 있는 놋그릇과 놋수저 그리고 사찰의 종, 불상 등 공예적가치가 큰 금속제품들을 모조리 회수해다가 살인무기생산에 충당하였다. 력사에는 많은 전쟁과 파괴략탈죄행들이 기록되여있다. 하지만 일제와 같이 한 나라의 문화재들을 그처럼 깡그리, 그처럼 야만적으로 파괴략탈하고 남의 나라의 문화적재보들을 저들의 재보로, 《국보》로 만든 파렴치한 침략자, 략탈자를 력사는 알지 못하고있다.
◎자료◎ 성 불 사
정방산성안의 정방산주봉인 천성봉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성불사는 898년에 처음 세우고 고려시기에 고쳐 지었다. 성불사에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응진전, 청풍루, 명부전,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채의 건물과 5층돌탑이 있다. 1327년에 고쳐 지은 응진전은 평안북도 박천 심원사 보광전, 황해북도 연탄 심원사 보광전,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시기의 건물로서 우리 나라에 지금 남아있는 목재건물가운데서 가장 오랜 건축물의 하나이다. 극락전은 1376년에 고쳐 지은 건물이다. 비교적 높은 기단우에 정면 3간(12m), 측면 2간(6.3m)으로 지은 극락전은 배부른 기둥우에 3익공, 통천정, 배집지붕을 얹은 단층건물이다. 청풍루는 정면 5간(15. 74m), 측면 2간(7. 57m)의 배집이며 가운데간에 통로를 낸 대문채식다락으로서 지형조건에 잘 어울린다. 명부전은 정면 3간(8. 25m), 측면 3간(7. 05m)이며 2익공에 겹처마배집이다. 극락전앞에는 고려시기에 세운 돌탑이 있다. 두단으로 된 밑단우에 5층으로 세웠다. 이 탑은 만든 수법이 검소하면서도 세련되였다.
◎자료◎ 화가 김두량과 조선화 《소몰이군》
어디선가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타고 흐느적거리는 버들잎, 그 아래서 짚단을 베개삼아 굳잠에 든 소몰이군, 하루일에 지친 기색이 잠든 얼굴속에 비껴있다. 이마에 팔을 얹고 베적삼을 풀어헤친 소몰이군의 호기있는 성격적기질을 보여주는듯 불룩한 그의 배는 참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화폭이 아닐수 없다. 세상모르고 잠을 자는 자기 주인과는 무관한듯 부림소는 묵묵히 풀을 뜯는다. 볼수록 생동하고 진실한 소몰이군의 모습, 이 그림이 바로 18세기에 창작된 조선화 《소몰이군》이다. 일명 《목우도》라고도 불리우는 이 그림은 사실주의적풍속화개척자의 한사람인 김두량에 의하여 창작되였다. 인물화와 함께 풍경화, 동물화를 비롯한 많은 그림들을 그렸던 김두량은 《소몰이군》에서 당시 인민들의 고된 로동생활과 함께 로동속에서 참된 삶의 보람을 찾는 근면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해학적이면서도 정서가 넘치게 형상하였다. 하기에 그림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터져나오는 웃음을 금할수 없게 하면서 주인공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지게 한다. 언제인가 공화국을 방문하였던 한 외국인이 김두량의 그림 《소몰이군》을 보고 간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외국인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던지 후날 자기 나라를 방문한 조선대표단성원들에게 대뜸 《그 소몰이군이 아직도 자고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렇듯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민족적정서와 향취가 짙게 흘러나오는 《소몰이군》은 아직도 잠에서 깨여나지 못하고 조선미술박물관의 벽면에 정히 보존되여있다.
◎자료◎ 고려의학서적 《향약집성방》
《향약집성방》은 1433년 로중례 등이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약재로 병을 치료한 경험을 한데 묶어 총 85권으로 편찬하였는데 앞선 시기의 의학서적보다 과학리론수준이 상당히 높은것으로 평가되고있다. 《향약집성방》은 매개 병에 대한 서술을 개론과 원인론, 병리론과 증후론, 치료법과 침구법 등으로 나누어 체계정연하고 알기 쉽게 썼으며 959종의 질병에 대한 처방 1만 700여가지와 침뜸치료법 1 479가지를 종합서술하였다. 또한 여기에는 우리 나라에서 나오는 근 700가지의 약재와 그 산지, 약재의 특성과 약효, 채취방법과 사용법 등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여있다. 《향약집성방》은 우리 나라 고유의 치료예방법을 집대성한것으로서 당시 여러차례에 걸쳐 출판되여 의학교재와 병치료에 널리 쓰이였으며 그것은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의학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자료◎ 신선로의 유래
신선로는 여러가지 완제품료리를 만들어 신선로라는 그릇에 담고 간을 맞추어 끓여먹는 료리이다. 신선로는 일명 열구자탕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입을 기쁘게 해준다는 뜻이다. 신선로는 고기, 물고기, 남새, 산나물, 과일 등을 따로따로 가공하여 볶음, 전, 회, 초대, 완자 등을 만들어 신선로에 담아 끓여먹는 맛있고 영양가높은 료리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특색있는 우리 나라의 민족음식의 하나이다. 신선로는 말그대로 산해진미를 한그릇에 모아놓았다고 할만치 맛에서도 으뜸이고 볼품도 아름다워 음식상을 화려하게 하므로 연회상, 큰상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상료리로 많이 쓰인다. 신선로는 15시기말∼16세기초에 생겨난것으로 추측되는데 옛날책인 《해동죽지》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씌여져있다. 리조시기에 정희랑이라는 문관이 있었는데 봉건왕조의 악정에 환멸을 느낀 그는 깊은 산속에 숨어살면서 도술을 닦고있었다. 어느날 리퇴계라는 유명한 학자가 산속에서 그를 만나 세상에 다시 나와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런데 그가 엎드려 공손히 절을 하고 고개를 드니 신선같던 로승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집안에 음식을 끓이는 화독과 여러가지 음식감만이 남아있었다. 이때부터 이 음식을 신선같은 로승이 만든 음식이라는 의미에서 신선로라고 부르게 되였다.
◎자료◎ 독특하고 우아한 조선치마저고리
독특하고 세련된 형식과 짙은 민족적색채로 하여 세상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는 조선치마저고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슬기로운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유산중의 하나이다. 조선녀성들의 전통적인 민족의상인 치마저고리는 보기에도 우아하고 입기에 편리한 등의 우점이 많다. 치마저고리는 오랜 세월 조선녀성들의 고상한 정서와 미감에 맞게 부단히 발전되여왔다. 력사적으로 보면 조선치마저고리는 형태상에서 저고리와 치마의 길이가 반비례되는 관계로 변화되여왔다. 기록에 의하면 치마는 고려시기까지 군이나 상으로 불리워져오다가 리조시기인 15세기초부터 적마로 불리웠다. 치마라는 말이 처음 나온것은 1527년에 편찬된 《훈몽자회》에서이다. 고구려무덤벽화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삼국시기에 우리 녀성들은 긴 저고리에 허리로부터 아래단까지 주름을 세워잡은 주름치마 또는 허리에만 주름을 잡은 폭치마를 받쳐입었다. 고려시기에 주름치마형식이 점차 없어지고 폭치마를 기본으로 입게 되면서 종전과 달리 치마를 허리부위가 아니라 가슴부위까지 올려 고정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였다. 12세기에 편찬된 《고려도경》에는 고려시기의 치마가 높이 추켜올려 옆구리에 찔러감은것으로 묘사되였다. 치마는 리조시기에 이르러 그 형태와 종류가 더욱 다양해졌는데 옆을 터친 꼬리치마, 일할 때에 입는 도랑치마(몽당치마)와 앞치마, 치마아래단에 화려한 수를 놓거나 금장식을 한 례복용의 스란치마와 대란치마 그리고 무지기와 같은 속치마류 등이 있었다. 치마와 달리 저고리는 점차 길이가 짧아지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삼국시기에 허리부위에 띠를 매여입는것이 기본이던 저고리는 발해 및 후기신라시기부터 짧아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에 허리띠대신에 고름이, 선대신에 깃, 동정이 생기는 등 많은 변화를 거쳐 오늘과 같은 형태로 되였다. 이처럼 오랜 력사적과정을 거쳐 발전되여온 조선치마저고리는 그 독특한 형태와 무늬, 색갈로 하여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민족의상중의 하나로 자랑떨치고있다. 우선 형태구조상으로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다. 예로부터 조선치마저고리의 외형상특징을 놓고 상박하후한것이 멋이라고 일러왔는데 그 뜻인즉 저고리는 작고 짧으며 치마는 길고 풍만한것이 안정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어 조선녀성들에게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말이다. 치마와 저고리의 길이에서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마저고리가 조화로우면서도 안정감을 주는것은 곡선을 이룬 큰 폭의 두 소매와 두가닥의 긴 옷고름이 저고리의 면적과 무게를 보충해주기때문이다. 몸의 륜곽선이 두드러지게 살아나는 양복차림과는 달리 옷의 륜곽선을 잘 살리고 깃선, 동정선, 고름선 등이 그와 잘 조화되여 풍만하면서도 날씬한 자연미를 부각시켜준다는데 치마저고리의 중요한 외적특징이 있다. 옷무늬와 색갈은 조선치마저고리의 아름다움을 돋구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조선녀성들은 전통적으로 치마저고리의 옷무늬로 잔잔하고 은근하면서도 섬세한 무늬들을 좋아하였으며 치마저고리의 색갈도 고상하고 선명하면서도 순결하고 부드러운 색으로 택하였다. 16세기의 이름난 녀류화가 신사임당이 비단치마의 얼룩진 자리에 잠간사이에 방금 따온것 같이 보이는 포도송이를 그려넣어 사람들을 깜짝 놀래웠다는 이야기는 치마저고리에 어려있는 조선녀성들의 아름답고 고상한 정서를 잘 알수 있게 한다.
◎자료◎ 설 명 절
설명절은 새해의 첫날을 기념하여 쇠는 음력 정월초하루를 말한다. 설이란 새해 첫 명절을 이루는 고유한 조선말이다. 설명절은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국가시기부터 있었다. 그후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초가 되면 강가에 모여 돌팔매놀이, 눈끼얹기와 같은 편싸움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보냈다. 설명절맞이는 고려, 리조시기에 이어져 전통적인 풍습으로 더욱 고착되여 큰 규모로 진행되였다. 국가적으로 1896년부터 양력이 사용되였으나 우리 인민들은 양력설보다 음력설을 기본으로 설명절을 쇠였다. 섣달그믐날에는 집안팎을 정리, 청소하고 소나무, 학 등 십장생그림을 그려 벽장이나 병풍에 붙여서 명절분위기를 돋구었으며 설옷(설빔, 세장)과 설음식을 준비하였다. 설맞이행사는 새해 정월초하루날 아침부터 진행되였다. 설맞이행사로는 차례와 세배, 설음식대접, 민속놀이 등이 있었다. 차례는 설날 새벽에 먼저 돌아간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로서 조상숭배관념에서 생겨난 행사였다. 설날 이른아침에는 웃어른들에게 세배를 하였다. 우선 집안의 웃사람순서로 차례차례 큰절로 세배를 하였으며 다음에는 마을의 웃어른들, 친척집의 웃사람들, 스승들에게 세배를 하였다. 설날에 하는 즐거운 일은 다음으로 설음식을 잘 차리여 친척들이 한곳에 모여 먹거나 찾아오는 세배군들에게 대접하는것이였다. 설날음식은 세찬이라고 하였다. 이날에는 특색있는 음식인 떡국, 찰떡, 설기떡, 절편 등과 여러가지 지짐류, 당과류, 수정과, 식혜, 고기구이, 과실, 술을 마련하였고 특히 떡국은 설음식으로서 빠져서는 안되는것이였다. 설명절을 특별히 장식하고 즐겁게 한것은 민속놀이였다. 설날의 놀이로는 대중적인 놀이인 윷놀이와 장기놀이, 어린이들의 연띄우기, 썰매타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바람개비놀이 등이 있었다.
◎자료◎ 정월대보름
정월대보름은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즐겨쇠온 명절의 하나이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은 벌써 삼국시기에 정월대보름을 쇠였다고 한다. 정월대보름명절은 보통 음력으로 1월 14일부터 시작되였는데 이날은 작은 보름이라고 하고 다음날은 대보름이라고 하였다. 정월대보름을 맞으며 우리 선조들은 새해의 행운과 풍작을 바라는 소박한 념원을 반영하여 여러가지 의례행사들을 진행하군 하였다. 대표적인것들로서는 집집마다 벼, 기장, 조를 비롯한 낟알이삭 등을 장대에 달아매여 마당에 세워놓는 낟가리대세우기, 녀인들이 새벽 일찌기 우물물을 길어오는 룡알뜨기 등을 들수 있다. 정월대보름명절에 특별히 이채를 띤것은 달맞이였다. 쟁반같은 둥근달을 먼저 보는 사람에게 그해에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여 대보름날이면 남녀로소 할것없이 앞을 다투어 달맞이에 떨쳐나서군 하였다. 정월대보름날 우리 선조들은 여러가지 특색있는 명절음식을 해먹으며 즐기였다. 이날의 명절음식으로는 오곡밥, 약밥, 9가지 마른나물반찬, 엿, 복쌈 등이 유명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또한 다채로운 민속놀이로 정월대보름날을 즐겁게 보내군 하였다. 마을사람들의 단합된 힘을 시위하는 바줄당기기, 논밭이나 최뚝의 묵은 풀에 불을 놓아 해로운 벌레알이나 잡균들을 태워버리는 쥐불놀이, 어린이들의 연띄우기, 바람개비놀이 등으로 명절분위기를 돋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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