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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옛날책도 민족의 귀중한 재부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가지고있는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훌륭한 책을 많이 찍어내여 세계에 명성을 떨치였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책들에는 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전통이 반영되여있습니다. 옛날책에는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위훈을 떨친 우리 인민의 투쟁자료와 인류력사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귀중한 과학기술적발명과 관련한 자료도 있으며 문학과 예술, 미풍량속에 대한 자료도 있습니다.》 김 정 일
민족의 자랑-《리조실록》
《리조실록》은 519년간에 걸치는 리조 27대왕조사를 간단없이 일기체형식으로 기록해놓은 정부일지이다. 실록은 력사적사실을 있은 그대로 쓴다는 직서, 직필의 원칙과 사료취재에서 객관성과 진실성을 보장하는 방향에서 왕대가 바뀔 때마다 편찬되였다. 정부기관들은 물론 왕도 포함하여 중앙 및 지방관리들의 현행 행정사무처리정형과 그들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선행이건 악행이건 사실그대로 놓침없이 기록하였으며 인민들의 동향과 생활과정일반에 대해서까지 사회생활전반을 제때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자연지리적변천과정과 천문, 기상, 수문, 지질의 이상현상 등 동식물의 변태에 이르기까지 자연현상전반에 대해서도 매일매일에 있었던 현상을 나타나는 그대로 적어놓았다. 또한 중국, 일본 등 이웃나라들과 동남아시아나라들, 로씨야, 영국, 프랑스, 도이췰란드, 미국 등 여러 나라들과 관련한 자료도 서술되여있다. 총 1 763권(근 90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리조실록》에는 이렇듯 리조봉건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외교 등에 관한 력사자료들과 천문, 기상, 의학, 농학 등 과학기술일반에 관한 자료들이 전면적으로 기록되여있어 리조시기의 력사와 이 시기 우리 인민이 창조하여놓은 우수한 문화를 엿볼수 있게 하는 력사문헌이다. 《리조실록》은 포괄시기의 장구성, 내용의 풍부성, 분량의 방대성에 있어서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력사기록문헌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이 귀중한 국보인 《리조실록》은 편찬초기 4조로 인쇄되여 서울과 충청도의 충주, 경상도의 성주, 전라도의 전주에 있는 사고에 보관되여있었는데 우리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으로 인한 무수한 전란속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1592년 임진조국전쟁시기 서울과 충주, 성주에 보관되였던 실록3조는 일본침략자들에 의하여 불타버렸고 전주에 보관되였던 실록만이 전라도 태인사람인 손흥록, 안의,한춘에 의하여 간신히 구원될수 있었다. 한조밖에 남지 않은 《리조실록》을 보존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간고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이 임진조국전쟁을 일으키고 전라도로 기여들 위험이 닥쳐오자 그들은 전주사고에 보관되였던 《리조실록》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소개시켰다가 배길로 충청도의 아산을 거쳐 황해도 해주로 옮기였다. 그리하여 《리조실록》이 구원되였는데 일본침략자들이 다시 기여들자 그들은 또다시 자기 집 하인들과 함께 50바리나 되는 방대한 량의 실록을 강화도로 옮기였으며 그것도 안심치 않아 평안도 안주를 거쳐 먼 후방인 묘향산의 불영대에 보관하였었다. 그후 임진조국전쟁이 끝나자 《리조실록》은 1601년에 강화도로 옮겨졌다. 1부밖에 남지 않은 이 실록을 저본으로 하여 1606년에 다시 4부를 인쇄하였다. 저본으로 한 본래의 전주사고본은 강화도 마니산사고에, 4부는 춘추관, 경상도 안동 태백산, 평안도 향산 묘향산, 강원도 평창 오대산사고들에 각각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후 춘추관본은 불타버리고 묘향산사고본은 전라도 무주 적상산사고로 옮겼으며 강화도 마니산사고본은 1660년에 강화도 정족산사고로 옮겼다.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사고들에 보관된 실록은 리조말에 이르기까지 손색없이 보관되였다. 《리조실록》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적상산본을 리왕직도서실로 옮기고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은 서울대학도서관에 이관하였다. 오대산본은 일제가 도꾜대학으로 략탈하여갔다가 1923년 간또대지진때에 불태워버렸다. 이처럼 간고한 로정과 시련을 겪은 《리조실록》은 해방후 미제가 강점한 남조선에서 천시당하고 조국해방전쟁의 불길속에서 내동댕이쳐져서 언제 이 세상에서 없어질지 모를 비참한 운명에 처해있었다. 그러했던 《리조실록》이 오늘 공화국의 귀중한 국보로 보존되여있으며 번역출판되여 력사연구에 적극 리용되고 있다. 우여곡절을 겪던 나라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리조실록》이 빛을 보게 된데는 어떤 사연이 깃들어있는가. 조국해방전쟁이 한창이던 주체39(1950)년 7월 어느날 교육부문의 권위있는 력사학자들은 뜻밖에도 최고사령부로 오라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리조실록》은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귀중한 재보이다, 지금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국은 시련을 겪고있으며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적들에 의하여 파괴소각되거나 도난당하고있다, 《리조실록》도 피해를 입거나 없어질수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절대로 수수방관할수 없다, 우리는 민족의 귀중한 재보인 《리조실록》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반드시 구출하여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물론 전시의 어려운 조건에서 근 1 800권에 달하는 《리조실록》을 사소한 손상도 없이 구출한다는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나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리조실록》을 후방의 안전한 장소에 옮기고 잘 보관하여야 한다고 또다시 강조하시였다. 《리조실록》을 구출해올데 대한 김일성주석의 말씀은 력사학자들의 심금을 뜨겁게 울리며 걷잡을수 없는 감격의 파도를 세차게 일으켰다. 돌이켜보면 파괴와 살륙으로 특징지어지는 전쟁의 참화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류의 문화재들이 불타버렸는가. 어느 나라, 어느 력사에도 한 나라 수령이 가렬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문화재를 구출하기 위한 사업을 몸소 조직하시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있다. 사람들의 희생을 동반하는 전쟁에서 문화재가 손실을 당하는것쯤은 의례히 있을수 있는 일로 여겨왔었다. 누가 누구를 하는 판가리싸움에서는 사실상 그런데까지 돌릴 정신적여유가 없는것이다. 오로지 나라의 재보를 민족의 운명과 떼여놓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주석께서만이 그처럼 간고한 싸움속에서도 하나의 력사문헌에 불과한 《리조실록》을 구출할데 대한 임무를 주실수 있었으니 그때 력사학자들의 심장이 어찌 격정으로 높뛰지 않을수 있으랴! 그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리조실록》을 구출해오는데 수송기재가 필요할것이라고 하시면서 어느 한 군사지휘관에게 군용자동차를 긴급히 보장해줄데 대한 지시를 주시였고 서울주둔 인민군부대 지휘관을 전화로 찾으시여 《리조실록》의 구출과 호송을 보장할데 대하여 이르시였으며 친히 전선사령관앞으로 력사학자들의 편의를 최대로 보장할데 대한 명령서를 쓰시였다. 명령서를 작성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친히 수표까지 하신 다음 그것을 력사학자들의 손에 쥐여주시면서 꼭 성공을 바란다고 매 사람들의 손을 굳게 잡아주시였다. 명령서를 받아안은 력사학자들은 김일성주석께서 친히 마련하여주신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달려나갔다. 그들이 서울에 도착하니 《리조실록》은 포연과 흙먼지 속에서 여기저기 날리며 나딩굴고있었다. 리승만역도는 서울에서 쫓겨나게 되자 《리조실록》을 헌 휴지장처럼 내던지고 도망쳤던것이다. 나라의 귀중한 민족문화재가 여지없이 유린되고있는 이 광경앞에서 그들은 원쑤들에 대한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하며 《리조실록》을 한책한책 주어모으고 먼지를 털어 군용자동차에 정성껏 담아실었다. 승리의 진격을 다그치며 모두가 오직 남으로 남으로만 달리고있던 그 시각, 《리조실록》을 실은 차는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북으로, 평양으로 달리였다. 《리조실록》을 구출해왔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누구보다 기뻐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력사학자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며 수고가 많았다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리조실록》을 최고사령부에다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후 《리조실록》의 번역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려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여러 기회에 한문으로 씌여진 이 책을 번역할데 대하여 말씀하시였으며 나라의 중대사를 토의하는 어느 한 회의에서 《리조실록》을 번역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면서 번역의 목적과 지켜야 할 원칙적요구들도 뚜렷이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드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리조실록》번역사업을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후대들을 위하여 반드시 우리 세대에 하여야 할 중대한 과업으로 내세우시고 힘있게 이끌어주시였다. 이미 1960년대에 《리조실록》은 우리 민족의 자랑입니다, 《리조실록》은 왕대를 단위로 하여 리조 500년간의 력사를 매일매일 체계적으로 기록해놓은 력사책입니다, 《리조실록》은 포괄기간이 대단히 길고 량이 방대할뿐아니라 내용이 다방면적이고 풍부한것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세계에는 《리조실록》과 같이 방대하고 체계화된 력사기록을 가지고있는 나라가 드뭅니다라고 말씀하시여 사람들의 가슴속마다에 높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새겨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리조실록》번역사업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직접 주신 과업인것만큼 이 사업에 모든 힘을 집중하여야 한다고, 집중적으로 번역할수 있도록 최상의 사업조건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유능한 로학자들과 새 세대 지식인들을 망라한 강력한 번역집단을 무어주시였고 필요한 모든 조건을 다 마련해주시였다. 숭고한 믿음과 은혜로운 사랑이 깃든 보약까지 받아안으며 《리조실록》을 한페지한페지 번역하여 수백권으로 된 번역본을 만들던 나날에 로학자들과 새 세대 지식인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처럼 민족의 재부를 끝없이 아끼고 빛내여주시는 위대한 령도자, 절세의 애국자가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며 그 위대한 품에서 나라의 민족고전을 연구하는 자기들처럼 행복하고 긍지높은 사람들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격정을 금치 못하였다. 드디여 《리조실록》번역본이 출판되였을 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못내 기뻐하시며 분에 넘치는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번역사업을 책임진 학자에게는 공화국공민의 최고영예인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도록 하여주시고 번역에 참가한 모든 성원들에게도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안겨주도록 하시였다.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주체85(1996)년 8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 력사를 가지고 인민들의 가슴속에 조국애를 키워줄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우리는 세상에 자랑할만 한 유구하고 찬란한 민족문화와 력사를 가지고있다는것을 잘 해설선전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군혁명령도의 길을 이어가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오래전의 일을 잊지 못하시며 그때 우리 학자들이 《리조실록》번역을 잘하였다고, 이 부문을 책임졌던 로학자가 후비들을 잘 키워놓았다고 뜨겁게 회고하시였다. 이처럼 《리조실록》을 민족의 자랑으로, 귀중한 재보로 여겨주신 절세의 위인들의 은혜로운 사랑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수수께끼로 신비경속에 묻혀있던 《리조실록》은 우리 시대에 와서 비로소 우리 말로 번역출판되여 자기의 진면모를 세상에 드러내게 되였으며 인류문화사발전에 값있게 리용되게 되였다.
오랜 발전력사를 가지고있는 고전소설
우리 나라에서 고전소설은 오랜 발전력사를 가지고있다.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가지고있는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소설을 창작하여왔다. 고전소설은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생활과 인민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비교적 진실하게 반영하여 창작되였으며 사회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미학적요구가 높아지는데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여왔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은 대부분 진보적경향을 가진 작품이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이 가지고있는 진보적인 특성은 당대사회의 불합리성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비판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은 봉건적착취와 예속에 얽매인 인민대중의 처지를 비교적 진실하고 생동하게 펼쳐보여주었다. 소설의 주제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비판적경향은 우리 나라 고전소설이 가지고있는 일반적인 특징의 하나이다. 실례로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진 《홍길동전》은 임진조국전쟁이후 심각한 사회적문제로 제기되였던 적서차별을 비판한 국문소설이다. 고전소설 《홍길동전》에는 주인공 홍길동이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던 사정과 그가 활빈당에 들어있는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합천 해인사를 습격하고 함경감사를 징벌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당시 우리 나라의 현실을 생동하고 진실하게 보여주었다. 고전소설 《홍길동전》은 지난날 우리 인민들속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전설처럼 전하여왔다. 그것은 홍길동의 신비로운 재주이야기가 흥미를 끌었기때문이 아니라 작품에 반영된 봉건통치배들에 대한 강한 비판적경향이 인민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사정과 관련된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가운데는 《홍길동전》뿐아니라 《사씨남정기》, 《장화홍련전》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작품이 대체로 비판적경향을 가지고 씌여졌다. 그중 김만중이 국문소설로 창작한 고전소설 《사씨남정기》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고전소설 《사씨남정기》는 숙종시기 궁중에서 있은 사실을 소재로 하여 봉건적인 축첩제도가 빚어낸 사회적악덕을 비판하고있다. 주인공 사정옥은 용모가 아름다울뿐아니라 시부모와 남편에게 극진하여 가문의 자랑이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자 남편 류한림에게 권고하여 첩을 맞아들이도록 한다. 그리하여 첩으로 들어오게 된 교채란은 아들 장주를 낳고 남편의 사랑을 받으나 사씨부인이 아들 린아를 낳게 되자 그를 시기하다못해 무서운 흉계를 꾸민다. 그는 이 집의 문객이며 모사군인 동청과 내통하여 류한림이 사씨부인에게 결혼의 신표로 주었던 옥지환을 훔쳐내여 동청의 심복인 랭진에게 줌으로써 류한림으로 하여금 랭진과 사씨부인간에 무슨 관계가 있는것으로 의심하게 한다. 또한 그는 자기 소생인 장주를 죽이고 그 죄를 사씨에게 들씌워 사씨가 음탕하고 악한 녀인으로 몰려 남편에게 버림받게 만들며 자기는 정실부인이 된다. 억울한 루명을 쓰고 쫓겨난 사씨는 죽어도 이 집 사람이 되겠다고 하면서 시부모의 산소밑에 집을 정하고 지내다가 악랄한 교채란의 모해로 그곳에도 있을수 없게 되자 자기를 믿어주던 두부인을 찾아 남방으로 떠난다. 그러나 두부인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모진 마음을 먹고 물에 빠져죽으려 하다가 녀승 묘혜에 의하여 구원된다. 한편 교채란은 동청과 음란한 생활을 하면서 류한림마저 죽이려고 그가 불충하다는 거짓증거물을 만들어 간신 엄승상에게 상소함으로써 멀리 귀양가게 만든다. 동청과 교채란은 류연수(류한림)의 집과 재산을 차지하며 동청은 지방의 태수까지 되여 백성들에 대한 로략질을 일삼는다. 교채란은 동청마저 배반하고 랭진과 내통하다가 창녀로 굴러떨어진다. 세월이 흘러 왕이 태자를 봉하게 되자 대사령이 내려 류연수는 류배지에서 풀려나오고 사씨부인과도 만나게 된다. 마침내 간신 엄승상의 죄가 드러나 동청도 그와 함께 처단되고 엄승상에 의하여 밀려났던 신하들이 등용되여 류한림은 내부시랑이 된다. 작품의 결말은 류한림이 창기로 전락된 교채란을 잡아다 그 죄를 다스려 처형하고 사씨부인과 다시 가정을 이루며 림씨를 후실로 맞아 부귀영화를 누리는것으로 끝나고있다. 작품은 당시 봉건사회의 부패상을 보여주고 우리 말과 글로 인간성격을 비교적 생동하게 창조한 고전소설의 대표작의 하나로서 그이후 사실주의소설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우리 나라 고전소설은 당대 사회의 불합리성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폭로비판하였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의 진보적특징은 또한 애국적경향이 강한것이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가운데는 반침략애국적경향이 강한 작품이 많다. 임진조국전쟁이후에 창작된 고전소설 《임진록》이나 병자전쟁이후에 나온 《박씨부인전》, 《림경업전》과 같은 작품들은 반침략애국주의적지향이 강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긍정인물들은 남녀로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침략자들을 끝없이 미워하고 나라와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로 그려져있으며 반침략투쟁에서 그들이 세운 위훈을 높이 칭송하고있다. 고전소설 《옥루몽》은 우리 나라 중세소설가운데서 비교적 큰 작품이다. 사건이 복잡하게 엉켜있고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고전소설 《옥루몽》에서 작가가 애써 강조한 측면은 애국적경향이다. 그것은 주인공이 늘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외적이 침입해오자 한몸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가 용감히 싸우는데서 표현될뿐아니라 등장인물의 성격을 철저하게 애국과 매국의 관계속에서 부각시키고있는데서 나타난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의 비판적이며 애국적인 경향은 사실주의적특성과 밀접히 관련되여있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은 대체로 사실주의적수법으로 씌여졌으며 특히 임진, 병자전쟁이후 사실주의적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고전소설 《춘향전》은 사실주의적창작방법에 의하여 씌여진 우리 나라 고전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말할수 있다. 고전소설 《춘향전》은 봉건사회에서 량반과 상민사이의 사회적불평등을 비판하고 남녀간의 사랑은 재산과 신분에 차별없이 자유롭게 할수 있다는것을 주장하였다. 고전소설 《춘향전》에서는 사람을 빈부귀천에 따라 갈라놓고 신분이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수도 결혼할수도 없게 하였던 봉건적신분제도를 비판한것이 기본핵이다. 고전소설 《춘향전》이 구전설화에 토대하여 이루어진 애정륜리소설이면서도 리조봉건사회 말기의 심각한 사회적문제를 부각시킬수 있었던것은 그것이 당대 사회에서 제기되였던 근본문제의 하나를 사실주의적으로 그렸기때문이다. 우리 나라 중세고전소설에서는 랑만주의적수법도 일정하게 리용되였다. 고전소설 《심청전》에서 심청이 왕후로 되는것이라든가,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에서 장화와 홍련이 행복을 누릴수 있게 되는것은 다 랑만주의적수법을 리용한것이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에서는 많은 경우 인민대중이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행과 고통은 사실주의적으로 그렸으며 희망과 념원은 랑만주의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에 꿈이야기가 많은데 그것은 대체로 작가의 념원이나 리상을 랑만주의적수법으로 이야기하였기때문이다. 우리 나라 고전소설가운데는 《토끼전》과 같이 오랜 구전설화에 기초하여 씌여진 우화소설도 적지 않은데 이것도 매우 이채로운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 고전소설은 주제사상적내용이나 예술적형식이 매우 풍부하고 다양하다.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옳게 살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계승발전시켜나가도록 하는데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리고계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열정에 의하여 창작된 고전소설들을 많이 발굴정리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53(1964)년 3월 29일에 발표하신 로작 《우리 나라 고전소설의 진보적특성에 대하여》에서 우리 나라 고전소설의 진보적특징들을 하나하나 밝혀주시면서 우리 민족의 우수한 유산의 하나인 고전소설작품을 더 많이 출판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 나라의 옛날것은 볼것이 없다고 하면서 무시해버리는 허무주의적경향과 옛날것을 우상화하면서 무조건 그대로 되살리려는 복고주의적경향을 다같이 극복할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주체59(1970)년 3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과 담화하시면서 지난날의 문학예술작품을 발굴정리하며 재현하는 사업을 잘할데 대하여 또다시 강조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좋은 고전문학작품을 더 많이 찾아내여 우리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한문으로 된것은 우리 말로 번역하고 어떤것은 원작을 기초로 하여 다시 쓸수 있다고 하시면서 지난날의 문학예술작품을 재현하는 사업에서 력사주의원칙과 현대성의 원칙을 옳게 구현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오랜 발전력사를 가지고있는 고전소설들을 적극 찾아내도록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68(1979)년 12월에 전 90권으로 된 《조선고전문학선집》을 출판할데 대한 원대한 구상을 펼쳐주시였다. 총서체계로 출판하는 《조선고전문학선집》. 여기에는 오랜 세월 일제의 식민지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하여 무참히 짓밟혀 점차 자취를 감추었던 고전소설들을 발굴정리함으로써 우리 나라야말로 찬란한 민족문화유산을 가진 반만년력사국이며 우리 선조들이야말로 예로부터 가장 슬기롭고 문명한 민족문화의 창조자들이라는것을 세계만방에 자랑높이 떨치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뜻이 어리여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1(1992)년 1월에 발표하신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 실학파문학에 대한 평가와 처리도 공정하게 하여야 한다는데 대해서도 밝혀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실학파는 량반사대부들의 부패성과 공리공담, 무너져가는 봉건국가의 후진성을 개탄하고 《실사구시》의 구호밑에 사회적진보와 문명발전을 위하여 투쟁하였으며 우수한 문학예술작품을 창작하여 우리 나라 근대문학의 려명기를 개척하는데 기여하였다, 박연암과 정다산의 문학작품은 지금으로부터 200년전에 나온것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것이며 세상에 자랑할만 한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문학예술부문에서는 실학파의 문학작품을 출판하고 세계에 널리 소개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실학파작가뿐아니라 최치원, 리규보, 김시습, 정철, 허균, 김만중을 비롯하여 고대와 중세, 근대와 현대의 이름있는 작가들과 그들의 우수한 작품들 그리고 《흥부전》, 《심청전》과 같이 작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많이 찾아내여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널리 소개선전하여야 한다고 밝혀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특히 19세기에 창작되였으나 인멸되여 전해지지 않은 많은 작품을 적극 찾아내야 한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에 이름있는 작가도 있고 인류문화의 보물고에 기여한 명작도 있다는것을 세상사람들이 알게 하여야 한다고, 그래야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줄수 있고 민족문학예술유산을 귀중히 여기고 옳게 계승발전시킬수 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고전소설의 발굴에 큰 의의를 부여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온달전》, 《장화홍련전》, 《홍길동전》과 같은 소설들을 현대조선말로 고쳐서 출판보급하여 사람들이 즐겨 읽도록 하시였으며 《조선사화전설집》도 많이 출판하도록 하시였다. 그 각별한 관심속에서 《심청전》, 《흥부전》, 《하진량문록》, 《을지문덕전》, 《온달전》 등 수많은 고전소설들이 출판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아득히 먼 옛날에 창작된 고전문학, 파란많은 력사의 흐름속에 빛을 잃고 사라져가던 고전소설들을 새로 수많이 발굴하도록 하시는 한편 그 소설이 담고있는 내용을 주제로 하는 영화와 가극, 연극들을 새롭게 창작하도록 현명하게 령도하시였다. 주체70(1981)년 3월 전국문화예술인열성자대회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 《주체적문학예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에서 민족고전작품들을 가극으로 만들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0(1991)년 7월 17일에 발표하신 고전적로작 《음악예술론》에서 《피바다》식가극의 주제와 양상을 다양하게 개척하자면 현대물과 고전물을 배합하여야 한다고 밝혀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민족고전작품을 《피바다》식가극으로 만드는데서 력사주의적원칙과 함께 현대성의 원칙을 옳게 구현하는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시면서 민족가극 《춘향전》창조과정을 실례드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민족가극 《춘향전》을 처음 창조할 때 월매의 성격을 오늘의 시점에서 옳게 규정하지 못하고 옛날에 하던 식으로 괴벽한 인물로 형상하면서 그가 부르는 노래도 고티가 나는 판소리식으로 하였다, 처음에는 천대받고 버림받은 한 어머니로서의 월매의 소박한 성격을 옳게 그리지 못하였으며 춘향과 몽룡의 사랑을 보여주는 아름답고 유순한 가극음악의 양상적통일을 파괴하였다, 향단이나 방자도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면서 건달이나 부리는 인물로 형상하였기때문에 그들의 계급적성격이 뚜렷이 살지 못하였다라고 지적하시였다. 계속하여 민족가극 《춘향전》은 월매와 향단, 방자의 성격형상문제를 비롯한 일련의 부족점들을 오늘의 시점에서 바로잡은 결과 《피바다》식가극창작원칙에 기초한 새형의 민족가극으로 훌륭히 창조될수 있었다고 밝혀주시였다. 그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 민족고전문화유산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통하여 형성된것이기는 하지만 계급적제한성과 시대적제한성을 가지고있기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을수 없다고 지적하시면서 아무리 훌륭한 민족고전이라 하여도 오늘의 시대적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게 비판적으로 계승해나가야 한다고 명철하게 밝혀주시였다. 이처럼 오랜 발전력사를 가지고있는 고전소설들을 적극 찾아내고 그것을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게 계승발전시킬데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고귀한 가르치심과 현명한 령도가 있어 공화국에서는 고전소설을 비롯한 문학예술작품유산들이 수많이 발굴되게 되였으며 그 내용들을 주제로 하는 영화와 가극, 연극들이 새롭게 창작되였다. 그중의 하나가 중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춘향전》이다. 이 고전작품은 영화와 민족가극으로 재현되여 관중들로부터 대인기를 끌고있다. 남조선의 어느 한 예술연구소가 내놓은 《남북음악극 <춘향전>비교연구》에 따르면 공화국의 민족가극 《춘향전》이 《가장 높은 작품완성도를 보인것으로 평가》됐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가 있어 아득히 먼 옛날에 창작된 고전소설, 파란많은 력사의 흐름속에 빛을 잃고 사라져가던 우리 나라 고전문학작품들이 새로 수많이 발굴정리되고 현대적미감에 맞게 문학예술의 여러 형태로 재현되여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세계만방에 더 높이 떨칠수 있게 되였다.
새롭게 평가된 카프문학작품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맑스-레닌주의가 급속히 보급되고 로동운동이 앙양되는 사회적환경속에서 자기의 창작을 무산대중의 리해관계와 결부시키려는 작가들이 출현하고 그들에 의하여 《염군사》, 《파스큐라》 등 문학단체들이 조직되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프로레타리아문학의 기치를 든 새로운 경향의 문학(신경향파문학)이 출현하였다. 신경향파문학이라고 불리운 진보적작가들의 문학운동은 1925년에 조직화된 형태로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의 결성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조명희, 송영, 리기영, 한설야, 류완희, 김창술, 박세영, 박팔양을 비롯한 진보적문학예술인들이 참가하였다. 카프는 1927년에 전국대회를 열고 조직을 재정비하였으며 계급적립장을 뚜렷이 밝힌 새 강령을 채택하였다. 동맹안에 문학부, 연극부, 영화부, 미술부, 음악부 등을 두고 지방도시들과 일본의 도꾜 등에 10여개의 지부를 두었다. 카프는 1930년에 다시 조직을 정비하면서 부를 동맹으로 확대개편하고 기관지로서 《문학창조》, 《연극운동》, 《집단》 등을 발행하였다. 카프가 조직되고 그의 진보적문학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1931년과 1934년 두차례에 걸쳐 사건을 조작하고 카프성원들을 대량적으로 검거투옥하였으며 1935년 5월에는 주요성원들을 수감시켜놓은채 강제로 카프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그후에도 대부분의 카프출신작가들은 진보적문인으로서의 량심을 지켰다. 카프작가들은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겪는 무산대중의 비참한 생활을 그리면서 그 원인을 계급적견지에서 밝혔으며 착취자, 억압자들을 반대하는 그들의 항거정신을 형상하였다. 특히 카프가 새로운 강령을 내놓은 1927년이후시기에 나온 장편소설 《고향》, 《황혼》, 단편소설 《락동강》, 희곡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 시 《민중의 행렬》, 《앗을대로 앗으라》, 《산제비》, 《진달래》와 그밖의 많은 작품들에는 로동계급을 비롯한 무산대중의 사회적해방을 위한 지향이 반영되여있다. 카프작가들은 비록 미약하지만 로동계급적립장에서 조직의 강령을 내걸고 투쟁하였으며 작품창작에서도 로동계급의 혁명적립장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명하였다. 더우기 1930년대 카프문학은 항일혁명투쟁의 영향밑에 그에 대한 인민들의 뜨거운 공감과 지지성원을 반영하는데로 지향하였다. 카프는 부르죠아반동문학을 반대하고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옹호하여 문학운동을 전개한 진보적인 문학예술단체로서 해방전 우리 나라 프로레타리아문학예술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한때 문학분야에서는 카프문학에 대한 평가를 매우 어정쩡하게 하고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카프문학을 비판적사실주의문학의 계렬에도 넣지 않고 사회주의적사실주의문학의 계렬에도 넣지 않았으며 그저 프로레타리아문학이라고 막연하게 규정하고있었다. 이것은 카프문학에 대한 공정한 평가라고 말할수 없었다. 그러던 카프문학이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비범한 예지와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우수한 과거문학유산으로 옳게 평가되게 되였고 당대 시기의 문인들과 작품들도 더 많이 발굴되여 민족문학사에서 취급되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1(1992)년 1월 20일에 발표하신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 카프문학에 대한 평가와 처리를 공정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카프의 작품에는 비판적사실주의작품도 있고 사회주의적사실주의작품도 있다, 특히 카프가 새로운 강령을 내놓은 이후시기에 나온 작품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사실주의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바와 같이 카프에 망라된 많은 작가들은 자기들의 작품에서 당대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우리 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해방을 주장하였으며 무산계급의 선각자를 전형으로 내세우고 사회주의적리상을 표현하였다. 물론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검열제도로 말미암아 작품에서 진보적인것이 적지 않게 삭제되거나 뚜렷이 강조되지 못한 점은 있으나 총제적으로 보아 그 내용은 사회주의적이였다. 카프문학은 민족문학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며 우리 인민의 민족적감정과 지향에 맞는 우수한 형식을 창조하였으며 선행한 사실주의문학의 제한성에서 벗어나 사상예술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있었다. 이것은 카프문학이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적사실주의사조를 이루었다는것을 말하여주는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물론 카프는 로동계급의 당의 령도를 받지 못하였으며 작가의 세계관적제한성으로 하여 창작활동에서 이러저러한 제약을 받게 되였지만 로동계급의 당의 령도를 받지 못하였다고 하여 카프문학을 사회주의적사실주의가 아니라고 할수 없다고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어떤 문학작품이 사회주의적사실주의문학인가 아닌가 하는것은 사상예술적으로 완벽한가 완벽하지 못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같은 하나의 창작방법에 기초한 작품가운데는 사상예술적으로 완벽한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것도 있다, 문제는 그 창작원칙과 사상적경향이 어떠한가 하는데 있다고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로작에서 카프 재조직이후의 문학은 비록 이러저러한 약점을 가지고있지만 기본창작경향이 로동계급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있는것으로 하여 사회주의적사실주의문학계렬에 속할수 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카프문학의 사회주의적사실주의경향을 인정한다고 하여 유산과 전통의 계선이 모호해지는것도 아니며 혁명적문학예술전통에 카프문학이 포함되는것도 아니다, 카프문학은 선행한 사회주의적사실주의의 창작방법에 기초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우리 나라의 우수한 과거문학유산에 속한다고 규정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카프문학에 대하여 응당한 평가를 주시였을뿐아니라 해방전 무산계급의 계급적해방을 지향한 카프문학작품들을 널리 취급출판하도록 하시였으며 카프시대 문인들을 세계적인 걸작영화, 조선영화의 얼굴이라고 할수 있는 《민족과 운명》에서 다부작으로 형상하도록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카프문학과 함께 신경향파문학에 대하여서도 응당한 위치에서 옳게 평가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1920년대 전반기 우리 나라 프로레타리아문학의 기치를 들고 새로운 경향으로 나타난 최서해, 리상화, 리익상의 초기작품을 비롯한 신경향파문학은 비판적사실주의로부터 사회주의적사실주의에로 넘어가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가르쳐주시였다. 20세기 초엽의 우리 나라 문학작품을 더 많이 찾아내고 옳게 평가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 문학예술발전과 인민의 문화정서생활에 이바지한 좋은 작품을 썼다면 그 작가와 작품을 아끼고 대담하게 내세워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리광수의 소설 《개척자》와 최남선의 초기시들을 문학사에서 응당한 수준에서 취급하도록 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처럼 카프문학에 대한 옳바른 평가를 해주시였기에 지난날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인멸되였거나 파묻혀있던 문학작품들이 빛을 보게 되였으며 우리 나라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공백이 메꿔지게 되였다.
다시 태여난 민족의학재보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의학이 발전하여온 나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우리 나라의 고유한 약재와 약물, 뜸과 침에 의한 고려의학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특히 리조시기에 이르러서는 의학의 전문분야들이 새로 개척되고 고려의학성과들이 집대성되여 중세의학의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였다. 당시 의학자들은 선행시기의 성과와 향약에 대한 깊은 연구와 치료경험에 기초하여 중세고려의학의 체계를 정연하게 세워놓았으며 우리 나라의 의학만이 아니라 당시 동방나라들의 거의 모든 의학발전성과전반을 반영한 《의방류취》를 집필출판하였다. 《의방류취》는 15세기 우리 나라의 유명한 의학자였던 로중례를 비롯한 수많은 의학자들이 1443∼1445년사이에 편찬하고 세차례의 교열과 수정을 거쳐 1477년에 266권으로 출판한 의학고전이다. 《의방류취》에는 95개의 병문으로 나뉘여 병의 증상과 치료법들이 자세히 서술되여있다. 여기에는 모든 병들의 원인, 병리와 증후 등 총론적인 기초리론들이 체계화되였으며 치료법에서도 약물료법, 침구법, 식사료법 등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여있다. 또한 병에 대한 예방법이 밝혀져있으며 사람들이 쉽게 리용할수 있는 민간료법들도 많이 적혀있다. 《의방류취》는 그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나 출판력사상 그 류례가 없는 방대한(6만여페지) 고려의학책이며 세계최초의 의학대백과전서적인 고전이다. 이 책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었으며 1861년에는 일본에서 출판되였다. 1477년에 출판된 원저는 외래침략자들의 략탈과 전쟁란리로 다 분실되였다. 그후 수백년세월이 흘러갔으나 그 누구도 《의방류취》를 우리 민족의 귀중한 유산으로 되살려놓지 못하였다. 이 력사적과제도 우리 민족이 창조한 재부라면 한점의 유물이라 할지라도 귀중히 여기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에 의하여 훌륭히 해결되게 되였다. 민족의 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나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군들을 파견하시여 사진촬영을 해오도록 하신 그 엄청난 량의 《의방류취》를 단기간내에 훌륭히 번역편찬하도록 모든 조건을 다 마련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64(1975)년 7월 어느날 《의방류취》편찬실태를 보고받으시고 일군들에게 《의방류취》번역과 출판사업은 번역한 페지수와 맞아 떨어지게 하는것이 더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모든 문제를 선견지명으로 환히 밝혀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의방류취》가 후날에 다시 찍기 어려운 방대한 민족의학고전이라는것과 책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를 깊이 헤아리시고 이 책의 필요한 전량을 다 찍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깊은 관심과 세심한 지도에 의하여 세월의 이끼속에 자기의 존재를 묻어두고있던 《의방류취》는 다시 세상에 태여나게 되였다. 공화국에서는 1974년부터 1980년까지 원문을 평균 13권씩 묶어 20분책으로 번역출판하였다. 매 분책의 앞부분에 번역문을 주고 뒤부분에 한자원문을 그대로 주었으며 찾아보기 편리하도록 번역문과 원문의 페지수를 일치시키고 차례를 새로 만들어 첨부하였다. 오늘날 《의방류취》는 《동의보감》, 《향약집성방》과 함께 3대고려의학고전으로 손꼽히고있으며 유럽에서 최초의 의학백과전서로 인정되고있는 에스빠냐의 마드리드에서 1807년에 출판된 《의학 및 외과학사전》(7권)보다 시기적으로 300여년이나 훨씬 앞서나왔을뿐아니라 규모가 매우 방대하고 과학성이 보장된 세계적인 의학전서로 공인받고있다. 우리 민족의 우수한 국보로 세계에 빛을 뿌리게 된것은 비단 《의방류취》만이 아니다. 오래전에 잃어졌던 고려의학고전인 《어의촬요방》도 선군시대에 와서 자기의 옛 모습을 되찾게 되였다. 《어의촬요방》은 1226년 4월 평양에서 처음으로 출판인쇄된 우리 나라의 의학고전이다. 《어의촬요방》이라는 책이름에서 《어의》는 궁중의사를 말하고 《촬요》는 가장 요긴한것들을 골라냈다는 뜻을 담고있다. 이로부터 《어의촬요방》은 궁중의사들이 쓰던 가장 중요한 처방들을 추려서 만든 책이라는것을 의미한다. 이 책은 고려왕조에서 왕의 정사를 보좌하는 부서의 하나이던 추밀원 재상 최종준이 썼다. 여기에 당시 철학가, 문필가, 시인으로 이름났던 리규보가 서문을 써주었다. 《어의촬요방》은 지금으로부터 780여년전 평양에서 처음 출판된 때로부터 그후 오래동안 의료사업과 의학교육에서 가치있는 참고서로 리용되여오다가 사라져버렸다. 《리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433년 6월 1일에 전의감 제주 황자후가 국왕에게 당면한 의료사업과 의학교육에 관한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면서 《어의촬요방》이 매우 편리한 책이라고 언급한 일이 있었다. 책이 나온지 200년이상 지나서 찾아보게 되는 이러한 력사기록은 이 책이 일상 림상실천에서 대단히 오래동안 리용되여왔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1445년에 편찬이 끝난 세계최초의 의학대백과전서 《의방류취》에도 《어의촬요방》을 포함한 153종의 옛 의학서적들의 내용이 부문별로 편집되여있다.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나온 《고사촬요》의 자료에 의하면 진주에는 《어의방》이라는 책판이 있었는데 이것은 고려때에 평양에서 처음 출판되였던 《어의촬요방》이 리조시기에 다시 출판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임진조국전쟁후인 1610년 8월에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전 25권)의 인용문헌목록에는 《어의촬요방》이 없다. 그 이후에 나온 문헌들에서도 《어의촬요방》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수 없다. 1592년에 왜놈들의 침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에서 침략자들은 우리 나라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닥치는대로 파괴략탈하였으며 가치있는 고전들도 수많이 훔쳐갔다. 이러한 력사적사실들로부터 학계에서는 《어의촬요방》도 이렇게 사라져버린 임진왜란의 희생물이라는 주장들이 강하게 울려나오고있다. 일본에서 출판된 책들을 비롯한 여러 문헌들에서 국내외의 의학력사가들은 이 책을 이미 잃어진지 오랜것으로 기록하고있다. 민족의 자주의 력사, 창조의 력사는 문화유산을 통하여 전하여진다. 민족문화유산을 적극 발굴하고 잘 복원하여야 후대들이 자기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잘 알고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질수 있으며 나라와 민족의 영예와 존엄을 빛내여나갈수 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숭고한 조국애를 지니시고 일찍부터 민족문화유산을 적극 발굴하고 잘 보존하며 옳게 계승발전시키는것이 사람들을 애국애족의 사상으로 교양하고 민족문화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시면서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이끌어오시였다. 그 현명한 령도밑에 공화국에서는 오늘 귀중한 민족문화유산들이 소중히 보존관리되고있으며 자취를 감추었던 적지 않은 유산들이 발굴복원되여 사람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하며 사회주의적민족문화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하고있다. 고려의학고전 《어의촬요방》도 그 과정에 복원된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이다. 책은 수백수십만의 헤아릴수 없이 많은 글자들과 서사기호들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복잡한 정신활동의 창조물이다. 그러므로 궁전이나 사찰, 루각 등과 같은 건축물유산이나 왕릉과 같은 구조물유산과는 달리 일단 사라져버리면 력사문헌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는 매우 힘들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할수도 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리규보가 《어의촬요방》에 남긴 서문이 그의 문집 《동국리상국집》에 실려 오늘까지 전해져오는 사실과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의방류취》, 《향약집성방》과 같은 훌륭한 의학유산들은 이미 잃어진지 오랜 《어의촬요방》의 복원을 얼마든지 가능하게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깊은 관심속에 공화국의 학자들은 오랜 기간 고심어린 탐구와 지칠줄 모르는 노력으로 우리 나라 의학고전들에 대한 연구사업을 진행해오는 과정에 《어의촬요방》을 얼마든지 복원해낼수 있다는 과학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특히 자강도 화평군의 어느 한 의사는 《어의촬요방》의 인용문을 찾아내기 위하여 피타는 탐구정신을 가지고 40여년간 어느 하루도 중단함이 없이 전 85권에 달하는 《향약집성방》의 내용을 다 조사하였으며 《의방류취》에 들어있는 130여개의 《어의촬요방》의 처방을 수집하기 위하여 6만여매에 달하는 방대한 이 의학대백과전서의 갈피갈피를 다 연구분석하였다. 특히 그는 찾아낸 하나하나의 복원기초자료들을 여러번 세밀하게 따져보고 복원본에 한글자도 근거없이 첨가삭제하거나 변경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며 책의 항목구성, 편성체계와 본문글씨, 책의 형식과 판형식 등을 결정하는데서도 당시의 간행물에 어울리게 만들어내기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는 또한 력사문헌복원에서 열쇠로 될수 있는 모의복원실험방법을 새로 연구완성하여 오래전에 출판된 의학고전들에 대한 반복모의복원실험을 부단히 진행함으로써 복원한 책의 정확성을 과학적으로 론증하는 성과도 이룩하였다. 하여 수백년동안 찾아내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없어졌다고만 생각해오던 《어의촬요방》이 위대한 선군시대에 다시 태여나게 되였다. 이 경이적인 성과는 아무리 훌륭한 민족문화유산도 숭고한 조국애를 지니고 우리의 민족성을 가장 귀중히 여기며 우리 선조들이 이룩한 아름답고 진보적인 모든것을 우리 시대에 활짝 꽃피여나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는 위대한 수령, 위대한 령도자의 품속에서만 빛을 뿌리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깊이 새겨주고있다. 복원된 《어의촬요방》은 우리 나라의 고유한 전통의학인 고려의학의 발전모습과 특성 등을 과학적으로 해명할수 있게 하는 민족문화유산의 하나로서 림상실천은 물론 조선의학사 및 문화사연구에 크게 이바지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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