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음악무용유산을 귀중히 여기시여

 

 

《민족음악은 민족의 사상정서와 생활, 풍습을 반영하며 따라서 민족의 발전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민족음악을 잘 알고 노래를 불러도 민요를 즐겨부르고 춤을 추어도 민족춤을 추게 하여야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의 정신, 자기 민족이 제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깊이 간직할수 있습니다.》

김 정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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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음악유산에서 기본은 민요이다

 

 

조선은 세계적으로 음악이 먼저 발전한 나라들중의 하나이다. 지혜롭고 재능있는 우리 민족은 아득한 옛날부터 악기를 만들고 념원과 생활감정을 노래에 담아 부르면서 자기의 전통적인 민족음악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민족음악유산가운데서 기본을 이루고있는 우리 나라 민요에는 《룡강기나리》, 《베틀가》, 《아리랑》, 《양산도》, 《도라지타령》, 《어랑타령》, 《애원성》, 《녕변가》, 《창부타령》, 《강강수월래》, 《쾌지나칭칭나네》를 비롯하여 로동민요, 서정민요, 풍자민요, 세태민요, 풍속민요, 륜무민요(륜무가) 등이 있다.

그러나 로동과 생활속에서 창조된 풍부한 민족음악유산들은 지난날 조선을 강점한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에 의하여 혹심하게 유린말살되였다.

일제는 강점 첫날부터 우리의 민족문화를 말살하려고 갖은 악독하고 비렬한짓을 다하였다. 인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대대로 물려오는 민족음악보급을 강제로 억제하였으며 조선사람의 넋이 깃든 연주단체는 그 어떤것이든 가림이 없이 무조건 해산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오랜 전통을 가진 우리의 민족문화는 참혹하게 짓밟히고 우리의 민족음악은 질식상태에 처하게 되였다.

조선의 민족음악은 해방후에야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자기 발전의 참다운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인민적인 민족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민족음악의 고유한 전통과 우수한 유산들을 살리면서 그것을 현대적미감과 시대적요구에 맞게 계승발전시키는 원칙을 견지하도록 하시였으며 민요계승발전의 실천적방도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시고 그것을 관철해나가도록 현명하게 령도하시였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민족음악에서 기본인 민요에 대한 발굴사업이 전군중적범위에서 벌어졌다.

1947년 4월에 첫 민족음악단체인 조선고전악연구소가 창립되였으며 짧은 기간내에 《아리랑》, 《양산도》, 《도라지》를 비롯한 민요들과 《춘향전》, 《흥부전》과 같은 극음악들, 농악과 같은 기악음악유산들이 발굴정리되여 무대에 오르게 되였다.

전후 국립고전예술극장(당시)안에 있던 인민창작연구실을 거점으로 하여 힘차게 벌어진 민족음악유산에 대한 발굴사업은 1970년대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1970년대초에 이르러 구전민요들을 알고있는 사람들의 평균년령이 60∼70살인 조건에서 민요발굴사업을 빠른 시일내에 끝낼수 있도록 음악가동맹에 민요연구실을 내오도록 하시고 중앙과 각 도예술단체들에 2∼5명으로 구성된 민요발굴조들을 조직하여 전국의 각 도, 시, 군들에 나가 민요발굴사업을 진행하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이 사업의 성과적수행을 위하여 친히 최신형의 록음기재들을 비롯하여 민요발굴사업에 필요한 기술기재들도 보장해주시였다. 결과 짧은 기간내에 전국적범위에서 수천편의 민족음악유산들이 발굴되였으며 수집된 민요들은 제때에 채보정리되여 지방별, 종류별로 분류된 《민요연구자료집》(1-9)으로 출판되였다. 또한 조선민요에 대한 연구사업도 본격화되여 민요작품에 대한 해설도서와 함께 형태, 양상별에 따르는 연구론문들, 민족시가적특성과 발전력사를 밝히는 민요연구도서들이 련속 나올수 있게 되였다.

날이 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민족음악유산을 수집정리하고 계승발전시키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사업을 더 적극 밀고나갈수 있는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그리하여 여러 단위에 분산되여 활동하는 민족음악예술분야의 연구성원들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음악연구소를 내오도록 하고 그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가 보장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민족고전음악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통일적인 연구집단이 무어짐으로써 민족고전음악작품들과 연주법을 보존하고 형상실현하는 사업을 더욱 실속있게 밀고나갈수 있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0(1991)년 7월 17일에 발표하신 불후의 고전적로작 《음악예술론》에서 전통적인 민족음악을 장려할데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전통적인 민족음악에서 기본은 민요이다, 민요는 민족음악의 정수이며 민족음악의 우수한 특징을 집중적으로 체현하고있다, 우리 나라에는 지방마다 특색있는 민요가 많다,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우며 전해온 조선민요에는 우리 인민의 민족적정서와 생활감정이 간결하고 세련된 음악형식에 풍부하게 담겨져있다, 오늘도 우리 인민은 민요를 좋아한다, 우리는 민요발굴과 연구사업을 잘하여 우리 선조들이 사랑하며 즐겨불러온 가치있는 민요를 우리 시대에 더욱 아름답게 꽃피워나가도록 하여야 한다고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1(1992)년 1월 20일에 발표하신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 또다시 우리 인민이 전통적으로 창조해온 민요에 대한 옳바른 견해를 가지고 그 유산을 공정하게 처리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일부 민요가 고투가 난다고 하여 그것을 덮어놓고 외면하거나 버리지 말고 우리 인민의 고상한 정신도덕적풍모와 뜨거운 숨결을 담은 가사를 붙여 현대적미감에 맞게 불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 이듬해인 주체82(1993)년 11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하신 담화 《민족음악을 현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시킬데 대하여》에서 민족음악유산에 대한 발굴사업을 잘할데 대하여 또다시 강조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민족음악은 지난날에 창조된 민요를 비롯한 민족음악유산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발전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지난날 민족음악유산을 발굴하는 사업을 많이 하였지만 아직도 발굴하여야 할것이 적지 않다, 이번에 전국적으로 민족음악자료를 발굴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는데 짧은 기간에 옛날 노래를 많이 수집하였다, 새로 발굴된 민요들가운데서 좋은것들을 골라 현대적미감에 맞게 다시 형상하여 보급하면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질것이며 우리의 민족음악이 더욱 풍성해질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민족음악유산발굴사업을 계속 잘해나가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공화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민요발굴사업과 함께 발굴한 민요를 시대적미감에 맞게 재창조, 재형상하는 사업이 적극적으로 벌어졌다.

《법성포의 배노래》와 같이 한문투로 된 가사를 고쳐 형상한 민요도 있고 《돈돌라리》와 같이 특별한 내용이 없이 조흥구(또는 구음)로만 이루어졌던 곡에 가사를 새롭게 만들어 완성한것도 있다. 또한 오래전부터 불리워온 《이팔청춘가》의 곡에 새로운 가사를 만들어넣어 완성한 민요 《맑은 아침의 나라》도 있고 지난날 강원지방인민들속에서 불리워온 《배놀이》의 가사와 선률을 발전시켜 완성한 민요 《바다의 노래》, 중부지방의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진 대표적민요인 《창부타령》의 가사와 선률을 개작하여 완성한 민요 《모란봉》도 있다.

민요를 시대적미감에 맞게 재창조, 재형상하는 사업과 함께 민요를 발전시킨 새로운 민요풍의 노래를 창작하는 사업도 힘있게 벌어져 인민의 지향과 요구에 맞는 수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였다.

민요풍의 노래가운데는 《세월아 가지 말아》, 《오직 한마음》, 《끝없는 이 행복 노래부르네》와 같이 수령칭송의 송가가 있는가 하면 《백두산의 만병초》, 《노래하세 대홍단》과 같이 혁명전통을 주제로 한 작품도 있으며 《산천가》, 《소방울소리》, 《종다리》, 《천하절승 묘향산》, 《뽕따러 가세》, 《비단짜는 처녀》, 《대홍단 삼천리》 등 보람찬 로동생활과 인민의 행복한 생활, 조국산천의 아름다움과 조국애를 반영한 작품들이 많다.

이렇듯 공화국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민족음악유산을 채보정리하는 사업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여 지난날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진 민요들이 수많이 발굴되였으며 민요를 재창조, 재형상하는 사업과 민요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민요풍의 노래를 창작하는 사업이 힘있게 벌어져 우리 인민의 민요유산은 훌륭히 계승발전되였으며 민요의 재보가 더욱 풍부해지게 되였다. 

 

 2

개량발전된 민족악기

 

 

우리 민족은 세계적으로 볼 때 음악뿐만아니라 민족악기도 그중 먼저 발전시켜온 슬기로운 민족이다.

고고학적발굴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B. C. 3000년경에 해당한 청동기문화층에서 벌써 뼈피리, 청동방울을 비롯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리용되는 관악기와 타악기유물들이 발굴되였다. 고조선에는 공후와 같은 현악기가 있었고 세나라시기에 가야금, 저대를 비롯한 여러가지 악기들이 있었다. 발굴된 고구려무덤벽화자료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만도 30여종의 악기들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6세기에 벌써 가야의 우륵은 가야금을 만들었다. 

발해시기에도 발해금, 수공후, 와공후, 봉수공후, 대피리 등을 비롯한 8종의 현악기, 8종의 관악기, 6종의 타악기들이 널리 사용되였으며 고려시기에는 기악연주가만 하여도 100여명이나 되는 궁중세례악단이 있었다.

리조시기 박연에 의하여 12률관이 제작되여 악기제작사업이 비교적 성과적으로 진행됨으로써 편종, 편경을 비롯한 65종의 각종 관, 현, 타악기가 개량되였고 고려 말기에 없어진 악기들이 복구제작되였다.

조선민족악기의 기본특징은 음색이 우아하고 부드럽고 처량한 소리를 내는데 있다고 말할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아름답고 슬기로운 우리 인민의 민족적성격을 반영한것으로서 우리 음악의 순하고 연한 민족적선률을 특징지어주는 담보로 된다.

민족악기의 이러한 특성과 다양성을 비교적 잘 살린 우리 선조들은 거기에 맞게 독주, 중주, 합주, 무용음악 등 여러가지 기악곡들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민족악기가 오랜 력사적기간에 걸쳐 발전되여왔다고 하지만 음역과 음량에서 일부 부족점을 가지고있다.

이러한 민족악기들을 현대적으로 개량발전시키는것은 민족음악을 시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말할수 있다. 재래의 민족악기를 가지고서는 우리의 민족음악을 현대화할수 없고 날을 따라 높아가는 시대의 정서적요구를 충족시킬수 없기때문이다.

민족음악발전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문제들은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음악의 거장이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에 의해 빛나게 해결되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민족악기를 개량발전시킬데 대한 방향과 방도를 제시하시고 오랜 기간의 준비와 시험단계를 거쳐 1960년대말에 악기개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빠른 시일안에 기본적으로 완성하도록 현명하게 령도하시였다.

악기개량은 어디까지나 본래악기의 고유한 소리색갈과 형태상특징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며 본래악기의 결함을 완전히 극복하고 어느모로 보나 나무랄데 없이 완성된 악기로 만드는 방향에서 하도록 하였다.

주체57(1968)년 4월 어느날 창작가, 예술인들을 만나주신 자리에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민족악기는 화성이 되지 않기때문에 관현악연주를 할수 없다고 하는것은 사대주의병에 걸린 사람들의 견해라고 하시면서 사대주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민족음악을 하라고 하면 마치 인격이 낮아지는것으로 생각하는데 작가, 예술인들속에서 나타나는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비롯한 온갖 그릇된 사상요소들을 반대하여 견결히 투쟁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계속하여 우리는 민족악기를 개량하여 관현악도 민족악기와 양악기를 배합하여 연주하여야 한다, 지금 민족악기를 개량하는 사업이 잘되지 않고있다고 지적하시면서 민족악기를 개량하는데서 나서는 구체적문제들을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 민족악기의 개량방향에 따라 피리, 단소, 저대와 같은 목관악기들의 기본재료를 참대대신 박달나무와 자단과 같은 굳은 나무를 써서 악기의 규격과 음정, 음색을 통일시켰으며 목관악기들을 12반음계 체계에 맞게 음공의 크기와 위치를 과학적으로 설정하고 누르개장치를 도입하여 운지법을 해결하며 전조와 이조를 쉽게 할수 있게 만들었다.

가야금과 같은 현악기들은 줄과 공명통을 적절히 고쳐 현악기들의 음량을 전반적으로 늘이고 음역을 넓히면서도 본래악기의 고유한 소리색갈을 최대한으로 살리도록 하였다.

민족악기를 개량하기 위하여 또한 모든 민족악기들을 12반음계 체계로 고치며 악기형태를 연주하기 편리하게 개조하였다. 이와 함께 국가적표준규격에 준하여 악기의 형태와 규격을 고착시키도록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제시하신 정확한 민족악기개량방향과 현명한 조치에 의하여 공화국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수많은 민족악기들이 민족적정서가 짙은 아름다운 음색과 맑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소리를 내는 악기로 훌륭히 개량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민족악기를 개량발전시키는것과 함께 민족관현악과 배합관현악을 새롭게 창조하도록 하시였으며 민족악기의 고유한 연주법을 적극 살려나가도록 하시였다.

언제인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예술부문에서는 가야금의 고유한 연주법을 살리는데 깊은 주의를 돌리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가야금연주에서는 롱현을 잘 살려야 가야금의 고유한 음색을 낼수 있다고, 민족악기의 연주법을 현대화한다고 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족적인 소리색갈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가야금의 고유한 연주법을 적극 살려 우리 식의 가야금연주법을 새로운 경지에 올려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또한 장고의 고유한 연주법을 살리는데도 응당한 관심을 돌릴데 대하여 강조하시고 예술부문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 우리 예술의 주체성과 민족성을 더욱 철저히 고수해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또 언제인가는 어느 한 예술단의 공연을 보아주시고 가야금독주와 병창에서는 철저히 가야금이 살아나게 연주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반주성원이 많아 가야금이 반주의 도움을 받게 되면 가야금병창이라고 할수 없다고, 가야금병창에서는 가야금이 기본이기때문에 반주의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가야금의 음색을 잘 살리고 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였다.

주체93(2004)년 12월 모란봉극장에 몸소 나오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국립교향악단의 예술창조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해주시였다.

이날 관현악 《아리랑》과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를 들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민족악기들의 음색을 특색있게 살릴데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장새납에 대하여 중요하게 강조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장새납은 우리의 고유한 민족악기인데 연주에서 소리가 약하다고,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에서는 장새납의 음색을 잘 살려야 민족적감정을 돋구고 흥취가 난다고, 특이한 음색을 가진 장새납소리는 관현악을 뚫고나올수 있게 커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그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은 창작가, 예술인들은 배합관현악에서 민족악기의 음색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더욱 기울여나갔다.

주체94(2005)년 2월과 3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국립교향악단의 관현악 《아리랑》과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를 들어주시였다.

독특한 배합관현악의 울림으로 오곡백과 무르익은 사회주의농촌의 가을풍경을 한폭의 그림마냥 생동하게 펼쳐보이는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에서는 민족적색채가 진한 새납소리로 결산분배장을 들썩하게 하는 농악무의 흥취를 한껏 더해주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는 들을수록 좋다고, 그 곡은 편곡자체가 잘되였다고 하시면서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에 새납을 도입하고 관현악 《아리랑》에 민족죽관악기를 도입한것은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우리 식의 독특한 관현악편성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에 의하여 단소(고음단소, 단소), 저대(고음저대, 중음저대, 저대), 새납피리속악기(장새납, 대피리, 저피리), 가야금, 양금 등 민족악기들이 개량발전됨으로써 민족음악과 양악을 마음대로 조화시켜 연주할수 있게 되였고 음악예술분야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더욱 철저히 세워나갈수 있게 되였다. 

 

 3

계몽기가요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음악유산이다

 

 

우리 민족이 력사적으로 이룩해놓은 민족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시고 옳게 계승발전시키며 사람들에게 보다 정서적인 생활을 마련해주시려고 늘 마음을 써오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계몽기가요를 옳게 평가하고 널리 발굴정리하는데도 큰 힘을 넣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계몽기가요는 1920년대부터 해방전까지의 시기에 창작보급된 진보적인 노래로서 해방전이나 해방직후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널리 부르던 대중가요이다.

시대의 산물인 다른 모든 노래들과 마찬가지로 계몽기가요에도 그것이 창작될 당시의 시대적배경과 력사적사연이 담겨져있다.

계몽기가요는 우리 나라가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된 시기에 나온 노래들로서 사람들에게 나라없는 민족의 설음을 알려주고 반일애국감정과 해방의 리념을 심어주는것을 기본목적으로 창작되였다. 때문에 일제에게 짓밟힌 나라의 비참한 모습을 노래한 《황성옛터》나 나라잃은 겨레의 울분과 제 나라, 제 땅에서 마음편히 살아보고싶은 간절한 념원을 반영한 《봉선화》를 비롯해서 계몽기가요들에는 망국노의 설음과 일제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 아름다운 조국강산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되찾으려는 지향과 념원이 깊이있게 반영되여있다. 또한 계몽기가요에는 명승고적과 결부시켜 조국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한 작품도 있고 조국해방에 대한 념원과 확신을 담은 노래도 적지 않으며 일제를 쳐부시고 빼앗긴 조국을 기어이 찾고야말리라는 굳센 의지를 그대로 표현한 노래도 있다.

계몽기가요는 조선민요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인류음악이 달성한 우수한 성과들을 적극 받아들여 민족성과 현대성이 잘 결합되여있다.

조선사람들이 부르기 쉬운 서정적이며 생활적인 노래인 계몽기가요는 당시의 시대적환경으로부터 노래의 사상주제적내용을 은유적인 수법을 리용하여 노래가사속에 숨겨서 형상하였다.

실례로 《봉선화》에서는 짓밟힌 조국에 대한 애정과 망국노의 설음을 울밑에 홀로 핀 가냘픈 한송이 꽃에 비유하여 형상했고 조국해방에 대한 리념과 희망은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라는 뜻으로 표현하였다.

《찔레꽃》, 《타향살이》, 《고향의 봄》 등 많은 노래들은 이국땅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던 우리 인민들의 고향에 대한 추억을 통하여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였다.

《홍도야 울지 말아》에서는 억눌리고 짓밟힌 민족의 넋과 정신을 《구름에 쌓인 달》로, 해방의 념원은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와 같이 자연현상에 비유하여 의미심장한 표현들로 숨겨서 노래했다.

《황성옛터》는 허물어진 고려왕조의 옛 황성터에 비추어 망국의 설음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였다.

계몽기가요는 음악형식이 조선사람의 민족적비위에 맞으면서도 시대적인 감정에도 잘 어울렸기때문에 사람들속에 널리 류행될수 있었고 일제식민지통치의 엄혹한 환경속에서도 우리 나라 가요예술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을뿐아니라 해방후 가요음악의 다양한 발전에도 일정한 기여를 할수 있었다.

그러나 한때 일부 사람들속에서는 계몽기가요에 대한 리해가 부족한데로부터 그것을 허무주의적으로 대하고 차요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있었으며 그로 하여 계몽기가요들이 음악사에서 응당하게 취급되지 못하고있었다.

사실 문학예술부문의 적지 않은 일군들과 창작가들은 물론 민족음악을 전문연구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계몽기가요를 슬픔과 애수의 감정만 토로하거나 련정적인 색조의 노래로만 생각하면서 그 의의에 대하여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있었다.

계몽기가요중의 하나인 《눈물젖은 두만강》만 놓고보아도 그것을 련정가요로만 속단하였지 실지 노래속에 깃들어있는 나라잃은 우리 인민의 피맺힌 원한과 해방의 날을 바라는 절절한 목소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였던것이다.

이러한 실태를 깊이 헤아리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86(1997)년 1월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계몽기문학예술에 대한 리해를 바로가지고 그것을 옳게 평가하고 살려나갈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의 계몽기문학예술을 잘 연구하고 거기에서 우수한 민족적정서를 찾아내여 현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 남조선의 역적들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미국화, 서양화하여 민족적인 문화전통을 말살하고있는 조건에서 우리가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유산을 발굴하여 고유한 민족적정서를 잘 살려나가는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이미 주체85(1996)년 12월 윤이상음악연구소 민족음악연구실을 모체로 림시집단을 무어주시고 계몽기가요에 대한 평론과 수집정리사업을 폭넓게 진행하도록 대책을 세워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여러 기회에 걸쳐 일군들에게 해방전에 창작된 노래들을 류행가라고 하여 다 반동적인 작품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 노래들이 시대적제한성으로 하여 오늘날의 노래와 같이 혁명적인 사상은 없지만 거기에는 조국을 빼앗긴 우리 민족의 울분과 향토애, 민족의 고유한 정서가 담겨져있다, 류행가라는 말자체가 나쁜것이 아니라고 명백히 일깨워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바와 같이 대부분의 계몽기가요들은 수난많던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우리 인민의 민족적울분, 나라의 독립과 부흥발전을 갈망하는 우리 인민들의 애국적지향과 고상하고 아름다운 민족적감정정서를 담은 진보적이며 인민적인 노래들이다.

《압록강의 노래》만 놓고보아도 그렇다.

《압록강의 노래》는 다른 계몽기가요와는 달리 일제를 쳐부시고 빼앗긴 조국을 기어이 찾고야말겠다는 굳센 의지를 직선적으로 표현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광복의 천리길에 오르시여 압록강을 건느실 때 조선을 독립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시면서 부르신 뜻깊은 노래이다. 하기에 언제인가 김일성주석께서는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인생은 이 노래와 함께 시작되였다고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이 노래가 그처럼 뜻깊은 사연을 안고있지만 이 노래의 창작가를 알지 못하고있다.

이것은 해방전 우리 나라 가요음악에 대한 일제의 악착스러운 탄압책동의 후과이다.

일제는 우리 인민을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노예로 만들기 위해 조선어말살정책과 창씨개명을 강요했을뿐아니라 우리 민족음악을 압살하기 위해 별의별 만행을 다 감행하였다.

우리 나라의 이름난 음악가 리면상선생의 첫 작품인 《들국화》가 창작되였을 때이다.

일제는 들국화는 서리가 내려도 피는 꽃인데 이것은 항일혁명투사들을 상징한것이라고 하면서 그 노래가 공개되기도 전에 노래금지령딱지를 붙이고 노래가 수록된 레코드들을 모조리 깨버리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지어 일제는 한 녀가수가 무대에서 《황성옛터》를 부르면서 울음을 터치고 관중들도 따라울었다고 해서 노래를 짓고 곡을 붙인 창작가들과 그 노래를 부른 가수를 감옥에 잡아가두는 악랄한 만행까지도 감행했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음악을 압살하기 위해 광분하는 한편 저들의 군국주의사상을 고취하고 우리 인민의 건전한 사상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저속하고 라태한 노래들을 《류행가》라고 하면서 류포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여 미쳐날뛰였다.

그래서 일제의 비호밑에 생겨난 퇴페적인 류행가들이 범람하게 되였고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류행가》라는 고상한 이름이 반동적이며 퇴페적인 노래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게 되였다.

이런 조건에서 계몽기가요를 어떻게 리해하고 취급하는가 하는것은 민족문화유산계승과 관련한 심중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91(2002)년 9월과 주체92(2003)년 1월에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우리 인민의 우수한 민족적전통을 적극 살려나갈데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계몽기가요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계몽기가요를 나쁜 노래라고 하면서 부르지 못하게 하였는데 계몽기가요들은 인민들속에 널리 불리워진 대중가요인것만큼 부른다고 하여 문제될것이 없다고, 계몽기가요에 대한 그릇된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그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96(2007)년 3월 《계몽기가요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음악유산이다》라는 불후의 고전적로작을 발표하시여 계몽기가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도록 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계몽기가요는 일정한 제한성을 가지고있지만 우리 민족의 귀중한 음악유산으로 된다고 하시면서 력사적고찰이 없이 계몽기가요를 류행가라고 하면서 부르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 나라 음악사에서 1920년대, 1930년대 음악을 잃어버리게 되며 특히 계몽기가요가 많이 확대보급된 카프시기부터 해방전까지의 사이에 공백이 생기게 된다고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계몽기가요가 가지는 유산적가치와 진보적측면 그리고 그 제한성에 대해서도 밝혀주시면서 계몽기가요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음악유산이라고 다시금 강조하시였다.

민족의 유산을 옳게 계승하면 력사가 빛나지만 유산을 옳게 계승하지 못하면 력사에 공백이 생기고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는데 대하여 가르쳐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공백이 생긴 력사를 후대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된다고, 우리가 계몽기가요를 인정하고 널리 부르도록 하는 목적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로작에서 계몽기가요들의 발굴고증문제, 계몽기가요와 계몽가요의 구분문제, 계몽기가요의 창작보급에 기여한 창작가, 예술인들에 대한 평가문제와 계몽기가요들의 재형상문제에 이르기까지 명철한 해명을 주시였다.

그후에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계몽기가요를 옳게 정리하고 장려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고 몸소 수십곡의 계몽기가요들을 인민의 사상감정과 정서에 맞게 새롭게 형상하도록 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보살피심속에서 공화국에서는 계몽기가요들에 대한 발굴수집정리사업이 폭넓게 벌어졌으며 《민요따라 삼천리》를 비롯한 여러 책들이 출판되고 《계몽기가요선곡집》이 품위있게 편찬되여 민족의 재보로 빛나게 되였다. 그리고 다부작예술영화에 1930년대에 많이 불리운 계몽기가요와 류행가를 배합하여 쓰면 특색있는 영화로 될것이라고 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락화류수》, 《동무생각》, 《고향하늘》을 비롯한 계몽기가요들이 영화의 장면에 맞게 많이 리용되게 되였으며 카프작가편에서는 계몽기가요창작가의 한사람인 홍란파에 대하여서와 그가 작곡한 《봉선화》가 취급되게 되였다.

또한 민족의 자랑이고 더없는 재보인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에서도 《눈물젖은 두만강》, 《타향살이》와 같은 계몽기가요들을 통해 당시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설음과 조국해방의 날을 간절히 바라던 우리 민족의 간절한 념원을 훌륭히 형상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속에 커다란 감명을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다양한 주제의 계몽기가요들이 현시대의 미감에 맞게 새롭게 재형상되여 TV와 소리방송에서 자주 울려나와 사람들의 문화정서생활을 보다 풍부히 해주고있다.

이처럼 지난날 수난많던 민족의 운명과 더불어 빛을 잃었던 계몽기가요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선군시대에 와서 자기의 옛 모습을 되찾게 되였고 우리 민족이 창조한 진보적음악유산으로 력사에 남게 되였다. 

 

4

무용에서 민족적인 고유한 멋을 살리도록

 

 

조선사람들은 수천년을 살아오면서 고유한 민족문화를 찬란히 발전시켜왔으며 무용예술도 널리 발전시켜왔다.

우리 선조들이 창조하고 발전시킨 무용에는 로동생활을 반영한것도 있고 군사활동을 반영한것도 있으며 인간관계와 풍속을 반영한것도 있다. 거기에는 인간의 다양한 생활이 반영되여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형상한 춤가락도 다양하다.

고대문헌에는 이웃나라에 전파된 고조선의 무용의 특징에 대하여 정서적인 음악에 맞추어 느리고 유순하며 정서가 짙게 춤을 추는것이라고 하였다.

고대시기에 창조된 조선춤기법은 삼국시기에 이르러 그 가짐과 놀림상에서 민족적특징을 더욱 뚜렷이 나타냈다. 그것은 고구려무덤벽화를 비롯한 당시 우리 나라 유적들의 춤그림과 이웃나라의 유적들에 그려진 춤그림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삼국시기에 우리 나라는 물론 이웃나라들에서도 긴소매옷춤이 추어졌는데 춤기법상에서 서로 차이를 보이였다. 고구려의 무덤벽화들에 그려진 긴소매옷춤은 모두 두팔을 앞 또는 옆으로 들어올린 상태이며 소매자락이 대체로 아래로 드리워져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긴소매옷춤이 정서적인 음악에 맞추어 소매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면서 춘 춤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와는 달리 이웃나라의 유적, 유물들에 그려진 긴소매옷춤그림들은 긴 소매를 우로 힘껏 뿌리치거나 휘돌리는 동작으로 형상되여있다. 이것은 고구려무용이 이웃나라 무용에 비해볼 때 섬세하고 우아하며 부드러운 춤기법으로 고유한 민족적특징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 후기신라시기에 와서 무용은 대외교류의 흐름속에서 이웃나라들에 전파되였는데 고려무(발해무용), 신라무용 등으로 불리우면서 그 나라들의 무용예술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국토의 통일을 이룩한 고려시기에 이르러 조선춤기법은 단일민족의 혈연적, 문화적공통성을 반영하여 더욱 발전하였고 리조시기에는 근로인민들속에서 창조된 민속무용들은 물론 궁중의 향악무용, 당악무용, 아악무용들도 조선춤기법으로 추어지게 되여 민족적색채를 짙게 나타내게 되였다.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계승발전하여온 민족적인 춤기법은 지난 세기초 일제의 잔악무도한 민족문화말살책동속에서도 본색을 잃지 않고 사람들의 생활속에서 굳건히 명맥을 이어왔으며 그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일부 진보적인 무용가들의 창작활동과정에 세계 여러 나라들에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졌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왜색왜풍의 탁류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수하고 민족적인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모대김이 문학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구쳐오르던 때에 이들은 민간무용, 승무, 무당춤, 궁중무용 등의 무용들을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서 민족적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현대조선민족무용발전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민족무용은 무대화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있었다. 극장무대에 성악작품, 기악작품, 화술작품이 오르는 례는 있어도 무용작품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감정에 맞는 무용작품들이 창작된 이때부터 무용도 다른 자매예술과 함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되였다.

이처럼 민족적인 사상감정과 정서를 짙게 반영하면서 발전하여온 조선춤기법은 우리 민족의 유구성과 단일성을 집약적으로, 직감적으로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문화적재보가 아닐수 없다.

그런데 지난 시기 일부 사람들은 민족무용유산평가를 그 유산이 만들어진 시대와 사회력사적환경 그리고 현실의 요구를 깊이 연구한 기초우에서 신중하게 하지 못한탓으로 하여 허무적으로 대하였는가 하면 또 옛날 춤동작이라고 하여 무턱대고 배척하려는 편향도 발로시켰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59(1970)년 3월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기회에 이 문제에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민족문화유산을 옳은 관점과 립장을 가지고 바로 평가처리할데 대하여 명백히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예로부터 우리 인민이 즐겨 추어오던 사당춤은 일정한 형식을 갖춘 작품인것이 아니라 즉흥적이면서도 재치있는 동작으로 엮어진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춤가락과 민족적흥취가 풍만한 춤이라고 일깨워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옛날 춤동작이라고 하여 무턱대고 버려서는 안된다고, 춤동작 하나를 얻기가 쉬운것이 아니라고, 비록 옛날에 궁중이나 사찰에서 추던 춤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수백수천년의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 다듬어지고 완성된 귀중한 유산이라고, 하나의 춤동작에도 우리 인민의 지혜와 재능이 깃들어있으며 인민들의 생활감정이 반영되여있다고, 그렇기때문에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일군들은 선조들이 만든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자그마한 춤동작 하나라고 해도 귀중한 민족의 재산으로 여기시고 더욱 빛내여주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가 뜨겁게 안겨와 격동된 심정을 억제할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한해가 지난 주체60(1971)년 4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을 만나주신 자리에서 탈춤이나 사당춤, 승무 같은 무용에 시대적제한성과 그 창조자들의 세계관적제약성에서 오는 유흥적이며 미신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하여 덮어놓고 버릴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우리 인민의 슬기와 지혜, 예술적재능이 깃든 아름다운 춤가락과 춤동작을 찾아내여 시대의 요구와 우리 인민의 미감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것이 민족무용유산계승에서 견지하여야 할 근본원칙이라고 또다시 강조하시였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아름다운 춤가락과 춤동작을 찾아내고 그것을 현실에 맞게 더욱 발전시키는것을 민족무용유산계승의 근본원칙으로 제시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무용창작에서 민족의 고유한 멋을 살리도록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주체61(1972)년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과 함께 어느 한 예술단에서 창작한 무용 《양산도》를 보아주신적이 있었다.

듣기만 해도 흥이 저절로 나고 어깨가 들썩이게 하는 《양산도》민요가락, 그 가락에 맞추어 화려한 꽃무늬양산을 들고 색갈고운 수건을 날리며 무대가 좁다하게 춤을 추는 무용수들…

그 무용은 사람들의 절찬을 받을만 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났을 때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함께 본 일군들도 포착하지 못한 결함을 대번에 지적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무용이 잘못되였다고 하시면서 《양산도》는 우리 나라의 오랜 민요로서 양산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그 순간 창작가들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양덕, 맹산에서 흘러온 대동강이 모란봉의 청류벽을 감돌아드는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 그 절경을 노래한 민요를 주제로 한 무용의 소도구로 양산을 택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였다.

잘못된 무용을 두고 몸둘바를 몰라하는 그들의 속마음을 헤아려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음악에 맞게 춤가락을 다시 찾아보아야겠다고 너그럽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나서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무용수들이 양산대신에 장고를 메고 춤을 추게 해보라고, 그러면 좋은 무용을 만들수 있을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든 창작가들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환성이 터져나왔다.

그후 《양산도》춤은 아주 멋들어진 우리 식의 장고춤으로 다시 만들어지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우리 민족의 우수한 춤가락들을 더 찾아내야 한다고, 조선춤은 건드러진 멋이 기본이라고, 조선춤을 절대로 얼치기로 만들어서는 안되며 민족적인 고유한 멋을 잘 살려나가야 한다고, 우리는 력사적으로 전해오는 민속무용을 발굴하고 다듬어 형상하기도 하고 새로운 민속무용을 만들기도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민속무용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이끌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75(1986)년 5월 어느날 문학예술부문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민속무용을 다시 형상하는 사업을 잘하여야 하겠다고 강조하시면서 민속무용을 다시 형상하는것은 파묻혀있는 특색있고 참신한 춤가락을 찾아내여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풍부히 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민속무용을 발굴하여 다시 형상하는데서 복고주의적인 경향을 없앨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민속무용 《장삼춤》은 무용이름부터 복고주의적인 냄새가 난다고, 그 민속무용에 음악 《능수버들》을 쓴것만큼 민속무용의 이름을 《능수버들》이라고 하였으면 좋았을것이라고, 《장삼춤》에는 민속무용에 고유한 참신하고 아름다운 춤가락이 없다보니 무용수들이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어쩔줄 몰라하는 동작은 개울을 건너가는것인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것인지 알수 없다고, 앞으로 민속무용 《장삼춤》은 이름도 고치고 춤가락도 더 찾아내여 완성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민속무용 《설장고춤》도 복고주의적인 냄새가 납니다, 민속무용 《설장고춤》의 이름에 《설》자를 붙여놓은것은 복고주의적표현입니다, 민속무용의 이름을 《설장고춤》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알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민속무용의 이름을 하나 붙여도 인민들이 다 알수 있게 통속적으로 붙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주체86(1997)년 6월 14일이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민속무용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국립민족예술단의 사업정형을 료해하시기 위하여 새로 창조한 민속무용조곡 《평양성사람들》을 보아주시였다.

민속무용조곡 《평양성사람들》은 씩씩하고 우아하며 발랄하고 흥취있는 민속무용과 특색있는 민족음악으로 자기 조국과 향토를 무한히 사랑하며 그를 지켜 용감히 싸운 평양성사람들의 애국충정과 슬기롭고 근면한 우리 선조들의 창조적인 로동생활, 아름다운 생활풍속과 풍만한 정서, 앞날에 대한 지향과 념원을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의 예술작품이였다.

무용조곡을 구성하고있는 무용 《류경의 봄》, 《룡악산무술터》들은 금수강산 내 나라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깊이있게 펼쳐보이였으며 무용 《평양성의 무사들》과 《승전의 기쁨》은 외적과 결사전을 벌려 승리를 이룩한 병사들의 미더운 모습과 승전을 축하하는 인민들의 환희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민속무용조곡은 우리 선조들의 로동생활과 생활풍속, 풍만한 정서생활을 무용 《락랑의 사냥군들》, 《달밤의 다듬이소리》, 《모란봉의 봄》 등에 담아 잘 보여주었다.

민속무용조곡을 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민속무용조곡 《평양성사람들》은 력사물작품의 창작원칙과 내용에 맞게 우리 민족의 고유한 춤가락을 찾아내여 구현함으로써 매 무용작품마다 개성이 있고 종합적인 구성도 아주 잘되였다고 하시면서 국립민족예술단 창작가, 예술인들이 우리 식의 독특한 민속무용조곡을 훌륭히 형상한데 대해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민속무용들가운데서 《모란봉의 봄》은 명작이라고 높이 평가하시였으며 무용 《승전의 기쁨》을 보시고는 우리 무용수들이 북을 률동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게 아주 잘 친다고, 인민성도 있고 계급성도 있어 좋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인민의 유구한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해나가는것은 우리 당이 일관하게 견지하고있는 확고한 방침이라고 하시면서 우리는 민족문화유산을 계승발전시키는데서 력사주의적원칙과 현대성의 원칙을 결합하며 복고주의와 허무주의적경향을 다같이 경계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는 민족문화유산을 우리 시대의 요구와 우리 인민의 지향에 맞게 계승발전시켜나가야 한다, 특히 무대작품에 시대정신이 옳게 구현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민속무용조곡 《평양성사람들》은 옛날것을 그대로 옮겨놓은것이 아니라 로동당시대에 새로 창조한 작품이라고, 이 작품을 조금도 흠잡을데 없이 완성해놓으면 먼 후날에도 우리의 후손들이 로동당시대에 창조한 우수한 작품들을 두고두고 자랑하게 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새로 창조한 민속무용조곡을 보시고 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이 가르치심은 무용에서 민족적인 고유한 멋을 살리며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줄기차게 밀고나갈수 있게 한 귀중한 지침으로 되였다.

새 세기에 들어와서도 민속무용의 계승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돌려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92(2003)년 6월 황해북도 은정축산전문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시면서 이곳 농장원들이 출연한 민속무용 《봉산탈춤》을 친히 보아주시였다.

예로부터 봉산에는 탈춤이 유명하다. 탈을 쓴 춤군들이 등장하여 백성들의 등을 쳐먹고사는 통치배들을 골려대고 야유하는것을 형상한 이 춤에는 착취와 압박에 대한 인민들의 항거정신과 자주적으로 행복하게 살려는 지향이 담겨져있어 오늘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특히 봉산사람들은 탈춤을 자기들의 자랑으로 여기면서 명절이나 휴식일이 오면 춤판을 펴군 한다.

이날 한여름의 뙤약볕속에서 탈춤을 보아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우수한 문화적재부를 옳게 계승발전시키는것은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시면서 민속무용을 적극 장려하고있는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리고 작품의 가면문제까지 깊이 관심하시며 전통적인 민속무용을 널리 보급하고 더욱 발전시켜나갈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후에 봉산탈놀이의 탈이 훌륭히 복원 및 개작되고 민속무용 《봉산탈춤》은 시대의 지향과 현대적미감에 맞게 더욱 훌륭히 완성되여 널리 보급되게 되였다.

이처럼 선조들이 만든 춤가락 하나, 춤동작 하나하나를 금싸래기같이 귀중히 여겨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민족애가 있어 우리의 흥취, 우리의 장단, 우리의 률동 등 무용에서 민족적인 고유한 멋이 살아날수 있었으며 그것은 사람들의 삶과 생활에 짙은 향기를 더해줄수 있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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