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나하나의 유적유물마다에도

 

 

《우리 나라에는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력사문화유적들이 많은데 그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입니다. 지난 시기 제국주의자들의 악랄한 민족문화말살책동과 침략전쟁으로 말미암아 귀중한 력사문화유적들이 많이 파괴되고 손상되였지만 로동당시대에 와서 원상복구되여 자기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민족문화유산을 계승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정책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뚜렷이 보여주고있습니다.》

김 정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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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산력사유적에 깃든 애국의 뜻

  

정방산은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에 있다.

산마루들이 서로 잇닿아서 정방형을 이룬다고 하여 그 이름을 정방산이라고 한다.

유구한 세월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와 외적을 물리친 선조들의 용맹을 간직하고있는 정방산은 자연경치가 독특할뿐아니라 많은 력사유적유물을 가지고있는것으로 하여 이름높다.

정방산지구에는 우리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 민족건축의 독특한 형식과 조형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력사유적유물들이 많이 보존되여있다.

민족의 매장풍습을 반영한 고조선시기의 대표적유적인 고인돌과 고구려시기의 무덤들,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과 봉수대들, 아름다운 경치를 부감하거나 휴식을 목적으로 하여 세운 루정들, 불교신앙을 반영한 사찰건물들과 탑, 부도, 불상과 비석들을 비롯하여 각이한 유적유물들이 많다.

정방산의 력사유적유물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략탈과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의 야수적인 폭격으로 커다란 손실을 입었으나 오늘 절세의 위인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애국의 뜻에 떠받들려 민족의 귀중한 재보로 자기의 가치를 빛내이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정방산을 여러차례나 현지지도하시면서 거기에 있는 력사유적유물들이 민족의 재보로 빛을 뿌리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어느해인가 정방산을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성불사를 돌아보시면서 귀중한 문화유산인 이 사찰을 잘 보존관리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때 사찰의 한 건물이 다른 사업에 림시리용되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 사업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에야 어찌 비길수 있겠는가, 그옆에서 불을 때면 연기에 그슬려 못쓰게 될수 있고 자칫하다가는 건물을 하늘로 날려보낼수 있으니 거처를 다른데 옮기도록 하라고 이르시였다.

이어 극락전에 이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여기에 불상들이 있었겠는데 다 어떻게 하였는가고 물으시였다.

사실 거기에는 불상들이 있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그 불상들이 젊은이들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고 하면서 그것들을 다른 곳에 모아두었던것이다.

한 일군이 그에 대하여  말씀드리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가볍게 웃으시며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부처는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하는 반증자료로 될뿐아니라 당대 사회의 조형예술을 연구하는데서도 가치가 있고 사람들에게 민족의 우수성을 알려주어 애국주의정신을 키워주는 귀중한 민족유산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일군들은 죄송함을 금할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불상을 제자리에 가져다놓고 보관관리를 잘해야 하겠다고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는 성불사는 고려시기 건축물들중에서 오랜것들중의 하나로서 우리 선조들의 세련된 건축술을 보여주고있다고 하시면서 고려사람들의 슬기와 재능이 우리 시대에 와서 더 빛이 나게 잘 보존하고 관리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정방산성도 돌아보시였다.

둘레가 30리나 되는 구간에 성벽을 쌓은 정방산성은 참으로 볼만 하였다.

정방산성을 이윽토록 둘러보신 장군님께서는 정방산은 경사가 급하기때문에 장마철에 땅이 패일수 있으므로 석축공사를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정방산성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성벽을 모두 돌로 쌓았는데 곳곳에 총과 활을 쏘는 구멍이 있어 적을 치는데 유리하게 되여있다고 하시면서 옛날에는 이 성안에서 무기도 만들었다고, 남문을 궁륭식으로 맵시있고 든든하게 쌓은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의 건축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고, 옛날에는 기중기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는데 성돌들도 큰것을 운반해다가 정교하게 다듬어서 높이 쌓았다고, 정방산성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인민과 군사들이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유명한 전적지이라고, 특히 임진조국전쟁시기 이곳 의병들이 왜적을 정방산성으로 유인하여 모조리 섬멸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세히 설명해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일군들은 력사와 유적에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깊은 식견에 놀라움과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정방산은 우리 나라의 오랜 력사와 우리 인민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말해주는 귀중한 력사유물도 많고 경치도 절경인 참으로 좋은 곳이라고 하시면서 정방산에 있는 력사유적과 유물을 더 발굴하고 원상대로 복구할것은 복구하여 잘 꾸려놓으면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도록 교양하는 좋은 장소로 될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의 뜻을 받들어 황해북도에서는 정방산의 유적유물들을 원상대로 잘 보존관리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는 한편 경치아름다운 경암산기슭에 력사박물관을 꾸리였다. 그리고 국보적가치가 있는 고려시기의 천문도와 리조시기의 흰사기화로를 비롯하여 수백점에 달하는 력사유물들을 진렬하였다.

그후 또다시 정방산을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성불사의 고적유물들을 다시금 돌아보시며 옛날에 승려들이 아주 묘한 곳에 자리잡고 살았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이전 쏘련외무성 일군도 정방산에 와보고 참으로 훌륭한 곳이라고 말하였다고 회고하시면서 사진사들이 와서 사진도 찍게 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구경하겠다고 하면 보여주도록 하라고, 우리는 성불사를 통하여서도 선조들의 건축술을 자랑할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주체86(1997)년 5월 1일 정방산을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새로 건설된 차집과 낚시터, 참관도로를 비롯한 유원지시설들을 돌아보시며 모든 시설들이 자연풍치에 어울리게 훌륭히 건설된데 대하여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성불사를 비롯한 유적들을 다시금 돌아보시면서 여기서 사람들이 애국애족의 넋을 깊이 간직할수 있게 그에 대한 보존 및 관리사업을 잘하여야 한다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에 받들려 정방산의 력사유적들은 1 000여년전의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여 찾아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민족된 긍지와 자부심을 한껏 느낄수 있게 하는 력사의 증견자로 될수 있었다. 

 

 2

잊지 못할 석왕사의 봄날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에 자리잡고있는 석왕사는 조선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귀중한 유적의 하나이다.

석왕사는 고려 말엽에 처음 세워졌는데 리조시기에 와서 크게 확장되였다고 한다.

력사적으로 볼 때 리조시기에는 불교보다도 유교가 성행한것으로 해서 불교사찰들은 대체로 조락하였지만 석왕사에서만은 리조시기에 50여채의 크고작은 건축물들이 건설되였다고 한다.

14세기 고려왕조에 복무하던 리성계가 하루는 거울이 깨지고 하늘가에 꽃잎들이 흩어지는것과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리성계가 꿈풀이를 하려고 간 곳이 바로 석왕사였다.

당시 석왕사에는 무학대사라는 주지가 있었는데 그가 리성계의 꿈풀이를 해주면서 장차 왕이 될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리성계는 왕이 된 다음 자기의 《꿈풀이》를 해준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는 석왕사에 많은 건물들을 세우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의 진실성이 있는가 하는것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석왕사가 그때로부터 계산하여도 600여년의 력사를 가진 큰 불교사찰임은 틀림이 없다.

이여의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석왕사 역시 근로하는 인민들의 창조적지혜와 예술적재능에 의하여 건설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재의 하나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석왕사에도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주체87(1998)년 5월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현지지도의 길에서 석왕사를 찾아주시였다.

봄빛이 한창 무르녹는 때여서 석왕사는 온통 신록에 묻혀있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게 꽉 들어찬 울창한 나무들이며 여기저기 울긋불긋 피여난 향기그윽한 꽃들, 봄바람에 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소리, 유정하게 들려오는 물소리, 물소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석왕사일대의 경치가 좋다고 하시면서 골짜기에는 사기천이 흐르고 산기슭에는 소나무와 잣나무, 참나무들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있고 물도 맑고 공기도 좋다고 하시면서 여기 석왕사에만도 수백명의 승려들이 생활하였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원래 여기에는 고려 말기에 세운 건물인 응진전과 호지문, 리조시기에 세운 대웅전과 팔상전을 비롯하여 53채나 되는 웅장한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석왕사의 래력에 대하여 말씀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석왕사의 많은 건물이 미제의 야수적폭격으로 불타고 지금은 불이문, 조계문, 설성동루를 비롯한 몇개의 건물밖에 남지 않았다고, 미제는 전쟁시기에 평화적인 학교와 마을, 공장과 농촌뿐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슬기와 지혜가 깃든 민족문화유산마저 폭격하여 없애버리려고 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석왕사의 유적들을 몸소 돌아보시면서 민족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고 잘 보호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석왕사의 첫 입구에 세워진 불이문을 보신 장군님께서는 불이문을 묘하게 세웠다고 하시며 무지개모양의 돌다리우에 건설된것으로 하여 그 건축미를 자랑할만 하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리고 조계문과 설성동루도 건축형식이 독특하다고, 두 건물이 다 합각지붕의 건물인데 형식도 좋고 단청도 잘하였다고 하시며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을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불이문과 조계문, 설성동루는 슬기로운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건축술과 예술적재능을 보여주는 가치있는 문화유적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인민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도 높고 민족문화도 찬란히 꽃피워온 정의롭고 슬기로운 인민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석왕사의 유적들은 건축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앞으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폭격에 불탄 건물들을 다 원상복구하도록 할데 대해 이르시였다. 그리고 유적보존관리에서 지형상 큰물에 의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필요한 대책을 세우며 산림보호사업을 잘하여 산불피해가 나지 않도록 할데 대한 문제, 석왕사일대를 인민의 문화휴양지로 더 잘 꾸릴데 대한 문제 등 민족문화유산계승과 보존관리에서 나서는 대책적문제들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받아안으며 일군들은 봉건왕조들이나 통치배들이 리용하던것들이라고 하여도 유적유물들은 인민이 창조한것이며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다는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였으며 선조들의 독특한 건축술과 예술적재능을 보여주는 석왕사의 유적들을 더 훌륭히 복구개건할 결의를 다지였다.

숭고한 민족애를 지니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불멸의 령도업적이 수놓아진 잊지 못할 석왕사의 봄날.

민족문화유적유물보존의 참된 뜻을 깊이 새겨주신 그 봄날이 있어 석왕사의 유적만이 아닌 이 땅의 모든 문화재들은 세월의 눈비속에서도 삭을줄 모르고 옛 모습그대로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지고있는것이다.

 

 3

또다시 찾으신 석담구곡

 

 

석담구곡은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천중류지역에 있는 명승지이다.

예로부터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우불구불 아홉굽이를 에돌면서 여러개의 못을 이루었다는 뜻에서 석담구곡이라고 불리워왔다.

석담구곡은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 사철 푸른 소나무숲, 봄철의 꽃, 여름철의 록음, 가을철의 단풍, 겨울철의 설경 등 아름다운 사계절풍경으로 하여 예로부터 인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곳 경치는 석담의 자연풍치를 노래한 리률곡(1536-1584)의 《고산구곡가》(1579년)를 통하여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석담구곡은 매 굽이마다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어 고유한 산골짜기의 독특한 풍경을 나타내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석담구곡을 처음으로 찾으신것은 주체49(1960)년 9월 20일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석담구곡이 유명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듣던바대로 경치가 참 좋다고 하시면서 석담5곡으로 향하시였다.

석담5곡을 은병이라고 부르는데 옛날 리률곡이 5곡을 솔산이 담수에 숨어있는듯 하다고 하여 은병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은병의 맑고 푸른 석담에는 그림과도 같이 산그림자가 비끼고 석담천가의 하늘을 아름드리 소나무, 느티나무 등 해묵은 나무들이 가리우고있었다. 숲속에는 선조들의 뛰여난 건축술을 보여주는 요금정과 소현서원 등 옛 건물들이 자리잡고있어 태고연한 옛 풍경을 더해주고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소현서원을 돌아보시면서 석담구곡이 널리 알려지게 된데는 구곡의 특유한 자연미에도 있겠지만 리률곡이 여기서 많은 학자들을 키워내면서부터 더욱 그렇게 되였을것이라고, 리률곡이 내놓은 사상들을 보면 그가 당대 사회에서는 선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 력사를 보면 리률곡과 같이 선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외적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운 무관들과 명인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는 이러한 력사적인 사실자료들을 잘 정리하여 후대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소현서원강당뒤에 있는 건물을 돌아보시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건물이 리률곡이 죽은 다음 그의 제자들이 제를 지내던 사당이라고 하는데 단청을 다채롭게 한것을 보면 제를 지내던 사당이 옳다고 하시면서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지금 사람들이 제를 지내던 집이라면 미신적인것으로 나쁘게만 보는 현상이 적지 않은데 그렇게 문제를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화유적들을 통하여 지난날 우리 인민들이 자기 선조들과 스승을 얼마나 존대하여왔는가 하는것을 찾아볼줄 알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된 선조들의 이러한 풍속은 응당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평가되여야 합니다.…

하나의 사당을 보시고도 우리 인민의 고상한 미풍량속을 먼저 생각하시고 그것을 민족의 자랑으로 평가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뜻이 어려있는 그 말씀을 들으며 일군들은 격동된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리률곡이 리순신장군과 같이 거북선의 시초인 병선을 만들기 위해 그 모형을 띄워놓고 연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있는 련못에 이르시여서는 앞으로 련못을 잘 정리하여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련못에 깃든 전설도 알려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석담구곡에 있는 문화유적들을 전반적으로 료해하여보고 력사적사실에 맞게 잘 정리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선조들이 이룩한 민족문화유산가운데서 낡고 반동적인것은 버리고 진보적이고 인민적인것은 오늘의 발전하는 현실과 인민들의 요구에 맞게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간곡히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앞으로 이 부문에 조예가 있는 학자들을 여기에 보내여 전쟁시기에 파괴류실된 문화유적들을 전반적으로 다시 조사하고 복구할것은 복구하며 그 보존관리체계를 똑바로 세워 우리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적들이 나라의 국보로 길이 보존되게 하여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선조들이 창조한 문화유산을 통하여 인민들에게 한없는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고 그들의 애국심을 최대로 발양시키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의도를 받들고 그후 공화국에서는 석담구곡의 문화유적들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장악사업을 다시 진행하고 그곳을 명승지답게 더 잘 꾸렸다.

그때로부터 10여년세월이 흐른 1974년 11월초였다.

당시 공화국에서는 그해 인민경제계획을 넘쳐 완수하기 위한 70일전투가 긴장하게 벌어지고있었는데 황해남도의 여러 부문에 대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일군들과 함께 또다시 석담구곡을 찾으시였다.

일군들은 끊임없는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느라 피로가 겹쌓인 장군님께서 잠시나마 경치좋은 그곳에서 휴식하실수 있게 되였다고 매우 기뻐하였다.

하지만 자기들의 생각이 짧은것이였음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느끼게 되였다.

현지에 도착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0여년전에 오시였던 추억을 더듬으시는듯 주변을 둘러보시다가 한 일군에게 여기에 와본 일이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경치가 좋다는 말만 들었지 와보지는 못하였다는 그 일군의 대답을 들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손들어 가리키시며 저기가 석담구곡중의 하나인 석담5곡이라고 하시면서 올라가보면 리률곡이 세웠다는 서원도 있고 그때 심은 나무들도 있어 경치가 참 좋다고 하시고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걸으시면서 일군들에게 이제 보면 알겠지만 석담구곡은 자연경치도 좋지만 오랜 나무들과 옛 건물들이 있어 고전미가 나 더 괜찮다고, 아마 이런 곳에 와서 고전영화들을 찍으면 좋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흥에 겨워 걷던 일군들은 어느 한 곳에 이르러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석담5곡으로 가는 도중에 《하마비》라는 비가 세워져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수 없었던것이다.

그앞에 서서 머리를 기웃거리는 일군들을 바라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웃으시며 《하마비》는 서원량반들이 저들의 세력을 내세우기 위하여 세운 비석인데 여기서부터는 모든 량반들이 말에서 내려 정중히 걸어들어오라는것이라고, 이를테면 리률곡의 이름을 빗대고 저들에게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해서였다는데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였다.

잠시후 장군님을 모신 일행은 소현서원 앞마당에 이르렀다.

서원은 담장으로 네모나게 둘러막고 다시 앞뒤구역으로 갈라져있었다. 앞구역에는 강당이 있고 뒤구역에는 사당이 있으며 담장바깥 앞쪽에는 청계당과 요금정이 있었다.

강당인 은병정사는 1578년에 글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건물이고 청계당은 리률곡이 처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친 건물이며 요금정은 당시 명필로,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높았던 리률곡의 누이동생인 옥산이가 오빠에게 거문고를 들려주었다는 루정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중 한 건물을 가리키시며 저것을 보면 그때 사회의 교육면모에 대하여 잘 알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그이의 말씀의 뜻을 알수 없어 그저 건물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리 크지 않고 소박한 건물이라고 해도 거기에 깃든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은 첫눈에 안겨왔지만 당대 사회의 교육면모를 어떻게 알수 있다는것인지 전혀 가늠이 가지 않아서였다.

그런 일군들에게 장군님께서는 건물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교육적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세심한 주의를 돌렸다는것을 직감할수 있다고, 나무 한그루를 심어도 대바르고 정서깊은 나무들을 골라 규칙적으로 심었다고 하시면서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시였다.

장군님의 말씀에 접하고 일군들이 다시 바라보니 건물은 정말 보 하나에 이르기까지 교육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썼다는것이 확연히 알렸다.

특히 소현서원의 정문앞에 서있는 수백년 자란 아름드리 전나무는 선조들의 그 뜻을 안은듯, 슬기롭고 대바른 우리 민족의 기상을 말해주는듯 곧게 하늘높이 치솟아있었다.

서원뜨락을 나서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다시 나무를 바라보시며 그옆에 전나무가 한대 또 있었는데 언제인가 벼락을 맞아 없어졌다고 아쉬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전나무도 좋은 나무인것 같다고, 이런 나무를 학교주변같은데 심으면 좋을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래야 력사와 함께 수많은 사연을 후세에 길이 전할것이 아닌가고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듣는 순간 일군들은 일시에 고개를 숙이였다.

건물 하나, 나무 한그루를 보시고도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찾아내여 후세에 길이 빛내여주시려는 장군님의 높은 뜻을 깨닫고보니 옛 건물을 구경삼아 돌아본다는 식으로 력사유적을 대한 자신들의 립장이 너무도 한심하기 그지없었기때문이였다.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난 시기 일군들이 일을 잘하지 못하여 응당 국보로 보존되고 길이 전해져야 할 문화유적들이 적지 않게 마사졌다고 가슴아파하시면서 민족의 유산을 잘 보존하고 길이 전하는것은 근로자들에게 민족적자부심을 키워주는데서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 어느 나라든지 민족성을 잃게 되면 혁명을 하지 못하게 된다고, 우리는 더우기 큰 나라들과 린접하여 혁명을 하는 나라이기때문에 민족성이 강해야 한다고 강조하시고나서 우리는 선조들이 이룩한 선진적인 문화유산을 통한 교양사업을 잘하여 인민들에게 민족성을 키워주고 조선민족이 제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하여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간곡한 말씀을 새겨안으며 일군들은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하게 되였다.

자기 나라와 민족을 제일로 여기시는 절세의 애국자, 민족의 어버이를 수령으로, 령도자로 모실 때에만 문화유산도 빛나고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에 넘쳐 세계를 향해 힘차게, 떳떳하게 나아갈수 있는것이다.

《고산구곡비》앞에 이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비문을 읽어보면 매 곡의 이름과 자연풍치가 다 새겨져 석담구곡에 대하여 대략 알수 있다고 하시면서 지금은 그때의 풍치가 많이 달라졌다고, 담수도 다 메워지고 그때의 자연풍치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석담구곡은 문화유적이 많은 명승지인것만큼 계곡미에 어울리게 개울도 정리하고 여러가지 좋은 나무들과 꽃나무들도 많이 심어 풍치를 한층 돋구어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리고 황해남도에 석담구곡뿐아니라 구월산과 장수산의 열두굽이, 몽금포를 비롯한 이름난 명승지들이 많은데 그곳을 다 근로자들의 문화휴양지로 잘 꾸리는것이 좋겠다고, 우리 나라의 명승지 그 어디서나 인민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도록 하여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름다운 대상에 대하여 사랑의 감정을 가진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의것일 때에는 사랑정도가 아니라 가슴뿌듯한 긍지, 자부심과 함께 모든것을 다 바쳐 지키고 빛내이려는 숭고한 자각을 간직하게 된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바로 이런 감정, 오랜 력사문화유적과 아름다운 명승지를 잘 보존관리하여 우리 인민들이 자기 조국과 민족에 대한 무한한 긍지와 애국적헌신성을 가지도록 해주시기 위해 석담구곡을 또다시 찾아주신것이였다.

참으로 민족문화유산이 많은 명승지들을 더 훌륭히 꾸려 사람들에게 조선민족된 한없는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심혈과 로고는 끝이 없다. 

 

4

세상에 널리 알려진 량천사

 

 

량천사는 고원군 락천리에 자리잡고있는 사찰이다.

고원읍에서 서쪽으로 약 5km정도 떨어져있는 동흥산기슭의 묘한 골안에 자리잡고있는 량천사는 석가모니불상을 앉힌 대웅전을 중심으로 여러채의 건물로 된 비교적 큰 사찰이였다.

753년에 건설된것으로 전해지고있는 량천사는 13명의 이름난 목수와 400여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여 13년간이나 건설한 사찰이라고 한다.

천수백여년의 력사를 자랑하며 고색창연한 빛을 뿌리는 량천사는 오랜 기간 여러차례에 걸치는 침략자들의 략탈과 파괴로 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잃어졌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의 야수적폭격으로 많은 건물들이 타버리고 현재는 대웅전, 만세루, 무량수전 3채의 건물만 보존되여있다.

건축년대로 보나 규모로 보나 력사가 오래고 큰 사찰들중의 하나였지만 량천사는 사람들속에 그리 잘 알려지지 않고있었다.

그러던 사찰이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사찰로 된데는 가슴뜨거운 사연이 있다.

주체91(2002)년 6월이였다.

그때로 말하면 미국의 반공화국압살책동으로 말미암아 조선반도의 정세가 매우 긴장되여있던 시기였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지켜 불철주야로 선군의 길을 이어가시던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그처럼 엄혹한 시기에 크게 이름나지 않았던 량천사를 몸소 찾아주시였다.

량천사 관리원으로부터 사찰의 지리적위치와 구성, 연혁에 대하여 해설을 들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먼저 대웅전으로 들어가시였다.

대웅전에는 크고작은 불상들과 함께 복숭아를 쟁반에 받쳐든 두 녀인을 중심으로 20여명의 인물들이 북과 징, 피리와 퉁소, 가야금과 소라 등 민족악기를 연주하며 춤추는 장면을 형상한 무악도와 불교도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별지화를 비롯한 많은 그림들이 천수백여년동안 원색그대로 보존되여있었다.

관리원이 과일쟁반을 받쳐든 두 녀인의 눈이 사람들이 이쪽저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따라움직이는것처럼 보인다고 말씀올리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몸소 이쪽저쪽으로 위치를 옮겨가시며 그림을 보아주시고나서 아주 특색있다고, 멋있다고, 대웅전천정에 그려놓은 무악도를 비롯한 그림들을 아주 잘 그렸다고, 천정에 그린 장생불로하는 신선물이라는 복숭아를 쟁반에 받쳐들고있는 두 녀인의 눈이 사람들이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할 때 같이 움직이는것 같다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그러시면서 량천사가 규모가 크고 단청색이 조화롭고 아름다운것으로 하여 이름이 있다는데 대하여 그리고 인물을 형상한 그림이 립체감이 나는것은 여기밖에 없을것이라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기둥벽에 그려진 별지화들도 아주 특색있다고 하시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여 불상뒤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하나하나 보아주시였다.

명주천에 금가루로 그림을 그려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원색그대로 보존되여있는 그림들을 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랜 그림들을 잘 보존하였다고 치하해주신 다음 만세루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만세루는 산경사지에 터를 닦지 않고 자연적인 주추돌우에 아름드리 돌기둥을 다듬어세우고 나무기둥을 련결한 다음 그우에 수평으로 나무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그우에 다시 키높은 20여개의 나무기둥을 세워서 웅장하고 경쾌한 겹처마합각지붕을 떠받들게 한 독특한 건물이다.

앞으로 보면 2층다락으로 되여있고 뒤로 보면 단층으로 된 만세루는 원래 불교도들이 글쓰는 장소로 리용하던 곳인데 리조시기에 와서 불교가 유교에 밀려 배척당한 이후로부터 량반들의 놀음터로 되고말았다고 한다.

그에 대한 해설을 들으시며 만세루에 들어서신 장군님께서는 만세루가 우리 나라의 사찰루정으로서는 제일 큰것 같다고 하시며 전망을 부감하시였다.

이윽고 여러가지 색갈로 단청을 한 만세루천정을 주의깊게 살펴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좋지 못한 색감을 가지고 진한 원색으로 칠하다보니 단청이 진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지적해주시면서 앞으로 사찰들의 색을 보색하면서 원색화하지 말고 고전미가 나게 연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오래갈수 있게 할데 대한 방도까지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잠시 동안을 두시였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에는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들이 많은데 그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긍지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력사문화유적들을 잘 보존관리하고 사람들속에서 그를 통한 교양을 잘하는것은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고 애국심을 높여주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력사문화유적들에는 우리 인민의 우수한 건축술과 뛰여난 예술적재능이 깃들어있는것만큼 보존관리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력사문화유적들을 원상대로 복구하는것도 우리 민족의 슬기와 문화적재보들을 후대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어찌하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토록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사찰을 찾아주시였는가 하는것이 가슴에 닿아오는 귀중한 가르치심이였다.

정세가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갈림길에 놓여있고 나라의 경제형편도 아직은 원만하지 못하여 해결하여야 할 문제들이 쌓이고 쌓인 때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큰 국가적, 군사적의의를 가진 대상이 아니라 선조들의 넋과 슬기가 깃든 량천사를 찾아주신것은 그이께서 력사문화유산을 얼마나 중시하시는가 하는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었던것이다.

량천사 관리원만이 아니라 동행한 일군들모두가 이런 생각으로 숭엄한 격정에 잠겨있는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모든 부문에서 력사문화유적들을 비롯한 우리 인민의 우수한 민족문화유산들을 옳게 살리고 빛내여나가기 위한 사업을 잘하여 인민들에게 조선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더욱 높여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량천사에 보존되여있는 그림들이 아주 멋있고 특색있다고 다시금 평가하시면서 그것을 화첩에 담아 널리 선전하도록 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량천사가 보존되여있다는것을 알면 불교를 믿는 남조선사람들과 해외동포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오겠다고 할수 있는데 와보게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어느덧 시간은 퍼그나 흘러 장군님께서 떠나실 시각이 다가왔다.

그런데 대웅전과 만세루, 무량수전을 다 돌아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승용차가 있는 곳이 아니라 력사유적해설문판쪽으로 걸음을 되돌려 옮기시였다.

분과 초를 다투는 중요한 사업들과 또 찾으셔야 할 곳이 그처럼 많으시건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민족의 재능이 깃든 문화유산이 그처럼 귀중하시여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시는것이였다.

이윽고 력사유적해설문판앞에 이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량천사가 753년에 세워진 사찰로서 정방산의 성불사나 구월산의 월정사보다 훨씬 더 먼저 세워졌는데도 원상대로 보존되여있는데 대하여 거듭 만족을 표시하시면서 량천사 관리원들이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민족문화유산을 빛내일 높은 책임감을 가지고 량천사보존관리를 잘하고있다고 분에 넘치는 평가를 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오늘 량천사를 잘 보았다고 하시며 관리원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고나서야 귀로에 오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량천사를 다녀가신 후에도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을 더 잘 보존관리하도록 필요한 모든 대책을 다 세워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그렇듯 열렬한 민족애, 조국애가 있어 량천사는 이 땅에 뿌리박은 수많은 력사유적들과 함께 온 세상에 고색창연한 자기의 자태를 더욱 빛내이고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다녀가신지 불과 반년도 못되는 기간에만도 6만여명의 근로자들과 남조선과 해외의 동포들이 찾아와 조선민족된 긍지와 자부심을 더욱 가슴뿌듯이 느끼며 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 조국애를 심장속에 깊이 새기였다고 한다.

오늘도 량천사를 찾는 사람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은 절세의 위인이실뿐아니라 민족적인 모든것을 제일 아끼고 사랑하시는 참된 민족의 어버이이시라고 격정에 넘쳐 이야기하고있다. 

 

5

심원사의 유물들에도

 

 

평안북도 박천군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얼마가량 가느라면 해발 200여m의 높이를 가진 봉린산기슭에 심원사라고 불리우는 그리 크지 않은 사찰이 있다.

심원사 비문에 의하면 이 사찰은 현욱국사(786-868)가 세웠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사찰을 처음 세운것은 9세기라고 할수 있다.

비돌에 새긴 글에는 1368년에 그 이전에 있던 건물들을 고쳐 지은것으로 되여있다.

심원사에는 현재 중심건물인 보광전과 전등루, 향로각이 남아있다.

년대가 가장 오래된 중심건물인 보광전은 고려건축양식을 적지 않게 보여주고있어 고려때의 건축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유산으로 되고있다.

보광전은 정면 3간(10. 85m), 측면 2간(7. 2m)의 단층합각식건물이고 전등루는 정면 5간(14. 63m), 측면 3간(7. 32m)의 2익공겹처마합각집이다.

지난 조국해방전쟁때 심히 파괴되였던 심원사는 공화국의 문화유물보존정책에 의하여 전후 원상대로 복구되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이러한 심원사를 찾으신것은 주체92(2003)년 2월 어느날이였다.

그이께서 심원사를 찾으실 때 당시의 정세를 두고 말한다면 미제의 반공화국고립압살책동으로 말미암아 조선반도에 일촉즉발의 정세가 조성되고 공화국이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 성명까지 내여 세계가 벅적 끓고있던무렵이였다.

이러한 시기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도 않은 심원사를 찾아주시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심원사에 도착하시여 관리원의 인사를 반갑게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시고나서 표식비앞으로 다가서시였다.

심원사 관리원이 흥분된 마음을 안고 장군님께 심원사의 연혁을 소개해드리였다.

동창천 맑은 샘물이 흘러나오는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사찰이라는 뜻에서 이름지어진 심원사는 9세기경에 건설된 이후 14세기에 대보수를 하였다.

지금은 협소하지만 초창기의 심원사는 기본건물인 보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극락전 같은 위성암자들과 부속건물들인 청풍루, 향로각을 포함하는 여러개의 말사를 두고 크게 번성하였을뿐아니라 그후 관서지방에 많은 분사들을 갈라낸 손꼽히는 사찰들중의 하나였다.

특히 심원사의 보광전은 정방산에 있는 성불사의 웅진전, 황해북도 연탄군 심원사의 보광전,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창설년대가 무려 천여년의 력사를 기록하고있다.

그에 대하여 료해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매우 만족하신 안색으로 몇번이나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계단을 오르시여 보광전안으로 들어서시였다.

보광전안에는 삼존불상을 비롯하여 수문장과 라한상, 탱화들 그리고 석가모니상을 심원사에 옮길 때 태워왔다는 가마(련), 목탁, 초대 등 적지 않은 유물들이 보존되여있다.

보광전의 각종 유물에 대한 해설을 들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몸소 가까이도 가보시고 좀 떨어져서 보기도 하시면서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보시였다.

이윽고 장군님께서는 천정으로 눈길을 보내시였다.

천정에는 불교의 례식때 쓰이던 운판을 비롯하여 봉황새와 룡을 부각한 각종 금단청문양들과 조각들이 옛 모습그대로 있었다.

그것들을 한점한점 일별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문득 금단청을 한 소란반자에서 시선을 멈추시는것이였다.

금단청을 한 소란반자란 합판같은 네모난 판에 붉은색, 청색으로 여러가지 문양을 그리고 그가운데 금박으로 꽃무늬를 새겨넣은것을 말한다.

관리원은 장군님께 그것을 가리켜드리며 심원사에서 력대적으로 보존되여오는 중요한 유물의 하나라는데 대하여 말씀드렸다.

현란한 빛을 내뿜는 유물들을 보며 동행하던 일군들모두가 감탄을 터치는데 문득 장군님께서 관리원에게 심원사를 9세기경에 건설하였다고 하는데 그때에 벌써 금장식을 할수 있었겠는가고 물으시였다.

순간 심원사 관리원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의문을 표시하신것처럼 심원사의 건설년대는 9세기초이지만 그 금단청은 지금으로부터 700여년전인 14세기 사찰을 대보수할 때 한것이기때문이였다.

그런데 그때까지 숱한 참관자들이 왔다갔어도 그저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에 감탄하였을뿐 이런 의문을 던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전문가들도 미처 헤아려보기 힘든 우리 나라 유색금속가공발전력사와 심원사건설년대를 순간에 대비하여 고찰해보셨던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지 못한 관리원이 송구스러워하며 심원사에 있는 비석에 금단청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때가 14세기라고 다시 말씀을 드리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런가고, 그후에는 다시 손질하지 않았겠소라고 다시 물으시였다.

심원사 관리원은 이 금단청은 그후 근 700년동안 단 한번의 수복도 하지 않은 진품이라고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찌렁찌렁하신 음성으로 자, 보시오, 얼마나 훌륭하오, 우리 선조들이 재능이 있었거든라고 하시며 보광전내부에 한 단청은 14세기에 대보수할 때 한것으로서 한 700년정도 되였지만 그대로 보존되여온다는데 아주 훌륭하다고, 우리 선조들의 단청술이 대단히 높았다고 말씀하시였다.

민족의 슬기와 우수성이 비낀 하나의 유적을 천만금처럼 생각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거룩한 모습을 우러르는 심원사 관리원과 동행한 일군들의 가슴속에는 경모의 정이 뜨겁게 치밀어올랐다.

잠시후 보광전을 나서시여 심원사의 우물에 깃든 유래를 들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얼마쯤 떨어져있는 커다란 나무에 시선을 멈추시고 사찰들에는 느티나무가 많은것이 특징인데 은행나무가 있는것은 심원사에 와서 처음 본다고 하시며 심원사에는 왜 은행나무를 심었는지 모르겠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심원사 관리원은 또다시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장군님께서 사람들이 늘 보면서도 관심하지 못하던 문제에 또다시 의문을 표시하시였기때문이였다.

관리원이 이런 은행나무가 심원사에서 자라게 된 유래에 대하여 해설해드리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심원사의 뒤산 봉우리들의 모양이 봉황새가 나래를 편것과 비슷하고 산에 있는 바위들의 모양이 누워있는 기린같다고 하여 산이름을 봉린산이라고 하였고 봉황새가 오동나무나 은행나무에 깃을 들이고 산다고 하여 심원사앞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는데 그럴듯 하다고 하시며 그의 말을 수긍해주시였다.

심원사의 유물은 물론 그 주변 나무 한그루도 무심히 보지 않으시고 그 특성과 유래를 깊이 파고드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어 청풍루에 들리시여 누구도 별로 주의를 돌리지 않는 자그마한 현판에 대하여서도 자세히 알아보시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청풍루의 대들보에 걸려있는 목어(나무로 만든 고기)를 보시고서는 좀 늦더라도 이에 대한 해설을 마저 듣고 가자고 하시며 그 유래까지 구체적으로 들어주시였다.

그러시고서는 심원사에 금단청과 꽃무늬조각을 비롯하여 력사유물들이 원상대로 보존되여있는것이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씀하시며 심원사의 국보적의의에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떠나시기에 앞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심원사 관리원에게 오늘 심원사에 와서 해설을 잘 들었다고,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보게 해야 한다고 따뜻이 말씀하시고나서 력사유적유물보존과 문화유산계승에서 나서는 과업들을 다시금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아무리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켜주고 빛내여줄 령도자를 모시는가 모시지 못하는가에 따라 한갖 력사의 흔적이 될수도 있고 아니면 나라의 국보로 세세년년 전해질수도 있는것이다.

박천 심원사만이 아니라 구월산의 패엽사, 금야군의 안불사 등 경애하는 장군님의 령도자욱이 찍혀져있는 이 나라의 수많은 유적지들의 어제와 오늘이 바로 그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는것이다.

지난 5천년민족사는 유명무명의 애국지사들을 많이 배출하였지만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처럼 민족의 넋이 깃든것이라면, 겨레의 슬기와 재능이 슴배인것이라면 이름있는 유적지이든, 이름없는 한점의 유물이든 그 모든것을 나라의 소중한 재보로 여겨주시고 빛내여주시기 위해 그처럼 마음을 쓴 위인은 일찌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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