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행복은 가꾸어야 한다
쾌청한 어느 일요일 아침이였다. 그날 아침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데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녀석이 그릇에 밥을 반쯤 남긴채 식탁에서 물러나는것이였다. 《어디 아프냐?》 《아니야요. 그저 먹기 싫어서…》 하고 대답한 그애는 장난감을 손에 들더니 집안이 좁다하게 뛰여다니는것이였다. 행복한 아이의 투정이였다. 그것까지는 너그럽게 넘길수 있었다. 문제는 가족의 태도였다. 나는 그들이 손자애를 잘 타일러줄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애를 탓할 대신 오히려 례사로운 일처럼 넘기는것이였다. 며칠 지나도 달라지는것이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밥 한숟가락에 관한 문제가 아니였다. 나라에서 눅은 값으로 쌀을 주고 생활의 구석구석을 다 돌봐주니 자기들이 어떤 행복속에서 살고있는지 잘 모르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정말 우리 조국처럼 인민들의 생활을 직접 책임지고 돌봐주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남조선 같으면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서는 한푼의 돈을 위해, 한그람의 쌀을 위해 사람들이 피터지는 생존경쟁을 벌리고있다. 실지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도 조국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 병들고 늙은 몸으로 도로청소를 하고 채석장에서 고역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 땅에서의 불행한 생활이였다. 이 땅은 그와는 전혀 다른 행복의 땅이였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우니 더러운 감방바닥에 떨어진 한알의 보리밥마저 꼭꼭 주어먹던 지난날이 자꾸만 돌이켜지는것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34년간의 옥중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것은 배고픔이였다. 놈들은 우리가 전향하지 않는다고 주먹만 한 4등식콩보리밥에 무우시래기국을 마지못해 내주군 했었다. 그때의 보리밥 한알한알은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한 투쟁의 량식이였던가. 만일 내가 오늘의 행복에 도취되여 독감방시절을 잠시나마 잊는다면 먼저 간 동지들과 고마운 조국앞에 죄를 짓는것으로 될것이다. 그렇다. 가족들에게, 사람들에게 알고 받는것보다 모르고 받는것이 더 많은 장군님의 사랑을 더 잘 알도록 일깨워주는것은 비전향장기수인 내가 해야 할 일이다. … 나는 다음날 가족들에게 밤늦도록 이야기를 했다. 행복할수록 장군님의 은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더 큰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도 오늘의 행복을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고…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우리 집에서 그전과 같은 일이 없어졌다.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녀석은 매번 행주로 훔친것처럼 말끔히 비운 밥그릇을 보여주며 《왕할아버지, 난 오늘도 밥을 다 먹었어요.》 하고 자랑한다. 그럴 때면 나는 너무도 귀여워서 그애의 오동통한 볼에 입을 맞춰주군 한다. 음식맛이 변하면 인간의 마음도 흐려지는 법이다. 어느날 나는 갑자기 감옥에서 먹던 보리밥생각이 났다. 가족들에게 보리밥을 해먹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몹시 난처해하는것이였다. 나라에서 쌀이며 육류와 수산물, 남새, 과일, 각종 당과류, 조미료, 술, 맥주 등을 정상적으로 보장해주지만 보리쌀만은 없었던것이다. 할수 없다. 꿩대신 닭이라고 강냉이국수라도 해먹자고 했더니 그들은 놀란 기색들이였다. 《예? 강냉이국수요?》 《왜 그러느냐?》 《아버님이야 오래동안 감옥에서 고생하면서 건강도 좋지 않은데 어떻게 강냉이국수를 잡숫겠습니까?》 그들의 대답이였다. 물론 나를 위해주는 가족들의 성의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잊지 말아야 할것이 있었다. 그것은 감옥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놈들과 싸우던 지난날이였다. 기름진 음식에 만족해서 차고 땅땅하던 콩보리밥덩어리를 잊으면 정신이 흐려지고 혁명의 길을 변함없이 갈수 없는것이다. 그날 나는 고집스레 강냉이국수를 먹었다. 사실말이지 아무리 가공을 잘한다고 한들 강냉이국수가 세상에 소문난 옥류관국수보다 더 질기고 매끈거릴수는 없고 찰찰 기름이 도는 흰쌀밥보다 더 소화가 잘될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먹고나면 마음이 한결 개운해진다. 나는 늘 행복속에 잠겨있다보니 날과 달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르고있다. 감격에 울면서 조국의 품에 안긴것이 엊그제 같은데 행복의 웃음속에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몸건강도 믿어지지 않을만큼 좋아졌고 날이 갈수록 생활은 더욱 즐거워진다. 그렇지만 추억의 파편은 때없이 나를 건드리군 한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손들엇!》 하는 야무진 소리가 들려왔다. 웬일인가 해서 돌아보니 어디엔가 숨었던 손자애가 장난감총을 내대고 생글생글 웃는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라면, 더구나 손자애를 귀여워하는 할아버지라면 그쯤한 장난에 쾌히 응해주었을것이다. 또 그런것이 늙그막의 락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럴수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가슴이 너무도 아팠기때문이였다. 그 사정을 알리 없는 손자애는 자꾸 손을 들라고 하더니만 나중에는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지금껏 나는 손자를 울려본적이 없었으며 또 그렇게 울릴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적도 없었다. (원, 이런…) 나는 어쩔줄 몰라했다. 그애의 요구를 거절하기에는 원체 내가 모질지 못했고 또한 손자에 대한 애정이 여간 깊지 않았던지라 할수없이 손을 들고말았다. 그러자 손자녀석은 언제 울었던가싶게 깔깔거리며 소리쳤다. 《왕할아버지, 손내렷!》 결국 그 일은 일흔고개를 훨씬 넘은 늙은이가 귀여운 손자의 요구를 들어주는것으로 무난히 끝났지만 밤에 자리에 누우니 자꾸만 어제날 일이 떠올랐다. …어느날 내가 깊은 잠에 떨어져 자고있는데 갑자기 독감방철문을 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야, 당장 나와!》 문가에 모여선 네댓명의 간수들이 눈을 부라리며 야단을 쳤다. 은근히 긴장되였다. 감옥에서 밤중에 철문을 여는 경우란 드물었기때문이였다. (이놈들이 왜 그럴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복도에 나서자 손을 뒤로 돌려 수정을 채우고 검은 천으로 눈을 싸맸다. 그다음 간수 두놈이 무작정 량옆에서 내 팔을 끼고 끌고갔다. 눈을 가리웠지만 방향감각으로 보아 보안과쪽으로 가는것이 확실하였다. 조금후에 지하실에 들어서자 《야, 꿇어앉아!》 하고 소리치며 내 어깨를 꽉 눌러 콩크리트바닥에 꿇어앉히였다. 그때에야 놈들은 눈가림천을 풀어주었다. 취조실책상뒤에 《전향공작반》 교회사놈이 제법 점잖게 앉아 《자, 오늘은 결말을 보자. 살겠는지 죽겠는지 분명히 대답해.》라고 지껄이였다. 까마귀는 백번 울어도 송장소리만 줴친다더니 늘쌍 듣던 소리였다. 나는 쓰거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좋다!》 그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권총을 내 머리에 대고 《열을 세는 동안 결심해!》라고 했다. 《열, 아홉, 여덟…》 거꾸로 세기 시작한 셈세기가 드디여 《…둘, 하나.》 하고 끝났다. 그래도 내가 묵묵부답이자 그자는 권총방아쇠를 당기였다. 《철컥-》 하는 격발기소리! 나는 랭소를 머금었다. 그랬더니 그자는 《이놈의 새끼, 이번에는 진짜 죽어봐라!》 하며 내앞에서 보란듯이 권총에 실탄 세발을 재웠다. 《야, 살려거든 예 하고 오른쪽문으로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왼쪽문으로 나갈 각오를 해!》 그때 나의 심장이 평온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생에 대한 애착은 아무리 밟히워도 다시 일어서는 민들레처럼 더 강하게 살아나는 법이다. 그렇다. 나도 인간인것만큼 살고싶었다. 조국으로 돌아가 꽃나이시절에 헤여진 안해와 만나 나누지 못한 정을 아낌없이 나누고싶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으랴. 별의별 생각이 머리속에서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다음순간 나는 채찍으로 가슴을 얻어맞은것처럼 꿈틀 놀랐다. 만일 내가 순간의 주저로 자기의 신념을 저버린다면 《김일성장군 만세!》를 웨치며 떳떳하게 사형장으로 떠나간 동지들앞에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있을 안해의 맑은 눈동자앞에 어떻게 나설수 있단말인가. 싫다. 난 죽어도 전향 안할테다. 안할테다! 혀를 꽉 깨물자 입안에 쩝쩔하고 걸쭉한 액체가 가득찼다. 나를 노려보던 교회사놈은 비린청으로 고함쳤다. 《어디 보자. 열, 아홉, 여덟, 일곱…》 마침내 《땅- 땅-》 하는 총소리가 터졌다. 권총에서 나온 화약내가 코를 찔렀으나 나는 끄떡없이 서있었다. 《이새끼 지독한데… 야!》 그놈의 악청이 떨어지기 바쁘게 여러놈들이 굶주린 승냥이처럼 달려들어 나를 발로 차고 밟고 하면서 마구 짓조겨댔다. 무쇠도 견디여내지 못할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나는 그만 의식을 잃고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정신을 차리고보니 독감방이였다. 온몸이 쇠꼬챙이로 마구 쑤시는듯 아팠고 옷은 금방 물에서 건져낸것처럼 푹 젖어있었다. 《?!》 사람의 몸에서 그렇게 많은 땀이 나온다는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감방벽에 몸을 기댄채 북녘하늘쪽을 우러러보았다. 그러자 눈앞에 어버이수령님의 인자하신 영상이 안겨왔다. (위대한 수령님, 오늘도 전 승리하였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이 김동기는 절대로 전향하지 않겠습니다!) 다음순간 동이 터진듯 눈물이 눈굽을 넘어났다. 그것은 적후의 이름없는 한 전사가 수령앞에 다지는 맹세의 눈물이였다.… 세상의 리치를 알기에는 너무도 어린 손자녀석의 그 장난은 그후에도 계속되였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너그러운 할아버지의 역에 습관될수 없었다. 우리 가족을 비롯해서 실지로 그런 일을 당해보지 못한 새 세대들은 행복하면 할수록 그 어려웠던 시절을 잊을수 없으며 그래서 장군님 안겨주신 오늘의 행복을 더 귀중히 여기고 지켜가려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심정을 다는 모를것이다. 지금도 놈들의 전향강요를 거부하며 굴함없이 싸우던 그 시절이 때없이 떠오르군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옥중투쟁은 일반수인들처럼 단순히 대우개선을 위한 산발적인 반항이 아니라 자기의 혁명적신념을 고수하고 귀중한 혁명동지를 지켜내기 위한 치렬한 정치투쟁, 계급투쟁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때문에 그처럼 치렬했으며 또한 철저했었다. 매 손가락으로 다섯번 두드리는것보다 주먹으로 한번 치는것이 더 강하다는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감방에서의 피어린 싸움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매 사람이 따로따로 싸울것이 아니라 한데 뭉쳐 투쟁해야 한다는것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철창속에서도 중심감방에 당조직을 내왔다. 비전향장기수라는 말처럼 《철창속당조직》이란 말도 세계옥중사에 없는줄로 안다. 중심감방은 매 감방의 동지들을 조직에 묶어세워 우리 당규약에 따라 생활하도록 하며 대렬의 통일과 단결을 보장하고 적들의 폭압에 집단적으로 맞서싸우는 등의 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우리들이 이렇게 한덩어리로 뭉쳐 싸우니 따로따로 싸울 때보다 더 힘이 생기고 성과도 컸다. 우리는 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슬기롭게 옆방들과 통방을 하군 했다. 그리하여 당세포는 놈들의 살벌한 감시속에서도 활발히 운영되고 우리는 자신이 절해고도에 있는것이 아니라 언제나 혁명동지들과 같이 있다는 배심을 가지고 더욱 분발하여 싸우게 되였다. 당세포에서 결정한대로 우리는 싸리나무단처럼 굳게 뭉쳐 교도소소장, 과장들과 만나 요구조건을 강력히 제기하였다. 이 절차는 미구에 벌어질 강도높은 물리적투쟁의 명분을 세우기 위한 전주곡이였다. 적중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군대로 말하면 전투전 정찰과 같다고 해야 할것이다. 예견한대로 놈들은 우리의 요구조건을 단마디로 거부했다. 우리는 즉시 롱성투쟁으로 진입하였다. 《강제전향반대!》, 《급식조건 개선하라!》, 《운동시간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목청껏 웨치며 밥그릇으로 독감방철문을 탕탕 두드리는데 벼락치듯 터진 그 소리는 감옥담장밖에 있는 소장놈의 집에서도 들릴만치 요란하였다. 랭돌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는 우리와는 달리 폭신한 침대우에서 팔자좋게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자다가 깜짝 놀라 깨여난 소장, 과장들이 눈곱을 닦을새도 없이 뛰여들어왔다. 비전향장기수들의 투쟁에 일반수용자, 특히 대학생들까지 호응할 때면 감옥이 통채로 떠나갈것 같았다. 이쯤되면 무술에 능하고 살기가 뻗친 우직스러운 간수들이 독감방철문을 하나하나 열고 들어와 비전향장기수들을 고문실로 끌고간다. 우리의 기세는 기름을 친 불처럼 더 세차지고 끌려갔던 동지들이 놈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돌아오면 집단적인 단식으로 넘어간다. 단식투쟁은 옥중에서 벌리는 최고형태의 투쟁이다. 우리는 매 사람이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움에 용약 나섰다. 장수처럼 몸이 건강한 사람도 물을 마시지 않고 한주일쯤 단식을 하면 탈수상태로 쓰러지고만다. 단식투쟁에 들어가 3일이 지나자 놈들은 우리를 지하실에 끌어내여 강제급식을 시켰다. 굶고 매맞아서 기력이 쇠잔해진 비전향장기수들에게는 그 또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다. 놈들은 우리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독감방에 다시 처넣었다가 의식을 차리면 또 끌어내여 강제급식을 진행하군 하였다. 이 과정에 리용운, 변영만, 손윤구동지들을 비롯한 적지 않은 동지들이 희생되였다. 때려눕힌자보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더 강하다. 우리는 놈들이 미친듯이 발악할수록 당세포의 두리에 더욱 굳게 뭉쳐 줄기찬 투쟁을 벌렸다. 결국 놈들은 굴복하고 일시적으로나마 우리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고말았다. 지금도 나는 자주 생각해보군 한다. 우리가 30∼40년동안 옥중에서 혁명가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게 된 그 정신적힘의 원천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우리들모두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마음의 기둥으로 믿었기때문이라고 본다. 임금도 심장에는 명령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다. 인간은 그 무슨 일이든 자기의 마음이 내켜야 하는것이다. 지어는 길가의 돌 하나를 치우는 일도 말이다. 만일 비전향장기수들이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 스스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순간순간마다 참기 어려운 고통이 들씌워지고 달콤한 유혹이 끌어당기는 감옥생활을 한두해도 아니고 수십년동안 할수 없었을것이다. 우리들은 모두가 일제식민지시기 망국노의 슬픔을 뼈에 사무치도록 체험했고 해방후에야 비로소 어버이수령님의 자애로운 품속에서 인간의 참된 존엄과 행복을 누려온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수령님은 곧 하늘이였고 그이를 위해서는 청춘도 생명도 기꺼이 바치는것을 최고의 영예로, 행복으로 여기고있었다. 때문에 사형장으로 나가는 동지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수령님의 은덕에 보답하지 못하고 가는것을 제일 가슴아파하였으며 《김일성장군 만세!》, 《조국통일 만세!》를 웨치면서 한번 닫기면 다시 열리지 않는 인생의 마지막문을 그처럼 당당히 열수 있었던것이다. 행복한 나날이 하루하루 꿈같이 흘러가고 폭신한 잠자리에 들군 하지만 아직도 귀전에는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앞에 부끄럼없이 나서고싶어했던 그들의 웨침소리가 쟁쟁히 들려온다. 나의 경우도 다를바 없다. 나는 어린시절에 민족의 위대한 영웅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전설적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젊어서는 천리마대고조의 불길속에서 향도의 별로 찬연히 솟아오르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에 대한 경모의 마음을 자래웠으며 그 과정에 백두산장군들을 하늘처럼 믿고 따르게 되였다. 다른 비전향장기수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세상에 고고성을 터뜨릴 때부터 그 어떤 고문에도 견딜수 있는 강철같은 육체와 강의한 의지를 타고난것은 아니다. 어버이수령님의 하늘같은 사랑에 보답하려는 각오가 짐승도 낯을 붉힐 중세기적인 고문을 이겨내고 오늘날 동지들의 대오속에 함께 서있을수 있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소중한 감정이 없었더라면 내가 34년이라는 인생의 절반을 독감방속에서 보내며 자기의 신념을 지킬수 없었을것이다. 하여 조국의 품에 돌아와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하고 자나깨나 뵙고싶었던 위대한 수령님의 령전에 삼가 인사를 올린 나는 가슴속에 끓어번지는 격정을 담아 방문록에 이런 시를 남기였다.
차디찬 감방속에서 수령님은 우리 심장을 불태운 위대한 태양 교수대에서도 《김일성장군 만세!》를 높이 웨쳤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얼마나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불렀던가 늦게 돌아온 전사들은 그 품이 그리워 눈물흘립니다 내 죽어도 한줌 흙이 되여 그이를 항상 바라보는 해바라기꽃을 피우렵니다
비전향장기수들이 혁명적신념의 강자로 자랄수 있은 요인은 다음으로 우리들모두가 우리 식 사회주의승리에 대한 확신에 넘쳐있었기때문이다. 세계에는 200여개를 헤아리는 나라가 있지만 우리 조국과 같은 굳건한 사회주의나라는 찾아볼수 없다. 우리가 크레믈리의 상공에서 70년동안이나 휘날리던 붉은기가 내리워진 소식을 들은것은 1990년대초였다. 처음 우리는 아연했다.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지구상에서 제일먼저 사회주의기치를 높이 들었고 미국과 당당히 맞서나가던 그런 큰 나라가 그처럼 맥없이 무너진단말인가? 그렇다면 우리 공화국은?… 하루는 놈들이 상담실로 나를 끌어냈다. 교회사놈은 미국에서 류학을 한 대학교수라는 사람을 나에게 소개했다. 교회사놈은 그날따라 개기름이 번질번질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자, 그럼 두분이 재미나는 이야기나 나누시죠.》 하고는 나가버렸다. 교수는 나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더니 문득 《선생님은 참 딱한 사람이예요.》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그 리유를 물었다. 《선생님이 믿던 사회주의는 다 망하고 이 세상에는 사회주의를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회주의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습니까. 헌데 선생님은 아직까지 사회주의를 믿고 전향을 거부하니 딱한 일이 아닙니까.》 그 사람은 마치 피고에게 판결을 선고하는 재판장처럼 의기양양해서 말하였다. 나는 처음 그가 대학교수라니 몽둥이밖에 모르는 놈팽이들보다 사고수준이 좀 나을줄 알았는데 들어보니 초록이 동색이였다. 나는 그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내쏘았다. 《교수님, 교도소지붕에 붉은기가 날리고있는것을 보았소?》 그러자 그 사람은 얼핏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레 웃었다. 《선생님, 그런 롱담 하지 맙시다.》 그러거나말거나 나는 준절히 말했다. 《당신의 눈에는 그 붉은기가 보이지 않을것이요. 그러나 나는 펄펄 휘날리고있는 사회주의붉은기를 매 시각 보고있소.》 교수의 우멍한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하나 묻겠소. 그래 당신네는 세상에 대고 남조선에는 한사람의 사회주의자도 없다고 선언했소?》 《…》 나는 통쾌하게 말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굴하지 않고 싸우고있기때문이요. 똑똑히 알아두시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살아있는 한 사회주의붉은기는 계속 휘날릴것이요.》 피델 까스뜨로는 원고가 없이도 보통 5∼6시간씩 연설을 했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처럼 할수는 없다. 허나 그때 옆방에서 내 말을 듣고있던 교회사놈이 기겁해서 뛰여들어오지 않았던들 나는 그가 손들고 나앉을 때까지 사회주의에 대한 변호를 했을것이다. 연설은 입으로 하는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불타는 심장으로 하는것이다. 그때 나의 가슴속에 꽉 차있던 사회주의는 곧 위대한 수령님이시고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우리들은 낮이나 밤이나 잠들지 못하고 북쪽하늘을 바라보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옆방에서 통방이 날아왔다. 무슨 소식인가 해서 통방을 받던 나는 하마트면 큰소리로 만세를 웨칠번했다. 《우리 조국은 여전히 굳건하다. 그러니 힘을 내라!》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내 조국아! 눈물겹도록 장한 조국의 그 모습은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가슴속에 모진 고문과 시련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혁명적신념을 지킬수 있었던 또 하나의 거대한 봉우리로 솟구쳐올랐다. 소중한것을 잃지 않고 지키려는것은 인간의 본연이다. 내가 보총보다 키가 작은 17살 어린 나이에 용약 인민군대에 탄원하여 조국해방성전에 떨쳐나선것은 아마도 그 소중한 조국을 다시는 빼앗기고싶지 않은 마음때문일것이다. 그때 백여차례의 침략전쟁력사를 자랑하던 미제의 사등뼈를 꺾어놓고 7월의 하늘가에 전승의 축포를 쏴올린 영웅조선의 모습은 나의 가슴속에 큰 바위처럼 자리잡았었다. 조국에 대한 크나큰 사랑도 결국에는 자기의 가족과 이웃, 공장사람들, 때로는 려행길에서 우연히 만나 별로 크지 않은 방조를 받았지만 헤여진 후에는 고마움을 잊지 못해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시작되는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살이 빠진 아버지의 딱딱한 무릎우에 올라앉아 밤가는줄 모르고 구수한 옛말을 듣던 정다운 고향집뜨락을 자기의 일부분처럼 사랑하였고 남의 불행을 자기의 불행처럼 여기고 진심으로 도와주던 마을사람들을 존경하였으며 동네아이들과 손잡고 마구 뛰놀던 뒤산의 나지막한 언덕까지도 잊지 못하고있었다. 그것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찾아주신 내 조국의 한 부분이였고 정다운 마을사람들이 가꾸어가는 고향이였다. 하기에 근 50년만에 고향을 방문한 뜻깊은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 저는 옥중속에서도 고향사람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그리워하였습니다. 해마다 뒤산에 떨기떨기 피여나는 진달래꽃도 보고싶었고 코물을 흘리며 뛰여다니던 들판의 잔디냄새도 맡고싶었습니다. 설사 옥중에서 죽어 한줌의 재가 된다고 해도 사랑하는 고향땅에 묻히고싶은것이 소원이였습니다.》라고 토로했었다. 부언하지만 나의 전향거부투쟁은 순수 평범한 인간으로서 량심을 지키는 투쟁만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존엄과 행복을 안겨주고 지켜준 고마운 조국과 순박하고 성실한 고향사람들에게 바치는 아들의 맹세가 피와 살로 다져지는 과정이였다. 비전향장기수들이 신념의 강자로 자랄수 있은 요인은 또한 그들이 지닌 뜨거운 혁명적동지애이다. 동지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 헌신. 나는 이 진리를 지금처럼 한겨울에도 따뜻한 내 집이 아니라 지독한 추위에 온몸이 한줌으로 졸아들던 천연《랭장고》속에서 뼈와 살로 체득하였다. 고백하건대 혁명동지들의 뜨거운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과 같은 승리자의 단상우에 올라설수 없었을것이다. 사형을 언도받고도 락심하지 않고 살아있는 동지의 배고픔을 덜어주려고 자기는 배아프다고 하면서 밥을 덜어주던 동지들, 누구도 다가서기 꺼려하는 전염병환자의 머리맡을 지켜 긴긴밤을 지새우던 동지들… 이런 불같은 마음을 가진 동지들을 배신하고 적들이 내민 전향서에 수표를 한다는것은 사람의 가죽을 쓰고서는 못할짓이였다. 옥중에서 동지라는 말은 비전향장기수들사이에 불리우는 영예롭고 고귀한 칭호이며 혁명전우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호칭이였다. 비전향장기수들은 엄격한 독거생활로 격리되여있었어도 통방으로 부지런히 옆감방과 련계를 취하면서 《우리》라는 집단의식과 함께 동지적사랑과 고무속에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신념을 지켜 싸웠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원래부터 혁명적동지애를 타고난것처럼 생각할수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들은 혁명가이기 전에 우선 참다운 인간들이였다. 내장을 뒤집어놓는 악취때문에 간수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소지(청소부)들조차 고개를 들이밀기 저어하는 독감방으로 자진해서 들어가 죽어가는 동지를 구완하며 며칠밤을 새우고 언제 한번 배를 채워준적이 없는 애기주먹만 한 밥마저 서슴없이 동지에게 덜어주는 그런 의로운 행동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참된 인간들만이 발휘할수 있는 아름다운 소행이며 고결한 헌신인것이다. 이런 눈물겨운 동지애는 보이지 않는 따스한 이불마냥 한겨울의 랭방에서도 나의 손과 발을 덥혀주었고 온몸에 사정없이 떨어지는 매질의 아픔도 한결 덜어주군 하였으니 꺼질줄 모르는 그 사랑의 불씨가 있었기에 나는 인간이하의 고역과 고통을 수십년동안 강요당하면서도 신념과 량심을 꿋꿋이 지켜낼수 있었다. 행복은 향유하는것도 좋지만 다시는 잃지 않도록 지켜가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나이도 이제는 여든고개를 톺고있지만 다행히도 아직 팔과 다리가 움직이고 수십년전의 일을 죄다 생생히 기억하고도 남을만큼 머리도 맑다. 나는 앞으로도 오로지 경애하는 장군님만을 태양처럼 믿고 혁명적신념을 지켜싸우던 지난날처럼 우리의 사회주의 내 조국을 지켜 모든것을 다 바쳐나갈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