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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왜 수기를 쓰는가
서두에 고백한다면 나는 전문적인 문학교육을 받은 일이 없다. 대학시절에도 문학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분야를 전공했었다. 물론 어릴적부터 남달리 소설책을 좋아한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소박한 취미정도로 문학작품을 쓰겠다고 한것자체가 무리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구름이 모이고 구름이 모이면 비가 내리기마련이다. 1999년초에 내가 기나긴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일부 남조선사람들속에는 비전향장기수를 랭랭하게 대하는 편향이 있었다. 지꿎게 지속된 《반공》교육의 후과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들은 북극에 가는 일도 아니고 고작해야 한장의 전향서에 지장을 슬쩍 찍으면 석방될수 있었는데 무엇때문에 그렇게 30∼40년동안 감옥생활을 했느냐고 하면서 우리더러 지독한 고집쟁이라고 욕질하였다. 또한 비전향장기수란 감정이 없는 목석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분했다. 사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만큼 감정이 풍부하고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구보다 안해를 사랑하고 자식들을 귀여워했기에 그들앞에 부끄럽지 않게 나서고싶었고 또한 그래서 인간적인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강잉히 이겨내고 오늘의 승리자로 되지 않았던가. 나는 그처럼 몰리해한 사람들에게 비전향장기수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인간성을 지닌 소박한 사람들이라는것을 알려주고싶었다. 그렇다고 온 남조선땅을 돌아다니며 목이 쉬도록 연설할수는 없었다. 좋기는 글을 쓰는것이였다. 문제는 그 형식을 무엇으로 설정하는가 하는것이였다. 소설을 써볼가? … 아니면 시를? 거울은 닦을수록 맑아지고 머리는 쓸수록 좋아진다는 말이 있다. 이래저래 궁리를 하던 나는 마침내 수기형식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기란 자기가 체험한 의의있는 생활이나 교훈적인 경험을 적은 이야기형식의 글인것이다. 다음 또 하나는 어떻게 해야 독자들의 심금을 틀어잡는 좋은 수기를 쓰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좋은 보석은 장식할 필요가 없다. 불필요한 겉치레는 오히려 보석의 품위를 떨굴뿐이다. 좋기는 나와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지난 수십년동안 독감방에서 겪었던 일들을 진실하게 쓰는것이였다. 그럼 수기를 쓴다고 그저 출판되는가? 아니였다. 아직도 파쑈악법인 《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어쨌든 일단 길을 떠났으니 끝까지 가야 하는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푼수에 맞지 않는 수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제목은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로 달았다. 무딘 붓을 끄적거린 끝에 원고가 완성되고 고맙게도 한 출판사에서 수기집을 출판해주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첫 숙제를 검열마치는 소학교 학생의 심정으로 독자들의 판결을 기다렸다. 드디여 한주일만에 나의 수기집이 최고로 팔린 책으로 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얼마나 기뻤던지 기대를 뛰여넘은 엄청난 성공으로 하여 현훈증이 일 지경이였다. 련이어 신문사와 TV방송에서 수기집에 대한 광고가 나가고 그 덕에 나는 하루아침에 일약 유명한 필자로 알려지게 되였다. 노예로부터 장군이 된 심정이였다. 무엇보다 통쾌한것은 비전향장기수들을 목석이라고 했던 편협한 인간들에게 진실을 알려준것이였다. 수많은 편지와 전화가 오고 초면인 사람도 만나자는 초청이 왔다. 그런데 독자의 70%가 녀성이고 거기서 대부분은 가정부인들이였다. 모름지기 나의 수기집이 인간의 량심에 호소하는 글이여서 남성들보다 감정이 보다 섬세하고 풍부한 가정부인들의 마음을 틀어잡았으리라고 본다. 책이 출판된지 며칠 지난 어느날 아침이였다. 조용한 《통일의 집》에 따르릉- 하는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잠결에 송수화기를 귀에 가져갔더니 알지 못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합니다. 전 목사입니다.》 그의 말이 내 수기집을 감명깊게 읽고 느낀 점이 많다는것이였다. 《저의 글이 목사님에게 감동을 주었다니 부끄럽습니다.》 나는 겸손하게 응수했다. 《난 옆사람들에게 김선생의 수기집을 읽어주군 합니다.》 하고 목사가 말하였다. 그게 어느 대목인가고 물었더니 《통일의 노래》를 실례로 들었다.
내 입으로 통일의 노래 부르다 벙어리가 되면 내 눈으로 통일의 노래 부르리 내 눈으로 통일의 노래 부르다 장님이 되면 심장으로 통일의 노래 부르리 내 심장으로 통일의 노래 부르다 심장이 멎으면 내 아들이 통일의 노래 계속 부르리
정말 《통일의 노래》가 목사의 심장을 울렸다면 내가 쓴 책이 그런대로 성공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것을 의미했다. 이런 인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통일의 집》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조국의 품에 안겼을 때 나는 그 수기 덕분에 딱한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날더러 가맹신청서를 내라고 했던것이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제가 어떻게 작가가 될수 있습니까?》 작가동맹에서는 남조선에서 출판된 수기집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만으로도 작가가 될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되여 나는 가맹신청서를 내고 심의한 후 정식 작가동맹 맹원증을 수여받았다. 가족들이랑 동지들은 그 일을 두고 부러워하였지만 나는 은근히 걱정되였다. 만사람의 믿음이 나에게는 부담일수밖에 없었던것이다. 내가 정말 작가구실을 할수 있을가? 작가란 문학작품창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다. 언어를 통하여 현실을 형상적으로 반영하는 예술의 한 형태로서의 문학의 특성에 맞게 작가는 인간의 사상감정과 생활을 형상적으로 반영하며 의의있는 인간문제를 내세우고 그에 대하여 심오한 예술적해답을 준다. 인간과 그 생활을 깊이 연구하며 그것을 예술적으로 반영함으로써 사람들을 사상정서적으로 교양하는데 이바지한다는 의미에서 작가를 인간정신의 기사라고 부른다. 다시말해서 작가란 그 나라의 지성세계를 대표하는 고급한 지식인이다. 그런데 독감방에 30여년동안 갇혀있던 내가 작가라니… 불현듯 조국에 와서 고려호텔에 들었을 때 나를 취재하려고 왔던 작가선생이 생각났다.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보아도 그 작가선생에 비하면 나는 대학생곁에 움츠리고 서있는 소학교 학생이였다. 하지만 운명의 수레는 이미 굴러가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힘에 겨워도 그것을 밀고갈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조선문학》을 비롯한 월간잡지와 신문에 글을 몇건 발표하였다. 일이 제대로 되여가는가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하루는 젊은 작가 한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이말저말 하다가 자기는 몇년동안 작가생활을 하지만 《조선문학》에 작품발표하기가 헐치 않다고 말하는것이였다. 나는 그의 말에서 심한 가책을 받았다. 전문교육도 받지 못하고 재간도 없는 내가 어떻게 그들보다 글을 더 잘 쓸수 있었겠는가. 한송이의 꽃으로는 아름다운 꽃다발을 엮지 못하는 법이다. 그것처럼 옥중생활체험 하나만 믿고서는 좋은 글을 기대할수 없었다. 가령 기름진 땅을 가진 농사군이 있다고 하자. 땅만 가지고서는 농사를 잘 지을수 없다. 좋은 종자도 있어야 하고 맨손으로 땅을 갈고 김을 맬수는 없으니 농사도구도 필요하며 안전한 수확을 거둘수 있는 선진농사법도 알아야 하는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체험이 있다고 해도 재간이 없이는 글을 쓸수 없는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천성적인 재능을 떨친 석윤기, 천세봉, 백인준과 같은 문호들과 나란히 놓을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제야 내가 발표한 글들은 잘되여서가 아니라 비전향장기수란 특권의 덕을 입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작가앞에서 얼굴이 붉어졌다. 좋다, 많이 낳지는 못해도 충실한 알을 낳자! 그러되 여전히 비전향장기수들의 생활을 진실하게 그리자. 우리 문학사를 보면 자기의 고유한 생활밭을 가진 작가들은 대체로 성공하였다. 실례로 천세봉은 《석개울의 새봄》, 《대하는 흐른다》 등 농촌물을 썼고 석윤기는 중편소설 《전사들》과 단편소설 《두번째 대답》, 장편소설 《시대의 탄생》과 같은 전쟁물들과 지식인들을 주로 작품에 형상하였으며 윤세중은 장편소설 《시련속에서》, 《용광로는 숨쉰다》를 비롯하여 로동계급의 생활을 위주로 소설을 썼다. 세계문학사를 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비전향장기수들의 생활만 취급한 수기를 쓰려고 결심한것은 아주 정확한 선택이였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고 해도 소설을 쓰기 위하여 일부러 30∼40년동안 감옥생활을 할 사람은 없는것이다. 레브 똘스또이가 자기의 3대소설의 하나인 《부활》을 썼다고 하지만 그가 실지로 까츄사가 억울한 루명을 쓰고 갇혀있은 감옥에서 수인생활을 한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까츄사가 네흘류도브의 박애주의적인 청혼을 뿌리치고 씨몬손과 운명을 같이하는 그 시각에 작가가 그들의 옆에 있은것도 아니였다. 재판에 참가했던 한 변호사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사실을 작가가 풍부한 예술적환상과 허구를 동원해서 그처럼 훌륭한 명작으로 만들었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독자들도 그러하겠지만 나도 TV련속극 《석개울의 새봄》을 무척 좋아한다. 《석개울의 새봄》을 소설책으로도 보고 TV련속극으로도 보았는데 확실히 농사군들의 체취와 거름냄새가 푹푹 느껴지는 작품이다. 천세봉선생은 늘 농민들속에 들어가 살면서 자신을 작가라기보다 그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간주했기때문에 그토록 진실하고 생활적인 소설을 쓸수 있었다. 구태여 언급한다면 남쪽에서 쓴 수기집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가 어느 정도 독자들의 호평을 받은것은 내가 직접 겪은 생활을 진실하게 썼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우리 동지들을 잘 안다. 그들의 가슴속에 무엇이 끓고있으며 그들이 무엇을 절절히 원했는가 하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다. 나는 그들이 투철한 수령관, 강의한 신념과 의지의 체현자일뿐만아니라 고향에 두고온 안해와 자식들, 부모형제들을 끝없이 사랑한 가장 진실하고 뜨거운 인간들이라는것을 세상에 알려주고싶었다. 우리 동지들속에는 놈들의 고문에 의하여 앓다가 독감방에서 숨을 거두면서도 《아버지는 너희들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간 동지도 있었다. 그처럼 자기의 어린 자식들앞에조차 성실하고 떳떳한 아버지로 나서고싶었던 이런 깨끗한 사람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싶었다. 빨리 쓰자, 더 늙기 전에… 자다가도 소스라치듯 놀라 일어날 때가 드문하다. 뜨뜻한 집에서 푹신한 이불을 덮고 태평스럽게 잠들고있기에는 먼저 간 동지들앞에 지닌 나의 의무가 너무도 많다. 다시 돌아올수 없는 사형장으로 나가면서도 《김일성장군 만세!》, 《조국통일 만세!》를 목청껏 부른 동지들… 묘도, 묘비도 없이 떠나간 그들의 모습이 어제도 오늘도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있다. 나는 한때 미련하게 소설을 쓰려고 끄적거린 일도 있었다. 그것을 안 한 젊은 작가가 나에게 《선생님은 소설을 쓰지 마십시오.》하고 충고를 주었다. 속으로는 좀 불쾌했다. 이 사람이 내가 창작능력이 높지 못하다고 그러는것이 아닌가? 《그 리유가 뭐요?》 하고 물었다. 《소설이란 허구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쓴 수기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이야기여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이제 소설을 쓴다면 이미 쓴 수기도 오해를 받을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앞으로도 수기외에 다른 글을 쓰지 말았으면 하는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평생 잊지 못할 그 작가의 말이였다. 비로소 사람들이 내가 쓴 수기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가를 알게 되였다. 부끄러웠다. 잠시나마 곁눈을 판것이. 누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가고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그건 바로 자기를 아는것이다.》라고 대답할것이다. 그렇다. 자기를 알면 그만큼 인간은 커지는 법이다. 그때부터 나는 바위처럼 틀고앉아 부지런히 수기를 발표했다. 처음으로 쓴 수기집 《태양가까이에서》에는 37편의 수기가 들어있는데 옥중생활 34년동안 체험했던 사실자료를 가지고 글을 썼다. 두번째 수기집 《생이란 무엇인가》에는 옥중에서 눈을 감은 10명의 동지들과 현재 살아있는 6명의 동지들을 그린 23편의 수기가 실려있다. 세번째 수기집 《삶의 노래》에는 지금은 우리의 곁에 없는 8명의 동지들과 생존해있는 5명의 동지들의 생활을 그린 23편의 수기가 들어있다. 이번에 내는 네번째 수기집 《조국의 품에 안겨》에서는 조국의 품에 안긴 지난 10년동안에 체험한 비전향장기수들의 행복한 생활을 기본으로 썼다. 없는 재간에 글을 쓰기가 조련치 않았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서 붓을 놓을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내스스로 채찍질하며 쓰고 또 썼다. 한편 또 한편의 수기를 발표할적마다 나는 량심의 빚더미가 줄어드는것을 느끼군 한다. 그 나날에는 예상치 않았던 좋은 일들이 생기기도 했다. 수기 《내가 만난 첫 사형수》가 발표되였을 때였다. 정영태동지는 사형장으로 나갈 때 나의 손을 잡고 자식들과 동지들, 조국앞에 자기는 마지막까지 떳떳이 살았음을 말해달라고 당부한 비전향장기수이다. 그 수기를 읽은 정영태동지의 아들과 가족들이 나를 찾아와 와락 끌어안고 쌓이고쌓였던 눈물을 쏟을 때 나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들에게 아버지에 대하여 말해주면서 부디 비전향장기수의 아들답게 장군님을 받들어 일을 잘하라고 고무해주고나니 정영태동지에게 졌던 마음의 빚이 다소나마 줄어드는것 같았다. 그후 수기 《통일의 그날이 보인다》를 읽은 송계록동지의 아들과도 만났으며 수기 《잊을수 없는 생일날》을 읽은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이며 박사인 신범수동지의 아들과의 상봉도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수기를 보고 나를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수기를 쓰기로 한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 하고 생각하군 한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신고하면서, 잠시간을 줄이면서 글을 썼던 지난 10년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기쁘게 여긴다. 앞으로도 나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감옥과 단두대에서 굴하지 않고 싸운 동지들의 투쟁이야기와 장군님의 품에 안겨 잃었던 청춘을 되찾고 행복한 삶을 마음껏 누리는 동지들의 생활을 담은 수기를 계속 쓰겠다. 그것은 의무이기 전에 비전향장기수의 한사람인 나의 량심이며 도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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