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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우리 삶의 의미
아주 오래전에 감옥에서 젊은 일반수인과 나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인생엔 목적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까? 다만 각자에게 주어지는것은 자기를 둘러싸고있는 현실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적정황에 맞게 살아가느라면 인생살이가 되는것 아닙니까?》 《사람은 태여날 때 목적을 가지고 나는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운것을 지향하는 인간은 스스로 목적을 갖기마련이요. 고결한 인간일수록 삶의 마지막순간까지 뚜렷한 목적을 안고 살지. 아름다운것을 따르고 그것을 위해 바치는 인간의 삶에는 반드시 깊이 새겨볼만 한 의미가 있소.》 그때 이런 대화가 오가게 되였던 동기가 무엇인지는 기억속에 삭막하다. 다만 내 생의 물리적공간을 너무도 악착스레 좁혀버린 무덤같은 먹방속에서 자주 그 대화를 상기해보며 내 삶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묻군 하던 일은 기억에 생생하다. 그때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살아온 생보다 살아야 할 생이 더 짧다. 로년은 추억의 시절이라지만 나는 오늘도 살아온 과거보다 살아야 할 래일에 대하여 생각하며 산다. 과연 래일을 사는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의 삶이 영원히 래일을 지향하도록 이끌어주는것인가. 2007년 12월 전국지식인대회에 참가하였던 나는 또다시 이 물음앞에 서게 되였다. 사실 나는 전국지식인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도 내가 여기에 참가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었다. 지식인대회란 지식으로써 조국을 받들어온 지식인대표들의 회의가 아닌가. 그때 친지들 몇사람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자기들이 대회에 참가하게 된 소식을 알려왔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들은 학문을 사랑했고 학문에 성실했으며 학문으로 조국의 부강번영에 이바지하기 위해 불타는 탐구의 열정을 바쳐온 나의 학우들과 조국의 품에 안긴 후 사귀게 된 이름있는 지식인들이였다. 나에게는 그것이 나의 일처럼 기뻤고 한편으론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벌써 이렇게 늙었다는것이 몹시 서운하게 생각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우리 집을 찾아온 한 일군으로부터 나도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은정으로 전국지식인대회 대표로 선출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전국지식인대회 대표증을 받았을 때는 거기 씌여진 이름이 정말 내 이름이 옳은가 하여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나는 나라의 과학기술발전에 이바지한 과학자도 아니고 이름있는 예술가도 아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대표로 참가할수 있단 말인가. 비전향장기수들중 5명이 지식인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해 특혜를 베푼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조국의 품에 안긴 후 수기집 《태양가까이에서》, 《생이란 무엇인가》, 《삶의 노래》 등을 내놓고 신문과 잡지들에 글을 발표한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하여 지식인들의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수는 없다. 대회가 시작되는 날 4. 25문화회관에 들어서니 박사메달을 단 수많은 학자들이 복도를 오가고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잘못 온것처럼 생각되여 아는 사람들을 보면 얼른 눈길을 돌리군 하였다. 좌석표를 본 나는 더 크게 놀랐다. 내가 앉을 좌석이 대회주석단으로 되여있었던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4. 25문화회관 응접실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며 앉아있는데 안내자가 다가왔다. 그는 《선생님, 같이 가십시다.》 하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할새도 없이 앞장에 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안내자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복도에 나서니 명예칭호들과 훈장들을 단 대표들이 주석단쪽을 향해가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대기실에 이르니 한사람이 기다린듯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내가 앉게 될 자리를 알려주었다. 응접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니 대부분 원사, 후보원사, 교수, 박사, 언론인, 작가, 예술인들이였다. 그들중에는 2중로력영웅을 비롯한 영웅들도 있었으며 김일성상계관인도 있고 TV에서 자주 보았던 경제부문 일군들도 있었다. 나는 이미 알고 지내던 몇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잠시후 회의가 시작되였다. 내옆에는 번쩍거리는 훈장을 가슴마다 가득 단 어느 공장의 지배인, 작가, 의사, 방송원이 앉아있었다. 강성대국건설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을 높일데 대한 보고자의 토론을 귀담아들으며 나는 비전향장기수인 나는 무엇을 하여야 이 지식인대회에 참가하도록 하여준 당의 은덕에 보답할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에게는 비전향장기수인 내가 어떻게 이자리에 앉게 되였는지조차 의문이였던것이다. 보고자의 토론을 주의깊이 듣던 나는 지식인들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추호의 흔들림없이 강한 신념과 의지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강성대국건설구상을 실현하는데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쳐야 할것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트이였다. 이제는 오래동안 지식인대오에서 떨어져있던 나를 이 대회에 참가하도록 하여준 당의 의도를 비로소 알수 있을것 같았다. 우리 동지들이 적들의 야수적인 악형속에서 어떻게 자기의 사상과 신념을 지켜냈는가를 지식인들에게 알려주어 그들도 조국의 륭성번영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나가도록 고무해주는것이 오늘 이 지식인대회에 참가하도록 하여준 당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였다. 대회 휴식시간에 나는 주석단에 앉은 사람들과 함께 대기실로 나왔다. 이때 누군가 나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이미전부터 나와 안면이 있는 작가였다. 김일성상메달을 단 그가 나에게로 다가와 《역시 김선생님이 맞았구만.》 하며 반가워하는것이였다. 무엇이 맞았다는 말인가 물었더니 그는 아까 다른 작가들과 함께 주석단에 앉은 사람들을 보다가 김선생을 보았는데 김선생인지 아닌지 딱히 알수 없었다고 한다. 옳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김선생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주석단에 앉은것은 물론 지식인대회에 참가한 사실자체가 그들에게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대회 휴식시간에 직접 확인해보려고 왔다는것이다. 그 작가는 동무들에게 주석단에 앉은 사람이 김선생이 옳다는것을 이야기해주겠다고 하면서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이름난 작가에게서 그 말을 들은 나는 몸둘바를 몰랐다. 회의가 다시 시작되였다. 많은 토론자들이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과 이전 쏘련의 붕괴때 사회의 정신적지주가 되여야 할 지식인들이 오히려 그에 앞장섰으며 오늘 그들은 비참한 운명의 길을 헤매이고있다고 하면서 지식인들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복무할 투철한 신념을 간직할 때 인생의 참된 행복을 누릴수 있다는것을 강조하였다. 그 말을 듣는 나의 마음은 저으기 흥분되였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사실 동유럽사회주의의 붕괴는 그 나라 지식인들의 정신적붕괴에서 시작된것이였다. 동유럽의 지성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아 서방에로 동경의 시선을 던지던 그때 동유럽전체의 방황이 시작되였다. 하지만 풍요로와보이던 서방의 거리들에서 그들이 얻은것은 헤여날 길 없는 정신적허무였다. 자기의 뚜렷한 리상과 신념이 없는 그들은 타락한 서방의 《문명》속에서 허무에로의 끝없는 방황을 시작하였다. 궤도를 리탈한 그들이 이제 닿게 될 곳은 어디이겠는지. 나는 오래전 공화국의 품속에서 상업경제학을 배운 지식인으로서 남쪽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보는 과정에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진면모를 대회에 참가한 누구보다 더 잘 알게 된 사람이다. 출옥후 생활하는 기간에는 르네쌍스시대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자본주의정신사를 철저히 분석해보기도 하였었다.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사회정치학이나 문학, 경제학에 대하여 연구도 하고 비판적분석을 가해보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현대자본주의사회의 정신적 및 구조적부패성을 어느 정도 깊이 파악하고있다고 할수 있었으며 그에 대하여 나름의 일가견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론증할 자신도 있었다. 토론자들의 토론내용을 마음속으로 긍정해주며 나는 우리를 분에 넘치게도 신념과 의지의 강자로 불러주시며 온 나라 인민들앞에 내세워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에 기어이 보답할 결의를 다지였다. 대회기간 TV로 대회주석단에 앉아있는 내 얼굴도 방영되여 평양은 물론 지방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축하의 인사들이 날아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나에게 어떻게 되여 지식인대회 주석단에 올랐었는가 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유치원에 다니는 우리 집 손자도 TV를 보다가 《왕할아버지가 나왔다.》 하고 떠들썩 고아댔다. 그애에게는 나까지 세사람의 할아버지벌 되는 사람들이 있었기때문에 그들중 나이가 제일 많은 나를 《왕할아버지》라고 부르고있었다. 그애도 역시 내가 왜 TV에 나오는가고 묻지 않았다. 어째선지 사람들은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을 특수한 존재라도 되는듯이 생각하면서 나라의 큰 행사들에 참가하는것을 응당한 일로 받아들이는것 같았다. 지나친 겸손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만약 그때 그 천진한 아이로부터 왕할아버지가 어떻게 TV에 나오게 되였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면 진땀을 뽑으며 설명해주어야 했을것이다. 나는 내가 대회에 참가한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래일에로 불러주며 인생의 래일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나가기 바라는 조국의 기대라고 생각한다. 지식인들의 대회에 참가하도록 하여준 당의 사랑에 나는 무엇으로 보답할것인가. 나는 오랜 생각끝에 더 많은 글을 쓰리라 결심했다. 마치 푸른 꿈을 안고 금방 대학교정을 나선 젊은이들처럼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침일찍 일어나 저녁녘까지 사색하고 또 사색하고 쓰고 또 썼다. 먼저 오래전부터 준비하고있던 론문 《신념과 의지의 강자 비전향장기수들의 투쟁연구》의 완성에 달라붙었다. 사실 나는 그것을 학위론문으로 구상했던것은 아니였다. 다만 옥중에서 겪은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싶었을뿐이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데는 사연이 있었다. 언제인가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문학대학 교수, 박사, 학생들과의 모임에서 여담삼아 이렇게 말하였었다. 《이자리에는 교수, 박사선생님들도 참가하였습니다. 문학리론에는 내가 선생님들에게 미치지 못할수 있지만 감옥에 대해서 말한다면 저도 능히 박사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모두가 즐겁게 웃었다. 물론 이러루한 일로 글을 쓰려고 생각하게 된것은 아니였다. 나는 30대초에 대구감옥의 사형수감방에서 정영태동지를 만났었다. 그는 사형장에 나가기 전에 나에게 《정영태는 김일성장군님의 전사로 떳떳하게 살았다고 당에 보고해주시오. 그리고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조국이 통일되는 날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이 아버지 목소리까지 합쳐 조국통일 만세를 불러달라고 전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는 사형집행날 복도에 나서자 온 감옥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김일성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였다. 그 모습은 금방 감옥투쟁을 시작한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였다. 나는 옥중투쟁기간 동지들이 이렇게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는것을 수많이 보아왔다. 그때 나는 만약 살아서 감옥문을 나선다면 이런 동지들의 모습을 꼭 기억해두었다가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기록으로 남길것을 결심했었다. 내가 비전향장기수들의 투쟁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것은 벌써 그때부터였다. 결국 나의 박사론문은 수십년의 력사를 가진셈이였다. 물론 그때 학위론문에 대해서는 꿈도 꾸어본적 없었지만… 종이도 붓도 없는 감옥에서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기억해둔다는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였다. 하지만 나는 력사를 기록해야 하였다. 머리로써가 아니라 심장의 피로써. 나는 그것을 사형장에서, 고문장에서 그리고 옥중에서 생을 마친 동지들에 대한 의리로 받아들이고 일에 착수하였었다. 우선 옥중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 나이, 고향, 간단한 경력, 사건내용, 가족관계, 옥중생활의 이모저모 등을 보고 듣고 재확인한 후 머리에 기억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일을 그렇게 기억한다는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여서 동지들의 출생년도는 나를 기준하여 몇살 우이고 아래인가를 계산하여 기억하는 등 방법을 연구하여야 하였다. 다음 조국의 품에 돌아올 때까지 비전향장기수들의 옥중투쟁사를 시기별로 크게 분류하고 해당 시기 옥중투쟁의 특징을 분석, 정의하였다. 전쟁시기의 옥중투쟁, 미제의 주구 리승만통치시기의 옥중투쟁, 군사파쑈독재《정권》시기의 옥중투쟁, 특히 《유신》시기의 사상전향강요의 특징과 《사회안전법》에 따른 《보안감호소》에서의 옥중투쟁, 전두환, 로태우집권시기의 옥중투쟁, 이전 쏘련의 붕괴후 1990년대의 옥중투쟁, 출소후 《보안관찰법》 감시속에서의 투쟁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투쟁내용도 그들의 출신별로 분류하고 정리하였다. 그다음 매 부류의 동지들의 투쟁방법과 정치사상적수준, 지식수준, 성격과 취미, 특기, 문화정서수준 등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료해하였다. 그리고 통일애국투사들에게 적용한 《보안법》, 《반공법》,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의 반민족적, 반통일적본질을 조항별로 연구하였다. 특히 그것을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조국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다 체포구속된 애국자들에게 적용하였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법과 비교하여보았다. 해방후 남조선괴뢰들이 만든 《법》이란 일제식민지시대의 법을 그대로 옮긴것이였다. 재판과정, 동지들에게 적용한 법률조항들의 범죄성, 전시의 《앞줄 사형, 뒤줄 무기》식판결 등에 대하여서도 수집정리했다. 적들의 사상전향방법들, 적감옥기구, 매 기구의 직능, 적감옥구조들에 대하여서도 료해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감옥들은 일제가 건설한 벽돌목조건물이였다. 1971년에 새로 건설한 철근콩크리트감옥구조, 특히 비전향장기수들을 수용한 그 악명높은 0. 75평 감방구조, 1984년에 미련방중구금감옥을 그대로 모방한 대전중구금감옥구조를 세밀히 조사하여 머리속에 새겨넣었다. 이 미국식감옥구조는 일본식의 위압적인 중세기적특징과 미국식의 교활성이 구현된 페쇄성구조였다. 이 모든 작업중 나의 주되는 과제는 사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한 비전향장기수들의 옥중투쟁을 기록하는것이였다. 나는 동지들의 모습과 그들의 눈동자와 숨결마저 생생하게 기억하고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처럼 대바르고 뜨거운 인간애를 지닌 사람들, 모진 악형을 혁명가의 량심으로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이겨낸 사람들의 숭고한 모습을 잊을수 있겠는가. 위대한 수령님을 하늘처럼 믿고 조국통일을 위해 싸우다 최후를 마친 동지들을 당대와 후세의 사람들에게 전하는것은 너무도 응당했다. 만약 그때 붓과 종이를 사용할수 있었다면 더 정확하고 많은 자료를 정리할수 있었을것이다. 출소후 나는 이미 출소한 동지들의 도움으로 자료들을 더 정확히 고증하고 정리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그에 토대하여 비전향장기수들의 옥중투쟁에 대한 글을 쓰게 된것이다. 론문을 쓴다는것이 80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몹시 힘에 부친 일이였다. 밤에 잠시간을 줄이면서 일하다보니 혈압도 오르고 때로는 부정맥이 생겨 담당의사는 글을 쓰면 안된다고 만류하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나이에 무슨 론문을 쓰느라 고생을 사서 하는가고 나무라기도 하였다. 그렇게 되고보니 나도 좀 망설여지는것이였다. 이렇게 전전긍긍하던 어느날 나의 눈앞에 정영태동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 그립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동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며 나의 나약한 마음을 질책하는것만 같았다. 나는 그들의 눈길을 피할수 없었다. 수십년세월이 흘렀다고 잊을수도 없으며 이제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더는 나에게 어떤 요구도 할수 없다고 외면할수 없는 나의 전우들이였고 동지들이였다. 나는 론문을 쓰는것은 나 하나만의 일이 아님을 다시금 자각하였다. 선렬들의 넋을 후세에 전하는것은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길을 떠나간 그들을 위해 할수 있는 산자의 최대의 례의였다. 이렇게 나는 론문집필을 떠나간 동지들을 위한 나스스로의 의무로 받아들이고 다시 글을 써나가기 시작하였다. 《ㄱ, ㄴ, ㄷ》순으로 수백명동지들의 명단을 작성한 론문부록을 만드는데만도 거의 한달이 걸리였다. 1971년도에 철근콩크리트로 건설된 대구, 광주감옥도면, 1984년 3월 20일 완공된 대전감옥도면과 감옥내의 비전향장기수들을 수용했던 0. 75평 특별사동, 독감방도면 등을 그리는데 또 몇달이란 시간이 소비되였다. 모란봉에로의 산책길도 집주위를 도는것으로 바꾸어 시간을 아끼였다. 이런 과정에 학위론문은 완성되여 심의에 제출되였다. 인민대학습당 회의실에서 심의가 진행되였다. 나는 변론에 앞서 《나는 박사가 되자고 학위론문을 쓴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이 글이 희생된 동지들에 대한 기록으로 남게 되기를 바랄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나의 진심이였다. 심의가 끝난 후 학위론문심의위원회는 론문에 대해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계시기에 세계옥중투쟁사에 없었던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이 태여나게 되였음을 옥중투쟁사실을 통하여 론증한 가치있는 론문이라고 평가하며 사회정치학 박사론문으로 결정한다고 하였다. 지난해 7월 나는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날 내가 학위를 수여받고 자리에 와앉았을 때 옆사람이 나보고 알은체를 하기에 보니 몇년전 어느 대학에서의 모임때 만난적이 있는 문학교원이였다. 그는 내가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은것을 알고 의아해하고있었다. 그럴만도 하였다. 그는 내가 작가동맹 맹원이니 문학으로 학위를 받으리라고 생각했을것이다. 그는 내가 왜 70객의 나이에 완전히 다른 분야의 론문을 피타게 써냈는지는 더더욱 모를것이였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감정은 박사학위를 받은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였다. 오늘에야 희생된 동지들앞에서 산자의 의무를 다했다는 행복감이였다. 한편 전국지식인대회때 별로 한 일도 없이 주석단에 앉았던 송구스러운 감정이 조금 가셔지는것이였다.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되여 대회주석단에 앉게 되였는가 묻지 않은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던 일도 떠오른다. 지금 다시 그런 물음을 받는다면 나는 다소나마 떳떳한 마음으로 대답할수 있을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스스로 조국앞에 지닌 의무를 생각하며 산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비전향장기수들 누구나 그렇게 살고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내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해 걷고 또 걸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로고의 자욱자욱을 따라 공장으로, 농촌으로, 발전소건설장들에로 발걸음을 이어간다. 전우들이 목숨을 바치면서도 저버리지 않았던 사랑하는 내 조국의 영원한 행복을 바라며… 아마도 그것이 우리들이 사는 의미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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