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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조선혁명박물관
친척들중에 대학에서 공부하는 한 젊은이가 조선혁명박물관을 참관한 후 나를 찾아와 몹시 흥분된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남조선에서 가지고온 《통일의 집》현판과 락동강모래 한줌, 옥중유물인 나이론양말 한짝이 조선혁명박물관의 조국통일관에 전시되여있다고 하는것이였다. 해설문에는 나의 이름까지 있다는것이다. 나는 몹시 흥분되였다. 조국의 품에 안긴 후 어느날 나는 나를 찾아왔던 조선혁명박물관 연구사들의 청으로 그것들을 내놓았었다. 하지만 나는 설마 하는 생각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쓰던 소박한 물건들이 어떻게 우리 혁명의 위대한 력사가 깃들어있는 그 집에 전시될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음날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아 전시품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던 나는 정말 믿을수 없는 현실을 눈앞에 보게 되였다. 나이론양말 한짝, 락동강모래 한줌, 《통일의 집》현판. 《통일의 집》현판소개문에는 내 이름까지 씌여져있었다. 그 현판은 내가 조국의 품에 안기던 그때 안고 들어온것이 분명하였다. 순간 가슴이 쩌릿해왔다. 조선혁명박물관은 겨레의 존엄과 행복을 위해, 조국의 부강한 래일을 위해 위대한 수령님께서 걸으신 혁명생애의 자욱자욱이 새겨져있고 그 자욱을 따라 머나먼 혁명의 길을 헤쳐온 혁명선렬들의 모습이 숭엄하게 안겨오는 곳이다. 온 겨레가 삼가 옷깃을 여미며 들어서는 여기에 감히 나의 이름이 새겨질 자리가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수 있었던가. 수십년의 옥중투쟁속에서 우리가 바란것은 오직 통일이였다. 그것을 위하여 삶을 깡그리 바쳤고 그것을 위하여 죽음도 영광으로 생각해온 우리들이였다. 산산이 부서지고 찢겨져 허공중에 티끌마냥 흩어지고 이름없는 산야에 모래알처럼 뿌려진대도 그 하늘이 통일조국의 하늘이 되고 그 땅이 통일조국의 땅이 되기만을 바라온 우리들이였다. 그런데 조국의 품에 안겨 분에 넘치게도 공화국영웅으로, 조국통일상수상자로 조국의 가장 값높은 명예를 다 받아안게 된것만도 꿈만 같은데 오늘은 또 혁명의 고귀한 력사를 영원히 전해주는 이 신성한 장소에 우리들의 이름이 새겨진것이다. 그날 나는 온밤 잠들지 못하고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위대한 장군님의 영상을 우러러보았다. 위인은 시대를 만들고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망각속에 묻혀지고말았을 우리의 인생은 오늘 위대한 장군님께서 펼쳐주신 6. 15시대와 더불어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력사에 영원히 기록되게 되였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 계시여 우리의 인생은 결코 지워버릴수도 잊혀질수도 없는 긍지높은 력사로 빛나고있는것이다. 아래의 글들은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된 나이론양말, 락동강모래, 《통일의 집》현판 등에 깃들어있는 사연들을 추억하여 쓴것이다.
1) 나이론양말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 살 때 래일의 생활을 행복하게 가꾸어갈수 있는것처럼 강한 의지로 숭고한 위업에 모든것을 다 바친 나날을 인생의 귀중한 재보로 간직할줄 아는 인간들만이 자기 인생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가꾸어갈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잊지 못할 하나의 추억이 있다. 놈들에게 체포될 때 나는 오른쪽허리로 들어간 탄알에 척추를 다치여 한쪽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가 되였다. 다리의 신경이 마비되여 오른쪽발가락은 안으로 구부러져 펼수가 없었다. 그때문에 나는 감옥에서 주는 낡은 고무신을 신을수 없어 맨발로 걷지 않으면 안되였다. 재판받으러 나갈 때면 다섯사람을 한바줄에 조기묶듯이 묶어 다섯사람이 같은 보조로 걸어야 하였는데 나는 다리를 절어 줄줄 끌리여다니게 되였다. 나도 힘들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편을 주는것이 괴로웠다. 그렇지만 그들은 낯색 한번 흐리는적이 없었다. 재판받으러 나가면 비둘기통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방에 여러 사람을 수용하는데 서로 무릎을 대고 앉아야 했다. 이 《비둘기통》에서 나는 피부색이 좋은 50대의 사나이와 무릎을 맞대고 앉게 되였다. 그 사람은 나에게 《몹시 괴롭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였다. 나와 이야기를 하다 간수에게 띄우면 매를 맞게 된다는것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동정심을 느끼였던지 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위로의 말을 해주는것이였다. 첫 순간부터 인정미가 느껴지는 사람이였다. 그 사나이는 자기를 어느 짐배의 선장이라고 소개하였다. 항해도중 자기네 배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심공판에 나서게 되였다고 한다. 우리는 법정에 나서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동안에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경위에 대한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자기의 이야기를 하자 그는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슬픈 일입니다. 의로운 일에 나선 젊은 사람들이 죄인취급을 받아야 하니…》 잠시후 우리는 함께 법정에 끌려나갔다. 나는 맨발로 법정을 향해나갔다.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은 엄동설한에 맨발로 절룩거리며 들어서는 나에게 집중되였다. 그들은 푸른색 광목천으로 만든 낡은 수의와 추위에 검붉어진 발을 놀라운 눈길로 바라보고있었다. 그들중에는 이 처참한 광경을 차마 볼수 없다는듯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였다. 총상으로 발의 신경이 마비된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보다는 사람들앞에서 떳떳하게 행동하여야 하겠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선장은 이날 석방되여 집으로 가게 되였고 나에게는 사형이 구형되였다. 《사형!》 하는 소리가 울리는 순간 장내에는 무거운 정적이 깃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비껴있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었던 나는 재판관이라는자들을 쓰거운 웃음을 짓고 바라보며 방청석 통로사이로 걸어나갔다. 뒤에서 사람들이 무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사형을 선고받고도 웃음짓는 사람의 모습이 기이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내가 다시 《비둘기통》에 들어서니 선장은 나에게 침통한 어조로 《선생님, 참 안됐습니다. 하지만 아직 재판이 더 남아있으니 아마 좋게 되겠지요.》 하며 위로해주었다. 나도 이 인정깊은 바다사람에게 《무죄는 못되였지만 집행유예로 나가게 된것이 내 일처럼 기쁩니다.》라고 인사하였다. 한사람은 교수대로, 한사람은 집으로 떠나야 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우리 두사람이였다. 《축하합니다.》 사형수의 이 말에 그 사나이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얼굴엔 무한한 감동이 어리고있었다. 나의 눈동자에 생명의 마지막불꽃이 피여올랐다. 그것은 겨레의 아름다운 삶을 위해 자신을 다 바치려는 마음의 불꽃이였다. 선장은 부드러운 어조로 한동안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여져야 할 시간이 다되였을 때 잠시 동정어린 눈길로 나의 발을 바라보던 그는 자기가 신고있던 나이론양말을 벗어 억지로 내 발에 신겨주었다. 《새 양말을 드리지 못하는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저의 성의로 아시고 신어주십시오.》 내가 《선생의 발도 시리겠는데…》 하며 양말을 벗으려고 하니 그는 자기는 몇시간후에 가족이 가져온 옷을 입고 새 양말을 신게 될것이니 걱정말고 신으라며 내 손을 꼭 잡는것이였다. 나는 그의 성의에 못이겨 양말을 신었다. 동지달 추위로 시퍼렇게 변했던 내 발은 점차 따뜻해지기 시작하였으나 선장의 맨발을 보기가 몹시도 미안하였다. 동지달 낮은 짧아 벌써 어두워지고있었다. 우리는 감옥에 돌아가기 위해 수정을 차고 바줄에 줄줄 묶인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선장에게 접근해간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인생에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고 마지막인사를 하였다. 선장은 나에게 부디 건강해서 오래오래 살라고 하는것이였다. 형장으로 떠나야 할 사람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참 별스러운 인사였다. 보통때라면 별치않게 들었을 이 말은 그 순간 나에게 강한 충격을 남기였다. 생명이 이제 곧 꺼져버릴 사형수에게 왜 그런 이상한 인사말을 하였던것인지는 지금껏 수수께끼로 남아있게 되였다. 요사이 나는 그때 그가 앞일을 내다본것이 아니였을가 하고 생각해보군 한다. 독감방에 돌아온 후 나는 나이론양말을 벗어들고 오래동안 쓰다듬었다. 이 나이론양말은 나의 첫 감옥재산이였다. 《지옥》의 첫 재산치고는 꽤 호사스러운 물건이였다. 나이론양말은 선장의 고운 마음씨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늦은 밤에 양말을 빨아 위생실 뒤벽에 널어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마른 양말은 새것처럼 보였다. 이 양말은 오래동안 신어야 하였으므로 나는 운동시간에 간수들의 눈을 피해가며 쓰레기통에 버려진 낡은 양말을 주어왔다. 선장이 준 양말바닥에 덧대려는것이였다. 나는 주어온 낡은 양말목을 풀어 실을 꼬아서는 이불속에 감추어두었다. 감옥에는 실 한오리라도 가지고있을수 없다는 금지사항이 있었던것이다. 목을 매고 자살할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리유때문이였다. 이번에는 바늘을 만들어야 하였다. 운동시간에 독거운동장에 나간 나는 일부러 비자루질을 세차게 해대였다.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자 간수는 껑충거리며 저만치 달아났다. 이때 나는 재빨리 참대비자루를 묶은 가는 철사를 바늘길이만큼 잘라냈다. 그리고는 옷섶에 감추어가지고 돌아와 감방의 마루바닥짬사이에 감추었다. 다음 운동시간에는 간수의 눈을 피해 자그마한 차돌을 주어다 변소 걸레속에 감추어넣었다. 간수가 검방(감방안에 부정물품이 없는가, 도주하기 위해 철창살을 절단하지는 않았는가 등을 검열하는것)할 때 변소 걸레에는 손을 대지 않기때문이였다. 그후 차돌로 철사 한쪽끝을 두드려 좀 납작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구멍을 뚫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 다른 철사끝으로 뚫고 또 뚫었다. 그야말로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이 끈질긴 인내심으로 노력하였더니 한달만에는 드디여 철사에 구멍이 생기였다. 다음 변소바닥 콩크리트에 철사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감옥 독감방에서 바늘을 만드는데 성공하자 나에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수 있다는 자신심이 생기였다. 나는 준비된 나이론실과 바늘로 나이론양말바닥을 뜨기 시작하였다. 바늘구멍에 나이론실을 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침을 바르고 해보았지만 잘 꿰여지지 않았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명주실을 바늘구멍에 꿰기전에 면실을 함께 비벼 꼬시던 모습이 떠올라 그렇게 해보았더니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잘되였다. 나는 나이론실로 양말바닥을 촘촘히 뜨기 시작하였다. 간수의 눈을 피하는데 많은 신경을 쓰다보니 속도가 느리고 몹시 힘들었다. 한달동안에 양말 한쪽바닥이 완성되였다. 바느질을 다하고 양말을 신어보니 바닥이 몹시 빳빳하였다. 비벼서 꼰 실로 뜬것이여서 그런 모양이였다. 어떻든 그것으로 한해 겨울을 넘기기는 하였으나 신경이 마비된 오른쪽발가락은 물론 왼쪽발가락마저 얼어서 시퍼렇게 되여버렸다. 봄이 되니 발이 가려워 미칠 지경이였다. 가을이면 수인들은 제나름으로 겨울나이준비를 한다. 메마른 몸에 훌렁한 수의를 걸친 사람들이 보잘나위 없이 초라한 물건들을 들고 겨울나이를 준비하는 이 어두운 세계의 모습은 너무도 처절한것이였다. 나도 헌 걸레쪼박으로 버선을 만들기로 하였다. 우선 재봉으로 기워놓은 걸레천을 조심스럽게 뜯어 이불솜을 뽑아내였다. 그런데 천이 어찌나 낡은것이였던지 2∼3일후에는 버선밑바닥이 터지며 솜이 삐여져나왔다. 그래서 나는 버선우에 나이론양말을 씌워보려 하였지만 워낙 양말바닥이 신축성없다보니 잘되지 않았다. 아깝지만 발의 동상을 막아야 하기때문에 나이론양말의 등을 유리쪼각으로 째고 버선우에 나이론양말을 씌웠다. 나이론양말이였기때문에 겨울내내 신어도 버선바닥에는 구멍이 생기지 않았다. 여벌이 있는것도 아니여서 겨울내내 세탁 한번 못하고 신다나니 버선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봄이 되자 버선을 버리고 나이론양말을 세탁하였는데 먹물같은 때물이 흘러나왔다. 가을에 다시 걸레천으로 버선을 만들고 그우에 나이론양말을 씌웠다. 이런 작업은 해마다 반복되였다. 그렇게 28년의 세월을 넘어왔다. 이 나이론양말이 없었더라면 내 발가락은 동상으로 다 썩어버리고말았을것이다. 한창 젊었던 그 시절 사형수로서 시작하였던 감옥생활을 마치고 석방될 때 나는 그 인정깊은 바다사람에게서 받았던 나이론양말을 가지고 나왔다. 뭇사람들의 눈에는 한갖 헝겊같은것으로나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반생의 가장 귀중한 재산이였다. 출소후 나는 그 잊을수 없는 선장을 찾아보았으나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다. 《통일의 집》에 거처하게 되였을 때 나는 그 양말을 사물함속에 보물처럼 정히 보관하였다. 집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옥중에서의 괴로웠던 이야기를 하다가 이 나이론양말을 꺼내 보여주면 누구나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더우기 나이론양말바닥의 가쯘한 바느질솜씨를 보고는 사람의 손으로 뜬것이라는 사실자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탓하고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자신도 1미리간격의 꼼꼼한 바느질자리를 다시 볼 때면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었던것인지 놀랍게 생각되군 하였던것이다. 그 별치않은 나이론양말은 사람들의 화제거리로 되여 출소후 김동기라고 하면 그 나이론양말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군 하였다. 력사적인 6. 15북남공동선언발표이후 《통일의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중에는 그 나이론양말을 기념으로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옥중재산목록 1호>만은 그 누구에게도 줄수 없습니다.》라고 정중히 사절하군 하였다. 사실 나는 옥중 수십년간 내 몸에서 한시도 떼여놓은적 없는 나이론양말을 누구에게도 주고싶지 않았다. 뭇사람들의 눈에는 별치않은 물건으로 비낄것이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신념을 지켜, 자기의 사상과 량심을 지켜 청춘도 생명도 기꺼이 바쳐 싸워온 나날의 귀중한 체험이 비낀 소중한 재산이였다. 그런데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생활을 물심량면으로 도와주었던 한 녀성이 나를 찾아와 나이론양말을 기념으로 달라고 끈질기게 달라붙기 시작하였다. 내가 여러차례 거절하였지만 그는 단념하기는 고사하고 더 열심히 찾아왔다. 먼곳에서 불원천리하고 찾아오는 그를 볼 때마다 괴로웠지만 거절할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또 그 녀성이 대학에 다니는 자기 아들과 함께 찾아와 사정하는것이였다. 《선생님이 고향에 돌아가시면 우리 서로 다시 만날수 있다고 기약할수 없습니다. 일생동안 두고두고 추억할수 있게 그 양말을 남쪽에 두고 가십시오.》 그 녀인은 눈물이 그들먹한 눈을 슴벅이며 말하였다. 선생님의 전재산이였다고 할수 있는 이 나이론양말은 후손들에게 통일의 절박성을 일깨워주고 민족을 위해 바치는 참된 삶에 대하여 가르쳐주는 산 교과서와 같은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나의 마음은 차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나이론양말에 대한 강한 집착심을 쉬이 버릴수가 없었다. 부인의 아들도 울먹이며 말하는것이였다. 《나이론양말 한쪽을 저희들에게 두고 가시면 우리는 항상 선생님들을 잊지 않을것입니다. 한쪽양말이라도 두고 가주십시오.》 내가 확답을 주지 않자 그의 어머니가 《선생님, 통일된 다음에는 이 양말 한쪽을 돌려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는것이였다. 그들의 진정을 알게 된 이상 나는 더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날 저녁 우리들은 한자리에 모여 엄숙한 분위기속에서 나이론양말을 한짝씩 나누어가지는 《의식》을 진행하였다. 나는 부인과 아들에게 나이론양말에 깃든 사연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후대들이 분렬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바쳐온 선렬들의 한생을 언제나 잊지 않고 싸워간다면 조국은 반드시 통일될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부인과 아들은 붉은 천에 나이론양말 한쪽을 싸서는 자그마한 목함에 넣어가지고 돌아갔다. 옥중에서 나와 떨어져본적 없는 나이론양말 한쪽은 섭섭했지만 이렇게 내곁을 떠났다. 공화국의 품에 안길 때 나는 남은 나이론양말 한쪽을 가지고 왔다. 조국의 품에 안긴 후 어느날 조선혁명박물관 연구사 두사람이 나를 찾아왔었다. 내가 가지고온 《통일의 집》현판에 대한 사연을 듣고난 연구사들은 내가 감옥에서 사용하던 물건이 있으면 보고싶다고 하는것이였다. 나이론양말을 보여주면서 양말바닥은 내가 바늘로 뜬것이라고 하였더니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는것이다. 그러면서 나이론양말을 28년동안 신었다는 사실자체가 비전향장기수들의 옥중생활이 얼마나 고난에 찬것이였는가를 말해주며 비전향장기수들의 신념과 의지를 보여주는 력사의 증거물이라고 하며 조선혁명박물관에 기증해주기 바란다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선뜻 대답할수 없었다. 한것은 나의 오랜 옥중유물을 내놓아야 하는 아쉬움보다는 나같은 사람이 쓰던 물건이 어떻게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될수 있단 말인가 하는 황송한 마음때문이였다. 나의 이 마음을 알아보았는지 연구사는 선생님들의 옥중투쟁은 후대들을 조국통일운동에로 힘있게 이끌어줄것이라고 고무해주는것이였다. 나는 쑥스러운 마음으로 연구사에게 나이론양말 한짝을 넘겨주면서 간단히 그에 깃든 사연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침대에 누웠지만 30년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늘 그 옥중유물이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몹시 흥분하여 그 소식을 전해준 젊은이에게 또 나이론양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의 이야기를 주의깊이 듣던 그는 통일이 되면 그 양말도 짝을 만날수 있겠다고 하는것이였다. 조국통일의 그날을 위하여 더 열심히 일하겠다는 그의 결의를 듣는 내 마음은 흐뭇하였다. 요사이 나에게는 수십년전 재판정에서 사형수인 나에게 나이론양말을 신겨주며 건강해서 오래오래 살라고 하던 선장의 말속에 깃든 뜻이 더 선명해진다. 물론 나의 생각이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생각과 일치하겠는지는 알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나는 스스로 이런 결론을 내리였다. 오래오래 살아서 후대들에게 통일애국의 길에 바쳐진 우리 한생의 체험을 이야기해주고 조국의 귀중함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는… 이제 나이론양말은 나 하나만의것이 아니였다. 조국통일의 길에 바쳐진 한생의 가치를 천금보다 귀중히 여기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조선혁명의 력사와 더불어 영원히 전해질 우리 전사들모두의 귀중한 재보로, 온 겨레를 조국통일을 위한 한길로 불러주는 혁명의 귀중한 재보로 되였다.
2) 락동강모래
전화의 그날은 멀리 흘러갔어도 사람들이여, 길이 추억하라 청춘도 생명도 조국에 다 바친 이 나라 아들딸들의 피어린 군공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헌시비문중에서-
나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을 맞을 때마다 가슴에 훈장들을 달고 거리를 활보하는 전쟁로병들을 눈여겨 바라보군 한다. 하지만 이내 서운한 눈길을 돌리며 그들속에 보이지 않는 모습들, 내가 찾고싶어도 찾을수 없는 전우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생각에 잠기군 한다. 전승의 날을 위하여 청춘도 생명도 다 바친 그들은 오늘도 우리모두의 가슴속에 고귀한 추억을 불러주고있다. 이 추억은 나나 우리 전쟁로병들의것만이 아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 겨레모두의 마음속에서 참다운 조국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살아숨쉬고있다. 나는 때때로 남녘의 이름없는 한 로인과 함께 락동강도하전투 전사자, 희생자를 위해 제사를 지내던 그날밤의 감동적인 일을 돌이켜보군 한다. 그 시기는 귀환을 앞둔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앞으로 초대장들이 무시로 날아들고있던 때였다. 2000년 7월 초순경이였다. 이미 알고있는 운동권녀대학생 한명이 경상북도 고령군에 살고있는 사람의 초청장을 갖고 《통일의 집》을 찾아왔다. 그 초청장에는 7월 26일 저녁 9시까지 자기의 집에 와주시면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겠다는 간절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우리들은 얼마동안 의논한 후 초청을 승낙한다는 회답을 보내였다. 7월 26일 아침 9시에 그 녀대학생과 40대의 남자 한사람이 소형뻐스로 《통일의 집》을 찾아왔다. 40대남자는 자기를 시골에 사는 농사군이라고 소개할뿐 별로 말이 없었지만 그 얼굴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호인다운 미소가 사라질줄 몰랐다. 광주에서 출발한 자동차는 전라도 담양, 순창, 남원을 지나 지리산휴계소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경상도 함안, 거창을 지나 고령땅에 들어섰다. 안내하던 남자는 좀 이르긴 하지만 읍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가자는것이였다. 초청한 사람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리라고 생각했던 나는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초청자의 의견을 따라 자그마한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간단히 하고 나와 다시 차에 올랐다. 차는 오솔길을 한시간정도 달리다가 어느 산기슭의 한적한 곳에 멈추어섰다. 차에서 내린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녀대학생은 우리가 내리자 작별인사를 하고는 자동차를 타고 그 좁은 오솔길로 사라졌다. 안내자는 나에게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걸어가야겠다고 하는것이였다. 다행스럽게 그날밤은 달이 밝아서 그리 불편없이 걸을수 있었다. 낮은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좀 가파로운 비탈길이 나졌다. 도중에 한번 쉬였는데 밝은 달빛에 산아래 부락들이 바라보였다. 안내자를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니 60대로인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밤에 험한 길을 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비전향장기수선생님들이 이곳을 방문해주신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곳에는 자그마한 기와집이 두채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첫 집에 안내되였다. 여름이여서 무더위가 심했지만 해발 300메터정도의 높이여서 그런지 모기는 없었다. 주인은 우리들에게 차 한잔씩 권하고나서 올라오시느라 힘들었겠는데 좀 누워 쉬라고 하였다. 이상한 집이였다. 안주인이나 가족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주인이 권하는대로 돗자리를 깐 방바닥에 누웠다. 피곤했던 참이라 스르시 잠이 들려는데 주인은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당 한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우물가로 안내해가더니 시원한 물에 세면하고 손을 씻으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렇게 하니 좀 거뜬해졌다. 방에 들어갔던 주인이 흰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다시 나와 우리들을 뒤집으로 이끌었다. 영문도 모른채 뒤집 방안에 들어서니 넓은 방에 제사상이 차려져있었다. 방에 깃든 엄숙한 분위기에 나는 좀 긴장해졌다. 제사상앞에는 위패가 있고 뒤벽에는 붉은 천에 《조국해방전쟁 전사자, 희생자추모식》이라고 쓴 글이 붙여져있었다. 그 글을 본 다음에야 우리는 지금까지의 수수께끼같은 일들을 리해할수 있었다. 이때 시간은 7월 27일 0시였다. 로인은 제물들을 차린 다음 《지금부터 조국해방전쟁시기 전사자, 희생자들을 추모하여 묵상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들은 잠시 묵상하였다. 술잔에 술을 부었다. 로인은 제사상 밥과 찬을 국에 조금씩 떠넣은 다음 잠시 기다렸다. 제사상을 정리하고 묵상하였다. 제사가 끝나고 작은 상에 제사음식 몇가지를 올려놓았다. 술기운이 좀 오르자 로인은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는 제사지내기 전에 이 사실을 공개하면 전사자, 희생자에게 불경한것 같아 비밀로 하였으니 리해하여달라고 하며 오늘 제사에 비전향장기수들이 참가하였으니 전사자, 희생자의 령혼들은 기뻐하였을것이라고 하는것이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자기는 10대의 소년이였지만 불타는 락동강을 도하하던 인민군군인들의 모습을 잊을수 없었다고 하였다. 1970년부터 30년동안 제사를 지내왔는데 오늘은 고향에 돌아가는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제사를 지낸 뜻깊은 날이라고 감동에 겨워 말하였다. 알고보니 그의 아버지는 1950년 8월 인민군군인들의 락동강도하전투때 도하용나무떼목을 묶는데 보태려고 집대문을 뜯어가지고 인민군대를 따라갔다고 한다. 그후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들리는 이야기에 아버지는 무수한 포탄과 폭탄에 바닥까지 마구 뒤번져지는 강복판으로 떼목을 몰고가던중 폭사했다고 하였다. 연방 눈굽을 훔치는 그를 보는 나의 가슴은 몹시 쓰려났다. 나는 그 로인에게 전사자, 희생자추모식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와 같은 민간인들을 희생자라고 하였는가고 문의하였다. 하지만 그는 완강히 머리를 저었다. 자기 아버지는 비록 군복은 입지 않았었지만 인민군군인들과 함께 락동강도하전투에 직접 참가하였으니 전사자로 불러야 할것이라고 하는것이였다. 그가 말하는 희생자란 인민군대를 원호했다는 리유로 억울하게 총살당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로인네는 조상대대로 이곳에서 농사도 짓고 락동강 물고기도 잡아 시장에 내다 팔면서 생계를 유지해왔다고 한다. 해방후에도 그들의 생활은 일제식민지시기나 다를바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고령읍쪽에서 인민군대의 포소리가 들리자 괴뢰군은 집집마다에 침입하여 략탈을 일삼았다. 놈들은 이 집에도 뛰여들어 사람들을 위협하며 닭과 돼지를 강제로 끌어내여 잡아먹고는 락동강을 넘어 패주하였다. 하지만 뒤따라 들어온 인민군대는 집주인들을 자기 부모들처럼 존대하였고 인민의 재산은 손톱만큼도 다치려 하지 않았다. 우물속의 물도 주인의 허가를 받고야 떠마시는 정도였다. 그 례절바르고 인정많은 군인들은 10대소년이였던 그에게 노래와 춤을 배워주며 몹시 사랑해주었다. 이런 인민군대의 모습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아버지는 인민군군인들을 친자식처럼 대해주었고 인민군군인들은 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대해주었다. 이런 나날에 맺어진 뜨거운 정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불타는 락동강으로 서슴없이 뛰여들었던것이다. 로인은 아버지를 비롯한 락동강도하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령혼을 위로해주는것은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자신의 의무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수십년세월 묵묵히 그 일을 해온다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였다. 놈들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제물을 구해들이고 제상을 차려야 하다보니 제물을 구입하는데만도 많은 시간을 바쳐야 했다고 한다. 이제 자기의 소망은 통일된 후 이 락동강기슭에 락동강도하전투 전사자추모탑을 세우고 추모제사를 지내는것이라고 하였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산자의 지성이 있어 비록 몸은 죽어 땅속에 묻혀도 넋은 살아 겨레의 삶을 위한 성스런 투쟁에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친 아름다운 생명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는것이다. 우리는 밖에 나와 밝은 달빛을 담고 춤추듯 출렁이는 락동강너머 멀리 비슬산줄기를 바라보았다. 바로 저뒤에 부산이 있고 남해가 있고 제주도가 있겠구나 생각하니 비통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포격과 폭격으로 거세게 용솟음치던 락동강물결은 지금 밝은 달빛을 안고 고요히 흐르고있었다. 새벽에 조금 눈을 붙이고난 후 우리들은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강가로 내려갔다. 강기슭의 차거운 물속에 손을 담그니 조명희의 소설 《락동강》이 불쑥 생각키웠다. 소설의 주인공 박성운이 맑은 물에 손을 담그고 구성진 노래소리를 물결우에 실어보내던 그 강이였다. 하건만 그때의 정서는 지금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우리는 가지고간 제물을 락동강가에 차려놓고 락동강도하전투에서 전사한 령혼들을 위해 묵상하였다. 나는 잠시 추억속의 모습들을 더듬어보았다. 한강봉의 모습이 떠오르자 왈칵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락동강도하전투에서 10대의 애젊은 나이에 전사한 한고향친구 한강봉의 모습이 두터운 망각의 이끼를 헤치고 눈앞에 떠오르는 순간 나는 그를 목놓아불렀다. 강봉아!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내 아침녘의 싸늘한 물속에 잦아들어버리고 강변에서는 물결소리만이 음산하게 울려오고있었다. 조국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던 그였다. 그래, 청춘의 고귀한 생명을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겨레의 행복을 위하여 바친 모든 전우들의 념원을 잊지 않으리라. 락동강가의 백사장으로 내려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세세년년 사연많은 겨레의 삶의 력사가 슴배인 락동강모래 한줌을 정히 쓸어모아 깨끗한 흰종이봉투속에 담았다. 《강봉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우리 민족앞에 통일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불러주셨다. 나와 함께 우리가 나서자란 고향땅을 찾아가자. 그리고 우리가 뛰놀던 남대천 모래밭을 발목이 시도록 실컷 달려보자.》 드디여 락동강을 떠날 시간이 되였다. 한많은 락동강아, 이제 헤여지면 언제 다시 오게 될런지. 잘 있거라 락동강아, 우리 통일의 그날에 다시 찾아오마. 우리 일행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자동차가 기다리고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2000년 9월 2일 조국의 품에 안길 때 나는 락동강모래 한줌을 가지고 왔다. 이 락동강모래도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되여있다. 그앞에 서면 무수한 포탄과 폭탄에 노호하며 뒤번져지는 검붉은 락동강을 오늘도 불사신마냥 완강히 헤쳐 건느는 한강봉이며 귀중한 나의 전우들, 굳세게 틀어잡은 노를 쉬임없이 저어가는 락동강할아버지를 다시 보는듯싶다. 또한 10년전 7월 27일 0시 뜻밖에 참가하였던 락동강도하전투 전사자, 희생자추모식 장면이 가슴뜨겁게 어리여온다. 조국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모든것을 다 바친 병사들의 넋은 력사와 더불어 영원히 살아있을것이다. 나는 80을 바라보는 로인으로서가 아니라 홍안의 나이에 총창을 비껴들고 탄우속을 달리던 병사시절의 그 자세로 말하고싶다. 사람들이여, 락동강모래앞에 삼가 옷깃 여미고 다가서시라. 제명을 다 살지 못한 생을 민족의 통일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젊은 병사들의 피가 아직 여기에 스미여있다. 심장마다에 이 소중한 모래 한줌을 품고 어제날의 병사들처럼 조국통일을 위한 성스런 위업에 청춘도 생명도 다 바칠 결의를 다지자!
3) 《통일의 집》현판
《통일의 집》현판은 내가 조국의 품에 돌아오기 전까지 거주하고있던 집의 현판이였다. 내가 《통일의 집》에 거주하여 살게 된데는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다. 《광주교도소》에서 석방되기 전날 아침 놈들은 나에게 보호자가 없으므로 《갱생보호소》로 보낸다고 통고해왔다. 놈들은 나에게 《갱생보호소》는 보호자가 없거나 자력으로 살아갈수 없는 출소자들이 자체로 생계를 유지할수 있을 때까지 밥먹여주고 잠재워주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출입절차가 까다롭고 자그마한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 《갱생보호소》는 사실상 감옥이나 같은것으로서 남쪽에 일가친척이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보안관찰법》대상으로 억류하고 감시통제하는 곳이였다. 그곳 관리원들은 다 《정보부》(당시)와 경찰의 밀정들이였다. 석방되기 전날 오전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광주 전남지역 인권단체 녀성련합회장 리명자선생이 나를 찾아왔다. 보호자가 없어 《갱생보호소》에 가게 되였다는 나의 말을 들은 그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면회도중에 황급히 떠나갔다. 오후 3시경 리명자회장은 5. 18광주인민봉기때 구속되였던 광주무등교회 강신석목사와 인권단체의 젊은 간사를 데리고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비전향장기수들을 《갱생보호소》에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였다. 강목사는 나를 만나자바람으로 자신이 석방되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신변보증을 서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것이였다. 알고보니 광주의 통일운동단체 인사들과 량심적인 인사들은 30년이상 옥중에서 고생한분들을 《갱생보호소》에 보낸다면 광주의 수치라고 하면서 나에게로 대표를 파견하여 신변보증을 서도록 했다고 하는것이였다. 《보안법》이 존재하는 남쪽땅에서 이런 결심을 한다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강목사는 감옥측에 보증서류를 요구하고 내앞에서 보호자로 서명하였다. 이리하여 비전향장기수들을 《법무부》산하 《갱생보호소》에 수감하려던 놈들의 음흉한 계획은 파탄되였다. 그런데 석방되는 날에는 또 서울에 살고있는 리두균동지가 우리들을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찾아왔다. 서울에 있는 동지들의 뜻이라고 하는것이였다. 고마운 일이였지만 난감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동지들의 뜻을 무시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광주사람들의 성의를 마다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나의 이 심정을 들은 그들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더니 자기들이 양보하겠다고 하는것이였다. 자기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것이 섭섭하긴 하지만 온 겨레가 우리와 한마음이 되였고 그 마음에 이끌려 통일이 현실로 다가오고있음을 확신하게 되였다고 하며 몹시 기뻐하는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광주에 남게 되였다. 범민련 남측본부 상임부의장이였던 김양무선생과 1929년 광주학생사건의 생존자 최순덕,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대책위원장인 리금주, 광주조선대학교 교수이며 시인인 문병란, 전남대학교 철학교수, 《한민족생활문화연구회》 리사장 장두석, 로동운동권의 김영인, 정재연 등 광주 전남지역 유지들과 많은 사람들은 자금을 모아 출소한 비전향장기수들이 거처할 집을 임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들의 사심없는 노력으로 무등산기슭인 광주시 북구 두암동에 여러칸의 살림방과 응접실, 부엌, 위생실이 있는 아담한 2층짜리 건물이 마련되게 되였다. 집이 마련되자 이번에는 집의 이름을 다는 문제가 제기되였다. 이미 출소한 비전향장기수들이 거처하는 집들은 《만남의 집》, 《사랑의 집》, 《광주빛골탕제원》 등 제나름의 뜻을 담은 이름들로 불리워지고있었다. 나는 동지들과 집이름을 어떻게 달것인가를 진지하게 론의해보았다. 단순히 건물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새기고싶었던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김양무선생과 광주 전남지역 유지들이 건물의 이름에 대한 자기들의 안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왔다. 그들이 제의하는 여러가지 이름들중 우리의 마음을 대번에 끌어당기는 그런 이름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통일의 집》이였다. 거기에는 통일된 조국에서 살려는 하나의 마음을 안고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온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한생의 뜻이 깃들어있었던것이다. 우리가 자기들의 속생각을 이야기하자 누군가는 크게 웃으며 뜻이 같으면 생각도 하나로 합쳐지는 법이라고 유쾌히 말하는것이였다. 《통일의 집》이라는 그 이름에는 우리들만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 아니 온 남녘겨레의 한결같은 열망이 담겨져있었다. 《통일의 집》현판을 다는 의식을 하는 날 남조선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왔다. 비전향장기수들, 범민련 남측본부, 민주로총, 《전교조》, 《전농》, 《전국련합》, 《남총련》, 《한총련》 등 통일운동단체 및 사회단체 대표들과 《통일의 집》 린접주민들, 심지어 광주시 부시장, 광주 북구 청장까지 찾아왔다. 장두석선생의 사회하에 《통일의 집》현판을 다는 의식이 진행되였다. 남조선은 물론 일본과 미국, 도이췰란드 등에서 단체와 개인들이 보내여온 꽃바구니와 축전들이 전달된 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과 여러 사람들의 축사가 있었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광주시 부시장도 나서서 축사를 하였다. 그들의 토론중에 가장 인상깊었던것은 비전향장기수가 있었기에 이 땅의 현대사가 살아있다는 말이였다.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력사가 배제된채 반쪽만이 기록되여온 남쪽의 력사가 오늘은 비전향장기수들이 있어 완전한 력사로 있게 되였다는 뜻이였다. 그들의 축사가 끝난 후 나는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생활터전을 마련해준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우리의 집은 겨레에 대한 사랑으로 통일된 여러분의 마음속에 태여난 통일의 집입니다. 0. 75평 감방에서 수십년동안 달구경 한번 못하고 살아온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사방에 창문이 있는 <통일의 집>에서 해와 달을 구경하게 되였습니다. 우리 집 대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을것이며 우리를 찾아오시는분들은 누구나 반갑게 맞이할것입니다.》 현판을 다는 의식은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것으로 막을 내리였다. 나는 그날 《통일의 집》현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우리의 소원을 담은 현판,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통일을 위해 바치려는 우리들의 결의를 담은 현판은 이때 남녘의 하늘가에 자랑스럽게 새겨넣은 우리들의 투쟁구호인듯 긍지롭게 안겨왔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통일의 집》현판을 내리우지 않을것이며 《통일의 집》을 통일을 바라는 남녘겨레가 손과 손을 잡고 마음과 마음을 합치는 집, 통일의 밝은 희망을 안겨주는 통일의 집으로 만들리라 마음다지였다. 《통일의 집》은 그 이름이 지닌 매력으로 하여 곧 남조선각지에 알려지게 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강희남의장과 여러 사회단체 대표들은 광주 전남지역에서 범민련행사가 있을 때마다 《통일의 집》으로 모여와 행사준비도 하고 통일문제에 대한 열띤 토론도 진행하군 하였다. 《한총련》, 민주로총, 《전국련합》, 《전농》 등 단체들의 행사때도 《통일의 집》은 명절처럼 들끓었다. 광주인민봉기 기념행사때는 각지에서 모여온 50∼60명 대표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운동권녀성들은 식사준비로 며칠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였다. 차츰 각이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나 열려져있는 문으로 무시로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기자취재진이 불쑥 뛰여드는가 하면 여러 종교단체 목사, 신부, 스님과 신도들, 녀성단체 녀성들 등 각이한 년령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쉴새없이 찾아들었다. 찾아오는 목적도 각이하였다. 《통일의 집》로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싶다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어 비전향장기수들이 어린아이들을 귀여워한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찾아오는 어머니들도 있었다. 비전향장기수들의 강의한 정신세계에 대하여 알고싶어하는 대학교수들, 조국해방전쟁시기 놈들에게 학살당한 유가족들, 비전향장기수들의 생활을 도와주겠다고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 비전향장기수의 건강을 돌봐주겠다는 《건강사회를 위한 의사회》 구강의사들, 《약사회》 회원들, 이들로 하여 우리는 언제나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보기관과 경찰은 《통일의 집》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후원자들의 활동을 이모저모로 방해해나서기 시작하였다. 놈들은 로골적으로 《통일의 집》현판을 내리고 다른 이름으로 고칠것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통일의 집》 비전향장기수들은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일축하였다. 통일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당신들은 통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조국의 통일을 싫어하는 당신들은 이 땅에서 살 권리가 없다. 그러니 스스로 태평양건너 미국에 가서 사는것이 좋지 않은가 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어느날 깊은 밤이였다. 그때 나는 까닭없이 불안한 느낌이 들어 늦게야 잠자리에 들었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불안할가 하고 생각하며 스르시 눈을 감는데 2층복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은것이 아닌가 하여 문가에 다가가 귀를 강구어보았다. 분명 사람의 거동이 느껴지는 소리가 간간이 울려오고있었다. 벌컥 문을 열고 나가보니 억대우같은 세 사나이가 한창 《통일의 집》현판을 떼여내고있었다. 내가 《누구야?!》 하고 크게 소리를 치자 놈들은 후닥닥 놀라며 황급히 2층 창문으로 뛰여내려 도망쳐버리였다. 다음날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고 항의하였으나 자기들은 모르는 일인데 조사해보겠다고 발뺌하는것이였다. 놈들이 이렇게 나오리라는것을 이미 예측하고있었던 우리는 다시한번 이런 일이 생기면 세계의 언론들에 폭로하겠다는 강한 립장을 표명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굵은 철사슬을 갖고 찾아온 운동권젊은이들은 《통일의 집》현판을 2층복도 기둥에 용접으로 억척같이 고정시켜버리였다. 하여 집을 헐기 전에는 《통일의 집》현판을 내릴수 없게 되였다. 이런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비전향장기수 후원자들이 《통일의 집》으로 몰려왔다. 《통일의 집》의 안전을 지키고 생활을 더 잘 돌봐주기 위한 후원회가 정식 결성되였으며 월에 1차 후원회사업을 총화하는 제도가 세워졌다. 《통일의 집》 비전향장기수들의 생활은 차츰 안정되여가기 시작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통일의 집》은 광주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통일의 집》사람들앞으로 연방 초대장이 날아왔다. 우리들은 상봉모임들에서 적들이 감옥에서 가한 온갖 비인간적인 만행들을 폭로하고 고발하였다. 그때마다 관중석은 눈물바다로 변하였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우리는 우리 당의 통일정책의 정당성을 알려주고 통일운동에 나서는것은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의무라는데 대하여 해설해주었다. 《통일의 집》이 마련된 후부터 각 신문사는 물론 TV방송국의 취재팀들이 연방 우리를 찾아왔고 인터뷰내용은 《MBC》, 《KBS》, 《인천TV》 등으로 속속 방영되였다. 그리하여 거리에 나서거나 뻐스를 타도 《통일의 집》 비전향장기수들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광주에서 있은 박람회때 나는 비전향장기수들이 이 땅에 생겨나게 된 과정과 《통일의 집》사람들의 일상생활내용, 공화국북반부에로 송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30분짜리 TV기록영화를 제작하여 기록영화응모에 제출하였다. 응모에 입선된 이 기록영화는 박람회기간중에 매일 3번 상영되여 《통일의 집》 비전향장기수들은 세상에 더 잘 알려지게 되였다. 광주에 있는 TV촬영제작가 조수란은 (그는 우리가 감옥에서 출소한 때부터 시작하여 공화국북반부로 돌아갈 때까지 《통일의 집》을 찾아와 TV촬영을 해온 녀성이였다.) 《<통일의 집>사람들》이라는 TV기록영화를 제작하여 내놓았는데 이 영화는 6. 15공동선언이후 남조선의 각 TV방송들에서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영상자료로 많이 리용하였다. 6. 15공동선언이 발표되던 날 《통일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TV화면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영상을 우러르며 만세의 환호성을 터치였다. 그것은 장군님의 뜻, 장군님의 발걸음을 따라 통일조국의 대문이 열리는 위대한 력사의 순간이였다. 공동선언의 매 조항을 자자구구 새겨보던 우리는 비전향장기수송환문제를 조속히 해결할데 대한 문구를 보는 순간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통일의 집》으로는 남조선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축하의 인사가 련속 날아들었다. 북남공동선언이 발표된 후 《통일의 집》으로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고 우리들은 눈코뜰새 없이 분주한 시간을 보내게 되였다. 그런가 하면 비전향장기수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행사에 참가해달라는 초대장들을 련속 받아들게 되였다. 옥중에 있을 때 신세진 사람들에게 미처 감사의 인사도 다 드리지 못했는데 이제는 조국에로의 귀환을 환영하는 인사를 받게 되였다. 민주로총에서 조직한 환송행사를 비롯하여 《전농》, 《전교조》, 《전국련합》, 범민련, 《한총련》 등 사회단체들, 각 종교단체와 산하의 교회, 성당, 사찰 등에서 조직한 환송행사들이 련일 계속되였다. 개별적인사들은 우리를 자기의 집에 초청하기도 하고 명승지려행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남조선사회는 6. 15열기와 함께 비전향장기수귀환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있었다. 심지어 광주 광역시 시의원들까지 《통일의 집》 비전향장기수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행사를 조직하는 정도였다. 마지막에는 1980년 5월 수많은 광주시민들의 피로 물들었던 금남로에서 시민행사가 크게 진행되였는데 그날 광주시민들은 온 거리를 꽉 메우며 우리를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악대의 반주에 맞추어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합창이 금남로를 뒤흔들었다. 사회자에 의해 《통일의 집》 비전향장기수들이 한사람한사람 열렬한 박수속에 소개되였다. 비전향장기수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연설들이 있은 후 《통일의 집》사람들은 비전향장기수들을 물심량면으로 도와준데 대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다. 그리고 통일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더 과감히, 더 열심히 통일운동에 나서줄것을 호소하였다. 악대의 환영곡이 계속 울리는 가운데 《통일의 집》 비전향장기수들에게 기념품이 전달되였다. 녀성촬영가 조수란은 TV기록영화 《<통일의 집>사람들》을 여러개 복사하여 《통일의 집》 비전향장기수 매 사람들에게 기념으로 넘겨주었다. 우리들이 노래 《다시 만납시다》를 부르자 시민들도 춤과 노래로 합세하였다. 광주시민들의 춤물결속에서 초저녁 금남로의 등불도 춤추는듯싶었고 광주의 하늘도 환히 웃으며 설레이는듯싶었다. 《통일의 집》현판아래에서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춤추고 노래부르는 광주시민들의 모습은 우리 겨레는 하나가 되였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였다. 통일운동단체들과 광주지역 유지들, 사회단체 인사들이 모여앉아 《통일의 집》에 깃든 가지가지 사연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의 기쁨에 넘친 모습들은 그대로 눈앞에 다가온 통일의 모습이였으며 마음과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서로 손을 잡는 이 순간은 통일의 순간이였다. 어느날 이 집을 찾아왔던 한 로교수는 숱한 사람들이 제 집 드나들듯 하는 모습을 감격에 겨워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통일은 벌써 이 집에 와있습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 마련해주신 6. 15가 있어 이 집은 이름그대로 통일의 집이 되였습니다.》 옳은 말이였다. 이름은 겨레모두의 소원을 담은 《통일의 집》이였어도 사실 이름과 달리 분렬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일도 많았던 이 집이였다. 하지만 6. 15공동선언이 발표된 후 《통일의 집》은 통일의 환희로 들끓고있었다. 나는 《통일의 집》현판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통일의 집》에 붙여지던 첫날부터 우리에게 신심을 주고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던 그 현판을 두고 이제 머지않아 떠나가야 하였다. 나에게는 이 정든 집과 우리의 뜻이 깃들었고 여생을 통일을 위해 바칠 결의를 안고 흘러온 나날의 하많은 추억이 깃든 현판을 가지고 가고싶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통일의 집》식구들의 생각도 나와 다를바 없었다. 어느날 누군가가 《통일의 집》후원회 인사들에게 북에 갈 때 《통일의 집》현판을 가지고 가고싶다는 의향을 조심스럽게 내비쳤었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청이라면 거절해본적 없는 그들이였지만 이 요청만은 거절하는것이였다. 한사람은 《이곳 광주사람들은 앞으로도 <통일의 집>현판을 보며 <통일의 집>에서 살았던 비전향장기수들을 잊지 않을것이며 통일의 의지를 더 굳게 다지게 될것입니다.》라고 자기의 진심을 이야기하는것이였다. 또 한사람은 《통일의 집》은 광주에 상주하는 《평양대표부》이니 절대로 현판을 내릴수 없다고 반대의사를 명백히 밝히였다. 우리는 더이상 자기들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주장할수 없었다. 《통일의 집》은 우리 비전향장기수들과 광주인민들만이 아니라 온 남녘인민의 마음속에 서있는 겨레의 집이였다. 장두석리사장은 비전향장기수들이 떠난 후에도 이 집은 계속 《통일의 집》현판을 달고 민주렬사유족회 사무실로 유지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통일의 집》현판문제는 일단락되였다. 드디여 《통일의 집》주인들인 우리들이 이곳을 떠나는 날이 왔다. 《통일의 집》을 떠나기에 앞서 《불교인권위원회》의 환송모임이 있었다. 여기에는 광주시내의 청년학생들과 스님, 불교신도들이 참석하였다. 통일애국투사들에게 드리는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들도 발표하고 노래와 춤을 추며 우리를 축하해주었다. 어떤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비전향장기수들에게 드리는 환송편지를 랑독하여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해주었다. 모임참가자들의 열광적인 박수속에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새로 만든 《통일의 집》현판을 전달하는 의식이 진행되였다. 광주 전남지역 인민들은 《통일의 집》의 현판에 깊은 애착을 안고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헤아려 새 현판을 만들어왔던것이다. 본래의 현판과 꼭같이 만든 현판이였다. 새 현판을 전달하면서 그들은 이것을 평양에 가지고가 광주사람들과 맺은 우정을 잊지 말아달라고 목메여 말하였다. 드디여 헤여질 시각이 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통일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통일의 집》을 떠나가는 우리들을 환송하면서 리별의 눈물, 통일념원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였다. 나는 환송나온 어린 학생을 목마태우고 걸으며 이 땅의 열혈청년들의 넋이 깃든 무등산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마음속으로 소리쳐불렀다. 《무등산아, 잘 있거라. 통일의 날 다시 찾아오마.》 그들이 차츰 시야에서 멀어져가며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우리는 차창밖으로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내 어깨우에 앉았던 어린 소년이 차를 따라 달리며 웨치던 소리가 오래도록 귀전에 쟁쟁히 울려왔다. 《통일되는 날까지 오래오래 사세요-》 그후 판문점을 넘는 나의 품에는 광주사람들이 안겨준 《통일의 집》현판이 있었다. 그 현판은 지금 조선혁명박물관의 조국통일관에 전시되여있다. 나는 오늘도 그때 그 소년의 모습을 그리고 정들었던 남녘겨레들의 모습을 잊을수 없다. 그 모습들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우리가 흘려야 했던 리별의 눈물을 통일의 감격으로 바꾸기 위하여 여생을 조국통일의 길에 깡그리 바칠 결의를 다시금 다지군 한다. 창밖 멀리 은하수 비낀 남쪽하늘을 바라보는 나의 뇌리에 6. 15공동선언발표후 《통일의 집》을 찾아왔던 한 교수의 말이 되새겨졌다. 그렇다. 우리 겨레모두를 따뜻이 품어주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넓고넓은 사랑의 품이 있어 크지 않은 《통일의 집》은 온 겨레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는 집으로 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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