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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조선치마저고리
옥중생활을 마치고 출옥한지 며칠 지난 어느날이였다. 하루는 중학교 력사교원이 찾아왔다. 이러저러한 대화중에 그는 《그동안 변화된것이 많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가장 많이 달라진것이 무엇인것 같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나는 좀 생각해보고나서 녀성들의 옷차림인것 같다고 말하였다. 출옥하면서 보니 제일 눈에 띄우는것이 바로 녀성들의 변화무쌍한 옷차림새였던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것이 세번이나 지났고 또 나도 형이상학적인 사고는 질색이지만 그래도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옷은 추위와 더위 그리고 외부환경의 작용으로부터 사람의 몸을 보호하고 피해를 막을뿐아니라 차림새에서 그들의 품위를 돋구어주는 역할을 한다. 옷은 인간의 생활과정에 필수적인것으로 발생하였으며 력사발전과 함께 일정한 민족적전통을 가지고 발전하여왔다. 초시기에는 나무잎이나 나무껍질, 짐승의 털가죽을 그대로 리용하였던 옷이 그후 실을 뽑아 천을 짜기 시작한 당시에는 천을 그대로 몸에 감는 형태변화를 가져왔다. 그후 바느질하여 만든 옷이 나왔으며 그것도 처음에는 직4각형 천쪼박을 바느질하여 입었고 점차 몸에 맞게 천을 재단하여 만들어입었다. 1884년에 인견사가 발명되고 20세기에 나이론을 비롯한 합성섬유가 발명되면서 미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한층 발전하게 되였다. 옷은 그 나라 사회제도와 사람들의 사상의식, 민족적생활감정, 기후풍토 등 주객관적조건들을 반영하며 당대사회의 경제, 과학,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변화발전하였다. 우리 조선민족은 오래전부터 옷문화가 발전하였다. … 《그런데 이남의 옷문화는 너무도 이질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있습니다.》 내 얼굴기색을 띠여본 력사교원이 개탄했다. 나는 그의 말에 수긍하였다. 그후 한달이 지난 화창한 봄날에 그 교원이 갑자기 《통일의 집》을 찾아왔다. 《김선생님, 오늘 저하고 서울구경하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그곳이야 돈있는 사람들이나 다니는데 아닙니까.》 《뭘합니까. 그저 심심풀이삼아 한번 다녀오십시다.》 그가 하도 청하기에 나는 따라나섰다. 서울행 기차에 올랐는데 사람들, 특히 녀자들의 옷차림새는 역시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괴상망측했다. 나는 슬그머니 력사교원에게 물었다. 《선생, 대체 녀자들의 옷이 왜 저렇습니까?》 교원은 쓸쓸히 웃으면서 《바로 그래서 오늘 명동거리로 가보자는겁니다.》라고 응대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옷차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했다. …우리 나라 녀성들의 전통적인 옷차림은 저고리에 긴치마를 입는것이다. 삼국시대의 녀자저고리는 길이가 허리밑까지 미치는 긴저고리였는데 발해 및 후기신라시기에는 짧은 저고리가 광범히 보급되였다. 고려시기에 와서 녀성들의 저고리는 짧은것으로 단일화되였고 리조시기에 와서도 계승되여 더 아름답게 발전하였다. 저고리는 짧게 하여 몸에 붙게 입었다. 치마는 폭이 넓고 길게 하며 풍만하게 했다. 그리고 치마가 풍만하게 퍼지도록 치마안에 속치마를 입었다. 조선치마저고리는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녀성들의 몸에 맞으며 그 형태와 색갈, 차림새 등에서 우리 인민의 민족정서에 맞는 우수한 민족옷이다. 력사교원은 우리 공화국북반부에서의 민족옷발전추세에 대해서도 환히 알고있었다. 남조선에서 옷류행의 본산지는 서울 명동이다. 명동은 류행의 본거지라고 하는 빠리를 닮아가고있다. 그래서 빠리가 감기 걸리면 명동은 재채기한다는 말까지 생겼다. 그는 외국문화를 받아들여 자체의 민족문화에 동화시키고 민족성을 이어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이런 처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통탄하면서 북에서 조선옷의 민족적전통을 살려나가고있으니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였다. 렬차는 어느덧 서울역에 도착했다. 《김선생님,귀중품이나 돈이 있으면 잘 간수하십시오.》 교원이 주위를 불안스럽게 살피며 던지는 권고였다. 그의 심정이 리해되였다.명동거리는 남조선에서 수준급의 소매치기기술을 소유한 범죄자들이 여봐라 하고 돌아치는 활무대였다. 나는 웃으며 양복주머니를 털어보이는 시늉을 했다. 소매치기가 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는 제편에서 돈을 넣어줄 형편이였던것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를 당황하게 한것은 마지못해 겨우 천쪼박을 걸친듯 한 반라체의 녀성들속에 우연히 끼여들게 되였다가 겪게 되는 곤경이였다.도무지 그들은 녀성으로서의 초보적인 품성도 먹고난 쵸콜레트포장지처럼 던져버린것 같았다. 우리는 간난신고끝에 즐비하게 늘어선 옷상점중에서 한 녀자옷가게에 겨우 들어섰다. 손님을 끌기 위한 상투적인 낯빛으로 《어서 오십시오!》라고 하던 상점주인은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자 별안간 막대기를 삼킨것처럼 꼿꼿해져서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돈이 사람의 인격을 저울질하는 남조선사회의 실상을 엿보게 하는 생동한 세부였다. 그러거나말거나 나는 놀라운 눈으로 상점의 상품들을 바라보았다. 녀자옷이란 거의다가 로출형옷들이였기때문이였다. (어떻게 이럴수 있는가?) 나는 교원에게 조선옷상점에나 가보자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조선옷상점은 몇개 되지 않아 찾기 힘들다고 했다. 나는 이왕 내친걸음에 꼭 가보자고 고집했다. 우리는 한참만에야 인파속을 헤치고 겨우 조선옷상점에 들어섰다. 그런데 조선옷이란 개량된 조선옷이 걸려있을뿐 일반대중용 조선옷이란 없었다. 나는 그 옷상점을 나오고말았다. 불현듯 조선옷을 입었던 안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였다. 그때 3천명합창단이 조직되여 문수리(현재 문수거리)에서 공연을 하게 되였다. 당시로서는 규모가 제일 큰 공연이였다. 예술단배우들은 말할것도 없고 평양시 각 대학에서 노래 잘하는 학생들을 선발하였다. 우리 대학민청위원회는 노래 잘하는 녀대학생 50여명을 선발하였다. 그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오후 5시)에 대학교정에 도착하는 뻐스를 타고 문수리로 나가군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대학생들의 외모와 행동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옷은 물론 교복차림이였지만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었고 머리모양도 달라졌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평양을 방문한 외국대표단과 함께 3천명합창단공연을 관람하신 후 우리 대학 녀학생들의 자부심은 더욱 높아졌고 옷차림새도 크게 변화되였다. 나의 안해도 합창단에 참가하였었는데 출연할 때 그들은 흰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군 했었다. 결혼후 안해는 그때 관람석 앞줄에 앉았던 내가 자기를 알아보고 웃던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렸었다. 우리 집에는 합창단성원들이 연출가, 지휘자와 함께 찍은 큰 사진이 있었는데 안해는 운명하기 전까지 그 사진을 가보처럼 여겼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 사진도 퇴색했지만 합창단대렬의 앞줄 복판에 앉아있는 치마저고리차림의 안해는 지금도 살아있는듯 방긋 웃고있다. 나는 그가 즐겨입었던 아름다운 조선치마저고리를 생각하면 대학생들의 조선옷교복을 처음 만들던 일이 생각나군 한다. 그때 나라에서는 우리 녀대학생들의 치마는 대지의 봄을 상징하여 약간 풀색으로, 저고리는 푸른 하늘을 상징하는 연한 하늘색으로 만들어 일시에 공급하여주었다. 대학교원들과 대학생들은 조화된 색갈의 아름다움에 모두 감탄했다. 대성산과 모란봉, 평양거리는 온통 개나리꽃, 살구꽃이 핀 꽃동산으로 변하고 그속으로 조선치마저고리를 입고다니는 녀학생들의 모습은 천국의 선녀들처럼 아름다왔다.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우리 대학 녀학생들의 치마저고리를 보고는 반한듯 그냥 쳐다보군 하였다. 우리 대학 녀학생들의 치마저고리의 매력이 온 거리에 알려지자 촬영가, 사진사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치마저고리를 입은 녀대학생들은 례외없이 사진촬영대상으로 되여버렸다. 며칠후 평양시거리의 화보사진판에는 모란봉 개나리꽃앞에서 조선치마저고리를 입고 찍은 여섯명의 녀학생사진이 전시되였다. 그 시절 대학생예술축전 녀성중창에서 항상 1등을 한 어느 한 대학의 녀성중창조도 그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연하였었다. 마치 명절날 새옷입은 소녀들처럼 수집어하는 녀대학생들의 청신한 모습을 볼 때면 그들의 얼굴마저 한없이 순결하고 깨끗하게 보였다. 나는 감옥에 갇혀있을 때 조선치마저고리를 입었던 안해의 대학시절모습을 자주 추억하기도 했다. 그때면 온몸을 쑤시는 고통도 멀리 사라지고 마음은 평온해졌다. 출옥후 나는 한 녀류화가를 알게 되였다. 그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생활을 도와주고 자신의 화판에 그들의 모습도 남기군 했다. 화실에는 조선치마저고리를 입은 녀자의 유화그림도 있었다. 내가 그림을 눈여겨보자 화가는 《낯익은 녀자입니까?》 하고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난 치마저고리를 보고있습니다.》 녀류화가는 혹시 치마저고리와 어떤 인연이 있지 않는가고, 비밀이 아니라면 이야기해줄수 없는가고 말했다. 내가 대학시절 안해가 입었던 조선치마저고리가 생각되여 그런다고 하였더니 어떤 색갈인가 묻는것이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있었던 연한 풀색치마와 하늘색저고리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아, 상상만 해도 아름답군요.》 화가는 그 옷색갈이 자연과 어울린 아름다운 색이라고 칭찬하면서 안해의 체격은 어떻고 키는 얼마인가를 자세히 알아보았다. 나는 《통일의 집》에 자주 다니는 녀대학생들중에 안해의 체격과 비슷한 한 녀학생을 가리켰다. 화가는 안해는 천성적으로 조선치마저고리를 입으면 꼭 어울릴 체형이라고 하였다. 그후 6. 15북남공동선언이 발표되고 비전향장기수들의 귀환이 확정되여 분주하게 뛰여다니던 어느날 그 녀류화가가 화려하게 포장한 지함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지함을 풀고 조선치마저고리와 옥돌반지 한개를 꺼내놓았다. 《김선생님, 전 같은 녀성으로서 34년동안 남편을 기다린 선생님의 부인에게 머리가 숙여집니다. 이건 부인에게 보내는 기념품인데 변변치 않아도 받아주십시오. 원래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학시절 조선치마저고리로 만들려다가 어울릴것 같지 않아서 60대초의 부인에게 맞을 색으로 골랐답니다.》 나는 아직까지 안해에게 가져갈 기념품을 마련하지 못했던지라 반갑기도 하고 한편 미안하기도 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몇번이고 하였다. 《선생님의 부인을 만난적은 없지만 우린 자매간이나 같습니다. 부인과 만나시거든 그리움으로 가득찼던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여생을 뜨겁게 사랑해주시길 바랍니다.》 녀류화가의 진심어린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국에 돌아와보니 안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다. 그 조선치마저고리는 아직도 포장지에 넣은채로 옷장속에 보관되여있다. 이런 사연때문인지 조국의 품에 안긴 다음 우아한 조선치마저고리를 입고 거리를 다니는 녀성들의 모습에 저절로 눈길이 가게 되였다. 지금도 대학생처녀들을 보면 화창한 봄계절부터 눈처럼 흰저고리에 까만치마를 받쳐입고 다니군 한다. 그런 치마저고리는 그 색조화가 산뜻하며 조선녀성의 순결하고 깨끗한 마음씨가 반영되여 고상한 느낌을 안겨준다. 그러고보면 조선치마저고리는 단순히 녀성들의 옷차림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조선민족의 자주의식에 관한 문제이며 민족의 정통성과 관련된 심중한 문제인것이다. 나는 평양의 거리에 흐르는 조선치마저고리의 아름다운 꽃물결을 볼 때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넋을 지켜주시고 빛내여가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민족관앞에 눈시울 적시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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