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책은 영원한 길동무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책은 말없는 선생이며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길동무이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배려로 생겨난 고급책장에 책들을 가득 정리하고나니 꿈만 같다. 나한테 이런 많은 책이 생기다니.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로작들,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조선대백과사전, 조선말대사전을 비롯한 각종 사전, 비전향장기수들의 장편소설 60여권을 비롯한 장, 중편소설과 외국소설, 각종 지리책, 의학서적, 료리책…

그런즉 내가 하루아침에 책부자가 된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집에 없는 책들은 인민대학습당 대출실에 가서 언제든지 대출해볼수 있다.

하루는 인민대학습당 열람실에서 정신없이 새 소설책을 보는데 옆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것이였다.

《저, 선생님!》

고개를 쳐드니 낯익은 사서의 동그란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사서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고 웃는것이였다. 웬일인가 해서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그만에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정신없이 책을 보느라고 그처럼 많던 독자들이 열람실에서 나간줄도 모르고있었다. 시계를 보니 열람시간이 퍼그나 지나갔다. 그러니 이 사서는 나를 위해 일부러 늦게까지 남아있은것이다. 고마운 사람이였다.

《이거 안됐습니다. 나때문에 퇴근도 못하고…》

그러자 그 사서는 다시금 웃으며 말하는것이였다.

《일없습니다. 저희 세대주도 비전향장기수선생님때문에 좀 늦었다고 하면 리해할겁니다.》

그후에도 이런 일은 드문히 있군 했다.

독자들은 책에 미쳐버린 나의 이 심정이 잘 리해되지 않을수도 있다.

출옥후 《통일의 집》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한 시인이 나를 찾아왔다.

이말, 저말 하던 끝에 그는 《34년동안 감옥에서 있었으니 그동안 책을 많이 읽었겠습니다?!》 하고 묻는것이였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예? 많이 읽지 못했다구요?》

그는 리해 안되는지 고개를 기웃거리였다. 하긴 나처럼 독감방생활을 해본적 없는 사람이 비전향장기수에게는 책이 금지항목으로 되여있다는것을 알리 만무했다.

사실 남조선에서 민주화투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까지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한해가 지나도록 한권의 책도 볼수 없었다. 그때에는 정치도서는 말할것도 없고 일반도서조차 제대로 볼수 없었다. 외부세계와 차단당하고 책마저 읽을수 없으니 그 고독이야말로 이루 형언할수 없었다.

세계옥중사에도 없는 이런 후안무치한 일이 유독 남조선의 감옥들에서는 지극히 응당한 일로 취급되고있다.

외국의 옥중사갈피를 뒤져보면 감옥이나 류형지에서 유명한 소설이나 시를 쓴 례가 얼마나 많은가.

로씨야의 작가이며 철학자인 체르늬쉐스끼는 짜리정부에 의해 1862년 비법적으로 체포되여 재판도 받지 못한채 가장 중한 정치범들을 가두는 뻬뜨로빠블롭쓰크요새감옥에 2년동안 감금되여있으면서 이곳에서 대표적인 장편소설 《무엇을 할것인가?》를 비롯한 여러편의 글을 창작하였다.

로씨야의 시인이며 사실주의문학의 개척자인 뿌슈낀도 류형지에 6년동안 갇혀있으면서 유명한 서사시 《깝까즈의 포로》, 《강도형제》, 《집씨들》, 비극 《보리스 고두노브》를 썼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들처럼 장편소설이나 서사시창작을 하는것은 고사하고 문명생활의 기초적수단의 하나인 종이와 연필도 없었다.

한때 남조선에서 명망있다는 한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 책이나 실컷 읽고싶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었다.

랑만성을 초월한 그의 천진함에 나는 쓰겁게 웃었다.

남조선감옥에서 정치범은 일단 감옥에 들어오면 력사, 철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서적을 일체 볼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그 사람이 정작 감옥에 들어왔다면 어떤 인상을 지었겠는가 하는것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독감방에 갇혀있으니 고통스럽기란 이루 말할수 없었다. 그 고독을 견디여내는것도 하나의 감옥투쟁이였다.

나는 오래동안 그 방도를 모색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간수가 보다가 쓰레기통에 버린 영어소사전과 영어기초책을 보았다.

(저것이다!) 하고 나는 속으로 환성을 올렸다.

나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그 책들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간수의 눈을 피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그때 내 나이는 마흔고개에 들어서고있었다. 그 나이에 외국어공부를 하겠다고 나선것은 푼수에도 맞지 않는 엄청난 용단이였다.

해방후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여 외국어공부를 시작할 때 있은 일이였다.

언제인가 수업을 마치고났을 때 외국어선생이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10대에 외국어공부를 하는것이 인생에서 시간을 절약하는 지름길이요. 내 말을 잘 들으시오. 20대의 기억력은 10대 기억력의 절반, 30대는 그 삼분의 일이요. 그러니 우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한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외국어선생은 웃으며 긍정했다

《옳습니다. 동무들은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겨우 10대초엽의 코흘리개들이였다.

그렇지만 나는 머리칼이 허옇게 세기 시작한 40대에, 그것도 대학교정이 아니라 비좁은 독감방에서 과거를 보려는 생원처럼 영어공부를 시작했던것이다.

영어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일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몹시 힘들었다.

그렇다고 중도에서 물러설수는 없었다. 혁명가에게 있어서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은 곧 투쟁을 포기한것이나 다름이 없기때문이다.

다음으로 난감한것은 필기도구가 없어 글을 써볼수 없다는 점이였다.

독자들도 알겠지만 외국어단어는 눈으로 읽고 손으로 부지런히 쓰고 입으로 열심히 발음해야 빨리 익힐수 있다.

그런데 연필이 없으니 도무지 영어단어를 외우기가 어려웠다.

처음 며칠동안 손가락으로 벽에다 영어단어를 써보았는데 손가락끝에 굳은살이 박히였다. 간수의 눈에 띄우면 옆방과 통방했다고 끌려가 고문을 당해야 했다.

저가락끝에 물을 묻혀가지고 마루바닥에 단어를 쓰면서 공부했다.

그런데 세번째 단어를 쓸쯤이면 물이 말라버려서 처음에 쓴 단어가 지워졌다. 그만큼 단어암기도 떠졌다.

아마 그때 학습장과 연필이 있었다면 외국어를 공부하는데 든 시간의 절반은 절약되였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을 도사려먹고 300여페지 되는 영어기초책을 수십번 읽고 첫 글자부터 마지막글자까지 빠짐없이 암송하였다.

하루는 내가 공부하는것을 띠여본 간수가 히물히물거리며 그 나이에 영어공부를 해선 뭘하는가고 비웃었다.

그 다음날도 또 빈정대기에 내가 《저세상에 가서 자네 조상들을 가르치는 선생할려고 그래.》라고 하였더니 화가 난 간수는 영어사전까지 압수해갔다.

그후에도 숨겨놓고 보던 책이 간수의 눈에 띄워 취조실에 끌려간 일이 많았다.

어느날 간수가 나를 취조실에 데려갔다.

《왜 불렀는지 알겠는가?》

의자에 건방지게 앉아있던 교회사가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자의 손에는 내가 구해보던 일본어판 《세계국세도회》라는 책이 들려있었다. 그것은 며칠전에 내가 몰래 보다가 간수한테 들켜서 빼앗긴 책이였다.

그제야 나는 그자들이 나를 찾은 리유를 알았다.

교회사는 그 책을 번지다가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손으로 짚으며 이렇게 따지는것이였다.

《이건 무전암호이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였다. 미친개눈에는 뭐밖에 안보인다더니 그들에게는 경제통계수자가 무전암호로 보이는 모양이였다.

내가 코웃음을 치기 바쁘게 기다렸다는듯이 매타작이 시작되였다. 그날 그자들은 나에게 어떻게 하나 《무전암호》를 인정시키려고 발광을 했다.

나는 고문도중에 의식을 잃어서야 독감방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이렇듯 독감방에서의 독서는 순간순간이 다 투쟁의 련속과정이였다.

그속에서도 나는 독서를 중단하지 않고 책만 생기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

그후 언제인가부터 외국어학습용교재와 사전이 비전향장기수들에게 허용되였다. 그러나 로어로 출판된 책은 승인하지 않았다.이전 쏘련이 사회주의국가라는 한가지 리유때문이였다.

그런 편견의 결과 남조선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와 로씨야와의 《관계개선》시기에 로어를 아는 외교관이 없어서 대외관계에서 곤난을 겪는 웃지 못할 희비극도 벌어졌다고 한다.

감옥에서 출옥한 후 안면이 있는 대학교수와의 담화중에 영어사전을 A부터 Z까지 다 읽어보았다고 하였더니 《정말 할 일이 없었구만.》 하고 웃는것이였다.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독감방문턱을 한번도 넘어본적이 없는 그가 한초한초가 투쟁의 련속으로 이어지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생활을 어떻게 리해할수가 있겠는가?

조국에 돌아온 후 내가 이따금 골프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규칙을 정확히 설명하면 사람들은 놀라와한다.옥중에 있었는데 어떻게 골프에 대해서 잘 아는가 해서였다.

나는 웃으며 그 리유를 설명해주었다.

언젠가는 국제문화회관 무용련습실에서 무용가들의 훈련모습을 구경할 때 무용지도원과 무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무용과 서유럽무용의 차이점을 문화사적인 이야기로 설명하였더니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이러한 잡상식은 다 옥중시기에 책을 미친듯이 읽은 덕분이다.

감옥에 있으면서 나에게는 손에 들어온 책은 무조건 다 읽고 암기하려는 습관이 생기였다.

그때 생겨난 습관은 조국의 품에 안긴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어느날 나는 손자녀석에게 하루는 몇시간인가고 물었다.

손자녀석은 《24시간!》 하고 양기있게 대답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꼭같이 인식된 어쩔수 없는 시간단위이다.

인생의 성공여부는 매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이 시간을 어떻게 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한사람, 한사람의 지식수준의 총합계가 그 나라의 지적수준의 정도를 나타낸다고 볼 때 사회가 발전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

더구나 오늘은 지식경제시대, 정보산업시대가 아닌가.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대부분은 80고령이다. 그렇지만 옥중에서 보지 못한 책을 보충하려고 열심히 책을 읽는다.

이것을 안 평양안경상점 종업원들은 시력측정기를 가지고와서 매 사람의 시력을 정확히 측정하여 돋보기안경과 색안경까지 보내주었다.

이제는 보고싶은 책도 있고 돋보기안경도 있으니 준마에 날개가 돋친 격이다.

지금 나는 홍수처럼 쏟아져나오는 새 책들과 옥중에 있을 때 보지 못했던 책들도 너무 많아서 보고싶은 책을 선택하면서 읽는 건달군이 되여버렸다.

사람들은 나에게 건강을 돌보면서 독서를 하라고 충고를 준다.

고마운 일이다.

조국의 품에 안긴 후 나는 평양의 거리와 지하철도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하다. 그러면서 속으로 그들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해서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기 위한 오늘의 보람찬 투쟁에 실력으로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도 독감방시절에 맺은 책과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짬만 있으면 책을 보군 한다.

내가 알고있는 한토막의 지식이라도 고마운 우리 조국의 부강번영에 이바지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설사 몸져눕는다고 해도 책만은 손에서 놓지 않을 생각이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