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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백두산에 올라
백두산은 선군조선의 영웅적기상과 슬기를 자랑하며 동방일각에 거연히 솟은 혁명의 성산이다. 백두산은 항일혁명투쟁을 승리에로 이끄시여 조국해방을 안아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가 깃들어있는 산이며 우리 당의 빛나는 혁명전통의 억센 뿌리가 내린 혁명의 성산이다. 조선의 려명은 이곳 백두산에서 시작되고 영광스러운 주체시대의 려명도 바로 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되였다. 백두산은 위대한 수령님의 영생불멸의 주체사상과 혁명업적을 빛내이며 혁명의 성산으로 높이 솟아있다. 백두산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 탄생하시고 성장하신 고향이며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할 큰뜻과 담을 키우신 혁명의 요람이다. 그이께서는 벌써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답사행군대오를 이끄시고 백두산답사길을 처음으로 개척하시였고 지금도 자주 오르신다. 백두산에는 태양의 해발을 한몸에 안고 혁명의 수만리길을 헤쳐 일편단심 위대한 수령님을 받드시고 조선의 미래를 안아키우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불멸의 업적이 깃들어있다. 백두산은 예로부터 조종의 산으로 일러왔다. 일설에 의하면 발해시조왕 대조영은 라당련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유민들을 이끌고 백두산에 올라 발해창시의 뜻을 굳혔다고 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백두산에 관한 숭상은 곧 조선에 대한 숭상이였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였다.》 백두산은 비전향장기수들이 철창속에서 그려보던 희망의 등대였고 놈들의 회유와 고문속에서도 참대와 같은 의지를 키워준 혁명의 성산이였다. 하기에 비전향장기수들은 조기천의 시 《백두산》을 사랑한다. 내가 백두산과 처음 인연을 맺은것은 대학시절이였다. 그 시기 나라에서는 백두산답사도로건설에 평양시 대학생들을 파견하였다. 그때 나도 평범한 한 대학생으로서 백두산에 가게 되였다. 백두산으로 떠나는 날 우리들은 대학기발을 앞세우고 혁명가요를 힘차게 부르며 평양역에 들어섰다. 역구내에는 환송하려고 나온 대학생들과 가족들로 붐비고 각 대학의 취주악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있었다. 수백명 대학생대렬은 인솔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렬차에 올랐다. 요란한 취주악대소리사이로 몸성히 잘 갔다오라는 웨침소리, 편지를 기다리겠다는 부탁소리,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한데 어울려 들려오는 가운데 렬차가 출발했다. 기차는 열정적으로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뒤에 남겨둔채 북쪽을 향해 기운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에 석별의 감정을 말끔히 털어버린 랑만적인 대학생들은 《민주청년행진곡》, 《조국보위의 노래》 등을 씩씩하게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렬차는 우리의 마음을 싣고 살같이 달려 양덕, 함흥, 단천, 길주, 혜산을 통과하여 마침내 보천보에 도착하였다. 대학생들은 보천보혁명전적지를 답사하고 다음날 삼지연군에 도착하여 얼마동안 휴식한 후 도보행군으로 신무성로동자구에 도착하였다. 이 로동자구는 삼지연군의 북부에 있는 주민지대로서 해방전에는 주민가옥이 없는 산림지대였다. 해방후 이 일대의 무진장한 산림자원이 개발되면서 이곳에 사람들이 살게 되였다. 부근에는 넓은 들쭉밭이 펼쳐져있으며 두만강연안에는 현무암모래가 많이 분포되여있다. 온밤 등산준비를 갖춘 우리들은 다음날 새벽 백두산을 향하여 떠났다. 태고의 밀림으로 덮여있는 수림은 무두봉에서부터는 나무가 보이지 않았고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였다. 답사대는 강행군을 들이대여 점심무렵에 그렇게도 보고싶었던 백두산 장군봉에 가닿았다. 장군봉은 해발높이가 2 750메터로서 백두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원래는 백두산을 대표하는 봉우리라고 하여 《백두봉》이라 불러오다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쌓아올리신 불멸의 혁명업적을 길이 전하며 위대한 수령님을 백두산과 더불어 영원히 높이 우러러모시려는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념원을 담아 《장군봉》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장군봉에 올라선 우리의 눈앞에 푸르른 천지와 백두의 드넓은 대지가 펼쳐졌다. 약속이나 한듯이 모두 《김일성장군 만세!》를 웨쳤다. 한동안이 지난 뒤 대학생들은 바람막이 골짜기에 내려와 점심을 준비하였다. 나는 몇명의 남동무들과 함께 가파로운 바위절벽을 내려 천지에 이르자 물부터 한모금 쭉 마시였다. 그러던 나는 《어, 시리다!》 하고 입을 싸쥐였다. 천지물이 얼마나 찬지 입안이 시리고 땀투성이던 잔등이 찬물을 뒤집어쓴것처럼 서늘했다. 그 느낌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생생히 남아있다. 조금후에 우리는 물통들에 천지물을 담아가지고 봉우리로 올라와 한창 점심준비를 서두르는 녀대학생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신비스러운 천지물을 기쁘게 마시고나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칼도마를 신나게 두드렸다. 식사를 하려고 할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밥통속의 밥이 전부 설었던것이다. 백두산의 해발고가 2 500메터이상이니 기압이 낮아 물이 100℃아래에서 끓었기때문이였다. 이것 역시 유쾌한 우리 청년대학생들에게는 하나의 생동한 현실체험으로 되였다. 드디여 답사도로건설이 시작되였다. 《답사길은 백두산으로!》 이르는 곳마다에서 각 대학 기발이 펄펄 나붓기고 그밑에서는 기세충천한 대학생들이 함마와 곡괭이를 휘두르고 맞들이를 들고 뛰여다녔다. 날이 갈수록 백두산 장군봉쪽으로 뻗은 답사길은 점차 자기의 륜곽을 드러냈다. 우리는 낮일만으로는 성차지 않아 밤에도 작업을 계속 했다. 밤날씨가 몹시 차고 작업조건이 어려웠지만 작업장에서는 웃음소리, 노래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다가 밑을 내려다보면 유정한 달빛속에 백두밀림이 한폭의 유화처럼 안겨오는것이였다. 그때의 감동이 얼마나 강했던지 나는 옥중속에서도 그 시절을 자주 추억하군 했었다.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엇이나 다 있는 법이다. 옥중에 있을 때 나는 백두산에 대한 그리움을 쌓다못해 한가지 신통한 생각을 궁리해냈다. 그것은 독감방안에서 《백두산에로의 달리기》를 하자는것이였다. 얼핏 계산해보니 독감방에서 하루 3천보씩 그자리뛰기를 하면 한해동안 대전에서 백두산까지 달리는셈이다. 달리기를 시작했다. 며칠동안 달리기를 하면서 보니 웬만한 의지와 인내성이 없어가지고서는 매일처럼 운동을 할수 없었다. 게다가 간수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해야 하는것만치 은밀성도 보장해야 하였다. 하지만 나는 달리기를 중단없이 진행했다. 그것은 단순히 체력보존을 위한 단련이 아니라 혁명의 성산 백두산으로 가는 길, 조국으로 가는 길이였기때문이였다. 출옥후 백두산을 그리는 나의 마음은 억제할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올랐다. 어느날 나는 억수로 퍼붓는 비속을 뚫고 남조선에서 제일 높다는 해발 1 950메터의 한나산에 올랐다. 멀리 북쪽하늘가를 바라보니 비속을 뚫고 백두산의 웅자가 점차 보이는것만 같았다. 아, 백두산! 나는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목이 터지도록 《백두산아!-》 하고 웨쳤다. 그 소리는 한나산을 뒤흔들며 멀리로 메아리쳐갔는데 나는 틀림없이 백두산천지에까지 울려갔을것이라는 엄청난 기대를 품은채 오래동안 눈물을 흘렸다. 지금 백두산으로 향하는 남녘동포들의 열망이 대단히 높다. 내가 대학시절 백두산에 올랐다는것을 알고있는 남쪽사람들은 백두산에 대한 질문을 수없이 하였고 나는 숨기지 않고 그 일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들은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갔다온 다음 기세등등해서 나를 찾아와 자랑하군 했다. 그때면 나는 참지 못하고 《장군봉에 올라야 진짜 백두산에 가봤다고 할수 있지요.》 하고 퉁을 주군 하였다. 하루는 어느 한 대학의 《한총련》사무실에 갔었는데 한쪽 벽면에 백두산사진이 걸려있었다. 너무도 반가운김에 체면을 차릴새없이 그 사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은 나의 사진첩속에 들어있다. 조국의 품에 안긴 이듬해인 2001년 9월 중순에 나는 동지들과 함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은정어린 사랑의 비행기를 타고 백두산에 갔었다. 떠나는 날은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평양비행장에서 리륙한 비행기는 기수를 동쪽으로 돌렸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정말 우리 조국은 금수강산이구나 하는 자부심이 솟구쳤다. 무르익어가는 넓은 논과 밭, 그사이로 댕기처럼 뻗어나간 도로들, 벌써 단풍옷을 차려입기 시작한 높은 산들과 푸른 동해바다… 얼마나 아름다운 산천인가. 얼마후 비행기는 비행장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 찰나 누군가 《백두산이 보인다!》 하고 소리쳤다. 순간 내 심장은 가슴밖으로 튀여나올듯이 쿵쿵 뛰였다. 아, 백두산! 얼마나 와보고싶었던 곳인가. 비행기는 인차 비행장에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니 평양은 아직 늦더위가 꺼지지 않고있는데 그곳에는 초겨울바람이 불어치고있었다. 마중나온 일군들과 인사를 나누고 뻐스에 올라 베개봉호텔에 도착하였다. 우리들은 먼저 삼지연에 모셔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을 찾아 꽃다발을 삼가 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우러르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주름진 두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는 쏟아지는 눈물을 훔칠념도 못하고 수령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오래도록 우러러보았다. 다음날 우리는 삼지연혁명사적관참관을 마친 다음 꿈결에도 가고싶던 백두산밀영고향집을 방문하였다. 고향집앞에 이른 우리들은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문득 시인 오영재선생이 쓴 가사 《흰눈덮인 고향집》이 나의 귀전에 쟁쟁히 울렸다.
아득한 밀림은 눈에 덮이여 하늘땅 저 끝까지 눈부신 광야 아 하얀 눈속에 봄빛을 안은 고향집이여 아 김정일동지 세기를 밝힌 고향집이여 …
시인이 주장한것처럼 세기를 밝힌 이 고향집이 있었기에 새 세기의 첫 문어구에 들어선 7천만조선민족은 조국통일의 리정표인 6. 15북남공동선언을 받아안을수 있었던것이 아닌가. 며칠후 새벽, 우리는 백두산답사의 길에 올랐다. 나는 차창밖을 내다보며 대학시절의 옛 흔적을 찾으려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아무것도 찾아볼수 없었다. 하긴 그때의 답사도로가 그대로 남아있을리 만무했다. 어느덧 뻐스는 장군봉에 도착하였다. 흥분한 우리들은 백두산사적비앞에 서서 《김정일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고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불멸의 혁명송가 《김정일장군의 노래》를 합창으로 불렀다. 나는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니기를 바랬다. 옥중에서 그토록 보고싶던 혁명의 성산 백두산! 어제날에는 내가 남쪽에서 백두산을 우러르며 《백두산아!》 하고 소리쳤었지만 오늘은 백두산에서 남쪽을 향해 《한나산아!》 하고 웨치고있다. 나는 이 웨침소리가 민족의 통일념원을 안고 한나산까지 메아리쳐가기를 바랬다. 비전향장기수들이 백두산마루에 올랐을 때 9월의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고 아직 잠에서 깨여나지 못한 뭇별들이 깜빡깜빡 졸고있었다. 점차 동녘하늘이 밝아오더니 불같이 이글거리는 태양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러자 삽시간에 백두산봉우리들이 붉게 물들여졌다. 그 빛은 하늘과 땅까지도 물들여버렸다. 그 빛속에 우리의 얼굴도 마음도 붉어지는것 같았다. 그 눈부신 주홍빛속에 《혁명의 성산 백두산 김정일》이라고 천연바위에 새겨진 장군님의 친필이 안겨왔다. 우리들은 또다시 《김정일장군 만세!》를 웨쳤다. 안내원도 웃으며 《제가 여기에 근무하면서 오늘처럼 바람 한점 없고 맑은 날은 처음 같습니다. 하늘도 신념과 의지의 강자인 비전향장기수선생님들을 축복해주고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얼마후 그의 안내에 따라 다들 분주하게 사진을 찍고있는데 한 기자가 날더러 천지에 내려가보자고 했다. 나는 삭도를 타고 천지에 내려갔다. 그 삭도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인민들의 수고를 헤아리시여 놓아주도록 하신것이라고 한다. 대학시절에는 젊은 혈기에 가파로운 경사길을 걸어내려가 천지물을 떠가지고 올라왔었는데 오늘은 삭도를 타고 내려가니 감회가 깊었다. 천지에 내려간 나는 언제인가처럼 천지물을 두손으로 듬뿍 떠서 마시였다. 《어, 시리다!》 여전히 천지물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고 상쾌했다. 문득 머리속에 (천지물을 또 마셨으니 내가 백살이상은 살겠지.) 하는 엉뚱한 생각이 솟구치는것이였다. 내가 놈들의 살인적인 고문속에서도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난것이 혹시 대학시절 신비스러운 천지물을 마신 덕일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준비해간 두개의 비닐물병에 천지물을 가득 넣었다. 후날 나는 천지물 한통은 가족들이 한모금씩 마셔보게 하고 다른 한통은 난치병을 앓고있는 최동지안해에게 가져다주었다. 《여느 샘물도 아니고 천지물이니 병치료에 특효약이 될수 있을겁니다.》 환자는 몹시 고마워하며 《특효약》을 조금씩 마시였다. 나는 그가 천지물을 마시고 하루빨리 완쾌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수십년세월 남편을 기다리며 애태우다가 이렇게 만났는데 자꾸 앓으면 우리 장군님께서 얼마나 심려하시겠는가. 2007년 8월에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가족들과 함께 스무날동안 백두산휴양을 갔었다. 베개봉호텔에 숙소를 정한 우리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삼지연읍의 문화시설과 스키장을 비롯하여 여러곳을 참관하였다. 다음날 우리는 아침 9시에 베개봉호텔을 출발하여 11시에 백두산 장군봉에 올랐다. 그날은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뻐스까지 뒤집힐듯 흔들거리며 굼뜨게 굴러갔다. 차에서 내리니 바람은 더욱 세찼다.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몇사람은 뻐스를 바람막이로 하고 《혁명의 성산 백두산 김정일》이라고 천연바위에 새겨진 장군님의 친필글을 배경으로 사진 몇장 찍었다. 뻐스에 들어가 바람이 약해지기를 기다렸는데 종시 바람이 멎지 않아 할수없이 장군봉에서 내려오고말았다. 신무성로동자구에 내려와 천지의 산천어로 쓴 어죽을 먹는데 가족들이 천지에 내려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그날밤 잠자리에 든 나는 잠들수가 없었다. 우리처럼 어쩌다 답사를 오는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수령님께서는 장장 20성상 오늘과 같은 칼바람속을 헤치시며 조국을 찾아주시였으니 그 고생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으랴. 우리가 아무리 감옥에서 고생을 했다고 해도 설한풍이 휩쓰는 험한 밀림속에서 강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내며 싸워오신 그이의 풍찬로숙과는 대비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니 수령님에 대하여 더 잘 알게 해준 백두산바람이 고마웠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베개봉호텔을 출발하여 10시 30분에 또다시 백두산 장군봉에 올랐다. 모두들 말들은 하지 않았지만 근심기어린 표정들을 짓고있었는데 다행히도 바람 한점 없이 개인 따뜻한 날씨였다. 뻐스에서 내린 우리들은 장군봉앞에서 《김정일장군 만세!》를 목청껏 웨치고나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 삭도를 타고 천지에 내려갔다. 직접 천지물을 마셔본 가족들은 너무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다. 천지에서 내려와 뻐스를 타고 백두산답사길을 달리면서 보니 이름모를 여러 종류의 꽃들이 도로주변에 떨기떨기 피여있다. 그 꽃들을 보자 불쑥 한사람이 생각났다. 그는 범민련남측본부 상임부의장 김양무선생이였다. 언제인가 나는 그가 불치병으로 입원해있는 병원에 찾아갔었다. 그때 자기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고있던 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김선생, 백두산바람만 마셔도 내 병은 나을것 같애요.》라고 하면서 죽기 전에 백두산에 가보고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가 어떤 연고로 백두산을 그리워하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이렇게 말해주었다. 《선생님, 통일되면 우리 함께 백두산에 올라 조국통일 만세를 목터지게 웨칩시다.》 양무선생은 자신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나는 백두산의 꽃을 한아름 꺾어 선생에게 드리고싶다고, 그러면 선생의 병이 당장 나을것 같다고 했었다. 그러자 병색이 짙은 양무선생의 여윈 얼굴에 미소가 스르시 떠올랐다. 그후 얼마 안있어 그는 우리곁을 떠나갔다. 지금 김양무선생은 광주 망월동 민주렬사묘지에 묻혀있는데 나는 조국이 통일되면 그의 비석앞에 백두산의 꽃 한묶음을 가져다놓으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운명하는 순간까지 백두산을 그리워했던 고인의 유언을 지켜주고싶다. 그것은 먼 앞날의 일이 아니다. 조국통일의 구성이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온 겨레가 혁명의 성산 백두산에 올라 《김정일장군님 만세!》를 부를 그날이 반드시 다가올것이라고 나는 굳게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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