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4공동성명과 조국통일3대원칙에 대한 반향

 

《남북공동성명가운데 통일원칙이라는 3대원칙을 듣고 그것이 가장 옳은 길이요, 빠른 길이라는데서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첫째는 자주적이요, 둘째는 평화적이요, 셋째는 민족적이기때문이다.

작년에 통일방안으로서 4대국의 보장을 받자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역시 외세에 의존하자는것이였다.

외세에 의존하자는데 대해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는것이 가장 옳은 일이 아니겠느냐? 우리의 주권을 남에게 맡길수 없다면 주권을 찾는것도 남에게 맡길수 없지 않느냐? 내것을 내것이라 하고 우리것을 우리것이라 하는데 제 삼자가 무슨 권한이 있느냐.

남에게 의존한다는것은 리해할수가 없는 말이다. 남에게 의존한다는 약한 정신으로써는 통일할수 없기때문이다.

다음은 평화통일이다. 무력에 의한 통일은 상대방이 서로 피해만 보고 리득은 못본다. 그렇다면 평화통일밖에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통일하는 방법은 민족적단결이라 하였다.

사상과 리념, 제도를 초월하여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대단결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정말 이때문에 통일이 가능하다.

사상, 리념, 제도를 초월할수 있는것은 민족적단결뿐이다.

집안에 형제가 있는데 형은 여당이요, 아우는 야당일수가 있다.

형도 여당을 적극 지지하고 아우도 야당을 적극 지지할수가 있다.

그러나 형제간에 우애는 변하지 아니할수가 있다. 형제의 우애가 인간으로서 여야를 초월하기때문이다. 이와 같은 리유로 남북이 같은 민족이기에 단결할수가 있다.

민족단결의 정신은 개선의 원동력이 되고 남북을 초월하는것이기때문에 통일의 근본동기와 유지력이 되는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한것이다. 조건은 사람이 만든것이지만은 혈연은 사람이 마음대로 만들지 못하는것이다.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것이 형제애요, 민족애다. 이것으로 단결한다는데 누가 반대하며 감히 누가 간섭할수 있느냐? 가장 떳떳하고 강한 방법이요, 가장 현명하고 빠른 방법이다.

과연 세계의 모든 나라가 우리의 남북합의를 환영하고 그 성명을 기대하고있다.

5천만 민족앞에 엄숙히 성명하고 세계인류의 기대하에 제1보를 내디딘 우리의 통일운동이 가장 옳바르고 빠른 길로 전진할것이니 어떠한 난관이라도 능히 극복할수 있을것이다.

이번의 조국통일3대원칙은 조금도 무리한데가 없다. 정정당당하게 서로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면 된다.》 (《중앙일보》 1972년 7월 11일부)

 

《… 우리는 7. 4공동성명이 인류평화에 대한 우리 민족의 비원을 피력함으로… 남북으로 분단된 이 저주의 땅이 이제부터는 세계평화의 사령탑이 될 새로운 리념의 발상지가 될것을 자부하면서 민족적긍지를 되찾을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였다고 생각한다.》(《한국일보》 1972년 7월 8일부)

 

《7. 4공동성명은 우리 민족사에 획기적이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줄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그것은 또한 해방후 27년동안 계속되여온 남북간의 극한적인 대결을 평화적공존체제로 전환할 뜻을 성명했고 전쟁아닌 평화적통일이라는 대원칙의 합의로서 온 겨레의 절실한 념원을 그대로 반영했다.

… 전민족적인 리해관계와 밀착되여있다는데서 전민족은 전폭적으로 지지를 표명하게 되는것이다.》(《동아일보》 1972년 7월 5일부)

 

《1972년 7월 4일 화요일 아침 10시 TV와 라지오앞의 순간의 귀와 눈과 감각을 의심했다. 다음엔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의 살아있는 뉴스의 흐름임에 소스라친 놀라움.

무언가 가슴에 닿아 뜨거운 흥분과 감격. 그것은 누구의것도 아닌 우리의 조국과 겨레의것으로 소중한, 아프고 슬프고 반갑고 기쁘고 진하고 두텁고 피맺힌 감격의 백과였다.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남북공동성명, 평양에 가고 서울에 와서 남북비밀회담, 외세의존 또는 간섭없이 무력에도 의거하지 않는 평화적인 조국통일의 실현, 사상, 체제를 초월한 모든 교류실시, 서울-평양 직통전화, 남북조절위원회구성에 합의 등 잇단 거센 파도와 같은 <빅 뉴스>에 감격은 해일로 가슴에 가득찼다.

긴 밤의 어두움을 지우는 려명의 빛과 밝음이였다. 뒤안의 겨울이 아니고 앞뜰의 양춘같은것. 부정을 허용치 않는 긍정의 리성과 슬기, 정체, 갈증, 곤혹, 울화, 분개의 뚝이 무너지려는 시원함.

열려서 내다보이는것, 일어서 멈추지 않는것.

가까워져서 닿는 온기. 한피줄의 뜻과 마음이 담긴 향일의 맥박이였다. 민족비원의 승화이며 한결같은 념원을 밝히는 점화인것.

27년동안 쌓인 담을 넘어선 남북의 미소이며, 숙원의 이끼낀 통일에의 문을 열려는 노크에 벅찬 설레임과 무량무한의 감개가 한혈족으로서 모두 함께 동일하고 동시에 한꺼번에 북받쳐오른다.

남북이 없고 38°선이 없고 사상과 리념을 초월한 남이 아닌 동족이란 하나의 마음이 더워질뿐이다. 8. 15의 감격을 4반세기만에 다시 안아보는것 같은 감격이다. 그 열기속에 배달겨레의 력사가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대회전을 시작하려고 한다.

민족의 정기가 어린 대도가 열린다. 서둘지 말고 겁내지 말고 인내와 끈기로 신중히 밟아야 하는 민족의 길이다. 비추어진 통일에의 서광을 받아 골육의 지정과 단일민족이란 자긍을 제일의 바탕으로 한 겨레의 정진이 있을따름이다.

이제 부르면 대답하는 남북, 3천리강토에 이는 훈풍에 민족의 혼과 명제를 담아 합창의 광장으로 모두 나서야겠다.》(《국제신보》 1972년 7월 6일부)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과 감격은 이루 말할수가 없다. 이 며칠동안 모든 국민이 흥분과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있는 사실에서 그대로 잘 나타나고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거리에서, 모든 국민들의 화제가 한곬으로 이 문제에 집중되고있는것도 이 성명이 갖는 획기적인 충격때문이다.》(《조선일보》 1972년 7월 7일부)

 

《올 때가 왔다는 느낌이다. 해빙무드속에 <한>반도만 결빙상태를 못벗었는데 이제 그것마저 풀릴 기미를 보여주는것 같다.

각 민족의 생존과 관련된 정치적결정은 당연히 민족스스로가 결정해야 할것이다. 세계정세가 분단국가의 통합분위기를 조성하고있지만 제3자의 종용에 의한 통일은 문제가 있을것 같다. 약소민족의 문제는 이제 세계사의 보편성보다 개별민족의 특수상황속에 해결되여야 할것이다.

우리 민족이 끊을수 없는 단일민족이고 세계의 집중된 이목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없이 민족의 과제를 지혜롭게 해결해줄것을 당부한다.》(《경향신문》 1972년 7월 5일부)

 

《8. 15후 최대의 충격적이고도 감격적인 일이다. 생존에 고향땅을 밟을수 있을것만 같다.》(대구시 회사원 최용팔, 《한국일보》 1972년 7월 5일부)

 

《김철원(50살, 서울시 지하도 행상)은 이 소식을 듣고 <20여년간이나 만나보지 못하고 생리별한 부모, 동생들을 직접 만나본것 같은 기분>이라면서 <하루속히 민족의 념원인 남북통일이 실현되기 바란다.>고 말했다.》(《대한일보》 1972년 7월 4일부)

 

《김윤근(변호사협회장)은 <해방후 20여년동안 민족적념원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못가졌다는것은 슬픈 일이였다. 이번에 통일을 위한 정치적대화의 길이 열렸다는것은 력사적으로 기록할만 한 일이다. 또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추구하기로 남북간에 합의를 본것은 경탄할만 하다.>고 하였다.》(《조선일보》 1972년 7월 5일부)

 

《남북이 통일을 자주적으로 해결할것을 다짐한것은 민족적자존심을 보인것이다.

자기 민족문제는 자기 민족스스로가 해결한다는것은 원칙적으로 옳다.

여기에 반대할만 한 명분은 찾을수 없다. 민족적자존심, 긍지의 표시로서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된다.》(《신동아》 1972년 8호)

 

《우리의 운명을 강대국들의 외교흥정에 맡길수는 없다. 우리스스로의 발로 서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립의 길로 나가야 하며 그런 립장에서 통일을 이룩하여야 한다.》(《경향신문》 1972년 8월 3일부)

 

김일성주석은 … 단 하루도 분렬의 고통을 잊어본적이 없고 조국의 통일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은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조국통일과 관련된 제안을 남쪽에 주동적으로 먼저 제기한것도 김일성주석이라는것은 이제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7. 4남북공동성명의 3대원칙도 김일성주석이 전적으로 제안한 내용을 남쪽에서 동의하여 합의된것이라고 한다.

7. 4남북공동성명뿐만아니라 수많은 로작과 담화에서 김일성주석은 조국통일과 관련된 언급을 거의 빠뜨리지 않았다.》(《자주민보》 2007년 8월 27일부)

 

김일성주석은 1971년 8월6일연설을 통하여 과거 불문하고 남북당국자들의 협상을 제안했다. 그 결과 새로운 장이 마련되였다. 남녘에서 8월 12일 적십자회담제의형식으로 응답했고 그 이듬해인 1972년 5월 3일 남북당국자간의 비밀접촉이 이뤄졌다. 이 접촉에서 자주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이 합의된것으로 밝혀졌다.》(《민족통신》 2009년 4월 16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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