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국통일3대헌장의 정립

 

3대헌장정립의 시대적배경

 

○ 미제의 반공화국고립압살책동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 90년대에 조선반도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첨예한 정세하에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1980년대말부터 시작하여 1990년대초에 이르기까지 이전 쏘련을 비롯한 여러 동유럽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련이어 붕괴된것으로 하여 지난 시기 동서대결을 기본으로 하던 세계정치구도는 조미대결을 기본으로 한 새로운 정치구도로 압축되였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은 《이제 세계는 력사의 종말을 경험하였다. 자본주의체제이외의 대안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마치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것처럼 열을 올렸다. 사실상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부터 쏘련을 비롯한 사회주의진영과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자본주의세력사이에 오래동안 존재해오던 《힘의 균형》, 다시말해서 랭전구조가 파괴되였다는것을 의미하였다.

랭전의 종식으로 이제는 지구상에서 더는 자기에게 맞설 나라가 없다고 호언하며 세계《유일초대국》으로 자처해나선 미국은 저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는것을 주요전략적목표로 내세웠다.

1991년 1월 당시 미국대통령이였던 부쉬1세는 미국회에서 한 일반서신연설이라는데서 《오래동안 바라오던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할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공언해나섰다. 여기서 미국이 세우겠다는 《새로운 세계질서》란 자본주의시장경제와 미국식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즉 지구상에 사회주의가 없고 미국이 주인노릇을 하는 자본주의화된 세계를 말한다.

미국의 지배층은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에 대항할만 한 대국이나 국가동맹이 또다시 나타나는것을 허용하지 않는것을 국방정책의 기본》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저들의 지배질서를 수립하는데서 주되는 장애물은 조선이라고 지목하고 반제자주의 기치, 사회주의기치를 굳건히 옹호고수해나가는 우리 공화국을 압살하기 위한데로 공격의 예봉을 돌렸다.

사실 이때 미국이 우리 공화국을 저들의 《새로운 세계질서》수립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본것은 조선이 미국에게 자그마한 양보도 없이 가장 완강하게 그리고 정면으로 도전해나서는 세계의 유일한 사회주의강경보루국이였기때문이였다.

 

※ 미국 죠지타운대학 국제관계대학원 상급연구원은 《북조선은 오늘의 세계에서 미국에 가장 완강히 도전할수 있는 군사적실체》, 《북조선의 사회주의실체는 미국이 주도하는 새 세기 국제질서에 정면으로 돌파구를 낼수 있는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언론들은 《미국에 대하여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직접 도전하는것은 이 지구상에서 북조선 하나뿐》이라고 하면서 《그 누구도 감히 미국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주저하고있는 오늘에도 워싱톤을 굴복시키려 하는것이 다름아닌 북조선》이라고 론평하였다.

 

력사적으로 볼 때 1950년대 3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국을 서산락일의 운명에 몰아넣은데서 그리고 1960년대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사건과 《EC-121》대형간첩비행기사건, 1970년대의 《판문점사건》 등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침해하려는 미제국주의에 추호의 굴복을 모르고 커다란 타격을 가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였다.

이로 하여 조선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던 미국은 랭전의 종식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이라는 구실이 사라지게 되자 《핵의혹》을 코에 걸고 조선반도정세를 극단한 위기에로 몰아갔다.

미국은 사회주의조선을 압살하기 위한 두가지 전략적방안을 세웠는데 그 첫째 방안은 도이췰란드의 경험을 살려 공화국을 남조선에 《흡수통합》시키는것이며 여기서 기본방도는 공화국을 《개혁》, 《개방》에로 유도하는것이였다. 그리고 두번째 방안은 공화국을 군사적으로 압살시키자는 힘의 정책이였는데 그 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5일전쟁전략》, 《9일단기맹타격》 등 작전안들도 세워졌다.

미국은 그 실행을 위하여 공화국에 대한 《외과수술식타격》이라는것을 최종검토하고 조선반도와 그 주변지역에 수많은 미군무력을 집중시키는것과 함께 《F-117》스텔스전투폭격기와 항공모함타격집단까지 들이밀었으며 저들에게 추종하는 제국주의반동세력을 끌어들여 악랄한 정치군사적압력과 끈질긴 경제적봉쇄, 교활한 사상문화적와해책동을 다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정치, 군사, 경제, 사상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공화국을 완전히 고립, 압살, 질식시켜 지구상에서 영영 없애보려는 극악한 목적을 추구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하지만 이것은 실현불가능한 망상이였다. 1993년에 공화국이 미국에게 준전시상태의 선포와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의 탈퇴라는 초강경으로 또다시 된매를 안기자 미국은 전쟁을 가상한 콤퓨터모의시험까지 해보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였다. 당시 미합동참모본부에서는 대통령이였던 클린톤에게 전쟁이 발발할 경우 예상되는 인적, 물적비용을 구체적으로 보고하였다. 케리 럭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은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은 8만∼10만명, 남조선군은 수십만명이 사망할것이며 전쟁에 드는 비용은 최대 1조US$에 이를것으로 분석했다. 이것은 미국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공화국에 대한 핵공격계획을 변경하여 대화의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렇게 되여 미국의 이전 대통령 카터가 평양을 방문하게 되였으며 1994년 10월에는 제네바에서 조미회담이 재개되게 되였다. 이 회담에서 조미쌍방은 두 나라 정부들이 핵문제를 해결하며 서로의 불신을 가시고 신뢰를 조성하여 쌍무관계를 개선해나갈것을 공약한 법적문건인 조미기본합의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미국은 이러한 조미기본합의문을 무조건 리행하겠다는것을 약속한 담보서한을 대통령의 이름으로 공식발표하였다.

하지만 그후의 사태발전은 미국이 조미기본합의문리행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대화의 막뒤에서 여전히 공화국을 압살할 책동에 매달리였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조미기본합의문이 채택된 직후 미합동참모본부 의장 샬리 카슈빌리와 미7함대 사령관 클레민스가 《핵전쟁준비태세 재검토》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공격용핵잠수함에 《토마호크》순항미싸일을 탑재해 전진배치할것이며 《이 잠수함들은 북을 대상으로 단독작전임무를 수행할것》이라고 밝힌것은 그 단적실례로 된다.

특히 미국은 1990년대 중엽에 들어와서 대조선고립압살책동의 도수를 더욱 높여나갔다. 1996년 미국의 최고위당국자는 《아시아의 미래에 그늘이 지면 미국의 미래도 담보될수 없》으며 따라서 《미국은 지구적인 안전과 안정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아시아, 태평양지역에 계속 개입할것》이라고 하면서 아시아지역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세계의 그 어느 다른 지역보다 아시아, 태평양지역 즉 조선반도를 더 중시한다는것을 실증해준다.

이에 따라 미국의 호전계층들은 여러 기회에 걸쳐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할수 있게 미군이 준비되여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남조선과 일본 등 지역에서 미군을 계속 유지하고 《대응태세》를 강화할것이라고 했다.

당시 미국방장관 코헨은 《미군무력이 임의의 시각과 장소에서 싸울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면서 당면하여 조선반도가 미군의 주되는 작전지역으로 되고있다는데 대하여 암시하였는가 하면 일본의 요꼬스까미해군기지를 모항으로 하고있던 《인디펜던스》호 항공모함전단 사령관 무어는 미국은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여있다.》, 미군과 남조선군은 《각종 규모의 전쟁을 수행할수 있도록 훈련할것》이며 《유사시》에 《인디펜던스》호항공모함전단이 조선반도지역에 파견되여 《전쟁에 참가할것은 명백하다.》고 말하였다.

이렇듯 미국의 호전세력들은 조선전쟁도발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우리 공화국을 압살하기 위해 미쳐날뛰였으며 이것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동시에 민족의 념원인 조국통일을 이룩하는데 엄중한 난관을 조성하고있었다.

 

1

○ 남조선집권세력의 북남대결소동과 반통일책동

 

미국의 이같은 반공화국고립압살책동에 편승하여 남조선의 집권세력은 그 어느때보다 북남대결소동과 반통일책동을 악랄하게 벌리고있었다.

특히 1993년에 집권한 김영삼은 이전시기의 집권자들도 무색할 정도로 사대와 매국배족, 대결과 분렬을 고취하면서 민족의 앞길을 가로막아나섰다.

김영삼은 집권 100일기자회견이라는데서 《핵을 가진 상대와는 악수할수 없다.》고 하면서 집권초기부터 외세와 야합하여 중단되였던 《팀 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을 재개하는것과 같은 북침전쟁대결소동의 폭과 심도를 계단식으로 확대해나갔다.

이미 세상에 잘 알려진바와 같이 1970년대 중엽부터 시작된 《팀 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은 우리 공화국을 침략하기 위한 《핵시험전쟁》, 《핵예비전쟁》이며 그 성격과 위험성으로 하여 우리 인민은 물론 온 세계의 규탄과 배격을 받고 중지되였던 대규모적인 핵전쟁연습이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위험천만한 전쟁연습이 김영삼호전세력이 들어서자마자 아무 거리낌없이 재개되였다.

 

※ 당시 남조선출판물들에 보도된 대규모의 북침전쟁연습만 보더라도 《6공》집권시기의 말기인 1992년에 8건이였던것이 김영삼이 집권한 첫해인 1993년에는 16건으로 2배나 많아졌으며 1994년에는 32건으로 4배, 1995년에는 37건으로 4.6배, 1996년에는 72건으로 9배, 1997년 상반년기간에만도 80건으로 10배에 달하였다.

 

조선반도의 정세를 고의적으로, 계획적으로 격화시켜 끝끝내 민족의 머리우에 전쟁의 참화를 들씌우려는 김영삼호전세력의 책동은 군비확장과 무력증강책동, 무모한 군사적무장도발행위들에서도 드러났다.

 

※ 김영삼《정권》의 1997년 국방예산만 보더라도 13조 7 865억원으로서 이것은 그 전해인 1996년의 국방예산보다 12. 6%나 더 늘어난것으로 된다. 그리고 군사비지출은 14조 4 600억원으로서 이것은 집권초기인 1993년의 9조 8 000억원에 비해 근 1. 5배에 달한다.

 

남조선의 군부호전집단은 동족살륙에 리용할 최첨단군사장비들인 《F-16》최신예전투기를 서산공군기지에 배비하여 《제20전투비행단》이라는 새로운 공군부대를 조직하였는가 하면 쌍방간의 무장충돌을 일으킬수 있는 각종 도발을 일삼았다.

김영삼호전세력은 위험천만한 군사적대결소동뿐만아니라 남조선의 통일애국세력을 탄압하는것으로써 우리 민족의 조국통일운동의 앞길을 가로막아나섰다.

집권초기 《평화구축》이요, 《통일기반축성》이요 하면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수 없다.》는 등 귀맛당기는 소리를 곧잘하던 김영삼은 《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주제넘는 《공약》까지 들고나왔다.

하지만 김영삼반통일세력의 실지행동은 어떠하였는가.

김영삼은 집권기간에 《남북페쇄》를 《정책》으로 선포함으로써 완화와 평화, 통일에 대한 겨레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그는 《감상적인 통일론을 버리라.》, 《통일보다 분렬이 낫다.》, 《평화통일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안보를 희생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는 망언들을 내뱉으며 북남관계를 최악의 단절, 랭각상태로 몰아갔으며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애국투쟁을 《좌경용공》, 《리적》으로 몰아 마구 칼질하였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1996년에 있은 8. 15류혈사태이다.

당시 《문민》파쑈집단은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념원하여 연세대학교에서 8. 15통일행사를 가진 적수공권의 애국학생들을 《폭도》, 《좌경폭력세력》, 《도시게릴라》라고 하면서 《모조리 잡아족치라. 설사 무리죽음이 난다 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폭언하였다. 그리고 통일행사장들에 들어가는 식료품과 의약품, 전기와 물공급을 일체 끊어버리고 수많은 폭압무력과 직승기를 비롯한 폭압장비들을 동원하고 총기사용명령까지 내려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그리하여 이때 2 000여명이 중경상을 입고 6 000여명이 련행구속되는 인민탄압사상 또 하나의 최고기록이 나오게 되였다.

남조선의 한 출판물은 이러한 류혈사태에 대해 《광주에서 발가벗기운채 대검에 찔려 살해된 녀학생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데 아직도 죽음의 행렬이 끊기지 않고있다.》고 하면서 《김영삼의 폭압정치는 그 규모와 잔인성, 지속성, 심각성에 있어서 암흑통치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유신>과 전두환, 로태우의 폭정도 무색할 정도》라고 개탄하였다.

특히 민족의 어버이를 잃은 크나큰 슬픔으로 하여 7천만겨레가 비애에 몸부림치고있을 때 김영삼파쑈세력이 저지른 패륜패덕행위는 온 민족의 피를 꺼꾸로 솟게 하였다.

김일성주석의 서거에 대한 비보를 알리는 공화국의 중대보도가 발표된지 30분도 못되여 김영삼파쑈독재세력은 군대와 경찰에 《특별경계령》과 《갑호비상령》을 내리고 이른바 《비상사태에 대처할 방안》이라는 모의소동을 벌리면서 민족의 어버이를 잃고 몸부림치는 동족에게 총구를 겨누고 림전태세를 갖추었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비상령》을 내린 김영삼패당은 《사회안정》을 코에 걸고 온 남녘땅을 살벌한 공포분위기로 뒤덮었다. 파쑈독재세력은 수만명의 경찰을 내몰아 각지에 차려놓은 분향소를 들부시고 추모현수막과 인쇄물들을 압수하였으며 조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북행길에 오른 범민련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조의방문단 성원들을 체포구속한데 이어 그들의 사무실과 가택을 수색하는 횡포를 저질렀다.

민족의 어버이의 서거에 대한 《문민》파쑈집단의 이러한 반민족적이며 비인륜적행위는 온 민족의 격분과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을수 없었다.

남조선의 한 민주인사는 케네디가 암살되였을 때에는 그처럼 옆에서 말렸음에도 굳이 워싱톤에까지 달려가서 눈물을 짰던 김영삼이가 《김일성주석께 조의표시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를 가리켜 《민족의 피는 고사하고 한쪼각의 례의도덕도 없는 랭혈동물》이라고 단죄하였다.

그리고 남조선잡지 《말》 1994년 9월호는 미국대통령이 김일성주석에 대한 조의를 표명하고 경애하는 장군님께 경의를 표시하고있을 때 김영삼은 《조문파동》과 《주사파소동》을 벌렸다고 하면서 격분을 표시하였다.

온 세계는 물론 적대국의 지도자들까지도 김일성주석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고있을 때 유독 남조선의 김영삼만이 천추에 용납 못할 반민족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해나선것은 력사를 두고 계산되여야 할 죄악중의 죄악이다.

 

2

○ 용암처럼 타오르는 겨레의 통일열망

 

미국과 남조선집권세력의 반공화국책동과 반통일책동이 극도에 이를수록 겨레의 조국통일열망은 막을수도 꺾을수도 없이 더욱더 불타올랐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우리 민족의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는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조국해방 45돐이 되는것과 동시에 민족분렬의 비극이 시작된지 45년이 되는 1990년에 이 땅에서는 8. 15를 계기로 분렬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가 온 겨레의 커다란 관심속에 처음으로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범민족대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각종 통일행사들이 진행되였으며 특히는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정당, 단체들과 여러 조직들, 각계각층 인사들을 조직적으로 결속시키는 조국통일범민족련합(범민련)을 결성할데 대한 결정이 채택되였다. 이에 따라 그해 11월 20일 범민련의 결성이 온 세상에 선포되였다.

범민련의 결성, 그것은 북과 남, 해외에서 분산적으로 진행되여오던 조국통일운동을 하나의 조직적인 기반우에서 련대적인 전민족적운동으로 강화발전시켜나갈수 있는 확고한 담보를 마련한 민족사적쾌거였다.

범민족대회에 이어 10월과 12월에 걸쳐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진행된 체육인들의 북남통일축구경기와 해외동포예술인들까지 참가한 범민족통일음악회 그리고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는 통일을 절절히 바라는 우리 겨레에게 통일의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 평양민족음악단의 공연을 본 남조선동포들은 《북의 예술인들은 이남민중들의 심장을 틀어잡았다.》, 《통일열망을 안겨주는 예술》, 《30여명이 1만명을 대신한 신기한 예술》이라고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남조선신문들은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의 합동공연소식에 대하여 《우리 가락타고 통일대화음》, 《민족의 가락과 겨레의 소리가 통일의 화음을 이루었다.》라고 대서특필하였다.

 

민족의 통일열망으로 고동치는 통일행사들은 날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더욱 고조되였으며 1990년대 중엽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1995년 공화국은 정당, 단체련합회의를 소집하고 조국해방 50돐을 맞으며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기 위한 대책으로서 8. 15를 계기로 판문점에서 대민족회의를 열어 민족공동의 통일방도를 협의확정할데 대한 제안을 담은 호소문을 채택발표하였다.

그리하여 1995년 8월 13일 민족의 성산 백두산에서는 7천만겨레의 통일지향과 의지를 안고 조국해방 50돐 민족통일대축전장으로 향하는 북과 남, 해외동포대표들의 장엄한 통일대행진이 시작되였다.

8월 14일에는 평양의 김일성경기장에서 10만여명의 군중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통일대축전행진대를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가 성대히 진행되였으며 이 대회에 사선을 헤치고 달려온 범청학련 남측본부 《한총련》대표들도 참가하였다.

조국해방 50돐이 되는 8월 15일 판문점은 민족의 대단결로 통일의 새 전기를 마련하려는 겨레의 통일열망으로 세차게 끓어번졌다.

판문각앞마당에서는 성대한 개막행사가 진행되였으며 이어 통일각에서 민족공동의 조국통일방도를 협의확정하기 위한 북, 남, 해외 정당, 단체들의 대민족회의가 진행되였다.

대민족회의에서는 온 겨레의 일치한 통일념원과 지향을 모아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제시하신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을 민족공동의 유일한 통일방도로 합의확정하였다.

이날 판문점의 통일각에서 열린 범청학련 중앙위원회 제1차회의에서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개 제도, 두개 정부에 기초한 련방제방안을 공동의 통일방도로 확정하고 범청학련과 통일애국세력의 모든 투쟁을 련방제통일실현을 위한 투쟁에로 한단계 상승시켜나갈데 대한 공동합의문이 채택되였다. 회의들에 이어 판문점에서는 범청학련 공동연단, 조국해방 50돐경축 통일음악회, 북, 남, 해외통일미술전시회, 범청학련 사진 및 미술전시회가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조국해방 50돐을 맞으며 진행된 거족적인 민족통일 대축전이야말로 분렬주의세력에 대한 통일애국세력의 자랑찬 승리로서 민족적단합과 조국통일에 대한 7천만겨레의 불타는 열망과 의지를 힘있게 과시한 민족대회합이였으며 반세기에 걸치는 우리 민족의 통일대장정에 지울수 없는 자욱을 남긴 뜻깊은 력사적사변이였다.

진정 삼천리강토에 굽이치는 민족의 통일열기는 그 무엇으로써도 막을수도 꺾을수도 없었다. 온갖 반통일세력의 악랄한 책동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끓어오르는 용암마냥 활활 타오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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