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기 러 기
김 승 기
1
새파랗게 높이 뜬 가을하늘로 《끼르륵- 끼륵-》 찾고 부르며 기러기떼들이 날아간다. 계절조의 울음소리건만 왜 이리도 심혼을 흔드는지. … 락엽이 흩날리는 높지 않은 야산에 웬 늙은이 하나 외로이 서있다. 청춘시절의 장대했던 체구는 구부러져 등나무지팽이에 의지했다. 펄펄 날리는 백발아래에 준수했던 홍안은 주름에 덮여 빛을 잃었다. 하지만 정신의 창문이런가 두눈동자는 80고령의 나이를 부정하며 정기를 발산한다. 비전향장기수 정윤기다.
비전향장기수들이 살았던 《만남의 집》을 나와 야산 오솔길로 부지런히 오르는 50대의 녀인이 있었다. 가을외투자락을 한손으로 누르며 로인에게 다가가 멎어선다. 《량심수후원회》 회원인 김향순이다. 지팽이에 의지하여 돌처럼 굳어져있는 로인의 모습을 보는 그 녀자의 입에서 흐느낌같은 한숨이 새여나왔다.
(아! 얼마나 외로운 인생인가? 락엽이 날아도는 산우에 서서 가을하늘 기러기떼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랴?)
인생의 몇십년을 감옥이라는 사람 못살 곳에서 보내며 끝까지 지조를 지켜온 비전향장기수들이 몇해전에는 북으로 송환되여갔다. 바로 그때 남측의 부당한 처사로 하여 북으로 가지 못한 비전향장기수-그가 바로 이 로인이다.
《로인님, 바람새가 차고 사나운데 이렇게 나와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김향순이 걱정하며 다가서자 정윤기는 조용히 눈길을 돌리였다.
《향순인가?》
정윤기의 그윽한 눈빛에 김향순은 자기의 온몸이 빨려들어가는듯 한 느낌으로 어깨를 옹송그렸다. 방금전까지 로인을 외롭게 여겼다면 그거야말로 아니할 생각이였다. 마음을 의지한 동지들을 다 떠나보내고 절해고도에 홀로 남아서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인간이 아닌가?
김향순이 《불교인협회》에서 일하면서 《량심수후원회》회원으로도 된것은 그자신의 의사이기도 했지만 거역할수 없는 외부적원인이 작용했기때문이다. 정윤기가 북으로 송환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게 된 그날 김향순은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시름겨운 번민속을 헤맸다. 용단을 내려 《만남의 집》을 찾아갔다. 그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절망과 비애에 빠진 늙은이의 처량한 모습이 아니라 뜻밖에도 태연자약한 모습이였다. 정윤기는 초물방석우에 두무릎을 꿇고앉아 눈같이 흰 종이우에 수묵화 《락락장송》을 그리고있었다. 먹을 찍으며 사색하고 붓을 들어서는 혼신의 힘을 모아 꾹 눌렀다가 가볍게 뗄 때마다 나무의 억센 줄기와 푸른 잎새가 금시 살아나는것 같았다.
《그대는 누군가?》
《저는 <불교인협회>에서 소임을 맡아보는 김향순이라고 합니다.》
《어인 일로 날 찾아왔소?》
《선생님을 꼭 뵈우라고 해서… 아니 제가 뵙고싶어서 왔습니다.》
《거짓은 욕망이 부추기는 인간의 어리석음이지.》
김향순은 하마트면 늙은이앞에서 자기의 속을 다 털어놓을번 했다. 정윤기의 기품과 언행이 회오리바람처럼 한순간에 온몸을 말아넣고 휘둘러놓았던것이다. 지금도 그날 저녁처럼 로인을 측은하게 여겼다가 후회하지 않는가?
《로인님, 내려가십시다.》
《그러세.》
김향순은 로인의 한팔을 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전 말이예요. 아이참!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일없겠는지.…》
《하라구. 허물할게 뭐 있나?》
《말씀드리지요. 로인님은 열반의 경지에 이른 신령과 같이 생각돼서 그럽니다.》
정윤기는 등은 굽었어도 고개를 높이 쳐들고 멀리 앞을 보며 걸었다. 그의 눈빛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비분에 떠는것 같은가 하면 너그럽게 웃는것 같기도 하고 침통한 사색을 하는것 같은가 하면 예리한 창끝처럼 번쩍거리기도 했다.
《내 몸안에는 욕구가 꽉 차있네. 석가모니가 아무리 바라지만 해탈은 못하였거던. 그런 내가 열반에 이르다니… 향순이는 아무때 보나 내 심중에서 뭔가 찾으려고 애쓴단 말일세. 그게 뭔지 보살님도 모르는데 나라고 어떻게 알겠나?》
《원, 로인님도… 로인님께서 가지고계시는 경전을 한권만이라도 빌려주신다면 몰라도 제가 어떻게 감히 심중을 엿볼수 있겠습니까?》
《허허, 내 마음속경륜을 읽고싶다? 이보라구 향순이, 내 글자는 세상이 모르는지라 보여줘도 읽지 못해. 불교란 <4제 8정도 12인연설>을 골자로 한 관념일세. 동방의 그 관념철학이 유럽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도 백여년 이상 앞섰지. 그리고 거기에는 세상만물의 호상련관과 변화발전이 암시되였거나 성문화된 흔적도 볼수 있지.》
김향순은 자기가 우연히 뱉아놓은 그 《신령》과 함께 걷는 착각까지 들었다. 붓을 들면 서예와 그림을 그려내고 입을 열면 그 어느 명망높은 대학의 교수도 무색할만큼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막히는데 없이 외우며 구술해내는 신통력이 정윤기에게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옥중살이 36년이 오죽한가? 그전에 배운것마저 다 증발되여 뇌수세포가 미이라처럼 될터인데 이 로인은 놀랄만큼 그 반대다. 로인의 머리속지식의 장서가 어떻게 마련된것일가? 김향순은 날이 갈수록 정윤기라는 인간이 점점 크고 무거워지는 존재, 리해하기 어려운 인간임을 느끼였다.
그는 정윤기의 기상과 인간성을 이미 체험한바 있었다. 《만남의 집》에서 낯을 익힌지 몇달 지난 어느날 서울시가에서 통일행진대의 출범식이 있었다. 그때 무장한 경찰들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금시 최루탄연막이 뒤덮을듯 한 긴장속에 행진대와 경찰이 마주서서 서로 기를 꺾으려고 했다.
《경찰은 물러가라! 우리가 바라는것은 조국의 통일이다. 통일로 가는 길을 막지 말라!》
《헤쳐라! 헤쳤! 더이상 란동을 부리면 재미없다!》
위협을 하는 경찰의 악청이 행진대원들을 머밋거리게 했다. 이때 용기를 북돋아주는 웨침소리가 행진대를 고무했다.
《누구냐? 통일이라는 깨끗하고 신성한 말에 칼질을 하는 너희들은 누구냐? 민족의 숙원이 피의 강물을 이루고 흐르는걸 보지 못하느냐? 력사의 이 대하를 막는 무리들은 통일의 원쑤, 민족의 원쑤다!》
청년학생들이 이 웨침에 화답하며 대렬을 정돈하고 나아갔다. 급해맞은 경찰들은 곤봉을 무질서하게 휘두르면서 퇴각했다. 여기저기에서 기세를 돋구며 행진대는 앞으로 전진했다.
멀리서 울려오는 학생들의 구호와 노래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기던 김향순은 가로등에 기대여선 정윤기를 보고 흠칫 놀랐다. 오른손으로 기둥을 안은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그 모습은 석상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이마에서 비물같은 땀이 줄지어 흘러내렸다.
《로인님, 왜 이렇게… 무슨 일입니까?》
정윤기는 굳어진 자세로 눈길만 쳐들며 조용히 대답했다.
《일없네. 망나니들의 몽둥이가… 그 망할 놈들이 내 허리를…》
그제야 김향순은 정윤기가 경찰곤봉에 맞았다는것을 알고 병원간호부들을 불러댔다.
《조심해요. 조심조심… 허리를 다쳤어요.》
정윤기는 담가에 실려 병원구급실로 옮겨졌다. 척추가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로인에게 있어서는 무서운 타격이였다.
《동통이 심하겠지요?》
김향순의 물음에 보라매병원 의사 리경운은 환자의 상태를 주의깊게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데 있습니까? 뼈를 깎는것보다 더한 아픔입니다. 쇼크까지 동반할수 있습니다.》
정윤기는 침상에 누운채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았다.
《의사선생, 모르핀이라도 놓아주세요. 아픔을 잊고 잠잘수 있게.》
김향순이 자기의 고통으로 느끼면서 이렇게 호소하는데 정윤기가 눈을 감은채 말을 하였다.
《일없네. 그런 약으로 진통을 멈춰서야 뭘하겠나?》
《그래도 좀 자고나면 낫겠지요.》
《우리가 당하는 진통은…》
정윤기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도피해도 안되고 잊어먹자고 생각해도 안되네. 이를 악물고 참으며 감수하느라면 의지가 산같이 크고 높아져서 이기게 되는거지.》
김향순의 눈에 비낀 정윤기는 이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와 지조와 기개를 가진 인간이였다. 정윤기는 입원생활을 두달가까이 했다. 의사들의 진단이 그를 더욱 괴롭히였다. 이전처럼 자유롭게 걸을수가 없으며 지팽이에 의지하거나 삼륜차에 몸을 싣고 꼭 필요한 때만 움직여야 한다는 권고였다. 병상에서 그가 생각해낸것이 《1인기차시위》였다.
김향순은 처음에도 그랬고 오늘까지도 정윤기가 벌리는 그 시위가 무리한것이라고 여기고있었다. 80고령의 늙은이가 기차를 타고다니며 병든 육체를 혹사하니 이거야말로 무리라고밖에 달리 볼수 있는가? 김향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윤기의 기차시위는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로인님, 오늘도 역에 나가시렵니까?》
《난 평생 마음먹은 걸음을 돌려세워본 일이 없네.》
산을 내려와 로인의 거처지인 《만남의 집》앞에 이른 김향순은 정윤기를 나무의자에 앉힌 다음 방안에 들어가 그의 시위용구호띠를 가지고 나왔다. 하얀 명주천으로 만들었는데 《미군가라!》는 구호가 씌여있었다.
《좋은 구호이군요.》
김향순이 감동적으로 말하자 정윤기는 담담한 표정으로 구호띠를 두르고나서 지팽이에 의지하여 일어섰다.
《하늘에 새긴 뜻일세. 누가 막는단 말인가.》
지금까지 수십차 정윤기와 함께 기차시위를 동행하는 김향순이였지만 로인의 강의한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신령》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수 없었다.
2
《로인님, 경운선생한테 들려서 필요한 약을 가지고 떠날걸 그랬어요.》
《약이 있다니까. 그 선생이 준 약이지.》
《그래두… 참, 그 선생이 요즘 침구학 열심히 판다고 해요. 로인님이 허리아프시니까 제가 고쳐드린다는거지요. 정말 고마운분이예요.》
《그런가? 그래서 내가 늘 그에게 고맙다는거야.》
굼뜨게 달리는 렬차차창을 내다보며 정윤기는 심중그대로 말했다. 김향순은 정윤기가 례의에 밝고 례의를 지키는데 있어서 자기나름의 절제가 있다는것을 알고있다. 지금같은 모습을 볼 때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수 있는 범속한 늙은이이다. 남의 크지 않은 성의라도 받으면 어떻게 갚을가 오래동안 생각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이젠 점심때가 되여오니 식사를 드릴가요?》
김향순은 정윤기의 《1인기차시위》에서 자그마한 불편이라도 있을세라 각근히 마음써온다.
《함께 하자구. 사람이 먹어야 산다는 생활의 진리는 가장 단순하고 초보적인데 부처님은 모르고계신다니까.》
《호호호… 아무 말씀이나 다 재미있고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신다니까요.》
《그렇다면 그 치사를 사양하지 않겠네. 허허허…》
차창탁에 김향순이 준비한 간단한 음식가지들이 올랐다. 정윤기는 김밥을 맛있게 먹으며 말했다.
《향순이의 음식솜씨는 누구도 못따를거야. 안해가 만들어주는 음식, 마음통하는 친구들끼리 정답게 나누는 음식… 사람이 죽어서는 안되기에 먹지 않으면 안되지. 그런데 성찬보다 더 꽁꽁 깨물어 영양을 섭취해야 하는 음식이 있다는걸 향순이는 다 모를테지?》
정윤기의 화제가 어디로 가지뻗을가 점치기를 하며 김향순은 부드러운 눈매에 미소를 담고 고개만 끄덕이였다.
《난 충청도 진천태생일세. 내 고향은 송림속에 자리잡은 살기 좋은 마을이였어. 무던히 장난도 세찼었지. 여름에는 강가모래불에서 못하는 놀음이 없었다네. 그통에 서당숙제를 못해서… 허허, 날 대신해서 나와 함께 장난을 치던 내 친구가 가끔 종아리를 맞았소. 그 친구는 서당훈장의 손자였다네. <이놈아, 삼강오륜을 알아야 집안에서 효자되고 나라앞에선 충신이 될게 아니냐?> 버들회초리가 장딴지에 뱀을 그릴 때면 속대무른 그 친구는 엉엉 울군 했지. 세월이 흘러 우리는 송림이 우거진 고향마을이 아니라 피비린내 풍기는 감옥, 살아서 못나온다는 대전교도소에서 만났지.》
정윤기는 스스럼없이 김향순의 넋을 이끌어 자기가 살아온 옥중생활의 토막앞에 세워놓았다.
… 날이 밝고 해가 지는것을 알수 없는 산 인간들의 무덤같은 대전교도소, 여기서는 흐르는 날과 달도 바람벽에 금을 그어가며 새겨야 알수 있다. 수인들에게 차례진 공간에는 빛이 스며드는 바늘구멍만 한 틈도 없다. 감옥복도에서 울리는 간수의 구두발소리, 돼지멱따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들을수 있는 인간세상의 소리이다. 대전교도소의 간수들은 하나같이 포악무도한 야수들이다. 하지만 이들도 수인다루기에 맥이 빠져서 날이 밝으면 진저리를 친다. 낮은 낮대로 비명소리로 악마구리끓는듯 하는데다 밤은 밤대로 시체들을 날라야 하니 간수들도 고역을 치르는셈이다.
대전교도소 사동에는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간수가 있었다. 이자는 걸상에 앉아 끄덕끄덕 졸다가 철창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에 화닥닥 놀라 왜가리청을 지른다.
《뭐야? 어느 놈이야? 신새벽부터 지랄을 부리는 놈이…》
간수가 자물쇠를 벗기고 철문을 열어제끼자 철창을 움켜쥔 수인이 무섭게 나타났다.
《개자식! 308번! 살기가 귀찮아서 발광이냐?》
간수가 발을 구르며 살기를 내뿜지만 수인은 두주먹으로 그냥 철창을 틀어쥐고 《늑대》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사납게 으르렁거려도 수인은 끄떡하지 않았다. 간수는 흰자위가 희뜩거리는 두눈을 꼿꼿이 뜨고 감방안을 살펴보았다. 하루밤을 지나보내면 한둘은 죽거나 미치기도 한다. 그래서 《늑대》는 감방상태를 확인하고 고함을 치는것이다.
《308번, 미쳤는가? 응? 아니면…》
《내 번호를 똑바로 불러라! 내 번호는 1010이다. 천-공-십번!》
《야, 이 미친놈아! 네 가슴에 패쪽처럼 단 번호는 뭐구 1010이란것은 또 뭐야?》
《1010번, 정윤기다!》
《가만가만, 이게 한해에 한번씩 발작하는 지랄이구나! 그렇지?》
《이놈아, 멀쩡한 사람보구 지랄이라구? 내 이름은 정윤기, 1010번이다!》
《네놈이 일부러 소란을 피우는줄 안다. 교도의는 네가 지랄병이 없다고 진단했다. 알겠어?》
《그렇다! 나는 1010번이다.》
《이 미친놈아, 수인번호는 교도소에서 하사한거다. 네가 감히 제멋대로 바꾼단 말이냐?》
《나는 죄인이 아니다. 통일을 위해 싸우는 애국자를 모독하지 말라!》
《늑대》는 악이 받칠대로 받쳐 발을 쾅쾅 굴러대며 길길이 날뛰였다.
《308번, 개자식! 내 담당에서 그따위 지랄을 해? 내 오늘 네놈의 미친병을 고쳐줄테다. 찍고 지지고 두들겨서 뼈가 흐물흐물 녹은 다음 먹방에 처넣어주마.》
정윤기는 이해 이날도 《1010》번을 부르며 새날을 맞았고 동지들에게 자기 인사를 보냈다. 철창을 두손으로 움켜쥐고 잊어버릴가봐 겁이 나는지 《1010》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것은 그의 당원증번호였다! 오늘 12월 2일은 그가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의 당원이 된 날이였다. 정윤기라는 육체적생명은 수난당한 망국노의 설음속에서 태여났지만 정치적생명은 해방된 조국땅 성스런 당기앞에서 받아안았다. 하기에 그의 가슴속에는 《어머니당이여, 당신의 아들은 그 어떤 준엄한 폭풍우속에서도 변치 않는 당신의 아들로 살겠습니다!》라는 맹세가 심장의 피를 끓이고있었다.
며칠후 감방문이 열리더니 《늑대》가 나타났다.
《308번, 지랄부린 값을 톡톡히 치렀지?》
(까마귀 고니의 뜻을 어찌 알랴? 난 한해에 한번씩 자신을 스스로 검열한다.) 하고 정윤기는 《늑대》를 비웃었다.
《사람같이 살고싶은 생각은 없는가?》
《난 어제도 오늘도 사람답게 살았고 래일도 1010번답게 살겠다!》
《흥! 너같은 절벽강산과 말하는 내가 어리석다.》
《피곤하다. 나는 쉬고싶다.》
《안돼! 308번, 날 따라오라!》
《늑대》가 고함을 치며 교도소의 어느 한 방으로 그를 끌어갔다.
《수인번호 3534번, 고개를 들고 보라. 네가 만나기를 소원한 308번이다.》
정윤기는 자기앞에 낯선 수인이 서있는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뼈만 남은 몸에 너덜너덜한 수인복을 걸친 피골이 상접한 모습…
《고향친구라지? 흥, 어이구- 이거야말로 사람이 먹는것들이구만. 소갈비, 삶은 닭알, 도미회렷다? 좋아, 친구들끼리 먹으면서 회포를 나누라구. 난 곁에서 군침이나 흘려야지.》
《늑대》가 제법 사람다운 말을 찾아하며 구석쪽 나무의자에 가서 앉았다. 두 수인은 눈을 쪼프리고 한동안 마주 보기만 했다.
《윤기, 날세. 김우성일세.》
《뭐? 자네가… 자네가 우성이라구?》
《그래, 낳아준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겠는데 임자가 알아볼수 있나?》
정윤기는 김우성의 앞으로 한걸음씩 다가갔다. 옥고에 머리까지 희여진 고향친구, 왼쪽입귀에서 웃어가지고있던 기미가 지금은 앙상한 살가죽에 매달려있다.
《옳구만, 우성이!》
정윤기는 북받치는 우애로 김우성의 어깨를 와락 잡아끌었다.
《좋아, 아주 좋아!》
《늑대》의 빈정대는 소리에 맞추어 정윤기의 잔등쪽에서 사진기섬광이 번쩍거렸다. 정신차린 정윤기는 옆에 펼쳐진 음식상을 굽어보았다. 김우성은 게면쩍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달리 생각말게. 우리 집에서 들여보낸 차입식품이네.》
정윤기는 김우성의 낯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헤여진게 언제더라?》
김우성의 얼굴에 약간 화색이 돌았다.
《그게 47년 겨울이였지. 정확히는 동지날…》
《기억력이 좋구만. 수인번호 3534라. 나도 본 일이 있어. 그게 자네였구만. 몇해째나?》
《3년 하구도 백날은 넘겼어. 흐흑-》
김우성의 어깨가 서리맞은 호박잎처럼 축 처졌다. 정윤기는 측은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여기서 나가려나?》
김우성은 흐느끼며 목소리를 높이였다.
《못살겠어. 나도 사람답게 살고싶네. 나를 낳아 키워준 부모님들앞에 자식된 도리를 해야겠네. 처, 자식들에게 남편구실, 아버지구실을 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도 사람이란 말일세.》
《우리라는 말은 뽑게. 임자 혼자 결심했다면 할수 없지. 자식도리, 남편, 아버지구실을 하겠다는데 누가 막겠나?》
정윤기의 동정어린 말에 힘을 얻은듯 김우성은 머리를 쳐들었다.
《윤기, 난 동지들앞에 죄진 일이 없네. 그것만은 믿어주게. 다만 전향서에 도장만 찍었을뿐이네. 윤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사람이 한번 나서 다 산대도 3만 6천여날이 고작일세. 그 절반이라도 사람답게 살고싶네.》
정윤기는 친구를 탓할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아 말없이 있었다.
《윤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우성이가 불렀다.
《임자는 장차 어떻게 하려나?》
《임자 말처럼 나도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살려고 하네.》
《임자 마음을 알겠네. 쉽지 않을걸세.》
김우성은 음식을 차린 상에 머리를 푹 박으며 주저앉아 가슴을 쥐여뜯었다.
《날 용서하게. 사람은 한계가 있는 법일세. 이 김우성의 한계는 여기서 끝이야.》
김우성은 가슴을 움켜쥐였던 주먹을 떨구며 몸부림을 쳤다. 정윤기는 엄숙한 자세로 그를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3
정윤기가 급작스레 기차시위로정을 바꾸는 바람에 김향순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여러번 함께 다녔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중도에 내리겠다는 때부터 의혹을 품었는데 저으기 당황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왜 놀라나? 진천은 내 고향일세. 이제 가면 알아볼이가 없고 반겨맞아줄이도 없지만 그래도 한번 찾고싶구만.》
《그래야지요.》
심중에 북받친 소리가 터져나올가봐 김향순은 큰 가방 하나뿐인 짐을 싸들며 부산을 피웠다. 그통에 김밥을 쌌던 곽이 가방안에 도로 들어가는것도 몰랐다.
렬차에서 내린 정윤기는 지팽이를 짚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였다. 역앞 오물통앞에서 멎어선 그가 고개를 돌리였다.
《다 먹은 김밥곽은 여기다 버리게. 향순의 가방이 어지러워질가봐 그러네.》
《예?》
자기의 실수를 깨달은 향순은 정윤기의 세심한 눈길에 감탄하며 가방속에서 빈 곽을 꺼내 던져버렸다.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서니 가을바람이 시원스럽게 불어왔다. 진천읍이 내려다보였다.
《진천 어디로 가시렵니까?》
《우리 향촌은 그때 죽동이라고 불렀다네.》
(?!)
죽동이라는 말에 다시한번 놀란 김향순은 바람을 피하듯 얼굴을 돌리였다.
《향순인 이 고장이 생소할테지?》
《예.》
정윤기의 팔을 끼고 걷는 김향순의 얼굴에는 이름 못할 감정이 숨박곡질을 하고있었다. 곁에 선 로인이 자기의 속마음을 빤히 들여다보는것 같아 허둥거리며 말했다.
《이런 말이 생각나는군요. <생거진천 사거룡인>이라고… 아마도 진천이 살기 좋은 고장인가보지요.》
《허허, 향순이가 용쿠만. 우리 향토 고사를 다 알고… 나서 살기에는 진천이 좋고 죽어 묻히는데는 룡인이 좋다? 그게 그럴사한 말이기는 해도 어떻게 사람이 제 맘대로 그렇게 선택을 해서 살고죽고 하겠나?
헛된 욕망일뿐이야. 그런데 그 옛 고사를 다시 듣고보니 참뜻을 음미하게 되는 측면이 있구만. <사거>라, <사거>라…》
정윤기는 이렇게 뇌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더니 이윽하여 걸음을 옮겨 죽동마을을 찾았다. 마을어구에서 그들은 허리가 꼬부장한 할머니를 만났다.
《이 고장에서 사신지 오랩니까?》
눈이 어두워 사람을 잘 가려보지 못하는 할머니가 고개를 쳐들고 정윤기를 뜯어보며 중얼중얼 되묻는다.
《누굴 찾아 어디서 오는 나그네요?》
《나그네가 아니라 제 고향을 찾아보자구 옵니다. 오래 사셨나요?》
《스무살에 과부됐구 외아들한테 얹혀서 증손자를 봤으니…》
《허허, 여기 죽동마을에 김우성이란 사람이 살았지요?》
《살았소만 지금은 없다우.》
《이사갔는가요?》
《아주 갔지. 사람이 마지막으로 가는 그 고장으로 말이우.》
하필이면 죽은 사람 주소를 물을게 뭔가는 노염으로 채머리를 흔드는 할머니는 제갈길을 더듬질하며 걸어갔다. 김향순의 얼굴에는 구름이 꼈다. 자기의 감정을 더이상 감출수 없었던것이다. 그의 심정과는 관계없이 정윤기는 동네사람들에게 물어 김우성의 묘소가 자리잡은 곳까지 알아냈다.
《향순이, 지금껏 나를 많이 도와줬는데 내가 고향친구의 묘에 분향하는것을 나무라지는 않겠지? 그럼 부탁하세.》
김향순은 정윤기가 시키는대로 마을에 있는 자그마한 점포에 가서 술과 향대를 사가지고 왔다. 김향순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어색한 웃음을 내비쳤다.
《이거면 되겠지요. 어서 가십시다. 저기 저 산이랍니다.》
두사람은 반나마 잎이 진 황철나무숲속 오솔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풀덤불속에서 쓰르라미가 울고 골짜기에 맑은 내가 돌돌 흘러내린다. 바가지모양으로 생긴 야산에 묘지들이 있었다.
《여깁니다.》
김향순이 추석날에 벌초한 흔적이 남아있는 묘앞에서 정윤기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금시 쏟아질것 같은 눈물이 맺혀있었다.
《허- 옳구만. 내 친구 우성이 여기에 누워있었군그래.》
김향순의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정윤기가 한동안 묘를 살펴보고나서 그가 술병과 향대를 상돌우에 차려놓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상돌우에서 향불이 파란 연기를 내며 실오리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주를 올려놓은 정윤기가 묘지를 마주하고 앉아 마음속으로 친구와 말하기 시작했다.
(우성이, 내가 왔네, 옛날 짜개바지친구이던 이 정윤기가 왔단 말일세. 사실 나는 자네를 찾아올 생각이 없었었네. 그런데 임자의 딸이 나를 그렇게 극진하게 돌보아주고있는 그 김향순이라는 녀인이라는것을 알았을 때 나는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수가 없었네. 더우기나 임자가 자기 딸에게 나를 잘 돌봐주라는 말까지 했다는것을 알고서는 더는 가만 있을수가 없더군.
우성이, 나는 얼마전에 향순이가 집으로 청하기에 그의 집으로 간 일이 있었었네. 그때가 자기 아들생일이라면서 할아버지 같은분이 오시면 그애가 얼마나 좋아하겠는가고 하기에 갔었지. 그런데 거기에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였네. 그때는 아직 생일음식이 다 되지 않은 때여서 나는 향순이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있는 사이에 그의 책상에 마주앉았었네.
그런데 그 책상앞에 앉으니 그 아들이란 녀석이 코를 훌쩍거리면서 나에게 무슨 책을 하나 쑥 내놓는것이 아니겠나? 여기에 나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다는것이였어. 호기심이 동하여 그걸 펼쳐보았더니 거기에 이런것이 씌여져있는것이 아닌가?
<… 나는 오늘 아버지가 당부하신대로 정윤기로인을 찾아갔었다.…>
아마 무슨 일기장인가보다 생각이 들었지만 그 눈에 띄운 글씨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네. 그 내용이 참으로 흥미가 있었기때문이였네. 한참 읽고나니 나는 눈물이 나서 견딜수가 없더군. 글쎄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나를 이제까지 그토록 극진하게 도와준 그가 자네의 딸일줄이야? 그리고 그 딸이 나를 찾아오게 된것도 자네의 당부가 있어서였더구만. 그래서 어린시절의 동무를 되찾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네.
임자는 나와 감옥에서 헤여진 이후로 계속 나를 생각하였다지? 그리고 자기의 지난날에 대하여서도 참 후회가 많았다지? 그래서 속죄로 나날을 보냈고 향순이에게 나를 잘 돌봐주라는 부탁을 했다지. 이렇게 되여 찾아온 사람이 이젠 얼굴을 볼수 없는 고인이 되였구만. 이제는 내가 임자 딸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줄 때가 된것 같네. 임자를 추억하며 이야기할 때가 되지 않았나?)
그가 이렇게 속대사를 하고있는 사이에 김향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로인님, 절 용서하세요. 제가 바로 이 김우성이란 사람의 딸이예요.》
《아네, 알아. 그래서 임자를 여기에 데려온것이 아닌가?》
그날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들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그리고 수십년세월 서로 찾아가지도, 오지도 않았던 리유에 대해서… 아마도 김향순이가 그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있으리라는 생각은 뻔히 하면서도 왜 그런지 다 털어놓고 말을 해야 마음이 가벼워질것 같아 정윤기는 오래도록 곱씹고 또 곱씹었다.
4
보라매병원 의사 리경운의 전화를 받은 김향순은 오후시간에 계획된 일도 뒤로 미루고 서둘러 역전으로 향했다. 정윤기의 1인시위는 오늘도 계속되고있었다. 참으로 초불처럼 심신을 태우는 애국의 장거이다. 그의 건강이 나날이 악화되는데 대하여 누구보다 걱정하는 김향순이였다. 리경운은 정윤기의 병이 심상치 않으니 실험검사를 포함한 종합적인 검진을 받는것이 좋겠다고 여러번 말해왔었다.
《정윤기로인님이 오늘 불편한 몸으로 렬차시위에 오른다는것을 알고있습니까?》
《선생님이… 요즘 병상에 계셨는데…》
《조금전에 나한테 왔댔습니다. 역으로 나가는 길이라면서 필요한 구급약을 달라기에 주었습니다만 걱정스럽군요.》
역앞에 이른 김향순은 곧장 대합실로 향했다. 정윤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타났다면 필경 사람들이 모여들텐데 어디에도 그런 광경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난 김향순은 역사밖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속을 헤치고 공원근처에 이르러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길이 한곳에 가 멎었다. 정윤기는 공원의자에 기대여 쉬고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쉰 김향순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눈을 감고 앉아있는 정윤기의 얼굴은 창백하다못해 푸릿한 기운까지 떠돌았다. 검버섯이 돋고 로인반점이 얼룩진 이마와 볼은 이따금 경련을 일으켰다. 몇해전 경찰의 곤봉에 맞아 허리를 다쳤을 때보다 더 아파하는 모습이여서 김향순은 떨리는 손을 그의 팔굽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선생님, 향순이예요. 어디 불편하신가보지요?》
《여길 어떻게?》
《경운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더군요.》
《고마운 사람들이야. 임자들이 난 정말 고마와.》
《그런 말씀마시고 저와 함께 병원으로 가십시다. 오늘 렬차시위는 뒤로 미루시고 말입니다.》
거절을 당할가봐 조심조심 물었는데 의외에도 정윤기가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래야 할가보네.》
자기 결심을 포기하는 성미가 아닌 정윤기이고보면 몸이 매우 불편한 형편에 이른것 같았다. 김향순은 택시를 불러 정윤기와 함께 타고 곧장 보라매병원으로 달렸다. 정윤기는 말 한마디 안하고 진통을 견디느라고 그런지 물난 등산용저고리가 흠뻑 젖었다.
《선생님,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정윤기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는 온몸을 엄습한 참기 어려운 동통속에서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려고 애썼다. 정신력과 아픔의 싸움이였다. 의지가 지면 의식은 육체적고통에서 산생되는 공포밖에 느끼지 못한다. 이겨내야 병마가 물러가는것이다. 마침내 그의 의식 한복판에 교도소의 고문장이 나타났다. 허공에 드리운 쇠사슬이 피비린내를 풍기고 눈뜨기 힘든 백열전등의 화광속에서 지옥에 가면 본다는 류황불가마같은것이 이글이글 타번진다.
《대답해. 네놈의 수인번호가 몇인가?》
《내 번호는 1010번이다!》
뼈마디가 부서져나간다. 벌거벗은 고문명수들도, 정윤기도 두눈을 부릅뜨고 마주 고함을 질러댄다.
《다시 대답하라!》
《1010번이다!》
《1010번이라는건 무슨 소리야?》
《내 생명의 번호다!》
《뭐? 생명? 네놈한테 생명이 있는가?》
《있다! 조선로동당이 생명이다!》
툭 끊기는 쇠사슬… 바닥에 떨어지는 아츠러운 소리… 야수같은 교형리들이 지쳐서 헐떡거린다. 정윤기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구름우에 누워서 어디론가 둥둥 떠가는 쾌감을 맛본다. 내가 이겼다! 의식이 몽롱해지는 속에서도 그는 이 말 한마디만은 붙들고있었다. …
《로인님, 몹시 아픕니까?》
정윤기는 자기앞에 선 김향순과 리경운을 보며 조용히 일어섰다.
《일없네. 나이드니 시름시름 앓는게지.…》
《갑시다. 오늘은 제가 하자는대로 하십시오.》
정윤기는 그들의 요구를 고분고분 따랐다. 실험검사로부터 종합검진을 받기까지 반나절이 걸리였다.
《선생님, 입원해야겠습니다.》
정윤기가 쓸쓸히 웃었다.
《병이 중한가?》
《아닙니다.》
리경운은 정윤기를 입원실로 안내했다.
《여기가 제일 조용한 곳이랍니다. 수속을 끝내고 필요한 사품을 제가 준비해가지고 오겠어요.》
김향순은 정윤기에게 환자복을 갈아입히며 말했다. 그때 잠시 밖으로 나갔던 리경운이 다시 들어섰다.
《로인님, 기분이 어떻습니까?》
《의사선생한테 신세를 너무 많이 졌소. 이 늙은게 언제 갚을지 그게 걱정이요.》
《그저 병만 다 나으십시오. 제가 오히려 신세갚음하렵니다.》
《허 참, 고마우이.》
리경운이 김향순을 데리고 나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용조용 묻고 대답하는품이 여간 긴장한 목소리가 아니다. 의사의 손에는 여러장의 필림이 들려있었다. 한시간가량 지나서야 김향순이 돌아왔다.
정윤기는 침대에 누워 잠들었는지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들여다본 김향순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고나서 정윤기의 렬차시위때 가지고 다니는 가방을 찾아들었다.
《향순이, 왜 얼굴색이 어두운가?》
김향순은 와뜰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어마, 전 쉬시는줄 알고…》
《난 내 병을 알아. 문밖에서 임자들이 말하는걸 들었지. 의사선생이 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뜬 정윤기가 김향순의 손을 꼭 잡았다.
《<생거진천 사거>… 어디더라?》
《룡인이라고 했지요.》
《아니, <사거>… 죽어도 가고싶은 곳, 나에겐 그곳이 있다네.》
김향순은 울고싶은 심정이였다. 정윤기의 병은 간암과 취장암이 겹친 상태여서 매우 위독했다. 아버지 같은분에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선생님, 다 말씀하세요. 가고싶으신 곳도, 만나고싶으신분들도… 그리고 잡숫고싶으신것들도…》
《필요없네. 난 이젠 한곳에만 가면 되는 사람일세.》
김향순은 정윤기가 가고싶다는 곳을 묻기가 두려웠다.
《어허, 임자는 일이 바쁠텐데 내 걱정은 말고 가보라구.》
그래도 가고싶지 않아 주밋거리던 그가 한참만에야 일어났다.
《선생님, 아무래도 제가 좀…》
이제부터 정윤기로인의 치료를 돕자면 미리 곁의 사람들에게 말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서 그러라구.》
김향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없이 나갔다. 입원실에 누운 정윤기는 명상에 잠기였다.
가을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떼… 끼르륵- 끼륵-
아득히 먼곳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
옥중에서 수십년 함께 있은 동지들이 나를 찾고있는것이 아닐가? 윤기야! 죽지 말아, 죽으면 안돼! 귀전을 두드리는 그들의 웨침…
내 오늘까지 살아있는것만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무리에서 떨어진 외로운 기러기… 숨쉬는 마지막날까지 통일을 부르다 죽으리라!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하다 죽으리라. 이제 눈을 감는다면 남기고가는 한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편안히 누워서 죽고싶지는 않았다. 허공을 쳐다보는 그의 두눈에 번개가 번쩍거렸다.
리경운이 들어왔다.
《30분후에 주사를 맞읍시다. 그리고 이 약은 지금 잡수셔야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윤기는 스스럼없이 약을 받아먹었다.
《선생, 향순이더러 좀 빨리 와달라고 전해주겠소?》
《그러지요. 곧 전화를 하겠습니다.》
정윤기는 또다시 엄습하는 진통으로 자리에 누웠다. 이윽고 김향순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눈을 뜨기 힘들었다.
《선생님, 제가 왔습니다.》
정윤기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앉다가 다시 누워버렸다.
《또 진통이 오나요?》
《일…없네.…》
《제 의사선생을 불러오겠어요.》
《아니, 찾지 말게.》
김향순은 수건으로 정윤기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씻어주었다.
《향순이, 날 데려다주겠나?》
《어디로요?》
《역으로…》
《안돼요. 절대로…》
몸부림치며 머리를 흔드는 김향순이 간호부를 소리쳐 찾는데 리경운이 들어섰다.
《경운선생, 진통을 억제하는 주사를 좀 부탁해요.》
정윤기는 손을 젓고나서 김향순을 가까이로 불렀다.
《내 웃주머니에서 수첩을 좀 꺼내주게.》
황급한 김향순이 시키는대로 했다.
《펼치라구.》
수첩장을 펼치던 김향순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리경운도 함께 들여다보았다.
《정윤기. 조선로동당 당원. 당원증번호 1010. 조선로동당창건 60돐을 맞으며 현지활동가 정윤기 당에 드리는 보고.
1인시위, 2005년 6월 15일까지 7만km
8월 15일까지 8만km
9월 9일까지 9만km
10월 10일까지 10만km》
김향순과 리경운은 눈길을 마주치며 자기들앞에 누운 인간의 초인간적인 정신에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향순이, 내 마음을 알겠지? 날 데려다주게. 이 몸은 죽어도 그 길을 가야 해. 가고싶은 곳으로 가야 해. <생거진천 사거평양>, <사거평양>이라-》
정윤기의 두눈은 생의 마지막힘을 모아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수첩을 든 김향순은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리경운의 물음에 김향순은 몸부림치며 울음으로 대답했다.
《태여나 사는 곳은… 진천이지만… 죽어서 묻히고싶은 곳은… 평양이라는…》
아! 이 민족의 장한 아들의 평생 마지막소원을 풀어줄수있는 길은 없는가?
《왜들 이러나? 내 숨을 쉬는 마지막날까지 삶의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가도록 도와주게나.》
그리하여 정윤기는 자원의료봉사대원으로 나선 리경운이까지 데리고 렬차시위의 길에 다시 올랐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1인시위였다.
×
정윤기는 보라매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순간에 그는 다시금 외웠다.
《사거평양》
김향순은 밤새 정윤기의 시신을 지켰다. 날 밝을무렵 리경운이 여러 사람들과 같이 들어섰다.
《향순선생, 위대한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 정윤기선생이 별세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그의 시신을 평양으로 꼭 모셔오라고 뜨거운 말씀을 하시였다고 합니다.》
《예?!》
김향순은 눈물을 쏟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으셨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바라시던대로 선생님은 이제 평양으로 가시게 되였습니다.》
그리고는 못다한 말이 있어 또다시 오열속에 더듬거리였다.
《선생님, 선생님을 불러주신분이 누구이신줄 아십니까? 그분은 바로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선생님의 소원을 헤아리시여 전대미문의 이 뜨거운 현실을 펼쳐주셨습니다.》
그의 령구차가 북을 향해 떠나가던 날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정윤기로인을 바래우는 김향순은 뜨거운 마음속으로 이렇게 불렀다.
《아버지!》
그는 여직까지 정윤기로인을 두고 아버지라고 불러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부르고있었다. 민족의 넋과 지조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신념으로 보여주고 사람이 어떻게 살 때 영생의 길을 걷는가 하는 진리를 똑똑히 새겨주고 떠나가는 그를 보통때처럼 그렇게 《로인님》이라고만 부르고싶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 화답을 하는듯 저 멀리 10월의 하늘가에서 기러기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르륵- 끼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