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냐, 짐승이냐

 

전쟁초시기 인민군대의 드세찬 공격으로 쓰디쓴 참패만을 거듭하던 미제는 그것을 만회해보려고 비렬하게도 《유엔》의 이름을 도용하여 15 추종국가군대들까지 조선전쟁에 끌어들이였고 1950 9월에는 5만명의 대병력과 1 000여대의 비행기, 300여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인천에 대한 상륙을 감행하였다.

미제침략자들이 인천에 상륙할 맥아더는 저들의 침략군에게 다음과 같은 특별명령을 내리였다.

《서울을 탈취하라. 거기에는 처녀들도 있고 부녀들도 있다. 3일간 도시는 너희들의것으로 될것이다. 너희들은 서울의 처녀들과 부녀들을 차지할것이다.

다른 미군살인마는 《조선사람은 미국사람과는 다르다. 따라서 인정이란 있을수 없다. 무자비하고 무자비하라.》라고 하였다.

상전의 명령을 받은 미제침략군은 야수적본성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놓으면서 살인, 강간, 략탈, 방화, 파괴 야수적만행들을 이르는 곳마다에서 감행하였다.

무엇보다먼저 인천과 서울이 미제야수들의 희생물이 되였다. 미제침략군의 야수적학살만행은 《공산분자》, 《통비분자》들을 없앤다는 이른바 《공비토벌》, 《통비분자숙청》, 《후방치안확보》라는 당치않은 구실밑에 감행되였다.

인천에 상륙한 미제침략자들은 첫날 하루동안에만도 주민 1 300여명을 학살하였으며 9 28일부터 11 13일까지의 기간에만도 5 6 000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공산분자》로 몰아 검거, 투옥, 학살하는 만행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

젊은 사람들은 모조리 골라내여 《공산주의자》, 《통비분자》로 락인하여 총살하였는데 수는 1만여명에 달하였다.

인천시 기업가인 김송식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 지구에서만도 미제침략군은 1 500명의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2 700여명을 학살하였다.

《빨간물이 마을은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라., 이것이 미군사령부가 내린 살인명령이였다.

서울에 기여든 미제침략군은 《빨갱이수색참모부》라는것을 설치하고 주민들에게 특별한 《거주증》을 교부하였다.

그리고는 곳곳에 검문소들을 만들어놓고 《거주증》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서는 《빨갱이》로 무작정 몰아 체포, 투옥하였다.

미제침략군의 이러한 만행으로 1950 9월말 서울교외 어느 동에서는 하루동안에 녀성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800여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미군기관총의 과녁이 되여 무참히 학살되였다.

이러한 미군의 학살만행에 대하여 당시 미국의 출판물까지도 《화물차 여러대에 실려와서 늙은이, 부녀자, 청년 그리고 아이들이 무덤으로 구뎅이앞에 세워져 보총과 기관총으로 헌병대에 의해 총살되였다.》고 시인하였다.

미제침략군은 서울전차차고 로동자 600여명을 《부역자》라는 혐의를 씌워 체포하고는 수십명을 야수적으로 학살하는 만행도 감행하였다.

야수들은 로동자들을 곤봉으로 마구 때리다가 그것으로도 성차지 않아 그들을 거꾸로 달아매고 끓는 물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빈사상태에 있는 그들의 배와 가슴, 머리와 눈을 창으로 찔러죽이는 몸서리치는 살륙만행을 감행하였다.

뿐만아니라 미제야수들은 인민위원회일군들과 가족들, 로동당원들, 민주단체 성원들, 인민군대 인민유격대의 가족들을 색출하여 끌어다가 마구 죽였다. 지어 친척이 의용군에 갔거나 조금이라도 인민군대에게 방조를 사람이라면 모조리 검거, 투옥하고 잔인하게 고문, 학살하였다.

사람잡이에 미친 미제침략자들은 학살한 애국자들의 머리가죽을 벗겨내여 《기념품》으로 나누어가지는 소름끼치는 야만적인 행위도 감행하였다. 그때 프랑스의 신문이 20세기의 최대의 만행은 미군이 조선에서 감행하였다.》고 평한것은 결코 우연한것이 아니였다.

미제의 야수적학살만행은 서울과 인천은 물론이고  남조선의 모든 도시와 지역에서 벌어졌다.

대표적실례가 충청북도 단양에서 감행된 미제의 야수적만행이다.

단양군 영춘면에는 곡계굴로 불리우는 넓은 동굴이 있는데 사건당시 동굴에는 마을의 수많은 주민들과 피난민들이 있었다. 미군이 저들의 후방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쩍하면 비행대를 동원하여 마을에 폭격을 가하군 하였기때문에 사람들이 동굴에 들어가 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던것이 당시의 실정이였다.

그러던 1951 1 20 먼저 미군정찰기 한대가 나타나 마을상공을 몇바퀴 돌던 끝에 동굴을 발견하자 무작정 폭격기편대를 불러들였다. 폭격이 시작되자 동굴입구에 불이 일게 되였다.

폭격에서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미군의 폭격만행으로 하여 동굴안에서 무려 400명이나 넘는 사람들이 불에 타죽거나 연기에 질식되여 죽었다.

생존자인 주민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나에게는 두살, 세살, 여섯살 동생이 있었다. 동굴안으로 연기가 들어오자 어머니는 그때 열두살 나에게 빨리 빠져나가라고 밀어댔다. 그런데 정작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뛸수가 없어서 질식해죽은것이다. 그때 나는 겨우 살아났지만 연기를 많이 마셔 이후 계속 기침을 달고 살았다. 후유증으로 얼마전에는 간암진단까지 받았다. 폭격의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였다.

다른 생존자인 주민은 《동굴속에 있던 아버지가 불길에 휩싸인 동굴밖으로 나를 던져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하면서 《동굴안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50 되였는데 그후에 대부분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동굴속에 시체가 얼마나 많았던지 그후 주민들이 시체를 처리하는데 무려 한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고도 시체를 처리 못하여 《몇년전까지만 해도 비가 많이 오면 곡계굴곁의 개울에 해골이 둥둥 떠내려갔다.》고 주민들은 증언하였다. 곡계굴의 무리죽음은 동네를 페촌으로 만들어버렸다.

미제침략자들은 1950 9 28 경기도 고양군(당시)에서도 1 000여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여 금정굴의 50m수직갱속에 떨구어죽였다.

 

※ 미제야수들의 각본에 따라 남조선군은 1950 12 18 《강화향토방위특공대》를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특공대는 《향토방위》라는 간판을 《주민학살부대》였다. 살인깡패들은 경찰서에서 100m정도 떨어진 양조장건물에 본부를 두고 애국적주민들에 대한 학살만행을 일삼았다.

그들은 인민군대를 따라 월북했거나 그를 도와준 사람들과 가족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여다가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특공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지 당시 강화도에서는 《개가 개벌에 나가면 사람다리 하나 물고 들어온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1950 12 6 함평군에 달려든 미제살인귀들은 《함평은 빨간물이 들었다. 모조리 죽이고 불사르라.》고 명령하고 초토화하였으며 함평군내 3 면에서 무려 500여명의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미제침략자들과 주구들은 1951년에 들어와 남조선에서 유격투쟁이 강화되자 그것을 《토벌》한다는 구실밑에 대규모적인 주민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미제상전의 명령밑에 남조선군은 1951 2 거창군 신원면에 기여들어 대현, 와룡, 성돈, 중유 6 부락에서 700여호의 집들을 몽땅 불태워버리고 109명을 성돈골짜기에 끌고가서 기관총사격으로 집단학살하였으며 나머지 1 000여명의 주민들을 학교로 끌고가 감금하고 그중 500여명을 박산골짜기로 몰아다가 2 중대병력으로 2시간동안이나 사격하여 집단학살한 다음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였다.

 

만행의 일단을 남조선의 《동아일보》(1960 5 15일부) 이렇게 전하였다.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부락민 500여명을피난가자고 인솔하여 박산개천가에 끌고가서 한곳에 세워놓고 기관총과 소총 등으로 무려 2시간동안이나 쏘아댔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죽은 시체에다 자꾸만 총을 쏘아댔고 젖먹이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멎은 후에야 발사를 중지하고는 시체에다 기름을 뿌려 불태워버렸던것이다. …

이들은 민간인들을 죽인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박산골짜기에 버려져있는 어린이들의 시체를 골라 머리를 따로 잘라 파묻어버렸는데 그후 부락민들이 해골을 파내여보니 뼈다귀만도 19가마니였다.

 

※ 남조선도서 《움직이는것은 무엇이든 쏴라》는 《부락별로 보면 대현리 285, 중유리 182, 와룡리 151, 과정리 4, 기타 21, 년령별로 보면 60살이상의 로인이 66, 80살이상의 로인이 6명이나 된다. 최고년령자인 92 나는 로인도 <공비>로서 학살당해야 했다. 생각해보라! 3살이하의 젖먹이어린이가 100여명가량 되여 전체의 14, 410살의 어린이가 191, 1114살의 소년이 68명이였다. 14살이하의 어린이가 전체의 절반인 359명이나 된다. 어린이들과 6092살의 로인들을 <빨갱이>, <공비협력자>, <악질분자> 대량학살한 군대는 어느 나라 군대인가? 어떤 군대이기에 그런것이 가능했는가.》고 준렬히 단죄하였다.

 

1951년부터 1952년에 걸치는 대규모적《토벌》은 미제침략군 8군사령관 밴플리트의 직접적지휘밑에 미제5공군과 기갑부대를 포함한 남조선군 수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감행한 대대적이며 류혈적인 탄압이였다.

 

  미제야수들은 인민유격대에 대한 《동기토벌작전》을 시작한 1951 12월의 열흘동안에 경상남도 함양, 산청, 하동지구에서만도 1 637개의 농가를 불태워버렸고 8 950명의 농민들을 엄동설한에 강제축출하였다. 그리고 70일이 지나는 동안에 30여만명의 농민들을 축출하였고 1 7 000여명의 인민들을 체포, 학살하였다. 또한 미제와 주구들은 전라남도 13 군에서 수개월동안에 13만명의 농민들을 강제추방하였다.

 

실로 지난 조선전쟁시기 미제의 야수적학살만행으로 하여 남조선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수 없다.

전쟁 3년간에 미제는 서울에서만도 13 6 000여명, 경기도에서 16 2 500여명, 충청남북도에서 16 7 000여명, 전라남북도에서 38 8 000여명, 경상남북도에서 18 9 500여명, 남조선강원도에서 19 7 000여명을 비롯하여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모든것은 미제야말로 가장 잔인무도한 야만중의 야만들이며 야수중의 야수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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